** 모든 저작권은 윌리칼럼 저자인 이위식에게 있으므로 저자의 서면 동의 없는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모든 윌리 칼럼은 미국 Korea Phila Times (주간필라) 신문에 매주 해당 날짜에 출간된 것임을 밝힘니다. **
고마운 사람들 (12-25-2015)
또 한해가 어김없이 간다. 보내고 싶은 마음은 그다지 없지만, 붙잡을 명분도 뚜렷함이 없으니 속절없이 떠나보냄 일게다. 모르지. 지난 새해를 맞이할 때 분명한 언질이나 희망이 없어서 그랬나. 이민의 삶이라는게 맨날 그렇고 그런 날이라서 대충 맞이해서 그랬나. 새날을 맞이하는 사랑이 시큰둥하니 보내는 사랑도 무덤덤한건 아닌가.
보내는 마음이 어쨌거나, 그래도 이렇게 무사히 한해를 마감할 수 있음은 고마운 시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녕 빈손이고 마음뿐이지만 여러분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도리일 것 같다. 감사합니다.
고마움은 언제나 미안함과 부끄러움으로 이어진다. 받기만 하고 되돌려 드리지 못함이 부담스런 나이 만큼이나 빚으로 쌓여간다. 빚진거로 따지자면 내 삶을 주관하시는 그분으로 부터, 나의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었던 기억조차 못하는 중생들과 삼라만상의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이루 말로 표현할 수야 없겠지.
그래도 나와 함께 이 한해를 동행하여 주신 그분께 무조건 감사드린다. 또한 내가 이 세상 다하는 날까지 늘 함께 하시리라 약속하시니 이 또한 감사하다. 그 다음번은 나를 아직까지 버리지 않고 한이불 덮고 한솥밥 먹는 내 아내에게 감사하다. 내년에도 별 마음에 내키지 않으셔도 변함없이 데리고 살아 주시리라 믿는다. 내년에는 보다 뜨거운 충성을 맹세하며 미리 머리 조아려 아부한다. 그 다음은 나를 위해 항상 기도하시는 내 어머니, 내 형제들, 내 자식들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미안하다. 내년에는 좀더 자주, 좀더 따뜻하게 직접 마음을 전하여야겠다.
그리고 내 친구들과 선후배들, 이웃분들, 고객분들, 칼럼 애독자님들, 지역에 어려운 사역을 하시는 목회자님들, 모두모두 감사하다. 그리고 역시 미안하다. 언제나 받은만큼 돌려드리지 못하니 변명조차 궁색하다. 특히 가게를 빨리 팔아드리지 못하는 400여 Seller분들께 진심으로 죄송하다. 내년에는 더욱더 열심히 일할 것을 약속드린다.
그리고 제 칼럼의 애독자분들에게도 감사하다. 언제나 같은 마음이지만 글에서 진정함과 절실함이 부족하여 늘 죄송할 뿐이다. 그런데도 만날 때마다 격려해 주시고 전화도 주시고 방문해 주시니 감흡할 따름이다. 그런데 제발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특히 연세 많으신 분들이 그렇게 호칭하시니 정말 부담스럽다. 물론 더 잘 하라고 격려하시는 줄 알지만, 나는 죽는 날까지 배우는 학생일 뿐, 보잘 것 없는 미생이다. 어느듯 매주 칼럼을 쓴다는 이 뻔뻔함도 햇수로 만 10년째고, 칼럼도 450편이 넘었다. 여러 이유로 지나간 칼럼들을 다시 보고 싶다는 분들도 계셔서 웹페이지 (www.willbusinessbroker.com) 에 260편을 올렸다. 핸드폰으로도 언제나 보실 수가 있는데, 내년에는 360편을 올리려고 한다. 결단코 글을 잘 써서 자랑할려고 올린 것이 아님을 해량하여 주시기 바란다. 내 자신이 이민의 삶이 어렵고 지칠 때, 가난한 소시민의 한사람으로써 그때 그때마다 읽은 책들을 통해 사색을 통해 우리 각자의 삶을 이야기한 것이니, 혹시나 누군가 힘들어 하실 때 도움이 될까 하여 보답 차원에서 올린 것이다.
이제 매주 칼럼을 쓴다는 것은 내 삶에 큰 의미가 되었다. 할 수 있다면 죽는 날까지 글을 쓰고 싶다. 나는 누구보다 내 자신을 위해 글을 쓴다. 내년에는 좀더 고독해지려고 한다. 교회 직분을 모두 내려 놓았다. <믿음이 약한 자>가 되기로 작심을 했다. 좀 더 많은 책들을 읽고, 많은 인문학 강의를 듣고, 많은 사색을 통해 조금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여러분의 사랑과 격려가 큰 힘이 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올 한해동안 내 치아를 모두 치료해준 북부 뉴저지의 정원장과 치과팀들에게 감사한다. 어금니 7개를 인플란트하고 앞니 3개를 신경치료 했는데 치료 기간 내내가 감동 자체였다. 나는 이민 와서 병원간 것도 처음이지만, 내 몸에 이렇게 큰(?) 돈을 쓴 것도 처음이다. 그 병원을 결정한 것은 첨단 장비와 치료비용도 한몫 했지만, 전문 의료진들의 신뢰였다. 치료 내내 고객 만족과 고객 감동, 세심한 배려 등, 젊은 원장에게 내 자신이 배운게 많았다. 경기가 어렵고 경쟁이 심할수록 사업의 성공요소는 <신뢰와 서비스 특화>라는 결론이다. 거의 10개월동안 20회에 걸쳐 장거리 치료를 동행해 준 아내에게 감사하다. 감사할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나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다.
유안진 시인의 <송년에 즈음하여> 마지막 대목을 인용하고 한해를 마감하고자 한다. “송년에 즈음하면 / 갑자기 철이 들어 버립니다 / 일년치의 나이를 한꺼번에 다 먹어져 / 말소리는 나직나직 발걸음은 조심조심 / 저절로 철이 들어 늙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올 한해동안 저와 저희 가족을 보살펴 주신 여러분 한분 한분 모두에게 감사드리며, 새해에도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하나님의 은총과 건강과 행복이 충만하시길 소망합니다. 고맙습니다.
공감과 자비 (12-18-2015)
올 한해도 거의다 저물어 간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힘든 한해였다. 힘들지 않는 해가 없는 것은 삶 자체가 고통이고 고난의 연속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집집마다 문제없는 집이 없듯이, 고통없는 집이 없다. 그러나 나보다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걸 잊고 산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 속의 감사함을 잊고 산다. 사람은 내가 우선이다. 나의 고통과 슬픔을 누군가가 이해주고 함께 슬퍼해 주길 원한다. 즉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곧 실망한다. 공감은 일시적이고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공감(empathy), 자비(compassion), 긍휼(mercy), 불쌍히 여김(pity), 동정(sympathy)은 어떻게 다른가? 나는 종교적으로 해석하고자 함이 아니다. 어느 목사는 말한다. “서로 사랑하라. 그래도 도저히 사랑할 수 없으면 불쌍하게라도 여겨라. 그것이 기독교 사상이다. 기독교는 <Love와 Compassion>이다.” 그렇다. 그런데 <compassion>은 <불쌍히 여김>이 아니라 <자비>로 해석되어야 한다. 불쌍히 여김(pity)은 신이 인간을 바라볼 때 느끼는 감정이다. 인간이 인간을 불쌍히 여김은 위장된 우월감이며, 교만이다. 자비가 필요하다.
자비는 긍휼에 가깝지만 더 깊고 섬세하다. 긍휼은 외적이지만 자비는 내적이다. 자비는 긍휼보다 더 깊고 오래 지속된다. <긍휼(mercy, 헬라어로 elelos)>은 가련한 자의 비참한 상태에 대해 유발하는 반응이다. 반면에 자비(compassion, 헬라어로 oiktirmos)- 고린도 후서 1장3절, 로마서 9장 15절>는 사랑스런 사람에 대한 마음에서 기원한 내적인 느낌을 가르킨다. 즉 가난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내적 사랑을 가장 깊이 있게 표현한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위트니스 리, 한국복음서원, 신약의 결론에서 인용).
우리가 흔히 자존감 (self – compassion)이라고 한다. 자기 스스로에 대한 자비라고 볼 수 있다. 이 자존감을 높이려면 첫째, 자기 자신을 친절하게 대하라. 둘째, 자신의 고통을 다른 사람들도 보편적으로 겪고 있는 것이라 깨닫는 것이다. 셋째, 고통스런 생각을 마음 명상을 통해 인식하면서 자신을 지탱해 나가는 것이다. 즉 자신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 고통이라 자각하고, 자기 자신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유지함으로써 실존적 주체성을 지탱해 나가는 것이 자존감 확립이라는 것이다.
서울대 종교학과 배철현 교수는 리더의 조건으로 <묵상과 컴패션> 두가지를 들었다. “자비(compassion)은 다른 사람의 슬픔을 내가 함께 슬퍼하는 것이다. 텔레비젼 드라마를 보며 흘리는 눈물은 악어의 눈물이다. 슈바이처 박사처럼 나와 상관없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끼는 것이다. 깊은 성찰을 통해 자기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지도자가 남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느끼는 자비심도 갖게 된다.”고 주장한다.
또 그는 “현대의 종교가 폭력의 진원이 된 이유가 20세기 초 등장한 근본주의 때문이다. 다윈의 진화론과 성서 비평학이 발달하면서 종교는 근본주의로 무장했다. 자기가 믿는 것만 옳다고 믿는건 오만이자 무식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신의 가르침이다.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삶에 대한 경외가 신앙’이다. 종교는 오히려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 자기 삶을 깊게 보려는 의지다”라고 했다.
또한 종교는 현대인에게 일종의 <상해보험>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외롭기 때문이다. 생계를 위해 직장 이동이 잦고 삶의 터전도 수시로 옮겨다녀야 한다. 고향도, 부모 형제도 친구도 먹고 살기 위해서 헤어져야 한다. 가장 가까운 사회적 관계가 멀어진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타인>이다. 그래서 새로운 교회나 절을 찾아간다. 내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눌 사람들을 종교 공동체 안에서 찾는다. 그중에서 교인들이 가장 많이 의지하고 기대하는 사람이 목회자다. 목사는 사랑과 자비와 공감능력이 엄청 높을 것이라 기대한다. 그런데 목회자가 눈물샘이 말라버렸다면, <울지 않는 새>라면, 슬픔의 공감에 진정성이 없다면, 상처받은 영혼은 어디 가서 위로받고 치유받겠는가. 종교가 보험이라 함은 내가 힘들고 아프고 슬플 때, 내가 죽을 때, 나와 내 가족들을 위로하고 함께 슬퍼하며 기도해 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교회 공동체가 눈물을 흘릴줄 모른다면 누가 나를 위로해 주고 기도해 주지?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부흥목사나 행정목사 보다는 <울보목사>가 좋다.
결국 <공감>이나 <자비>, <긍휼>, 이 모든 것은 <관계>에서 형성된다. 사람은 사회적 관계를 무시하고 나 홀로 살 수 없다. 나에게 상처주는 것도 내 이웃이지만, 내가 위로받고 치유받는 것도 내 이웃이다. 내 상처만 치유받기를 원하지말고, 내 이웃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공감하고, 자비함으로 나누는 것이 어떨까. 내 주위를 다시 한번 둘러보는 년말이 되어보자..
기대감의 소멸 (12-11-2015)
어느 가을날, 아내와 근교의 산에 산행을 하였다. 산길을 걷고 있는데 저만치서 중년의 노신사가 혼자서 올라오는 모습을 보았다. 평소에 존경하는 70대 선배님이었는데 교회 예배를 마치고 혼자서 한달에 두세번 산행을 하신다는거였다. 깊은 사색을 하는듯한 그 모습이 하도 인상적이어서 한동안 잊혀지지가 않았다.
늙어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살 날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일게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애틋함일 수도 있다. 또한 주위로 부터 사회로 부터 관심의 대상에서 점점 멀어진다는 것은 아닐까?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에서 별똥별이 떨어질 때처럼, 섬광같은 불빛은 어느듯 희미하게 사라져 가듯이.. 노인이 되어간다는 것은 멀어지고 잊혀져 가는 것이다. 노인은 경쟁사회에서 뒤쳐지면 안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점점 해방되어 간다. 세상과 잘 어울려야 한다는 의무감도 사라져 간다. 몸에 맞지도 않는 직책이나 명예를 어깨에 울러메고 낑낑거리며 광대 노릇을 하지 않아도 된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말한다. <낮아져라, 내려 놓으라, 겸손하라>고 말이다. 나는 되려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내려놓았고, 무엇이 낮아졌으며, 누구에게 겸손한가를 말이다. 산다는 것이 내가 내려 놓고 싶다고 내려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낮아지고 싶다고 낮아지는 것이 아니더라. 아직도 가야할 길이 구만리고, 먹여 살려야 할 자식들은 어리고, 이루고 싶은 꿈들이 많은 젊은이들에게 내려놓으라면 내려놓고, 낮아지라면 낮아질 수 있겠는가. 아직 가보지도 않았는데, 아직 해보지도 않았는데, 아직 가져 보지도 않았는데, 아직 높아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나이가 들고 늙어감에 따라 주변의 기대에서 멀어질 때, 세상사람들에게 잊혀질 때 비로서 본의 아니게 낮혀지고 내려 놓임을 당하는 것이더라. <기대감의 소멸>이다. 따라서 늙어간다는 것은 인생의 축복이다. 세상이 원하는 삶을 살지 않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어 되려 감사할 일이다.
심리학자 말버트 엘리스는 세상살이가 힘들어 하는 까닭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해야 한다의 삼총사>라고도 한다. <난 성공해야 하고, 주변 사람은 누구나 나를 잘 대해 주어야 하며, 세상 살기가 쉬어야 한다>고.. 글쎄, 나는 현대인들이 이런 극단적이고도 편협된 기준으로 살기 힘들어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조절, 억제, 제어, 만족이 안되므로 항상 스스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늙은이는 다르다. 성공하거나 가난하거나, 누구의 잘못이거나, 어떻게 살아 왔던지간에 이제는 내 운명을 받아드리고 내려놓아야 한다. 이것을 공자는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도 <때>가 있는 것 같다. 늙었다는 것은 <그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늙음은 축복이다. 세상의 <기대감>이 소멸되었고, 삶의 <절박함>이 소멸되었다. 세상은 노인에게 혁명을 하자고 하지 않는다. 노인에게 중요한 직책을 맡기지 않는다. 노인에게 부자가 되라고 하지 않는다. 사랑을 해도 죽이고 살리는 전투적 사랑이 아니라, 두루 사랑하는 평화적 사랑을 하면 된다. 일을 해도 돈만 벌기 위한 생업이 아니라, 내 일을 즐기면서 주변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가 있다. 배움도 경쟁이나 성공하기 위함이 아니라, 내 스스로 사색하고 실천하는 배움을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국의 마이클 폴리는 <행복할 권리 (The age of absurdity – 부조리의 시대)>에서 <3S와 친숙해져라>고 말한다. 즉 3S란 고독(Solitude), 정적(Stillness), 침묵(Silence)다. 이 3S는 현재와 연결되어 있다. 지금 시작하라는 것이다. 미래의 계획이 아니다. 3S는 그들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나만의 시간>을 위해서 필요하다. 욕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노인이 과한 욕심을 부리면 그 모습이 추하다. 이제는 땅에 떨어진 하나를 줍기 위해서는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내려 놓을줄 알아야 한다. 손에 잡히는대로 움켜쥘 나이가 아니다. 준다고 덥석 받아 먹어서야 되겠는가?
내가 침묵하고 고독해질려고 하면 세상과 어느정도의 <거리둠>이 필요하다. 거리가 떨어져 있어야 주변을 살필 수 있다. 상대방과의 어느정도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원수지간이 가장 거리가 짧다. 서로 등지고 있으니 만날려면 지구 한바퀴를 돌아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어깨에 기댈 수 있는 거리, 넘어지면 바로 잡아줄 수 있는 거리면 충분하다. 허구헌 날 세상 눈치보며 미친 무당 널 뛰듯이 살아서야 되겠는가. 세상사람 하는거 다 따라하고 흉내내다 보면 언제 고독하고 고요하며 침묵하겠는가. 이제는 하루하루 세상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세상사람에게 잊혀지는 사람이 되어가자. 그리고 내 하나님을, 내 자신을, 내 사랑하는 사람을 더욱 선명하고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하자. 그래서 감사하고 사랑하자. 늙어가는 내 청춘에 건배!!
생각하라 (Think) – 후편 (12-04-2015)
데카르트 역시 “그 모든 것을 거짓이라고 의심하는 나의 존재 자체는 절대 의심할 수가 없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새로운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영국의 로크와 독일의 칸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데카르트의 이성중심의 <합리주의>가 영국의 로커 <경험론>을 체계화하고, 이것이 산업혁명과 계몽사상의 뿌리가 된다. 또한 로크의 사상은 프랑스의 인권선언, 미국의 독립선언서, 권리장전, 헌법 탄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또한 독일의 칸트 <관념론>은 마르크스 주의의 뿌리가 되고, 미국의3대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데카르트의 실용주의와 개인주의가 인간을 교회와 국가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것이다. 즉 <Think>를 알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성경을 알아야 아우구스티누스를 알게되고, 실용주의를 알기 위해서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프랜시스 베이컨, 로크, 버클리, 흉, 칸트의 철학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컴퓨터와 IT분야의 세계 3대 인물의 <Think>에 대해서 잠깐 맛만 보자. 사람들은 IBM 창시자 토마스 J.왓슨의 ‘Think’는 ‘컴퓨터로 새로운 인류문명을 창조한다’이고, 마이크로 소프트 빌게이츠의 ‘Think Week’는 ‘IBM을 뛰어넘는 컴퓨터 문명을 창조하는 시간을 보낸다’이며, 스티브 잡스의 ‘Think Different’는 ‘IBM, 마이크로 소프트와 다른 컴퓨터 문명을 창조한다.’라고 이해한다. 즉 고전 인문학에서 힌트를 얻은 다음, 기발한 아이디어로 세계적인 부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국 기업들은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고전 인문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야단법석이다. 하지만 그들은 어릴적 부터 수많은 인문학 서적들을 통독하고 <How to Think>에 대해 교육받으며 성장한 것이다. 즉 그들의 생각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따라서 ‘Think’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서는 그들의 경영 사상을 이해할 수 없다.
간단히 소개하면 IBM의 <Think>는 1.독서하라 2.경청하라 3. 토론하라, 4. 관찰하라 5. 생각하라 로 이루어져 있다. 매일 저녁 1시간 이상을 고존 인문학 서적을 읽으라, 읽은 다음에는 대화 형식으로 <토론하라>는 것이다.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청해야 한다. 한국인은 나를 포함해서 토론이 서툴다. 토론한다고 시작한 것이 결국 싸움으로 끝난다. 우리편이 아니면 적으로 간주한다. 우리 세대는 토론 문화를 배운적도 없고 생활화 되어 있지도 않다. 유대인과 가장 대표적 차이점이다. <관찰하라>는 독서하고 경청하고 토론한 내용을 바탕으로 세상의 흐름을 파악하라는 것이다. <생각하라>는 어떻게 하면 개선하고 변화하고 창조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하이데거의 철학에 심취했다면, 빌 게이츠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빠졌다.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열한가지 인문학 공부법을 소개한다. 첫째, 자기암시를 하라. 나 자신을 개발해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둘째, 원전을 읽어라. 세째, 원전을 필사하라. 넷째, 홀로 사색하라. 홀로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생각하라는 것이다. 다섯째, 잠들기 전 사색하라. 여섯째, 인문학 공부노트를 써라. 새로운 인문학 지식, 이를 토대로 사색한 내용, 관찰하고 실험한 내용 즉 적용이다. 일곱째, 작가와 함께 하라. 여덟째, 도서관을 사랑하라. 아홉째, 인문학 서재를 만들어라. 열째, 인문고전을 극복하라. 먼저 저자의 생각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그 다음에는 저자의 생각을 뛰어넘어 내 생각 시스템을 만들라는 것이다. 열한째, 자주 휴식하라. 빌 게이츠 또한 세계적 독서광이자 사색광이었다. 평일엔 무조건 1시간, 주말엔 무조건 3,4시간 독서가 평생 원칙이자 습관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인문학 공부법도 유사한데 특이한 점은, 이미지로 생각하라.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라. 생각을 글로 표현하라. 생각을 실천하라. 토론하라. 겸손하라 등이다.
세계적인 고전 인문학자, 위인, 성공한자, 그 누가 어떻게 한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내가 생각하고 내가 실행해야 한다. 내 스스로가 평생을 생각하지 않는 교육환경에서 성장했고 살아왔다. 원인이 어떠하든 인문학적 소양이 절대 부족하고 생각하는 능력이 한참이나 뒤떨어진다. 그렇다고 여기서 이대로 멈출 수는 없다. 내 나이 이제 겨우 육십이 막 지났을 뿐이다. 늦었다면 지금부터라도 시작하면 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적용해야 한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행동해야 한다.”고 했다. 먹고 살기 위해 소비하는 시간을 최적화하자.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시간을 줄여야 한다. 기존의 가치에 얽매인 노예가 되지 말자. 이제는 남의 눈치나 보며 욕심에 사로잡힌 돼지는 되지 말아야 한다. 매일 매일을 독서하고 사색하고 글쓰는 삶을 살아보도록 하자. 고독하여 보자. 홀로 되어보자. 그리고 또 생각해 보자.
생각하라 (Think) – 전편 (11-27-2015)
심리학자들 연구에 의하면 인간은 하루에 약 6만번의 생각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에 95%는 어제 했던 생각의 반복이며, 나머지 5% 마저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없이 산다>는 농담 같은 진담이 있는가 보다. 당신의 삶이 문제투성이라면 그 원인은 99.9% 어제와 똑같은 생각을 매일 6만번씩 되풀이 하기 때문이다. 고장난 시계처럼 과거에 정지된 삶에 무슨 발전과 미래가 있겠는가. 그러면 매일 매일을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하나?
일부 학자들은 멀지 않은 미래에 한국은 엄청난 경제 위기를 맞을 것이라고 예고한다. 물론 한국은 한강의 기적으로 세계 최빈민국에서 불과 50년만에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 반쪽짜리 하드웨어 성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1위 제품 중에 향후 5년 이후에도 1위를 보장할 제품은 얼마나 될까? 세계 소프트웨어의 대부분은 미국, 일본의 것이다. 같은 스마트폰을 만들어도 애플은 영업이익이 점점 커지는 반면, 삼성은 점점 줄어든다. 세계 1위 싸움은 소프트웨어 싸움이다. 소프트웨어는 고전 인문학에서 나온다. <공부하는 인문학>이 아니라 <생각하는 인문학>에서 나온다.
서양인들은 동양인들을 <생각할줄 모르는 영혼>이라고 비아냥 거린다. 일본과 중국은 한국을 <생각할줄 모르는 영혼>이라고 하대한다. 하기야 중국과 일본은 오랜 세월 경제 대국이었고, <돈>이 종교인 국가다. 그들은 돈을 모르고 경제를 모르는 비 현실적인 조선의 인문학이 아니라, 돈의 흐름을 꿰뚫고 경제를 살리는 현실적이고 유익한 인문학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이미 세계 2위 경제 대국이다. 일본은 세계 3위 경제 대국이다. 일본은 세계를 상대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쟁국가다. 지금 일본 그들이 다시 전쟁할 권리를 확보했다. 일본은 한국을 40년 가까이 식민지로 착취했지만 경제만 착취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영혼까지 착취했다고 주장한다. 아베 신조 수상의 외조부이자 그의 멘토인 기시 노브스케는 1급 전범 이면서 일본 수상을 지냈다. 그는 1945년 전쟁 패망 후, 향후 100년 동안은 적어도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무슨 근거로 망언(?)을 했을까? 한국인의 <생각하는 영혼>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은 일제 강점기 동안 현대판 노예 교육제도에 길들여졌다는 것이다. 주입식, 암기식 교육체제, 기초과학과 고전 인문학을 등한시하고, 왜곡된 역사의식을 주입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성적, 성과 위주의 경쟁체제, 황금 제일의 계급 지배 구조, 수백년 반복되는 당파 싸움, 이분법적 사고 방식, 만연한 사회 부패 등이 경제 위기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은 아직까지 실질적 노벨상 수상자가 없나? 왜 유독 한국에만 서양 종교가 부흥할까? 물론 과장된 억지도 있겠지만 지금부터라도 한국인 스스로가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반면에 세계 인구의 0.2%인 유대인들이 세계 경제를 장악하고, 노벨상 30%이상을 석권하는 이유도, 구글, 델 컴퓨터, 인텔, 페이스북, 마이크로 소프트 등 세계 IT기업들 뿐만 아니라, 세계 식량, 자원, 금융을 우지좌지하는 유수의 유대인들 가문이나 창업자들 모두가 어릴 때 부터 수많은 고전 인문학 서적들을 읽고 토론하고 사유하는 생활 환경이 원인이라고 한다. 2천년전의 고전 인문학이 21세기 첨단 문명의 현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나 현재나 미래 역시 삶의 본질은 유사하며, 인간이 추구하는 근본 목적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 칼럼의 일부 내용은 이지성씨의 <생각하는 인문학>에서 인용함을 밝힌다. <Think>는 <생각하다>가 아니라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라’는 <Think>는 그리스어로 <도케오>인데 “to think, to believe, to appear, to count for something”이다. 또 라틴어로는 <코기토, cogito>인데 그 뜻이 “to think, to consider, to have one’s opinion, to have in mind, to expect, to imagine”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세계 역사상 인문학을 귀하게 여긴 시절의 국가들은 흥했고, 황금을 귀하게 여겼던 시대는 망했다.
새로운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나를 찾는 것이다>. 인간은 불확실한 존재이므로 완전한 진리는 없다는 전제하에 모든 것을 <의심하라>. 서양 신학의 스승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이 세계, 이 우주 그리고 당신 자체도 거짓일 수 있다. 그러니 의심하라, 오직 의심하라, 당신의 삶에서 가져야 할 유일한 태도, 그것은 의심이다” 라고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친 후에야 “만일 내가 악마에게 속고 있더라도, 속고 있는 나는 존재한다”로 이끌어낸다. 내가 존재하므로 가족도 존재하고, 이웃, 인류, 세계, 우주, 하나님도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결론이 1000년에 달하는 중세문명으로 시작되는 순간이다.
일과 행복 (11-20-2015)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급이나 무급, 어떤 형태로든, 일들을 한다. 정년 퇴직을 하고나서도 비정규직이나 임시직 일을 하기도 하며, 호스피스 병동이나 종교 단체에서 주관하는 봉사활동의 일을 하기도 한다. 현대 자본주의의 양극화 현상은 고용시장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비정규직을 대량 양산한다. 그러면 정규직은 행복한가? 이민자의 일은 자영업, 비정규직 주급 생활, 정규직 월급쟁이 일들로 구분할 수 있다. 그래도 여러분은 나같은 수당직 (commission)제 보다는 낫다. 부동산 에이전트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에이전트의 90%가 수입원이 제로에 가깝다. 지속적인 수입도 아니고 안정된 수입도 아니다. 또한 오늘의 수입과 고객이 내일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수당직 직업수명은 단명하다. 그러면 여러분은 행복한가? 어떤 일을 하든, 대부분은 행복하지 않다.
흔히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한다. 가끔은 법에 어긋나는지 알면서도 일을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 못해 먹고 살기 위해 일한다고 한다. 한국처럼 부정 부패지수가 높고 불법이 판치는 세상에서는 더더욱 일의 만족도가 떨어진다. 그래서 분노의 사회가 된다. 자신의 일에 대해 목적이나 가치를 부여할 수가 없다. 심리학자 에이미 브제스니에프는 일을 세가지로 구분한다. 소명(calling), 생업(job), 직업(career) 으로 구분하는데, 그 중에 자기 일을 <재량권>을 가지고 <소명>으로 일하는 사람이 제일 크게 만족해 하고 행복해 한다고 한다. 오지의 선교사나 무명의 사회 봉사자가 소명받은 자의 대표격이다.
<일>은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동산에서 내쫓으실 때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도록 내린 형벌이라고 하자. 하지만 평생 일을 하면서도 왜 일을 하는지 모른다면, 과연 삶에 어떤 가치가 있으며,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일에 규칙만 있고 영혼이 없다면 내 인생은 행복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까뮈는 “일이 없다면 모든 인생은 부패한다. 그렇지만 일에 영혼이 없다면 인생은 질식사한다”고 했다. 또 ‘긍정의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은 “자기가 하는 일에 빠져드는 <몰입>과 자신이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의 삶과 연결하는 <의미 찾기>를 행복의 대표적 강점이다” 라고 했다. 또 다른 심리학자 피터 워는 “자기 일에 만족하려면 몰두와 열정만으로는 부족하다. 자기가 하는 일이 다채롭고, 일 처리 과정에 <재량권>이 있어야 하며, 일에 대한 <목적>에 믿음이 있어야 한다”라고 했다.
배리 슈워츠와 케니스 샤프의 공동저서 <어떻게 일에서 만족을 얻는가?>에서 일에 대한 목표와 목적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에서 찾는다. <실천적 지혜>는 7월 칼럼에서도 주제로 다룬 적이 있다. 일의 목적을 <텔로스 (telos)>라고 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정한 행복은 <실천적 지혜>를 가지고 텔로스(목적)을 찾아내고 추구하는 것이다. 소명과 생업의 차이는 무엇인가? 내가 하고 있는 생업에 삶의 가치와 목적을 내 스스로 부여하면 소명이 되는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성과주의, 능력주의, 경쟁주의를 내세우며, <규정과 보상시스템>으로 현대인들을 구속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발적 노예>를 강요하는 것이다. 모든 업무의 성과와 평가는 <돈>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사람들은 일의 목적보다는 보상에 매달리는 것이다. 의사의 진료 목적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목적이지, <돈>이 목적이 아니지 않는가. 흔히들 <당근과 채찍>이라고 한다. 심지어 교회 목회자가 성도를 <돈>이나 <규정과 보상>으로 평가한다면 <세속화된 교회>가 될 것이다. 이 책에서도 규정과 보상 시스템이 정교하고 강력할수록 스스로가 판단하고 결정할 일은 줄어든다고 했다. 규정이 강할수록 불이익이나 처벌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기살기로 경쟁한다. 목표에는 평가 목표 (performance goal)와 숙달 목표(mastery goal)로 나눌 수 있다. 평가목표는 목표 대비 성과와 실적을 평가한다. 그 결과에 따른 보상이 우리들의 일을 <지겨운 밥벌이>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평가와 보상에 익숙한 세대다. 일에 내 영혼이 없다.
일과 인생은 따로 떼어낼 수 없다. 우리가 일을 한다는 것은 설령 그것이 먹고 살기 위한 생업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성>에 바탕을 둔 실천적 지혜가 필요하다. 실천적 지혜는 이성적 지혜와 도덕적 지혜를 연결한다. 지혜로운 판단은 일의 만족으로 이어지고, 일의 만족은 행복으로 이어진다. 행복은 또다른 지혜로운 판단을 하게 되므로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생업에 실천적 지혜를 부여하여 삶이 행복할 수 있을까? 어느 인문학 책에선가 “위대해지기 위해서는 위대한 사람을 흉내내라”고 쓴 글을 기억한다. 예를 들어 내가 진실한 크리스찬이 되고 싶다면 예수를 흉내 내면 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생업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다고 생각하고 일을 해 보라. 위대한 창조는 조그만 모방에서 시작되듯이, 그분을 흉내내다 보면, 언젠가는 나의 모습이, 내 삶의 가치가 행복하게 창조되지 않을까..
황혼 이혼 (11-13-2015)
<황혼이혼>이 요즘 우리 세대의 화제다. 비단 한국의 문제만도 아니요, 미국, 영국, 프랑스, ‘나리타 공항의 이별’로 유명한 일본 등 선진국의 베이비붐 세대 모두가 겪는 고통이다. <황혼이혼>이란 결혼 기간이 20년 이상의 부부에게 해당하니 통상 50대 이상의 년령층이 여기에 해당한다. 한국도 2014년 기준 이혼 부부 10명중 3명(27.8%)이 황혼이혼이라고 하니 물건너 불구경 할 입장이 아니다. 황혼이혼의 현상과 문제점을 파악하고 대책 수립에 만전(?)을 기하여야 한다.
황혼이혼의 급증 원인은 무엇보다 <생명 연장>이다. 80세는 평균 수명이고, 바야흐로 100세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종전의 결혼 계약기간은 30년 정도였다. 결혼 서약을 한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의 한계 나이는 평균수명이 60대라는 것이다. 머리칼이 하얗게 변하는 60대면 대부분 죽었다. 70세까지 설령 장수한다고 하더라도 얼마남지 않은 세월이니 대충 참고 살았다. 결혼해서 30년까지는 먹고 살기 위해, 자식들 키우고 결혼시키기 위해, 서로 성격이 맞지 않아도 참고 살았다. 그런데 80세, 90세 이상 산다면 앞으로도 함께 살아야 할 세월이 삼,사십년이 더 남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미 자식들도 모두 장성했겠다, 재산도 어느정도 모았겠다, 그런데 저 재미없는 인간하고 3, 40년을 더 살아야 한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결론이 나면 대책이 없다. 따라서 결혼 30년을 살고 이혼을 하는 것은 <결혼 실패>가 아니고, <결혼 종료>라는 것이다. 결혼해서 할만큼 했다는 것이고, 이제는 나머지 내 인생 30년을 즐겨야겠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원망하거나 미워할 필요도 없다. 재산 절반씩 나누고 깨끗하게 헤어지자는 것이다. 황혼 이혼 사유의 절반(48%)이 <성격차이>라고 한다. 성격차이가 무슨 의미인가? 꼴같지 않다는 것이다. 더 이상 관심없다는 것이다.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황혼 이혼>의 화두는 “왜 함께 살아야 되지?”이다. 남편은 60세에 퇴직하면 돈 못버는 백수지, 집에서 노니 24시간 붙어 있는 찰거머리지, 삼시세끼 밥달라는 삼식이지, 돈 못번다고 무시하느냐는 삐돌이지, 아내의 일정을 시시콜콜 육하원칙에 따라 물어보는 형사지, 일일이 간섭하는 잔소리꾼이지, 함께 할 줄 아는거 없는 맹탕이지, 몸은 건강해서 죽을 생각도 안하는 고래 심술이지, 그러니 누가 좋아하겠는가? <함께> 살아야 할 공통분모가 없는 것이다. 요즘은 남편들의 이혼 청구 소송도 함께 늘어난다고 한다. 가족들이 남편을 아버지를 무시한다고 여겨서 홧김에 이혼하는 것이다.
즉 황혼이혼의 원인이 결혼 생활이 끔찍했다거나, 폭행 폭언 등으로 무서워서 이혼하는 것이 아니다. 싫지도 않았지만, 좋지도 않다는 것이다. 미워하지도 않지만 더이상 사랑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어제 오늘 갑자기 생긴 감정이 아니라 오랜동안 마음 저편에 묵혀 두었던 <가치와 신뢰>의 상실인 것이다. 이렇게 살 바에야 나머지 30년을 내 자신을 위해 혼자서 가치있게 살겠다는 것이다.
황혼이혼의 휴유증은 남자 쪽이 훨씬 크다. <홀로서기>가 거의 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족들을 위해 돈을 번다는 미명 아래 <가족 관계>가 대부분 엉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혼하면 자식들 대부분은 어머니 편이다. 또한 대부분의 남자들이 가사 업무, 집안 일에 서투르다. 언젠가 어느 목사님이 설거지 몇번 한걸 자랑이라고 설교하는 것을 보고는 ‘철이 없어도 한참 없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황혼이혼을 당한 남자들은 서둘러 재혼을 하는데 이게 더 문제라는 것이다. 재혼을 할 때에는 반드시 <혼전 계약서>를 작성하라고 변호사들은 충고한다. 재산 분할, 상속, 가사분담, 종교생활, 성생활 등등. 특히 미국은 주마다 약간 다르지만, 결혼을 하고 단 하루만 살아도 재산의 절반 혹은 그이상을 새 여자에게 주어야 한다. 아무쪼록 기분 내키는 대로 하지 말고 전문가와 충분히 상담을 한 후에 재혼을 하든, 바람을 피우든 해야 한다. 세상에 만만한 여자 없다.
황혼이혼을 당하지 않으려면 네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는 경제력이다. 65세 은퇴? 이런 철없는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 설령 먹고 살 재산이 충분하더라도 혼자서 작은 가게라도 해야 한다. 그래야 아내에게 돈과 자유 시간을 충분히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돈먹는 하마다. 늙은 마누라는 사랑이 아닌, 의리로 산다. 둘째는 건강해야 한다.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챙겨야 한다. 골골 대는 날부터 황혼이혼의 심사 대상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세째는 관계회복이다. 마누라와의 관계 뿐만 아니라, 자식들과의 관계, 마누라 친구들과의 관계 까지, 모두모두 신경써야 한다. 네째, 마누라가 좋아하는 놀이를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함께 놀아주어야 한다. 고객의 <needs>를 신속히 파악해서 눈치껏 살아야 한다. 이 네가지가 안되거나 하기 싫으면 이혼당하고, 재산 뺏기고, 버림당하여 혼자 살 각오를 해야 한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 아이구 내 팔자야 !!
나는 달린다 (11-06-2015)
나는 지난주 부터 달리기를 다시 시작했다. 참으로 오랜만이다. 아직까지는 내가 달린다고 해 봐야 집 부근 공원을 두세바퀴 달리는 극히 초보자 수준이다. 공원 한바퀴 달리는데 11분, 두바퀴면 23분 정도의 거리다. 세바퀴 째는 걷고 달리고 걷는 수준이어서 총 40분 가량 소요된다.
며칠 전에는 둥근 보름달이 떳다. 마치 달의 품 속으로 달리는 것 같다. 공원 호수에 풍덩 빠진듯 한 보름달을 보며, 참으로 감사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구나,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구나… 이제는 육십이 넘은 나이이어서인지, 오랜만에 다시 달리니까 그런지, 모든게 예전과 다르다. 조금만 달려도 숨이 가쁘고, 숨소리는 거칠다. 지난번 테니스 운동으로 다친 무릎 관절과 발목은 달리는 내내 신경 쓰인다. 몸의 근육은 점점 노화되어 신체 각 부위가 삐걱거리며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렇게 달릴 수 있지 않은가. 우리집 1마일 이내에는 내가 좋아하는 테니스장, 수영장, 골프장, 야구장, 야외 공원, 산책길 등이 모두 있다. 운동하기 최적의 환경이다. 하고 안하고, 즐기고 못즐기고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있다.
나는 다른 운동에 비해 달리기를 잘 하는 편도 아니고, 좋아하는 편도 아니다. 나의 달리기 역사(?)는 40대 초반 부터 시작된다. 대기업에서 나와서 개인회사를 시작하고서 부터이다. 소기업 사장은 혼자서 모든 결정을 해야 하므로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스트레스도 장난 아니다. 그 당시는 헬스클럽이 별로 없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별도의 운동이나 체력관리를 한다는 것이 마뜩치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달리기(조깅) 이었다. 달리기는 혼자서 할 수 있다. 달리기는 날씨와 관계없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달릴 수 있다. 달리기는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새벽이나 한밤중이나 내가 마음만 먹으면 된다. 달리기는 운동화와 운동복만 있으면 된다. 달리기는 별도의 기술이나 훈련이 필요없다.
빌리 쾰러는 <달리기의 심리학>에서 “인간의 육체는 달리기를 하도록 생물학적으로 진화되어 왔다. 인간의 육체는 100킬로미터 이상의 장거리를 지속적으로 달릴 수 있으며, 달리기에 알맞도록 힘을 비축할 수 있다. 인간은 달리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라고 한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앉아서 일하는 환경과 고칼로리의 식생활 습관으로 축척된 에너지를 사용하지 못한다. 에너지 탱크인 지방세포에 항상 넘치는 지방을 비축하므로 육체는 기형적으로 뚱뚱해지고 각종 질병을 얻는 것이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라는 마르크스의 명제는 인간 존재의 정신과 육체의 상관관계를 정확히 밝힌 말이다. 비만의 해결 방법은 <적게 먹고, 많이 움직여라>로 극히 단순하고도 명료하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정반대로 살고 있다.
내 경험으로는 뱃살 빼는 것과 콜레스트롤 낮추는데는 달리기가 최고다. 인터넷으로 <달리기 미학 –효능>을 찾아보니까 <스트레스 해소, 성인병 예방, 심장 기능 향상, 치질과 정맥류 방지, 뇌 노하 방지, 고혈압 치료, 혈액순환 개선, 변비 치유, 당뇨병 치료, 우울증 치료까지 !!> 이정도면 만병통치약 수준 아닌가.
오랜만에 요쉬카 피셔의 <나는 달린다>라는 책을 다시 읽었다. IMF 직후인 2000년도에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당시 독일 부총리 겸, 외무부 장관 이기도 한 그는 달리기를 통해 일년만에 몸무게 112킬로그램에서 37킬로를 뺀 85킬로그램 몸무게를 만든다. 100미터도 못 뛰던 그가 뉴욕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완주한다. 그는 헝거리 이민자의 가난한 정육점집 아들로 태어나서 고등학교 중퇴, 자동차 공장 노동자, 택시 운전사, 노동 운동가 등을 거치면서 녹색당에서 활동, 35세에 독일 연방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때만 해도 181Cm, 75Kg 이었는데,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 그에 상응하는 맛있는 저녁식사, 포도주 등의 과식으로 112Kg의 몸무게가 되면서 아내에게 이혼을 당하고 13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 충격으로 체중 감소를 목표로 달리기를 시작한 것이다.
이 책의 달리기 요점을 정리한다. 첫째, 내가 나를 강제할 수 있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 둘째, 그런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정해야 한다. 양초는 양쪽 끝에서 불을 붙이면 가장 빨리 타듯이, 적게 먹고 발생한 칼로리를 완전 소진해야 한다. 셋째, 내가 지킬 수 있는 원칙과 기본 수칙을 만들어야 한다. 네가지 원칙으로는 <과감한 결단, 끈기있게 지속할 능력, 철저히 현실에서 출발할 것, 인내> 이다. 그리고 세가지 기본 수칙으로는 <너 자신을 결코 기만하지 말라, 항상 너에게 과도한 부담을 주는 일을 피하라, 결코 포기하지말라> 이다. 그는 16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달리고 난 후에는 이 원칙을 폐기하였는데, 그는 이렇게 충고한다. “한번에 뛰는 거리를 결코 줄이지 말라 !”
계획을 잘 세우고 성취하는 즐거움이 꼭 필요하다. 과연 나는 달릴 수 있을까? 잘 되어야 할텐데..
잃어버린 나 (10-30-2015)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왜 나는 여기에 있는걸까? 언제나 내가 있는 곳에 내가 있었지만, 어쩌면 나는 그곳에 없었는지 모른다. 삶이 바람처럼 가볍다.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에 이곳 저곳으로 바람 부는대로, 떠밀려 오다시피 여기까지 왔다. 의미나 가치를 논할 만큼의 양푼 냄비라도 되는 삶이었던가? 사람들 속에서 소음과 혼돈으로 바쁘게 사니 그렇게 살면 되는 줄 알았다. 삶이 힘들고 가난해도 사람들 속에 있으면 안전한 줄 알았다. 사람과 사람이 무리지어 산들, 쉽게 섞여질 수 없는 외로운 존재란걸 한참이나 잊고 살았다. 어린 시절이 기억난다. 추운 겨울날 친구들과 밤세워 술을 마시다가 깨어나 보니 길 바닥에서 웅크린채 혼자 자고 있었다. 기억은 상처가 된다. 죽음은 늘 가까이 있다. 오늘처럼 가난은 굴욕스럽다. 나는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와 나는 고독해져야 한다.
우리 지역 한인 사회에도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가난이나 경제적 고통만이 아니다.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왜 사는지? 원초적 고민으로 힘들어 하신다. 이민 오신지는 2,30년이 넘고 나이도 50대부터70대들이다. 흔히들 말하는 생활 기반도 잡혔고, 사업체도 안정적이고, 자녀들도 모두 성장하여 세상사람들이 부러워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왜?? 이혼을 고민하거나, 장기간 별거 생활을 하는 분들도 있고, 큰집에 같이 살아도 각자 방에서 각자 생활을 한다. 잠잘 때에는 방문을 잠그는 것은 물론이고 이중 잠금장치도 한다. 식사도 각자 해서 먹는다. 정도가 약한 분들도 있지만 부부간의 사랑이나 신뢰는 물건너 간지 오래 되었다. 재산을 처분하여 반반씩 나누고 이혼하면 간단할 것 같은데, 이혼하지 못하는 사연도 가지가지다.
이해할 것도 같다. 아침에 눈비비고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와 밥해 먹으면 자야 하는 지루하고도 반복된 습관적 세월이었다. 딴 생각을 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다. 먹고 살아야지, 자녀들 교육시켜야지, 집 사야지, 빚 갚아야지, 그렇게 살다보니 3,40년이 훌쩍 지난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거울에 비친 나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된다. 내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늙고 망가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이렇게 사는 것은 사는게 아니다. 부부 서로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서로에게 요구만 한다. 대화가 되지 않는다. 자기 주장만 고집하니 타협이 되지 않는다.
이럴 때는 가던 길을 멈추어야 한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왜 잃어버렸는지, 어떻게 하면 잃어버린 나를 찾을 수 있는지를 내 스스로 질문하고 고민해야 한다.
푸르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과거에 대한 <회상>을 통해 잃어버린 공간, 잃어버린 시간, 궁극적으로는 잃어버린 나 자신을 찾으라고 말한다. 진실한 시간, 진실한 나 자신은 무엇인가? 프루스트는 1922년 죽을 때까지 13년동안 두문불출하고, 7부작 11권, 3천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이 책을 저술한다.
그는 <정체성> 즉 인간의 자기 동일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은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였는지를 알게 될때 비로서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시간론>을 말한다. “시간을 <상기의 힘>이라고 말하는데 ‘인간의 기억에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하나로 연결함을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흔히들 과거, 현재, 미래를 세단계로 분리시킨다. 그래서 시간도 삶도 단지 흘러가버리고 마는 것, 값어치 없는 것, 후회해도 소용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시간의 파괴성>을 경고한다. 그러나 과거, 현재, 미래를 병행해서 겹쳐 놓으면,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가 된다. 즉 시간은 연속성이며 통일성이다. 따라서 <잃어버린 시간>은 존재하지 않으며, 흘러가 버린 모든 것, 사라져 버린 모든 것, 잃어버린 모든 것, 심지어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모든 것까지 모아서 하나의 통일체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 주는 <되찾는 시간 (카이로스, kairos)>이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의 기억을 신의 은총이라고 한다.
우리 한인들이 특히 여자분들이 여태껏 고생고생 하면서 열심히 사시다가 한국 여행 등을 다녀오시면, 모든게 와르르 무너지며 ‘왜 이렇게 살았나?’하고 우울증에 걸리거나 이혼 등 극단적인 생각을 하신다. 현재의 생활 패턴을 바꾸어야 한다. 살아온 과거를 회상해 보고 향후 무엇을 어떻게 해야 삶이 가치있고 의미있을 것인가를 결정하고 미래를 연결해야 한다. 그리고 남편은 과거의 아내를 기억해야 한다. 아내는 변했다. 무슨 계기가 있었던지 간에 과거의 아내가 아님을 이해해야 하고 감싸 안아야 한다. 사랑해야 하고 미안해야 한다. 그래야 미래를 함께 갈 수 있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내 생애 마지막 식사 (10-23-2015)
바람이 분다. 가을의 냄새가 흩날린다. 숲 속의 단풍잎들은 꽃비되어 내린다. 이 산에 오면서도 양쪽 길가 에 늘어선 가로수들에서 낙화하는 단풍들을 본다. <모래시계>의 배경 음악인 러시아의 <백학>이 마음 저편에 흐른다. 자연의 장엄함이다. 죽음에 망설임이 없다. 미련이 없다. 초연하다. 이생에 와서 할만큼 했고, 사랑할 만큼 사랑했고, 행복할 만큼 행복했다는듯이.. 보란듯이 생을 마감하는 그들이다. 이 산 속 계곡물에 떠있는 단풍잎들 모습을 보라. 죽은 후의 모습조차 주변과 어울려 화보가 되니 이 또한 참으로 이쁘다. 저렇게 살다 죽고 싶다.
만약 지금 이순간이 내 생애의 마지막 순간이라면, 그래서 마지막 식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무슨 음식을 주문할까? 나는 죽처럼 약간 눌은 밥에다 소고기 가지찜을 주문할 것 같다. 얇게 쓴 쇠고기를 갖은 양념해서 볶은 다음, 된장과 약간의 간멸치와 마늘 풋고추와 함께 볶은 후, 약간의 물을 부어 가지와 함께 쪄내는 것이다. 입맛이 없는 여름철에 찬밥을 물에 말아서 열무 김치와 먹던 어린 기억들이 그립다. 그 음식에는 어머니와 아내가 모두 있다.
얼마 전에 읽었던 독일의 되르테 쉬퍼가 쓴 <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가 기억난다. 부제가 <살아가는 동안 놓쳐서는 안되는 것들>이다. 작가는 호스피스 병동의 주방을 책임지고 있는 루프레히트 슈미트라는 일류 요리사를 통해 호스피스 환자들의 마지막 모습을 그려내었다. 슈미트는 일류 레스토랑의 요리사였지만 삶의 허기를 느낀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손님들이 의미없이 먹는 것 보다는, 손님이 먹고 싶어하는 음식을 정성을 다해 만들고, 음식을 통해 그들과 교감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는 과감하게 호스피스 병동의 요리사를 선택한 것이다.
호스피스 병동은 인간이 마지막으로 거쳐야 할 곳이다. 병원에서 최종적으로 치료하기를 포기한 환자들이 세상과 하직하기 전에 잠시 들리는 곳이다. 이곳에서 2주일 내지 3주일 지내면 98% 이상이 죽는다. 아니면 본인의 희망에 따라 집으로 돌아가 죽음을 맞이한다. 우리 모두는 죽으며, 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다만 그날이 내일일지, 1년 뒤일지, 그 이상일지 모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이곳 환자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사형수들에게도 마지막 식사를 주문할 권리가 주어지는데, 대부분이 값비싼, 혹은 고급스러운 음식을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 추억에 남아있는 특별하지만 아주 평범한 음식들이라고 한다. 애플 파이, 햄버거와 같은.. 대부분의 환자들은 오랜 항암치료로 인해 미각 세포를 잃어버려 음식을 먹을 수 조차 없다. 하지만 그 음식을 통해 잃어버린 추억을, 잊혀진 사랑과 용서를 되찾을 수는 있다.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는 것이다. 그 호스피스 병동 입구에는 이런 문구가 걸려 있다. “우리는 인생의 날을 늘려줄 수는 없지만, 남은 날들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애써 죽음을 외면하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고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죽음은 삶과 불과 한발짝 떨어져 있을 뿐이다. 삶이란 그 중에서도 먹는다는 것이다. 먹는다는 것은 실존이다. 먹지 않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가슴 먹먹한 음식이 있다. 풍기는 음식 냄새, 달콤한 혀 끝의 감촉, 입안에서 부서지는 음식 재료들의 조화, 목구멍을 넘어가는 부드러움과 감칠 맛, 그 음식과 연관된 사람들과 주변의 모습들, 그런 소중한 과거들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킴벌리 커버거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대해 더 자주 귀를 귀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그토록 지겨워하던 <평범함>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그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것이 없다는걸 깨닫게 된다. 그래서 늙어간다는 의미는 <평범함>의 소중함을 오늘이라는 순간순간 마다 하나씩 되찾아가는 과정이리라.
옥빛 가을 하늘은 높은줄 모르고 높고, 나의 가을 식욕은 먹어도 먹어도 멈출 줄을 모른다. 나는 음식에 관대하며 내 입맛은 성인처럼 너그럽다. 손수 만든 음식은 다 맛있다. 사실 이 칼럼을 쓰는 이유도 요즘 아내의 구박이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나는 좀처럼 살이 잘 찌지 않는 체질이다. 20대부터 60대인 지금까지 70에서 72Kg을 유지해 왔다. 그런데 얼마전 내 평생 처음으로 76Kg을 넘어선 것이다. 원인은 혼자서 늦은 밤까지 먹는데다가, 운동클럽 중에 베트민턴 반과 테니스 반이 유야무야 없어졌기 때문이다. 또 낮동안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대부분인 것이 결정적이다. 아내의 결정은 처참하리만큼 가혹하다. 야간 조깅이 시작되었다. 하루 한끼, 점심 도시락이 나의 하루 식사의 전부다. 간혹 저녁에 과일이나 쪼그만 고구마 한개를 주기도 하지만.. 먹다 죽은 귀신은 떼깔도 좋다는데.. . 부인, 가여운 저에게 은총을 베푸소서, 소박한 저녁 밥상을 허락하소서..
가을 속 당신 (10-16-2015)
<아, 가을인가>. 어제 밤엔 둥근달 너머로 어머니가 내 창가에 머물다 가셨나 보다. 오늘은 하루종일 이 가곡을 흥얼거린다. 어머니는 내 어릴적 언제부터인가 가을이 되면 이 가곡을 즐겨이 부르셨다. 이 노래가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되고, 내 입가에 낙엽되어 머물면 가을임을 나는 안다. 그리움이 미안함으로 색칠되면 나는 혼자가 된다. 어머니, 보고 싶습니다. 미안합니다. 어머니.
오늘 가을 숲 속을 아내와 걸었다. 아직은 가을이 농염하게 익지 않았다. 가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올거라고 기다린 여름날이 엊그제 같은데,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버선발로 뛰쳐나가 가을을 맞이하지 못했다. 바람이 차가워진 어느날, 두손을 감싸고 마시는 당신의 커피향에서 나는 가을을 보았다. 저녁 산책 길에서 팔장 낀 당신의 차가워진 손등에서 나는 가을을 보았다. 파란 하늘처럼 부서지듯 당신의 치마 자락에 내려앉는 가을 햇살을 바라보며 나는 가을을 보았다. 붉게 물든 가을 숲 속으로 걸어가는 당신의 머리결을 보며 나는 가을을 보았다. 당신은 이미 가을의 한가운데 서 있는데….
35년동안 당신과 함께 맞이한 가을이지만 매번 다른 모습의 가을이 아니었을까? 올해도 또 하나의 새로운 가을을 당신과 함께 보낼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한다. 이번 가을은 나에게 어떤 모습일까? 나는 미안함이다.
한때는 가을을 수확의 계절, 풍요의 계절, 결실의 계절, 감사의 계절로도 생각했다. 정말 열심히 산 세월들이었고, 그래서 얻은 결과들이 당연하면서도 감사했다. 그래서 새로운 해에는 더욱더 많은 열정과 사랑으로 더 큰 열매를 수확할 수 있을거라고 확신했고, 자신도 있었다. 그래서 당신 앞에 선 나의 모습은 언제나 당당 했고, 당신에게 강한 남자로 기억되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누구 못지 않게 성공할 것이라 믿었고, 그래서 당신을 누구 못지 않게 귀한 사람으로 호강시켜 줄 수 있을거라 믿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이제는 빛바랜 허구이며, 공허한 위세였음을 알게 됨이다. 아니 이제는 그러한 허풍과 큰소리 마저도 떠들 용기조차 없음을 스스로 인정함이,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이제는 과거의 맹세가 지키지 못한 가을 낙엽이었기에, 나는 그래서 미안하다.
나는 이제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힘들게 살아가는 중년의 노인이다. 오늘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막연함과, 오늘을 오늘로 살아야만 하는두려움이, 그래서 당신에게 덜 미안하고픈 철부지 같은 미성숙함이다. 앞으로 살아야 할 세월에, 그것도 결코 짧지만 않을 세월에, 먹고 산다는 기본 조차 보장됨도, 준비됨도 없이, 그래서 당신에게 더욱 미안함이다.
얼마전 한국의 40년지기 친구로 부터 페이스북으로 어떻게 알고 연락이 왔다. 한국의 모든 친구들과 연락을 끊은지 20년 가까운 세월이다. 모두가 내 소식을 궁금해 한다고 한다. 너무 멀리 왔다. 소식을 끊은지 너무 긴 세월이다. 친구놈들은 옛날 모습 그대로들이다. 대부분의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나만 다른 모습의 외계인이다. 지금에 와서 무엇을 어디부터 연결끈을 찾아야 하나. 또 그래서 무얼 하나. 다른 세계다. 삶의 방식이 다르면 대화의 본질도 다르다. 다시 잊기로 하고 문을 닫는다. 그래서 또 당신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당신은 나의 변한 모습을, 약해진 모습을, 가난한 모습을, 더 이상은 나아질게 없다는걸 이미 알면서도 감사해 한다. 내가 살아 있는것만으로도 감사해 한다. 이렇게 머나먼 곳에, 외로운 행성에 떨어져 사는 것에도 감사해 한다. 나 하나만으로 만족해 하며 감사해 한다. 그래서 가을 속의 당신은 나에게 기도가 된다. 우리 둘다 이 모습 이대로 살다 가게 하옵소서. 부도, 명예도 필요없고, 가난해도 좋으니 두사람 모두 아프지 말게만 하옵시고, 이 모습 이대로 살다 가게 하옵소서.
밤이 깊어가니 가을 바람은 가을비가 되어 내린다.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려고 창문을 연다. 어릴적 양철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그리워진다. 우리 부부의 저녁생활은 거의 일정하다. 아내의 퇴근시간은 7시로 나와 비슷하다. 아니 내가 아내의 퇴근 시간에 맞추어 퇴근을 한다. 때로는 나 혼자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서, 문 밖에서 아내를 기다린다. 저녁을 같이 준비해서 먹고, 설거지는 내가 한다. 설거지 하는 동안 아내는 샤워를 한다. 그리고 30분동안 우리는 강아지와 함께 동네 한바퀴를 산책한다. 돌아와서는 아내와 함께 TV를 보거나 인문학 강의를 듣는다. 아내가 화장을 하는 동안 얼마 전부터 나는 아내의 머리를 빗겨준다. 빨래 후 아내의 낡은 속옷을 개는 것처럼, 아내의 머리칼을 빗겨주다 보면, 내가 아내에게 얼마나 미안함인지, 못난 찌질남인지 깨닫게 된다. 아내가 잠자리에 들면 나는 나의 서재로 가서 하루를 마감한다. 이렇게 가을 밤은 깊어만 간다. 여보, 미안해…
우리 신부님, 우리 목사님 (10-09-2015)
역시나 이번에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우리들의 기대를 져버리지 않으셨다. 5박6일 미국에 머무시는 동안, 특히 우리가 사는 필라델피아를 방문하시는 동안 그의 말씀과 행적을 보면서 ‘왜 그는 세계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되었을까?’를 생각케 한다.
그분은 세계 카톨릭교 수장인 <교황 성하>이기에 앞서, 가난한자를 대변하고 보호하는 <영적 지도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적어도 그분은 <예수의 말씀>대로 사실려고 솔선수범을 보이시는 분이 아닐까? 적어도 그분의 설교가 그분의 삶이고, 그분의 삶이 설교이어서가 아닐까? 그분의 삶 자체가 80세의 고령임에도 검소하고 절약하며, 더 낮아지며, 더 내려놓고, 더 깊어지려 함은 아닐까? 종파를 떠나 가난한 자, 소외받은 자, 상처받은 자들을 먼저 찾으시고 위로하시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면서도 세계 권력의 상징인, 최고 지배국가인 미국 의회와 백악관 연설, 유엔 연설에서 미국 지도자들을 질타할 수 있는 용기와 정의를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특히 이민자들을 대변해서는 ‘나 자신도 이민자였다. 미국인 모두도 얼마전까지는 이민자였다’ 라고 하면서 이민자와 난민들의 인권을 옹호하셨다. 또 노숙자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는 ‘예수께서도 말 구유통에서 태어나신 노숙자 신분이었다’로 그들을 위로했다. 교도소의 죄수들을 만나서는 그들에게 희망을 잃지 말라고도 하셨다. 그분은 어느 나라를 방문하신든, 항상 <지극히 작은자 > 모두에게 ‘어떤 어려움과 곤경을 만나더라도 낙담하지 말라’라고 격려하신다.
어찌보면 교황의 말씀과 행동은 기독교인들이라면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이 <예수의 말씀>이시고 <예수의 행하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현대인들은 기독교와 교회를 떠나야만 하는가? 비신자보다 못한 기독교인들의 삶, 세상보다 더 세속화된 교회 문화, 가난한 이웃과 사랑을 나누지 않는 이기와 아집, 고통 분담보다는 안락과 평안함을 추구하고, 직분으로 계급화된 불평등한 공동체 생활, 선민의식의 오만과 독선.. 그 무엇도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수 없는, 닮고 싶지 않는 모습들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을 보고, 무엇을 믿고 따라오라고 <전도>할 수 있겠는가?
언젠가 교인이 나에게 선물한 죠반니노 과레스키의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 이라는 책이 생각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이 책이 이처럼 베스트셀러가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이탈리아 작은 마을에 우직한 신앙심과 덩치큰 돈 까밀로 신부와 그에 맞서 싸우는 공산당 소속 깡패 읍장 삐뽀네, 그리고 중재자 역활을 하시는 <선한 양심>의 예수님, 세사람이 주인공이다.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이념과 사상으로 매 사건들마다 극단적 충돌을 맞이하지만, 결국은 용서와 화해, 우정과 사랑으로 갈등과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모습들이 책을 읽는 내내 나의 입가에 웃음을 머금케 한다.
어쩌면 작금의 현대인들은 어느 시대보다 삶이 더 힘들고 지쳐있는지 모른다. SNS발달과 소통 수단의 발달로 가상 속의 친구는 많지만, 진정한 대화의 대상은 없다. 교회는 많은데 내 지친 영혼을 편히 내려놓고 쉴 곳은 드물다. 단적인 예가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고 있다. 특히 유사이래 한국의 자살률이 세계 1위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만약에, 만약에 이런 가정을 해본다. 세상사람들은 어떤 목회자를 원하는가? 특히 돈 까밀로 신부를, 프란치스코 교황을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서민적인 <순수함>이라고 생각한다. 목회자의 <진정성>이다. 삶과 설교가 닮아가는 <동질성>이다. 막말로 목회자가 조금 무식하면 어때? 세련되지 못하면 어때? 인간적인 실수를 좀 하면 어때? 설교를 더듬거리며 말을 잘 하지 못하면 어때? 목회자에게 박사학위가 왜 중요한가? 왜 목회자가 교회의 인사권과 재정권을 움켜쥐어야 하는가? 신도들은 잘난 권력자가 아니라 진정한 <친구>를 원한다. <go man go, is man is>의 군림하는 목사가 아니라, 한마리 잃어버릴지도 모를 양을 위해 함께 간구하는 목사, 가난한 자 작은 자와 함께 밤세워 울어줄 수 있는 목사, 눈물로 기도하는 목사, 소외받은 자들의 발을 한달에 한번씩 씻겨주고 입맞춤 해 줄 수 있는 목사, 작은 자들을 직접 찾아가서 어루만져 주는 목사, 가난한 자들의 섬김이 꾸준한 행동으로 보여지는 목사, 교인들과 함께 하는 봉사와 나눔이 생활화되고 설교가 되어 비신자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목사.. 그런 목사가 있는 교회라면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만들어지고 교회가 엄청나게 부흥될텐데..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선한 양심>은 하루 아침에 전세계에 알려지는 세상인데.. 왜 그게 안되나?? 안되는 이유는 목회자의 기초생활이 보장되지 않키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목회자는 <국가 공무원>이다. 가족들이 안심하고 먹고 살 수 있는 <평생 철밥통>이 보장되지 않는한, <영세 자영업자>로 전전긍긍하는 한, 신도들의 염원은 공염불이 되기 십상이다. 생활을 보장하지도 못하면서 목회자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말자!! 목사도 사람인지라..
초인 (超人) – 후편 (10-02-2015)
짧은 지면과 얕은 지식으로 니체의 사상을 논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나의 사견으로 이 무거운 주제를 마무리 하고자 한다. 니체의 사상은 21세기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행복론과 상당 부분이 유사하다. 또한 니체가 죽인 신은 절대자인 하나님이 아니라 절대자를 빙자한 인간이 만든 신을 말하며, 그 외의 잡신, 물신, 맘몬신 등 모든 우상을 죽여야 한다고 강변한 것이리라. 아이러니하게도 니체의 우상은 현대인의 우상과 동일하다. 또한 19세기 당시 기독교는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고, 약자를 더욱 더 비굴하게 구속하는 노예적 근성을 갖게 한다고 니체는 규탄한 것이다. 이 또한 현대 기독교와 별반 무엇이 다른가?
니체의 사상은 <자유>,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 <삶의 사랑>, <주인 의식>, <변화>, <순간의 충실>, <자기 극복>, <창조적 삶>, <생명의 소중함>, <건강한 삶> 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까?
그중 첫째가 <자유 의지>다. 현대인은 누구나 자유를 갈망한다.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내가 원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도권에 갇혀 있다. 하루하루의 비루한 삶에 노예처럼 구속되어 평생을 그렇게 살다가 죽는다. 장자크 루소는 <자유>를 이렇게 정의한다. “진정한 자유란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하고 싶지 않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라고 했다. 당신의 일상에서 당신의 의지대로 하기 싫은 것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을 < No!!>라고 몇가지나 말할 수 있나? 자유롭기 위해서는 고독해야 한다. 그리고 내 스스로를 꾸준히 성찰해야 한다. 노예는 누구인가? 무리지어 몰려 다니고, 주는대로 먹고, 뚜렷한 주관도 개성이 없이 군중 심리에 부화뇌동 (附和雷同)하며, 지배자가 명령하는대로 순종(굴종,혹은 맹종)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노예에게도 <권력의 의지>는 강렬하다. 하지만 니체의 진정한 권력은 상대방을 포옹하는 힘이며, 사랑할 줄 아는 자를 말한다. 진정한 <주인>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자라고 한다. 예수의 <서로 사랑하라>라는 지상 최고의 계율과 일맥 선이 닿는다.
둘째가 <창조적 삶>이다. <위버멘쉬> 즉 <초인>이 되라고 하는 것은 내 자신을 극복하고 뛰어넘는 그 무엇이 되라는 것이다. 요즘 현대인들에게 가장 많이 요구되는 삶이 창조적 삶이 아닌가? 인간의 삶의 배경은 <영원회귀 사상>이다. 삶 자체는 죽는 그날까지 <고통>이다. 이런 고통 속에서 창조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 자신을 사랑해야 하고 규범이나 율법에 구속되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는 학교 공부만 잘 한다고 출세하고 행복한 시대는 지났다. 시키는 대로 사는 삶은 노예의 삶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끊임없이 도전해야 한다. 물론 고통과 실패도 따른다.
위버맨쉬 !! 내 자신을 넘어선다는 것은 내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것 부터 시작된다. 영혼 못지않게 내 육신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내 영혼도 내 신체의 일부라는 것이다. 그러니 오늘이라는 순간에 충실하라. 과거로 이어지는 영혼과 미래가 이어지는 영혼이 만나는 지금이라는 순간에 충실하라. 오늘이 없는, 내일을 위한 삶은 메뚜기 삶에 지나지 않는다. 행복은 미래에 없다. 목표를 이룬 삶은 허구이다. 행복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다. <영혼>의 고대 그리스어는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다. 순간에 충실하다보면 영혼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니체의 사상이나 현대인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창조적인 삶을 사느냐 못사느냐, 행복한 삶을 사느냐 못사느냐, 주인으로 살 것인가 노예로 살 것인가는 하나님의 몫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의 몫이다.
현대인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어떤 신을 믿든, 안믿든, 그것은 각자의 몫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의 노예가 아니다. <소원을 말해봐> 식으로, 내가 간구하는대로 이루어 주시는 요술램프가 아니다. 인간인 나는 그분의 크신 뜻을 알지 못한다. 우리를 통해 무엇을 이루실건지 알 수가 없다. 신앙생활은 믿음 생활이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계율은 지극히 간단 명료하다. <서로 사랑하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서로를, 이웃을, 가난한 자를 내 몸같이 사랑하며 살지 못하면 죽는 날까지 꼬랑지 내리고 살면 된다. 내 삶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삶이다. 무엇을 달라고 그렇게 간구하는가? 내 삶은 내가 해결해야 한다. 내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분이 항상 나와 동행한다는데 결과가 그 무엇이든, 그냥 감사하면 된다. <오늘>이라는 이 <순간>을 살게 해 주심만으로도 감사할 뿐이다. 다만 ‘언제 죽어서 천국가나’ 하며 죽을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은퇴자의 삶>을 살아서는 안되는거 아닌가? 그리고 천국에 누가 오래? 그러라고 살려놓은 목숨이 아니지 않은가? 죽는 날까지 <위버맨쉬>!! 초인적, 창조적인 삶을 살도록 노력이라도 해 보자..
초인 (超人) – 중편(09-25-2015)
니체는 왜 신을 죽였는가? 신이라는 절대적 가치, 형이상학적 진리, 영혼구원이라 불리우는 낡은(?) 가치들을 죽여야만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유신론과 무신론은 인간이 논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신이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당과 연옥이나 지옥도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이다. 신의 영역이다. 인간이 신을 있다 없다, 천당에 간다, 못간다를 판단하고 결정할 주체가 아니다. 신을 팔아서 밥 먹고 사는 종교인이나 주술사가 아닌 다음에야 그 의미는 공허하고 허무할 뿐이다. 그러면 니체가 신을 제외하고 추구하는 새로운 가치란 무엇인가? <내 자신>이다.
<짜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기본 사상은 <영원회귀 사상>이다. 불교의 윤회 사상, 열반, 깨달음, 일체유심조 등과 일맥 유사하면서도 다르다. 삶은 고통과 쾌락, 사상과 탄식, 무의미와 의미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그대로의 실존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다만 다람쥐 체바퀴 도는 듯한 무의미한 삶의 반복이 아니라, 매일 달라지는 새로운 반복의 삶을 살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니체는 신의 죽음인 절대적 가치에서 벗어나 내 자신의 삶을 탐구하는, 내 삶의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짜라투스트라는 니체의 예수다. 예수의 말씀대로 <내가 진리다>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성육신한 신이니까 ‘내가 진리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지만, 인간이 어떻게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수 있을까? 니체가 생각하는 <진리>란 내가 결정하고 내가 의지하고 내가 창조하는 그 무엇이며, 내 자신이 되는 것을 막는 모든 것을 <우상>이라고 단정지었다. 즉 니체의 화두는 <나는 누구인가>가 아니었을까?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변한다고 정의했을 때, ‘나는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가’에 방점을 둔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초인>이 되라는 것이다. <초인>의 독일어 원어는 <위버맨쉬, over man>, 즉 <네 자신을 넘어서라>는 뜻이다. 초인은 슈퍼맨 혹은 초능력자, 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포항공대 이진우 석좌교수는 <니체는 누구인가?> 강의에서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하여야 하고, 그의 삶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어야 하며, 동경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하며, 가슴에 별을 품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초인이 되는 삶이다. 현대인은 가슴에 아무런 별도 품고 있지 않을 뿐더러, 새로운 별도 잉태할 수 없다”라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내 자신을 넘어설 것인가? 첫번째, 자기 자신을 먼저 성찰하라는 것이다. 둘째는 자기 자신을 극복해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 실존의 가장 커더란 결실을 수확하는 비결은 <위험하게 살라>는 것이다. 스스로가 추구해야 할 목표를 제시하고, 하늘이 아닌 대지에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의 미래를 약속하는 자, 선과 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만이 삶의 가치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긍정하라. 필연보다는 우연을, 존재보다는 생성을, 미래보다는 <순간>을 살라는 것이다. 끊임없는 변화의 노력이란, 순간을 즐기는 태도이고, 순간을 향유하는 적극적 자세이다. 순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라. <다시 살고 싶은 삶>을 살 때, 삶의 목표와 의미는 저절로 찾아온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니체는 정신의 세가지 변신에 대해 이야기 한다.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로 되고, 사자가 어린아이가 되는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고 한다. 낙타는 스스로가 삶을 견뎌야 할 고통으로 생각하고, ‘삶은 고된 것이다’라고 말하는, 착하고 인내심이 많은 동물이다. 짐 깨나 지는 낙타는 더없이 무거운 짐 모두를 짊어진다. 그러다가 낙타는 사자로 변한다. 사자는 자유를 쟁취하여 그 사막에서 주인이 되고자 한다. 사자는 자신이 섬겨온 주인을 찾아 나서며, 마지막 신에게 대적하려 신과 일전을 벌인다. 창조된 모든 가치를 아는 사자, 자유의 쟁취를 강탈한 사자가 모르는 것은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과 <망각>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어린아이가 되라는 것이다. 이 세가지 과정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고 짜라투스트라는 말했다.
니체는 인간의 대표적 속성을 <원숭이>에 비유했다. 인간은 전통, 규범, 인습의 테두리 안에서만 행동한다. 그런 면에서 원숭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중은 믿고 따를 리더가 있어야만 단결하여 정치적 행동을 할 수 있다. 니체가 볼 때 인간의 가장 끈질긴 본성은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 습성, 즉 노예근성이라고 한다. 니체는 인간을 주인도덕과 노예도덕으로 분류한다. 주인 도덕은 명령하는 자의 가치 창조이며, 자기긍정에서 비롯된 가치 평가를 말한다. 즉 개인의 좋고 나쁨을 기준으로 한다. 반편 노예 도덕은 억압받는 인간의 원한 감정에서 발원한다. 즉 노예 도덕은 사회적 선과 악을 기준으로 한다. 니체는 모든 인간 내면의 공통돤 점은 <권력의 의지>를 추구하는 것이라 전제하였다.
초인 (超人) –전편 (09-18-2015)
요즘 한동안 내 머리 속에 맴도는 화두는 ‘초인(超人)이란 누구인가?’이다. 우리 세대의 기억 속에는 <초인>하면 이육사의 <광야>가 자동으로 연상된다. “까마득한 날에 / 하늘이 처음 열리고 / 어데 닭 우는 소리가 들렸으라 // (중략) / 지금 눈 내리고 /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다시 천고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 시는 이육사의 <청포도>와 함께 학창시절에 누구나 외우던 시 구절이었다. 분단된 조국과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는 고구려 영토였던 만주 벌판을 되찾길 소망하며 우리는 다 함께 가난한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때 백마 탄 <초인>은 누구인가? 신인가? 우리 자신인가?
먼저 니체의 <초인>을 논하기에 앞서, 나는 니체의 사상이나 철학이 맞고 틀림을 논하고 싶지 않다. 또한 니체에 대한 깊은 지식도 갖고 있지 못할 뿐더러, 다만 니체는 19세기 그 시대에 그렇게 생각했고 나는 나의 평범한 의문에 나의 생각을 말하는 것 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간에게는 두가지 유형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초인>이고, 다른 하나는 <마지막 인간> 즉 <최후의 인간>이라고 한다. 그가 말하는 <마지막 인간>이란 세속적이고 시장 속의 인간, 개인의 이익만을 극대화하며 자기 극복의 의지를 잃어버린 인간, 현재에 만족하고 작은 행복에 만족하는 인간, 즉 현대인의 표상이며 전형적인 <나>같은 인간이다. 그는 이러한 마지막 인간을 개성이 없는 <메뚜기떼>와 같다고 한다.
반면에 <초인>은 누구인가? 형이상학적 가치와 반대되는 자, 현대인과 선한 자 그리고 기독교인과 반대되는 자,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능력을 가진자, 자신을 넘어서는 (beyond oneself) 그 무엇인가를 창조하는자, 즉 자기 극복을 할 수 있는 자를 말한다. 니체의 <초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니체의 <신은 죽었다>를 이해해야 한다. <신>은 누구인가? 절대적 가치, 절대적 진리, 불변성과 영원성의 절대자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는 종교적 가치보다는 물질적 가치가 중요시 되고 소비 중심의 시대가 되었다. 형이상학적 이데오르기가 무너지고 세속화 (secularization)가 이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따라서 신은 우리 모두가 죽인 것이다. 의미와 가치가 상실된 시대, 절대적 진리가 사라진 시대, 이렇게 해서 허무주의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신은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이다. 절대적 진리란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 변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만이 진실일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면 과연 <신은 죽었는가?> 이것은 나의 전적인 사견임을 전제로 한다. 두가지 가설이 있을 것이다. 첫번째 가설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믿는 절대자 하나님은 창조주시다. 이 우주와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고, 운영하시고 관할하신다. 절대자이니 죽지 않는다. 인간이 <신은 죽었다>라고 해서 죽고, 부활했다고 해서 살아나는 신이 아니다. 신이 인간을 만드시고 다스리신다면 그 절대자 하나님은 감히 인간이 이해할 수도 없고, 짐작조차도 할 수 없는 위대함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는 그분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분이 나와 항상 함께 동행한다는 그 믿음 하나만으로도 이생의 마지막까지 충분히 살 수 있는 힘이 된다. 더 이상의 무엇을 바랄까. 신께 그 이상의 요구는 철없는 욕심이다.
두번째 가설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설화>인 것이다. 우주의 빅뱅 이론, 진화론 등 현대 과학적 배경으로 신은 허구인 것이다. 인간이 만든 신이라면 인간이 죽일 수 있다. 신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만 창조 과학은 믿지 않는다. 즉 인간이 만든 <설>은 믿지 않는다. 나는 유대인들이 말하는 그들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나는 나의 하나님과 예수를 믿는다. 설령 천고의 뒤에 신은 없다고 판정이 나더라도, 신은 인간이 만든 창작품이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신이 있다고 믿고 싶다. 아마도 인간이 생존하는 한, 신도 존재 하겠지만 그런 토론에 내 인생의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신이 있다고 믿어서 손해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신은 나에게 어떠한 댓가도 요구하지 않는다.
니체의 말대로 <영원 회귀사상>에 의해 삶은 고통의 반복과 연속이라면, 그럴수록 의지할 대상이 필요하다. 신은 내 삶의 여정에 큰 위로가 된다. 하지만 인간은 신을 인간의 입맛에 맞게 너무 우상화 시켰는지 모른다. 현대는 <예수의 말씀>대로 살기 어려운 시대다. 기독교인의 삶이나 교회 대부분이 예수의 삶과 거리가 멀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예수의 삶 자체는 고통이다. 현대인은 세속화 되었다. 평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한다. 그래서 신에게 싫증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래서 니체는 망치를 들고 우상화된 신들을 죽였는지 모른다. 아니 우리 모두가 그렇게 신을 죽였는지도 모른다.
Buyer의 상식 (09-11-2015)
사람과 사람간의 만남에는 나이나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지켜야 할 예의가 있고, 알고 있어야 할 상식이 있다. 나도 이 지역에서 비지니스 컨설팅이라는 직업을 만 9년째 하고 있으니, 그동안 가게를 사시겠다고 나에게 등록하시고 서명하신 Buyer분만 861명 (가구)에 달한다. 물론 이 분들 중에는 나를 통해 가게를 사신 분들도 있고, 다른 부동산을 통해 사시거나, 아니면 아직도 못사신 분들도 계신다.
그런데 미국 부동산 특성상, Buyer는 Broker를 통해 가게를 사든, 안사든 Broker에게 지불하는 비용은 일체 없다. 어떤 분은 3년동안 가게를 사기 위해 수십차례 나를 만나고 같이 가게를 방문하고 애를 썼지만, 결국 다른 브로커의 매물을 사시는 경우도 있다. 나는 무일푼으로 수고만 한 셈이지만, 그렇다고 그분을 조금이라도 원망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내가 미안함이다. 이 직업은 단순히 매물을 중계하는 일이기에 앞서서, 사람 (고객)과의 신뢰를 구축하는 일이 우선이므로 향후에도 계속 연결되길 소망한다. 오늘은 나의 <Cash –Cow>고객이 아니었지만, 언젠가는 또 다시 나의 <Prospector –가망고객>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몇몇 답답한 Buyer들이 계신다. 자신의 정보을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않는 경우다. 가게를 살 충분한 자금이 있다고 하고 크래딧 점수도 좋다고 한다. 그런 걱정들은 하지 말고 가게 매물들을 모두 보여 달라고 한다. 그렇게 여러개의 매물 분석 자료와 주소를 주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연락이 안된다. 전화를 해도 받지를 않는다. 상도덕상의 예절이 결여된 경우다.
이런 분보다 더 골치 아픈 분들이 있다. 마음에 드는 가게를 결정해서 오퍼 계약서를 작성하고 은행 융자를 알아볼려고 하면 그때서야 나에게 말한 정보들이 사실과 다름을 알게 되는 경우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가지고 있는 자금 출처다. 아직도 한국 사람은 계를 많이 한다. 한인 지역의 서민들이 목돈을 만들 수 있는 대표적인 방법이라는 것도 이해한다. 그래서 <친목계>를 통해 받은 현금과 그동안 주급생활을 하면서 받은 현금을 즉시 은행에 입금하면 융자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I.R.S에서 인정하는 자금출처를 증명할 수 없는 현금은 내 돈이 아니다. 이 경우는 부부 크래딧이 모두 좋아도 작업을 해서 3~4개월 뒤에야 융자 신청이 가능하다. 가장 융자에서 중요한 것은 다운페이한 자금의 출처와 신용정보다. 경기가 오래동안 불황이다 보니 크레딧이 망가지신 분들이 의외로 많다. 특히 부부 둘 중에 한사람만 크래딧이 좋아도 괜찮치 않을까 안심하는 분들도 많다. 아니다. 두분 모두 680점 이상이 되어야 한다. 또한 파산, 연체, 재판중이거나, 차압 등에 걸려 있는 흔적들이 의외로 많다. 새 장가를 갈려면 과거의 흔적을 정리해야 하듯이 은행 융자를 받기 위해서는 나쁜 기록들을 지워야 한다. 물론 여러가지 방법으로 조정 가능하지만 시간이 필요하다. 망가진 크래딧 교정을 하고 자금 세탁을 하는데 최소 6개월이 소요된다. 즉 미리미리 여러 전문가를 만나고, 융자를 받을 준비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가게를 살 수 있는 것처럼 처신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매물은 생물 (生物), 즉 살아있는 물건이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즉 지금 당장이라도 마음에 들면 살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Buyer가 <알아서 한다>, <걱정하지마라>라는게 무슨 말이가. 자신의 재정 상황을 정확하게 말하지도 않으면서, 있는 매물을 다 보여달라고 하면 브로커에게 매물을 맡겨놓았는가? 브로커에게 돈 한푼도 지불하지 않으면서, 그 당당함은 어디에서 오는건가? 매물을 여러개 소개 받았으면 매물을 잘 보았는지, 검토한 결과 무엇이 문제인지, 필요한 요구사항이 무엇인지, 최소한의 return-call은 해 주셔야 되지 않나? 설령 다른 브로커를 통해 가게를 샀을 경우에도 다른 가게를 샀다고 sorry-call정도는 해 주셔야 하지 않나. 여러분에게는 대수롭지 않는 매물일지 모르지만, 브로커에게는 그 매물 하나 하나가 밥줄이며, Seller의 재산을 대리 위탁받은 신뢰의 끈이다. 또한 부동산 사업은 정보 사업이다. 고객과 고객간의 비밀 보장이 생명이다. 남의 재산 비밀을 보고자 할 때에는 볼 수 있는 자격이 되어야 하며, 설령 그 매물을 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타인이나 제 3자에게 그 매물 정보를 누설하지 말아야 한다. 마치 지역의 매물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것이 사회적 신분이 높은 것인양, 폭넓은 인맥을 구축하고 있는양, 훈장처럼 의시되서는 안된다. 브로커에 대한 미안함이 있어야 하고 측은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부동산 브로커는 여러분의 재산 증식에 필요한 무급여 도우미다. 자주 만나서 의논하고 질문하라. 능력이 되지 않는 브로커라면 어쩔 수 없지만, 브로커를 통해 빼낼 수 있는 것은 다 빼내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얻는 것이 지혜로운 고객이다. 서로에게 예의와 상식을 갖추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Seller의 환상 (09-04-2015)
우리 지역의 한인들이 가게를 팔려고 할 때 아직도 과거의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하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가장 대표적인 환상이 가게를 팔았을 경우 지불해야 할 세금 (양도 소득세)이다. 우리 지역 한인 Seller들은 나이가 60, 70대가 많으시며, 지금 하고 있는 가게들을 대부분 10년 이상 했다. 예를 들어 10년 전에 40만불에 가게를 사서 오늘 50만불에 가게를 팔면 양도차익인 10만불에 대한 세금을 2~3만불만 내면 된다고 착각을 한다. 그런데 이것은 감가상각을 전혀 고려치 않은 것이다. 가게를 사게 되면 매입 가격에는 권리금, 장비 및 시설비, 상품 재고, 상호권 등 몇가지 항목으로 세분화 된다. 각 매입 항목들은 내구 년수에 따라 감가상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 내가 가게를 얼마에 샀던지 간에 10년이 지나면 가게 잔존가는 거의 남아 있지 않으므로 50만불에 대한 25%~30%의 세금, 즉 13만~15만불 세금을 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부동산 커미션, 변호사비,등을 지불하면 내 손에 30만불 밖에 쥘 수가 없으니 20만불을 손해보고 판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 경우는 양반이다. 10년전에 70만불에 가게를 샀다. 그동안 내부 시설이며 인테리어, 장비 교체로 20만불을 투자 했다. 그러니 가게에 들어간 돈이 90만불이라고 생각한다. 매상은 10년전 보다 대부분 떨어졌다. 또한 가게 권리금들도 대부분 떨어졌다. 즉 나의 재산 가치가 90만불로 생각했는데, 50만불에 가게를 판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도 일부 공제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거의 세금만 10만불 이상 내어야 한다. 그러니 기타 비용을 공제하면 내 손에 35만불 밖에 쥘 수가 없으니 내 재산 90만불 중의 3분의 2인 55만불이 날라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억울하고 분통해서 가게를 못판다. 그래서 Seller가 요구하는 것이 <Under Payment>다. 10만불 Under이면 2만5천불, 20만불 Under이면 5만불 이상 세금을 안내어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Seller로서는 세금을 Saving하는 꼴이지만, 결국 Buyer가 나중에 대신 내는 것이다. 그러니 Buyer는 그만큼 가격을 더 주고 비싸게 사는 꼴이다. 가장 쉽게 유혹당하는 말이 팔때도 <Under>로 팔면 된다 라는 것이다. 과거 호시절에는 가능했다. 무슨 장사든 잘되고 나오는 매물은 적고, Buyer가 많으면 가능하다. 또 장사가 잘되어 벽장 속에 숨겨둔 현금들이 많으면 가능하다. 이제는 미국에 그런 시절은 오지 않는다. 우리 지역 한인들은 가난하다. 숨겨둘 현금들이 없다. 버는 쪽쪽 쓰기 바쁘다. Buyer도 바보가 아니다. 그러니 <Under 요구>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위의 사례들은 투자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식의 차이>다. 첫번째는 <인지부조화>이고, 두번째는 <매몰 비용의 효과>다. <인지부조화>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미지와 이에 모순된 증거에 대하여 두가지 상반된 생각 즉 이율 배반적 갈등을 말한다. 이러한 심리적 고통을 줄이기 위해 사람들은 현실적 정보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며 최소화 할려고 한다. 또는 과거의 잘못된 의사 결정을 합리화 하기 위해 현실의 믿음 자체를 바꿀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된다.
<매몰 비용의 효과>란 투자 의사 결정을 할 때, 현재와 미래의 이익과 비용을 고려할 뿐, 과거의 비용은 투자 가치의 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비용에 집착하는 것이다. 가장 흔한 예가 장사를 하기 위해 그동안 장비를 바꾸거나 시설 투자한 비용을 가게 매각대금에 추가할려는 경향이다. 가게 가치는 현재 매상에 의한 <년 순수익>만으로 평가되며, 나머지 사항들은 기회요소인 참고 사항일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가게 가격 가치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50만불에 가게를 사서 10년동안 매달 2만불의 가게 수익으로 생활하다가 50만불에 가게를 판다고 하면 본전인가? 세금 떼고 손에 30만불 밖에 못쥐니까 20만불 손해인가? 아니다. 10년동안 월 2만불 x 12개월 x 10년= 240만불의 수익을 창출했다. 이 수익으로 <지렛대 효과>를 이용하여, 은행 대출을 받아 제2, 제3의 가게를 확장해서 더 많은 수익을 창출 했을 수도 있다. 50만불을 은행에 입금하여 복리 이자 수익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10년 후에 양도 차익 세금을 15만불을 지불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10년동안 창출한 수익의 鳥足之血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동안 잘 먹고 잘 산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늘어난 재산에 대한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 국가에 내는 세금을 이제는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니 현재 가게를 10년 이상 했다고 하면 얼마에 매입했던지 간에, 시장 가격에서 60~70%가 내 손에 들어오는 실제 수익이라고 생각하면 마음 편하다. 가게를 팔기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여러 회계사들을 미리 미리 만나서 매각후의 세금과 기타 비용을 정확히 계산한 후, 마음의 결심이 되면 매물로 내놓기 바란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가게 하나 팔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Under>를 주지 않으면 안팔겠다는 둥, <아니면 말고> 식의 <맛보기>는 안했으면 좋겠다. 제발..
Back to Business (08/28/2015)
작년 이맘 때 “지역단상 <가게 팔기 정말 어렵다>”라는 제목으로 5회에 걸쳐 칼럼을 쓴적이 있다. 지금 다시 읽어봐도 일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게 없다. 아니 혹자는 점점 더 살기가 어렵다고 한다. 매년 죽는 소리니 그러려니 한다. 가게 매상은 더 떨어지고 부대 비용은 더 올라갔다고들 한다. 렌트비, 인건비, 물품대금, 유티릴티 비용 등 올라가면 올라갔지 내려오는 것은 없다. 그러니 손에 쥐는 돈은 점점 줄어들고 장사하는 재미는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물론 한인 사회의 정확한 데이타가 없으니 나의 단편적 사업 자료로 어림잡아 말하는 것임을 전제로 한다. 먼저 이 불경기에 가게를 살 사람들은 있을까? 오늘을 기점으로 D-1년 (09/01/2014 ~8/31/2015)동안 가게 (비지니스)를 사시겠다고 회사에 신규 등록된 Buyer 는 81명이다. D-2년 (09/01/2013~08/31/2014)은 77명, D-3년은 76명이 새롭게 등록되었으니 수치상으로는 매년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런데 Buyer가 문의한 매물을 업종별로 보면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된다. <D-1년/ D-2년>을 비교하면, 건물 문의 :17대 6, Beer 관련업종 : 11대9, 세탁소 : 7대20, Drop Store : 19대21, Deli & Breakfast : 18대 22, Nail :7대8, 레스토랑 (피자, Seafood포함) : 6대4, 카워시 5대2, Stock (Beauty, 컨비니언스, 기타) ; 4대6, 등이다. 단 D-1년 고객은 타 년도에 비해 실수요자보다 허수요자 (탐색 수준)가 많다. 건물은 복수 업종의 Buyer가 일부 중복되어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매물이 평균 350개 에서 400개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작년과 올해가 달라진 특이점은 건물, 술 관련 업종 등이 늘어난 반면에, 그동안 한인 사업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 세탁소, Breakfast 가 하향세를 이루고, 인기 절정이던 Drop Store와 Nail 업종도 신통치 않고, Beauty Supply 등 Stock 사업들은 바닥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또한 60대 이후 한인 1세들의 은퇴 시기와 과격한 육체 노동을 기피하려는 경향과도 일치한다.
그런데 우리 지역의 한인 이민자들 가운데 보유하고 있는 현금(금융자산 포함)이 50만불이 넘는 사람이 몇사람이나 될까? 5%, 10%.. 글쎄. 1백만불 이상의 건물이나 Beer, Car Wash와 같은 사업에 투자할 사람은 몇사람이나 될까. 그렇다고 이런 부류의 사업들이 안전성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위험요소와 실패한 사례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면 나머지 90%인 대부분의 소자본 한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계실까? 피고용인인 주급 생활자는 돈을 모을 수가 없다. 가난에서 탈출할 유일한 방법은 육체적 고생을 감수하더라도 내 장사를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적은 자본으로 편하게 일하고 돈 잘 버는 장사는 없다. 그러면 기존의 한인들이 하고 있는 업종들을 하지 않고 다른 업종을 하면 좀 나아질 것 같은가?
무슨 사업이든 진입장벽이 있다. 미국의 비지니스 (장사)에 재미있는 현상은 민족별로 선호하는 업종이 나뉘어져 있다. 업종은 민족 성향, 교육 수준, 본국의 국민 소득, 투자 자금 등에 따라 나뉘어진다. 요즘 중국 사람들은 돈이 많아도 아주 많다. 건물, 장치 사업들은 그들의 독무대다. 인도 사람들은 대가족 문화이어서 프렌차이저 사업을 독차지 한다. 동남 아시아와 남미 이민자, 흑인들은 영세하다. 반면에 한국 사람의 장점은 무엇인가? 부지런하다. 깔끔하다. 빠르다. 인내심이 강하다. 지독하다. 유행에 민감하다. 손재주가 뛰어나다. 등등.. 그러니 깔끔해야 하고 작업 환경이 열악하더라도 견디야 하는 세탁소 관련 업종은 한국 사람이 아니면 할 민족이 없다. 즉석에서 신속하고 정확하게 만들어내야 하는 Breakfast 업종은 ‘빨리 빨리’의 배달 민족을 따라올 수 없다. 생선가게, 과일 가게처럼 부지런함을 요구하는 업종도 마찬가지다. 네일가게도 한국 여자들 처럼 상냥하고 미적 감각이 뛰어난 여성도 없다. 그러니 아직도 살아남은 업종이 되었고, 앞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업종이다. 한국 사람만이 잘 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서비스가 강화된, 다른 민족이 하지 않는 특화 업종을 해야 살아 남는다. 자본이든, 인력이든, <규모의 사업>에서는 대륙 민족을 이길 수 없다.
현실을 직시하라. 우리 지역 한인사회는 대부분의 자본금이 영세하다. 가난한 도시다. 눈높이는 높다. 영어가 한계다. 육체적 고생은 하지 않을려고 한다. 각종 루머에 약하다. 매사가 부정적이다. 열정과 도전 정신이 사라진다. 겉늙었다. 정지된 사회다.. 이제는 100세 시대다. 65세에 은퇴하면 35년을 집에서 멍하니 무얼 하실려고 그러시는가. 돈 없는 노인은 자식도 교회도 싫어한다. 우리 지역 한국 이민자는 은퇴 목표를 75세로 수정하자. 장사를 해서 돈도 더 벌고 더욱 건강하여야 장수하실 수 있다. 주급 생활자는 더더우기 자기 사업체를 해야 한다. 아이들 Back to School이 시작되었다. 우리 모두도 Back to Business !!
이름없는 들꽃이 되어 (08/21/2015)
화원의 값비싼 화초는 사람이 키우고, 저 들판의 값없는 들꽃은 하나님이 키우신다고 어느 시인이 말했는가. 어제는 아내와 함께 산을 갔다. 산을 좋아하는 일행이 있어 일요일날 별다른 계획이 없으면 길을 따라 나선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얼마를 걸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일행의 배려심으로 크게 무리하지도 않고, 산 정상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하루 반나절 험하지 않는 산길을 걷다가 좋은 계곡물에 발 담그며 준비해 온 도시락 까먹고 좋은 이야기를 하다가 산에서 내려온다. 산행도 단풍지는 10월이 지나면 내년 봄까지 기다려야 한다.
산길을 걸으며, 들길을 걸으며, 수많은 들풀들을 본다. 이름 모를 들꽃들을 본다. 내가 그들의 이름을 모른다고 저 들꽃들의 이름이 없을까. 내가 저 들풀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그들의 삶이 의미를 상실하는걸까. 내가 그냥 스쳐 지나간다고 저 들꽃들이 실망하고 낙담할까. 혹시나 아는 들꽃이 있어 그의 이름을 불러 준다고 그가 나에게로 다가와 새로운 의미가 될까. 그들은 나와 무관하다. 개의치 않는다. 담대하다. 자신을 창조하신 그분만을 경외하며, 저 이름없는 산길에서 태어나 자신의 소명을 다하고 사라질 뿐이다. 그렇게 살다 간 들꽃이라 일생이 허무하고 보잘 것 없는걸까. 우리도 저 들풀처럼 초연하고 의젓하게 살 수는 없는걸까?
어제는 대한민국이 광복 70주년 되는 날이었다. 어느 나라의 역사든, 패배의 역사, 고난의 역사는 있기 마련이고, 그 기간을 산 사람들의 고통 또한 이루다 표현할 길이 없다. 특히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전 재산과 남은 여생을 바친 독립군과 그 유가족들, 또한 음지에서 독립을 지원한 이름 모를 사람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런데 인간 세상은 참으로 모순되고 정의롭지 못하며, 불공정하다. 그 독립군들의 후손들은 세대가 이어질수록 가난에서 점점 벗어나기 힘들고, 이름조차 없는 반면에,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하던 친일파들은 그 당시에도 잘 살았고, 지금도 그 후손들의 대부분이 국가의 부와 권력을 차지하며 이름을 날리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기득권자라고 한다. 가난은 후손들에게 교육의 기회조차 빼앗아 간다. 그러니 누가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희생자가 되겠는가. 누가 전재산을 국가를 위해 바치겠는가. 국가의 평가와 보상의 원칙이 바로 서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광복 70주년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광복 100년이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니 지금도 굴욕의 역사와 패배의 역사는 우리의 가슴 속에 계속되고, 침탈자인 일본은 한국을 꼴값으로 우습게 아는 것이다.
저 들꽃에서 배우자. 저 들풀에게서 배우자. 세상 사람들에게 유명하지 않으면 어때.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어때. 부자이지 않으면 어떻고 잘 먹고 잘 살지 않으면 어때. 평민이면 어떻고 평신도면 어때. 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고 그 분에게 합당한 사람이면 되는거 아닌가. 내 삶이 하루하루 열심이고 감사함이 간절하면 되는거 아닌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면 되는거 아닌가. 나태주 시인의 <풀꽃>에서 “자세히 보아야 / 예쁘다 / 오래 보아야 /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처럼 세상에도 들꽃 같은 사랑이 많다. 자세히 보고 싶은 사람이 있고, 오래동안 보고 싶은 사람이 있고, 보면 볼수록 나의 눈물샘에 담아 두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과 사랑을 하다가 부르시면 홀연히 흩날리는 꽃씨되어 돌아 가고 싶다. 따사로운 햇살에 나의 작은 몸 맡기며 자연과 대화하고, 혼자 사색하며 기도하다 가고 싶다. 저 들꽃처럼.. 개울가 시냇물 소리, 풀벌레 소리, 나무가지 사이에 이는 바람소리, 사랑하는 여인의 재잘거림을 들으며 그렇게 이쁘게 살다 가고 싶다. 저 들꽃처럼..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 오랜 억겁의 세월 중에서 내가 살다 간 이 찰나의 세월에 이름을 남긴다는게 무슨 큰 의미일까. 세상 사람들에게 이름이 불리기우기 애태우지 말고, 내 스스로에게 오늘의 의미가 되자..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는 이현주 목사의 <한송이 이름없는 들꽃으로>를 소개한다. “한송이 이름없는 들꽃으로 피었다 지리라 / 바람으로 피었다가 바람으로 지리라 / 누가 일부러 다가와 / 허리를 굽혀 향기를 맡아준다면 고맙고 / 황혼의 어두운 산그늘만이 / 찾아오는 유일한 손님이어도 또한 고맙다 // 홀로 있으면 향기는 더욱 맵고 / 외로움으로 꽃잎은 더욱 곱다 / 하늘 아래 있어 새벽 이슬 받고 / 땅의 심장에 뿌리 박아 숨을 쉬니 / 다시 더 무엇을 기다리랴 . // 있는 것 가지고 남김없이 꽃피우고 / 불어가는 바람 편에 말을 전하리라./ 빈 들에 꽃이 피는 것은 / 한평생 홀로 견딘 그 아픔의 비밀로 / 미련 없는 까만 씨앗 하나 남기려 함이라고.. // 한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 피었다 지리라./ 끝내 이름없는 들꽃으로 지리라. //.. 목사님, 부디 그렇게 사시길.. 나 스스로도 그렇게 살길 소망한다.
세상 만사 (世上 萬事) (08/14/2015)
아내하고 장시간 운전을 하고 다닐 때면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 (卽問 卽說)>이나, 생태마을 황창연 베네딕토 신부님의 <행복특강 (총 41회)> 등을 자주 듣는다. 가끔은 유명 목사님들의 설교도 듣지만 솔직히 재미도 없고, 별 감동도 없으니 반복해서 듣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물며 … 왜 그럴까?
두분 강의는 특히 법륜 스님의 <즉문 즉설>은 이 시대의 사람 사는 이야기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다. 흔히 어느 집이나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이고, 너와 나의 이야기다. 큰 깨달음을 얻고자 함도 아니요, 속 시원한 해결 답안을 얻고자 함도 아니다. 사는게 답답하니 혹시나 해서일게다. 부부간의 문제, 부모와 자식 간의 문제, 결혼, 취직, 공부, 종교, 등등 그저 그런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많은 시청자들이 배를 잡고 웃기도 하고, 가슴 아파하며 공감도 한다. 질문자의 질문을 통해 나의 아픔을 공감하고,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카타르시스와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감사한다. 어떤 상담자의 질문과 생각은 어찌나 엉뚱한지, 그런 질문에도 바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역질문으로 다시 생각하게 하니 질문자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각자의 <답>을 찾게 한다. 그 속에서 부처님의 법문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상담을 하는 스님의 답변도 <답>이 아니라 또 다른 <설>이고 <가정>이다. 스님의 답변이 맞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즉문즉답>이 아니고 <즉문즉설>인 것이다. 요즘 많이 배우고 잘난 현대인들이 믿으라고 하면 믿을 것이며, 믿지 말라고 한다고 믿지 않을 것인가. 현대인의 믿음에는 무조건적, 신화적 강요가 아니라, 동시대의 <공감>이 필요하다.
그러면 왜 말 잘하기로 유명한 목사님들은 이런 일반인들의 아픔을 상담하는 <즉문즉설> 같은 공개 강론을 하지 못하시는걸까? 아니면 안하시는걸까? 나의 부족한 생각으로는 목사님들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결혼을 해서 아내가 있고 자식들이 있으면 어느 집이나 겪는 똑같은 문제들을 겪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어쩌면 평범한 가정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는 않을 것 같다. 세상 만사가 그렇게 설교 말씀처럼 만만한가. 세간의 눈들이 있으니 행복한 척은 할 수 있어도 가족 당사자들을 속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계 유명한 위인이나 사상가, 작가들 중에는 목사의 자식들이 제법 있다. 그런데 대부분이 목사인 아버지와 많은 갈등과 아픔을 겪으면서 홀로서기를 한 사람들이다. 왜 그럴까. 인간의 욕심 때문일 것이다. 나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가정 문제는 <조금만 더> 때문에 발생한다. 남도 아니고 내 자식이니까 <조금만 더> 공부 잘 했으면 좋겠고, 조금만 더 잘 났으면 좋겠고, 조금만 더 잘 살 았으면 하는 욕심 때문이다. 더구나 자식의 내일 앞날을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잘 나가다가도 하루 아침에 삼천포로 빠진다. 내 어머니는 지금도 통화하면 항상 내 걱정부터 하신다. 부모는 죽는 날까지 자식 걱정을 하는가 보다. 또한 아내는 어떠한가. 아내는 함께 사는 세월이 길면 길수록 남편의 모든 약점, 허점, 실수, 이중성, 언행 불일치 등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목사님도 우리 같은 평신도 처럼 감히 아내에게 반항은 커녕 숨소리도 크게 못내는 것일게다. 목사님들의 현실 생활은 열악하고 세상의 기대치는 극히 높다. 그런데 목사님이 공개적으로 남의 가정사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린다면 답변은 십중팔구 <너나 잘 하세요.>일게다. 반면에 신부님이나 스님들은 결혼해 본 경험도 없고 자식 때문에 골치 아픈 일도 없으니 자신있게 상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비교 대상이 없다. 모르면 용감하다고나 할까? ㅎㅎ 스님, 신부님, 목사님, 부디 용서하십시오.
이런 강의를 듣다보면, 질문자는 모두 상대방 탓만을 하고, 정작 자신은 피해자다. 그런데 정작 자신을 학대하고 핍박하는 사람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임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먼저 내가 행복해야 한다. 내가 행복해야 내 가족도 행복하고 내 이웃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르 2세께서 서거하시면서 남긴 말씀이 “나는 행복합니다. 당신도 행복하세요” 이다.
세상만사 ~~, 뒤에 오는 단어는 무엇일까. 세상만사 천태만상, 도찐개찐, 일장춘몽, 둥글둥글, 새옹지마, 돌고 돌아, ~~ 그 무엇이 되더라도 내가 행복해야 한다. 황창연 신부님의 행복특강 중에서 100세 장수 시대를 맞이한 우리 세대들의 <행복 설계>편을 인용하면 “1. 곰곰히 생각하라, 노년에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 것인지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워라. 2. 운동하라. 내가 건강해야 한다. 3. 친구를 만들어라. 친구의 나이, 지위, 재산을 따지지 말고 사귀어라. 4. TV 시청시간을 줄여라. 80년 인생중에서 TV 시청 시간이 10년이라면 말이 되는가. 5. 공부하라. 6. 많이 웃어라. 7. 나 자신에게 잘하라.” 곱씹어봐도 지당한 말씀이다. 모두들 행복하세요..
저 바다에 누워 (08/07/2015)
어제, 오늘 연이틀 아내와 함께 바다에 갔다. 다음주에도 토요일, 일요일 바다에 갈 것이다. 꼭 가야할 이유도 없고, 꼭 오라는 사람도 없는데 나는 무엇에 홀린 마냥 바다를 간다. 나는 내가 사는 곳이 산과 바다와 가까움에 감사한다. 한 두시간 거리면 유명한 비치가 즐비하다. 해운대 백사장의 몇배나 긴 해수욕장이 많다.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바닷물에 들어갈 수 있는 날은 일년 365일 중에 극히 일부다. 대충 7월 20일부터 8월 15일 까지다. 그 이전이나 그 이후는 물이 차가워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니 휴가를 내지 않는 다음에야 이민 생활을 하면서 일요일날 바닷물에 들어갈 수 있는 날은 7월 마지막주, 8월 첫째주, 둘째주, 그렇게 서너번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어영부영 하다보면 바닷 물에 한번도 못들어가는 불상사가 생긴다.
내가 이렇게 기를 쓰고 바다를 짝사랑하는 것은 고향이 부산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부산 출신 중에 바다를 싫어하는 친구도 많다. 굳이 이유를 물으신다면 바다는 언제나 내가 필요로 할 때, 나와 함께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속상할 때, 우정이 서운할 때, 배신당하고 부서지고 깨지고, 잃어버리고 죽고 싶을 때,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을 때, 분노하고 고함지르고 싶을 때, 죽이고 싶을 정도로 용서가 되지 않을 때 나는 바다로 달려 갔다. 어릴 때는 어린대로, 늙었을 때는 늙은 대로, 한평생을 살면서 나는 시도 때도 없이 그렇게 바다에 갔다. 바다는 나의 습관이었고 나의 일부였다. 수척 높이의 파도가 절벽 아래로 굉음을 내며 부서지는 바위에 앉아 목이 터져라 고함도 질러보고 소리내어 울어도 보면 한없이 초라한 내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바다는 내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가더라도 결국은 나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다.
바다는 새벽 바다와 밤바다가 다르듯이, 여름 바다와 겨울 바다가 다르다. 한국 바다와 미국 바다가 다르듯이, 태평양 바다와 대서양 바다가 다르다. 한국 바다가 어머니 같다면, 이곳 미국 바다는 아버지 같다. 한국 바다는 아기자기 하다. 섬도 있고 방파제도 있다. 마을도 있고, 횟집도 있다. 여름이면 휴가 인파로 백사장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밤이면 젊은이들과 술과 노래소리로 흥청된다. 30년전만 해도 동해안의 이름 없는 해수욕장도 있었고, 벽지 외딴 섬도 있어 혼자서 텐트치고 며칠 조용히 보낼 수도 있었다. 어린 시절에 가족들이 해수욕장에 물놀이를 간다 함은 대규모 행사였다. 어머니는 새벽부터 가족들 도시락을 만드신다, 과자며 주점부리를 준비하시느라 바쁘시고, 어김없이 누군가는 수박 한통을 들고 만원 버스를 타야 한다. 자가용이 없던 시절이었으니 하루동안의 세간살이를 어린 자식들 5명 각자의 손에 모두 들리우고 움직여야 한다. 거기다 이웃집하고 같이 바캉스를 가야 하는 날이면 피난 행렬이 따로 없다. 버스에 다 함께 탈 수 없으면 어디서 만나자, 못만나면 다른 포스트 장소를 정하고 고함치고, 도착해서도 찾느라 한참을 헤매야 한다. 난리,난리, 그런 북새통이 따로 없다. 내 기억에는 어머니께서 바닷물에 온몸을 담그신 적은 별로 없었다. 아니 수영복을 입으신 사진이 없었던 거로 보면 확실한 것 같다. 이제 내 나이 육십이 되어 보니 어머니는 평생 수영복도 제대로 한벌 없으셨구나 하는 때늦은 죄송함이다.
대서양 바다는 광활함이다. 백사장도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고, 수평선도 막힘이나 끊김이 없다. 모래가 그야말로 백색 떡가루다. 물빛이 너무 맑아 물밑 발가락이 다 보인다. 억겁의 세월동안 한번 쉬지도 않고 밀려오고 부서지는 저 파도에 몸을 맡기면 한없이 작은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백사장 위에 각자의 파라솔 아래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다 보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평화>만 있을 뿐이다. 작렬하는 태양, 뜨거운 열기, 파란 하늘과 끝없는 수평선, 파도 타기를 하는 사람들의 작은 모습들, 아이들의 하얀 포말과 같은 웃음소리.. 정녕 8월의 바다는 시간과 욕망이 함께 멈추어 선 듯하다. 일시 정지 화면이다. 그래서 나는 8월의 바다가 좋다.
아내는 바다를 싫어한다. 아니 연애할 때는 바다도 산도 모두 좋아하는 줄 알았다. 싫어도 싫다고 말하지 않는 아내의 성격이다. 내가 가자고 하면 어디를 가든 함께 따라 나선다. 오늘도 바다에 와서는 물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물방개처럼 바다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내 모습을 보고 미소만 지을 뿐이다. 유투브로 음악 듣고, 인문학 강의 듣고, 책보고 그게 아내의 바다 생활 전부다. 바캉스 일과는 항상 일정하다. 주일 아침 예배보고, 커피 한잔, 김밥 2인분, 맥주 2캔, 치킨 8조각, 과일 한 그릇, 얼음물 한병, 간이의자 2개, 파라솔 1개, 타월 1장, 이것이 소지품 전부다. 입고 간 옷 그대로 입고 온다. 돌아오는 길에 저녁 하기 귀찮으면 아무 곳이나 들러 저녁 사먹고 들어온다. 극히 게으른 하루다. 그래서 나는8월의 바다가 너무 좋다. 야호호..
실천적 지혜 (07/31/2015)
현대인들은 급변하는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혹은 분노와 상실의 시대에서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 수 있느냐로 고민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최고의 선은 <행복>이었다. 행복은 무조건적인 추구의 목적이 되고, 그 자체로 바람직하며,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것이다. 행복하기 위해서 많은 사상가들이 고전적 지혜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 – 프로네시스 (Phronesis)> 에 근거로 대안을 제시한다. 해서 수박 겉핡기이지만 <실천적 지혜>에 대해 공부해 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의 생활(comtemplative life)>이 최고의 선이자 행복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하였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신의 관조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행복에 이르게 하는 인간의 <탁월성>을 <덕>이라고 하는데, 이는 <지적(知的) 덕(德)>과 <도덕적 덕>으로 구분한다. 지적 덕에는 ‘기술, 지식, 실천적 지혜, 이론적 지혜, 이성’으로 나누는데, <이론적 지혜>가 지식과 이성의 결합체라면, <실천적 지혜>는 지적 덕과 도덕적 덕을 연결시켜 주는 덕이다. <실천적 지혜>의 정의는 “인간적인 선에 관해서 참된 이치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말한다. 즉 행동하되 <선>이라는 목표와 방향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풀어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는 우리가 올바른 선택과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이는 ‘똑똑함’이 아니라 ‘탁월성 (excellence)’을 발휘해야 한다. 탁월성이란 ‘자제력, 공정성, 용기, 포용력’ 같은 기질을 일컬으며 달리 미덕(virtues)으로 불리운다. 단 탁월성이라는 실천적 지혜의 형성이 이론적 지혜 (지식과 이성)의 완벽한 이해를 전제하고, 오랜 삶의 경험을 가정한다는 점이다.
실천적 지혜는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사회 공동체의 미덕을 요구한다. 그러러면 <도덕적 자각>이 절실하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이해라는 서사 구조를 지닌 존재여서 ‘도덕적 상상력’과 ‘감정이입’이 요구된다. <도덕적 상상력>은 ‘다양한 상황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간파하는 능력’이며, <감정 이입>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는 정서적 기술’이다. 그러나 도덕적 자각만으로는 부족하여,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통찰력(자기 성찰)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우리는 행동을 조율하면서 적절한 균형을 추구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중용>이라고 표현한다. 산술적인 평균이 아니라 <공감과 거리둠>을 조율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는 덕이 되는 정서와 행위는 다음의 다섯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1 알맞은 때, 2 마땅한 일에 대해, 3 적합한 사람에게, 4 좋은 목적을 위해, 5 올바른 방식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다섯 조건을 만족시칸다면 중용의 상태이며, 최선의 조건이며, 덕이라고 한다.
<덕(德)>은 인간 생활과 관련된 <습관의 결과>라고 한다. 아들러(Adler)는 “습관은 지적 습관과 도덕적 습관으로 구분되는데, 지적 습관은 인식과 사고의 습관이고, 도덕적 습관은 욕구와 행동의 습관이다”라고 한다. 인간에게 선(善)이란 결국 <덕의 실천>을 통해 남에게 보여주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적 덕은 오랜 습관화를 통해 일어난다. 절제와 정의의 중요성을 안다고 해서 절제하는 사람, 정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실천하고 습관화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사람의 습관화는 과도나 과소가 아닌 중용으로 조화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통과 쾌락을 잘 다루어야만 유덕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론적 지혜는 간접적으로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직접적으로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즉 실천적 지혜는 행동 수반이 필연적으로 뒤따라야 하며, 이 행동이 행복추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커티스(Curtis)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에는 세가지 형태가 있는데, 첫번째는 쾌락을 추구하는 삶이고, 두번째는 명예와 정치적 평판에 따르는 삶이고, 세번째는 선과 지혜를 따르는 삶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했다. 이 세번째 삶이 신적인 개념인 <관조의 생활>이다. 그에게 실천적 지혜를 지닌 사람 (phronimos)은 좋은 인격을 지닌 사람이며, 덕을 완전히 구비하고, 인격의 탁월한 상태를 가진 사람이다. 또한 구체적인 생활 환경에서 어떻게 생활해야 되는 지 아는 사람이고,자신의 실천적 결정에 구체화된 가치들을 반성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에 대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실천>이다. 올바른 목적으로 문제를 관조하면서, 행동으로 도덕적 덕을 실천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 즉 <테오리아>라고 했다. 믿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실천하지 않는 믿음은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이론적 믿음, 즉 죽은 믿음이다. 그분의 말씀은 알고 이해하지만, 애써 외면하고 실천하지를 못하고 있으니 나의 믿음은 결코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 나의 믿음은 작은자 중에 가장 작은 자요, 낮은 자 중에 가장 낮은 자의 믿음일 수밖에 없다. 플라톤은 지혜로운 사람의 반대인, 나같은 자를 <우둔한 사람>이라고 한다.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고, 무엇이 더 좋은지 알면서도 실천 하지 못하는자.. 우둔한 자!!
젊어서 고생 (07/24/2015)
젊어서 고생은 사서라도 하라고 한다. 하지만 늙어서 고생은 할 짓이 못되는 것 같다. 젊어서의 고생을 <단련>이라고 한다면 늙어서의 고생은 <고행>이다. 60이 다된 아내가 이번에 유럽 배낭 여행을 아들과 다녀온 소감문이다.
15일동안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이태리 밀라노, 피렌체, 베니스, 로마를 오직 지도에 의존하여 다녀온 것이다. 21살 아들과 59세의 엄마는 둘다 배낭여행이 처음이다. 모자 (母子)가 계획을 철저히 짠다고 했지만 막상 현지에 도착하니 계획과 다르고 모든게 낯설다. 영국을 제외하고는 첫째 언어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다. 둘째는 최소 경비로 계획을 잡았는데 환전 수수료를 생각하지 못했고 현지의 식당 음식 비용이 미국에 비해 너무 비싸다. 떠날 때 스파트폰을 로밍으로 하지 않아서 길을 찾는데 헤매기 일쑤다. 경비를 아끼느라 하루에 평균 3만보 이상을 걸어야만 했다. 덕분에 유럽 현지 서민들의 삶도 구석구석 볼 수 있었다. 유명 관광지를 입장할려면 입장료는 차치하고라도 서서 기다리는 시간이 2시간 이상은 보통이다. 유럽의 여름 날씨는 유사 이래 가장 더운 불볕 더위다. 유럽은 지하철이고 식당이고 간에 어느 곳을 가나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 여행 경비와 인솔은 아들이 모두 책임 관리하라고 아버지가 명령했으니 시원한 물 한병을 사먹으려고 해도 아들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아들은 자신의 경비 산정이 잘못된 것을 알았지만, 정해진 경비 이내에서 여행을 마쳐야 하므로 제대로 된 식사 한번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계획된 여행 장소와 일정은 모두 사진을 찍어서 아버지에게 증명을 해야 하니 건너 뛸 수도 없다. 그래서 찍은 증명 사진이 무려 2천장이 넘는다. 잠자리도 게스트 하우스나 싸구려 민박집이니, 공동 샤워장을 사용하는 새장 같은 잠자리마져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미국은 소비 천국이라면, 유럽은 절제의 미학이었다. 한마디로 고생이란 고생은 퇴박이로 한 셈이니 말로 다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들도 아내도 딸도 모두 이번 여행에 만족하며 무사히 여행을 마칠 수 있었음에, 서로에게 감사하고 마지막 날 저녁에는 서로 손잡고 기도하며 울었다고 한다. 가족의 소중함과 서로에 대해 좀더 이해하고 배려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내가 의도한 바 대로 소정의 성과를 거둔 셈이다. 단 다음번 여행은 아내는 남편과 함께 페키지 여행을, 딸은 남자 친구와 함께, 아들은 혼자서 배낭여행을 다시 오고 싶다고 하니 내가 너무 가혹한게 아니었나 하는 죄책감 마져 든다. 제가 죄인입니다. 회개합니다.
귀한 자식일수록 여행을 보내라고 하지 않는가. 글쎄. 이번 여행을 통해 엄마와 자식들은 각자가 무엇을 깨닫고 얻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앞으로의 인생에 가족의 소중함과 삶의 중엄함과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체험적 산경험이 되었기를 소망한다.
마치다 소호 교수는 그의 저서 <야성의 철학으로 일하라>에서 “순탄한 환경에서는 통속적인 견해와 상식적인 발상 밖에 없는 사람도 큰 과오를 범하지 않고 지낼 수 있지만, 역경에 부딪히면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좌절한다. 필사적으로 생각하고 몸을 던져 행동하는 야성적인 인간이 필요하다. 남다른 전문성은 단순히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생기지 않는다. 실천적 성찰 (reflection –in action)과 성찰적 실천 (reflection –on action)의 과정을 반복하는 가운데 문제의 노하우를 몸으로 체득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노나까 이쓰미 교수는 <생각을 뛰게 하라>에서 “인-액션(in-action)은 행위를 하면서 이전의 행위를 숙고해 보고, 다음 행위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온-액션(on-action)은 스스로 취한 행동의 결과를 추후에 생각하고 반성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유영만 교수는 “걸으면 길이 열리고 생각이 트이며 마음도 새로워진다. 일온스의 실천이 일파운드의 관념보다 더 가치가 있다. 생각의 발로는 발로 부터 시작되며, 실천적 지혜의 출발점이다. 영어의 알파벳은 ‘a’로 시작하는데, 그것은 ‘action’이다”라고 한다.
이번 여행에서 아내는 “한시대에 세계 최강국들이었던 이 나라들이 수많은 나라들을 침공하고 약탈해 온 세계 유산들을 자기 나라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었다. 중세 교회들은 예수를 팔아서 종교 전쟁을 일으키고,엄청난 부를 축적하며 타락하였다. 르네상스 부흥 시대는 인간의 힘으로 만들었다고 믿기 어려운 그 아름다운 건축물과 그림들을 보면서 과연 얼마나 많은 서민들과 노예들이 희생되었을까, 교회 문짝 하나 만든데 26년이 걸렸다면 누구를 위한 성전이며 누구를 위한 교회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기독교가 수많은 돈을 들여서 더 큰 교회를 신축하고 증축하면서, 그러기 위해 성도들의 피땀 흘린 돈들을 온갖 방법으로 긁어 모으는, 일명 <부흥하는 교회>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교회인가. 그분으로 부터 응답을 받았다면 과연 예수께서는 심판 날에 그들을 용서하실까? 잘못이 반복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다. 결국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신도 못말리는 것이다. 그래도 그 후손들이 관광 수입으로 먹고 살게 하시니, 이 또한 신의 배려인가?
고독과 외로움 (07/17/2015)
오늘 저녁은 불고기 전골을 맛있게 만들었다. 요즘 사람들은 불고기를 별로 귀한 음식으로 여기지 않지만 나에게는 각별한 음식이다. 아버지께서는 요리를 하신 적이 없으신데, 꼭 불고기 전골 (일명 ‘스끼야끼’) 만은 직접 요리하셨다. 불고기는 별도로 갖은 양념에 살짝 볶은 다음에 참다랑어 국물에 각종 야채와 버섯, 두부를 살짝 익혀서 계란 노란자와 간장과 다랭어 국물을 섞은 소스에 찍어 먹는다. 일종의 ‘샤부샤부’와 비슷한데 맛이 색다르다.
이렇게 혼자 준비한 음식을 예쁜 그릇에 담고 식탁에 앉아서 석양을 바라보면 웬지 <쓸쓸함>이 밀려온다. 물론 며칠 뒤면 유럽으로 배낭 여행간 아내와 아들이 돌아오겠지만, 언젠가 이렇게 혼자서 긴 세월을 살아야 한다면 어떻하지? 하는 <두려움>마져 든다.
문득 <고독>과 <외로움>은 어떻게 다를까? 라는 생뚱맞은 생각을 한다. 고독(孤獨)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이다. 외로움은 ‘홀로 되어 쓸쓸한 마음이나 느낌’으로 되어있다. 사전적 설명으로는 도찐개찐이다. <고독>하면 떠오른는 사람이 <니체>다. 그는 현대와 같은 허무주의 시대의 청년 헤겔파다. 칼 마르크스, 지그문트 프로이드와 함께 19세기 <의심 학파>로 분류된다. 그는 왜 ‘신은 죽었다’ 라고 했을까? “세상에는 진짜보다 우상이 더 많다. 위험하게 살아라. 절대적 진리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를 알고 싶으면 끊임없이 질문하라. 안전을 추구하면 지적 청조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등등.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죽는 순간까지 그의 삶 자체가 고통이었고, 삶 자체가 사상이었다. 그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화가 모딜리아니, 빈센트 반고호, 장욱진, 이중섭, 베에토벤 등등, 수많은 시대의 천재들은 고독했다. 고독한 사나이 킬리만제로의 표범? 고독하지 않으면 창조적 삶을 살 수 없는 것인가? 우리세대의 청소년 시절에서는 철학 서적들이 <고독이라는 병>의 김형석 교수, <생의 철학>의 안병욱 교수, <저 물레에서 생명의 실이>의 이어령 교수 등이 기억난다. 참으로 아마득한 이야기지만 <고독>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날까지 놓아 버릴 수 없는 인간의 동반자가 아닐까. 해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그의 저서 <고독의 즐거움>에서 이렇게 말한다. “가능한 한 혼자 지내는 것이 유익하다. ‘남들처럼’이라는 말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자. ‘다들’은 어디에도 없다. ‘이 세상이 하는듯이’ 해서는 무엇 하나 이룰 수 없다.” 현대인이 보기에는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월든> 속의 그의 삶은 소식(小食)과 자급자족, 산책과 사색, 고독과 독서, 자연과의 교감, 무소유 그 자체였다. 법정 큰스님도 그러하셨지만..
하지만 현대인은 진정 고독한가? <외롭다>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쓸쓸함, 공허함, 허전함, 무상함 등등. 바쁜 일상 생활, 치열한 경쟁, 쫓기는 종속 관계, 비교에 따른 열등감과 우월의식, 맹목적 믿음과 타락한 쾌락주의, 인간 관계의 불신과 물질 만능, 이에 따른 소외감과 이탈감은 외로움과 우울감을 조장하는 것은 아닐까?
히로나카 헤이스케가 쓴 <학문의 즐거움>에 보면 “영어에 loneness (고독)과 loneliness (외로움)이라는 단어가 있다. 두 단어는 상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명확히 서로 대립하는 것이다. ‘외로움’은 ‘고독’으로 부터 도망치려 하는 인간의 감정을 나타낸 말이다. 고독을 잃었기 때문에 외로움이 생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어도 <고독>을 확고히 가지고 있으면 좋아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 어떤 삷과 어떻게 접하더라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신조다” 그는 외롭지 않기 위해서는 <공감>과 <거리둠>을 병행해야 한다고 한다. 그는 벽촌 장사꾼의 열다섯 남매의 일곱번째 자식으로 태어나 가난으로 대학을 갈 수 없었다. 그는 끈기 하나로 미국으로 건너가 하바드 대학에서 수학 박사학위를 타고,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필드상을 수상, 하바드 대학과 교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한 천재 수학자다. 나는 그의 저서를 통해 수학이라는 학문을 다시 생각한 계기가 되었지만, 모든 학문과 예술, 심지어 삶과 종교의 최종 정점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첨단 기술의 미래 사회는 뛰어난 기술적 전문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폭이 넓으면서도 깊이가 있는 인간적 전문가, 즉 <사람됨>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는 불교의 인연(因緣)을 이렇게 해석한다. “<인>은 ‘근원’으로 내적인 것이며, <연>은 외적인 것이다. 인과 연이 결합해서 모든 것이 생기고, 인연이 해소됨으로써 모든 것이 사라진다. 사람은 스스로의 체험적 지식인 <인>과 외부의 <연>이 만나서 희망이 되고 행동이 되고 결단이 되어 길이 만들어진다”라고 한다.
이제는 <홀로됨>을 즐길줄 아는 나이가 되지 않았나? 생각 없이 휩쓸려 다니고, 내가 아닌 다른 나를 보여주기 위해, 나타내기 위해, 신이 나에게 준 소중한 시간들을 지나가는 개도 쳐다보지 않을 <허세>를 뜨는데 소비할 수 없지 않은가? 살아 있다는 것은 부단히 무엇인가를 배우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창조적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창조적 삶>은 조그만 시작에서 출발한다고 한다. 고독하게 살아보자
야간 학교 (07/10/2015)
요즘 나는 아내와 <야간 학교>를 다닌다. 학교라고 해봐야 집 거실에서 TV로 영상 수업을 듣는 것이지만, 정녕 얼마만의 배움인가. 우리 부부는 73학번이니까 학부를 졸업한지 어언 40년이 가까워 온다. 이 나이에 다시 학교를 다닌다니 늦깎이 학생들이다. 각자 공책에 필기도 하고 교수의 강의를 이해하지 못하면 반복 재생으로 다시 복습하고, 또 배운 내용에 대해 아내와 토론도 한다. 얼마나 감사하고 좋은지 모른다.
배우는 학과목 강의는 <고전 인문학> 중심이다. 나는 흔히들 말하는 공돌이(공과대학) 출신이다. 인문학에 대해 공부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기껏 수강한 경험은 대학 1학년 때 교양과목으로 철학을 1년 수강한 것이 전부다. 그동안 살면서 몇권의 인문학 서적을 통해 알고 있는 지식이 전부다. 세상 참 좋아졌다. 유투브에 들어가면 각종 인문학 강의가 즐비하다.
인문학의 본질은 <생각>이라고 한다. 생각하는 고로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행복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결국은 나의 주체성, 존재성, 존엄성을 찾는 것이다. 이런 회의감이 든다. 초,중,고, 대학 총 16년이상의 공부를 하는 동안 과연 무엇을 배웠으며, 무엇이 내 기억에 남았는가. 그 공부의 본질에 대해 의문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열심히 암기하고 공부하면 성적이 좋아지고 그러면 좋은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졸업하고 나면 유명한 대기업에 들어가고, 거기서 또 필요로 하는 교육을 받고 승진하면서 생활이 보장받고, 그것을 성공이라는 가치와 목표로 삼은 것 뿐이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그 공부를 해서 내 자신과 사회에 무슨 보람과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렇게 죽도록 공부한 내용들이, 수많은 수학 공식과 물리, 화학, 전자공학과 기업체의 전문 교육들이 지금 이 나이에 이민자라는 특수 환경에서 무슨 소용이 있으며, 무슨 도움이 되었는가? 생각없이 공부했고 생각없이 살았다.
<생각하는 인문학>, <리딩으로 리드하라>의 저자 이지성씨는 우리 세대가 받았던, 아니 신자유주의가 받고 있는 현시대의 교육은 1800년대 초반 유럽의 프러시아에서 만들어진 교육제도라고 한다. 스스로 생각할 줄 모르는 바보를 만드는 교육, 즉 거대 자본가와 정부, 기업들의 명령에 그 어떤 의문도 품지 않고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국민을 길러 내고자 함이 프러시아 교육의 시발점이었다. 그렇게 프러시아는 독일로 이어지면서 거대 강국으로 만들었고, 그 제도가 19세기 미국으로 건너와 미국의 지배계급들이 피지배 계급들을 길들이기 위한 교육제도가 되었다. 그래서 미국의 교육은 지금도 두 분류로 나뉘는데, 지배계급은 그들의 자녀들에게는 고액의 사립학교를 만들어 고전 인문학과 세계 역사, 철학을 교육시킨다. 반면에 피지배 계급인 흑인, 히스페닉, 아시아계 이민자들 자녀에게는 공립학교를 만들어 산업 생산에 필요한 기술 위주의 주입식, 암기식 교육을 받게 함으로써 지배 계급이 대대손손 피지배계급을 지배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런 공립학교 교육제도가 한국 전쟁 후의 미군정에 의해 자연스럽게 도입되었다. 이것이 영혼을 병들게 하는 성적 최상주의 교육이 된 것이다. 한국 청소년들이 삶의 행복도가 가장 낮고 자살률이 가장 높은 이유도 잘못된 교육제도로 인해 청소년들의 영혼이 병들어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국 교육제도는 성적 (명문대, 돈)이 좋은 (많은) 사람이나 나쁜(적은) 사람이나 간에, 불행하게 공부하다가 불행하게 졸업해서, 불행하게 살다가 불행하게 죽는 사회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최진석 교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강의에서 사람은 항상 경계(警戒)에 서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가 믿고 있거나 알고 있는 보편적 이념(기준)이 스스로를 강제하고 복종하도록 만든다고 한다. 자발적 복종, 자발적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다. 흔히들 <진리>라고 말하는 보편적 이념은 성인(聖人)들이 남긴 술 찌거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편적 기준에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고 결함없는 인간이 어디 있으며 부족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삶은 <사건>이지,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건>은 살아 있으며, 항상 변하고 있기에, 그러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가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순수한 욕망, 착한 욕망의 실천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경계에 선다>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배움은 배움 자체로 끝나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결국은 실천하고 가르칠 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황혼의 이 나이가 고전 인문학을 배우고 생각하기에 딱 좋은 나이가 아닐까. 가족을 위해, 먹고 살기 위해, 성공하고 출세하기 위해, 나 자신을 버려야 했던 종속적 노예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나이다. 내 자신을 되돌아보는 자정(自淨)과 자숙(自肅)의 세월을 살았으면 한다. 서양 고전, 동양 고전, 세계역사와 한반도 역사, 철학과 종교를 아우르는 독서와 강의를 병행해서 열심을 다해 보자. 길은 걷는 자의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황혼의 새로운 길을 아내와 함께 하루 한시간씩 열공해 보시는건 어떨까요?
엄마와 아들의 여행 (07/03/2015)
어제 아내와 막내 아들이 유럽으로 배낭 여행을 떠났다. 아니 떠나 보냈다.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를 보름동안 다녀 오는 여행이다. 나는 아내에게 매년 1~2개월씩 힐링휴가를 보낸다. 올해는 당초 한국에 사는 큰 딸 내외와 함께 작은 딸이 공부하는 영국에서 모두 만나 유럽 여러국가를 여행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한국의 큰 딸은 손녀딸이 두돐도 되지 않아 해외여행하기에는 무리라고 하고, 나도 여러건의 계약이 진행중이라 도저히 시간을 뺄 수가 없어서 내년으로 연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오늘의 주어진 행복은 오늘 누려야 하며, 내일의 행복은 내일 누려야 한다.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미룬다고 오늘의 행복을 되찾을 수 있는건 아니지 않는가? 우리 부부가 늘 소망하는 행복은 극히 <작은 행복>이다. 휴일날 우리 부부만의 오솔길을 손잡고 산책하는 것, 향기로운 차 한잔과 함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잠깐의 여유, 각자 멀리 떨어져 사는 자식들과의 영상 수다, 함께 기대어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 맛있는 저녁을 함께 만들어 황혼의 석양을 바라보며 즐기는 저녁 식사, 등등 매 순간마다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작은 오늘>들이다. 내일을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몇년만 고생하면, 조금만 더 돈을 벌면, 자식들이 공부를 마치면, 이번에 승진하고 나면, 등등의 <IF>가 얼마나 허구적이며 허망한 것임을 늙은 나이가 된 지금은 알고 있다. 단 하루를 살아도 그런 허망한 시간을 살고 싶지 않음이기에 거창한 사랑이 아닌 <작은 사랑>에 소중하려고 한다.
당신은 어머니와 단둘이 여행을 가 본적이 언제인가? 몇년 전에 작고한 황수관 박사의 마지막 강의 <어머니의 사랑>을 기억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의 1위가 <Mother>, 2위가 <Passion>, 3위가 <Smile>, 4위가 <Love>, 그런데 <Father>이라는 단어는 70위 이내에도 없었다. 이 세상에 어떤 자식이라 할지라도 <어머니>라는 단어만큼 눈물나는 것이 있을까? 어머니는 어느 자식에게나 쉼터이자 피난처이며, 안식처다. 사실 나에게도 87세의 어머니가 한국에 계시는데, 작년부터 알츠하이머 병을 앓고 계신다. 멀리 미국에서 살고 있다는 핑계로, 수년동안 매달 생활비를 보낸다는 어줍잖은 자위감으로 못뵈온 적이 벌써 햇수로 4년이 되어 간다. 작년에도 꼭 한국에 나간다는 것이 다른 핑계로 또 못나갔다. 그런데 올해 들어 치매가 점점 심해져서 급기야 요양병원에 입원하고 계신다. 나는 요즈음 어머니와 통화할 때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엄마>라고 부른다. 다 늙은 자식이 <엄마>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래야 엄마가 아들을 더 잘 기억하실거라 위안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엄마한테는 못가면서 내 가족들과 유럽여행을 다녀올 수 있겠는가?
물론 아내에게는 이런 나의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아들이 앞으로 평생 살면서 아내와 단둘이 여행을 다녀올 기회가 몇번이나 있을까?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눈이 소담스럽게 펑펑 내리는 명동길을 엄마는 대학생인 나의 팔짱을 끼고 걸었는데 어머니의 얼굴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분위기 있는 찻집이며, 맛있는 레스토랑이며 이곳 저곳을 며칠이나 모시고 다녔다. 엄마와의 첫데이트였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맞으시면서도 활짝 웃으시는 모습이 흑백 사진 속에서 본 엄마의 처녀시절 모습 그대로였다. 엄마도 엄마이기 이전에 꿈많은 소녀였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결혼하고서는 어머니와 단둘이 여행을 간 기억이 별로 없다. 가족들 모두가 함께 여행을 떠날 때 모시고 가는 식구 중의 구성원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사업 실패로 죽음을 생각할 때, 어머니 집으로 내려가 어머니를 모시고 단둘이서 동해안 여행을 떠났다. 그때는 그 여행이 마지막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여행에서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사업에 실패하고 전재산을 날려버린 아들을, 그래서 죽음을 생각하는 아들을, 어머니는 <괜찮다. 아무런 걱정 하지마라, 우리 아들은 반드시 이겨낼거야>라는 말씀으로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엄마는 언제나 그렇게 내 마음 속에 영원하신 것이다.
그래서 아내에게 아들과 단둘이 유럽여행을 가라고 권한 것이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그냥 보내겠는가. 당연히 조건들이 붙는다. 최소 경비로 여행을 가라. 호텔은 안된다. 게스트 하우스나 싸구려 민박집에서 숙박하라. 한 곳에서 이틀을 숙박할 수 없다. 아들은 하루 일과를 한시간 단위로 계획 짜고, 필요한 경비를 산출하여 청구하라. 헬레니즘과 중세 유럽 시대, 르네상스 시대와 메디치 가문에 대해 공부하고 프랑스 역사와 시민혁명, 대영제국 배경과 산업화에 대해 공부하라. 실제로 아내는 나와 함께 르네상스 고전 인문학 강의를 열시간 이상 수강했다. 정말 골치아픈 남편이자 아버지다. 내가 요구하는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고 떠난 <엄마와 아들의 여행>인 만큼, 아름다운 추억을 많이 만들고 무사히 돌아오길 소망한다.ㅎㅎㅎ.
실패한 아티스트 (Artist) (06/26/2015)
아트(Art)는 사랑에 빠지는 일과 비슷하다. 어떠한 조건 때문이 아니라 무조건 좋은 것이다. 결과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 자신의 사랑에 열정을 다하고, 그 결과에 미련을 버리는 것이다. 아트는 과정과 방향에 대한 열정이지, 결과에 대한 열정은 아니지 않는가. 나는 지금의 아내와 35년째 사랑에 빠져있다. 나는 처음부터 나의 아내와 동성동본(同姓同本)인 것을 알면서 만났다. 아내는 나의 일본어 선생님이었다. 한국에서 동성동본은 결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사람은 사랑했다. 어머니 말씀처럼 세상에 많고 많은 여자 중에 왜 하필이면 그 여자인가?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처가집 가족들도 모두 반대했다. 아내는 결혼할 수 없는 남자인줄 알면서도 그 험난한 사랑을 선택했다. 두사람은 언제라도 헤어질 준비를 하고 사랑에 빠졌다. 나는 아내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맏아들이 그것도 장손이 그 여자를 무조건 사랑한다고 하니, 아버지께서는 승낙하시고, 두사람이 결혼할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만들어 주셨다. 그러기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도 아내와 헤어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서로가 목숨걸고 선택한 삶이니 서로가 행복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먼저 두려움을 실체를 이해해야 한다. 두려움을 그대로 바라보고, 연구하고, 맞닥뜨려야 한다. 두려움은 피하는게 아니라, 이해해야 할 대상이다” 변화의 힘은 막강하다. 그래서 변화하라고 말하기도 하고 자신이 변할려고 노력도 한다. 그러나 변화는 언제나 실패할 가능성을 동반한다. 하지만 변할려고 하는 목표가 내가 만든 목표가 아니라 사회가, 조직이, 공동체가 원하는 복종의 삶을 변화의 목표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지금 가난한 이유는 40대 때 나의 모든걸 걸고 올인한 사업이 실패한 것 때문이다. 그 이유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함 때문이다. 만약에 내가 목숨 걸고 아내와 결혼한 것 처럼, 내 사업에 목숨을 걸었다면 과연 <실패한 아티스트>가 되었을까? 나는 40세에 잘 나가던 대기업 부장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내 사업을 시작했다. 대기업 직장 생활은 상무, 전무가 되든, 부사장, 사장이 되든, 결국 남의 집 종살이고, 언젠가는 쫓겨나야 한다는 절박감이었다.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쳤지만 그것은 내 사업이 아니고 내 인생이 아니라고 느꼈다. 처음에는 <한국 총판>사업을 했다. 전국에 대리점을 30여곳 두고 국내, 국외 유명 어학 전자 제품을 판매하는 사업이다. 돈을 제법 벌었다. 하지만 총판 사업은 제품의 판매 여부를 떠나 무조건 본사의 요구 물량을 개런티해야 한다. 그래야 총판 사업권을 유지할 수가 있다.
그래서 내 회사 제품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한 것이 국내 최초의 <온라인 교육사업>이었다. 먼저 어학(영어) 과목과 수학 과목 두가지였다. 나의 전재산과 나의 모든 인맥을 동원해 총력을 다 하였다. 벌써 20년전의 이야기다. 그 당시에는 학습지 방문교육이 대세였고, 인터넷이 없던, 모뎀으로 통신하던, 밴처라는 용어가 없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한국은 고액의 사교육비로 문제지만, 가난한 집 아이도 본인만 똑똑하면, 특히 수학과 영어 과목은 초등학생이 중학교, 고등학교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믿었다. 초등학교 부터 대학교 까지 모든 수학은 6개 영역별로 나뉘어지며, 모든 문제는 각자 코드로 상호 연결된다는 것이 사업의 핵심이다. 연산을 모르는 아이가 방정식을 풀 수 없고, 함수를 풀 수 없다. 즉 수학과 영어는 스스로 선행학습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서울 초등학교 현직교사 40명이 문제 출제자로 참가하고, 전국 대리점 230개 사업주들이 공부방 형식으로 계약하고, 본사 소프트웨어 개발 직원들이 수십명, 아이들의 공부 흥미를 유발하기위한 게임 에니메이션 협력회사와 조인하고, 검색 엔진을 만들기 위해 대학 연구소와 교수들이 조인했다. 모두가 기꺼이 동참했다. <누구나 공부할 권리가 있다>라는 슬로건 아래 2년이내에 각자의 목표를 완료한다는 일념으로 동시에 출발했다. 목표의 70%~ 80%가 완성되어 가던 중, I.M.F라는 복병을 만났다. 아직은 회사의 수익 구조가 아니었는데 은행에서 대출금을 상환하라고 한다. 갖고 있던 부동산들 가격은 반토막이 나고 대출이자는 살인적이다. 본사 자금난으로 본사 직원 일부를 정리해고 한다. 그러니 노사분규가 일어나고, 대리점이 분열되고, 협력회사들도 자금난에 고충을 받는다. 총체적 위기가 닥친 것이다. 회사가 부도나면 나를 믿고 보증을 선 가족, 친구들이 피해를 본다. 부도는 막아야 한다. IMF는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두려움>이었다. 회사를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기로 한다. 하지만 모든걸 정리하니 빈털털이가 되었다. 다시 재기할 <용기>가 없었다. 그때 만약 내가 목숨을 걸고 직원들, 대리점들, 협력업체들을 설득했더라면, 일년만 더 버티었더라면 하는 결과론적 미련은 남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의 삶은 내가 선택한 열정과 창조적 삶이었므로 <실패한 아티스트>는 되었을 망정, <후회하는 아티스트>는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아티스트 (Artist) -2편 (06/19/2015)
아티스트에게는 여섯가지 주요한 자산이 있다. <신뢰, 공감, 독창성, 리더십, 사람들의 관심, 인간적 요소 (연결, 배려, 겸손)>가 그것이다. 이 여섯가지는 아티스트들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단호히 결단하고, 내적인 고통을 견디면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겠다는 확고한 의지로 이런 성공적인 결과물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는 비단 아트스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우리 모두의 자산이어야 하기도 하다.
<신뢰와 공감> : 사람들은 자기가 믿는 사람들의 말만 듣는다. 자기의 관심을 사로잡은 사람들과 거래하기를 원하며, 공감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귀울인다. 세상이 각박하고 삭막해 질수록 인간적인 느낌을 중시한다. 이것은 비지니스 컨설팅이라는 나의 직업과도 직결되는 중요한 포인트다.
<독창성> : 독창성이란 항상 새롭고, 검증되지 않고, 신선하고, 위험스런 것이다. 대개 사람들은 지루하고 뻔하고 흔해 빠진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으며, 시간을 낭비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의 칼럼을 쓰는 자세이기도 하며 가장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리더십> : 리더십을 반대되는 말은 <관리>다. 관리는 어제보다 더 빨리, 더 낮은 비용으로 원가 만들어내는 일이다. 복종을 미덕으로 삼고, 끊임없이 비용을 낮추고, 오차를 줄이는 일이다. 리더십에는 어떠한 지침이나 규칙도 없고, 호통치는 상사도 없다. 또한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려 하지도 않는다. 스스로 새로운 일들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 스스로가 <자유인>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다.
<사람들의 관심> : 향후 세계는 인터넷이나 다양한 채널들로 열려 있는 세상이다. 수많은 후보자들이 자신을 선택하라고 떠들어댄다. 그래서 신뢰와 관심은 무척 희귀한 자산이 된다. 관심과 신뢰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창조적 삶으로 인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다.
<인간적인 요소> : 연결, 배려, 겸손이 대표적 요소다. 대중은 여전히 값싸고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물건들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적인 요소가 결여된다면 사람들은 외면할 것이다. 서로를 연결하고, 다른 사람을 우리의 <일원>으로 만들어 주는 순수함에 이끌린다. 이것은 사업을 하거나, 이민자가 지역에서 조그만 장사를 하더라도 반드시 명심해야 할 덕목 사항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육체 노동이 아니라 감정노동으로 형성된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과 감사하는 마음을 얻고, 그들의 영혼 깊숙이 파고들려면 감정노동을 토해야 한다. 노동으로 돈은 벌 수 있지만, 박수갈채는 받지 못한다. 당신의 페이스북에 얼마나 많은 친구가 있는지, 트위터에 얼마나 많은 팔로워가 있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참된 친구도 아닐 뿐더러 진정한 추종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내일 당신의 자리로 돌아오지 않을 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그리워 할 것인가이다. 오늘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되묻는 상당한 무게감이다. 연결 경제에는 자발적 <감정노동>이 필요하다. 감정노동은 인간의 존엄성에서 시작된다. 아트는 기술이 아니라 개념이 본질이다.
세스 고딘은 “<도마뱀의 뇌>를 흔들어라”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좋은 성적, 좋은 직장, 좋은 경력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항상 정답이 존재하며, 성공을 얻기 위해 정답을 찾는다. 완벽하게 외우고 철저하게 준비한다. 도마뱀의 뇌는 여유로운 직장에 집착한다. 도마뱀의 뇌는 두려움과 반사작용, 분노와 성욕을 담당하는 부위다. 원시 때부터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으나, 무척 어리석고 겁이 많아서 걸핏하면 경고등을 켠다. 오랜 세월동안 안전 지대가 안락지대였기 때문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우리는 철저히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배운대로, 들은 대로 따라하면 된다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이다. 가장 합리적인 행동은 아트라는 비합리적인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척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이제 지겹지도 않은가? 모험을 두려워 하지 않는 밴처 사업가나 성공신화의 사업가들도 진정한 아티스트다. 인간적인 측면을 주목하고, 스스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연결하여 사업을 일으킨 사람들이다. 아티스트는 감정노동을 하고, 지도없이 뛰어들고, 어둠 속에서도 용감하게 항해하며, 위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랜 세월동안 <도마뱀의 뇌>가 되도록 훈련 받아왔고, 그렇게 살아야 안정된 삶이 보장되는 것으로 믿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두려움을 수반한다. 세스 고딘은 <고통을 즐겨라>라고 말한다. “용기란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로 표현하고, 그러한 생각을 지키려는 의지를 뜻한다.” 자신의 견해를 고수하는데는 위험이 따르므로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아티스트 (Artist) -1편 (06/12/2015)
우리에게 아티스트(Artist)라고 하면 예술 작품을 창작하거나 표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을 연상한다. 화가, 음악가, 작가, 조각가, 디자이너, 전위 예술가 등이 일차 대상이다. 요즘은 범위가 광범위해져서 콘셉트 아티스트, 스토리보드 아티스트, 페인팅 아티스트, 심지어 네일 아티스트, 요리 아티스트 등, 종류도 다양하다. 총체적으로 이들을 <예술가>라고 칭한다. 하지만 세스 고딘은 앞으로의 세상은 창조적인 일을 하는 모든 사람을 아티스트라고 규정한다. 심지어 한국에는 <창조 경제>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창조적인 삶>에 대한 원조는 고전 인문학에서 미켈란제로가 말한 “Live creatively, and Die gracefully.” 즉 “창조적인 삶을 살다가 아름답게 죽자”가 아닐까. 창조적인 삶은 내 스스로 만들어 가는 삶이다. 누구의 지시나 강요에 의해서, 회사의 메뉴얼이나 복무 규정에 따라,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서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업무를 정해진 시간동안 하는 것을 창조적 삶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 일용직 근로자의 “노동만 있을 뿐 나의 삶은 없다”라는 절규처럼 대부분의 현대인은 생존하기 위해 단순 막노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과연 창조적인 아티스트의 삶은 쉬운 길인가? 나는 딸아이 둘 모두가 예술분야를 전공하고 그 분야에서 일들을 하므로 어깨너머로 조금은 알고 있다. 예술(Art)은 평생을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하고 도전해야 한다. 예술가가 가야 할 길이 이렇게 힘들고 먼 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말렸을 것이다. <창조>는 참으로 힘들고 고단한 삶이다.
그런데 향후 현대사회는 우리 모두를 진정한 아티스트가 되길 원한다. 대량 생산의 산업화 시대에서는 거대한 공장의 기계 부품처럼 우리 모두를 획일화와 주입식, 암기식 공부와 복종적 삶을 요구했다. 하지만 산업화 시대는 저물고, 창조 시대가 도래했다. 오스카 와일드는 아트(Art)를 ‘새롭고, 복잡하고, 필수적인 것’이라고 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아트는 유전자를 타고 나거나 특별한 재능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틀을 구축하고, 사람과 아이디어를 연결하고, 정해진 규칙없이 시도하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트다. 정답이 아니어도 자신있게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고, 안전한 길을 버리고 위험 속으로 과감히 뛰어들며, 일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모두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야말로 우리 사회가 요구하고, 우리가 목표로 해야 하는 아티스트의 모습이다. 즉 아티스트란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용기와 통찰력, 창조력과 결단력을 갖춘 사람이다.
우수한 품질의 제품은 더이상은 희귀한 물건이아니다. 뛰어난 인재도 많다. 다양한 제품과 인재를 얼마든지 선택하고 고용할 수 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희귀함>이란 <연결과 신뢰, 놀라움>이다. 인터넷과 첨단 정보 기술의 발달은 향후 시대의 예측을 극히 혼란스럽게 만든다. 변화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혁명은 완전한 카오스를 동반한다. 그래서 혁명적인 것이다.” 우리가 <혼돈>이라고 번역되는 카오스 (chaos)는 그리스 신화의 헤시오도스 우주 발생론에 근거한다. 우주 발생론은 비단 구약 성경의 창세기에서만이 아니라, 현대 과학의 빅뱅 이론, 각 종교들, 각 나라의 신화, 심지어 단군 신화에도 등장한다. 실질적 우주 창조는 창조주만 아시겠지만.. 이 그리스 신화에서는 우주가 만들어질 떄 최초로 만들어진 것이 <카오스 = 텅 빈 공간, 대공허 또는 무, 절대 공간>를 말한다. 그 다음이 현세, 사후 세계, 사랑이 차례로 만들어진다. 그 다음 대기, 낮과 밤 (시간), 하늘과 땅, 강이 차례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카오스>는 무엇이 만들어질지 모르는 혼란 속의 공간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 향후 세상은 대 혼란의 시대가 된다는 것이다. 과장해서 무엇 하나 보장되는 것이 없고 확정된 것이 없다. 따라서 <카오시즘>은 혼란 속의 질서이자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아트라고 할 수 있다.
‘새롭고, 실질적이고, 중요한’ 이란 수식어는 아트를 정의하는 세가지 요소다. 향후 세계는 공장, 건물, 제품, 근로자, 아이디어가 핵심 가치가 아니라 <연결 경제>가 키워드다. 이러한 연결 경제의 통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트다. “아트는 힘들고 위험하고, 깜짝 놀라게 만드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열정>이 필요하다
세스 고딘에 의하면 진정한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서는
- 기존의 질서를 허물고 무너뜨리고 바꿔라. — 그러기 위해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복종이 아니라 성취가 중요하다. 더 높은 꿈과 도전 의식이 필요하다. 춤추는 꼭두각시가 되어서는 안된다.
– 이제 지도(정답)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답을 찾는 일은 아트의 적이다. 이카루스가 낮게도 날지 말고 높게도 날지말고, 중간 높이로 날아야 한다는 안전 지대는 없다. 얼마의 높이로 날아야 하는 고도(지도)는 없다.
– 아트는 선택받음으로써 느닷없이 찾아오는 성공이 아니다. 따라만 해서 이루어지는 일도 아니다. 평생의 습관이자, 계속해서 더 많은 새로움을 창조하도록 스스로 격려하는 점진적 습관이다.
이카루스 전설 (06/05/2015)
몇회에 걸쳐 세스 고딘의 저서 <이카루스 이야기>를 바탕으로 <변화와 창조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세스 고딘은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경영 구루이며, 온라인 마케팅의 천재, 정보화 시대의 최고 기업가, 기업 컨설팅 전문가, 유명강사로 불리운다.
먼저 <이카루스> 그리이스 신화에 대해서 알아보자. 이카루스는 크레타섬의 명 건축가이자 못만든게 없는 발명가 다이달로스의 아들이다. 해상무역의 본거지인 그리이스 크레타섬의 미노스 왕이 전쟁에 나간 틈에, 왕비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서 선물의 징표로 받은 숫소와 바람이 나서 임신을 하게 된다. 이렇게 반인반우로 태어난 아들 미노타우로스를 영원히 가두기 위해 다이달로스에게 인류 최초의 미로를 만들게 한다. 그후 그는 미노스 왕의 뜻을 거역한 죄로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그 미로에 갇히게 된다. 그곳에서 다이달로스는 기발한 탈출 계획을 세웠다. 그는 새의 깃털을 모아 큰 날개를 만들고, 자신과 이카루스의 몸에 완성된 날개를 밀랍(양초)으로 붙힌 후 탈출을 감행한다. 그는 아들 이카루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바다와 태양 중간을 날아야 한다. 너무 높이 날아 오르지 마라. 너무 높이 날면 태양의 열기에 네 날개의 밀랍이 녹아서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너무 낮게 날지도 마라. 너무 낮게 날면 파도에 날개가 젖어 바다에 빠져 죽을 것이다.” 이들이 날아 올라서 미궁을 탈출한 후 아버지 다이달로스는 중간 높이로 날아가 성공적으로 시실리아 까지 무사히 도망친 반면, 아들 이카루스는 하늘을 날 수 있다는 들뜬 마음에 자꾸만 태양을 향해 더 높이 올라갔다. 결국 이카루스의 날개는 밀납이 녹으면서 바다에 추락해 죽고만다.
이 신화의 교훈은 “왕명을 거역하지 말라. 아버지 말씀을 어기지 말라.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말라. 그리고 자신에게 신의 능력이 있다고 자만하지 말라.”로 압축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세대가 살아온 산업화 사회는 높이 날지 말라는 <자만>은 죄악으로 꼽으면서도 <너무 낮게 날지 말라>는 제거해 버린 것이다. 즉 적은 것에 만족하는 <겸손>을 강요한다. 높게 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이 낮게 나는 것인데도 말이다. <안전하다>라는 착각은 낮은 기대와 소박한 꿈에 만족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면서 안전하다는 느낌으로 살아간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위험을 피하는 데만 급급해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산업화 사회의 자본주의는 백년 이상을 거대한 자본의 권력 아래 종속시키기 위해 갈고 다듬어진 제도이다. 우리는 이 제도에 길들어진 노예들이다. 즉 대량 생산과 생산성 향상, 이윤 창출이라는 목표 아래 점점 학교 교육은 산업에 필요한 기술을 배우게 하는 기술자 양성기관이 되었다. 인문학과 철학, 역사, 윤리는 사라지고 첨단 기술과 전문 기술자를 요구한다. 학비는 터무니없이 올려놓고 학비를 고금리로 빌려준다. 기업에서도 당근과 채찍을 강요한다. 고액의 연봉, 승진, 안정된 직장, 연금, 우리사주 등의 당근을 통해 줄을 서게 한다. 그 줄에서 벗어나면 모든 혜택을 빼앗는다는 협박이다. 그러니 우리 세대는 <획일화와 복종과 겸손>에 익숙해진 세대다. 안전이 보장된다고 믿었던 세대다. 하지만 작금의 산업화 말기 증상은 보장된 것도 전혀 없고, 살기는 점점 더 어렵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시점이다.
세디 고든은 삶을 <안전지대(safety zone)>과 <안락지대(comfort zone)>로 나눈다. 안전지대는 예로 당신의 비지니스나 삶이 우호적인 환경에서 순조롭게 굴러가는 영역을 말한다. 하지만 안전지대는 정치, 경제, 사회, 기술적인 외부 환경에 따라 영향을 받으므로 안전지대도 당연히 이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안락지대는 당신이 내면적으로 편안하게 느끼는 영역을 말한다. 그 안에서는 긴장감이나 실패의 두려움도 크지 않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에게 익숙한 영역이어서 습관적으로 행동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변하였다. 즉 안전지대는 이동했는데 당신의 안락 지대는 종전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안전지대는 우리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과 달라졌다. 새로운 안전 지대는 아트와 혁신, 파괴와 재탄생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 한인 사회도 이러한 문제에 봉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변화와 혁신이 필요한데 아직도 10년전, 20년전의 고루한 사업 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사업이 날로 위축되고 있다면, 태양을 향해 높은 곳을 향해 비상하기는 커녕, 적은 수익에 만족하는 물 위를 아슬아슬하게 날아가는 위험한 비행을 한다면, 그곳은 더 이상의 안전지대가 아닌 것이다. 다만 오랜 이민 생활동안 해 오던 사업이라 타성에 젖어 안전하다고 느낄 뿐이다. 이대로는 더 이상의 승산이 없다고 판단되면 바로 그 순간이 변화를 해야 하는 출발점인 것이다. 저자는 “자유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잇는 능력을 말한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려는 의지를 말한다.”라고 한다. 실패가 두려워 기존의 안전지대를 고수한다면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한인 사회의 사업이나 삶이 변하지 않으니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다.
실향민 (失鄕民) (05/29/2015)
얼마전 교회에서 지역 주민을 위해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를 상영했다. 나는 그 영화가 천삼백만 관객을 돌파한 흥행작 이라던지, 산업화와 경제 개발이라는 낡은 이데올로기로 구태어연한 정치적 노림수 라던지, 먹고 살기 위해, 가족들을 위해 희생 세대였다는 넋두리가 아닌, 고향을 잃어버린 한 가족의, 한 남자의, 한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를 보았다.
나는 이북 실향민의 자식이다.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 그 영화 속에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았다. 그리고 그분들이 그리워 눈물이 흐르고 또 흘렸다. 영화와 또 다른 나의 가정사를 말하고자 한다. 6.25 전쟁 당시 나의 어머니는 흥남 출신으로 20세, 함흥 약대 1학년 여학생이었고, 아버지는 함흥 출신으로 서울의대를 졸업과 동시에 육군 군의관으로 26살에 전쟁에 투입되었다. 1950년 12월 미군의 흥남 철수 작전시 흥남 시민들에게는 중공군 30만명이 밀고 내려 오는데, 처녀라는 처녀는 모두 작살을 낸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전쟁이 곧 끝난다고 믿었고 남북이 지금까지 분단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조차 못했다. 해서 결혼한 언니 (나에게는 이모)가 사는 부산으로 몸을 잠시 피해 있으라는 부모님의 권유로 처녀 혼자 몸으로 흥남 부두에 나간 것이다. 그때 배를 탈려고 밀려온 인파가 족히 10만명은 되었다고 하니 상상도 할 수 없다. 노래 가사대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바람찬 흥남 부두다. 그러나 피난민들이 바로 배를 타지 못하고 며칠을 굶주리며 있다는 말을 전해들은 어머니의 어머니 (나에게는 외할머니시며 그 당시48세였음)가 떡을 만들어 머리에 이고서는 막내딸에게 주러 왔다가 되돌아 가지 못하고 그 길로 딸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신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메러더스 빅토리호를 서로 타기 위해 아수라장이며 생지옥을 방불케 한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렇게 집에 남겨진 가족들과는 영영 생이별을 하신 것이다. 탑승 정원이 60명인 배에 1만4천명이 승선했으니 그 아비귀환은 지구 역사상 유례가 없었을 것이다.
배는 거제도에 도착하고, 우여곡절 끝에 언니가 산다는 부산에 도착하니 그곳이 국제시장 옆 동네인 충무동이라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중매로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시고 나를 낳으신 것이다. 그러니 충무동, 자갈치 시장, 국제시장은 이북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집단 거주 지역인 셈이고, 나에게 매우 익숙한 곳이다. 그곳에서는 함경도 사투리를 흔하게 들을 수 있었고, 실향민들은 모두가 친척이었다. 서로를 아바이, 아마이, 아주바이, 아주마이로 불렀기에 그래서 나는 지금도 사촌 이상의 촌수를 잘 알지 못한다.
내 기억으로도 실향민들은 누구나를 가리지 않고 참담한 여건 속에서 억척스럽게 살았다. 가진 돈도 없었고 혈연 지연도 없었다. 1951년 6월 소련이 휴전협정을 제안했지만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국경 분할권으로 전쟁은 2년을 더 끈 덕분에 한국은 온 강산이 잿더미로 변한다. 6.25전쟁으로 인해 군인 사망자가 160만명, 민간인 사망자가 99만명, 이산가족이 수백만명, 경제 규모가 120개국 중에서 119위였다면 무슨 희망이 있고 가능성이 있었겠는가. 지금의 아이티나 아프리카 최빈민국 정도라면 짐작이 될까. 그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분들이 지금의 70대 이상의 분들이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분들이 그들이다. 영화는 4개의 시대적 패러다임으로 나눈다. 흥남 철수와 피난민 시절, 독일 광부 시절, 월남 파견 시절, 이산 가족 찾기 시절이다. 물론 한정된 영화 시간 동안 표출하지 못한 시대적 정치적 배경의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승만 시절, 4.19 학생 의거, 5.16 군사 혁명, 새마을 운동, 유신 헌법과 군사독재, 등등. 하지만 지금의 노인들이 그 시대를 살아오면서 자신의 삶이 아닌, 가족을 위한 헌신적 삶이 왜곡되고 폄하된다면 우리도 내 자식들에게 그런 대접을 받을 것이다.
우리 이민자 모두도 역시 실향민이다. 영화 속의 대사인 “그 험한 일을 우리 자식들이 아니고, 우리가 겪어서 다행이다.”라는 덕수의 대사에 대해 현대 젊은 비평가들은 “고생을 모르는 너희 세대가 무엇을 알겠느냐?”로 곡해 해석한다. 기존 세대들의 기득권과 희생 논조의 구태의연함이라 폄하한다. 또한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의 이산 가족 찾기도 기계적 울음과 신파조 되새김이라고도 지겨워 한다. 하지만 아픔을 겪지 않은 사람이 눈물을 공감할 수 없듯이, 실향민의 그 설움과 아픔을 왜곡하거나 억지로 외면 해서는 안된다. 아픈 역사를 외면하는 민족은 또다시 반복되는 아픔을 미래에도 겪기 때문이다. 한국인과 유대인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부모 형제가 그리워도, 고향이 그리워도 만날 수 없고 갈 수 없었기에, 수많은 밤을 우리 몰래 등 뒤에서 눈물로 지세우셨다. 아버지도 살아 생전에 이북에 계신 할아버지께 목놓아 울부짖으셨을 것이다. “아버지, 약속 잘 지켰었지예. 이만 하면 잘 살았지예, 그런데 저 진짜 살기 힘들었거든예.” 이 대사는 동시대 한국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동일한 절규일 것이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부디 건강히 오래 오래 사세요..
젊음에 고함 – <마지막편> (05/22/2015)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말로 가뜩이나 힘든 자네를 더욱 지치게 한 것 같아 미안하네.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행복의 나라로 가는 길은, 지금 자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말씀대로 자네 스스로 <힘을 기르소서, 힘을 기르소서> 이 말씀 뿐이네.
전후 세대인 우리 늙은이들과 자네 세대와 비교하면 지금이 훨씬 살기가 윤택해졌지. 첨단 문명의 이기와 물질의 풍요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아무리 가난하다 하여도 전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살고 있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우리 이민자들은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에서 최고의 삶을 누리고 있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왜 사는게 더 힘들어졌을까? 왜 더 여유가 없고, 불안할까?
우리 세대는 대량 생산체제인 산업화 시대였으므로 모든게 예측 가능한 고용 안정시대였지. 가난한 집안 아이도 본인만 똑똑하고 열심히 공부하면 일류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고. 전공에 따라 유명 전문가가 될 수도 있었으며, 대기업에 취직하면 변수가 없는 한, 승진과 출세도 보장이 되었으니 본인의 미래를 예측할 수가 있었네. 고용인과 피고용인 간에 필요충분 조건이 맞아뜨러지니 신뢰 관계가 성립되었던거지. 또한 신경제가 과도기적인 시기였으므로 부자가 될 기회도 많았었고, 무슨 장사를 해도 돈을 벌 수 있었던 시절이었지. 또한 분배의 선순환 구조였기도 하지. 한국이나 미국 모두 최고 호황기었지. 하지만 지금의 신경제는 수많은 상품과 신기술들이 빠른 속도로 급변하는 시대에 살고 있네. 더 좋은 상품을 더 저렴한 가격에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므로 일등만이 살아남고 그 나머지는 소비자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그러니 기업체도, 부자도 내일이 보장되지 않고 내일을 예측할 수도 없으니 가난한 종업원을 책임질 수 없고 상호 신뢰 관계도 깨어지게 되었네. 자네 세대는 믿을 곳이 어디에도 없네. 오직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자네 자신 뿐이네. 미국의 부자가 가난한 자보다 일을 더 많이 하고, 대졸 출신이 고졸 출신보다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을 알고 있나? 미국인이 유럽인은 물론, 일본인 보다 일을 더 많이 한다는 걸 알고 있나? 빈부의 격차가 점점 더 심해지는 이유는 사회 제도적 모순도 있지만, 부자 스스로가 불안하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하기 때문이야. 오늘은 부자지만 내일도 부자일거라는 보장이 없기에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많은 돈을 벌려고 하는거지. 햇볕이 좋은 날 건초를 더 준비하는 격이지.
그러면 가난한 집안의 자네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열심히 공부해서 창의성을 갖춘 전문가가 되는거야. 로버트 라이시 교수는 그의 저서 <부유한 노예>에서 이렇게 말하지. “신경제에서 최대의 가치를 얻어내는 사람은 컴퓨터나 정보 관련 기술에 능숙한 <지식형 근로자>가 아니다. 창조력을 가지고 혁신을 추구하는 <창조적 근로자>가 필요한 것이다. 혁신의 분류에는 두가지가 있는데 <기크(geeks)형>은 특정분야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창조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며, 또 다른 부류인 <슈링크(shrinks)형>은 Market 이나 고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고 대안을 제시할 수있는 사람을 말한다.” 지금은 <자기 브랜드 시대>라네. 그 무엇이 되었던 간에 누구나 할 수 있는 단순 근로자는 빌어먹는 각설이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는 결코 가난에서 벗어날 수가 없네.
현대인들은 흔히들 행복하게 살기 원하지. 행복하기 위해서는 <삶의 균형과 조화>가 필요하다. 삶에는 생계형과 삶의 질로 나뉜다. 그런데 생계가 보장되지 않는데 삶의 질을 논할 수 있을까? 생계가 전제되지 않는 삶의 본질은 허무한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 <내려놓음>과 <나눔>은 부자들의 여유이며, 가난한 자들의 허구이다. 종교가 소수 가진자의 전유물이 되고, 선뜻 가난한 자들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다. 가난한 자의 삶은 풍요로운 삶의 조화를 이루기 힘들다. 가난한 자가 풍족한 삶을 즐기면서 돈을 많이 벌 수는 없다네. 공부를 하던, 장사를 하던, <힘>을 길러서 <돈>을 만들어야 하네.
아주 중요한 일과 아주 중요하지 않는 일을 나누어서, 아주 중요한 일을 우선으로 선택해서 하게나. 그래도 시간이 모자랄 것이네. 인맥을 잘 관리해라. 부자는 부자끼리 모인다. 죽는 날까지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전문성을 계속 키워야 한다. 내가 평생 하고 싶은 분야를 가능한 빨리, 그러면서도 신중하게 결정해라. 그리고 내가 평생 존경할 멘토들을 정해라. 그분들의 생애와 업적을 연구하고 분석하여, 내 삶의 지표로 삼아라. 내 자신이 겸손하여야 존경심이 생기고, 그래야 내 자신이 변화된다. 그래야 선한 삶을 살 수 있고, 종국에는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도덕성이 붕괴된 부의 축적은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네. 그러니 삶의 가치관이나 목적이 이끈 삶은 말씀대로 사랑하며 선하게 사는 삶이어야 하네. 결코 포기해서는 안되네. 건투를 비네..
젊음에 고(告)함 -5편 (05/15/2015)
현대 자본주의가 공평한 기회라는 가면과 평등한 사회임을 위장하고 있음은 자네도 자각하고 있을 것이다. 평등하게 태어나지도 않지만 평등하게 살지도 않는다. 하나님이 인간을 이토록 사랑하사 창조하신 것은 맞지만 평등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환경과 조건이 각자 다르지. 과거처럼 현대도 <계급 사회>다. 현대 사회도 귀족, 양반, 중인, 서민, 천민으로 <신분>은 계급화 되어있다. 같은 신을 모시고, 같은 교회를 다닌다고 그 신분이 동등한 것은 아니다. 흔히들 신분을 <사다리>라고 표현하지. 자네도 친구들과 심심풀이로 <사다리 게임>을 해 본 적이 있을거야. 사다리 타기에는 두가지 부류가 있다. 한가지는 <자기 신분용> 사다리가 있고, 다른 하나는 <신분 이동용> 사다리가 있다. 이를 <신분 상승용>이라고도 하지. 자네가 타고 올라가는 사다리는 불행히도 그 높이가 그다지 높지 않아. 대부분의 서민들은 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다가 생을 마감하지. 설령 그 사다리의 꼭대기까지 올라 갔다고 하더라도 내 신분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동급에 비해 좀 낫다는 정도? 신분을 이동 내지는 상승할려면 다른 사다리로 바꿔 타야 더 높이 올라갈 수가 있지. 하지만 내가 아무리 사다리를 바꿔 타고 열심히 노력해도 오를 수 없는 한계점을 <유리 천장>이라고도 하지.
가난한 서민들의 가장 보편적 이동방법은 내 자신이 열심히 공부해서 사회가 인정하는 신분을 획득하는 방법이다. <전문가>가 되는 길이지. 의사, 변호사, 교수 등등 말아야. 다른 하나는 열심히 장사(사업) 해서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내 자신이 스스로 피나는 노력과 도전을 통해 내 스스로 사다리를 바꾸는 것이다. <위대한 게츠비>나 현대의 많은 자수성가형 부자들 처럼 악착같이 돈을 벌어 부자가 되는 것 말이다. 그외 다른 방법은 <아메리카의 비극>의 주인공처럼 부자와 결혼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분 위장>에 지나지 않지. 하지만 그런 결혼 생활이 행복하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위장 결혼은 사랑이기 전에 <조건 계약>이기 때문이다. 주고 받을 조건이 깨어지면 거래도 깨어지는 것이다. 속칭 ‘사랑이 밥 먹어여 주나?’ 라고들 하지. <공정 거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내 스스로 노력해서 좋은 학벌에 좋은 직업을 가지고 유사한 계급의 부자집 사람과 결혼한다면 한꺼번에 여러개의 사다리를 상승 이동하는 대박일수도 있겠지. 하지만 예로 부터 ‘보리쌀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 안한다’라는 말이 있네. 내 가족은 죽는 날까지 내가 책임진다는 강한 전투력이 남자의 조건이자 자존감이지.
자네는 젊지 않은가.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지 않은가. 늙은이와 달리, 젊음의 강점은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야. 무모한 도전이라도 좋아. 꿈을 크게 가지고 돌진하는거야. 정면 돌파하는거지. 경륜과 자금과 지식이 부족한 젊은이가 어찌보면 실패하는게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 실패만큼 훌륭한 스승은 없다네. 해 보지도 않고, 시도조차 해 보지도 않고, 머리 속 생각만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네. 30대를 지나 40대에 들어서면 도전하고 싶어도 실패가 두려워 현실에 안주할 수 밖에 없고, 삶의 무게로 인해 현실과 타협할 수 밖에 없네. 그러니 무엇이든 지금 당장 자네가 하고 싶은 일에 과감히 도전해 보길 권하네.
도전하기 전에 무엇을 해야 최고가 될 수 있을지 결정하게. 공부할 머리가 아니면 공부를 포기하게. 평범한 대학을 평범한 성적으로 졸업하면 평범한 월급쟁이 밖에 더 되겠는가. 공부를 할 것 같으면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된다는 각오로 공부하게.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으면 다른 전문 분야에 소질이 있는지 빨리 파악해서 도전하게. 공부가 아닌 다른 분야는 그야말로 천재성이나 소질이 뛰어나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기능공에 지나지 않게 되네. 특히 예술 분야나 체육, 인문학 분야는 경쟁이 가히 죽음이라네. 그래서 공부가 제일 쉬웠다고 하는거야.
공부도 관심없고, 특별한 재능도 없으면 젊었을 때 장사를 시작해 보게. 돈을 벌어보라는 거지. 단 죽기 살기로 일하고 또 일하고 절약해서 자네 힘으로 종자돈을 만들어 보라는 거지. 자네 힘으로 시작해 보는거야. 그래야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가 있다네. 그러면서 짬짬이 돈버는 공부를 하게. 금융, 회계는 기본이고 부동산, 경영 관리 등 부자가 되기 위한 힘을 기르라는 것이네. 월급쟁이를 아마추어 세계라고 한다면, 장사나 사업은 크기에 관계없이 프로의 세계야. 비교가 안되지. 월급쟁이는 언제나 <을>이지. <을>은 조직에서 도퇴만 되지 않으면 꼬박꼬박 월급은 나오니까 안전할 것 같지만, 도퇴되지 않키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네. 또한 대단한 신분 상승을 이루기도 어렵고 부자가 되기는 더 어렵지. 월급쟁이가 부자가 될려고 욕심을 부리니까 부정과 불의와 타협하게 되고 결국은 개망신을 당하는거야. 자네가 부자가 되고 싶다면 지금 당장 조그만 장사라도 시작하게. 장사는 정직한거야.
젊음에 고(告)함 -4편 (05/08/2015)
가난의 분노는 포도송이 처럼 점점 커져가고 영글어져 마침내 터져 버리거나, 결국 땅에 떨어져 썩어버린다. 분노의 폭발과 좌절감이다. 지금 자네의 가난과 무엇이 다른가. 한국에서 아메리카 드림이라는 꿈을 갖고 이민와서 지금까지 가난하게 사는 자네 부모세대와 무엇이 다른가. 꿈의 상실과 사회적 모순, 분배의 불균등, 빈부의 격차, 등등. 가난의 본질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자네 스스로가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방법 밖에 없다.
1925년에 발표된 고전소설 T. 드라이저 <아메리카의 비극>을 소개하지. 고등학생 때 읽은 것 같은데 책의 분량이 많은데가 문체가 반복적이고 설교식으로 지루했다는 기억인데, 가난한 신분인 주인공과 현대의 가난한 젊은이들이 무엇이 다른지, <신분 상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길 바란다. 1920년대는 <위대한 개츠비>와 유사한, 금주령 시대이면서 불법이 판치는 과도기적 자본주의 시대였다. 반면에 기회의 시대이기도 했다. 현대 자본주의 3대 원동력이 돈, 권력, 성적 매력이라고 한다면 그 시대도 그러했다.
클라이드 그리피스는 캔자스 시의 가난한 순회 목사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길거리 전도사였기에 그의 어린 시절은 길거리에서 전도하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생활에 환멸을 느낀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실망과 불만과 방황 속에서 병적인 공상력만 키운다. 그는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했다. 여기까지의 유년 시절은 작가의 성장 배경과 유사하다. 그는 돈과 사회적 지위를 동경하게 되었다. 따분하고 살풍경마저 감도는 집에서 뛰쳐나온 그는 도회지로 나와 우선 호텔 보이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동차 사고를 일으켜 뺑소니로 숨어 지내던 어느 날, 우연히 작은 아버지인 사무엘 그리피스를 만나게 되었다. 작은 아버지는 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무척이나 부유하게 살고 있었다. 그는 클라이드의 예절 바른 태도에 호감을 지니게 되어, 자기 공장에서 근무하도록 일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클라이드는 부하 여직공인 로바타와 맹목적 남녀 사랑을 하게 되고 로바타는 임신을 하게 되었지만, 클라이드는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 그는 작은 아버지의 소개로 사교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부자집 딸 손드라와도 교제하게 된다. 다른 세상을 본 것이다. 미모와 재력과 사회적 지위를 두루 갖춘 여자와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는 손드라와 결혼하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자네라면 두 여자 중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잠시 사랑에 빠진 댓가로 평생 가난하게 살 여자 기능공과, 출세와 성공이 보장된 미모의 부자집 딸 중에서 선택하라면? 답은 빤할 것 같은데.. 그런데 로바타가 클라이드의 아이를 배었으니 빨리 결혼하자고 애원하며 매일처럼 성화를 부린다. 그 당시에 미혼모가 된다는 것은, 자식이 사생아가 된다는 것은 평생 주홍글씨를 의미한다. 미숙한 사랑은 언제나 이렇게 변질된다. 그녀는 결혼을 해 주지 않으면 세상에 두사람 사이의 비밀을 폭로하겠다고 위협도 한다. 난처한 입장이 된 클라이드는 언젠가 신문 기사에서 난 <산정 호수의 실종사건>에 살인의 힌트를 얻는다. 안개가 많이 끼인 날 젊은 남녀가 보트를 타고 호수 가운데로 나갔다가 보트가 뒤집혔는데 여자의 시신은 찾았으나, 남자의 시신은 아직까지 오리무중이라는 것이다. 며칠 뒤에 그는 로바타를 불러내어, 철에 맞지 않게 호수로 놀러가 보트를 빌려 탔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계획이 너무나 무서운 범죄임을 깨닫고 살인을 포기한다. 하지만 클라이드는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그녀에 대한 분노로 인해 미친듯이 발작을 일으킨다. 그때 그의 목에 걸려 있던 카메라가 그녀의 얼굴을 때리면서, 바로 그 순간에 보트가 전복하고 로바타는 물에 빠진다. 로바타는 무서움에 질려 손을 내밀어 구원을 청하지만, 그는 외면하고 그녀는 죽는다. 클라이드는 강기슭까지 헤엄쳐가 도망친다. 그러나 로바타를 구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정신적 살인도 살인이라는 죄가 성립되어 결국은 전기의자에서 사형당한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유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 <나는 유죄인가?>로 소설은 인간적 죄성과 사회적 법리, 신분적 한계를 장황하게 서술한다. 사형 판결후 어머니와의 대화에서 “저는 하나님과 목사 앞에서 모든 것을 자백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아니다. 너는 네가 무죄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제 양심이 제가 옳다고 말하면 그만 아닙니까” “안될 말이다. 하나님이 그와 다른 말씀을 하신다면….” 그리하여 아메리카의 비극은 끝났다. 그는 <정신적, 도덕적 비겁자>로 평가된다. 허영을 좋아하고 공상을 즐기며, 출세욕에 눈이 먼, 그러면서도 위협할 때에는 능히 범죄를 저질 수 있는 어리석은 자로 평가된다. 과연 우리 자신과 우리 자식들은 어떠하며 무엇을 교육시켰는가.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출세하고 성공하여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압 속에서 자식들은 망가지고 변형이 된 괴물로 변해 버린 것은 아닐까. 어리석은 주인공이 비극이 아니라, 출세지향적인, 황금만능적, 가치관이 상실된 현대 자본주의가 비극이라는 것이다.
젊음에 고(告)함 -3편 (05/01/2015)
삶은 준엄하다. 더우기 가난은 냉엄하다. 설마 내가? 어떻게 되겠지? 언젠가는 마음 잡고 살면 부자가 되겠지? 열심히 사노라면 잘 살게 되겠지? 천만에 말씀이다. 가난은 막연함이나 우연적 기대를 거부한다. <열심히>라는 단어는 경쟁사회에서 보편적 무의미한 단어다. 즉 부자든, 가난한 자든, 누구나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산다. 그러니 <열심히>만으로는 경쟁력이나 차별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차별력을 키울려면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열심히> 살 것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가난은 그렇게 만만한 대상이 아니다. 가난한 자가 가난을 벗어난다는 것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가난은 이 시대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대부터 지구가 종말을 고하는 그날까지 가난은 대부분으로 존재하고 대물림된다. 가난은 두 부류가 있다. 선대 때부터 가난하여 가난이 세습된 선천적 가난과, 선대 때는 부자였는데 내 세대에 와서 가난으로 전락한 잔반 (殘班)세대다. <잔반>은 두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음식 찌거기를 말하며, 다른 하나는 몰락한 양반을 일컫는다. 부자가 3대를 못간다고 한다. 부자와 가난한자의 분포가 1대 99이라고 가정하면, 질량 불변의 법칙에 따라 부자 1%의 3분의 1인 0.3%가 부자에서 가난으로 떨어지고, 반대로 가난한 자가 부자될 확률도 최대 0.3%인 셈이 된다. 물론 터무니 없는 말장난이지만 그만큼 부자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가난에 대한 고전 소설 두권을 추천한다. 우리 세대에서는 필독 도서였는데 한권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이고 다른 한권은 T. 드라이저의 <아메리카의 비극>이다. 늙은이가 권장한다고 사이버 세계에 갇혀 있는 자네가 고리타분한 고전 소설을 읽을까만, 그 당시와 지금의 가난이 달라진게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는 1938년에 발표되었는데 시대적 배경은 미국의 경제 대공황 시기인 1930년대이다. 주식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니 은행으로 부터 주식과 토지를 담보로 대출 받아 너나 없이 흥청망청 소비하게 된다. 그러다가 주식값이 폭락하니 부동산 가격도 폭락하게 되고, 담보인 땅을 은행과 부자 지주들에게 빼앗기면서 소작농으로 전락한다. 지역 배경은 오클라호마와 켈리포니아인데, 1933년부터 3년간 텍사스에서 캐나다 국경에 걸친 대평원에 모래폭풍이 몰아치니 농경지는 사구(모래 언덕)으로 변해 버린다. 경작하던 땅까지 빼앗겨 소작농으로 전락한 마당에, 트랙터라는 신상품이 소작농들의 일감마저 빼앗아 버린다.
오클라호마의 가난한 소작농들은 <꿈의 땅> 캘리포니아로 대이동을 시작한다. 고임금으로 일자리가 얼마든지 있다는 캘리포니아 대지주들의 구인광고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민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주인공 톰 조드는 우연한 살인죄로 4년간 감옥살이를 하다가 가석방으로 집에 돌아오니 가족들은 이미 캘리포니아를 향해 떠난걸 알고는 뒤따라가 합류한다. 오클라호마로 부터 시작하여 미시시피, 로키산맥을 거쳐 베이커스 필드, 택사스주, 후버빌을 거쳐 캘리포니아에 도착하는 대 장정이다. 등장인물들인 톰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이동 중에 죽게 되고, 아버지는 삶의 터전을 잃은 가장이 되어 위상이 바닥에 떨어진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남은건 가족 밖에 없다”라는 신념으로 가족이 뭉칠 것을 강조한다. 심지어 할머니가 사망하지만, 어머니는 가족이 분열될까 걱정하여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고 죽은 시신을 안고 밤을 세운다. 하지만 남동생 앨 조드는 “뭉쳐서 사는건 불가능하다”로 가족 대열에서 뛰쳐나가고 가족은 분열된다. 여동생 로자샨은 임신한 몸이었지만 이동 중에 아이를 유산하고 남편은 떠나버린다.
이미 톰 가족들은 캘리포니아가 지상 낙원이 아님을 되돌아 오는 30만 이주민들을 통해 알게 된다. 각지에서 이주해 온 노동자는 넘쳐나니 임금은 형편없이 낮고 물가는 턱없이 비싸다. 톰의 가족들은 이동 중에 이미 가져온 약간의 돈마져 다 써버리고 일자리를 구하지만 일자리가 없다. 목화 따기도 해 보고, 복숭아 따는 일도 해보지만, 온 가족이 하루종일 일해 번 돈은 고작 4달러에 불과하다. 톰과 알고 지내는 케이시는 목사였지만 노동 운동가로 변신해 임금 인하에 반대하는 저항 세력의 지도자가 된다. 하지만 빨갱이로 몰린 케이시는 색출대에 의해 습격을 받고 죽게 되자, 톰은 홧김에 케이시를 죽인 살인자를 죽이고 도망자 신세가 된다. 그는 케이시처럼 노동 운동가가 되길 꿈꾼다. 그는 도망가기 전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자기만의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만 크나큰 영혼의 한 조각을 갖고 있을 뿐인지도 몰라요. 내 자신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나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어요.” 톰의 가족이 있던 곳에 큰 홍수가 일어난다. 가족들은 언덕 위의 헛간으로 피신한다. 그 헛간에는 어린 아들과 함께 굶어 죽어가는 50대 노동자를 만나게 된다. 톰의 어머니는 딸 로자샨에게 눈빛을 보내고 온 가족이 밖으로 자리를 비켜준다. 딸 로자샨은 죽어가는 남자에게 자신의 젖을 물려서 먹게 한다. 이렇게 소설은 끝난다. 언제나 가난한 현실은 꿈과 너무 멀다. 과연 지금 이 시대의 가난과 무엇이 다른가?
젊음에 고(告)함 -2편 (04/24/2015)
흔히들 내 적성에 맞는 일을 하라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직업을 선택하라고 한다. 그럼 내가 자네에게 질문하지. 자네가 남들보다 잘 하는 것이 무엇인가? 자네의 적성은 무엇이며, 무슨 직업을 갖고 싶은가? 그런 결정을 한 근거는 무엇인가? 과연 이 세상을 살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 적성에 맞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 세상은 급속도로 끊임없이 변하는데, 나의 기호와 적성도 끊임없이 변하는데 과연 그 길이 내가 선택한 최선일까? 20대의 젊은 나이에 무슨 경험이 그렇게 많고 무슨 지혜가 뛰어나서 수많은 정보를 분석하고 예측하며, 심시숙고하여 평생 직업을 선택하겠는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길>이다. 불확실한 기준이 될 수 밖에 없고 불투명한 목표일 수 밖에 없다.
인생은 선택이라고 한다. 선택은 내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선택은 선택의 폭이 넓을수록, 선택의 종류가 많을수록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고,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대부분의 선택의 기준은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그런데 자네는 20여년을 살면서 무슨 경험을 해 보았는가? 대부분의 성공한 사람들은 수많은 길 중에서 자신에게 맞는 길을 잘 선택한 사람이 아니다. 가난이나 외적인 어려움 때문에 그 길 밖에는 선택할 길이 없었기에 그 길을 걸어야만 했고, 돌아갈 수 없는 길이기에 목숨을 걸고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그런 먼 세월 뒤에 되돌아보니 나도 모르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공, 출세, 부자가 되기 위해서 그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십대 학창시절에 남들보다 조금 잘하는 학과목이나 예능 과목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선생님으로 부터 칭찬받고, 친구들도 부러워하니 그 과목을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되고, 그러니 남들보다 더 잘 하게 된다. 그게 내 소질이나 적성이라 생각하고 그 길을 택하는 것이다. 공부하기가 싫으니 다른 잡기를 찾게 되고 그게 내 적성이라고 오해하기도 한다. 내가 자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적성이나 소질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자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보라는 것이다.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지 말고, 사이버 공간에만 갇혀 있지 말고, 그 무엇이라도 결정하여 죽을 힘을 다하여 최선을 다해 보라는 것이다. 현대 젊은이들의 문제는 인터넷을 통해 아는 잡정보는 많은데 경험을 통한 산지식이 없다는 것이다. 성공한 부자들 중에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못나오거나 ,학교를 중퇴한 사람들이 많다. <경영의 신>이라 불리우는 일본의 <마쓰시타 고네스케>, 한국 현대 그룹의 창업자 <정주영>, 빌 게이츠, 델 컴퓨터 창업자, 애플 창업자, 등등.. 그 사람들과 자네의 차이점은 그들은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갔다는 것이고, 자네는 그 길 문턱에도 들어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젊은 나이에 나의 생각만으로 나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어렵고도 위험하다. 그래서 좋은 학부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기도 하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 격려와 도전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자네를 가장 진심으로 충고할 수 있는 사람은 자네 부모님이다. 설령 자네 부모님이 자네 표현처럼 무식하다고 하더라도 그분은 세상의 많은 경험과 지혜를 가지신 분이다. 그런데 그 부모의 충고를 잔소리로 무시해 버리면 자네는 가장 큰 멘토를 잃어버린 엄청난 실수를 한 것이다. 이 진실은 먼 세월이 흐른 뒤에나 깨닫게 될 것이다. 겸손해야 한다.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 그리고 많은 고전과 인문학 책들을 읽어야 한다. 비록 한권의 책이지만 그 책 속에는 성공한 사람의 가르침과 일생이 모두 담겨있다. 그런데 자네는 오만하고 불손한데다가 도전할 용기도 없고 무식하기 까지 하다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먼저 되어야 한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착함이며, 삶의 가치와 목표를 선하게 인도함을 의미한다. 왜 내가 그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왜 내가 그 길을 평생 걸어가야 하는지 목적과 의미가 불분명한데 그 힘든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갈 수 있겠는가. 십중팔구 포기하기 십상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길>을 소개한다. “우리에게는 각각 주어진 길이 있다. 하늘이 내려준 준엄한 길이 있다. 어떤 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은 갈 수 없다. 나만이 걸을 수 있는, 두번 다시 걸을 수 없는 소중한 이 길. 넓을 때도 있고 좁을 때도 있다. 오르막이 있는가 하면 내리막도 있다. 이 길이 과연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을 때도 있다. 위로를 받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짜피 이 길밖에 없지 않는가.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지금 서 있는 이 길, 지금 걷고 있는 이 길, 어쨋든 이 길을 쉬지 않고 가야 하는 것이다. 나만이 갈 수 있는 소중한 길이 아닌가. 타인의 길에 마음을 뺏겨 어쩔줄 모르고 서 있어 봐야 길은 조금도 열리지 않는다. 길을 열기 위해서는 우선 길을 걸어야 한다.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걸어야 한다. 설령 그 길이 먼길이라 여겨져도 쉼없이 걸으면 새로운 길이 반드시 열리는 법이다.”
젊음에 고(告)함 <전편> (04/17/2015)
우리 이민 사회에도 이민 1.5세, 2세, 3세의 젊은이들이 많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한인 젊은이들이 미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젊은 세월을 허송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아니 내 자식들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는 말을 해 주고 싶은데, 내 자신이 이민사회에서 성공하지도 못하고 내세울 것도 없으니 조언조차 궁색하며 마땅치가 않다. 하지만 먼저 어려운 세월을 산 늙은이로써, 사업 컨설팅을 하며 많은 부모들의 고민을 접한 경험자로써, 이,삼십대 세명의 자식을 둔 이민의 아버지로써, 집집마다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기에, 나름대로 생각한 어줍잖은 이야기를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이야기 하고자 한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주길 바란다.
물론 일류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장래가 유망한 직종에서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하는 젊은이들도 많겠지.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이 안되고, 다니던 직장에서 마저 쫓겨나 집에서 무위도식하는 젊은이가 많다. 대학을 중도에 포기하거나 아예 대학을 다니지 않는 젊은이들도 많다. 집에서 하루종일 컴퓨터 게임에 빠져 살거나 인터넷에 중독되어 사이버 공간에 갇혀 사는 젊은이도 많다.
다행히 자네들 표현대로 영어도 못하고 바보처럼 무식하게 일과 돈 밖에 모르고 살았던 부모들 덕분에 부모 집에 얹혀 사니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하지만 속이 새까맣게 타는 부모들은 가만히 지켜볼 수만 없으니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잔소리를 퍼붓는다. 덕담이 아니라 악담이다. 충고가 아니라 신세 한탄이다. 아니 이 단계도 지나 부모는 자식 눈치, 자식은 부모 눈치를 보며 대화가 단절된지가 오래인지 모른다. 살아온 세월이 너무 다르니 생각이 다르고 대화의 본질이 다르다. 자식은 눈치밥을 먹는 신세니 방문을 걸어 잠그는 수 밖에 도리가 없다. 갈 곳이 없다. 마음 붙일 곳이 없다. 대화할 대상이 없다. 부모도 교회도 친구도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직장이라고 어렵게 구해 주급생활도 해 보지만 돈도 되지 않고, 생각보다 너무 힘들어 직장을 포기한다. 그렇다고 장사를 하자니 가진 돈이 적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용기를 낼 수도 없다. 장사 밑천이 부모 지갑에서 나와야 하니 또 다른 간섭을 받기도 싫다. 더구나 어린 자식들은 집에 내팽겨 둔채, 새벽에 나가서 밤 늦게 까지 일만 하던 부모 세대들을 증오하면서 <나는 저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이제와서 똑같은 삶을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모든게 싫어지고 자포자기하게 된다. 죽고 싶다.
이런 무기력한 젊은이들에게 힘을 내라는, 희망을 가지라는, 야망을 가지라는, 꿈을 가지라는, 종교를 가지라는 어줍잖은 말로 위로나 권면이 되지 않을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이미 미국식 자본주의는 말기 증상으로 부자와 가난한 자의 양극화가 자리잡아 고착화된 상태다. 차별화된 사회, 분리된 사회, 발버둥을 치고 몸부림을 쳐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사회에서 젊음이라는 밑천 하나로 무엇을 할 수 있냐는 자괴감이다. 부모의 강요에 못이겨 대학에 들어가 하기 싫은 공부를 한다고 하지만, 일년 등록금과 생활비가 7-8만불이 지출된다면 4년이면 25만불, 대학원 과정까지 마친다면 40만불, 물론 장학금도 받고 학자금 대출도 받는다지만, 결국은 빚쟁이 삶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사회인가. 비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라 미친 사회다. 그렇게 빚쟁이로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직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가난한 자는 평생 무식하게 살던가 빚쟁이로 살아야 하는 평생 노예 사회다. 그러니 가난한 집 부모로서는 엄청난 빚을 떠안고 공부하라고 강요도 할 수 없고 장사하라고 밑천을 대 줄 수도 없으니, 주급생활 임시직 노동자로 내밀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국가가 잘못되고, 사회가 모순된다고 해서 그 사회와 제도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네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비판하고 비난할 수는 있어도 이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 물론 사회 운동가나 노동 운동가, 사회 복지사, 사회 봉사자는 될 수 있겠지. 아니면 세계 오지를 찾아 선교사나 종교 목회자가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신이나 예수를 팔아 내 가족이 함께 밥을 먹고 살겠다면 그 삶은 초라하고도 구차하다. 종교가 세속화 되는 이유다. 내 자신이야 신으로부터 콜링을 받았든, 계시를 받았든, 내가 선택한 길이니 누구를 원망 할 수도 없지만, 내 아내나 자식들마저 신의 콜링을 받은건 아니지 않는가. 혹은 제국주의나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한 <체 게르바>처럼 사회 혁명가가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의 말처럼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지 않는 한, 그것이 삶의 목표라는 어떠한 확신도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만큼 사회를 위해, 가난한 자들을 위해, 타인을 위해 산다는 것은 어렵고도 외롭고 힘든 길이다. 그래서 그 길은 피할 수 있다면 피하기를 권한다. 자네 스스로 잘 살 길을 찾아야 한다.
봄날은 간다 (04/10/2015)
느림의 미학처럼 봄날이 느리게 그리고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미 4월이 시작되었는데 나무가지의 꽃순들은 터지지도 않았다. 아직도 기다림인가. 저러다 어느 봄날 자고 일어나면 꽃들이 피었다 지고, 또 필 것이다. 그렇게 봄날은 소리없이 오고 또 말없이 지나감을 우리는 알고 있다.
<봄날>은 인생에서 무슨 의미인가. 좋은 세월? 좋은 시절? 희망의 출발점? 청춘? 사랑의 만남? 새로운 시작? 그중에서도 사랑의 순간이 가장 애틋함이다. 사랑의 시작이고 설렘이며 그래서 더욱 소중함이다. 하지만 사랑이 이만큼 왔다고 느끼는 순간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라는 느낌은 ? 세상 이치? 오면 간다? 만남과 이별? 시작과 끝? 한계성과 소멸성? 있을 때 잘해라? .. 그래서 더욱 미안함이고 그리움이다. 돌아서서 저만큼 떠나는 봄날의 뒷모습을 우리는 잊지 못한다. 다시는 못만날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 봄날들을 보내고 그리워한다. 사람인 내가 바보스럽다. 내 곁에 머물고 있는 여러가지 사랑들이 언제 어디서부터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또 언제까지라도 항상 머물러 있을거라 생각한다. 아니 언젠가는 떠나겠지만 지금은 아니라도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많은 그 사랑들은 떠나간 봄날처럼 어느날 내 곁을 떠나고 없었다.
오늘은 부활절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날이다. 또 오늘은 내 아버지 기일이기도 하다. 돌아가신지 어언 27년전, 아버지는 꽃상여 타고 훨훨 봄길을 떠나 가셨다. 매년 마누라님의 지극 정성으로 제사상을 사이에 두고 내 아버지와 내 자식들과 나의 만남이 이어진다. 예수도, 내 아버지도 <항상> 내 마음에 살아 계신 분이다. 하지만 <언제나, 항상> 이라는 단어 속에는 그렇지 못함과, 나태함과 안일함이 숨겨져 있음을 고백한다. 나는 예수의 재림을 믿지 않는다. 그분은 이미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고 영원토록 함께 하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종말론을 믿지 않는다. 천국은 내가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곳도 아니며, 내가 마음 먹는다고 선택받는 곳도 아니다. 내가 죽은 후 갈 그 곳은 오직 그분 만이 결정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이, 이 순간이 천국이라고 믿고 싶고, 그렇게 살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살아도 사는게 아니다. 하루하루 사는게 힘들어, 이승을 천국처럼 생각하며 살아지지 않는다. 그렇게 절절하게 감사하며 살지도 않는다.
오늘 부활절 강사로 뉴저지 지역 감리사가 설교를 하셨다. 아주 짧은 설교였지만 모처럼의 울림이었다. 주제는 <이미>와 <아직>이었다. <이미> 그분께서는 부활과 영생을 몸소 보여 주셨고, 우리에게 <이미> 많은 것을 준비해 주셨는데, 내가 <아직> 알지 못하고 실행을 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아직>은 믿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텅 비어있는 예수의 무덤처럼 우리의 인생은 턴 빙 무덤과 같을지도 모른다. 예수는 부활하셨지만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를 보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도 텅빈 무덤만을 보고 있다. 어쩌면 우리의 삶이 죽는 날까지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가 꿈꾸는 희망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비록 사는게 힘들어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이 <텅 빈 무덤> 같다 할지라도 감사하고 기다리며 열심히 살아야 한다. <아직>은 <이미>이기 때문이다.
영화 , 허진호 감독, 유지태, 이영애 주연의 <봄날은 간다>가 기억난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와 “라면 먹을래요?”라는 대사로 더 유명해진 영화다.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순정남과, 애정은 휘발성 물질과 같다는 이별의 내성을 가진 여자의 사랑 이야기다. 사랑이 변하든, 변하지 않든, 봄날에 꽃이 피든, 꽃이 지든, 봄날이 오든, 봄날이 가든, 변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Fact는 이 봄날에 내가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꽃잎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듯, 꽃잎이 꽃비되어 떨어지듯, 사랑을 해 봐야 봄날을 기다릴 수도 있고, 가는 봄날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뼈에 사무치게 그리워 할 수도 있고, 봄날의 실루엣 처럼 뿌옇게 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백설희씨가 불렀던 <봄날은 간다>의 가사처럼 “같이 웃고 같이 울자던 알뜰한 그 맹새”가 되었든, “시들한 그 맹세”가 되었던 간에, 이번 봄날은 다시 한번 패티킴의 <Till, 사랑의 맹세>를 불러보자.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함께 손을 잡고 봄의 꽃길을 걸어보자. 혼자이시면 정훈희의 <꽃밭에서>를 부르며 봄을 만끽해 보자. 내 삶에 항상 동행하시는 그분과 함께 봄을 즐겨보자. 내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조차 사랑하지 못하는데, 먼곳에 있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한 사람 조차 사랑하지 못하는데 열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지금 사랑하지 못하는데, 천국에 가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객기며 과욕이다. 어불성설이다. 있을 때 잘하자. <봄날은 간다>..
분노의 시대 (후편) (04/03/2015)
왜 현대는 <Angry 사회>가 되었는가? 이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고 공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회 균등의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 법리와 제도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며 살아도 희망이 없고 보장된 기약이 없기 때문이다. 제도와 규범이 모순되고 편파적이기 때문이다. 가치와 도덕이 무너지고, 돈만이 판단의 기준이 되고, 목적이자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작금의 자본주의 사회는 빈부의 격차가 너무 심해 아무리 몸부림쳐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다면,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좌절하게 되고 산다는게 두렵고 불안한 것은 당연하다. 현대는 가난이 죄가 되고 가난한 자가 죄인이 되었다. 그래서 가난한 서민들은 통곡하고 분노하는 것이다.
또 다른 분노의 이유는 대중들 <사고의 변질>이다. <우월감을 행복감>이라고 생각하는 그룻된 세태이기 때문이다. 경제가 고속 성장을 하면서 부의 편중화에 따른 분배의 불공평이 사회적 큰 이슈가 되었다. <내가 너보다는 잘 낫다>고 하는 <우월감>이 상대방을 조롱과 비하하는 관성으로 고착화 되었기 때문이다. 상대방과의 차이를 인지하고 수용하는 것으로 매듭짓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치를 돈으로 비교하여 부당한 횡포와 함께 무리를 지어 연대하고, 욕설하고 삿대질하며, 무시하고 경멸하고, 비하, 조롱, 차별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언어로 뿐만 아니라 눈빛, 말투, 표정으로도 충분히 상대방을 분노하게 하는 것이다. <갑질>은 갑이 을에게 하는 행위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갑이 갑에게, 을이 을에게도 <갑질>을 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상대방보다 낫다고 판단되면 우월감이 <갑질>로 표현되는 것이다.
성공회대 김찬호 교수는 <모멸감>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감정은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멸시하고 조롱하는 심성이 관성으로 고착화된 사회다. 한국사회가 권력과 부와 지위만을 쫓는 이유는 한국 사회가 오만과 모멸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의식주가 풍족해 졌지만, 그것을 얻는 방법은 빈궁한 시대보다 더 가혹해 졌다. 이것은 삶의 기반이 빈약한 사람들이 늘 불안한 이유이기도 하다.” 김우창 고려대 교수는 <정치와 삶의 세계>에서 “차이를 인정하기 보다는 모든 것에 서열화하는 습관이 마음 속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타인과 자신에 대하여 끊임없이 등급을 메기고, 남보다 앞서야 안심한다. <우월감 = 행복감>이라는 심리부터 바뀌어지지 않는 한, 모멸감은 계속될 것이다.”
우월감은 열등감의 발로다. 태생부터 우월한 종자들은 우월함을 과시하지 않는다. 이를 빗대어 미국식 부자와 유럽식 부자의 차이로 이야기 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미국 초기 부자들은 태생이 극도로 못사는 사람들이 유럽에서 탈출하여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죽을 고생을 해서 부자가 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미국 부자는 없이 살았기에 과시욕이 강하다. 반면에 많은 유럽 부자들는 귀족 계급으로부터 세습되어 내려오는 오래된 부자들이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부자가 부자티를 내면 천박하다고 비난을 받는다고 한다. <잰틀맨>이라는 호칭도 유럽부자에게 적용된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지만, 역사의 어느 시대나 가진 자가 지배자였다. 또한 어느 시대나 과도기가 있기 마련이다. 한국도 불과 50년이라는 경제 과도기를 거치면서 벼락부자, 졸부라는 부자들이 많아졌다. 이런 과도기적 부자들은 항상 사회적 열등감을 갖고 있다. 그러니 우월하다는 외형적 과시로 허영과 과소비를 하게 되며, 자기 보다 가난한 자를 비하하고 업신여기는 것이다. 얼마전 코메디 프로에서 졸부를 상징하는 <몸이 과거를 기억한다>라는 유행어가 있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잘 살아야 하는데, 잘 산다는 것이 물질적 풍요로움으로 모든게 평가되니, 상대적으로 가난한 자는 항상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다. 이것이 충족되지 않거나 어렵다고 판단되면 분노와 화가 나는 것이다. 분노는 인격장애와 행동 장애로 나뉜다. <인격장애>는 지나치게 의심이 많거나 욱하는 공격성을 보이는 장애다. <행동장애>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충동적, 극단적 행동, 즉 분신, 방화, 살인, 폭력, 절도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분노를 억제하기 위해서는 <CALM>을 권장한다. <C- Change>, 변해야 한다. 변할 수 있어야 하고 변할려고 노력해야 한다. 정체되면 화를 일으킨다. <A- Accept>. 받아드려라. 너무 저항하다가 갈등이 오고 분노가 생기며 화를 키운다. <L- Let go>. 놓아버려라. 어떤 일이나 생각에 너무 집착하면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된다. <M- Manageable Life style>. 자기 생활의 패턴, 자기 삶의 스타일을 잘 관리해라. 적절한 운동, 좋은 식습관, 꾸준한 취미생활, 원만한 대인관계, 균형잡힌 신앙생활 등이다. 평상심 (平常心)을 잘 유지하는 것이다. 쉽지야 않겠지.. 어쨌거나 화는 백해무익이다. 화내지 말고 웃으며 즐겁게 살아야 한다. 웃으면 복이 와요..
분노의 시대 <전편> (03/27/2015)
요즈음 사회면 기사를 보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벌어지는 각종 사건 사고를 접하게 된다. 어찌보면 사소한 일로 폭력과 살인을 하고 방화를 하고 자살을 하고 부분별한 범죄를 저지른다. 이렇게 순간적인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발하는 병을 <분노 조절 장애 (Anger Disorder)>, 혹은 <간헐성 폭발성 장애>라고 하는데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서 급격히 증가한다고 한다. 우리를 <Hungry 세대>라고 하면 지금 젊은이는 <Angry 세대>라고도 한다. 분노 자체는 인간으로서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다만 그 분노를 너무 참으면 <울화병>이 되고, 외부로 즉시 표출하면 폭력이 된다. 그 분노의 조절이 잘 안되는 것이 현대인의 병폐다.
왜 특히 젊은이들이 <욱>, <버럭>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일까? 현대인의 분노는 모든 삶의 영역을 경제적 논리로 환원시키는 신자유주의의 부산물이다. 삶의 목표와 과정이 돈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공부도, 취직도, 결혼도, 출세도, 인간 관계도, 심지어 종교도 돈으로 평가되고 돈으로 귀속된다. 그래서 가정과 공동체에서 인간관계가 붕괴되고, 신뢰와 소통이 단절되고,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소한 갈등들이 점점 쌓여서 마침내 폭발하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은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다. 분노의 감정 저변에는 <불안과 두려움> 때문이라고 한다. 손현정 박사의 <행복은 과학이다>에서 화가 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내 안의 두려움과 불안을 상대방이 자극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뇌 속의 편도체가 증가하게 되고 스트레스가 증폭한다. 이를 <편도체의 납치>라고 하는데, 불안과 두려움은 점점 증폭되고, 이성적 억제가 마비되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도 여러 단계가 있는데 1차적 스트레스 해소되지 않고 남아 있는 상태에서 2차, 3차 스트레스가 계속 쌓이기만 하니까 어느 순간에 사소한 자극만 받아도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동물은 화를 내지 않는다고 한다. 사슴이 사자의 공격을 받으면 인간과 마찬가지로 편도체가 증가하고 근육이 수축되고 긴장되어 온 힘을 다하여 도망을 간다. 그런데 인간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격하는 상대방에게 온힘을 다해 맞서서 공격을 하기 때문에 화를 내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손현정 박사는 <거울 뉴런(Mirror neurons)>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즉 화를 내는 상대방의 감정이 내 거울에 그대로 복사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난 사람과 대화하다 보면 나도 똑같이 맞받아 화를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를 내는 사람을 멀리 하고 즐거운 사람을 가까이 하라는 것이다. 또 화내는 상대방의 그 내면에 그 사람을 화내게 한 불안감이나 두려움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라는 것이다. 내 자신이 분노를 만들지 말라고 하는데, 이것은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파악하고 잠재우려고 노력하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긍정적 자기 독백>을 연습하라는 것이다. 감정은 조절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는 것이라고 한다. 내 안의 두려움과 불안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 누구도 아닌, 내 자신만의 행복을 위하여 지금 이 순간 그 무엇을 하라는 것이다. 이것을 <행복 지키기 연습>이라고 한다.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내 자신을 긍정 마인드로 위로하고 사랑하면서, 이 순간에 가장 가치있는,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것이다.
<분노 자가 조절법>은 여러 문헌에 여러가지 방법이 소개된다. 분노 조절은 “사소한 일에 땀을 흘리지 않는다”라고 할 수 있다. 과연 내가 직면한 일이 화를 낼만한 가치가 있는가? 즉 화를 Management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숫자세기다. 즉 <시간 벌기>다. 참을 인(忍)자 세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과 같다. 두번째가 분노에 대응하는 <방법 바꾸기>다. 화를 안으로 삭이는 것도, 밖으로 표출하는 것도 모두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명상, 심호흡, 산책, 운동 등로 대체하는 것이다. 세번째가 <생각한 뒤 말하는 것>이다. 올드 팝송에 <Think twice before you answer>라는 가사가 생각난다. 화가 난다고 내뱉은 말일지라도 주워 담을 수는 없다. 그 다음이 <해결책 모색하기>다. 화를 내는 근본 원인이 뭔지, 어떻게 해야 할지 신중하게 생각한다. 그래도 화가 나면 일단 <자리 피하기>다. 어쩌면 가장 현명한 방법일지 모른다. 대부분의 갈등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됨을 삶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잘잘못을 따지지 말고 일단 자리를 피하자. 그런 다음 운동을 하거나 요리를 하거나 산책을 하거나 좋아하는 일을 하자. 그러면서 내 자신의 <거울보기>를 하자. 분노한 내 자신의 모습을 외부의 내가 바라다 보자. 아마도 십중팔구 유치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화를 내는 이유가 나라와 인류를 구하는 거창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화를 참지 못하겠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청하자, 왜냐하면 분노나 화는 습관성이고 반복성이자 중독성이라는데 심각성이 있기 때문이다. 분노는 2차적인 습관이며 2차적인 카타르시스라고도 한다. 또 다른 분노를 알아보자.
젊은이의 양지 (03/20/2015)
50대, 60대인 우리 세대의 자식들은 통상 20대, 30대 젊은이들이다. 이미 기성세대인 동시에 늙은 세대인 우리들은 요즘 젊은이들의 사고나 행동방식을 마뜩치 않아 한다. 현대 젊은 세대들은 풍요로움이 지나쳐 부족함이 없는 세대, 원하면 무엇이나 소유할 수 있는 배고픔을 모르는 세대, 본인만 열심이면 얼마든지 공부해서 성공할 수 있는 세대, 가족들 보살필 부담도 없이 본인 스스로만 잘 살면 되는 세대, 세계 어디라도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자유로운 세대, 등등 기성세대가 그 나이 때에는 감히 상상 조차도 해보지 못한, 부럽다 못해 질투가 나는 세대들이다. 그런데 왜 내 자식들 세대인 젊은이들이 한없이 가여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한인 사회에서도 교포간에 <묻지마> 조항이 있다고 한다. “자식이 무슨 대학을 다니는지, 대학을 졸업했는지, 어느 직장을 다니는지, 결혼은 했는지, 배후자는 어느 나라 사람인지, 년봉이 얼마인지 등등” 이런 류의 자식에 대한 질문은 내용의 정도에 따라 죄질과 형벌이 다르게 매겨진다고 우스깨 소리를 한다.
요즈음 한국의 20대, 30대 젊은이들을 <오포세대>라고 한다. 다섯가지를 포기한 세대. 즉 연애, 결혼, 출산, 집장만, 인간관계. 이 다섯가지다. 더구나 지금 10대들은 이 나이가 되면 더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 살아야 할지 모른다. 부모인 우리세대는 <예측 가능한 시대>에 살았다면, 지금은 <예측 불가능 시대>다. 태어나자 마자 영재 교육이니 뭐니 부터 시작하여, 영아반, 유아원,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할 떄 까지 대부분의 한국 아이들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학교, 학원을 다녀야 하며, 집에 와서도 새벽까지 숙제를 해야 한다. 그러고도 일류 대학을 들어가기가 어렵다면 이 노릇을 어이할꼬. 대학에 합격하면 뭐하나. 취직이 보장 되지 않으니 입학 하자마자 취업 준비생이 되어야 한다. 기업에 취직하는데 무슨 놈의 스팩이 그렇게도 많이 필요한가. 내 한몸 밥벌이를 하기 위해서, 태어나서 부터 취직하는 순간 까지 25년 이상을 죽어라 공부하는 기계가 되어야 한다면 이 아이들에게 무슨 미래와 희망이 있겠는가. 하물며 중도에 포기하거나 좌절한 젊은이들은 어떻게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가. 그렇치 않아도 빈부의 격차는 점점 벌어져 가난은 가난으로, 부자는 부자로 세습되는 계급 시대다. 그렇게 죽기 살기로 일류 기업에 취직이 된다 해도 정년이 38세라면 이 또한 무슨 날벼락인가. 대기업 과장으로 버틸 수 있는 최장기간이 38세 정도다. 승진하지 못하면 사표를 내야 한다. 그러니 물려 받을 재산도 없고 그럴듯한 직장도 없는 젊은이라면 무슨 배짱으로 연애를 하며, 결혼을 하겠는가. 결혼 비용이 한두푼 들어야지, 부모가 전세집이라도 마련해 주지 않으면 무슨 수로 저축을 하여 집을 사겠는가. 누가 가난한 남자에게 시집을 올 것이며, 어느 세월에 집을 장만하겠는가. 부부 둘이 죽어라 벌어도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데, 돈덩어리인 자녀가 태어나면 그 엄청난 사교육비는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태어난 자녀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 애물단지가 된다면 그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인가. 거기다 인간관계 마저 외형위주, 고소비 고품격을 추구하니, 관계를 유지하는 비용조차 부담스럽다. 그래서 젊음이들은 더욱더 외로워지고 혼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이 물질 만능, 자본주의 병폐이다. 부모인 우리 세대가 돈,돈,돈 에만 미쳐 살다보니까 우리 자식들이 중요한 가치를 포기하는 세대가 된 것이다. 일본에도 20대, 30대를 <사토리 세대>라고 한다. <사토리>의 뜻은 <득도 (得道), 깨달음>이다. 이들 세대는 <잃어버린 20년>의 일본에서 태어나서 거품 붕괴, 장기 불황에 대한 후유증을 온몸으로 느끼며 자라난 세대들이다. 즉 절망적인 일본에서는 어떠한 꿈도 목표도 실현하기 어렵다고 깨달은 세대. 즉 깨달음에 도달한 성직자처럼 소비에 무관심한 세대이다. 자동차에도, 스포츠에도, 술도, 여행도, 여자도, 결혼도 관심없고 돈을 많이 벌겠다는 의욕도 없고, 유명해지거나 관심을 받고 싶지도 않는 세대를 말한다. 하지만 한국에 비해 일본의 40대 이후의 세대들은 소득 대비 저축률이 훨씬 높으며 보다 안정된 생활들을 하고 있다. 한국이 문제다.
세계적으로 점점 노인 인구는 증가한다. 인구 4명중 1명이 노인인 시대다. 평균 수명이 90세를 바라볼 날이 멀지 않았다. 우리 기성세대가 이 젊은 세대들에게 짐이 될 공산이 크다. 그렇다고 국가와 사회가 베이붐 세대인 50대 이후 기성 세대를 책임질 수도 없다. 국가 자체가 빚 투성이고 자립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러니 기성세대 스스로가 자립도를 높혀야 한다. 그리고 젊은 세대들에게 꿈과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젊은이의 양지>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내 자식들이다. 그들을 따뜻하게 감싸고 위로해 주자. 돈이나 물질보다 더 높은 가치가 삶 속에 있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여 생활로 보여주자. 모범을 보이자. 어른이면 어른다운 가르침과 행동으로 젊은이들의 길잡이가 되자..
공무도하가 (公無渡河歌) (03/13/2015)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아내와 나는 얼마 전 한편의 독립 영화에 보면서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 강원도 횡성군의 어느 조그만 산골 마을의 아담한 집에 조병만 할아버지(98세)와 강계열 할머니(89세)의 76년간 러브 스토리를 1년반에 걸쳐 만든 다큐 영화다. 19살 소년은 14살의 어린 소녀 집으로 장가를 오면서 사랑은 시작된다. 신부가 너무 어려 성숙할 때까지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다는 할아버지의 배려 깊은 사랑은 그렇게 시작한다. 자녀들이 매년 해주는 커플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백발의 노부부. 꽃피는 봄에는 예쁜 꽃을 서로의 머리에 꽂아 주며 환하게 웃고, 시원한 여름 날이면 집 부근 시냇물 가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고, 단풍지는 가을 날에는 낙엽을 서로에게 던지며 장난치며 사랑하고, 하얀 겨울에는 눈싸움을 하다가 서로의 언 손을 호호 불어 주는 노부부. 어딜 가나 항상 손을 맞잡고 다니는 노부부, 주무실 때도 항상 할머니의 얼굴이나 귀, 손을 만지면서 잠을 주무시는 할아버지, 반찬이 맛있으면 밥을 많이 먹고, 맛이 없으면 조금만 먹을 뿐, 불평을 하지 않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화장실을 갈 때면 할머니가 무서워 한다고 함께 따라가서 문 밖에서 노래를 불러 주는 할아버지, 남편에게 꼭꼭 존대말을 하는 할머니. 주무시다가도 할머니의 잠자는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는 할아버지, 모든 장면 하나 하나가 사랑 그 자체였다. 그러던 어느날 할아버지가 귀여워하던 강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날 이후로 할아버지는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난다. 날이 갈수록 점점 잦아지는 할아버지의 기침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이별을 준비하는 할머니. 남편의 옷들과 12남매 중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어린 6남매의 내복을 사서 남편의 고운 한복들과 함께 태우며 눈물 짓는 할머니. 눈이 펑펑 내리던 날 할아버지의 무덤가에서 “내가 곧 갈께요. 할아버지 먼저 가서 정리하고 있어요. 내가 금방 못가거든 할아버지가 데리러 와요” 하시던 할머니의 울음 소리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대부분의 부부는 사랑해서 결혼을 했고, 그래서 지금도 사랑을 하고, 앞으로도 죽는 날까지 사랑을 하며 살다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한다. 죽음이라는 강은 피할 수 없는 강이다. 우리 모두는 그 강을 건너야 한다. 하지만 그 강을 건너기 전까지는 죽도록 사랑을 하며 살다 가야 한다. 하지만 알면서도 잘 되지 않는다. 살면서 좋은 일만 있을까. 서로에게 만족만 하며 살 수 있을까. 현대를 산다는게 좀 만만한가. 영화에서도 여느 집처럼 자식들이 노부모 때문에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노부부는 말없이 눈물만 짓는다. 시골의 삶이 과연 녹녹하기만 할까. 영화에는 비춰지지 않은 아픈 사연들이 많았을 것이다. 사람 사는 것이 거기서 거기라면 어떻게 해야만 죽는 날까지 사랑만 하다가 죽을 수 있을까.
항상 사랑하는 사람 곁에 함께 있어 주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 안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면 안된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따뜻한 마음만을 전해야 한다.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것이다. 무엇을 기대하거나 상대방을 바꿀려고 하면 안된다. 잘 안되지만 그럴려고 무단히 노력해야 한다. 한국적 사랑은 이승과 저승이 이어진다. 그래서 한국적 사랑은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며, 이별한다고 이별하는 것이 아니다.
여느 부부들 처럼, 나는 내 아내를 사랑한다. 하지만 내 사랑을 여느 다른 부부와 비교하는 자체를 거부한다. 내 사랑은 나만의 사랑으로 족하다. 왜 아내가 좋은지, 왜 사랑하는지 이유 자체를 거부한다. 아내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기에 그냥 사랑하는 것이다. 나도 그렇듯이 아내도 여러 장점과 여러 단점이 있겠지. 하지만 그건 내 사랑의 평가 항목이 되지 않는다. 나는 멋있는 사랑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아내가 내 사랑을 만족해 하고 행복해 하면 된다. 그냥 저 강을 건널 때 까지 그런 사랑을 하고 싶을 뿐이다. 그건 내가 사는 날까지 나의 소망이기도 하다. 요즈음 나는 아내 얼굴만 바라봐도 눈물이 나는 병에 걸렸다.
“님아,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님아, 님아, 내 님아, 그 예 그 강을 건너시네 / 아 ,물에 휩쓸여 돌아가시니 / 아, 가신 님을 어이 할꼬” <공무도하가>는 일명 <여옥의 노래>라고 한다. 고조선 시대에 백발의 미치광이 사내가 머리를 풀어 헤친채 술병을 끼고 비틀거리며 강을 걸어서 건너는 것이다. 뒤쫓아 온 아내가 말리려 했지만 이미 늦어 그 사내는 죽고 말았다. 울던 아내가 슬퍼하며 이 노래를 부르고 나서 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부른 노래가 <공무도하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다. 우리 모두 그 강을 건너는 그 날까지 순수하게, 순진하게, 알콩달콩 사랑하며 살자…
말, 말, 말 (03-06-2015)
우리는 한평생을 살면서 많고도 많은 말들을 하면서 살고, 많고도 많은 말들을 들으면서 산다. 그 많은 말들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받기도 하고, 잊혀지지 않는 위로를 받기도 한다. 내가 몸담고 있는 교회도 <각종 말들을 생산하는 공장>과 같은 곳이다. 현대인들은 직업이 무엇이든지 간에 혼자서만 살 수가 없고 사람 산다는 자체가 <말>을 피해 갈 수가 없다. 특히 나처럼 많은 손님들을 만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많은 말을 하고 또 들으면서 그 <말>의 양면성을 절감한다.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 중 하나가 <말>이다.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종교에서는 <말>에 대해 경고한다.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불교 경전에도 <구업 (口業) –말로 짓는 죄>에 대해 여러차례 경고한다. 하지만 <바른 시기에 바른 장소에서 바른 말>을 하기가 말처럼 쉽지가 않다. 이 기회에 만약 나의 말로 인해 상처를 받으신 분이 있다면 (분명 계실 것이다) 용서를 빈다. 컨설팅 이라는 직업상 냉정하게 혹은 정확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는 미명 아래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고 말씀드렸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고의적이거나 악의는 결코 아니었겠지만, 좀더 자숙하고 성찰하여 성숙한 상담자가 되고자 한다.
우리 교회에서는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모세5경과 함께 책을 한권 정하여 속회 (소그룹)별로 매주 토의를 한다. 책 제목은 <독이 되는 말, 득이 되는 말>이다. 작가는 일본의 심리 연구가인 쓰다 히데끼 씨와 정신과 전문의인 니시무라 에스케 씨가 공동 저작한 책이다. 물론 한국 문화와 일본 문화의 다른 점이 약간 있지만, 사례별로 말하는 방법과 구체적 대안을 제시한 흥미로운 책이다. 각 장르별로 말의 가시를 뽑는 방법, 말 속에 퍼진 독을 빼는 방법, 부드러운 말을 하는 방법, 몸짓과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들을 구설하였다. 물론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 교육 과정을 통해 말에 관한 교육들을 받기도 하고 직접 교육을 시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말>은 감정의 평온한 상태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화가 나고 분노나 감정이 조절이 되지 않을 때 말의 실수가 많다. 또한 말은 글과 달리 한번 뱉은 말은 주어 담을 수 없고 번복하기가 쉽지 않다. 누구나 말의 실수를 하지만 그 실수가 잦아지고 반복이 되다 보면 말의 습관으로 고착화가 된다는데 심각성이 있다. 말의 방법과 기술은 부단히 노력해야 함을 잘 알고 있다. 나는 고향이 부산이다. 말투가 결코 부드러운 지역이 아니다. 말이 거칠고 단답형이면서 짧다. 그런데다가 장교 교관을 하면서 말투가 명령조고 지시형이며, 상명하복의 단답형이다. 나는 농담으로 유머로 한 이야긴데 아내는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아내는 나의 이런 말투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도 많이 고친다고 고쳤지만 무심코 툭툭 튀어 나오는걸 보면 참으로 <말>이라는 것이 무습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나의 말로 인해 가장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내 자식들일 것이다. <긍정적 스트로그> 즉 칭찬, 호의, 긍정, 존재 가치에 중심을 두는 말하는 요령이 부족했다. 미안한 마음이다. 내 자신도 말의 실수가 많거나 남의 말을 옮기기 좋아하는 사람과는 사귀기를 꺼려한다.
또 다른 책을 소개한다면 데보라 스미스 피게가 쓴 <말 다스리기 30일>이다. 30일동안 매일 한가지 말에 관한 주제로 불경건한 말을 억제함으로써 <말 금식>을 하며 자성하는 책으로 기독교인들게는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의도대로 “나는 늘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건전한 혀를 갖고 싶다”고 했다. 책의 서두에 “부주의한 말은 다툼을 일으키고, 모진 말은 삶을 부수고 무너뜨린다. 쓰디쓴 말은 증오를 낳고, 난폭한 말은 상대방을 넘어뜨리고 죽일 수 있다. 은혜로운 말은 길을 평탄케 하고, 기쁜 말은 하루를 밝게 한다. 시기 적절한 말은 스트레스를 줄여 주고, 자애로운 말은 치유와 축복을 가져다 준다.” 라고 시작한다. 무슨 말이든 때와 장소와 방법이 있다. 해야 할 말이 있고 해서는 안될 말이 있다. 말은 생각을 전하는 차량이며, 혀는 그 차량의 운전사다. 그래서 혀가 운명을 이끈다고도 한다. 영적으로 성숙해지려면 바른 말을 바른 때에 바른 이유로 말하는 법을 끊임없이 배울 필요가 있다. 말은 습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짓된 말, 아첨하는 말, 조정하는 말, 조급한 말, 이간질 하는 말, 따지는 말, 자랑하는 말, 경시하는 말, 중상하는 말, 험담하는 말, 참견하는 말, 누설하는 말, 냉소적인 말, 아는체 하는 말, 과격한 말, 요령없는 말, 위협하는 말, 무례한 말, 비판적인 말, 자아에 골똘한 말, 저주하는 말, 불평하는 말, 보복적인 말, 참소하는 말, 낙담시키는 말, 의심하는 말, 수다스런 말, 경솔한 말, 침묵하는 말, 말, 말. 사람이 사람다운 말을 하지 못하니 말 많을까 하노라.. 말도 나이를 먹으니 말의 체통을 차려야지..
가난한 마음 (02/27/2015)
우리 한인 사회에도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 불경기가 만성이 되다 보니 가난도 습관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친한 이웃과 밥 한번 먹는 것도 부담스럽다. 마트에서 일주일에 장을 한번 보는 것도 겁이 난다. 꼭 필요한 것만 산다고 해도 100불을 훌쩍 넘기기 일쑤다. 교회의 헌금도 십일조를 낸다는 것이 내 양심을 속이지 않는 다음에야 큰 부담이다. 이리저리 사람을 멀리하고 교회를 멀리 하게 된다. 내 가족만 근사하기도 벅차니 이웃에게 베풀고 나눈다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성경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누구인가? 차동엽 신부님의 <행복선언>에서 보면 “마음은 감정의 처소이고, 영은 의지의 처소이며, 의지는 자발적이므로 <마음이 가난한 자>는 자발적으로 가난한 자를 말한다. 자신의 물질적 소유를 안전 장치로 삼는 <부유의 길>을 택하지 않고, 그저 하늘의 뜻에 따라 주어진 대로 누리며 사는 <가난의 길>을 택한 사람을 일컫는다. 즉 소유하려 하지 않으면 누리고 즐길 수 있으며, 물질적 궁핍이나 영적 궁핍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소된다”라는 뜻이다. 이런 삶을 살면 천국 즉 하늘나라는 종말론적인 천당이 아니라 이 세상이 곧 천국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쉽지, 어떻게 자본주의 세상에 살면서, 돈이 최고인 세상에 살면서 내 소유를 내려 놓을 수 있을까. 수명은 길어져 100세 시대에 살면서 노후 대책도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는 것은 물론,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도 전혀 보장된 것이 없는 불확성 시대에 살고 있는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예수의 삶처럼 <무소유> 의지로살 수 있겠는가? 그것도 먹고 살만 하고 가진 것이 있으니 베푼다고 여유를 부르는 것이지, 없는 사람에게는 씨도 먹히지 않을 것 같다. 돈은 있어야 산다. 그래도 이왕 살다 가는 인생이라면 다른 그 무엇이라도 베풀고 가야 하지 않을까?
베푼다. 나눈다. 기증한다 라는 불교적 용어가 보시(報施)다. 어떤이가 석가모니 부처님을 찾아와 호소를 한다. “저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으니 무슨 연유입니까?” “그것은 네가 남에게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는 가진게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털이입니다. 무엇을 나누어 준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느니라. 네가 아무 재산이 없더라도 나누어 줄 수 있는 일곱가지가 너에게 있느니라.” 그것을 불교에서는 <무재칠시 (無財七施)>라고 한다.
첫째가 화안시(和顔施)다. 부드럽고 정다운 얼굴로 남을 대하는 것이다.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좋은 얼굴이 있다. 첫인상일 수도 있다. 얼굴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탈랜트 처럼 잘 생긴 얼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화의 80%는 풍기는 외모 즉 비언어이며, 20%가 언어 즉 말이 라고 한다. 내가 비록 돈이 없어 가난하지만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 부드럽고 정다운 인상을 남기도록 하자.
둘째가 언시(言施)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하지 않는가. 사랑의 말, 칭찬의 말, 위로의 말, 격려의 말, 양보의 말, 부드러운 말 등이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이며 교양이며 무기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말에 대해서는 다음 주 칼럼에서 별도로 다루고자 한다.
세째가 심시(心施)다. 마음을 열어 상대방에게 따뜻한 마음을 주는 것이다.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고 하지 않는가. 내 마음이 진실되고 사랑이 충만하여 따뜻함과 온유함이 상대방에게 전달된다면 그것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겠는가.
네쩨가 안시(眼施)다. 눈은 마음의 창이다. 눈으로 말한다고 하지 않는가. 어떨 때는 백마디 말 보다는 사랑이 그윽한 눈으로 바라다 보는 것만으로도 용기를 얻는다.
다섯째가 신시(身施)다. 흔희들 말하는 육보시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 몸으로 봉사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가장 확실하게 다가갈 수 있는 보시다. 돈 없으면 몸으로라도 떼우라 하지 않는가. 주인 잘못 만나 몸이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 한번 더 움직여 상대방에게 기쁨과 위로를 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감사할 일이다.
여섯번째가 상좌시(床座施)다. 때와 장소에 맞게 자리를 내어 양보하는 것이다. 영원한 내 자리는 없다. 내가 낮아지면 된다. 양보의 미덕이 필요하다. 내가 낮아진다고 진정 내가 낮아진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일곱번째가 찰시(察施)다. 상대방을 잘 관찰하고 그 속을 헤아려 알아서 도와주는 것이다. 즉 배려다. 배려 깊은 사람은 상대방에게 감명을 주고 믿음을 준다.
이상의 일곱가지 무재칠시(無財七施)는 돈이 없어도, 가난하여도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상대방에게 베풀 수 있고 그로 인해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불교의 금강경에서는 보시 중에 진정한 보시를 <무주상보시(無住相報施)>라고 한다. 보시를 했지만 보시를 했다는 의식이 조금도 없는 보시, 즉 생색을 내지 않는 보시를 말한다. <가난한 마음>들이여, 돈은 없어도 우리 같은 서민도 베풀고 나눌 수 있습니다. 그분은 기억하실 거예요. 기 죽지 맙시다.
입춘대길 (立春大吉) (02/20/2015)
어제 밤 사이로 강한 칼바람과 더불어 눈이 제법 많이 내렸다. 이번주 내내 이번 겨울 중에 가장 추운 날씨인듯하다. 그래도 작년에 비하면 견딜만 하다. 작년에는 눈이 너무 많이 와 가게 문을 닫은 날이 2주일 가량 되었으니, 겨울 눈은 서민들 살림살이에 결코 반갑지 않는 손님이다. 어느새 입춘(2월 4일)이 지났다. 입춘 (立春)은 24절기 중에 첫째 절기로 대한 (大寒)과 우수 (雨水) 사이에 있다. 입춘을 入春이라고 쓰지 않고 立春이라 쓴 것은 <立>자가 ‘곧’이나 ‘즉시’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즉 본격적으로 봄이 들어선 것(入)이 아니라, 곧 봄이 시작된다(立)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봄을 기다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입추, 입동의 ‘입’자도 설 <立>이다.
흔히들 입춘이 되면 ‘입춘대길 건양다경 (立春大吉 建陽多慶)’이라는 한자어가 기억날 것이다. 입춘이 되면 아버지께서는 한지에 큰 붓으로 이 글을 쓰서 대문, 안방, 건너방에 부치시곤 하셨다. “봄이 이제 곧 시작되니 크게 길할 것이며, 따뜻한 기운이 넘쳐나니 경사스런 일들이 많으리라” 라는 뜻이다. 이 말뜻을 곰곰히 되씹어 보면 지금은 겨울이지만, 머지않아 곧 봄이 온다는 뜻이다. 즉 봄과 겨울은 계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겨울이 계절적 의미라면 겨울이라고 길한 일이 없으며 경사스런 일이 없겠는가. 또 봄이 왔다고 길한 일과 경사스런 일들이 더 많아지고 근심 걱정이 사라지겠는가. 아닐 것이다. 겨울은 현재의 삶을 의미하며, 봄은 더 나아지고 싶은 내일의 삶을 말하는 것일게다. 서민의 삶은 조선시대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힘들기는 마찬가지 것일게다. 그렇다고 맥놓고 망연자실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봄은 내 마음의 희망이며 소망이고, 등불이다. 그래서 이 추운 겨울날을 참고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산천초목이 흰 눈으로 뒤덮혀 온 천지가 하얀 날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인근 공원을 산책 했다. 그런데 놀라운 광경에 아내가 탄성을 지른다. 그 눈 덮힌 가지 사이로 새순 봉우리가 수줍게 감춰져 있는 것이다. 한 두나무가 아니라 온 천지의 나무가 봄이 올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저 나목들은 이 추운 겨울날을 그냥 추위에 떨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구나. 상처없이 어찌 봄이 오고, 상처없이 어찌 깊은 사랑이 움트겠는가. 도종환 시인은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저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니 이 대지에 봄이 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숲에는 질서와 휴식이, 그리고 고요와 화평이 있다. 숲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안개와 구름, 달밫과 햇살을 받아들이고, 새와 짐승들에게 보금자리를 베풀어준다. 그리고 숲은 거부하지 않는다.” 그는 <참고 견딜만한 세상>에서 “하나의 씨앗을 움트기 위해서는 / 흙 속에 묻혀서 참고 견뎌 내는 / 인내가 필요하다 / 그래서 사바 세계. / 참고 견디는 세계라는 것이다 / 극락도 지옥도 아닌 사바세계 / 참고 견딜 만한 세상. / 여기에 삶의 묘미가 있다.” 그렇다 극락과 지옥은 내가 선택하여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천국도 내 소관이 아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 내가 행복하게 살 것이냐, 불행하게 살 것이냐, 그것은 내 마음 먹기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내 지금의 삶이 눈보라 치는 겨울이면 어떠하랴. 겨울은 언제가는 지나갈 것이며, 지금 겨울이라는 것은 봄이 곧 가까이 왔다는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함께 참고 견디자.
그러면 어떻게 하면 내 삶이 따뜻한 봄 햇살처럼 행복할 수 있을까? 내 삶을 즐기는 것이다. 누군가 말하기를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고 했다. ‘봄날 만난 꽃과 나무에 대해 많이 아는 것 보다 꽃과 나무를 좋아하는 일이 더 중요하며, 좋아하는 것 보다 꽃과 나무와 함께 즐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역시 마찬가지로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 보다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그와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 함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이제 매화꽃 부터 시작해서 동백꽃, 산유화, 진달래, 복사꽃, 사과꽃, 배꽃, 개나리, 목련, 등등 아름다운 봄 꽃들이 차례대로 흐드러지게 피어날 것이다. 꽃이 피면 뭐하나. 주변에 사랑할 사람이 많으면 뭐하며, 좋은 사람이 많으면 뭐하나.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받아드리지 못하니 봄은 정작 왔건만 내 마음은 동토의 겨울이어서야 되겠는가. 내 마음을 크게 열자. 그리고 봄을 기다리자. 그럼 아마도 <앗싸, 대낄 (大吉) !!> 할 것이다. — 이말은 우리 세대가 어릴 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외치던 유행어다. 올 봄에는 우리 모두 <앗싸, 대낄> 합시다.ㅎㅎ.
부끄러움 (02/13/2015)
부끄러움 (02/13/2015) 요즘 한국 사회의 사건 사고를 보면 어떻게 사람으로서 저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상식 이하의 부끄러운 일들이 비일비재 하다. 세월호 침몰 사건, 안산 인질극 사건, 어린이집 폭행 교사 사건, 양양 방화범 사건, 땅콩 회항 사건, 백화점 고객 갑질 사건, 사회 지도층의 갑질 성추행 등등,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낯뜨거운 사건들은 인면수심 (人面獸心)이라고 해야 할까, 후안무치 (厚顔無恥)라고 해야 할까. 사람이 사람이길 포기한 것 같다. 그런데 가해자인 그들은 한결같이 “나도 피해자다” “나도 억울하다”로 변명한다. 국가든 사회든 개인이든, 부끄러움의 자정(自淨) 능력이 사라지는 세상이다. 이 이야기는 얼마전 JTBC 손석희 앵커가 중앙일보 권석천 논설위원의 <세월호 이후의 세상>이라는 칼럼을 인용하여 소개한 <사라진 부끄러움>에서 거론하였다. 어쩌면 이 시대의 문제점을 가장 신랄하게 지적한 대표적 어휘가 아닐까. 그는 말하기를 “현대인의 자기 소개서는 내가 아닌 나를 아무 거리낌 없이 적어내는 것을 말하며, 우리가 아이들이게 가르치는 것은 얼마나 자소설 (自小說)을 잘 쓰게 하는 것이다. 즉 스스로를 얼마나 잘 속이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날 때 죄에 대한 <부끄러움>을 알게 하시어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게 하셨다.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으며, 누구나 죽을 때까지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한국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기신 성철 큰스님은 그의 열반송에서 “일평생 남녀 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닿아 수미산보다 더 크구나” 라고 하셨다. 얼마나 큰 울림이며 큰 자성인가. 예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인간의 원죄는 사하여 주실 수 있지만, 인간 스스로가 살면서 짓는 죄는 죽는 날까지 끊임없이 회개하며 고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인간으로 해서는 안 될 분별력과 지성을 주셨다. 어느 종교에서도 역지사지(易地思之) 를 말씀한다. 항상 상대방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 보고 이해하라는 뜻이다. 내가 싫은 것은 남도 싫어하는 것이 당연하며, 타인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해서도 안되며, 강요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도덕이나 사회적 규범이 생기고 예의나 윤리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현대 사회는 <맘몬주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너나 없이 돈이면 모든 것이 다 되는 세상이다. 삶, 인생, 성공, 출세, 행복, 사랑, 공부, 결혼, 가족 관계, 인간 관계, 교회, 신앙생활, 등 이 세상의 모든 가치 기준이 결국은 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돈은 소유와 직결된다. 돈만 있으면 권력도 가지고, 존경도 가지고, 교회도 가지고, 사랑도 가지게 된다는 사고 방식이다. 온통 세상이 돈으로 미쳐가고 있다. 그러면서 부끄러움도 점점 사라져 갔다. 한국 기독교가 개독교로 지탄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기야 우리 같은 서민이야 돈이 있어봐야 그 맛을 알지..
요즘 흔히들 광분하는 <갑질> 논란도 그러하다. 인간의 본성에는 누구나 <갑>과 <을>이 내부적으로 존재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나보다 약한자에게는 군림하고 싶어하고 지배하고 싶어한다. 나보다 강한 자에게는 아부하고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 부자만이, 강한 자만이 <갑질>을 하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자도, 약한 자도 나보다 더 약한 자에게 <갑질>을 한다. 인간의 이중성이고 간악성이다. 다만 참고 억제하는 것은 <부끄러움>이 있기 때문이다. 약한 자를 강제로 괴롭히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할 짓이 아니라는 <부끄러움>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은 일명 속된 말로 <쪽팔림>이다. <쪽>은 얼굴이며 체면이다. 인격이며 지성이고 명예이자 상식이다. 하류사회에서 깡패와 양아치의 차이도 <쪽>의 차이다. 선비와 사무라이 (武士)도 <쪽>을 목숨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계층이다. 사무라이는 <쪽>이 팔렸다고 생각되면 <할복 자살 (割腹自殺)>을 해서라도 명예를 지킬려고 한다. 장교 훈련에서도 가장 강조하는 정신 교육이 <고도의 명예심>이다. 본래의 명문 집안도 돈이 많은 집안이 아니라 명예와 전통을 목숨보다 귀하게 생각하는 집안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부끄러움>이 사라진 시대가 되었다. 체면이, 명예가, 양심이, 정의가 밥먹여 주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대상이 불신의 시대인 것이다. 부모와 자식 관계도, 부부 관계도, 성직자와 교우 관계도, 선생과 제자 관계도, 사장과 직원 관계도, 인간의 모든 관계와 가치가 돈 앞에서는 무기력 하기만 하다. 가토 다이조의 <부끄러움의 심리>에서 보면 부끄러움이라는 인간의 심리는 두려움에서 발생한다고 한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거절에 대한 두려움, 자신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 존중>이 부족한 사람이다. 이런 자들은 체면과 명예욕과 허영심이 강하고 상대방으로 부터 쉽게 상처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더욱더 권위적이 되며 우월 의식이 강해지고 비교 의식에 따른 합일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끼리 끼리 문화>로 이어진다. 어쨌거나 부끄러움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지만, 현대인들 처럼 부끄러움이 상실된 <철판 시대>는 더 문제가 아닐까. 내 자신과 후세에게 <쪽> 팔리는 행동은 이제 그만 하도록 하자. 부끄러움을 배우자..
침묵의 대화 (02/06/2015)
현대인은 하루 하루가 정보의 홍수 시대에 살며, 또한 너무나 많은 소리(소음) 속에서 산다. 조용한 날이 없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에 손이 간다. 밤새 들어온 이메일과 세계 뉴스를 확인하고 TV를 통해 아침 뉴스를 듣는다. 연신 카톡으로 서로의 안부로 부터 시작해서 각종 신생 정보 퍼나르기가 시작된다. 살다보니 여러 단체에 가입하게 되고 그룹 카톡으로 묶여져 이곳 저곳에서 중복되는 정보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온다. <카톡!, 카톡!~~>쉴새 없이 울린다. 하는 수 없어서 전화기를 진동으로 해도 신경 쓰이기는 마찬가지다. 정보들의 내용도 천천히 살펴 보면 어디서 인용들을 하는지 하나 같이 모두가 <좋은 말씀>이다. 하지만 대부분이 <알고 있는 말씀>이기도 하다. 귀한 것도 너무 흔하면 귀한 것을 모른다. 현대인은 생각의 되새김질이 없다. <좋은 말씀>을 조용히 곱씹어 볼 생활의 여유가 없다. 그냥 눈으로 읽고 하수도로 흘려 버린다. 현대인은 사색과 사유 (思惟)를 싫어한다.
어느 철학자가 현대인은 <행복 이데오르기>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다. 행복도 민주주의, 공산주의 처럼 <이념>이 되어 버린 세상이다. 모든 말과 행동이 행복으로 귀결된다. ‘무엇을 하면 행복하고, 무엇을 하지 않으면 불행해진다.’는 식이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생긴지는 얼마되지 않는다. 어쩌면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 신기루인지도 모른다. 현대인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느 시대 때보다 더 잘 알고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런데 더 많이 불행하고 더욱 더 고독하고 외롭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다. 어느 목회자를 통해 설교를 듣던지 간에 어지간 해서 감동을 받지 않는다. 그 말씀이 그 말씀이다. 모두가 <좋은 말씀>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 식이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세계에서, 한국에서 내노라 하는 유명 목회자들의 설교가 즐비하다. 하물며 한 목회자로부터 새벽기도, 주일 예배, 수요예배를 십년 이상 계속 듣는다면 그렇고 그런 말씀에 무슨 울림이 있을 것이며, 무슨 영성이 자다가 벌떡 일어나 각성이 되겠는가?
사람들의 모임에서도 대화의 내용은 깊지가 않고 수다스럽기만 하다. 만나도 허구헌 날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만 하다가 헤어진다. 오히려 삶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심각하게 이야기하면 따돌림 당하기 십상이다. 모임에서도 시답지 않은 우스개 소리를 잘 해야 인기가 높다. 그래서 현대인은 대화가 많을수록 공허하다. 그래도 그것을 <관계의 미학>이라고 해야 하나? TV에서도 브라이어티 쇼가 대세다. 한미디로 수다 프로다. 저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무슨 목적으로 일반 대중들에게 공개하는지, 왜 시청자들은 재미있다고 보는지 나도 보면서도 잘 모르겠다. 현대인에게는 <좋은 말씀>이 없어서 고독하고 외로운 것이 아니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고독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데 그렇게도 많은 <좋은 말씀>이 필요할까? <사랑하라>는 그 말씀 하나도 평생에 걸쳐 지키지 못하는데.. <좋은 말씀>이 세상에 흘러 넘쳐난다. 현대인에게는 말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하며, 깨닫기 위해서는 침묵하고 묵상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 시급하다.
어느 종교에나 <침묵 기도>라는 것이 있다. 기독교에서는 <피정 (避靜)>이라고 하며, 불교에서는 <묵언 수행>이라고도 한다. 또 승가에서는 <동안거, 하안거>라 하여 일년에 3개월씩 두번에 걸쳐 묵언 정진을 한다. 피정의 사전적 의미는 일상 생활에서 잠시 벗어나 묵상이나 침묵 기도를 하는 종교적 수련을 말한다. 종교 단체가 아니더라도 유명한 <명상의 집>들도 있다. 피정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나는 묵언 수행을 선호한다. 유명 강사의 설교보다는 새벽에 눈떠서 잠자리에 들기 까지 오늘의 말씀 한가지만 깊게 묵상하며, 하루종일 산책하고 사색하며 침묵으로 지내는 것이다. 사람을 만나도 눈 인사만 하고 식사 시간에도 조용히 식사만 하는, 하루종일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 그런 생활을 일년 중에 단 일주일이라도 하면서 살고 싶다. 부부가 함께 참석해서 일주일동안 서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손잡고 산책하며 눈으로 대화하고 십자가 아래 무릎 꿇고 묵상 기도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은 인간과의 어떤 기도를 좋아하실까. 눈물이 콧물과 범벅이되어 울부짓는 절규의 기도를 좋아할까, 큰 소리로 고함치는 통성 기도를 좋아하실까. 어느 책에선가 이런 구절이 기억난다. 염력이 뛰어난 수도사가 신에게 통성기도를 드리는데 연못의 개구리들이 너무 시끄럽게 울어대자 개구리들을 울지 못하게 호통친다. 그러니까 신께서 수도사에게 이르시기를 “나는 지금 저 개구리와 나의 피조물인 자연들과 깊은 대화를 하고 있는 중인데, 왜 네가 방해를 하느냐? 너의 기도는 언제 들어도 똑같은 너의 일방적인 요구일뿐, 나와 진정으로 대화한 적이 있는가?” ‘진정한 대화는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라는 말이 있다. 이제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으면 말 좀 그만하고 살자. 입 좀 다물고 살자. 자연을 바라보자.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자. 신을 바라보자.. 그것이 진정한 침묵 속의 대화법이 아닐까..
슈퍼볼 (01/30/2015)
매년 1월 마지막 주 일요일 (올해는 2월 1일)은 미식축구 결승전이 있는 날이다. 미국인들이 만든 구기 종목이며, 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운동이다. 올해로 49회인 슈퍼볼은 작년 우승팀인 시애틀 시호크스와 3시즌 만에 슈퍼볼에 진출한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가 이번 주일에 우승을 겨눈다. 슈퍼볼 시청자는 1억1천명이 넘는다고 하며, 결승전 광고단가는 가장 비싸기로 유명하여, 30초짜리 광고가 350만달러 (약38억원)이다. 뿐만 아니라 막대한 TV 중계료, 하프타임 쇼 수입료, 당일 입장 수입료등 모든 비용이 천문학적 초특가이다. 한국의 현대자동차도 7년간 슈퍼볼 광고주였으니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나는 미식 축구 애찬론자다. 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재미있다. 나는 대학을 입학해서 가장 하고 싶은 동아리 클럽이 미식 축구부였다. 만약 내가 체력이 강하고 장골이었거나, 몸놀림이 단거리 선수처럼 빨랐다면 가입 신청을 해 보았을 것이다.
미식 축구는 영국 식민지 시대 때부터 시작하여 1876년 동부 아이비리그 대학들이 주축이 된 전미 축구연맹이 설립되면서 200년 이상 발전되어 온 운동이다. 럭비와 축구의 혼합 변형경기라고도 하지만, 실제로는 일명 <땅 따먹기 운동>, <프론티어 운동>이라고도 한다. 다른 운동과 달리 미식 축구는 수비시에는 상대편 선수들이 자기 진영으로 땅을 빼앗으러 오는 것을 막고, 공격시에는 상대 진영에 침투하여 한뼘씩, 한뼘씩 땅을 빼앗아 결국에는 엔드라인에 터치다운 하면 내 땅이 되어 이기는 게임이다. 따라서 어떤 구기 종목보다 전쟁의 다양한 전략과 전술이 가장 많이 닮아 있으며, 남의 것을 빼앗고 나의 것을 빼앗기지 않키 위해서는 강인한 체력과 냉철한 두뇌, 그리고 서로의 역할을 책임질 수 있는 팀웍이 필요하다. 따라서 부상이 많은 운동이기도 하며, 보호장비와 운동 규율이 엄격하기도 하다. 경기 규칙은 어찌보면 단순(?)하다. 총 100야드 땅을 따먹는 경기이므로 4번의 공격 기회동안 10야드를 전진하면 다시 4번의 공격 기회를, 못하면 상대방에게 공격 기회를 넘겨 주어야 한다. 그래서 공을 가지고 있는 선수에게는 <태클>, 공을 가지고 있는 않는 선수에게는 <블로킹>이라는 기술로 내 땅에 못들오게 온 몸이 부서지도록 막아야 하고, 한뼘이라도 더 남의 땅을 빼앗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게임이다. 작전이 많아 머리가 나쁘면 하지도 못한다.
그런데 막상 미국인들은 누구의 땅을 따먹겠다고, 빼앗겠다고 저러는 것일까? 미국이라는 이 땅은 누구의 땅이었는가? 이 땅의 원주인은 누구인가? 미국인들은 원주인들에게서 어떤 방법으로 이 땅을 빼앗었는가? 지금 그 원주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 준엄한 역사의 진실을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참회하지 않는 미국 역사에게 그들의 신은 어떤 용서를 할 수 있는가?
인디언들과 미국 청교도들의 인식은 근본적으로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류시화 시인이 쓴 인디언의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법,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라는 책 (918페이지)을 읽어보면 누가 더 예수 제자 다운 삶을 살았는가를 알 수 있다. 미국 정부(백인 추장)가 인디언들에게 땅을 팔라고 할 때 시애틀 추장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 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 판단 말인가? 그들은 어머니인 대지와 맏형인 하늘을 물건처럼 취급한다. 결국 그의 욕심은 대지를 다 먹어 치워 사막으로 만들 것이다.”
미국 초기 수많은 이민자들은 굶어 죽었다. 가난한 청교도들은 먹고 살 수 있는 땅만을 원했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땅도 주고 농사도 가르쳐 주어 살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래서 추수 감사절이라는 것도 만들어 인디언들에게 감사함을 표시도 했다. 그런 이민자들의 욕심은 점점 커져 간다. 원하지도 않는 담요 한장이나 위스키 한병을 주고는 엄청난 땅을 인디언들로 부터 샀다고, 서류에 서명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인디언들은 애시당초 땅(대지)은 인간의 소유가 될 수 없으며, 살 수도 팔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창조주가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살아야 할 공동의 땅이며 이 마저도 잠깐 빌려쓴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사고방식 자체가 소유와 무소유, 개인과 공동체 관리, 매매와 임대 등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청교도인 이민자들은 미국 땅을 정상적인 가격으로 매입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모르는 인디언들을 속여서 빼앗은 것이다. 그리고 나서 자기 땅이라고 말뚝박고 울타리 쳐서 못들오게 하니 인디언들과 싸우게 된 것이다. 전쟁을 밥 먹듯이 해온, 총으로 무장된 백인들을 자연 속에서 활로 사냥이나 하던 인디언들이 어떻게 싸워 이기겠는가. 이 책에서 보면 백인 선교사들이 인디언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하기 위해 성경말씀을 인용하자 인디언들이 하는 말. “아마도 예수는 우리와 같은 형제인 인디언이었던 것 같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삶은 예수의 말씀과 거의 유사하다. 그런데 백인 당신들은 예수 말씀대로 살지 않으니 말과 행동이 다른 당신들을 믿을 수가 없다.” 예수 말씀대로 살면 자본주의 이 땅에서는 쪽박차고 쫓겨나기 십상은 아닐까?
나비의 무게 (01/23/2015)
2014년도에 <삶의 무게>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는데, 그때 사람의 <영혼의 무게>가 얼마인지를 거론한 적이 있다. 과학자들은 21그램이다, 1온스다 하지만, 영혼의 무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의 그릇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항상 <메몬토 모리 (Memento – 기억하다, 생각하다. Mori –죽음)> 즉,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라는 취지로 쓴 글로 기억한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이탈리아 유명 작가 ‘에리 데 루카’가 쓴 <나비의 무게>를 읽으면서 나비는 얼마나 무거울까, 한모시보다 더 얇은 날개를 가진 나비의 무게를 생각해 보았다. 이 책에서 한마리 나비의 무게란, 긴 세월이 흘러서 쌓인 인생의 무게 위에 더해지는 생의 마지막 순간을 상징한다. 그러니 나비의 무게는 각자 살아온 삶의 무게인 셈이므로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책의 줄거리는 담백하다.
천적인 두 왕의 이야기다. 산에는 산양들의 왕이 있고, 외딴 산 오두막에는 산양들을 사냥하며 혼자 사는 사냥꾼의 왕이 있다. 둘다 각자의 세계에서 왕으로 인정받고 살면서 누릴만큼 누린 생의 베테랑이다. 하지만 둘은 원수지간이다. 사냥꾼이 산양왕의 어미를 죽였기 때문이다. 산양왕은 산양들 중에 힘이 가장 강한 왕이었고, 도주의 달인이었으며, 사냥꾼은 추격의 달인이다. 마침내 인간과 산양 사이에 결전이 벌어지지만 누구에게도 승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생의 막바지에 다다른 두 왕이 과거를 청산하고 하나가 되었을 때 그들의 늙고 지친 몸위에 가늠할 수 없는 무게로 한마리의 나비가 내려 앉는다. 나비의 무게가 무거운 것은 그것이 그들의 삶과 고난의 무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들의 최후를 결정하는 것은 삶의 무의미하고 허망하고 가볍기 짝이 없는 무게, 나비의 무게이기도 하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마주 해야 하는 것은 질곡의 삶을 평생 살아온 천근의 무게도 아니요, 부귀와 재물과 명예로 채워진 만근의 무게도 아니다. 신이 나를 오라고 부르시는 나비의 날개짓이며, 내 육신 위에, 내 살아온 날들의 무게 위에 살포시 내려 앉은 나비의 무게만큼이나 가벼운 것이다. 그래서 자연의 힘은 위대하고 창조주는 전지전능하신 것이다. 작가는 사냥꾼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그의 인생은 계절의 운율을 타고 세상을 따라 흘러갔다. 끊임없이 혼자만의 힘으로만 구축해온 인생이었지만, 그러나 그것도 온전히 그의 것만은 아니었다. 되돌려 주어야 할 물건이었다. 다 쓰고 낡아서 너덜너덜해진 인생이었지만 이제 되돌려 주어야 했다. 그 얼마나 넓은 아량을 가진 채권자란 말인가. 새것을 빌려주었다가 버려도 아깝지 않을만큼 헌 상태로 되돌려 받는 그분은 말이다.”
그렇다. 산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삶의 무게가 무거운지 몰랐다. 살다보니 내 육신과 삶은 너덜너덜이라는 표현이 꼭 맞을 만큼이나 보잘 것 없다.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왜 그렇게 정신없이 살았는지, 그렇게 살아온 지금 나에게는 무엇이 남았는지 음미해 보아야 한다. 엘리자베스 쿼블러로스는 <생의 수레바퀴>에서 암에 걸린 어린 소녀에게 <꿈꾸는 나비 고치>라는 제목으로 편지를 쓴다. “우리가 지구에 보내져 수업을 다 마치고나면 몸은 벗어버려도 좋아. 우리의 몸은 나비가 되어 날라오를 누에처럼 아름다운영혼을 감싸고 있는 허물이란다. 때가 되면 우리는 몸을 놓아버리고 영혼을 해방시켜 걱정과 두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신의 정원으로 돌아간단다. 아름다운 한마리의 자유로운 나비처럼 말이다.” 그렇다. 우리의 육신은 허물을 벗은 고치에 지나지 않는데, 그 육신을 가꾸고 치장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한 것은 아닌가. 빌린 내 육신을 너무 무책임하게 혹사시킨 것은아닌가. 나의 영혼으로 변신한 나비는 과연 아름다운 모습으로 신의 정원에 날라 갈 수 있을까.
도교의 시조인 장자는 <나비의꿈>에서 “꿈속에서 나비로 날고 있다가 깨어났지만, 과연 자신은 나비가된 꿈을 꾸었는지, 그렇지않으면 지금의 자신은 나비가 꾸고 있는 꿈인가 ?”라는 설화다. 즉 꿈과 현실, 나비와 나 자신 중에서 무엇이 진실인가가 중요한 것이아니라, 자신이라는 본질에는 변화가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꿈일 수도 있고, 죽은 후에 갈 천국이 꿈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승과 저승, 현실과 천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본질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 영혼이 맑고 깨끗하면 이승에서 살든, 천국에서 살든 향기로울 것이니 항상 내 영혼을 갈고 닦아야한다는 것이다. 나비의 무게가 천근만근 무거울 수도있고, 바람처럼 가벼울 수도 있다는 것이다.
소싯적(少時的)에, 물론 아내를 만나기 전에 한 여인과 연애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여인은 연애편지에 꼭 나비우표를 붙여서 보내왔다. 그것도 매번 다른 나비들을 말이다. 헤어진 후 나비의 사연을 알았다. 한마리의 나비는 한 영혼이 떠나면서 남긴 마지막 소망이라는 것을.. 그 여인의 마지막 소망은 무엇이었을까?
가난한 도시 속의 빈곤 (01/16/2015)
2015년도 새해에는 우리 한인 서민들 살림살이가 좀 나아지려나 하는 기대감을 가져본다. 나는 8년동안 해마다 <한인 지역경제 칼럼>을 쓰는데, 점점 더 사태가 나빠지는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이제는 가난이라는 올가미에서 벗어나기가 정녕 어려워진 것인가. 얼마전 지역 신문에 우리가 사는 필라델피아가 미국 전체 150개 도시 중에서 빈곤율이 130위, 식량 자급율 148위, 미국 10대 도시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도시라는 기사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왜 하필이면 내가 이민을 선택당한 도시가 가장 가난한 도시란 말인가. 이왕하는 고생이라면 잘 사는 도시, 부자인 도시에서 살아야 장사도 잘 되고 돈도 잘 벌 것 아닌가. 부익부, 빈익빈이다. 돈이 돈을 만들고 부자가 부자를 만든다. 나는 한국에서 살 때에도 가장 부자 지역을 의도적으로 선택해서 살았다. 호황기 때는 가장 경제적 혜택을 많이 받고 불황기 때 가장 영향을 적게 받는 곳이 부자촌 지역이다. 이것이 부자의 기본 공식이다. 그런데 내가 사는 이 지역이 가장 가난한 도시라니, 그렇다고 때 늦은 나이에 부자 도시로 이사를 가서 다시 시작할 수도 없고 마냥 허탈할 뿐이다. 주요 원인은 필라델피아의 특수성이다. 대부분의 한인들은 필라델피아에서 장사를 하지만, 필라델피아에서 살지 않는다. 사는 거주지는 펜실베니아 외곽지역이나 사우스 뉴저지 부촌이다. 비단 한국인만 그러하겠는가. 주류인 백인들도 마찬가지다. 가난한 미국 도시는 흑인들의 거주 지역이다. 이것은 미국 도시의 인종 차별적 상징이다. 돈의 수익은 필라델피아에서 만들고, 돈의 소비는 부유층 외곽지역에서 이루어지니 도시의 재정 자립도가 낮을 수 밖에 없다. 도시가 가난하니 부도를 막기 위해 영업세, 부동산세 등 각종 세금은 올라가고 담배값, 공공요금은 비싸진다. 언젠가는 주류(술)에도 손을 델 것이다. 가난한 도시에서 특히 가난한 흑인들을 상대로 장사해서 먹고 살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수 밖에 없는 구조다. 미국은 유럽식 사회주의 제도를 추구하는 나라가 아니다. 부자가 가난한 자에게 수익을 배분하는 나라가 아니다. 철처한 부자들을 위한 나라이다. 빈부의 격차는 점점 더 심해질 수 밖에 없다.
나는 부자로 살다가 한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가난이라는 수렁에 빠졌다. 가난에서 탈출할려고 10년 이상을 몸부림쳤지만 좀처럼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가난은 점점 더 혹심한 가난으로 빠져들게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가난은 되물림 된다고 말한다. 세계인구의 1천2백만명 이상이 매년 극심한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경제학에서 가난을 세등급으로 나누는데 첫째가 <절대적빈곤>이며 이는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의식주도 해결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세계인구의 5명중 1명꼴이다. 두번째는 <견딜만한빈곤>으로 간신히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가 해결되는사람을 말하며, 세번째는 <상대적빈곤>으로 한 국가의 소득기준으로 볼때 하위계층의 사람들로 문화적 혜택이나 질좋은교육, 높은수준의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아마도 미국에 사는 한인사회 서민들은 <상대적빈곤>에 해당될 것이다. 나는 직업상 한인사회의 많은 부자들도 만나고 가난한 자들도 만난다. 부자 한인들은 가난한 한인들이 얼마나 힘든지 알지 못한다. 부자들은 가난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지금의 가난한 자는 가랑비에 옷젖듯이 가난이 10년 가까이 누적되어 버렸다. 크레딧은 망가질대로 망가지고, 그동안 모아둔 비상금들은 야금야금 다 써버렸다. 가진 돈이 없다. 일자리를 구하기도 정말 어렵다. 어렵게 구한 일자리는 오래가지 못한다. 함께 이민와서 같은 교회를 섬기지만 빈부의 격차가 점점벌어지니 자존심이 상해서 서로에게 힘들다는 말도 하지 못한다. 자본주의는 교회마저도 빈부의 격차로 차별화시킨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가난이 없었던 시대나 지역은 없었다. 권명중 교수가 쓴 <경제학, 성경에서길을 묻다>에서 보면, 성경에서는 가난을 <선택의자유>라는 관점과 <인간의탐욕>이라는 두가지 관점에서 다룬다. 가난의 첫번째 원인을 <게으름>이라고 했다. 일하기 싫어하거나 마지못해 일을 하면 가난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한인사회의 대부분 서민들은 게으르지 않다. 그들에게 먹고 사는 문제는 생존이지 선택이 아니다. 가난한 이민자가 일하지 않으면 죽는다. 부부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자식들도 학업을 중단한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 둘째는 <잘못된선택>이다. 잘못된 선택 때문에 가난에 빠지는 것은 불가항력적이다. 많은 한인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또 얼마나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을지 암담할 뿐이다. 그렇다고 주급생활이 해결책은 결코 아니다. 또 다시 선택해야 한다. 세번째 원인은 <불합리한 사회제도>나 <사회적 불의>이다. 성경에도 사기를 친 자들이 벼락부자가 되어 세도를 부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한 구절들이 많이 나온다. 인간의 탐욕이 불합리한 사회제도나 사회적 불의와 합쳐져 빈부의 격차를 더 심하게 만들고 필요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부작용이다.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는 한, 인간사이에서 발생하는 빈부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재산 축적의 원리는 눈덩이가 불어나는 원리와 같다. 부의 쟁탈전에서 한번 가난해진 사람은 언제나 패자가 될 수 밖에 없고 궁극적으로는 신이 준 <선택의자유>마저도 빼앗기게 된다. 방법은 하나 뿐이다.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이다. 그 길 밖에 없다. 아니면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드리고 체념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건 너무나 굴욕 적이지 않은가. 힘내세요. 깨어지든, 부서지든, 끝까지 해봅시다. 화이팅 !!!
희망가 (希望歌) (01/09/2015)
새해에 누구나 새로운 계획을 짜고 새로운 꿈을 꾼다. 에디슨은 “이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을 일하는 사람,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희망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우리 모두는 일을 한다. 설령 내가 하는 일이 돈버는 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일을 통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그로 인해 내가 즐겁고 힐링이 된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또 한편으로 먹고 살기 위해 억지로 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할 일이 있고 그것을 할 수 있는 건강이 허락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새해에도 열심히, 즐겁게, 신나게, 성실하게 일하도록 하자. 사랑이야 어제 오늘만도 아니고 평생 해야 할 그분의 최고 명령이니 죽는 날까지 내가 사랑하면 되는 일이다. 희망도 그렇다. 내가 처해진 환경이 절망이거나 부유하거나 간에, 내가 원(願)을 세우고 내가 찾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일도 내가 하는 것이고, 사랑도 내가 하는 것이고, 희망도 내가 찾아서 만드는 것이다. 그래야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매일 희망을 갖고 열심히 일과 사랑을 하다보면 저절로 행복은 만들어 지는 것이다. 이것을 <행복의 공식>이라고나 할까?
적어도 우리 세대 이상은 <희망가>라는 노래를 많이도 들었고 또 많이도 불렀다. 제목을 <이 풍진 세상>이라고 기억할 정도로 이 노래를 생각하면 막걸리, 골목길 대포집, 삶의 질곡에 비틀거리는 아버지들의 뒷모습, 자유와 민주에 좌절하던 젊은이들, 박봉에 시달리는 말단 직장인들이 기억난다. 맨정신에 부른 기억은 별로 없고 술이 어느정도 취해야 <희망가>나 <사노라면>을 불렀던 기억이다. 작곡, 작사가 미상으로 알려진 이 곡은 1850년경 미국인의 찬송가로 재탄생되었다가 1910년께 일본에서 배 침몰 사건의 진혼곡으로 불리던 것을 1920년대 재일 한국 학생이 작사를 해 부른 것이 지금까지 80년이상 서민들 애창된 곡으로 되었다. 1,2절 노래 가사처럼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세상 만사가 일장 춘몽이고, 담소화락 (談笑和樂)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니 세상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하겠는가.” 어찌보면 허무적이고 현실 도피성 절망가라고 할 수도 있지만, 곰곰히 되씹어 보면 희망의 정의는 세상의 부귀영화, 출세, 부자, 명예, 주색잡기, 유행 등 세상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그분께 부끄럽지 않기 위해 <항상 깨어 있으라>는 준엄한 충고로 들린다. 진도가 너무 나갔나??
코넬 대학교의 세계적 사회학자 칼 필레머 교수가 쓴 <내가 알고 있는 걸 당신도 알게 된다면> 저서 중에 <하강의 미학>을 소개하고자 한다. 일명 <지는 해를 즐기는 법>이다. 17세기 정치인이자 시인이었던 앤드루 마블은 나이드는 것에 대한 느낌을 단 두줄로 표현한다. “그러나 나는 등 뒤에서 듣는다. 시간이 날개달린 전차처럼 달려오는 소리를.” 그러나 늙는다는 것을 피할 수도 없지만 슬픈 것만도 아니다. 두려움 없이 나이들기 위한 5가지 조언을 소개한다.
- 나이 먹는 것은 생각보다 괜찮은 일이다 : <고개마다 다른 기쁨이 있다> “우리는 지금 길의 끝에 서 있는 것이 아니야.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 있는거지.” 그러니 쓸데없이 나이듦에 대한 걱정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노년의 삶은 기회이자 모험, 성숙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나이를 먹는 건 탐험과 같다. 노인 대다수가 노인의 삶에 대하여 ‘평온함’ ‘존재의 가벼움’ ‘고요하고 평화로운 일상’등 긍정적인 말로 표현한다.
- 100년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 몸을 아껴라. : <젊을 때, 100년 쓸 몸을 만들어라> 건강에 해를 끼치면서 “얼마나 오래 살든 신경 안 써”라는 변명 따위는 하지 마라. 병은 쾌락의 이자다. 흡연, 형편없는 식습관, 과음, 운동부족 같은 것들로 일찍 죽지는 않는다. 몇년 혹은 몇십년 동안 만성질환에 시달리며 고통받을 뿐이다.
- 아직 오지도 않은 죽음을 미리 걱정하지 마라 :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은 없다> 죽음을 걱정하느라 불안해 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대신 그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비해 계획을 잘 세워두라.
- 관계의 끈을 놓치 마라 : <배우고 다가가라>. 중년 이후에 찾아 올 사회적 고립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중년에 접어들면 의식적으로 새로운 기회와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관계의 끈을 놓지 않는 두가지 전략은 첫째, 배울 기회를 이용하라. 둘째, 관계의 끈을 유지하고 새로 엮기 위해 노력하라.
- 노후의 거처를 계획해 두라 : <미루다 늦는다>. 주변 노인들이 노인 거주시설에 막연한 두려움과 편견을 갖고 있다면 방치하지 마라. 삶에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꼭 기억해야 할 요점은 <나이와 싸우지 마라>이다. 나이와 싸우지 말고 노화과정을 받아들이고 신체 능력과 상황에 맞춰 적응하라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러한 과정을 <보상이 수반된 선택적 최적화 : Selective Optimization with Compensation>라고 부른다. 성공적으로 나이 먹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가장 가치있는 일을 <선택>하고, 그 일에 집중함으로써 상황을 <최적화>하고, 능력을 극대화해 상실한 다른 능력을 <보상>한다’는 것이다. 쉽게 표현하면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며 열심히 일하고, 희망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며 즐겁게 살다보면 행복이라는 보상이 주어진다”이다. 요점 정리 끝.
새해 해돋이 (01/02/2015)
매년 새해가 되면 동해의 푸른 바다 정동진이 기억난다. 한국 드라마 <모래시계>로 더 유명해진 정동진의 간이 기차역이 생각난다. 나는 동해안 해변도로와 백사장을 무척 좋아했다. 시간만 나면 차를 몰고 동해안으로 갔다. 내가 마지막으로 정동진을 찾은 때가 어언 15년이 지났다. 이민온지 14년이 되었으니까 세월의 빠름이 덧없기도 하다. 지금은 그곳도 많이 변했겠지. 그때는 내 형편이 지금보다 훨씬 더 막막했다. 사업10년차 때 졸지에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기에, 자식들 중고등학교 등록금 조차 낼 돈도 없었다. 그 이후 새로운 자본주를 만나 창업한 회사는 말이 밴처회사 사장이지 투자유치를 하지 못하면 사표를 써야 하는 월급쟁이 사장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가진 돈이 없으니 무슨 장사라도 해 볼 수가 없고, 무엇을 해야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 있을지 앞날이 깜깜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아내는 말없이 결심했다.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언니가 사는 미국으로 무작정 이민가기로 한 것이다. 미국으로 가는 길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미국에 가면 자식들 공부는 시킬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하든 밥은 굶지 않을거라고 아내는 믿었다. 남편이 없어도 아내 혼자서 자식들을 키울 수 있을거라고 믿었다. 언제 다시 가족들이 만날 기약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12월 31일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정동진으로 이별여행을 갔다. 바닷가 민박집에 짐을 풀고 새해 첫날 새벽에 백사장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가족 모두가 서로의 손을 잡고 정동진 해돋이를 보았다. 서로가 아무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저 수평선 아래에서 솟아 오르는 찬란한 태양을 바라보며 각자의 희망을 눈부신 아침 햇살에 실어 보냈을 것이다. 그날 새벽 햇살에 비추어진 아내의 모습은 강하고도 결연했다. 아내가 어쩌면 나보다 더 강하다는걸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우리집 이민 역사는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아무런 정보도 없이 오로지 막연한 희망만으로 시작되었다.
그때를 돌이켜 보면, 지금처럼 미국 이민 생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더라면, 그래도 미국으로 이민올 생각을 했을까? 불법체류자 신분이 무엇인지, 영주권이 무엇이며, 어떤 과정을 거쳐 몇년의 시간이 소요되어야 영주권을 받는지, 기다리는 기간 동안 자녀가 스무살을 지나면 그 자녀는 어떻게 되는건지, 불법체류자가 겪어야 할 두려움과 불이익은 얼마나 많은지, 흑인 동네에서 구멍가게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지, 영어를 못하는 부모가 겪는 수모와 미국 사회에 대한 무지가 가져다 주는 무기력과 슬픔이 얼마나 큰지, 가난한 이민자가 미국에서 청소년 자녀를 키우는게 얼마나 힘든지, 유일한 혈육인 친척과의 의견이나 사고방식이 얼마나 다르며, 그로 인한 서로의 상처가 얼마나 큰지, 손바닥만한 한인 사회에서 여러 사람들과 부대끼며 마음 붙이고 사는게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지, 불경기에 장사해서 먹고 산다는게 얼마나 불안한지, 남의 집 주급 생활하는게 얼마나 서러운지, 미국에서 의료보험 없이 아프면 얼마나 두려운지, 이런 저런 이민 실생활을 알고나면 결코 쉽게 이민을 결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 50년 가까이를 살아온 남자의 이민 결정은 더욱 더 힘든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에 남았다면 지금 이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을까? 적어도 내 아내는 이민 온 것에 대해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훨씬 더 많다고 감사하는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희망은 막연함이다. 희망은 준비되고 구체적이고 논리적이고 정량 (定量) 적인 기대치가 아니다. 희망은 평등하지도 공평하지도 않다. 희망은 요구하는 각자의 몫이다. 희망은 고통 속에서 피어나며, 희망은 절망이 클수록 간절한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희망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희망이 없다면 그분이 없는 십자가와 같다. 희망은 등대며, 믿음이다. 희망은 분배도 선택도 아니다. 희망은 찾는 자에게만 보인다. 희망은 오로지 그 길 밖에 보이지 않으므로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의 갈급함이다. 희망은 내 인생의 길을 걷는 동안 나와 항상 함께 하여야 할 그분과 같은 존재다.
이해인 수녀님의 <새해엔 이런 사람이>라는 시가 있다. 그 시를 요약하면 “신뢰와 용기로써 나아가는 기도의 사람, 밝고 맑게 살아가는 희망의 사람,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의 사람, 말보다는 행동이 뜨거운 진실로 앞서는 사랑의 사람, 화해와 용서를 먼저 실천하는 평화의 사람, 작은 것에서도 의미를 찾아 지루함을 모르는 기쁨의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리고 맨 마지막 부분에 “욕심을 버리는 연습, 자기 뜻을 포기하는 연습을 통해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 오늘은 지상에 충실히 살되 내일은 홀연히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순례의 사람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는 시귀가 제일 내 마음을 적신다. 수녀님은 새해 희망을 <희망에게>라는 시에서 이렇게 시작한다. “하얀 눈을 천상의 시(시)처럼 이고 섰는 / 겨울 나무 속에서 빛나는 당신 / 1월의 찬물로 세수를 하고 / 새벽마다 당신을 맞습니다.//~~”
우리 모두 새해의 희망을 갖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새해 한해도 어려운 일, 힘든 일, 괴로운 일, 슬픈 일, 아픈 일들이 당연히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먼저 사랑하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감사하자>. 힘들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여, 우리 모두 새해에 희망이라는 주머니를 옆구리에 차고 함께 길을 걷자. 그러면 새로운 희망이, 더 큰 희망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