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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과 응전 (7/6/2012)
영국의 역사학자 토인비는 그의 명저 <역사의 연구>에서 인류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 (Challenge and Response) 의 과정으로 정의한다. 외부의 도전에 효과적으로 응전했던 (살아남은) 민족과 문명은 번성하지만, 그렇지 않은 문명은 사라졌다. 또 도전이 없는 민족이나 문명도 무사안일에 빠져 사라지고 말았다. 존 F 케네디는 역사는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책이라고 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굴러가야만 그 자국을 남긴다.
재미있는 사실은 고대문명과 세계 종교지의 발상지가 모두 척박한 땅이었다는 것이다. 토인비는 문명을 일으킨 자연 환경은 안락한 환경이 아니라 대부분 가혹한 환경이었다는 것이다. 성공적으로 응전한 사례로 이집트 문명, 수메르 문명, 미노스 문명, 인도문명, 중국 문명등을 들수 있다. <나일강의 선물>은 무엇인가. 나일강변은 수량이 풍부하고 땅이 비옥해서 농사짓기에 적합하였지만, 해마다 반복되는 나일강의 범람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에 범람 시기를 측정하기 위해 천문학, 태양력이 발달하고, 경지 측정을 위한 기하학이 발달, 제방 공사를 위한 도드래와 수레가 발명되었다. 중국도 강물이 유순하고 땅이 비옥한 양쯔강이 고대문명의 발원지가 아니라, 해마다 범람이 반복되는 황하강이 고대문명의 발원지다. 성경에서도 40년 광야생활을 마치고 약속받은 땅이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었을까>에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역사학자들도 많다. 그곳은 그때나 지금이나 모래바람이 부는 척박한 땅이라는 것이다. 약속의 땅은 실체가 쓸모없는 척박한 땅이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시험에 대한 유대민족의 도전이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유대민족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포도나무를 심고 양들을 키워 <젖과 꿀이 흐르는 >살기 편한 땅으로 만들었다는 <응전>이다.
토인비의 <청어이론> 혹은 <메기이론>이 있다. 영국인들은 아침을 푸짐하게 먹는데 그 중에서 청어는 영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생선이다.그래서 일명 영국인들을 ‘연제청어’ 라고도 한다. 그런데 청어는 북해나 베링해협 같은 먼 바다에서 잡히는데 배에 싣고 오는 동안 청어들은 대부분 죽는다는 것이다. 간혹 살아있는 청어는 죽은 청어의 몇배 비싼 가격에 팔린다는 것이다. 그런 어느날 청어를 운반해 오는 수조에 물메기 (곰치 혹은 아귀와 흡사한 모양) 몇마리를 넣었더니 잡혀 먹히지 않으려고 힘껏 도망다니는데, 도착할 때까지 대부분의 청어가 살아 있더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꾸라지 양식장에 메기 몇마리를 함께 넣었더니 대부분의 미꾸라지가 싱싱하게 살아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즉 토인비는 <청어 이론>을 통해 가혹한 환경이 문명을 낳고 인류를 발전시킨 원동력이라는 역사 이론을 주장하는 것이다.
반대로 <도도새의 법칙>이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도도새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도도새는 인도양의 작은 섬 모리셔스에서 서식하고 있었다. 이 섬은 자연환경이 뛰어나고 먹이가 풍부하며 천적이 없는 에덴동산과 같은 곳이었다. 처음 이 섬을 발견한 포르투칼 선원들이 날아가지도 못하는 이 새를 보고 ‘바보, 멍청이’라는 포루투칼어로 <도도>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외부의 사람들과 동물들이 유입되면서 이 도도새는 멸종하고 말았다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외부의 침략이나 도전없이 스스로 사라진 <마야문명>이 있다. 기원전부터 화려한 문명을 꽃피우다가 AD900년경에 갑자기 사라졌다. 여러가지 학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외부의 침략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세계에서 가장 시련과 도전을 많이 받은 민족이 누구인가.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3천년의 역사를 떠돌아 다니면서 수많은 도전에 응전하여 살아 남은 민족이다. 그래서 지금은 세계 인구의 0.3%에 불과한 그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민족이 된 것이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 자신의 <생의 수레바퀴>는 굴러가는가, 멈추어 섰는가. 또 어떤 흔적을 남길 것인가. 인생은 도전의 연속이다. 도전을 멈춘 인생은 굴러가기를 포기한 수레바퀴와 같다. 도전하는 삶이 청춘이다. 믿음 생활도 도전의 연속이어야 한다. 지금의 도전과 시련이 힘겨울 수 있다. 하루하루 사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힐수도 있다. 가난하고 버티기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무너져서는 안된다. 아니 멈추어서는 안된다. 멈춤은 몰락의 시작이다. 응전하여 살아 남아야 흔적을 남길 수 있다. 50대 이후의 한인 세대들은 기억한다. 까막득한 깡촌에서 자식들을 8명, 9명씩 주리주리 낳고 키우면서, 보리고개에 먹을 것이 없어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으면서 살아남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을.. 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세대들은 죽지 않고 살아 남았기에 오늘날의 한국을 만들었고 한강의 기적을 만든 것이다. 지나온 도전과 시련이 생존의 에너지가 됨을 감사하자. 하지만 지금의 풍요로운 자식 세대들은 어떠한가. 이들이 <도도새>가 되는 것은 아닌가.
<몰락의 법칙>이 있다. 인류 역사에 영원한 국가도 없고 영원한 부자도 없다. 부자가 3대를 못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의 저명한 컨설턴트 짐 콜린스는 그의 저서 <위대한 기업은 어떻게 망하는가>에서 성공의 도취가 몰락의 전조라고 진단했다. 어느 한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기업은 성공에 도취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몰락의 1단계이다. 성공에 도취하고 나면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될 것만 같다. 즉 ‘원칙없는 확장의 단계’로 접어든다. 그것이 몰락의 2단계이다. 이렇게 3단계,4단계,5단계를 거치면서 풍요로움은 몰락으로 종말을 고한다. 가난하다고 기죽지 말고 부자로 성공했다고 껍죽대지마라. 지금의 가난은 풍요가 기다리고, 지금의 풍요는 몰락이 기다린다. 인생은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다. 내 생의 수레바퀴로 남길 흔적을 고민하자..
선택과 집중 (7/13/2012)
불경기가 장기화되면 가장 많이 듣는 용어가 <Slim 화 작업> 혹은 <구조조정>이다. 생산 가치가 떨어지는 사업이나 직원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경영자도 인간적으로 정말 못할 짓이다. 하지만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하는 과정이다. 모두를 다 끌어안고 험난한 길을 헤쳐나갈 수는 없다. <선택>해야 한다.
이민자 여러분의 사업과 생활에는 구조조정할 대상이 없는가. 경영자들은 바쁜 직원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생산 가치가 높은 직원을 원할 뿐이다. 이민자의 소규모 사업에도 바쁘기는 누구 못지 않게 바쁜데 흔한 표현으로 영양가가 없다. 낮에는 낮이라서 바쁘고, 밤은 밤이라서 바쁘다. 일은 많고 만나는 사람도 많은데 돈이 되지 않는다면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선택>해야 한다.
이민 사회 사업도 온갖 상품을 모두 취급하는 만물상이 더 바쁘다. 무슨 Account가 그렇게도 많고 상품수는 왜 그렇게 많은지 모두 기억조차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영양가 (사업가치)가 없다. 비근한 예로 한국 음식점에 가면 못만드는 음식이 없고 안되는 음식이 없다. 이해는 할 수 있다. 가뜩이나 장사가 안되는데 모처럼 오신 손님을 되돌려 보낼 수가 없다. 아니 옆 가게에 손님을 빼앗길 수 없다. 그러니 손님이 찾으면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민 초창기에 놀란 일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함흥냉면을 엄청 좋아한다. 함흥냉면과 짜장면은 무조건 곱배기라는 공식이 내 머리에는 문신처럼 박혀있다. 사실 물냉면은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것이 음식점 물냉면보다 더 맛있다. 그런데 함흥냉면은 면발이며, 홍어 끼미며, 쇠고기 편육이며, 구수한 육수 물을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는게 여간 어렵기도 하고 진정한 함흥냉면 맛이 나지를 않는다. 그러던 어느날 함흥냉면 전문집이 생겼다. 얼마나 감사한지 빨리 가서 먹고 싶었는데 차일 피일 미루고 못갔다. 속으로 ‘저 집은 대박이 나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년도 지나지 않아 그 함흥냉면 집이 문을 닫은 것이다. 한번 먹어보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가장 큰 이유가 이곳 한인 사회가 전문 음식점을 하기에는 시장이 너무 작다는 것이다. 가족이 모처럼 외식을 나가면 각자 원하는 음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업을 <전문화> 해야 하는 것은 알지만 수요가 따라 주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너나 나나 없이 만물상이 되는 것이다. 서로가 부둥켜 안고 침몰하는 과정이다.
만약 <선택>이 <전문성>으로 안된다면 <단순성>으로 검토해야 한다. 세계적인 그래픽 디자이너인 MIT의 존 마에다 교수는 그의 저서 <단순함의 법칙>에서 ‘단순함은 디지탈 시대의 성공 키워드라고 한다. “Less is more !” 그의 디자인의 철학이다. 조금 모자란듯이 비워 둔 여백이 훨씬 더 많은 상상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그의 단순함은 극단적인 단순함이 아니라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군더더기를 없애는 것을 말한다. 스트브 잡스가 애플을 기적처럼 회생시킨 단 한가지 화두는 <우아한 단순함>이었다. 그 회심작이 ‘아이팟’이다. 20세기 거대한 난파선 GE를 살린 잭 웰치의 처방도 단 한 줄이다. “1등, 2등만 남기고 모든 처분하라.” 1981년 그가 취임했을 때 GE는 무려 250가지 사업분야에 손을 뻗고 있었다. 매출은 70억달러, 순익은 18억 달러였다. 그는 <선택과 집중>전략을 택했다. 이런 혹독한 워크아웃을 거친 후 1998년 GE 실적은 1,005억 달러 매출에 93억 달러의 순익을 창출했다. 그기 취임한지 14년만에 매출은 14배, 순익은 5배가 성장한 것이다. 물론 한인 소규모 사업체와 동격 비교는 무리다.
<오컴의 면도날 법칙>이 있다. “복잡한 것은 진리가 아니다. 진리를 구분하는 기준은 단순함이다.”가 그의 명제다. 여러개의 가설과 가정이 있어야만 설명이 가능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이론에 스콜라 철학의 창시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물론 기독교 철학이 수호해 왔던 수많은 진리와 가치들이 잘려 나갔다. 그래서 그의 이론을 <면도날 법칙>이라고 한다. 동일한 현상을 설명할 때 두개의 상반된 의견이 맞선다면 그 중 가장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진리이다. 예를 들어 신학은 성경하나로 충분하며, 중세 교황들이 남긴 수많은 메세지까지 성서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사업체에도 없애야 할 상품들이 많을 것이다. 여러분의 집에도 쓰지 않는 가구며 물건들이 아마 산처럼 쌓여 있을 것이다. 아니 여러분의 냉장고를 열어봐도 알 것이다. 특히 냉동실을 뒤져보면 기가 막힐 것이다. 우리의 생활도 마찬가지다. 바쁘기는 무진장 바쁜 것 같은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무슨 가치가 있는지 별 생각이 없다. 그냥 습관처럼 바쁘게 보내는 것이다. 냉장고의 꽉 찬 냉동실처럼 말이다. 골프에 미친 사람, 술에 미친 사람, 도박에 미친 사람, 드라마에 미친 사람, 음식에 미친 사람, 일에 미친 사람, 돈에 미친 사람, 감투에 미친 사람, 등등 셀 수없이 많을 것이다. ‘미치다’는 나쁜 의미만은 아니다. 미친다는 것은 <집중>한다는 의미다. 언젠가 차인표라는 연예인이 하던 말이 기억난다. “술에 미쳐 있을 때는 주변에 모두 술에 미친 사람들만 모이더니. 봉사 활동에 미치니까 주변에는 모두 봉사에 미친 사람들만 모이더라.” 인간은 모든 것을 다 할 수도 없고, 모든 것을 다 이룰수도 없다. 내 사업과 내 생활에서 1등과 2등만 빼고 모두 없애라고 하면 무엇을 없앨까. 무엇을 <Slim>화 해서 <단순화>를 할 것인가. 그런 다음에는 그 단순해진 일과 생활을 어떻게 <집중>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들의 인생 과제이며 목표가 된다면 이 불경기를 견디는 <슬기로운 삶>이 되지 않을까.
솔개의 선택 (7/20/2012)
하늘의 제왕 솔개는 기류를 따라 높이 나른다. 일명 연이 나는 것 같다고 하여 ‘검은 연 (Black kite)’라고 한다. 솔개의 수명은 40년이지만 환골탈태를 통해 70년까지 살 수 있다고 한다. 우리는 철저한 도전과 변화를 말할 때 <환골탈태>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환골>은 뼈를 갈아 끼운다는 뜻이고, <탈태>는 태를 벗긴다는 의미다. 솔개는 지구상의 조류 중에서 가장 장수하는 새라고 말한다. 하지만 솔개의 수명이 40년 가까이 되면 솔개는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 발톱이 다 닳아서 더 이상 먹이를 채지 못하고 부리도 구부러져 더 이상 쓰지를 못하게 된다. 또 날개는 오래된 깃털과 곳곳이 부러진 상처여서 날기에 무겁기만 하다. <솔개의 선택>은 “이대로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인 것인가? 아니면 이 고통을 이겨내고 새 삶을 살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솔개가 환골탈태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적의 눈에 띄지 않는 높은 절벽에 둥지를 틀고 안전하게 숨어야 한다. 그리고는 못쓰게 된 뭉텅한 부리를 바위에 쪼아 스스로 뽑아 버려야 한다. 이때 부리를 뽑기 위해 흘린 피가 바위를 붉게 물든다. 그리고 나서 서너달이 지나면 새로운 부리가 돋아난다. 새로운 부리가 돋아나면 이번에는 그 새 부리로 낡은 발톱을 하나씩 쪼아서 뽑아 버린다. 그러면 날카로운 발톱들이 새로 돋아난다. 그런 다음에는 꺾이고 상처난 깃털들을 하나씩 뽑아버리면 새로운 깃털이 나면서 웅장한 날개가 된다. 새로운 부리와 새로운 발톱과 새로운 날개가 다시 돋아날 때까지 대략 6개월이 걸리는데, 그 과정을 환골탈태의 과정이라고 한다. 그러고 나면 솔개는 약 30년 정도를 더 산다고 한다.
흔히들 <도전 의식>이나 <선택과 결정>을 강의할 때 자주 인용되는 우화이다. 위의 <솔개의 선택>이 우화이든 사실이든 간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생의 50대나 60대 (일명 오륙도)인 은퇴시점에서 새로운 비상을 위하여 환골탈태를 선택할 용기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잘살든, 못살든, 성공했든, 실패한 삶이든, 인생 황혼의 시점에서 새로운 목표를 정해 놓고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또 다른 관점은 우리의 긴 삶 속에서 누구나 겪는 삶의 질곡이다. 현실의 고통, 스스로의 한계,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이대로 죽고 싶은 절망과 좌절, 더 이상 한 발자욱도 걸을 수 없는 삶의 무게, 한심한 무능함, 모두가 떠나버린듯한 외로움, 홀로 남겨진듯한 두려움, 달고 살아야 하는 지긋지긋한 질병들, 늘어나는 주름살과 부실한 육신, 상대적 빈곤과 멸시…등등,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고통이다. 잊혀질만 하면 다시 불쑥 나타나는 불청객이라고나 할까. 지금의 어려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나온 세월 속에서 몇번인가 겪었던, 지금은 기억하고도 싶지 않은 아스라한 아픔들이다. 하지만 그때도 그렇게 이겨냈듯이 지금도 이겨내어야 한다. <솔개의 선택>처럼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을 선택하고 결정하여야 한다. 이대로 죽음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는가. 이대로 이렇게 마감을 하기에는 그분에게 너무 미안한게 아닌가. 새로운 가능성에 도전하면 엄청난 에너지가 용솟음침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살다가 살다가 너무 힘들면 모두 접고 일단은 높은 절벽에 올라가 둥지를 틀자. 그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자. 그래서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깨닫고 그분이 주신 삶과 시간의 가치를 깨닫자. 그런 다음 목표를 정하고 새로운 삶을 사는 동안 해야 할 일들을 기록하자. 다시 사는 날까지 그 세월이 10년이든, 30년이든, 정말 가치있는 삶을 살자. 메마른 땅위에 선 나무가 더 깊게 뿌리를 내린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티브 잡스의 말대로 항상 배고픔을 유지해야 한다. ‘Stay hungry.’ 목마름이 없는 사람은 물의 소중함을 모른다. 그 물이 생명수임을 알지 못한다.
만약에 죽을만큼 그분께 눈물로 간구하여 새로운 부리와 새로운 발톱과 새로운 날개를 얻는다면 그대는 무엇을 할 것인가. 또 먹고 사는데 내 나머지 인생을 모두 소비할 것인가. 신은 공평하심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부와 명예와 지혜와 건강과 가정의 행복과 건강한 믿음을 동일한 사람에게 모두 주시지는 결코 않으신다. <질량 불변의 법칙>처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함수 공식은 각각의 행복 Factor를 곱하면 누구나 제로가 되게 만드셨는지도 모른다.
경제학은 ‘인간은 합리적 선택을 한다.’라는 가정하에 성립되는 학문이다. 어느하나를 선택할 경우 얻을 수 있는 효용을 <기대효용>이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를 포기할 때에는 <기회비용>이 발생한다. 합리적인 선택이란 기대효용이 기회비용을 능가할 때만 성립되는 것이다. 두사람의 이익이 상충되는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인간의 합리적인 선택이 오히려 최악의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이론이 ‘죄수 딜레마’ 이론이다. 나의 삶을 되돌아보아도 내가 부자가 되기 위하여, 사업을 성공하기 위하여 하늘 높은줄 모르고 살았을 때 잃어버린 <기회비용>은 너무나 많았음을 통감한다. 반대급부다. 만약 여러분이 원하는 부자가 되었다면 어떻게 변할까. 매일 새벽기도 나가서 눈물로 엎드려 기도할까. 주님을 알기나 할까. 돈으로 무엇인들 못살까. 가난한 이웃을 알기나 할까. 가족들이 같이 모여 저녁 먹는 날이 며칠이나 될까. 가족이 서로 존경하고 의지하며 사랑할까. 주변의 수많은 유혹들을 과연 뿌리칠 수 있을까. 이제는 그런 삶을 다시 살 수는 없다. 또 살아서도 안된다. 앞으로는 <기회 손실 비용>을 최소한 줄이고 <기대 효용 가치>가 높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찬란한 목표를 정해놓고 새로 태어난 솔개처럼 저 푸른 창공을 더 없이 높게 날아야 한다. 날개야, 날아보자….
나그네 설움 (7/27/2012)
오늘도 무작정 길을 나선다. 오라고 반기는 곳은 없는데 찾아가야 할 곳은 많다. 약속도 없이 일면식도 없이 무작정 찾아 나서는 길이다. 탁발승은 승복이라도 입고 부처님 가피로 복 많이 받으시라는 염불이라도 독송하여 드리지만, 나는 무작정 찾아가는 그분들께 드릴 것이 없다. 존경받을 직업도 아니고 환영받을 직업도 아니다. 아무리 선의로 열심히 일을 해도 돈을 받는 직업이므로 칭찬보다는 불평 불만을 듣기 십상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걸어야 한다. 나의 직업은 비지니스를 컨설팅하고 사업체 매매를 중계하는 일이다.
요즈음은 불경기인데도 비지니스 브로커가 부쩍 늘어나는 것은 그만큼 살기가 힘들고, 브로커라는 직업이 별도의 검증 절차를 거치지 않으며, 진입 장벽이 낮기 때문이 아닐까. 하기야 나도 6년전에 먹고 살 길이 아마득하여 시작한 일이 이 직업이니까 무슨 말을 하랴마는. 다 같이 어려운 고비를 잘 견뎌 나가길 소망한다.
하지만 비지니스 브로커가 결코 만만한 직업은 아니다. 한마디로 규칙과 룰이 없는 무한 경쟁이다. 혹자는 일년에 몇건만 매매를 성사시키면 나머지 허구한 날을 골프나 치면서 놀아도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주위를 둘러봐도 비지니스 브로커를 해서 부자된 사람이 몇명이나 되며, 존경받는 사람이 몇명이나 되는지 자문해 보면 브로커라는 참혹한 현실을 실감할 것이다. 비지니스 브로커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조그만 사무실 얻어서 신문에 그럴듯 하게 광고내고, 양복에 넥타이 메고 명함 찍으면 그날로 비지니스 브로커가 된다. 하지만 고객의 입장는 자신의 전 재산이 걸려 있는 문제이므로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고객이 그 많은 브로커 중에서 나에게 맡겨야 할 강력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같은 교회를 다니니까, 아는 안면이니까, 과거에 매매한 경험이 많으니까, 등등 단편적인 이유로 자신의 재산을 맡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브로커 시장은 <약육강식>이 아니라 <강자 독식>의 시장이다. 지역 구분이 없고 독점권이 인정되지 않는다. 지나간 실적이 아무리 많아도 항상 제로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매매 경로도 브로커를 통하지 않고도 여러가지 방법으로 매매가 이루어진다. 집은 사기를 당할 우려가 작지만 비지니스는 잘못 사면 망한다. 그러니 어느 코메디언의 말처럼 될 놈은 되고 안될 놈은 안되는 구조다.
브로커의 주요 업무는 사무실에서 Buyer 손님을 상담하는 것과 매물을 찾기 위해 여러분들의 가게를 방문하는 일이 주요 업무다. 가게를 팔겠다고 하여 방문하는 경우도 있지만 무작정 방문하는 경우도 많다. 지난 6년동안 여러분들의 많은 사랑과 믿음으로 사무실에 오셔서 직접 상담하신 Buyer 고객만 603명이 되신다. 또 가게를 팔아달라는 매물도 560개가 넘는다. 하지만 무작정 방문해서 매물로 받을 확률은 지극히 낮을 수 밖에 없다. 물론 Buyer와 매물들은 각자 아이디와 그 가게의 사업성 분석과 사진들과 히스토리가 기록되어 있다. 되돌아보면 아무런 연고도 없고 사무실도 없이 중고 자동차와 연필 한자루로 시작하여 여기까지 왔으니 감사하고도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나는 지난 이,삼년동안은 사무실에서 상담하기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길거리 영업>을 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Buyer 손님들에게는 상담을 하고 난 뒤, 매물 분석 자료와 주소를 드리고 혼자 찾아가시게 했다. 나는 Buyer고객과의 상담시간이 평균 한시간에서 두시간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한다고 하지만 결국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고객의 편리를 가장한 나의 편리함을 위해서다. 깊이 반성하고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가게를 무작정 방문하는 것을 <길거리 영업>이라고 한다. 가볍지 않은 가방을 메고, 양복에 구두 신고, 생각보다 많은 거리를 걷게 된다. 가뜩이나 장사가 되지 않아 고민이 많은데 염장을 지르는 것도 아니고 누가 반갑게 맞이 하겠는가. 바쁜 시간에 찾아가면 문전박대 받기가 일쑤고, 가게를 팔 마음도 없으니 명함조차 꺼내기 어렵다. 또 행여 팔더라도 평소 생각해 둔 브로커를 통해 팔지, 무작정 찾아 온 낯선 브로커에게 매물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길거리 영업>을 다시 하기로 했다. 영업의 효율성은 떨어지지만 이 일을 통해 감사할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무작정 <길거리 영업>을 하는 날이면 골프장 18홀을 걸어다는 것 이상의 운동량이다. 컨디션이 좋은 날이면 18홀을 두번 도는 정도의 거리를 걷는다. 그래서 나는 별도로 골프를 치지 않는다. 골프는 일년에 한두번 치는 나의 연중행사가 되어 버렸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힘든 직업일 수 있다. 내일이면 육십인 나이에 이 무슨 짓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 수도 있다. 이 직업으로 돈을 번다는 생각은 애시당초 접어두었다. 이 직업도 돈이 있어야 돈을 번다. 하지만 이 일을 통해 하루하루 먹고 살게 해 주시고, 자식들 키워주시고, 내 힘으로 걸을 수 있는 건강 주시고, 초면인 나를 반갑게 맞아 주시는 좋은 분들 만나게 해 주시고, ‘글 잘 읽고 있습니다.’라고 해 주시는 격려의 한마디는 내가 살아야 할 몇가지 이유중에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나이에는 큰 돈도 필요 없기에, 어쩌면 건강이 허락하는 마지막 날까지 해야 할 나의 천직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걷는다.
“오늘도 걷는다 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 / 지나온 자욱마다 눈물 고였다. / 선창가 고동소리 옛님이그리워도 /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을 흥얼거리며… 갑자기 막걸리 한사발이 생각나네..
레몬 시장의 비밀 (8/3/2012)
현대전은 정보전이다. 특히 전문적인 지식이나 정보가 필요한 분야라면 정보 판매자와 정보 구매자 사이에 현격한 정보의 차이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의사와 환자, 변호사와 의뢰인, 장의사와 상주, 중고차 딜러, 금융상품과 투자컨설턴트, 보험상품과 보험사 직원, 부동산과 에이전트, 사업체와 브로커 등등이다. 그래서 좋은 정보제공자를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성공의 지름길이다. 하지만 인터넷의 발달로 정보의 간격이 좁혀지고 있어 정보 중개인들의 수입이 예전같지가 않다. 고객이 동종 상품과 가격을 인터넷에서 비교 선택할 수 있는 수준의 사업은 이미 정보로서의 독자적 가치를 상실한다고 할 수 있다.
<레몬 시장> 이론이 있다. 레몬은 겉모양은 번지르하지만 먹기가 힘들다. 즉 빛좋은 개살구라고 할 수 있다. 중고 자동차 시장을 예로 들어보자. 지금 중고 자동차 3대가 시장에 나와 있다. 자동차 A는 품질이 양호, B는 보통, C는 불량이라고 하자. 자동차 판매자 (Seller)는 당연히 자동차 3대를 모두 A 가격(비싼 가격)에 팔고 싶고, 구매자 (Buyer)는 3대 모두를 C가격(싼 가격)에 사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구매자 (Buyer)는 자동차를 선별할 인지능력이 부족하므로 자동차 3대 모두를 불량급인 C급으로 간주한다. 그러면 시장 가격은 중간 가격에서 형성된다. 그 이후로 정보 판매자 (Seller or Broker)는 좋은 제품 A는 시장에 내놓지 않고 기존의 등록된 고객들이나 확실한 고객에게 은밀히 팔아버린다. 그러면 시장의 매물은 C급으로 넘쳐나게 된다. 그러니 광고를 보고 매물을 찾는 Buyer는 한수 아래인 셈이다. 이것을 버클리 대학의 에켈로프 교수는 <레몬 시장>이라고 명명했다. 금융상품도 고등수학을 이해할 수 있는 정교한 파생상품이므로 일반인들은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러면 결국 금융시장은 엉터리 상품으로 넘쳐나게 되며, 금융회사 직원들은 훈련된 판매원에 불과하다. 1990년 후반부터 보험상품의 가격들이 하락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인터넷으로 보험상품들 가격 비교를 해 주는 사이트가 등장하고서 부터이다. 부동산 시장도 그러하고 다른 정보 관련 사업들도 유사하다.
그런데 요즘 한인 사회에서도 <신종 레몬시장>이 형성되고 있어 한인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불경기가 계속 되니까 쇼핑몰 곳곳에 비어 있는 가게들이 많다. 권리금이 없으니까 약간의 시설비만 있으면 가게를 차릴 수 있다. 게다가 건물주와 잘 협상하면 6개월정도를 파격적인 임대조건으로 가게를 얻을 수 있다. 몇년 전부터 한국 여자분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사업체가 Drop Store다. 한국이 잘 살고부터는 이곳 교민들도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하신다. 냉난방이 잘 되어 있는 곳에서 여자가 예쁘게 화장하고 음악듣고 책 보면서 백인손님들을 상대로 장사할 수 있는 업종이 Drop Store다. 영업시간도 짧고 주일과 국경일, 여름휴가를 다녀올 수 있는 업종이기도 하다. 종업원 관리도 한두명이면 어지간한 가게는 충분하니 사람 때문에 속 썩을 이유도 없다. Drop Store는 주매상이 $500불 단위로 매매 가격이 껑충 뛴다. Drop Store의 매매 핵심요소는 주매상과 임대료다. 아무리 주매상이 높아도 Rent비가 비싸면 매매 가격은 급락한다. 정상적인 임대료일 경우, 주매상 $1,500불은 20배부터 시작하여, 주매상 $4,000불 이상은 50배 이상도 한다. 세탁소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하지만 세탁소의 자업자득이다. 세탁소가 너무 많고, 주매상 4천불 미만의 세탁소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데 이 세탁소들은 홀세일을 하지 않으면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세탁공장의 빨래 가격이 낮으니 Drop store가 엄청 많이 생겼다. 이미 우리 지역에는 세탁소와 Drop store가 포화상태다.
그런데 레몬시장으로 <신종Drop Store>가 생기고 있다. 비어있는 쇼핑몰에 파격적인 임대조건으로 무일푼의 가게를 차린다. 소비자 가격을 $2.50 이하로 광고한다. 아니면 50% 세일을 한다. 1년동안 장사가 되든, 안되든 상관하지 않는다. 문을 닫아도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다. 본인은 세탁소를 하고 있으므로 Rent비용만 부담이 안되면 일하는 아주머니 한명 인건비만 있으면 된다. 그러다가 다행히 매상이 $2,500불 이상만 되면 덤핑 간판을 떼어 버리고 정상가격으로 환원시킴과 동시에 부동산 시장에 매물로 내놓는다. 완전한 속임수다. 물론 그런 가게를 사면 망한다. 심각한 것은 동일 Seller가 이런 가게를 여러개 가지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한때 세탁소가 $1.99로 한인 사회 전체가 몸살을 앓은적이 있다. 지금도 어떤 지역은 그 지역 전체가 저가 경쟁의 블랙홀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가격을 내리기는 쉬워도 올리기는 어렵다. 이런 덤핑가게들은 팔기도 어렵다. 이러니 가게 문 닫는 날까지 모두가 함께 침몰하는 것이다. 세탁소 $1.99해서 부자된 사람이 몇명이나 되는가. 그래도 세탁소는 $20만불 이상의 시설 투자라도 했지만, Drop store는 이야기가 다르다. Drop store가 덤핑을 하면 그 지역의 세탁소, Drop store는 모두 죽는다. 당연히 본인도 죽는다. 이런 칼럼을 쓴다는 것 조차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우매한 사람들이 모방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가격덤핑이라는 정책은 어떤 경제 이론에서도 전략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치킨게임>처럼 나는 살고, 주변을 모두 죽일수 있다면 가능하다. 하지만 소규모 장사에서는 나도 죽고 주변 모두도 죽는다. 지금 나는 상도덕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한인 교포들이 단합하여 가격덤핑을 막지 않으면 몇개 남지 않은 한인 업종마저도 몰살한다. 내 예상이 틀리기를 소망하면서…
펭귄의 교훈 (8/10/2012)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남자>는 누구일까? 그는 좁은 일본식 주택에서 살면서, 맛없는 영국 음식을 먹고, 드세기로 소문난 미국 여자와 사는 남자라고 한다. 반면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는 누구일까? 그는 넓은 미국식 저택에서 살며, 온갖 맛있는 중국음식을 먹으며, 애교 만점인 일본여자와 사는 남자라고 한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내 경험으로는 일본의 주거환경은 정말 최악이다. 40대 시절에 일본 중견 기업들과 한국 총판계약을 맺고 사업을 한 경험이 있다. 그 때 일본 중역들 집을 초빙받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내심 놀랐다. 임원들 사택들은 공간이 너무 작고 심지어 다다미에서 기생하는 벌레로 곤욕을 치룬적도 있다. 화장실이며, 욕실, 주방등 거주 공간들이 너무 좁아 보물찾기 하는 기분이었다. 영국 음식은 못먹어 보았지만 이곳 미국 음식과 중국, 한국, 일본 음식을 비교해도 서양 음식은 품격이 한참 떨어진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의 행복지수는 어떠한가. 대부분이 미국식 저택(?)에서 살고 있고, 음식도 한국식이면 세계 수준에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 음식 종류며, 맛이며 음식 가격등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 같이 사는 여자는 지금의 한국 아내와만 살아봐서 다른 나라 여자들은 잘 모르겠지만, 미국 여자가 더세다면 외국 여자 대부분이 만만찮을 것이다. 미국에 사는 한국 여자는 미국 여자인가, 한국여자인가, 그래서 더세게 느껴지는걸까… 또 일본 여자라고 모두 애교가 많다면 큰 착각이다. 그리고 일본 여자가 인기가 많으면 한국 여자도 못지 않게 인기가 많을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 여자든, 여자는 남자하기 나름일테니까 지금의 한국 마누라면 감사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미국에 사는 한국 남자들은 집, 음식, 여자 모두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들이 되는건가?
그런데 세상에 가장 불쌍한 남자가 또 있다. 남극의 펭귄이다. 언젠가 한국 다큐멘터리에서 <남극의 눈물> 4부작을 방송한 적이 있다. 지구 온난화와 기상 이변으로 생태계가 파괴된다는 환경 프로그램이었는데, 남극의 펭귄들 숫자가 지난 50년간 70%이상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 방송에 황금빛 깃털을 가진 <황제 펭귄>들의 일생이 나온다. 특히 <아빠 펭귄>의 일생은 나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남극에 서식하는 <황제 펭귄>들은 겨울이 올 무렵에 짝짓기를 한다. 그들은 길게 무리를 지어 며칠동안 ‘오모크’라는 은밀한 장소로 이동을 한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모인 펭귄들은 암수가 한쌍을 이루어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는다. 펭귄은 일년에 한개의 알만 낳는다. 알을 낳은 암컷은 수컷에게 알을 넘기고 먹이를 구하러 떼를 지어 바다로 나간다. 먹이를 찾아나선 암컷들은 바다에 뛰어들기 위해 일렬로 줄을 서서 기다린다. 왜냐하면 바다사자가 물에 뛰어드는 펭귄을 잡아먹기 위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가 눈치를 보다가 그중 용감한 펭귄 한마리가 물에 뛰어 들어 바다사자의 먹이가 되면 줄줄이 그 뒤를 이어 바다에 뛰어든다. 마케팅 이론에서 서로 눈치 보는 것을 <펭귄 효과>라고 한다. <펭귄효과>는 특히 한국 소비자들에게 강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미국 사람은 성능을 보고, 독일 사람들은 내구성을 보고, 프랑스 사람들은 디자인을 본다면, 한국 사람들은 <눈치>를 본다는 것이다.
암컷들은 바다에서 싱싱한 물고기들을 잡아 먹으면서 몸을 푼다. 한참동안을 먹고 놀면서 기력을 회복하면 수컷과 새끼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뱃속에 물고기를 최대한 잔뜩 집어넣고 돌아온다. 암컷이 늦게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않으면 수컷과 새끼는 굶어죽고 만다. 그동안 영하 60도의 혹한 속에서 수컷 펭귄이 겪는 고통은 눈물겹다. 수컷은 알을 자기 발 위에 올려놓고서 털로 덮어 부하시킨다. 새끼가 알에서 깬 다음에도 수컷은 잠시도 새끼를 얼음 위에 내려놓지 않고 품어서 키운다. 새끼가 품에서 밖으로 나와도 수컷의 발 위에 올려 놓는다. 알에서 깨어난 펭귄은 수컷 펭귄이 토해주는 먹이를 먹으면서 자란다. 새끼를 키우는 동안 수컷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오직 새끼만 먹이면서 암컷이 먹이를 구해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앉지도 눕지도 못한다. 서 있어야만 한다. 그러는 동안 수컷은 체중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암컷을 기다리는 동안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혹한을 피하는 방법은 모든 수컷들이 원둘레 모양으로 겹겹이 에워싼다. 물론 맨 바깥원에 있는 펭귄들이 가장 춥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모두가 조금씩 움직인다. 강강술레 처럼 바깥에 있는 무리들은 안쪽으로, 안쪽에 있는 무리들은 바깥 쪽으로 <자리 이동>을 하는 것이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함이다.
만약 사람들이었다면 어떠했을까. 나혼자만이라도 살아남기 위해 안쪽의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서로 죽이고 죽지 않았을까. 지금의 불경기를 남극에 비유하자면 <공생공존>하는 법을 <황제 펭귄>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서로가 바람막이가 되어야지 혼자만 살겠다고 가격덤핑을 하면 모두가 얼어 죽는다. 암컷이 돌아오면 수컷은 새끼를 어미에게 인수인계하는데 그러고서도 한참을 새끼 주위를 멤돌며 떠나지 못한다. 세상 아버지들의 마음을 어미가 알까, 새끼가 알까. 알에서 깨어난지 6개월이 지나면 새끼는 부모곁을 떠나는데, 먹이를 구하기 쉬운 여름철에 떠나도록 배려하는 것이다.그래서 자식에게 가장 헌신적인 아버지를 펭귄의 수컷에 비유한다. 경기가 어렵고 집안이 어려울수록 아버지가 담대해야 한다. 아버지의 어깨가 위축되고 의기소침하면 약한 어미와 어린 새끼들은 어찌하란 말인가. 술에 취해 세상을 원망한들 가족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함께 살아야 한다. 한인 수컷들끼리 서로가 바람막이가 되어 이 엄동설한을 견디어보자…
칼럼을 쓰다 쓰다 이제는 별걸 다 쓴다 하실지도 모르겠다. 틀린 말씀이 아니다. 6년동안 매주 칼럼을 쓰다보니 쓸 내용이 여간 마땅치 않다는 게으른 변명이다. 논술시험 처럼 누군가 매주 칼럼 제목이라도 정해 주면 고민이 덜 할 것 같다. 그러다가 오늘처럼 도저히 제목이 떠오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이때까지 쓴 300여편의 칼럼중에서 적당히 재탕하는 것은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허잡스러운 내용으로 여러분을 기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생각다 못해 오늘은 광복절이기도 하여,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책을 요약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아래의 글은 <통박사>라고 알려진 조병호 박사(목사)의 <성경과 고대 전쟁>과 <성경과 5대 제국>을 년대별로 다시 요약한 것임을 밝힌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지배한 제국들은 대표적으로 이집트, 앗수르, 바벨론, 페니키아, 카르타고, 페르시아, 헬라, 마케도니아, 로마 이며 오늘까지 역사는 반복되어 이어진다.
<BC 2000년> : 창세기 전쟁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 인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다. 창세기 14장에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당시는 서아시아를 앗수르가 지배하고 있었다. 롯이 선택한 땅인 소돔은 부유한 곳이었으며, 젊음과 번영을 누르던 곳이었다. 소돔인들은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며, 도시국가를 유지하였으므로 실제의 소돔과 고모라는 허당인 셈이다. 12년간 조공을 바치던 요단 지역 나라들이 13년째에 들어와 앗수르를 배반한다. 앗수르 군대가 시리아 일대 국가들을 초토화시키는 와중에 싯딤 골짜기 즉 염해에 진을 치고 소돔인들과 전쟁을 치른다. 앗수르 도시국가 왕 4명과 요단지역 왕 5명이 맞서 대규모 전쟁을 치루나 앗수르가 승리하고 롯은 포로가 된다. 이에 아브라함이 사병 318명을 데리고 야습과 기습으로 조카 롯을 구한다. 이에 제사장인 살렘왕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니 아브라함이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바친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십일조다.
<히브리민족> : 아브라함 후손 70명이 이집트에 왔을 때는 ‘요셉의 가족들’이라 불렀는데, 이집트에서 노예생활하는 430년동안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났으며 이들 아브라함 후손을 ‘히브리 민족’이라 불렀다. 우리 민족의 일본 식민지 생활 36년만으로도 광복 67년인 지금까지 뼈 속의 한이 되거늘,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수모는 가이 짐작할 수 있다.
<바벨론과 앗수르 제국> : 바벨론은 오늘날의 이라크이다. 페르시아는 지금의 이란이다. 세계 4대문명은 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중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말할 때, 티그리스 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나라가 앗수르이고, 유프라테스 강을 중심으로 발달한 나라가 바벨론이다. 바벨론은 B.C. 2,000년경에 유프레테스강을 중심으로 지금의 바그다드 남쪽 지역에 나라를 세운다. 앗수르는 B.C. 2000년경 바벨론 지역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 강변에 ‘앗수르’라는 도시에 정착한다. B.C. 1800년경에 앗수르는 바벨론의 함무라비 법전으로 유명한 함무라비 왕(1792~1750)과 전쟁을 펼치고 빌레셋 1세 (1115~1077년) 때에는 지중해까지 영역을 확대한다. 고대 앗수르는 520년간 서아시아를 지배했다. 앗수르는 B.C. 883년부터 무자비한 정복 전쟁을 벌려 많은 나라들로 부터 조공을 받고 억압을 한다. B.C. 609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앗수르는 철기시대 최초의 거대한 군사강국이었다. B.C. 10세기에 이미 궁수와 창병을 갖춘 기병을 이용했으며, 주력은 최초의 전차부대였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점령하여 혼혈정책으로 북이스라엘 민족을 <사마리아인>으로 만들었고, 남유다를 침공했다가 예루살렘 공성전을 실패하게 된다. 성경에 ‘불’이라는 이름의 티글랏 빌레셋 3세는 진정한 ‘앗수르 제국의 창시자’로 평가받는다.
<아말렉 전투> : 히브리 민족이 애굽(이집트)을 탈출하여 광야 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 겪는 전쟁이 아말렉 전쟁이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하지만 군대라는 조직이나 군사력을 갖지 못했다. 하나님의 보호로 홍해를 무사히 건너지만, 아말렉의 공격을 받는다. 아말렉은 고대근동에서 호전적인 민족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들은 10가지 재앙으로 이집트를 초토화시키고, 홍해를 건널 때는 이집트 군대를 모두 수장시키며, 장차 이스라엘이 거대 민족으로 클 것을 염려하여 사막 한가운데서 말살시킬려고 한다. 이때 모세가 아론과 홀과 함께 산위에 올라가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이스라엘 전쟁의 최초 전략이며 전술이었다. 이후부터 아말렉과 이스라엘의 전투는 계속 된다.
<300년간 전쟁> : 여호수아는 요단강 서편에서 5년간 31개 도시국가를 공격해 모두 승리한다. 한건의 방어전도 없이 모두 공격전이었다. B.C. 1,000년 다윗의 전쟁기록은 역대상 18,19,20장, 총 3장에 걸쳐 ‘전쟁사’로 기록되어 있다. 또 사사시대의 사사들은 종교 지도자들이자, 동시에 전쟁의 선봉에 섰던 사람들이다.모세와 여호수아 시대의 전쟁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자 약속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반면에 사사 시대는 가나안에 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이웃나라들의 침략을 통해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구하게 한 것이다. 그 중 대표적으로 18년간 이스라엘을 괴롭힌 모압과 싸워 이긴 옷니엘, 모압왕 에글론을 죽인 에훗, 블레셋의 공격에 막서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인 삼갈, 시스라 공격에 맞서 바락과 함께 싸워 승리한 여사사 드보라. 300명의 용사를 선발해 13만 5천명의 미디안 병사를 물리친 기드온과 둘라와 야일, 암몬 공격에 싸워 승리한 입다. 뒤를 이어 입산, 엘론, 압돈, 삼손, 사무엘이 있다. 또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도 40년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많은 전쟁을 치렀다.
성경과 고대제국 (제2편) (8/24/2012)
<B.C 1000년>은 다윗의 시대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번성한 황금기였다. 또 페니키아 의 왕 히람도 최고의 번성기를 누리던 시절이었고 서로가 우호적 관계였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머문지 400년간이나 예루살렘이라는 난공불락의 성에서 살던 여부스족이 겨우 다윗의 부하 600명에 의해 하루아침에 성을 빼앗기고 만다.이후로 다윗의 세력이 점점 강해졌다고 한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옮겨다니던 법궤를 정해진 한 곳에 모셔둘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바치려는 결심한다. 당대에 성전을 건축하지는 못했지만, 다윗은 성전 설계도와 건축자재들을 솔로몬에게 전해주고, 오빌(인도)의 금 3천달란트 (금93톤, 현재시가 43조원) 와 순은 칠천 달란트를 성전건축 자금으로 남겨주었다. 또 다윗의 측근들도 오빌(인도)의 금 5천달란트(현재시가 72조원)와 순은 1만달란트를 헌금한다. 즉 다윗 시대는 엄청난 경제력을 가진 시대였다. 이 금과 은을 운송한 민족이 페니키아인이다. 솔로몬 시대에 페니키아와 본격적인 국제무역이 있었다는 성경 기록들이 있다. 솔로몬 시대는 금들이 넘쳐났고 은들은 돌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솔로몬의 경비요원들은 큰 금방패를 들고 있던 사람이 200명이고, 작은 금방패가 300명으로 도합 500명이 금방패를 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윗과 솔로몬이 쌓아놓은 어마어마한 부는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어진 뒤, 남유다의 부는 이집트가 가져가고, 북이스라엘이 부는 앗수르가 가져간다. 그 이후 바벨론이 이집트와 앗수르를 점령하면서 솔로몬의 부가 바벨론으로 넘어가고, 그 이후는 페르시아로 넘어간다. 페르시아가 황금의 제국으로 불리운 근원이 솔로몬의 부였고, 그 이후 헬라와 로마제국으로 이어진다. 구약 1천년 세월동안의 <돈의 흐름>이다.
예나 지금이나 부자가 되는 것은 본인만 잘나서 되는 것이 아니다. 주변조건이 맞아야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나 할까. 한국으로 따지면 광개토왕과 장수왕에 해당할지 모르지만,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페니키아라는 걸출한 해상무역의 스타가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페니키아의 도시국가들은 아테네, 스파르타, 코린트 (고린도), 티베등 여러나라였다. 페니키아인들은 B.C 2000년경부터 지중해 동쪽 레바논의 티루스 (두로)에 정착하면서 앞의 여러 도시국가들을 건설하며 살았다. B.C. 1000년부터 1000년동안은 지중해를 호수 삼아 주변지역의 무역을 지배하다시피 했다. B.C. 1000년경의 페니키아는 가장 번성할 때였는데, 이 당시 페니키아 왕 히람은 성경의 다윗과 솔로몬 왕과 깊은 관련이 있다. 페니키아인은 역사상 가장 과감한 해상활동을 벌인 민족이며, 야간 항해와 원양항해를 처음 시도한 민족이기도 한다. 당시 세상 끝이라고 두려워 했던 헤라클레스의 기둥 (지브럴터 해협)을 넘어 오빌 (지금의 인도)까지 금을 위해 항해를 한 거침없는 민족이다.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 아프리카, 잉글랜드까지 무역을 펼쳤으며, 대규모 식민지를 건설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식민지는 아프리카 튀니지인 고대의 카르타고이다. 한니발이 제 2의 포에니 전쟁의 출발지로 삼았던 스페인도 페니키아의 식민지였다. 또한 대규모 국제교역을 위해 이집트 문자를 변형시켜 사용했으며, 이 문자는 고대 그리스로 유입되어 결국 알파벳으로 발전한다. 로마제국때 가정교사로 가장 선호하는 1순위가 그리스인이고, 로마 부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매니저 1순위는 유대인이었다. 페니키아 (성경에서는 베니게라고 함)는 사울왕과 전쟁을 하기도 하지만 다윗과 솔로몬시대에는 아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한다.
<정략 결혼> : 그 이후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어진다. 이스라엘의 파멸은 정략결혼이 빌미를 제공한다. 북이스라엘(10개 지파)은 남유다 (2개지파)보다 군사력과 경제력이 5배이상 강하였고, 200년간 7번의 왕조가 바뀌고 19명들의 왕들이 다스렸는데 그중 에서도 오므리 왕조를 연 오므리 왕 시대가 최고조다. 그는 사마리아를 수도로 삼고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그는 그의 아들 아합과 당시의 경제대국인 페니키아 (두로와 시돈)의 공주 이세벨을 결혼시킨다. 정략결혼은 솔로몬 왕 시절에도 왕성했다. 이세벨은 시집오면서 자기나라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를 가져와 북이스라엘 전체에 퍼뜨린다. 이런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자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신다. 며느리가 집안에 잘못 들어온 것이다.
<갈멜산 전투>는 엘리야 한사람과 바엘과 아세라를 섬기는 850명의 선지자들과의 싸움이다. 선제공격은 바알을 섬기는 450명과 아세라를 섬기는 400명, 총 850명이 온갖 종교행위를 하며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번에는 엘리야의 반격이 시작된다. 그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단과 주변의 물까지 모두 태워버린다. 이세벨 공주는 죽는 날까지 북이스라엘에 바알과 아세라를 퍼뜨렸고, 그녀의 딸 아달랴를 남유다에 시집보내 그곳까지 바알 우상을 섬기게 했다. 무서운 집념의 여자다. 그래서 집안에 여자가 잘 들어와야 한다고 하는건가.
<두로전쟁> : B.C.8세기는 여로보암 2세가 북이스라엘 왕이었을 때 경제적으로 가장 번성한 시기다. 이 당시 두로는 노예무역을 시작하면서 엄청난 경제적 이득을 보게 된다. 그때 아모스 선지자가 나타나 <정의>와 <공의>를 말하면서 두로의 멸망을 예언한다. 더 나아가 남유다의 선지자 이사야까지 나타나 두로의 멸망을 예언했으나, 두로 스스로는 신이라 여기며 교만했다. B.C. 8세기 아모스와 이사야, 그리고 B.C. 6세기 예르미야와 에스겔 선지자 모두가 두로의 멸망을 예언했으나 두로가 워낙 부자 나라였으므로 이를 믿는 자는 없었다. 그러나 B.C. 4세기 두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완전히 멸망하게 되니 이것이 <두로전쟁>이다.
성경과 고대제국 (제3편) (8/31/2012)
<B.C 732년> : 앗수르는 정복한 나라들중 가까운 나라들은 속주로 통합시켰지만, 지형적으로 먼 나라들은 자치를 허용했는데, 통치 방법은 각 나라의 민족주의를 말살시키기 위해 다량의 이주정책을 펼치며 혼혈족을 탄생시킨다. 따라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감독아래 혼혈 사마리아인들로 혈통이 변질된다. 이에 반발한 북이스라엘 왕 므나헴과 다미섹의 왕 르신이 남유다와 함께 3국 동맹을 맺어 앗수르에 대항하고자 한다. 이때 남유다 왕 아하스는 이사야 선지자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친앗수르 정책을 펼친다. 한국의 남과 북이다. 같은 이스라엘인들끼리 서로 등을 돌리고 배신한다. 이에 북이스라엘과 다미섹은 남유다를 공격한다. 이에 남유다는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며 도움을 요청하는데 이것이 앗수르에게 전쟁의 명분을 주는 계기가 된다. 앗수르의 빌레셋 3세는 다른 나라 남자들을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로 대거 이주를 시켜 혼혈족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때 탄생한 혼혈족이 <나쁜 사마리아인>이다. 북이스라엘의 여자들은 무슨 죄인가. 나라가 약하면 내 누이와 내 딸들이 버림받는다. 조선시대에도 수많은 조선의 딸들이 중국으로 끌려갔다. 대표적인 사례가 <환향녀>이다. 인조 15년( 1637년),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나라에게 무릎을 꿇고 투항을 한다. 굴욕의 대가로 세자와 함께 수만명의 조선의 딸들이 청나라로 끌려간다. 그리고 목숨을 부지해 조선으로 돌아온 그녀들은 <환향년>라고 동네 사람들의 돌에 맞아 죽는다. 그녀들이 무슨 잘못인가. 혼혈족 <사마리아>인들이 무슨 잘못인가. 분명한 인종차별이며, 배타적 민족주의다. 그래서 남유대인들은 같은 민족을 배신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들을 <나쁜 사마리아인>으로 죄악시하는 것인가. 참고로 현대 유대인들은 단일 민족도 아니고 다윗의 자손이 대단한 것도 아니다. 혈통을 따질 잘난 역사도 아니다. 누구나 여자가 유대교를 믿으면 자식들은 유대인이 된다. 인류 역사에 죄없는 씨앗이 어디 있을까…
<B.C. 612년> : 바벨론이 앗수르의 수도 니네베(니느웨)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다. 앗수르가 하란까지 퇴각하나 610년 바벨론이 하란까지 공격하자 포기한다.
<B.C. 609년> : 므깃도 전투 : 이때 이집트의 왕 바로느고가 앗수르의 잔여 병력을 규합해 바벨론과 전쟁을 치루려고 하남으로 진격하나, 남유다의 왕 요시아가 길을 가로막아 할수 없이 남유다와 전쟁을 치루고 여기서 남유다 왕 요시야는 전사한다. 이집트는 다시 전력을 모아 하란으로 진격하나 이미 하란은 바벨론의 수중에 들어간 뒤다. <B.C 605년> : 바벨론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마저 이기고 고대 제국의 주인이 된다. 그때까지 함락되지 않은 곳은 남유다의 예루살렘 성 뿐이었다. 이집트를 점령한 바벨론은 나뮤다를 들러 다니엘을 포함한 천재 소년 4명을 인질로 잡아가는 ‘제 1차 바벨론 포로정책’을 실시하면서 바벨론을 섬기며 조공을 바치도록 하고 철수한다.
<B.C. 598년> : 남유다가 강화조약을 잘 지키지 않자, 바벨론은 남유다를 다시 공격해 남유다의 왕 여호야긴과 에스겔, 그리고 1만여명의 기술자들을 바벨론으로 끌어간다. 이것이 ‘제 2의 바벨론 포로’이다. 이때 바벨론 왕이 느부갓네살 (B.C. 605 ~562) 이다.
<B.C. 589년> : 느부갓네살은 남유다가 이집트와 함께 바벨론에 대항하자 남유다 전체를 초토화시킴과 동시에 예루살렘 성을 포위한다. 그와 동시에 이집트를 공격하여 다시는 대항하지 못하게 응징함과 동시에 이집트의 무역권을 모두 차단한다. 이때 남유다 왕은 시드기야 였고, 선지자는 예레미야 였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이 예루살렘이 망하고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을 해야함을 말해 주었으나 (대하 36 :20-21), 시드기야는 예루살렘 성안에서 18개월을 버티며 공성전을 이어갔다. 이동안 바벨론은 여러번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남유다왕은 거절한다.
< B.C. 586년> :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바벨론의 피의 보복이 이루어진다. 예루살렘 성을 초토화시킴은 물론, 살아남은 사람 대부분은 바벨론으로 끌려 간다. 이를 ‘제 3차 바벨론 포로’라고 한다. 남유다 왕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채, 바벨론 감옥에 갇혀 죽는다. 두눈이 뽑히기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어린 두 아들의 목이 달아나는 장면을 본 것이다 (왕하 25:7). 이때 끌려간 남유다의 백성들이 강가에서 ‘나라 잃은 설움’을 노래한 것이 1970년대 유명디스코 그룸 ‘보니엠’의 ‘바벨론 강가에서’이다. 누구의 잘못인가?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남유다 시드기야의 오만이 유대 민족을 말살시키는 원인이다. 결국은 잔인한 바벨론 제국은 예레미야의 에언대로 70년만에 멸망한다.
<B.C.5세기> : 페르시아의 바벨론 공성전 : 페르시아(이란)는 ‘황금의 제국’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지만 토지는 사막과 산맥으로 이루어져 있고, 날씨는 건조하고 일교차가 심한 척박한 땅이었다. 키루스 2세 (B.C. 585 ~529, 성경에는 고레스 왕)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페르시아는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 키루스 왕이 메디아를 점령하고 리디아 (지금의 터어키)를 공격해서 승리하고부터이다. 리디아는 사금으로 유명한 나라이고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엄청난 부자였다. 리디아 전쟁을 계기로 페르시아는 경제 부국이 된다.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는 동쪽으로 정복전쟁을 치루어 에게 해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호시탐탐 바벨론을 공격할 기회를 엿보던 차에, 바벨론 왕궁은 종교문제로 심각한 내분이 발생한다. 바벨론 백성들은 벨사살 왕을 불신하게 되고 페르시아 군대가 바벨론성을 공격할 때 바벨론 백성들이 성문을 열어주면서 페르시아 군대를 환영한다. 바벨론은 저항 한번 못하고 멸망한다.
성경과 고대제국 (제4편) (9/7/2012)
멸망한 바벨론 제국과 정복한 페르시아 제국, 두 제국 사이에는 정책의 핵심포인트가 전혀 다름을 알 수 있다. 정치와 경제와 국력은 상호 정비례한다. 바벨론의 정책은 패전국들의 똑똑한 인재들을 모두 바벨론으로 끌고와 바벨론 제국을 부흥시키는 정책이었다. 이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바벨론 본국을 부흥시키겠지만, 인재들을 모두 빼앗긴 패전국들은 대부분 황폐하고 가난해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패전국들로 부터 거두어 들이는 세금이 작을 수 밖에 없으니 본국의 국력도 날로 쇠퇴해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페르시아의 카루스 2세는 바벨론의 포로들을 모두 본국으로 되돌려 보내면서 그 속국의 유능한 사람을 총독으로 삼고 경제를 살리게 하여 더 많은 세금을 페르시아에 바치도록 하는 정책을 펼쳤다. 본국과 속국의 윈윈 전력이다. 이 시대에 느헤미야, 스룹바벨 같은 유능한 사람들이 유대 총독으로 등장한다.
바벨론까지 점령한 페르시아는 이제 이집트만 점령하면 되었다. 이집트를 공격할려면 사막을 건너야 하고 그럴려면 물이 해결되어야 하기에 아라비아인에게 동맹을 청한다. 이에 아라비아가 이를 수락함으로서 이집트를 공격하여 손에 넣게 된다.
<바벨론의 반란> : 바벨론은 페르시아로부터 독립하기위해 오래전부터 준비를 한다. 모든 가정에 어머니와, 식사준비를 위한 여자 1명만 남겨두고 나머지 모든 여자들은 죽여 버린다. 전쟁에서 식량을 아끼겠다는 독한 의지다. 페르시아 왕 다레이오스 (다리오) 은 반란 소식을 듣자 바벨론 성을 포위하고 19개월동안 대치한다. 이때 조피로스라는 페르시아의 충신이 역적인양 위장하여 바벨론에 거짓 투항을 한다. 그는 결국 신임을 얻어 바벨론 성벽의 총지휘관이 되며, 57일 째 되는 날 성문을 열어둔다. 다레이오스 왕은 바벨론 성을 함락시키고 바벨론 남자들을 닥치는대로 죽인다. 특히 반란주자 3천명은 말뚝에 박아 말려 죽인다. 이후 바벨론의 통치권을 조피로스에게 주고 바벨론으로 여자 5만명을 보낸다. 현재 바벨론 사람들은 이들의 혈육이라고 할 수 있다.
<3차 페르시아 전쟁> : B.C. 492년 1차 그리스 침공. 다레이오스 왕은 심한 폭풍을 만나 싸움 한번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함대 300여척이 침몰하고 만다. 스키타이와의 전쟁에서 페르시아가 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리스의 이오니아 지방에서는 이 기회에 그리스 본국의 지원을 받으면 페르시아 지배에서 독립할 수 있겠다고 판단하여 지원 요청을 한다 (B.C. 499년), 아테네는 지원을 하지만 스파르타는 거부한다. 492년 페르시아는 공격을 하지만 다행히도 폭풍으로 살아남는다. 그 이후 다시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공격하는데 B.C. 490년이 그 유명한 <마라톤 전투>이다. 그때 페르시아 전력은 2만명의 보병과 5천명의 기병, 삼단노선 200척, 수송선 400척, 수병 4만명이었던 반면에, 아테네는 9천명의 보병이 전부였고 기병도 함대도 없었다. 아테네의 명장 밀티아데스는 1만명의 시민병을 이끌고 마라톤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페르시아군대를 기다린다. 싸우기 좋은 장소로 적을 유인하고 적을 먼저 공격하러 나서지만 엄청나게 늦은 속도로 진격하다가 순식간에 양 측면에서 기습 공격을 하는 것이다. 마라톤 전투는 총 전투시간이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전쟁으로 페르시아 군대의 전사자는 6,400명, 아테네는 192명이었다고 한다.
<살라미스 해전> : 다레이오스가 죽은 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일으킨 살라미스 해전은 세계 4대 해전중의 하나이다. 그는 그리스 원정을 위해 4년간 철저하게 준비한다. 마침내 B.C.480년 크세르크세스는 역사상 가장 많은 원정군을 이끌고 그리스로 출격한다. 페르시아 함대는 1,200척이었으며, 아테네 함대는 100척과 연합군 함대 300척이 모두였다. 아테네는 전쟁도 하지 않고 아테네를 비운체 살라미스 섬으로 철수한다. 살라미스 해전은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유사하다. 해협 폭이 좁아 배 2척만이 겨우 빠져 나올수 있는 곳이다. 적선들은 3중 전열을 2열 종대로 바꾸어 해협을 통과해야 한다. 이 해협에서 8시간 전투동안 200척의 함대가 격침당하고 200척의 함대가 포획당한다. 전사자는 4만명으로 추정한다. 페르시아 군대는 완전히 참패하고 만다. 이 전쟁으로 그리스는 완벽한 동지중해의 지배권을 갖게 된다.
<마케도니아 전쟁> : B.C. 359년 필립포스 2세가 마케도니아 왕이 된다. 그는 현재의 유고슬라비아인 일리리아와 트라키아, 테살리아를 정복한다.이어서 고린도로 쳐들어가 성을 무자비하게 파괴시켜 버린다. 그는 테베와 아테네 연합군까지 격파하고 나서 그리스 전체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남부 그리스인들에게 야만인 취급을 받던 마케도니아가 그리스 전체를 통치하게 된 것은 서양의 보병과 동양의 기병을 통합한 통합군 덕분이었다. 이 시기가 성경의 말라기서에 해당한다.
<이수스 전투> : 페르시아 제국을 헬라 (성경의 신구약 중간기 약 400년에 해당하는 시기) 에게 넘기게 된 전쟁이다. 마케도니아의 핵심은 기병이다. 20세에 왕위에 오르게 된 알렉산드리아는 이미 18세때 기병대를 책임지는 장군이었다. 아버지 필립포스가 암살당하여 죽자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리아는 페르시아 정벌까지 위업으로 이어받는다. 그리스는 어린 알렉산드리아를 얕보고 반란을 일으키자 즉시 테베, 아테네, 스파르타의 반란을 초기에 진압한다. 그는 3만5천명의 보병과 5천의 기병과 160척의 함선을 이끌고 9년만에 페르시아 제국 전체를 점령한다. BC. 332년 티로스 전투에서도 페르시아는 패하고, B.C.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도 완전 패멸한다. 그는 끊임없는 정복의 야망으로 인도까지 정복하지만 32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성경과 고대제국-전편 마지막회 (9/14/2012)
B.C 고대 제국은 로마제국 이전의 헬라 제국까지만 다루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로마인의 이야기> <십자군 전쟁> <예루살렘 성전>등의 베스트셀러를 통하여 로마제국 부터 이슬람제국, 기독교 제국에 대해서 정리해보려 한다. <성경과 고대제국> 칼럼을 중단하는 이유는 로마제국 시대는 예수님 전후 시대와 겹쳐서 예민한 부분도 있고,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의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나의 오지랍을 꾸짖는 아내의 잔소리 때문이기도 하다. 재미가 없었나? …
<B.C. 4세기> 헬라의 두로 공성전 : 페르시아의 속국이자 페르시아 함대의 주도적인 역활을 했던 페니키아의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가 이수스 전투에서 패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알렉산더에게 항복을 하지만 두로 (티루스)는 알렉산더의 사절단을 죽여 시신을 바다에 던져 버린다. 두로성은 육지에서 0.5마일 떨어져 있고, 성벽의 둘레가 0.8km에서 1.2km에 달하고, 높이가 45m에 달하기 때문에 두로는 버티어내리라 믿었다. 하지만 알렉산더의 7개월간의 공격끝에 두로성은 함락되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8천명의 두로 백성들을 살해하고 3만명을 노예로 팔아버린다. 이로써 다윗 때부터 우호 관계였던 이세벨의 두로와 시돈의 페니키아는 알렉산더에 의해 멸망한다.
<알렉산더 사망> : 인도 갠지스강까지 점령한 알렉산더는 군인들의 종군 거부로 32세 나이에 죽고 그 넓은 대륙은 7명의 장수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다가, 3명은 도태되고, 4명에 의해 통치된다. 이중 셀루쿠스가 유대를 통치하는데, 그는 헬라문화를 유대에 강요하자, 유대 안에 반 헬라 감정이 싹튼다. 이 시기에 로마는 카르타고와 포에니 전쟁을 치루고 있다. 3차에 걸쳐 120년간 계속된 포에니 전쟁은 신흥국가 로마에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이에 반해 카르타고는 페니키아가 세운 강력한 해상국가로 시칠리아 섬 서쪽을 400년간 이상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데 23년간의 1차 포에닌 전쟁과 16년간의 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하자 필립포스 2세 때부터 마케도니아의 통치를 받고 있던 그리스가 로마의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그리스 문화를 존중하던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크게 무찌름으로써 마케도니아가 로마의 속국이 되고 만다. 이때가 B.C. 197년이다.
<마케도니아 전쟁> : 그리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마케도니아를 응징하고 싶어 시리아의 셀루커스 왕조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때 2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배한 한니발이 셀루커스로 망명해 있었고 최고조에 달한 때라 세루쿠스는 승리를 확신했다. 하지만 마케도니아는 이미 로마의 속국이었으므로 이는 로마에 대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셀루커스는 로마에게 참패를 당하고 자기 나라로 도망하여 한니발을 총사령관으로 내세운다. 그러자 로마도 스키피오를 투입시켜 시리아로 향한다. 3차 포에니 전쟁에서도 로마가 승리하여 5천 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거액을 전쟁 배상금으로 합의한다. 셀루커스는 국내 모든 성전은 물론, 예루살렘 성전까지 압류할려고 하다가 암살당한다.
<B.C. 31년 : 악티움 전쟁> : 헬라제국의 종말 : B.C. 333년은 알렉산더가 이집트를 점령한 해이다. 이집트는 알렉산더가 죽은 후 300년간 알렉산더의 장수 프톨레미가 왕조를 이루며 통치했다. 그들은 이집트와 유대를 함께 지배했다가 시리아 셀루커스 왕조에게 유대 통치권을 빼앗긴다. 이집트를 통치하던 헬라 제국의 프톨레미 왕조의 마지막 왕이 클레오파트라다. 이집트 여왕인 클레오파트라가 흑인이 아니고 백인인 이유는 그녀의 조상들은 그리스, 마케도니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21살에 이집트 여왕의 자리에 올랐으며, 그 시대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25세 최연소 장군이었던 폼페이우스와 내전을 벌리던 시절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을 가 망명을 요청하는데, 클레오파트라의 남동생인 어린 왕과 환관들이 폼페이우스를 살해하고 그의 목을 카이사르에게 바친다. 이때 이집트가 왕위 계승권으로 골치를 아파하자,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를 왕위에 앉히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이후 로마는 카이사르가 권력을 잡자 오랜 공화정을 끝내고 단일 황제 체제로 바뀐다. 결국 카이사르는 원로원과 공화정 사람들의 권력 싸움에 의해 암살당한다. 이후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되는데 그는 그의 전재산을 로마 시민들에게 분배하라는 것과, 후계자는 18세의 옥타비아누스라는 것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로마를 진정으로 사랑한 카이사르를 암살한 원로들과 공화정파들을 성토하게 되고 카이사르의 부하 안토니우스에 의해 모두 죽음을 당한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후계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들의 내분은 14년간 지속된다. 한편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연인이었던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진다.
마침내 두 장군은 최후의 결전을 벌이는데 그것이 악티움 해전이다. B.C. 31년 9월2일 엄청난 로마 군인들이 서로 적이 되어 싸운다. 클레오파트라 (그녀에게는 카이사르의 아들 한명과 안토니우스와의 쌍둥이 자녀와 두살배기 어린아이가 있었음) 도 안티니우스를 돕기 위해 해전에 군대를 이끌고 참가하지만 전쟁 도중에 퇴각을 한다. 이에 안토니우스도 군사들을 버리고 그녀를 따라 지금의 리비아로 도망을 친다. 이때 유대의 분봉왕 헤롯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전쟁때도 그러했던 것처럼, 양쪽 모두에게 금은 보화 상자를 보내어 보험에 들었다가 전세가 기울어지자 옥타비아누스에게 줄을 섰다. 그는 정치적 욕심이 크고 간교한 정치인이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대왕 자리를 지킨 헤롯에게 동방박사라는 자들이 ‘유대왕이 예루살렘에 태어낳다’고 하니, 갓 태어난 예수를 가만히 두겠는가.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거짓 유언비어에 속아 스스로 자결하고 그 뒤를 이어 클레오파트라 마저 자결함으로써, 헬라제국은 종말을 고한다.
철지난 가을바다 (9/21/2012)
떠나간 자와 남겨진 자. 만남과 이별에는 항상 이렇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자욱이 남는다. 작열하던 태양의 여름바다는 이름 모를 피서객들과 함께 떠나가고 몇마리의 물새와 파도만이 빈 백사장에 남겨진다. 비라도 내리는 <가을 바다>는 그렇게 말없이 혼자서 운다. 보고 싶으면 보고 싶은 대로, 그리우면 그리운대로 가슴에 묻어둔 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울고 싶으면 울어야지 어찌할꺼나… 눈물이 강물처럼 흘러 내려도 닦을 수 없으니 어찌할꺼나… 소리내어 울부짖어도 꺼억 꺼억 빈 울음만 나니 어찌 할꺼나… 아들아, 아들아, 아무리 목놓아 불러도 빈 하늘만 허공에 걸려있으니 이를 어찌 할꺼나… 어머니. 힘내세요. 어머니 곁에는 주님이 항상 계시잖아요. 그리고 누군가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힘내세요…
얼마전 일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60대 전후의 아들 둘을 모두 잃어버린 어머니 한분이 계신다. 내 어머니와 연세도 비슷하시고, 독서도 많이 하시며, 수줍음도 많으시고, 항상 친구 어머니처럼 인자하시던 분이다. 그분이 아파하는 동안, 나는 그분을 위해 무언가 해 드릴 것이 없어서 수요예배 때 그 분을 위해 <누군가 기도하네>를 색소폰으로 불러드렸다. 물론 미리 말씀을 드리지 않았으며, 그분은 수요예배에 참석하지 못하셨다. 인간사가 항상 그러하다. 떠나는 자는 이유가 무엇이든 떠나면 그만이다. 새로운 사랑을 찾아서든, 더 잘 살기 위해서든, 목숨이 다해서든, 삶이 지겨워서든, 무슨 이유에서라도 떠나갈 사람은 떠난다. 항상 남겨진 사람이 문제다. 이별을 원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혼자 남겨진채, 가슴앓이를 하고 그리워하고 못잊어한다. 눈물도 남겨진 자의 몫이고, 상처도 남겨진 자의 몫이다. 상처에 딱지가 앉을려면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나는 그날 밤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철지난 가을바다>를 보았다.
나는 바다를 무척 그리워한다. 꿈속에서도 바다를 본다. 내가 죽은 후의 망막에는 아마도 고향바다가 잔상으로 새겨져 있을 것이다. 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계절마다의 바다를 모두 좋아한다. 이민 생활을 하면서도 짬만 나면 바다로 간다. 그렇다고 낚시를 좋아한다거나 배를 타고 멀리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바다는 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바다 냄새만으로도 좋다. 파도에 내 몸을 맡기는 것만으로도 좋다. 백사장을 걷는 것만으로도 좋다. 비가 와도 좋고 눈이 와도 좋다. 바다의 파도 소리만으로도 좋다. 반면에 아내는 산을 더 좋아한다. 바다는 아내가 싫어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다. 바람이 더세고, 모래가 날리고, 자외선이 강렬하고, 햇빛이 눈부시고, 파도가 무섭고, 옷을 갈아입기가 번거롭고, 바르고 씻고 화장하는 것을 귀찮해한다. 하지만 남자가 바다를 좋아하니 기꺼이 따라나선다. 이번 여름에도 매주 일요일마다 아침예배를 보고 바다를 가는 것으로 아내에게 약속을 받았다. 그런데 교회 사역이 7,8월에 대거 몰려있는 것이다. 비밀이 누설되었나. 아무튼 일곱번 계획에 세번밖에 바다를 가지를 못해 여간 아쉬운게 아니다. 철지난 바닷가라도 다녀와야겠다.
나는 고향이 부산이기도 하지만 청소년시절을 광안리라는 바닷가에서 살았는데 바다를 눈에 넣고 살았다. 여름이 되면 서울이며 객지에서 온 많은 관광객들이 혁명군들 처럼 부산의 해수욕장들을 일괄 점령한다. 나의 청소년 시절, 부산 촌놈들은 세련된(?) 외지인들을 피해 동해남부선 완행열차를 타고 한적한 바닷가로 가서 텐트를 치고 놀다오곤 했다. 대학시절에는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부산 부모님 집으로 바로 내려가지 않았다. 학기말 시험을 마치자마자 그날로 즉시 혼자 배낭을 꾸려메고 한달 동안 전국 바다와 산을 돌아다녔다. 대학교 일학년때는 같은 과 친구들과 같이 여행을 갔는데 여러명이 여행을 간다는 것은 내 취향과는 별로 맞지 않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행은 혼자나 둘이서 다니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웃끼리 가는 가족여행도 세가족이 넘으면 여행의 재미가 반감된다. 혼자 여행을 다니면 여러명이 갈 때보다 여러 계층의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나는 혼자니까 상대방도 경계심을 풀고 더 쉽게 친해진다. 혼자 여행다니는 싱글들도 의외로 많다. 그리고 만나고 헤어짐에 경계가 없다. 며칠을 함께 지내다가도 각자의 여행 일정에 따라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떠나므로 이별이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다시 만나자는 것도 남세스럽다. 사진을 핑계삼아 그 짓도 몇번 해 보았지만 여행지와 현주소는 엄연히 다르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아야 한다는걸 배운다. 여행은 서로가 떠나는 자들일뿐, 남겨진 자는 없다.
하지만 <철지난 바닷가>는 남겨진 자다. 그렇다고 남겨진 <가을 바다>는 고독하고 외로운가. 혼자 남겨졌다고 외롭고 불행한 것은 아니다. 내 마음의 눈이 그 가을바다를 어떻게 보느냐, 어떻게 투영되어 내 마음에 색인되는가에 따라 다르다. 바다는 변함이 없다. 봄바다는 봄바다이고 겨울바다는 겨울바다일 뿐이다. <겨울바다>를 혼자서 바라보면 외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장엄하고 큰 울림이 느껴진다. 아무리 바람이 더세고 살을 에이는 추위라 할지라도 겨울바다가 가엾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유독 <가을바다>가 외롭고 쓸쓸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떠나간 자의 그리움 때문이다. 그리움은 지우려할수록 더욱더 그리워진다. 잊으려 할수록 기억세포에 깊이 파고들어 문신처럼 남는다. 그래, 상처자욱을 안고 살자. 저 파도처럼 저 물새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살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어머니, 힘내세요.
야간 비행 (09-28-2012)
나는 요즈음 <야간 비행> 횟수가 부쩍 많은 것 같다. 나는 공군에서 통신장교로 복무한적이 있다. 석양이 지는 저녁에 관제탑이나 활주로 끝에서 보는 <야간비행>의 모습은 황혼의 남자에게서 풍기는 완숙함과 애잔함 같기도 하고, 또는 밤하늘에 떠서 고해의 바다를 내려다보는 해탈 승려 같기도 하다.
우리 부부는 결혼 30년만에 자식들을 모두 떠나 보내고 둘만이 남게 되었다. 막내 늦둥이 아들을 사십이 넘어서 낳았으니 내 또래에 비하면 십년 가까이 늦은 셈이다. 우리 부부는 결혼해서 지금까지 단 둘만이 살아본적이 없다. 신혼시절에는 시동생과 같이 살거나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거기다 자식이 세명이다 보니 알게 모르게 세월이 이렇게 흐른 것이다. 얼마전 기숙사로 들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제 우리 둘만 남았네요.” 라며 눈물을 글썽이는 아내의 모습이 안스러워 말없이 안아주었다. “이제부터 무엇을 하지?”라는 아내의 질문에 “당신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것을 다하고 살아.”라고 허세롭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제부터 나는 무엇을 하고 살지?”라는 화두를 갖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헨리 나우엔 신부님이 쓴 <노인의 영광은 백발>이라는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노인의 영광은 백발이다. 백발은 영화로운 면류관이니, 의로운 길을 걸어야 그것을 얻는다. (잠언 16:31)” 오십 끝자락에 서있는 내가 벌써부터 노인 흉내를 낸다면 노인분들께 귀싸대기 맞을 짓이겠지만, 이제부터라도 영광스런 노인이 되기 위한 준비는 해야 될 것 같다. 시편 31:9-12에서는 <늙음>을 이렇게 말한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피해간다. 죽은 사람처럼 기억에서 사라지고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그래서 시몽 보봐르는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늙었을 때라고 했던가. 불보듯 뻔한 심한 고통을 기다리는 것이 삶을 마감하고 다른 세계로 떠나는 것 보다 더 두려운 것이다.
노인이 쓰레기처럼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것은 노인의 <차별분리>와 <자기상실> 때문이다. 클레어 타운센드는 늙었을때를 <마지막 차별분리>라고 했다. 행동(doing)이나 소유 (having)를 존재 (being)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는 현대사회에서는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평생 열심히 일해서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넉넉한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당장 돈을 벌 수 없다면 자신을 가치없는 사람이라고 느끼는 심리다. 두번째는 노인의 <자기상실>이다. 노인들 스스로 자기를 거부하는 <자기 배척>은 자기 마음 속의 추방으로서, 자신을 스스로 가치없는 사람으로 느낌과 동시에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상실은 온통 자기 정체를 과거에 묻어 버리고, 지금은 아무런 만족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을 잃어버리면 희망도 잃게 된다.
늙어감은 빛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소원(wish)을 천천히 희망 (hope)으로 바꾸어 가는 것이다. 즉 소원은 ‘밖(out)’에 있는 것을 갈구하지만, 희망은 ‘안 (in)에 있기 때문이다. 소원은 재물처럼 구체적인 대상에 관한 것이지만, 희망은 약속이 이루어지리라는 열린 믿음이기 때문이다. 소원을 바탕으로 둔 결혼생활은 항상 위험하지만 희망을 바탕으로 두면 온갖 가능성을 지닌 자유로운 미래가 열린다. 부부가 소유한 물질이나 재능보다는 부부 서로가 귀중히 여기고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늙어감에 대한 각자의 희망을 실행하기로 했다. 기본전제는 앞으로 계속 나이는 먹어가고 경제능력은 떨어지고 육신은 늙어간다 점이다. 소외되어 잊혀질 것인가, 삶의 중심에서 조그만 역활이라도 충실히 살다가 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나의 결론은 우리 부부 각자가 생활 가운데 (일명 Core Value of my life, 삶의 핵심가치라고 하자) 로 들어가자는 것이다. 믿음 생활도, 일도, 이웃과의 공동체 생활도, 봉사나 사역도, 인간관계도 그 핵심으로 들어가자는 것이다. 원심력에 의해 지구 밖으로 튕겨나가지 말고, 구심력으로 이웃들과 더불어 재미있고 진솔하게 살자는 것이다.
그래서 당장 일주일 계획표를 짜보았다. 아침에 일어나 헬스클럽에 가서 운동하고, 코코(강아지 이름)와 산책한다.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전9시부터 오후5시까지가 나의 근무시간이다. 은퇴 나이는 하나님이 그만 두라고 할 때까지로 정했다. 그러면 퇴근후 부터가 개인시간인데 월요일 밤은 색소폰 클럽에서 연습하는 날이다. 이제는 정예 맴버가 짜여져 테너, 베이스, 소프라노, 엘토1. 엘토2, 피아노로 6명으로 구성 되었다. 쫓겨나는 날까지 불어볼 생각이다. 화요일 밤은 탁구 클럽과 배드민턴 클럽에 가입하였다. 교회 커뮤니티 센타가 완공되어 눈비가 와도 계속 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요일 밤은 도서실 당번이면서 일주일 읽을 책을 선별하고 수요예배에 참석한다. 짜투리 시간에 색소폰 연습도 한다. 목요일 밤은 소그룹 성경공부를 한다. 금요일 밤은 아내 가게를 도와주고 외식하고 야간산책하는 날이다. 토요일 밤은 음악회 합창연습이나, 교회 식구들 모임, 친지들 가족 모임이 있는 날이다. 일요일은 아내와 아침산책하고 예배보고 시장보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집안일 하고 영화보는 날이다. 그리고 짬짬이 지난달에 들어온 신간 서적 116권을 읽어야 하고 매주 칼럼을 써야 한다. 아내의 야간 스케줄은 나와 함께 하는 것도 있고 별도로 아내가 선택하여 하는 것도 있다. 전적으로 아내의 자유다. 아내와는 각자 다른 일을 하므로 일주일에 만나는 시간은 밤과 일요일뿐이다. 그러니 젊은 시절보다 지금의 늙어가는 시절이 야간시간을 더 바쁘게 사는 것 같다. 그래도 나는 돈 안되는 지금의 <야간비행>이 훨씬 더 좋다. 엔진마력을 최대로 높이고 밤하늘을 수직 상승해 볼까나…
고향의 달 (10/05/2012)
오늘 저 달은 추석날 보름달이다. 달무리에 얼굴을 내민 저 달처럼 사람은 누구에게나 <고향의 달>이 있다. 되돌아보면 지치고 외로울 때, 혼자라고 여겨져 목놓아 울고 싶을 때, 저 달은 내 눈앞에서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고향을 떠나 처음 객지 생활을 할 때, 혼자 여행을 떠나 이름 모를 곳에서 야영을 할 때, 군에 입대하여 훈련사관 생활을 할 때, 사업에 실패하여 죽음을 생각할 때, 이민을 와 신분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꼼짝달싹 할 수가 없을 때, 타향도 아닌 타국에서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나아지기는 커녕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나는 저 달을 그렇게 바라보았다. 이민와서 처음 몇해동안은 저 달만 보면 미칠 것 같았다. 고요한 가을 밤에 아파트 베란다에 나와 혼자서 소주를 마시면서 저 달을 바라보고 있으면 등뒤에서 큰 딸아이가 내가 좋아하는 <달빛 소나타> 시리즈를 연주해 주던 날들이 바로 엊그제같다. 아버지는 달을 보고 울고, 딸은 피아노 악보를 보고 울고, 서로가 그렇게 말없이 울고 있었지도 모른다. 지금은 결혼해서 한국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큰 딸아이가 어제밤에는 화상통화로 온가족이 한참동안 (약 2시간정도?) 수다를 떨었다. 우리집 수다는 엄마와 딸이 매일 통화하는 기본 수다가 한시간이다. 둘째딸과 막내 아들은 추석이라고 어제 모두 집으로 돌아 왔다. 서울사위는 싸이의 <강남 스타일> 말춤을 추면서 장모에게 재롱을 떨고, 장모는 한인 추석 대잔치에 나가서 기타치며 부를 노래를 사위에게 들려준다고 야단이었다. 처제(둘째딸)는 형부(사위)와 코드가 잘 맞다나 하면서 수다를 떨고 아들은 강아지와 수다를 떤다. 참으로 못말리는 가족이다. 또 오늘 새벽에는 5시부터 차례음식을 만든다고 아내와 자식들이 부엌에서 수다들을 떠는 바람에 잠자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나는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추석과 설날 차례와 아버지 제사는 꼬박꼬박 지낸다. 그것은 내 어머니와의 약속이기도 하지만, 가족은 무슨 날이면 반드시 만나야 하고, 함께 저녁을 먹어야 한다는 나의 단순한 고집때문이다. 하지만 아내가 차례상을 준비해 주지 않으면 내 혼자 여간 곤욕스러울텐데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으니 아내는 아마도 이씨집안 귀신(?)이 되기로 마음을 굳혔나 보다.
내가 이런 잡다한 가정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민와서 지금까지 나처럼 힘들게 사시는 분들과 함께 수다를 떨고 싶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잘 살아서 이민 온 것이 아니라, 이민오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던 분들이다. 신분문제가 해결이 안되어서든, 혹은 생활형편이 어려워서이든,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이든, 어떤 이유에서든, 저 <고향의 달>을 바라보며 고향으로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고향을 갈 수 있는데 안가는 것과, 갈 수 있는데 못가는 것과,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것은 감옥 창살 안에 있는 사람과 바깥에 있는 사람처럼 엄청나게 다르다. 같은 이민자라고 해도 처해진 입장에 따라 많이 다르다. 이민와서 성공한 자와 아직도 가난한자와는 많이 다르다. 가난한 이민자에게는 교회도 지역사회도 낯설다. 가난한 이민자는 아픔도 고통도 혼자 앓아야 한다. 하지만 <고향의 달>은 평등하다. 어머니의 품속 같다.잘났든 못났든 누구에게나 각자 <고향의 달>이 있다. 하나님이 만민에게 평등하시듯이 저 달은 나의 마음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저 달 속에 내 과거가 모두 들어있기 때문이다. 저달 속에는 내 부모님이 계시고 내 가족이 있다. 나의 어린 시절이 있고 내 꿈이 있다. 나의 선생님들과 나의 고향 친구들이 있으며 나의 첫사랑이 있다. 저 달 속에 있는 나의 보물들은 결코 없어지지도 않거니와 누가 훔쳐갈 수도 없다. 우리는 저 달을 보면서 스스로를 갈고 닦아야 한다.
철강 왕 카네기가 춥고 배고팠던 시절 ,그의 사무실에는 볼 품없는 그림 한점이 걸려 있었다. 이름없는 화가의 그림인데 그저 커다란 나룻배 한척과 노 하나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그림이다. 그 나룻배 밑에는 화가가 적어놓은 말이있는데 “ 반드시 밀물은 오리라. 그날 나는 바다로 나아가리라.” 카네기가 밀물이 올 그 날을 기다리면서 시련과 고통을 이기는 원동력이 되었던 그림이었다.
차동엽 신부님이 쓴 <무지개 원리>에 목표달성을 위한 5단계 시스템이 있다. 첫째, 강한 바램을 갖는다. 즉 ‘꿈을 품으라’는 것이다. 목표가 없는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목표를 정해 놓고 전력 질주하는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사람들은 목표가 있다고 하지만 진정한 목표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둘째는 확고한 믿음을 갖는다. 믿음이 없으면 성취도 없다.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루어질 가능성은 더 크다. 이 믿음을 공고히 해 주는 것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라’이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절대 긍정’의 생각을 가질 때, 믿음도 더욱 확고해진다. 세째 성취언어로 말한다. ‘말을 다스리라’ 에서 긍정의 3P, 즉 긍정적이고, 현재형이며, 개인적인 문장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네째, 성취 습관으로 행동한다. 여러가지 습관중에 ‘정보 수집의 습관’과 ‘계획의 습관’ 그리고 ‘시각화의 습관’이 필요하다. 이는 무지개원리의 ‘꿈을 품으라’와 유사하다. 다섯번째,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살아가는데 장애물이 없다면 목표 또한 목표라고 할 수 없다. 처어칠의옥스퍼드 대학 연설을 기억하라. “Never give up. Never, never, never give up” 7번의 반복된 무구로 유명하다. 저 <고향의 달>을 바라보며 청승맞게 소주나 마시지 말고, 그리운 사람에게 <가을 편지>나 한번 써보자..
세계경제 1편-보호무역전쟁 (10/12/2012)
우리는 2012년 하반기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몇가지 사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본 내용중 일부는 장준하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들의 음모>, 배리 아이캔그린의 <달러제국의 몰락>등을 통해 인용하며, 지협적으로 추측해 보는 지극히 개인적이며 비전문가적 사견임을 전제로 한다.
먼저지난달 연방준비 이사회(FRB)의 공개시장 위원회(FOMC)에서 발표한 제 3차 양적완화(QE3) 조치다. 그동안 소문만 무성했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FRB가 돈을 푸는 방법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문제는 미국정부가 FRB에 요청한 것이 아니라 FRB가 자체 결정으로 시행할만큼 미국 경제가 심각하고 시급하다는 것이며, 정해진 기간없이 주택채권을 무기한 매입하기로 결정한 것은 향후 경제상황이 예측불가라는 것이다. 이 조치가 있자마자 세계 각 선진국들은 동일한 방법으로 무제한 자금을 풀기 시작한다. 유럽연합 중앙은행은 무제한적인 국채매입을 선언했고, 일본 중앙은행은 지난주 자산매입기금 규모를 10조엔 더 늘렸다. 전세계는 이제 중국의 움직임에 주목하고 있다. 자국의 통화가 강세를 띠게 된 상황에서 중국이 이를 가만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은 자명하다. 실제로 중국은 10월 국경절 연휴를 앞두고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내놓을 것이란 전망이 파다하다. 이미 금융시장에 대규모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을 골자로 한 증시부양책이 언급되기도 했다. 그동안 비축해둔 막대한 자금을 자국내 내수시장에 풀겠다는 의지며, 수출이 부진하면 막대한 규모의 내수 시장을 통해 경기를 회복하겠다는 전략이다.
각 나라가 무제한 자금을 방출하는 목적은 <무역전쟁>임과 동시에 <통화전쟁>을 선언하는 것이다. 미국은 주택채권을 사들여 부동산 시장을 살림과 동시에 대규모 달러를 방출함으로써 달러가치를 낮추어 무역적자 폭을 줄이려하지만 다른 강대국들도 동일한 방법으로 맞불을 놓는 것이다.
또 다른 일련의 사건은 한국의 지적 재산권과 특허전쟁이다. 최근에는 ITC가 애플·삼성전자의 특허분쟁에서 애플의 손을 들어줬다. 또 지난 7월에는 미국 상무부가 우리나라 산(産) 세탁기에 최고 82%의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또 미국 법원은 다국적기업인 듀퐁사가 제소한 코오롱 방탄섬유 판매금지 처분에서 듀퐁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또 프랑스는 “한국 노동자들이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는 것도 불공정한 일이다.”라고 한국 현대자동차의 덤핑여부 조사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에 요청하였다. 내세운 근거중 하나는 한국 노동자들이 프랑스 노동자들보다 일을 너무 많이 한다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다. 프랑스에도 없는 노동문화를 거론하며 이른바 ‘근로덤핑’을 불공정의 근거로 내세운 저변에는 현대차와 기아차가 올 들어 30% 이상의 판매 증가를 기록하며 프랑스는 물론, 독일 브랜드마저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도 한국의 자동차와 IT전자제품에 높은 관세를 물리려 한다.
미국과 EU(유럽연합)는 지난해 한국이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나라들이다. 수출이든 수입이든 무역규모의 증가는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돌아온 것은 덤핑판정과 저작권침해, 특허침해였다.
최근 한국무역협회가 세계무역기구(WTO)의 자료를 인용, 직접적인 보호무역 조치라 할 수 있는 ▲반덤핑 ▲상계관세 ▲세이프가드 등의 조치에 한국이 해당된 경우를 찾아 집계한 결과, 올 들어 16건이 늘어난 122건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식적인 제소와 관련이 있는 것만 꼽아봐도 이 정도이고, 수입관세 인상이나 특별세 도입, 자국산 사용의무 부과, 수입절차 강화 등 수입상품의 경쟁력 약화에 초점을 맞춘 간접적인 조치까지 포함하면 규제는 훨씬 많아진다.
북미와 유럽 등 선진국들은 지적재산권과 반독점법, 기술표준 위반 등 주로 내국법에 기준해 한국 기업들을 압박했다. 반면 브라질과 멕시코, 베트남 등 개발도상국들은 수량제한이나 통관절차 강화, 수입관세 인상, 자국산 사용의무화 등을 강조했다. 이는 선진국의 경우처럼 수입을 원천 차단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즉각적으로 효력을 발휘한다는 데서 부담이 적지않다. 보호무역주의 조처를 한 사례를 국가별로 살펴보면 미국의 움직임이 가장 두드러진다. 1995년부터 2011년 말까지 미국의 WTO 무역관련 제소건수는 109건을 기록해 전 세계 1위를 차지했다. 반덤핑 관세 관련 제소건수는 458건을 기록해 인도에 이어 2위였다.
상대방의 불공정 무역행위를 트집 잡기 위한 미국 정부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제무역위원회(ITC)의 지적재산권 침해조사 건수는 10년 전보다 6배 이상 늘었다. 이는 갈수록 늘어나는 무역적자를 막기 위한 미국의 궁여지책이다. 미국의 무역적자 폭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지난해 미국의 무역적자는 5600억달러를 기록해 2010년보다 600억달러가 늘었다. 보호무역 전쟁과 환율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30년 이상 개발도상국들을 위협해 왔던 <자유시장> 경제이론과 <자유무역>의 선전구호는 막을 내리고, 그 주창자들 (미국과 유럽연합)이 먼저불공정한 <보호무역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한국은 미국에게 무슨 약점을 잡혔길래 막판에 쫓기듯이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것일까. 공정한 게임은 세계역사의 어디에도 존재하지않으며,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정녕 몰랐던 것일까.
세계경제 2편-반복되는 역사 (10/19/2012)
역사에서 배우는 올바른 교훈은 무엇인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과거에 어떤 일이 이루어졌는지 알지 못하면 항상 어린 아이처럼 지내는 것이다. 과거의 노력을 무시한다면 세계는 늘 지식의 유아기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부자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들을 상대로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면서 자유시장, 자유 무역 정책을 강요해 왔다는 것이다. 이 사실 자체가 역사적 교훈이다.
장하준교수는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없다.” 그들 (나쁜 사마리아인들, 세계 강대국들)은 이렇게 말한다. “시장은 자유로워야 한다.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면 시장에 참여하는 자원들이 적재적소에 쓰이지 못한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이윤을 높이는 일을 할 수 없다면 그들은 투자하지도, 기술 혁신을 할 동기도 잃을 것이다. 따라서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내버려둬야 한다.” 하지만 자유 시장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이 자유로워 보이는 것은 그 시장에 깔려있는 여러가지 규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 규제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는 언제나 시장에 개입하고 있고 자유시장론자 자체도 정치적이다.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 시절 <보스톤 차 사건>도 영국의 높은 세금 때문이었으며, 결국은 미국의 독립전쟁으로 이어진다. 또 미국은 노예 매매의 자유권을 둘러싸고 남북전쟁을 했으며, 영국은 중국으로부터 수입되는 차에 대한 무역 불균형을 막기위해 식민지 인도의 아편을 중국에 수출한다. 하지만 중국의 아편에 대한 높은 관세때문에 아편을 자유롭게 거래할 수 없게 되자 중국과 아편전쟁을 벌렸다. 결국 중국은 영국에 홍콩을 내어주고만다. 2008년 금융시스템 붕괴에 직면한 미국은 주택담보 대출회사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에 2000억달러라는 자금을 퍼부어 국유화조치를 했다. 또 2009년에는 미국 자동차 3사가 부도위기에 직면하자 막대한 국가 빚을 내어 개인 회사들의 부도를 막아 주었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에서나 가능한 동화같은 일을 한 것이다. 그들은 자국산업을 시장자율화에 맡기지 않았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세계화>를 통신과 운송 기술에 비롯된 피할 수 없는 결과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유무역>은 대부분 약소국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 강요된 것이었다. <세계화>의 정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 세계 강대국들은 자신들이 강하면 자유무역과 시장 개방을 요구하고, 자신들이 불리하면 보호무역 정책을 강화한다. 역사는 이 굴레를 반복한다. <보호무역> 조치는 경제위기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골메뉴다. 20세기 이후만 봐도 1930년대 대공황과 70년대 오일쇼크, 그리고 미국과 일본간 무역전쟁이 한창이던 1980년대에도 예외가 없었다.
영국은 19세기 중반까지 고도의 보호무역 국가였다. 1721년 월폴 수상은 제조업을 보호하고 수출을 장려하는 법률제정을 한다. 수입되는 외국 공산품에 대한 관세는 크게 올리고, 제조업에 사용되는 원자재 수입 관세는 크게 낮추거나 아예 없애버렸다. 공산품 수출은 수출 보조금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지원되었다. 1820년대 영국은 수입 공산품 평균 관세율이 45~55%인 반면에 네덜란드는6%, 독일과 스위스는 8~12%, 프랑스는 20% 정도였다. 2차 세계대전이후 일본, 한국, 대만 등 기적의 아시아 드림들이 사용한 경제 정책들은 영국 정책과 유사하다. 한국의 근대화는 박정희 정권의 보호무역 정책이 시발점이었음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영국은 그들의 식민지들이 본국의 제품과 경쟁하게 될 제품은 본국이나 해외로 수출하는 것조차 금지했다. 영국은 미국과 같은 식민지에 대해서는 1차 상품 (대마 ,목재, 판재 등)의 생산을 장려하고, 수익성이 높은 하이테크 산업은 못하도록 묶어두는 정책을 펼쳤다. 1776년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은 보호관세, 보조금, 독점권 부여 등의 경쟁 제한 조치들이 향후 영국경제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고 경고했다.
19세기 중반 영국은 산업혁명과 고도의 경제 성장으로 다른 나라들도 무역을 자유화하고 규제를 해제하기 시작하였다. <자유주의>의 세계질서는 영국의 패권아래 1870년 즈음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일차세계 대전이 끝나고 세계 경제가 불안해지자 각국은 자유주의를 버리고 다시 무역장벽을 쌓기 시작한다. 1930년 미국은 자유무역을 버리고 관세를 법제화한다. 독일과 일본은 파스즘과 대외 침략과 관련이 깊은 카르텔을 구성한다. 1932년 영국마저 관세제도를 다시 도입하면서 세계 자유무역 시스템은 붕괴된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부자나라들 간에 자유무역에 대한 진전이 있었으나 공산주의 국가들과 개발 도상국가들은 여전히 보호주의와 국가 정책 개입이 지속된다. 1970년대 개발 도상국들이 보호관세, 보조금, 규제를 바탕으로 한 수입대체 산업화가 실패를 한다. 반면에 동아시아 국가들이 자유무역과 외국인 투자 개방으로 ‘경제 기적’을 이루자 다른 개발 도상국들의 자성을 일깨운다. 거기다 1989년 공산주의가 붕괴되면서 보호무역주의는 무너진다. 세계 차원의 경제 통합이 심화되면서 문호개방은 어느 때 보다 중요하게 된다. 이에 범세계적인 관리 시스템도 보강된다. 1995년 GATT가 무역 뿐만 아니라 외국인 투자 규제와 지적 소유권 같은 여러 분야의 개방을 강력히 촉진하는 기관 WTO(세계 무역기구)로 승격된다. WTO는 단기 금융을 담당하는 IMF와 장기 투자를 담당하는 세계은행 (IBRD)과 함께 범세계적인 관리 시스템의 3대 핵심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공평하지 못한 기구들이다.
세계경제 3편 – 미국 달러의 얼굴들 (10/26/2012)
나쁜 사마리아인 (세계 부유국)들은 곤경에 처한 빈민국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했던 대로 하지말고,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하라.” 부유국들은 강력한 보호주의 정책으로 부자가 되었으면서도 가난한 나라들에게는 자유무역과 시장 개방을 강요하는 것이다.
세계 국가중에서 다음의 나라는 어디일까? “과거 수십년동안 가장 강력하게 보호 무역주의를 추진한 이 나라는 평균 공산품 관세율이 40 ~55%에 달한다. 국민 대부분이 선거권이 없고, 매표 행위와 선거부정이 횡행한다.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정치인들이 정치자금과 공직을 맞바꾸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공개경쟁으로 공무원을 뽑아본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공공재정은 위태로운 상태인데다 채무를 갚지 않은 전과까지 있어 외국인 투자자들이 불안해 한다.특히 외국인 투자자들에 대해 차별이 심한데 은행업 부분은 더 심하다. 외국인은 은행 이사가 될 수 없고, 의결권도 행사할 수 없다. 경쟁법이 없어서 카르텔 같은 독점 현상이 팽배하다. 지적 소유권의 보호는 구멍이 많고 외국인의 저작권은 아예 보호가 되지 않아서 악명이 높다. 이 나라는 어디일까?” 답은 중국이 아니라 1880년대 미국이다. 아이러니하게도 19세기 말의 미국과 21세기 중국은 자유시장에 역행함으로써 세계 최대 부국이 되었다.
강력한 보호무역과 산업혁명으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된 영국은 세계 각국에게 자유무역을 요구하지만, 이에 가장 처절히 저항한 나라가 그들의 식민지 미국이었다. 영국은 식민지 미국이 농산물 생산의 일차산업국가이기만 바랄 뿐, 부가가치 높은 하이테크 제조산업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봉쇄했다. 따라서 영국에서 미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공산품에 관세를 없애게 했다. 하지만 오늘의 세계 초강대국 미국을 만든 사람은 모두 미국달러 속에 있다. 일명 ‘죽은 대통령 (달러지폐에 나오는 인물들)은 말이 없다.’라고 불리운다. 100달러지폐의 벤저민 프랭클린은 대통령을 지낸적이 없다. 10달러 지폐에 나오는 알렉산더 해밀턴은 대통령이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초대 재무장관에 불과했다. 그는 기라성 같은 대통령 대열에 끼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현대 미국 경제 시스템>을 설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생아로 태어나서 독립전쟁 중이던 22세때 조지 워싱톤 장군의 전속부관이 되며, 1789년 32살의 젊은 나이에 미국초대 재무장관에 임명된다. 그리고 2년뒤 <제조업 분야에 관한 보고서>를 미국 의회에 제출한다. 이 보고서의 골자는 철저한 <자국 보호주의> 정책에 관한 내용이었다. 보호관세, 수입금지령, 정부 보조금, 핵심 원자재의 수출 금지령, 산업 원자재에 대한 수입자유화, 관세 철폐, 발명품에 대한 포상과 특허부여, 상품 표준에 관한 법령제정,금융과 운송에 관한 하부구조 개발등이었다. 그래서 그를 ‘현대의 미국을 만든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 이후 1812년 미영 전쟁이 발발하자 평균 관세가 12.5%에서1820년에는 40%까지 관세가 올라가면서 해밀턴 프로그램은 자리를 확고히 굳힌다. 만약 미국이 자작농으로 이루어진 농업 경제를 미국의 이상 사회라고 주장한 토머스 제퍼슨 (초대 국무장관 및 3대 대통령)의 견해를 따랐다면 오늘날의 강성 미국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달러에는 토머스 재퍼슨의 얼굴이 없는걸까. 이런 보호주의 정책은 1달러 지폐의 조지 워싱턴 대통령뿐만 아니라, 5달러지폐의 링컨은 남북전쟁 당시 관세를 사상 최고로 올렸던 보호 무역주의자로 유명하다. 링컨은 유치산업(국내산업)의 보호를 강력하게 옹호했던 사람이다. 미국 공업을 보호한 위대한 보호자라는 칭호까지 갖는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링컨이 1862년 노예제도를 철폐한 것은 도덕적 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전략적 조치였다는 것이다. 또한 남북전쟁의 영웅이며 차기 미국대통령인 50달러의 율리시스 그랜트는 “한 200년정도 보호무역을 해서 거기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을 다 취한 다음에야 미국도 자유무역을 할 것이다.”라는 연설로 유명하다. 결국 미국 달러의 얼굴들은 강력한 보호주의 정책자들만 들어있는 셈이다.
헤밀턴의 보호주의 정책의 근간은 1721년부터 21년간 대영제국의 초대 수상을 지낸 로버트 윌폴에게서 빼껴온 것이다. 18세기 중반 영국은 모직산업에 진출한다. 그 당시에는 벨기에, 네덜란드가 당시의 하이테크 산업이었던 모직 산업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영국 모직업자들은 정부의 관세, 지원금등으로 성장했으며, 얼마 뒤 영국의 주요 수출품목이 되었다. 아무도 넘볼 수 없는 산업적 우위를 확보한 1860년대가 되어서야 자유무역을 시작했다. 미국이 1830년대부터 1940년대 사이에 전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보호주의 정책을 실시했다면, 영국은 1720년대 부터 1850년대 까지 가장 보호주의적 나라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 미국과 영국 경제는 가장 빠르게 성장하였다. 비단 이 두나라 뿐만 아니라, 필란드, 덴마크, 한국, 스위스, 일본, 독일, 대만, 싱가폴, 중국 등 국가들도 이에 해당된다. 또한 미국은 195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자유무역주의를 외치지만, 미국 전체 연구 개발 비용의 50~70%이상을 연방정부 비용으로 지원한다는 것이다.이는 한국, 일본 등의 정부주도형 국가에서 지원하는 20%수준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며, 이러한 막대한 국가 지원이 없었다면 미국은 컴퓨터, 반도체, 생명공학, 인터넷, 항공우주괴학 등, 핵심산업분야에서 기술적 우위를 결코 확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개인이나 국가나 부자가 될려면 꼼수가 필수인가 보다….
세계경제 4편 – 1대 99 사회 (11/2/2012)
얼마 뒤면 미국 대선이다. 내가 투표할 대통령 후보는 정해져 있지만, 이 글은 어느 특정 정당을 두둔하거나 상대 정당을 비난하기 위함이 아님을 전제로 한다.
지난 8월 말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공화당은 이른바 ‘공급 측면의 경제학’을 정강정책에 새삼 명시했다. 부자들의 소득에 대하여 막대한 세금을 감면해 주면, 부자들은 그 돈을 기업에 투자하여 경제를 활성화시킴으로써 고용이 창출되고 일자리가 증가됨에 따라 서민들 경제가 나아지고 국가경제가 성장한다는 논리다. 이 부자 감세 정책은 어제 오늘의 정책이 아니다.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 줄기차게 주장해온 공화당의 핵심정책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떨까? 미 의회조사국 (CRS) 분석 결과, 1950년대 4.2%였던 평균 GDP 성장률은 2000년대 들어 1.7%로 뚝 떨어졌다. 반면에 1945년엔 단 4.2%에 그쳤던 소득수준 최상위 0.1%가 미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07년엔 12.3%까지 늘었고, 같은 기간 50%였던 최상위 0.1%의 소득세율은 25%로 절반으로 줄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부유층에 대한 세금 감면은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켰을 뿐, 고용창출이나 경제성장 촉진에는 사실상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극소구에 해당하는 0.1%의 부자들이 미국 전체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배로 늘어난 반면, 세금은 과거보다 절반밖에 내지 않는다면 미국은 과연 누구를 위한 민주국가인가? 유럽 선진국들에 비해 의료보장제도와 사회보장제도가 현격히 떨어지며, 대학교 등록금은 살인적으로 높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국 경제가 나아진다 해도 서민 경제는 점점 어려워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실제 미 진보적 격월간지 < 머더존스 > 는 지난해 3·4월호에서 “지난 30년 동안 미국이 이룬 경제성장의 과실 대부분을 가구당 연평균 2700만달러(약 300억원)를 벌어들이는 소득수준 상위 0.01%가 차지했기 때문”이라며 “소득수준 상위 1%가 연평균 101만9089달러의 수입을 올리는 반면, 하위 90%의 평균 소득은 2만9840달러에 그치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가구당 보유 자산 규모도 마찬가지다. 경제위기 직전인 2007년을 기준으로 상위 1%가 미국 전체 자산의 34.6%를 차지한 반면, 하위 90%는 26.9%에 그쳤다. ‘1 대 99의 사회’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더구나 2007~2008년 부동산 거품이 터져 미국의 빈부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의 자료를 보면, 2007년을 기준으로 자산 규모 하위 60%에 해당하는 가구의 보유자산 가운데 주택이 차지하는 비중이 65%에 이른 반면 상위 1%는 주택 비중이 10% 남짓에 그쳤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자산 구조는 어디에 해당하는가? 부자들의 자산 규모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 사이 깨진 기록이 하나 더 있다. 부유층에 부과하는 세금이 사상 최저치까지 떨어진 것이다. 조지 부시 행정부가 2003년부터 역점을 두고 추진한 ‘부자 감세’ 정책이 그 배후다. 미 국세청(IRS)이 지난 6월 초 낸 자료를 보면, 1995년 미국에서 소득이 가장 높은 400대 갑부의 평균세율은 29.93%였던 게 2007년 16.63%까지 떨어졌다.
미국 부자들은 돈이 많다. 많아도, 정말 아주 많다.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을 예로 들어보자. 미 경제전문지 < 포브스 > 가 지난 9월19일 내놓은 ‘2012년 미국 400대 부자’ 자료를 보면, 게이츠 회장의 재산은 약 660억달러(약 73조8천억원)다. 세계은행(WB)이 내놓은 지난해 지구촌 192개국의 국내총생산(GDP) 순위표를 놓고 보면, 게이츠 회장의 개인 자산 규모는 65위를 차지한 에콰도르(670억달러)와 견줄 만하다. 국가 전체가 한 해 만들어내는 경제적 가치가 게이츠 회장의 개인 자산보다 적은 나라가 무려 126개국이나 된다는 뜻이다. 미국의 ‘400대 부자’ 반열에 오르려면, 적어도 175위보다 많은 11억달러 이상을 보유해야 한다. 이들 400명의 평균 재산은 42억달러로, 지난해에 견줘 4억달러나 늘었다. 자산 가치를 합산하면 무려 1조7천억달러에 이른다. 전년 대비 13%나 뛴 규모다.
세계경제로 보면, 부자나라들은 세계 생산고의 80%를, 국제 무역의 70%를, 전체 외국인 직접 투자의 70~90%를 차지한다. 부유국들이 막강한 영향력으로 세계 경제의 규칙을 만든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 정책을 채택하는 조건으로 대외 원조를 해주는 조건이다. 특히 개발도상국들의 정책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악한 삼총사’ 즉 IMF, 세계은행, WTO이다. 이 삼총사들은 부자 나라들에 의해 통제되고, 부자나라들이 원하는 나쁜 사마리아인 같은 정책을 구상하고 실행한다. 특히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정부 예산, 산업 규제, 농산물 가격, 노동시장 규제, 민영화 등, 개발 도상국들의 모든 경제 정책을 포괄하는 것이다. 1990년대 들어와서는 차관에 이른바 체제 관련 융자조건을 붙인다. 그들이 개입하지 못할 영역은 없다. 심지어 출산율 결정, 인종통합, 남녀 차별, 문화적 가치까지 모든 사안에 대하여 조건을 달 수 있다. 이런 결과로 개발 도상국들의 성장 저하, 불평등한 소득 분배 심화, 경제 불안정을 낳는다. 부유국들은 IMF와 세계은행의 전체 투표권 중 60%를 장악해 절대적 통제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미국은 가장 중요한 영역 18개 분야에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어 있다. 결국 미국의 400대 부자가 미국을 장악하고, 미국을 비롯한 몇몇 부자국가들이 세계경제를 장악하는 <1대 99의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 위대한(?)미국에 살고 있는 99%의 우리는 행복하다고 해야 하나?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세계경제 5편 – 경제위기의 종말 (11/9/2012)
경제위기는 끝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경제가 되살아나고 있는 것인가? 하지만 경제는 살아나지 않는다고 경제석학들은 말한다. 경제는 이동하고 있을 뿐이다. 1950년대 베이붐 세대들이 만든 현대 경제는 죽어가고 있으며, 향후 새로운 경제(포스트 모더니즘 경제)는 1990년대 이후에 태어난 인터넷 세대들에 의하여 태어날 것이다. 한인들의 이민사회에는 전설같은 동화들이 전해 내려온다. 80년대, 90년대 장사가 잘 되던 시절의 이야기다. 돈을 담을 시간이 없어서 마대자루에 달러를 쑤셔(?) 넣고 집에 와서는 돈을 세워볼 시간도 없어서 방 구석에 처박아 놓았다라든가. 누가 총기로 살해를 당해서 집을 수색해 보니 벽장에서 수백만달러 현금이 쏟아져 나오더라든가, 빈가게를 사들여 차리기만 하여도 떼돈을 벌었다라든가, 돈 몇푼만 주면 살 수 있는 상업용 건물들이 널려 있었다라든가, 등등. 그 시절 그 많은 돈을 번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자 반열에 명함도 못내밀고 사는 모양이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까?
경제학자들은 말한다. 아직 최악의 경제 시나라오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고. 그들이 주장하는 몇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 미국의 옛산업들이 죽어가고 있다. 오래된 기업들이 주던 배당금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2009년GE는 68%를, JP모건은 86%씩이나 배당금을 삭감했다. 둘째, 세금은 계속 오른다. 미국 정부가 지금의 경제 위기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계속 달러를 찍어 내는 것이다. 미국은 세계최대 채무국이다. 미국이 독립선언을 한 이후부터 1990년대까지의 빚보다 최근 10년의 빚이 훨씬 더 많다. 한 예로 미국의 GDP(국내 총생산)가 14조달러인데, 2009년 미국이 방출한 구제금융 액수가 7조달러이다. 달러가 기축통화가 아니었으면 이미 미국은 채무불이행 국가로 부도가 나고도 남는다. 세째, 미국의 최대 채권국인 중국이 미국 달러를 기축통화로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네째, 빚더미에 올라앉은 미국의 소비자들은 현금을 쓰지 못한다. 아니 쓸 현금이 없다. 미국경제의 70% 이상은 소비지출 부문에서 일어난다. 세계 경제가 미국 소비자들의 소비에 달려있다. 미국 소비자가 돈이 없으면 미국경제가 죽고, 그러면 세계경제가 죽는다. 미국 소비자들은 예금을 거의 하지 않는다. 경기침체가 오래가면 미국 소비자. 미국경제, 세계경제 모두가 죽는다. 하지만 큰 내수시장을 갖고 있는중국과 일본 보다는, 개발 도상국들과 한국같은 수출주도형 국가들이 문제다. 미국 소비자들이 돈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달랑 한채 가지고 있는 집값이 올라서 거기서 세컨드 모게지, 즉 빚을 또 얻는 방법밖에 없다. 정부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겠지만, 집값 올리기가 예전처럼 쉽지가 않다. 다섯째, 실업률이 치솟는다. 세계 기업들은 인력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다. 미국의 실업률은 공식적으로 8.5%이지만, 파트타임, 임시직까지 합하면 19.1%에 달한다. 대공항때 실업률이 24%였으니 얼마 남지 않았다. 여섯째, 기술은 점점 보이지 않게 바뀌며, 가격은 점점 떨어진다. 좀더 적은 인원으로 좀더 많은 수익을 얻는 것이 기업의 목표다. 일곱번째, 학교는 정보화시대에 맞는 교육을 하지 못한다. 기술과 응용이 너무 빠르기 때문에 대학 졸업장이 시대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대학을 졸업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덟번째, 만약 ‘근검절약이 대세다’라는 풍조가 만연되면 미국 경제는 겉잡을 수 없게 무너진다. 미국 경제가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미국인들이 더 많은 빚을 지게하여 펑펑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미국 중산층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주요 원인으로는 첫째, 베이비붐세대가 퇴직하기 시작했다. 둘째, 중산층이 모여사는 교외지역은 서브프라임 사태로 폐허가 되어 버렸다.중산층이 빈곤층으로 전락하면서 쇼핑센타가 문을 닫기 시작했으며, 웬만한 소매점들도 문을 닫기 시작한다. 집값도 교외에 있는 신흥 중산층 주택단지가 가장 많이 떨어졌다. 세째, 고속도로가 노후화되고 자동차 산업이 경쟁력을 잃었다. “GM이 전진하면 미국도 전진한다.”라는 말은 옛말이 되었고 GM은 무덤으로 전진하고 있다. 네째, 텔레비젼 광고가 줄고 광고주들이 인터넷 온라인으로 옮겨가고 있다. 다섯째, 항공사들은 문을 닫거나 통폐합과정을 거쳐 축소되고 있다. 책상앞에서 인터넷으로 전세계인들을 만나는 세상이다. 여섯째, 사람의 수명은 늘어나지만 비만과 성인병으로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간다. 미국의 의료보장제도는 파산 직전이며, 높은 의료비용으로 수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고 일자리는 점점 감소해간다. 일곱번째, 퇴직연금기금은 이미 파산했다. 퇴직후 기업연금과 의료보험 혜택을 편안히 받는 사람은 없어진다. 800만명의 베이비붐세대가 퇴직하여 의료보장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완전한 수혜자가 되는 몇년후의 상황은 미국 정부의 재앙이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여덟번째, 이미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강대국 자리에 올랐다. 중국이 미국달러를 버리는 순간 미국은 아수라장이 된다. 아홉번째,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빚을 안고 있는 나라다. 미국이 그 어마어마한 빚으로 쓰고 남은 것은 거대한 군사력뿐이다. 여차하면 폭력으로 약한 놈을 잡아먹을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부시정권 때 처럼 깡패국가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세계전쟁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외에도 많은 이유로 미국 경제가 회복된다는 것은 눈속임일 뿐, 어렵다는 진단이 설득력을 갖는다. 결론은 이제 꿈같은 시절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향후 계속되는 경제위기 속에서 부자가 될 방법을 알아보자.
세계경제 마지막회-돈의 규칙 (11/16/2012)
세계 경제가 위기고 미국 경제가 위기라는 모멘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위기 속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으며, 한발 더 나아가 어떻게 해야 부자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이번 칼럼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의 칼럼의 <Go –Stop>을 우지좌지하는 내 아내께서 이번 칼럼은 재미없다는 결론을 내렸으므로 이번 주제는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들의 음모>를 팁으로 막을 내린다.
우리는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돈의 게임에서 이기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한다. “90%의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평범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좋은 학교에 들어가라>,<좋은 직장을 잡아라>, <열심히 일하라>, <돈을 아껴쓰라>, <집이 최고다. 집은 가장 큰 자산이자 투자대상이다>, <버는 돈보다 적게 쓰라>, <주식, 채권, 뮤추얼펀드에 골고루 분산하여 장기투자하라>, <퇴직하면 정부 연금으로 살수 있다>. 이상의 이야기들은 부자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 아니라 평범하게 살기위한 조건들일 뿐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금융 지식>이 새로운 돈임을 자각하고 금융 지식을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돈의 언어>들을 배워야 한다. 돈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음모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며, 부자들의 거짓 예언에 농락당하지 않게 된다는 의미다. 그래야 10%의 클럽에 들어갈 기본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 이득과 현금흐름>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2007년 부동산 시장과 주식시장이 무너지면서 90%의 사람들이 돈을 잃은 것은 그들이 현금흐름이라는 게임을 하지 않고 자본이득이라는 게임을 했기 때문이다.”
당장 먹고 사는게 힘든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무슨 말인지 피부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자식들에게도 위에 열거한 원칙들을 교육시켜 왔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그렇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부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학교에서 시키지 못하게 한다. 내 자신도 잘 나가던 사업들이 <IMF>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허리케인을 얻어맞아서 망했다고 변명하지만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핑계일뿐, 결국은 <자본이득과 현금흐름>과 <금융지식>과 <위기 대응정책>의 부족으로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식이 공부를 못하는 것은 용서할 수 있어도 금융지식이 없는 것은 용서할 수가 없다. 적지 않은 재산을 모두 잃은 다음에야 체득한 나만의 금융지식과 경험을 전수할 것이다.
그가 말하길 “부자가 되기 위한 성공의 비밀은 판매하는 것을 배워야한다. ‘버는 한도내에서 생활하라’는 말을 지키면 결코 부자가 되지 못한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자가 되기 위한 꿈을 가져야 한다. 꿈을 꾸는 사람의 말을 하라. 자신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말하라.저주보다 축복을, 문제가 아닌 기회로, 장애가 아닌 도전으로 세상을 바라보라. 힘든 일을 두려워마라. 어려운 시기가 승자와 패자를 구분하는 분기점이다. 자신이 버는 돈에 만족하지마라. 꿈은 크게 꾸되, 작게 시작해라. 부자는 스스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금융지식과 함께 판매 공부를 해야 한다. 돈의 세계에서는 부자는 팔고 가난한 사람은 산다. 무엇을 살까를 고민하지 말고 무엇을 팔까를 고민하라. 사는 것보다 파는 것이 많다면 버는 한도내에서 살 필요가 없다. 직업의 안정성에 목메달 필요도 없고,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을 살 필요도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의 역사와 돈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재정보고서를 볼 줄 알아야 하고 진정한 자산과 부채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또 자본 이득과 현금 흐름의 차이를 분명히 이해해야 하고 그렇게 실천해야 한다. 근본 투자와 기술 투자의 차이를 알아야 하고 자신의 강점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좋은 파트너 찾는 법을 알아야 하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또 많은 자산 항목 중에서 어떤 항목이 내 자신과 가장 잘 맞는지 파악해야 한다. 집중할 때와 분산할 때를 알아야 하고, 위험을 최소화 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세금을 최소화하는 법을 알아야 하고, 부채와 신용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자신의 파생용품을 만드는 법과 사용법을 알아야 하고, 부가 어떻게 빠져나가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실수하는 법을 알아야하고 실수를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의 새로운 규칙>을 알아야 한다. 첫째 <금융지식>을 배워라. 돈은 지식이다. <금융지식>만이 새로운 시대의 돈이다. 둘째, 빚을 이용하는 법을 배워라. 좋은 빚과 나쁜 빚을 알아야 한다. 빚이 나쁜 것이 아니라 빚을 잘못 쓰는 것이 나쁠 뿐이다. 좋은 빚을 활용하는 법을 배워라. 세째, 현금흐름을 통제하는 법을 배워라. 1971년 달러가 기축통화가 되면서 달러는 빚으로 변했다. 부자들은 사람들을 빚으로 몰아넣는 게임을 시작했다. 우리의 빚은 부자들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네째, 힘든 시기를 대비하라. 그러면 좋은 시절을 누릴 것이다. 다섯째, 지금 필요한 것은 스피드다. 한달에 한번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초단위로 돈을 벌어야 한다. 여섯째, 돈의 언어를 배워라. 일곱번째, 돈은 팀 경기다. 자신의 팀을 소중하게 선택하라. 여덟번째, 돈의 가치가 떨어질수록 자신의 돈을 찍어내는 법을 배워라. 이 여덟가지의 규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각 항목마다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그리고 실전처럼 연습을 해야하고 토론을 해야 한다.”
부자되기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어렵지도 않다. 부자들은 자신만의 <금융지식>을 공유하려 하지 않는다. 어느 책에서도 수박 겉핧기 식으로 밖에 말하지 않음을 간파해야 한다. 내 스스로만이 갈고 닦을 수 있다. 모두들 열심히 공부하여 부자되시길 소망한다.
턱시도 상팔자 (11/23/2012)
나의 말년 팔자가 상팔자인가 보다. 사연은 이러하다. 지난 11월 첫째 주말에 교회패밀리센타 건물을 짓고 하나님께 영광을, 교민들에게 감사를, 지역주민에게 봉사를 올리는 봉헌음악회가 열렸다. 6월달에 합창단원 100명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사님 강권에 못이기는척 우리 부부는 비주얼 단원(?)으로 합창단원에 가입하였다. 솔직히 우리 부부는 성가대나 합창단원이 될 음악실력은 되지 못한다. 음악공부를 별도로 한 것도 아니고 취미도 별로 없다. 나의 음악 경력은 한심하다. 나의 음악교육은 중학교 졸업이 전부다. 고등학교때는 학교 방침이 서울대학교에 몇명 합격시키느냐, 한강이남의 최고 명문고등학교 유지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음악시간은 그야말로 쉬거나 입시과목을 보충하는 시간이었다. 가끔은 바닷가 바위에 앉아 고래고래 아는 노래를 부른 것 말고는 노래부른 기억이 없다. 아니 고등학교때 짧게 4개월동안 교회 청년부 성가대에 선 기억은 있다. 그러다가 대학 가서는 자취방에 틀어밖혀 가끔은 통기타치면서 어줍잖게 가수흉내 내며 그 시절의 노래들을 부른 기억이 난다. 물론 누구로부터 기타를 배운 적이 없다.
그러다가 군대가서 군가부르고 사회에 나와서는 신입사원시절부터 밤무대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한국의 회사생활은 밤무대 생활과 병행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때는 지금의 <노래방>이 없던 시절이었다. 선배가 시키면 아무곳에서나 목따는 소리로 노래를 불러야했다. 그래봐야 뽕짝이었지만 말이다. 가끔은 직속상관들이 손님접대하는 자리에 끌고가면 시키는대로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곳에는 노래방시설과 여자들이 있었다. 당시 직속으로 4단계위인 하늘같은 상무는 특히 나를 끌고 다니는걸 좋아했다. 그 양반은 그런 술집에 가면 나의 노래를 듣기 좋아했는데 레파토리가 정해져 있었다. 그로부터 밤무대 생활이 20년이었으니 이번 음악회처럼 술마시지 않고 맨정신에 노래를 부른다는건 손에 꼽을 정도다. 그리고 밤무대 노래는 성악가처럼 곱게 부르면 인기가 없다. 임재범이나 박완규처럼 목소리 탁하고 갈라지는 듯, 애절하고 호소력이 짙어야 한다. 그런 목소리는 폭포수 아래서 득음을 하지 않는다음에야, 술과 담배에 쩔어서 불러야 제격이다. 한참 밤무대 목소리가 될 때에는 양주 한병을 옆 테이블 손님으로 부터 선물을 받은 기억들도 몇번 있다. 그러니 목소리가 다 망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도 강산이 두세번 변한 다음에야 성가 합창연습을 한다니 잘 될일이 있겠는가. 그러지 않아도 늙은 목소리는 갈라지고,두성으로 노래부르면 기침이 나고 호흡이 짧아 도저히 합창을 계속 할 수가 없었다. 해서 중간에 포기할려고 보니까 눈치빠른 몇사람이 벌써 그만 하직을 한 것이 아닌가. ‘아, 이제는 되돌아 갈 수도 없구나.’ 신세를 한탄하며 매일 차안에서 운전하면서 합창곡들을 듣고 불렀다. 4개월을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나도 한심스럽지만 합창단원들도 오십보 백보였다. 이런 실력으로 음악회를 할 수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자신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목소리도 안정감이 있고 복식호흡도 그런대로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가사가 내 마음에 들어앉기 시작하는 것이다. 음악은 영혼의 울림이다. 음악은 음표와 음표사이에 영혼이 들어있다고 한다. 어떤 음악이든, 노래부르는 자의 영혼이 그 노래에 없다면 대중은 절대로 감동하지 않는다. 드디어 발표회 전날, 리허설을 하는데 가슴이 뭉클하는게 여간 은혜가 되는게 아니었다. 잘하면 좋은 음악회가 되겠구나 하는 확신이 음악회 전날 생긴 것이다. 우리 부부는 이번 음악회를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으며, 남은 인생에 잊지못할 또 하나의 기억이 되었다. 감사할 일이다.
그런데 막상 음악회가 다가오니 복장이 문제였다. 턱시도와 턱시도 와이셔츠를 입는다고 한다. 무슨 내 팔자에 턱시도인가. 내가 할리우드 배우도 아니고, 밤마다 파티에 불려 나갈 연예인도 아니고, 저녁식사에 초대받을 상류층 인사도 아니다. 턱시도를 입어봐야 몇번이나 입을까. 기껏해야 자식 결혼식때 입는다고 해야 두번이다. 그러니 턱시도를 사는 것은 말도 안된다. 턱시도를 빌리는 방법 밖에 없다. 이렇게 우기니 아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여 잊고 있었다. 하기야 나의 대부분의 옷들은 아내가 혼자 쇼핑가서 사들인 것들이니 내 의견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주는대로 먹고 주는대로 입으리라’가 나의 의식주 철학이다. 그런데 리허설 하루 전날 턱시도를 입어보라고 내놓는데 이건 빌린 것이 아니라 사온 것이아닌가. 아내의 변명은 몇번 임대하는 가격이나 구매하는 가격이나 비슷하다는 것이다. 불현듯 지난주에 집에 다녀간 둘째딸이 머리를 스치면서 이건 두 모녀의 작당(?)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남편은 분명 반대할터이니 딸을 앞장세워 거사 당일날 공개하면 어쩌지 못할거라는 다년간의 노하우인 것이다. 분명 두 모녀가 좀더 저렴하게 살려고 온 천지를 누비고 다녔을 생각을 하니 못이기는 척 입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웬 조화인가. 맞춤복처럼 꼭 맞을 뿐만 아니라, 여간 멋있는게 아니다. 내가 이렇게 잘 생긴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 이래서 옷이 날개라고 하던가. 그래서 아내에게 호통을 치기를 “턱시도 입을 날이 몇번밖에 없으니 최대한 입어서 본전을 뽑아야겠다. 그래서인데 내가 죽으면 수의를 별도로 하지말고 이 턱시도를 입혀서 관에 뉘여달라”고 말이다. 하기야 이승의 마지막 모습도 멋있게 보이고 떠나야 겠지만, 이승의 마지막 날이 천국의 첫날인데 첫인상을 꾀죄죄하게 보일 수는 없는 노릇 아는가. 혹시 나를 수행할 천사가 예쁜 미혼 여성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아무튼 나는 아내가 사준 턱시도 입고 천국 갈거다….
황혼의 색소폰 (11/30/2012)
지난 주에 ‘필라델피아 색소폰 동호회’의 정기 발표회에 다녀왔다. 그 클럽은 창립 6주년으로 매년 한번씩 정기 연주회를 갖는다고 한다. 내가 속해 있는 ‘체리힐 색소폰 클럽’은 이제 겨우 일년이니 새까만 후배인 셈인데가 실력도 여러가지로 부족하여 선망의 대상이다. 그런데 우리 클럽의 리더가 그 연주회의 찬조출연을 덜커덩 승락하는 바람에 본의아니게 우리 멤버들이 한곡을 불게 됐다. 연주는 대체로 무난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클럽에 색소폰을 배운지 2년밖에 되지 않는 72세의 노인부부가 계신다는 것이다. 그 노부부가 프로그램의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70세가 넘은 황혼의 노부부 !!. 나도 십여년이 지나면 저 나이가 될텐데 우리 부부는 과연 그 때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나는 그분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지금 어떤 삶을 사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적어도 저 부부가 색소폰을 함께 부는 시간만큼은 행복할 것이라 확신한다. 또 배운지 6개월밖에 되지 않았다는 여자분도 합주는 물론, 독주까지 훌륭히 하는 것이다. 참여한 축하객들도 부모, 형제들, 자식들,친구들, 심지어 손주들까지 대부분이 온 가족이어서 그야말로 집안 잔치였던 셈이다. 연주를 잘하고 못하고의 차원이 아니라 그들은 음악을 통해, 색소폰을 통해 인생을 즐기고 있다는 느낌을 공감할 수 있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프린스턴 대학의 다니엘 카네만 교수는 <일상의 즐거움>을 행복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생각했다. 행복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의 문명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프로이드는 이를 <문명의 불만>으로 압축해서 설명한다.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억압하는 것을 기초로 생성된 문명은 그 본질에 있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게 없다는 결론이다. 카네만 교수는 “행복하고 싶다면 행복을 구체적으로 정의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직접 느낄 수 있게 정의할 수 있어야한다. 이를 전문용어로 ‘조작적 정의’라고 한다. 행복이란 ‘하루중 기분 좋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돈과 행복의 관계는 ‘행복하기 위해서는 일정정도의 수입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단 그 한도를 넘어서면 돈과 행복은 별 상관이 없다. 돈 이외에도 행복을 결정하는 외부적 요인으로는 종교, 결혼, 직장, 사회 민주화 등 다양하다. 하지만 이들은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들 중에 10%에 불과하다. 켈리포니아 주립대학의 소냐 류보머스키는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의 50%는 ‘유전적인 성격’이다. 즉 60%의 내적 외적 조건들을 정리해보면 우선 유전적으로 성격이 외향적이어야 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되어야 한다. 아울러 일정하고 안정적인 수입이 있어야 하고, 결혼을 해야 하고, 종교를 가져야 한다. 또한 건강해야 하고 민주적인 국가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나머지 40%는 무엇인가? 사는게 재미있어야 한다. 즐겁고 유쾌하게 사는 <능력>이 40%를 차지한다. 행복의 요건중 50%의 유전적 요인은 어차피 팔자(?)고 운명이다. 그러나 나머지 40%는 재미있고 유쾌하게 살려는 <노력>만으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명지대 김정운교수는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즉 재미있게 사는 놈’이라는 명제를 제시했다. 앞으로의 시대는 열심히 일하는 ‘새벽형 인간’의 시대가 아니라 창조적이고 재미있는 삶을 추구하는 ‘노는 놈(?)’의 시대라는 것이다. 그래서 산업화 시대는 ‘걷는 놈위에 뛰는 놈,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었다면, 그들은 성공한 삶을 위해 즉 좋은 학벌, 좋은 직장, 안정된 수익을 위해 죽도록 앞만 보고 달렸다. 하지만 이제는 삶이 재미있지 않으면 부와 명예도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이다. 당신의 현재 삶은 재미있는가. 아니면 ‘참아야 하느니라, 또 참아야 하느니라’고 수없이 독백하는 수도승의 가시밭 길인가. 요즈음 사람들은 죽을 때 ‘껄, 껄, 껄’하고 죽는다고 한다. 첫번째 ‘껄”은 ‘보다 베풀고 살껄’이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죽은후에 정리해보면 천만원은 있다고 한다. 돈,돈,돈. 해봐야 재미있게 사는데 큰돈 드는 것도 아니고, 평생 죽도록 일해 자식들에게 물려줘봐야 고마운줄도 모른다. 베품도 결국은 즐거움이다. 두번째 ‘껄’은 ‘보다 용서하며 살껄’이다. 원수지고 살아봐야 나만 상처입고 아까운 세월만 낭비한 셈이다. 용서는 원수같은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재미있게 살기 위한 내 자신을 위한 것임을 잊지말아야 한다. 마지막 ‘껄’은 ‘보다 재미있게 살 껄’이란다. 재미있게 살기 위해서는 재미있는 <꺼리>를 구체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대상>을 만들어야 한다. 이민의 삶에 그 대상은 부부가 아닐까. 지금 당장 이혼할게 아닌다음에야 황혼의 나이에 서로에게 구박하면 무엇하겠는가. 서로 이쁘다고 말해주고 만져주고 먹여주는게 무에 그리 어려운가. 흔한 말로 돈드는 일도 아닌데. 그리고 혼자 사시는 분이라면 클럽에 가입하거나 재미있게 사는 사람을 친구로 사귀면 된다.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 부부도 황혼의 노부부처럼 재미있게 늙어가는 삶을 연습중이다. 색소폰 클럽, 기타클럽, 탁구클럽, 배드민턴 클럽, 성경공부 클럽에 가입한 이유다. 또 좀더 나이들어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미술클럽 (유화, 묵화, 동양화, 수채화, 초보자는 종목을 가리지 않는다), 산행클럽, 여행클럽, 골프클럽, 문학클럽 등에도 가입할 예정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수염도 기를 생각이다. 생각만 해도 즐겁다. 바쁘다. 바뻐…
중년남자의 수다 (12/6/2012)
여러분 주변에 50대나 60대 남자들이 모여 있다면 그들의 수다를 가만히 관찰해보라. 한국에 사는 남자들은 그래도 남자들끼리 모이는 장소도 많고 모임의 성격도 다양하다. 직장, 대학교, 군대, 초,중,고등학교 동창, 고향 친구, 선후배, 종교, 취미별, 인터넷 동호회등 각양각색이다. 흔한 말로 마음만 먹으면 못만들 건수가 없다. 하지만 이민의 중년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수다를 떨 곳이 없다. 대부분이 부부 동반이며, 교회모임 아니면 한두개의 친목모임이다. 그런데 이민 수다의 주도권은 아줌마가 아니라 아저씨다. 집사가 아니라 장로다. 젊은이가 아니라 늙은이다. 본인의 이야기 꺼리는 ‘왕년에’로 시작하여 1시간 꺼리도 되지 못한다. 그것조차 주변사람들은 죄다 외울 정도다.그러니 대부분의 수다꺼리 대상은 교회나 주변 사람들 이야기다. 결국 남의 이야기다. 남의 이야기를 할 때 칭찬이나 좋은점을 이야기하겠는가?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대부분의 험담으로 날밤을 샌다. 젊은 나이에는 나라라도 구할 기백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까지 무너진 것일까. 놀랄 ‘노’자다. 했던 말을 또 하고, 말을 시작하면 끝내지를 않는다. 남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는다. 체통도 염치도 접어둔지 오래다. 이 나이에 왜들 이러는걸까?
중년의 남자들은 이야기가 배고픈 것이다. 누군가를 붙잡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지 않는다.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는 거세당했거나 은퇴할 나이고, 자식들은 이미 성장하여 아버지의 충고나 조언을 거부한다. 이미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물건너 간 동화다. 아내는 불보듯 뻔한, 별 볼일 없는 남편의 수다니까 무반응, 무관심이다. 중년남자들은 외롭다. 혼자 내버려두면 혼자서라도 중얼거린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기러기 아빠들의 독백증상이다. 이러한 중년 남자들의 심리적 저변에는 <불안감>이 깔려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21세기를 ‘스토리텔링 (Story Telling)의 시대’라고 한다. 내가 하는 이야기의 내용은 바로 ‘나 자신’이다. 생각도 이야기다. 생각은 내가 나 자신과 나누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러시아 문학 심리학자 비고츠키는 내 자신의 생각을 <내적 언어>라고 했다. 다양한 방식의 ‘기호’와 ‘상징’으로 매개된 <스토리텔링>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문화구성원리이다. 나 자신의 이야기가 없는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정치인 이야기, 연예인 이야기, 주변 사람들 이야기, 이 모두가 스토리에 굶주렸기 때문이다. 남의 이야기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의 허전한 존재 욕구를 충족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골프나 낚시는 나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골프는 스토리텔링이지 운동이 아니라고 한다. 한국남자들이 술을 마시지 않고 4시간 이상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는 골프밖에 없다고 명지대 김정운 교수는 말한다. 여자 이야기도 이렇게 길게 하지 못한다. 4시간 이상 수다를 떨고도 지치지를 않으니 내일이면 또 골프장으로 기어나간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있는 삶은 행복하다. 이야기는 풍부하고 다양할수록 좋은 것이다. 남의 이야기는 백날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더 늦기 전에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내 피부로 느끼는 삶의 기쁨이나 슬픔에 관한 이야기, 내 가족과 친지들이 공유할 수 있는 조그만 즐거움이나 설렘에 관한 이야기가 많을수록 행복한 삶이다.
20대 젊음의 시절에는 세월이 천천히 가다가 사,오십대가 되면 세월이 쏜살같이 지나간다고 누구나 말한다. 그 근본적 이유는 <스토리보드 (Story Board)>다. 젊은 시절에는 삶의 이벤트가 많았다. 사랑하고 고민하고, 사색하고 좌절하고, 만나고 헤어지고, 졸업하고 입사하고, 매순간이 새로운 도전과 반응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40, 50대는 쳇바퀴도는 반복되는 삶이다. 내 삶이 아니다. 이미 스토리보드가 짜여진 판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이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러기 위해 승진하고 출세하여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 나를 잃어버린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은퇴시점인 5,60대 중년의 나이라면 지금이라도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내 스토리를 만들고 내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21세기는 남의 이야기를 해서는 인기를 끌지 못한다. 글을 쓰는 인기작가도 결국 자기 영혼을 팔아서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 목사님이나 스님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설교나 설법이 감동을 주지 못한다. 목사님이 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연예인들도 은막의 시대는 끝났다. 스타가 되기 위해서는 스토리보드를 만들어야 하고 스토리텔링을 해야 한다. 가난과 역경을 이겨낸 스토리면 더 감동적이다. 그래서 TV만 틀면 채널마다 리얼 버라이어티가 대세인 이유다. 현대인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Reality (현실성)과 Variety (다양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21세기를 사는 중년의 남자는 수다도 떨어야 하고 눈물도 흘려야 살 수 있다. <노오란 셔츠>입은 <말없는 그 남자>는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지금쯤 정신병원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중년의 수다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6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감동적인 스토리테링이 얼마나 되는가. 적어도 당신의 아내와 가족들이 감동할 스토리 이벤트는 몇가지나 되는가. 이제는 남의 험담이나 하는 한심한 중년남자로서의 수다가 아니라, 내 삶에 내 스스로가 감동을 주는 나만의 스토리보드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언젠가는 <영혼이 자유로운 남자>가 될 것이다..
터널 경제의 삶 (12/13/2012)
또 한해를 마감해야 하는 시점이다. 여러분의 올해 사업 성적표는 어떠한가. 장기간 계속 되는 불황으로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힘겨운 생활을 한다. 물론 이런 와중에도 돈을 잘 버는 선수도 있다. 혹자는 작금의 경제상황을 터널에 비유한다. 언제부터 터널이 시작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캄캄한 터널 안이며, 앞으로도 얼마나 더가야 터널을 벗어날지 예상조차 가늠키 어렵다. 저 터널 끝저리에 희미한 불빛은 보이다가도 또 길이 구부러지면 그 불빛조차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저 불빛을 우리는 희망이라고 하고 구원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몇가지 의문이 생긴다.
첫번째 가설은 과연 터널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 마음의 가상공간인가? 어쩌면 이승에서 산다는 자체가 끝이 없는 <터널의 삶>은 아닐까? 이승을 마감하고 천국가는 날이 비로소 터널을 벗어나는 날은 아닐까? 그래도 이 가설은 비교적 쉽다. 왜냐하면 인생 자체가 고해라거나 끝이 없는 터널이라면 이 조건은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구속>이기 때문이다. 너도 나도 사는게 끝이 없는 <터널속>이라면 저 희미한 불빛을 향해 오늘도 한걸음씩 나아가면 된다. 기도하고 묵상하고 열심히 하루하루 살아가면 언젠가는 저 터널을 벗어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터널안이 캄캄하고 그 끝을 짐작하기 어려워 두렵고 불안할 것이다. 그래서 터널 한가운데서 포기하고 주저앉은채 대책없이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이는 남들보다 빨리 가기 위해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다가 터널 벽에 머리를 쳐박고 죽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터널을 무사히 빠져 나올 것이다. 차이점은 터널을 평생이라는 시간동안 지나오면서 ‘행복했는가, 불행했는가’일 것이다. 터널 안에서의 행과 불행은 누구도 만들어 줄 수 없는, 스스로가 만드는 <복>인 것이다.
두번째 가설은 터널은 한시적이라는 것이다. 인생은 사람마다 지나야 하는 터널의 길이와 터널의 갯수가 다르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작금의 경제 상황을 <제한적 구속>이라 생각할 것이다. 이 일시적 고난은 곧 끝난다는 것이다. 곧 밝은 세상으로 나가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세계적 경제위기는 내가 선택한 고통이 아니라 거대한 세력, 즉 내가 어떻게 해 볼수도 없는 <거대한 타력>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터널 안에 갇혀 있든, 터널 밖으로 빠져 나오든, 어떤 상황에서라도 힘센 자가 이기고, 가진자가 이기고, 준비된 자가 이긴다. 그냥 터널 밖을 빠져나왔다고 가난한자의 형편이 나아지고, 힘 약한자가 힘 강한자로 바뀌지는 않는다. 오히려 터널을 빠져나오면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차이는 더 벌어진다. 가진자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터널안에 있을 때 남들보다 더 열심히, 더 빨리 걸어야 한다. 그래서 남들보다 한발짝이라도 먼저 터널 밖으로 빠져 나와야 한다. 왜냐하면 터널 밖으로 빠져 나오는 순간, 모든 물가는 올라있고, 모든 부동산과 비지니스 가격은 뛰어 오르기 때문이다. 먼저 터널을 빠져 나온 가진자들의 횡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의 사업실적은 여러분의 덕분에 4년동안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불경기가 장기화 될수록 가난한자가 가게를 사고 판다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통감한다. 터널속 경제논리다. 가난한 자는 가진 돈이 적으므로 터널 속에서 더더욱 심리적으로 불안해진다. 쉽사리 결정할 수가 없다. 수많은 생각과 주변의 우려와 불안으로 망설이는 동안 가진 자들에게 빼앗겨버린다. 터널 안과 밖에서의 가격과 조건들을 비교하면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자들은 터널 안에서도 계속 재산과 사업체를 불려나가는 것이다. 가난한 자도 어두운 터널 안일 때 준비를 마쳐야 한다. 그래야 밝은 터널 밖으로 나오더라도 그것을 기반으로 더 크게 불려나갈수 있기 때문이다. 빈손으로 터널 밖에 나온들 빈손인 것은 마찬가지다. 바쁜 벌꿀은 슬픔을 모른다. 문제는 항상 두려움이다.
이어령 교수의 시에 <언제 아담은 울었을까>가 있다. 천지창조 맨 마지막날 아담은 태어난다. 그리고 첫날 밤을 맞게 된다. 하나님은 다음날 해가 뜬다는걸 알았지만 아담은 알지 못했다. 깜깜한 밤이 되자 아담은 ‘아, 이게 끝이구나, 이게 죽음이구나’하며 공포와 두려움으로 밤을 꼴딱 세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 어둠에서 찬란한 태양이 떠올랐을 때, 아마도 아담은 목놓아 울었을 것이다.최초의 새벽에, 최초에 만나는 어둠 속에서 태어나는 태양을 보고 울었을 것이다. 그때 종교가 생겼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두려움, 하나님의 권능을 뼈절이게 느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양자물리학에 <터널효과>가 있다. 만약 인간의 맨손으로 두꺼운 철벽을 뚫을 수 있을까. 답은 가능하다. 실제로 소립자의 세계에서는 에너지가 낮은 입자 (인간의 손에 해당)가 고에너지 입자 (두꺼운 철벽)을 뚫어버리는 현상이 극히 이례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를 <터널효과>라고 한다.불가능한 일도 계속 두드르면 어느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방울이 떨어져서 어느 순간 바위를 깨는 이치다. 높은 장벽을 도저히 넘어가지 못하다가 일시에 터널을 뚫어 지나갈 수 있다는 이론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고 하셨지 않는가. 하지만 인간은 두드리지 조차 않고 주저앉은채, 터널을 벗어날 날만 기다리는 것이다. 새해에는 힘차게 쉬지말고 두드려 보시길 소망한다.
내 아내를 고발함 (12/20/2012)
나는 나의 아내를 고발하고자 한다. 그리고 <희망의 밥상> 저자인 제인 구달 박사와, <클린>의 저자 알레한드로 융거 심장 전문의, <밀가루 똥배>의 저자 윌리엄 데이비스 심장병 예방학 전문의, <병의 90%는 스스로 고칠 수 있다>의 저자 오카모토 유타카, <1일 1식>의 저자 나구모 요시노리, <생로병사의 비밀>의 KBS 제작팀을 한꺼번에 싸잡아 고발할려고 한다. 사연은 이러하다.
나는 결혼 30년차를 넘긴 중년남자로서, 키 172 센티미터, 몸무게 72킬로그램, 허리 사이즈 34인치, 혈압, 당 수치, 콜레스토롤 등 각종 건강수치와, 최근 두번의 암 종합검사에서도 지극히 <정상>판정을 받은 남자다. 물론 최근에 때늦은 오십견 때문에 오른팔을 잘 움직이지 못하고, 치아가 부실하며, 봄이 되면 꽃가루 엘러지가 심하다. 또 변강쇠처럼 힘이 센 편도 아니다. 하지만 지난 30년동안 그야말로 각종 유해물질에 노출되어 대책없이 살아온 생활의 <습>에 비하면 아직도 이런 건강을 지키게 해주심을 하나님께 감사하고도 감사할 뿐이다.
그런데 요즈음 아내의 <먹거리> 횡포가 도를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다. 나는 하루종일 배고프다. 나의 하루 먹는 음식은 다음과 같다. 아침은 야채주스 한잔이 전부다. 맛이 없어도 아내가 만들어 주는대로 마시지만, 견과류, 검정깨, 콩, 여러 야채 특히 맛이 쓴 야채, 과일 등일 것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6년을 마셨다. 그리고 점심은 아내가 만들어준 도시락이다. 이 도시락 인생도 6년이다. 하루 중 유일하게 밥을 먹는 시간이다. 내 직업이 사업 컨설팅 업무다 보니 상담이 예정보다 길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점심을 건너 뛰게 되거나 또 혼자서 먹으러 나가는 일도 예사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항상 아내에게 고마움 반, 미안함 반으로 도시락을 먹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밥의 양이 한 공기에서 반 공기로 줄었다. 한국 사람은 <밥힘>으로 사는데 밥도 없이 채소 위주의 반찬만 먹으라는게 말이 되는가. 그러고 모든 반찬은 소금을 안뿌렸는지 싱겁기 짝이 없다. 물론 문제는 내가 일으켰다.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고 움직여도 자동차로 움직이니 운동량이 적을수 밖에 없다. 그래서 올 봄에 몸무게가 72Kg 에서 2Kg 정도 느는가 했더니 34인치 바지들이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다. 배가 나오고 바지가 잘 채워지지 않으니 옷입을 때 금방 들통이 났다. 아내는 신혼 여행때 입던 옷을 지금도 그대로 입는다. 거짓말 같지만 사실이다. 드디어 올 봄부터 점심 도시락 밥의 량이 줄어들더니 급기야 올 가을에는 저녁을 고구마 한개로 바꾸어 버렸다. 저녁을 주지 않는 것이다. 모두가 위에 열거한, 아내가 읽은 책들 때문이다. 아내는 한번 머리에 입력이 되면 좀처럼 변하지 않는 <맹꽁이과>다. 구달 사순 박사의 <희망의 밥상>을 읽더니 육식에 대한 거부감이 엄청 강해졌다. 반대로 나는 육식을 엄청 좋아한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육류 관련 음식은 모두 다 좋아한다. 그런 남자에게 일주일에 육류를 한번 정도 먹을 수 있는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그런데 융거 박사의 <클린>과 윌리엄 데이비스의 <밀가루 똥배>를 읽고나서 부터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클린>의 핵심을 요약하면 첫째, 독소와 스트레스는 몸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스스로를 치유하는데 장애가 된다. 둘째, 현대인의 식습관과 생활습관은 우리 몸을 오염시키며, 몸이 최적 상태로 기능하는데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하지 못한다. 세째, 독소를 없애고 식생활을 개선하면 우리의 몸은 건강을 회복하고 에너지를 되찾아 최상의 외모와 기분을 갖게 된다. 또 <밀가루 똥배>로 밀가루를 거부하는 것이다. 나는 고기도 좋아하지만, 빵이며 면종류 음식은 모두 좋아한다. 특히 저녁에 밥을 해 주지 않는 대신에 잔치국수, 소면, 냉면, 해물칼국수, 짜장면, 해물 짬뽕 뿐만아니라, 해물파전, 고추전, 김치전,부추전 등 각종 부침게도 무척 좋아해서 자주 해 먹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밀이 유전자 변이로 조작되어 글루덴 성분이 비만의 주범이며, 각종 성인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밀은 혈당과 인슈린을 증대시켜, 비만, 당뇨, 심장병, 남성 유방, 뇌질환, 골다공증, 각종 류마치즘, 셀리악 병, 피부병, 알레르기 등을 일으키는 주범이라는 것이다. 밀의 중독적 특질인 에소르핀은 중독, 금단, 망상, 환각, 식탐 증세를 일으키며, 식욕 촉진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현대 미국 성인의 2/3가 비만이거나 과체중인데, 특히 통곡밀을 권장한 1986년부터 급증했다고 한다.
“이래서 못먹고 저래서 못먹으면 무얼 먹고 사냐? 하늘이 무너질까 두려워 하늘을 이고 살지 그러냐?”고 반항도 해 보지만, 아내는 마이동풍이다. 혹자는 밖에 나가서 몰래 사먹거나 혼자 만들어 먹어면 되고, 라면도 있고 페스트푸드점도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할 수 있다. 패스트푸드점 음식은 이민온지 10년이 지났지만 내 발로 간 적은 열번도 안될 것이다. 또 아내가 싫어하는 일을 그것도 아내를 속이면서까지 거사(?)를 꾸미기는 싫다. 그리고 참고로 나는 한국 식당의 매뉴판에 적혀있는 대부분의 음식들을 혼자 만들 수 있다. 허풍이 아니다. 나의 요리솜씨는 내 가족과 친지들이 모두 인정하는 수준이다. 그리고 이민와서 Breakfast & Deli가게도 운영하면서 직접 Cook을 해 보았기 때문에 미국사람들과 관련된 음식도 어느정도 할 수 있다.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혼자 살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끝난 남자다. 하지만 나를 위해서 아내가 저리도 애쓰는데 아내의 눈을 속인다거나 힘으로 억지를 부린다는 것은 사내대장부로 할 일은 아니지 않는가? 그나저나 오늘 저녁은 어디 밥 얻어먹을 곳이 없을까?
또 한해를 보내며 (12/27/2012)
아니 벌써? 무얼 했다고? 무슨 염치로?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받기만 하고 또 한해를 보내도 되는건가? 여느해 처럼 여러분들에게 사랑받고, 격려받고, 은혜받고, 위로받고, 관심받고, 도움받은 한해다. 감사하기로 마음먹으면 감사하고도 또 감사할 일들로 넘쳐난다. 해서 미안하기로 마음먹으면 미안하고도 또 미안한 일들이 마음 언저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참으로 바쁘게 살았던 한해 같은데 막상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남겼는지, 무엇을 나누어 드렸는지 머리 속이 멍한채 떠오르지가 않는다. 일주일 하루 하루가 아침에 눈뜨고 부터 늦은 밤 눈 감을 때까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짜여진 시간표대로 일하며, 운동하며, 신앙생활하며, 책보며, 칼럼쓰며, 음악하며, 산책하며, 서로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며, 웃으며 가슴 아파하며, 그렇게 산 한해였다. 누구를 크게 미워한 기억도 없고 누구를 크게 원망한 적도 없는 한해였다. 크게 아픈 적도 없고 불의의 사고로 고통받은 적도 없다. 분에 넘치는 평온함 가운데 하루하루 열심히 살수 있게 해 주심을 감사드린다.
하지만 유독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일들은 나의 고객들과 주변분들 중에 아픈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가게를 급히 팔아달라고 하시는 분들중에 사정이 딱한 분들이 많은데, 문제는 그런 분들 가게가 대부분 안팔렸다는 것이다. 이분들 가게는 나의 기도 제목이기도 하다. 죄송하고 송구할 뿐이다. 가게를 팔아드리지 못한 결과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나의 무능함과 노력의 부족함은 당연지사니 열외로 하자. 그러면 경기가 불황이어서 가게를 사겠다는 Buyer가 없어서인가? 아니다. 가게를 팔아드리지 못한 저의 고객들에게 변명이라도 하기 위해 저희 회사의 2012년 영업비밀 자료를 몇가지 공개한다. 나의 고객들에게는 각자 고유 ID 번호가 있다. Buyer는 저희 회사를 방문해서 저와 직접 상담을 하신 분들에게만 ID가 주어지며 컴퓨터 고객List에 등록이 된다. 2012년 올 한해동안 저희 회사에 처음 오셔서 신규등록하신 Buyer분은 #540번 부터 #649번까지 총 110명이며, 그중에서 저에게 직접 컨설팅을 받으신 분은 86명이다. 나머지 24명은 아직까지 가게를 사실 준비가 안되었다고 판단되어 보류한 상태이다. 그것이 Seller 고객들에 대한 나의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올해 Buyer 최초 등록 인원수는 1월에 20명, 2월에 3명, 3월에 8명, 4월에 13명, 5월에 15명, 6월에 9명, 7월에 8명, 8월에6명, 9월에8명, 10월에 10명, 11월에 5명, 12월에 5명, 이렇게 총 110명이다. 그중에서 가게를 사신분과 현재 계약 진행중인 분들은 총 18명이다. 물론 2009년, 2010년, 2011년에 최초 등록하시고 아직까지 가게를 구입하지 못하신 분들도 상당수 있다. 올해 구매자중에 2명은 3년전에 처음 등록하시고 3년을 저와 줄기차게 상담하신 분들이다. 다른 브로커에게는 가지도 않는다. 철저하게 저를 믿고 맡기시는 분들이다. 결국 3년만에 가게를 구입하신 것이다. 정말 징그럽게(?) 고마운 분들이다.
이렇게 소상히 말씀드리는 이유는 가게를 사겠다는 Buyer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사업 업종에 대한 사전 정보들이 왜곡되어 있거나, 너무 안일한 시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매입 결정을 못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가지고 있는 돈에 비하여 너무 많은걸 요구하는 경우다. 예를 들어 한인들의 대표 업종들은 크게 4분류로 나뉘는데, 첫째가 세탁소와 Drop Store, 둘째가 먹는 장사, 즉 Breakfast, Deli, Beer Deli, Convenience Deli, 레스토랑, Salad Bar, Pizza Deli, Seafood, 야채가게 등이다. 세째가 Stock 사업이다. Beauty, Discount, Dollar, 맥주도매상, 그로서리 등이다. 네째가 장치 서비스업이다. Car Washer, Gas Station, Coin Laundry, Nail Spa, Hair, 기타 각종 프랜차이저 사업들이다. 이중에서 흑인상대로 하는 가게는 싫다고 하면 몇개 업종이 남을까. 우리가 사는 지역은 필라 다운타운을 빼고 나면 까다로운 백인동네에서 할 수 있는 사업은 정해져 있다. 또 주7일영업은 안된다. 맥주나 담배를 팔면 안된다. 애들 교육때문에 하루종일 일을 하지 못한다. 매니저를 두고 해야 한다. 모든 지출을 공제하고 월 순수익이 1만불은 되어야 한다. 경험은 별로 없다. 여자 혼자서 혹은 남자 혼자서 해야 한다. 가진 돈은 얼마되지 않는다. 가게를 사시겠다고 오신 분들 중에 내 머리로는 도저히 도와드리지 못할 분들이 평균 20%는 된다. 또 Buyer본인의 상황을 정확하게 공개하지 않는 분들에게는 어떤 도움도 드릴 수가 없다.
비지니스 브로커는 가게를 사드리기 위해 몇개월을 함께 일하지만 Buyer에게는 돈한푼 받지 않는다. 가게를 사기까지 브로커를 평균 스무번 이상은 만날 것이다. 그러고도 가게를 사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자신의 정보를 속이거나 감춘다면 이들을 좋은 팀이라고 결코 할 수도 없고, 좋은 가게를 살 수도 없다. 나는 다른 브로커들이 고객들에게 어떻게 상담을 하는지, 어떤 매물이있는지, 어떤 Buyer가 있는지, 몇건이나 매매를 하는지, 알지도 못하고 솔직히 관심도 없다. 여러분 스스로가 믿을 수 있는 전문가를 찾아서 그들을 좋은 파트너로 활용해야 한다. 같이 고민하고 함께 사업성을 분석해야 한다.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숫자 뒤에 거짓말을 숨겨놓았을 뿐이다. 새해에는 현실성있는 기준으로 좋은 브로커를 만나 최선의 매물을 구입하시기 소망한다. 그리고 저를 믿고 매물을 맡기신 Seller고객들에게는 빨리 팔아드리지 못한 죄송함과 아울러 새해는 더욱 분발할 것임을 약속드린다. 새해에는 여러분 가정과 가족 모두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