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 칼럼 2010

** 모든 저작권은 윌리칼럼 저자인 이위식 (Wi Sik, Lee)에게 있으므로 저자의 서면 동의 없는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모든 윌리 칼럼은 미국 Korea Phila Times (주간필라) 신문에 매주 해당 날짜에 출간된 것임을 밝힘니다. **

 

단순하게 사는 법 (01-04-2010)

별다르게 놓은 일도 없이 세월만 가고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다는듯이 묵은해를 보내며, 어김없이 새로운 해를 맞이한다. 해마다 맘때면 겪는 뒷맛이 개운치 않는 쓸쓸함이며,  새해에 대한 두려움이다. 무엇을 했는지 기억에도 없는데 막상 일기장이나 수첩을 뒤져보면 역시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감사해야 일들이 적지 않음을 알게 된다. 지난해에도 번번히 신세만 지고 마음의 빚만 늘어 가는 같아 여간 송구스럽지 않다. 이민와서 나이는 잊으려고 노력도 하고, 늙어감이야  잊는다고 잊혀질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이곳은 한국에 비해 나이에도 있는 <> 있다는 것이 고마울 뿐이다.

나는 새해에는 어떻게 살까 생각하다가 새해에는 < 단순하게 살아보자.> 새해의  주제로 잡아 보았다.  <단순함> 삶의 필요한 부분들이 아니면 가능한   억제하고 해야 ,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한 <집중화> 의미하기도 한다. 나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지만 그래도 새로운 계획이나 구상을 세워보고 실행해보려는 노력을 하는 것과 일체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다를 것이다. 하지만 늙어간다는 징조가  이러한 변화와 계획, 다짐등 <새로움> 번잡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은 아닐까. ‘어제가 오늘 같고, 그러한 오늘이 내일이라고 있을까, 하물며  새해라고 무엇이 달라질까라는 과거 비난형, 현실 안주형이나 미래 체념형으로  변해가는 것이 늙어감의 상징은 아닐까. 누군가는 삶은 과거형이라고 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지, 남들따라 살아지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인생에  단한번뿐인 오늘이라는   순간을 신이 주심을 감사하며 나의 삶으로 사는 것은 어떨까. 세상을 사는데는 두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죽음을 향하여 하루하루 살다가 죽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하루하루 새롭게 사는 삶이다. 매일 아침 나를 깨우는 것은 자명종 시계 소리도 아니고 마누라의 앙칼지거나 혹은 섹시한  기상소리도 아니다. 매일 아침 나를 깨울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며, 새로운 하루를 허락하시는 분도 분뿐이다. 그분이 나를 깨우지 않으면 그것으로 인생은 자동 종료되는 것이다. 그러니 억지로 자살할려고 앙탈을 부리지 않아도 되고, 천년 만년 살겠다고 몸에 좋다는 것은 죄다   속에 집어넣고 남에게 못할 하면서 심술부리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시간은 사람이 만들어 약속일 뿐이다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은 시간이라는 연속선상의 점들일 뿐이다. 탄생과 죽음, 시작과 끝이라는 정의도 인간이 지정해 놓은 가설일지 모른다. 숫자 제로에도 플러스 제로와 마이너스 제로가 있다. 나는 이것을 제로의 철학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이 정의한 시간에 관련된 단어들은 연속선상의 각각의 점들인데, 인간이 무슨 특별한 가치를 부여한다고 자체의 순수성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도 시간의 본질은 동일한데 사람이 땅위에 있을때와 우주선을 타고 있을 때와 다른 행성에 있을 때의 인간의 시간은 달라지며  상대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하루하루 죽어가는 삶을 것인가, 새롭게 살아가는 삶을 것이냐하는 평가 기준은  삶의 본질에는 변함없지만 삶의 가치는 자신이 결정하기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하는다는 가르침일 것이다.  

그러면 나는 새해를 어떻게 살까. 일단은 새해 나의 삶을 세가지의 형태로 나누어 놓는다. 하나는 <>이고 다른 하나는 < 개인 생활의 즐거움>이고 마지막은 <건강 관리>이다. 이렇게 나누는 이유는 최대한 나의 삶을 <단순화>시켜 보려 함이다. <> 평생 왔고 남은 세월동안 계속 하겠지만 새해에는 스스로에 대한 <> 평가 기준을 과거와 달리 하고 싶다. 그리고 스스로를 위한 <개인생활> 분명히 규정하고  속에서 조그만 즐거움을 찾아볼려고 한다.  과거에 비추어보면 항상 우선순위가 <> 먼저였기 때문에 개인 취미 생활은 시간이나 형편상 <여유가 되면> 이라는 전제조건에 번번히 좌절당하고 말았다. 새해에는 <> <개인 취미 생활> 중복시키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하겠다. 그리고 <건강관리>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소홀히 했던 부분이다. 하나님이 대부분의 사람에게도 그러하셨듯이 나에게도 건강한 몸을 주심을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앞으로 남은 세월도 탈없이 건강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하나님께 강제위임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한국 가서 종합검사를 받으면서, 건강 관리는 하나님 소관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의 소관하에 <무한 책임의 조건 계약>임을 알고 잔뜩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몸은 내가 챙긴다.’ 새해 슬로건이다.   

여기에다 <인생수업>의 작가가 권유한  4가지 삶의 기술을 접목시켜보자.  <살고 Live 사랑하고 Love, 웃으라 laugh. 그리고 배우라Learn. 이것이 우리가  이 지구별에서 존재하는 이유이다.>라는 4가지 멋쟁이 항목들을 나의 세가지 삶의 대항목인 <일, 개인생활, 건강>과 메트릭스 구조로 한번  만들어 볼까 한다. 여러분도 함께 만들어 보심은 어떠하실지…

 

 군복 정장 (01-11-2010)

사람이 살아가면서 평생을 함께 하는 것이 <>이라는 놈이다.   <> 싫어서 버리면 어느듯 <>이라는 놈이 나에게 붙어 있다. 흔한 말로 <사랑>없이는 살수 있어도 <>없이는 수가 없다. <사랑> 밥먹여 주지 않아도 <> 밥먹여 준다. 사랑은 없어도 죽지는 않지만 일이 없으면 죽는다. 현대인의 할딱거리는  생명은 사랑이 아니라 일로 인해 연명되어 간다. 사랑은 변하기  마련이며, 식어지면 다른 사랑을 찾아 떠나기도 한다. 살다보면 사랑하는 사람이 없이도 살아가기도 하며,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도 아무일 없다는 듯이 살아가기도 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태어난 것은 죽고, 생겨난 것은 없어지며 만들어진 것은 부서지며 나타난  것은 사라진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으로 없는 가상의 절대적 존재를 만들고 그에 의존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유독 사람이 만든 것중에 죽는 날까지 지겹도록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이다.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 개의치 아니한다. 내가 기쁘거나 슬프거나  <> 개의치 아니한다. 내가 아프거나 병들거나 개의치 아니한다. 내가 열심이거나 게으르거나 개의치 아니한다. 내가 많이 하거나 적게 하거나 개의치 아니한다. 분명한 것은 사람은 <> 통해서만 먹고 살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내치실때부터 하나님은 화가 많이 나셨기 때문에 항상 모든 일과 자원에는 <한계성> 두셨다. 따라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부족할 밖에 없고 항상 모자라며 불만스럽게 느끼도록 만드신 것이다. 목이 말라 마실수록 갈증을 느끼도록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승차권을 각자에게 주셨다.   <욕망> 위대하거나 거룩한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많은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이룰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현재 내가 서있는 위치에서 <한발자욱만  >, 내가 현재 가지고 있는 보다 <한개만 >, 항상 <욕망> <조그만 > <한개만 >< 단계만 > 요구하되, 쉬지 않고 요구하는 것이다. 만족을 모르는 것이 문제이고 감사할 모르는 것이 문제이므로 쉬지 않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욕망> 갖고 있는 맹독성이며, 중독성이다.   <욕망> 전차를 타면 일에 대한 목표와 속도는 더욱 높아지고 빨라져서 오로지 전차가 원하는 목적지를 향해서만 달리게 된다.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얻으려고 어느 목적지를 향해 그렇게 정신없이 달렸는지 자신도 모르고 달려 것이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욕망>이라는 전차에서 내려야만  한다. 내려서서 발로 대지에 우뚝 섰을 비로서 모습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달리는 전차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전차를 타는 것보다 몇배의 용기와 위험이 뒤따른다. 나는 전차에서 스스로 뛰어 내리지 못했다. 전차에서 내팽개쳐서 굴러 떨어지고서야 전차의 모습을 있었다. 나이가 들어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보면 전차는 타지 말았어야 했다는 자괴감이 밀려온다.

젊은 시절의 일에 대한 <욕망> 군인의 <군복 정장> 같다. 유니폼을 입고 있으면 자기 자신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아내는 살아오면서 내가 가장 멋있게 보였을 때가 공군 군복 정장을 입고 연애했을 때라고 한다. 계급이 높을수록, 무공훈장이 붙을수록 자신은 더욱 특별한 존재가 되어간다. <군복 정장> 젊은이를 전쟁터로 내몰고 거기서 기꺼이 죽을 있도록 세뇌시키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무엇을 위해 젊은이는 나이에 초개처럼 죽을 있을까. 국가를 위해, 인류를 위해, 평화를 위해, 자신의 신을 위해, 아니다. 무엇도 젊은이의 죽음을 대신할 없다. 주검옆에는 빛바랜 훈장과 <군복 정장> 남아 있을 뿐이다.

이제는 <욕망>에서는 벗어나서 일할 있을것 같다. 내가 얼마를 벌지 않으면 가족이 굶어 죽는다는 과장된 표현은 하고 싶지 않다. 한달에 지출되는 경비가 얼마이고, 올해 가족들 계획에 따라 얼마를 저축해야 하고 돈을 벌지 못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올해 매출 목표가 얼마이고 올해 경쟁대상이 누구이고 지역에서 언제까지 일등을 해야 하고 하는 등의 숫자로 정량적 목표놀이는 그만 하기로 하자. 30년이상의 세월을 항상 목표를 정해놓고 목표를 향해 죽자살자 달려 인생이 아니었던가. 목표는 내가 있는 목표보다 항상 20%   많게 정하여서 동료나 경쟁자를 이기기 위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는가. 일등만이 살아남는다, 적자생존, 약육강식,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변해야 산다.등등의 무시무시한 구호가 오히려 익숙한 환경에서 대부분의 인생을 살아오지 않았는가, “6개월마다 자신의 이력서에 기록할 만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면 이미 도태된 인생이다라는 신념아래 최신 정보, 최신 기술, 최강 조직에 목숨 걸며 자학해 세월이었지 않았던가. 자신을 독려하며 승리하는 날을 위해, 어쩌면 한걸음,   한걸음 앞서기 위해 나의 시랑하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며 살아왔던 세월들이 아니었던가.

이제는 그 멋있고 엘리트다운 <군복 정장>을 벗어버리고 헐렁헐렁한 편한 옷으로 갈아 입고 편하게 일하고 싶다. 수십년동안 일해 온 <습>이 있고 머리속이 온통 숫자들로 자동처리되는 알고리즘이다 보니 옷 바꾸어 입는다고 많이야  달라지겠느냐만은, 그래도 더 이상 계산하고 정해 놓고 그 속에 맞추어 놓고 살고 싶지는 않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이고, 이 일이 있음을 감사하고, 얼마를 벌든지간에 해가 뜨고 해가 지듯이 그렇게 하루하루 일하고 싶다. <단순하게> 일하고 싶다. 그 일과 함께 살고(Live), 그 일을 사랑하고(Love), 그 일로 인해 웃고(Laugh),  그 일로 부터 삶의 이치를 배우기를 바랄뿐이다 (Learn). 

 

 상실과  이별 (01-18-2010)

요즈음처럼 웃을 일이 별로 없고 마음이 겨울 날씨처럼 자꾸 우울해진다면 두권의 책과 한편의 영화를 권하고 싶다.  겨울철 군밤같은 느낌의 책은 경북 안동에서 개인 병원을 하는  박경철이라는 외과 의사가  <시골 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두권짜리 책이다. 한권은 그동안 외과 의사 생활하면서 겪었던 환자들의 이야기고, 다른 한권은 본인 자신이 의사로서 겪어 왔던 , 의대생 시절, 인턴(짐승이라 칭한다고 .)시절, 레지던트 시절, 종합 병원 전문의 시절, 개업의사 시절들의 이야기를 간결한 문체로 기록하였는데 전혀 지겹지 않을 것이다. 아내는 천성이 야무지지 못한 탓도 있지만 책을 본다고 집에 오는 지하철 역을 두번이나 놓치고 종점까지 가셨다나. 아무튼 책을 권하는 이유는 우리가  실제로는 어려움없이 살아가면서도, 특별한 감사함도 없이, 의미없고 재미도 없다고 투덜거리며 하루하루 살고 있는데 반해, 순간 순간 죽음과 싸우는 수많은 이웃들이 있다는 것이다. 응급실에서, 중환자실에서, 신생아실에서, 수술실에서 하루에도 수많은 생명들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것이다. 병원에 실려오는 긴급 환자들의 대부분이 <우연>으로 어느날 갑자기 스스로에게 닥친 사고라는 것이다.

작가가 책을 쓰게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은 삶에서 맞닥뜨린 수많은 <‘우연 연속>으로 오늘이라는 필연적 결과를 얻게 된다. ‘우연으로 점철된 삶의 결과로 지금 우리가 자리에 있는 .’ 그것이 내가 필연이라고 믿는 현재의 모습이라면, 지금까지 내가 지나온 삶의 흔적들과 내가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연 역시 하나하나가 모두 삶의 소중한 역사일수도 있다.”라고 한다. 우리 모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수많은 우연으로 각자의 필연적 삶을 살아 왔는지 모른다.   삶의 한가운데에는 지금처럼  고통과 아픔과 두려움이 있었기 마련이다. 지금  많은 한인 사회 여러분이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살고 있다. 과거에도 그러했던 처럼 고통의 순간을 사랑과 감사로 버티고 이겨내면 이야기의 아름다운 추억이 것이다. 우리보다 힘들고 어려운 <우연>속에 살고 있는 <이웃>들을 잊지말고, 그래도 나는 나은 편이라고 위로하고 감사하자.

하나의 추천은 < 사랑 곁에>라는 한국 영화이다. 나는 영화의 예술성을 평가할 있는 지식이나 매니아이어서 추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아내가 울면서 영화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순정물 드라마나  멜로영화를 무진장 좋아하는데, 나는 별로 하는 일이 없을 때에는 옆에서 강냉이 튀긴것이나 팝콘 얻어먹는 재미로 같이  보곤 한다. 그런데 영화처럼 아내가 영화보다가 울면 괜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도 눈치보면서 먹을 것을 갖다 나르는 것은 나만의 비굴함인가. 아무튼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루게릭병을 <우연> 앓게 되는데 그에게는 가족이 아무도 없다. 병은 신체의 모든 신경조직과 근육 세포가 서서히 마비가 되면서 아주 천천히 고통을 받으면서 죽어가는 병이다. 자신의 모든 감각 기능과 판단기능이 파괴되는 것을 환자 본인이 직접 느끼면서 서서히 죽어 가야 한다는 것이 정말 끔찍스러운 병인 것이다. 그러한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택한 여자가 있으며, 두사람이 죽는 순간까지 사랑한다는 심플한 내용인데 연기가 장난이  아니다. 남자 주인공은 연기를 하기 위해 20킬로그램의 몸무게를 감량했으며, 촬영중에도 계속 감량한 흔적이 화면으로 직접 느낄 있다. 비만인 사람이 20킬로 감량하는 것과 정상 체중인 사람이 급격히 무리한 감량을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며, 실제로 배우는 엄청난 후유증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그런데 배우가 감량한 개인적 사연을 아내로 부터 듣고 보니 세상에 쉽게 되는 일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영화를 보면 내가 만약 저런 병에 걸렸다고 하면?, 그떄 나는 어떻게 것인가? 무엇을 것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변해 갈까? 이별은 언제,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가장 아프게 하는 걸까? ’등등의  의문들이 계속 꼬리를 문다. 이때 옆에서 같이 영화보는 짝궁에게 내가 저런 병에 걸리면 당신은 어떻게 할건데? ‘따위의 시비조 질문을 하면 건강할때 잘해, 짜샤라는 가슴 면박과 동시에 내쳐지기 일쑤이므로 조심해야 한다.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벨로 로스는 <인생수업>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생은 상실과 이별의 연습이 필요하다.  상실 없이는 성장도 없다. 성장 없이는 상실의 경험도 있을 없다. 상실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자신에게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것을 잃는 것만 여기지만, 상실이 주는 배움을 통해 당신이 그동안 하찮게 여기던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깨닫게 해준다. 상실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실을 느끼고 사실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 고통을 겪는 것만이 고통에서 벗어날 있는 유일한 길이다. 고통의 한가운데 있을 때는 상실감이 결코 끝나지 않을 같지만 삶의 수레바퀴는 계속 굴러 간다. 환자 병동에서는 하루에도 많은 생명이 죽어가지만 바로 옆의 신생아 병동에는 하루에도 많은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다. 모든 상실의 과정은 다섯 단계의 과정을 보인다. 첫번째 반응은 <부정>이며, 두번째는 <분노>, 세번째는 <타협>, 네번째는 <절망>, 다섯번째 반응은 <수용>이다. 과정은 반드시 거치는 일률적이거나 순차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상실은 우리에게 공허함과 무기력, 분노, 슬픔, 두려움 등의 감정을 남긴다. 분명한 것은 <시간> 모든 것을 치유하리라는 사실이다.”

 

 내가 선택한 <전반부> (01-25-2010)

사람은 하고 싶은 보다 해야만 하는 자신을 얼마나 붙잡혀 사는지 알면 놀랄 것이다. ‘하고 싶은 대한 정의는 자기  스스로에게 결과에 신경쓰지 않고 원하는 일을 무엇이든지 있다면 , 어떤 일을 것인가?” 대한 대답이며,  ‘나는 누구이며, 진정한 나를 가로 막고 있는 장애물이 무엇인가?” 대한 답을 구해 것이라고 한다.살면서 내가 선택한 일들은 내가  ‘하고 싶은 이었나, 혹은 해야만 해야 이었나. 자신이 한번 지나온  세월을 뒤돌아 보는 이유는 미련이나  늙었다는 의미보다 앞으로도 아직  걸어 가야   인생의 종반부와 지금 현재도  내딛고 있는 발자욱의 의미가 남았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에는, 아니 대부분의 삶들이 내가 하고 싶은 한다는 것은 참으로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대학교 학과를 선택할 때에도 자기 적성이나  가고 싶은 학과를 선택하는 자체가 어려웠다. 출신 고등학교가 원하는 일류 대학에 몇명이나 합격하는 것이 우선이지 본인의 적성이나 취미는 크게 상관치도  않았으며, 본인 스스로도 정도의 장래 학과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신도 전자공학과에 대한 지식이나 꿈이 있은 것이 아니라 당시 반도체, 전자제품 생산등, 사회의  인기학과라고 주변에서 부축이니까  막연하게 우쭐거리며 학교를 다닌 같다. 부모님들은 의과대학을 들어가길 원하셨지만  원하는  의과대학에는 들어갈 성적이 안되었고, 재수는 하기 싫고, 그렇게 핑계삼아 생각해 보니 의사라는 직업이 별로 달갑지도  않았다. 사는게 요즈음처럼 힘든 알았다면  성적에 맞는 의대라도 다닐걸 잘못 선택했다는 후회 아닌 후회도 보지만, 의사라는 직업은 숭고한 사명감 없이는 없는 천직임을 알고 있기에 지금  다시 결정하라고 해도 의사는 못할 같다.

 군에서도 통신 전자 장비들을 교육시키는 장교 교관,초급 지휘관, 번역장교등 여러가지 관련 업무를 내가 지원해서 했지만, 군인 복무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도 아니었고 관심도 없었으며 지금 기억에 남는 지식도 없다. 제대하고 대기업에 취직하여 컴퓨터 사업부 기획실로 발령이 났는데 기획실 업무가  비상대기조이다. 특히 그 시절에는 끝도 없는 서류작업하다가 내 인생이 끝날 것 같았고, 내 알량한 전공조차 못살리는 것 같아 기술부서로 보직을 바꾸어 달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겁도 없는 행동이었지만  윗분들의 배려로 소프트웨어 기술부에 발령이 났다. 그런데 이때까지 내가 배운 전자 지식하고는 전혀 다른 새로운 전문 분야였다. 그것도 경력사원으로 입사를 했으니 기존의  3년차 동일 호봉 동료들하고는 업무 지식이 하늘과 땅차이다. 어느 조직이든지 간에 3년차가 그 조직의 꽃이다. 가장 열정적이고 그 분야에 대한 실무 지식이 가장 능숙하다. 또 진급대상(그 당시에는 대리) 이었기 때문에 모든게 싱싱하다. 그때는 정말 창피당하기 싫어서 밤을 세워 실무 공부를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밤세워 공부하던 컴퓨터 실무 지식이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으며 사용할 곳도 없다. 그 당시에는 개인용 컴퓨터나  인터넷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지금 사용하는 컴퓨터 지식과는 많이 다르다.

그러던 어느날 지사장으로 발령이 났는데 업무 평가 기준이 대형 컴퓨터 판매 실적 위주이다. 그 이전까지 영업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해 보지도 않았고 영업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관심도 없었으며, 방법도 몰랐고, 영업이나 마케팅과 관련된 책 한권도 읽어 본 적이 없었다. 주위의 동료 선배들은 고속 승진했다고 축하하였지만 나는 사표를 양복 안주머니에 가지고 다니면서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직속 임원이 개인적으로 나를 불러 ‘대기업에서 부사장, 사장할려고 하면 영업부서  근무는 필수’라는 일침에 그날부터 영업을 배우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고객들이 전산실장, 기획실장, 임원, 사장급들이었으로 대부분 연배가 많았고 모든 기준이 그들 연령에 맞추어졌다. 컴퓨터 시스템을 한대 더 팔기 위해,  결국 남들보다  조금 빨리 진급하기 위해, 밖에서는 못마시는 술마시고 접대하며 술에 취해 살고, 회사 안에서는 부하 직원들을 독려하여 제안서를 만들고 경쟁사를 비교 분석하고 악쓰며, 계약을 따기 위해 협력 부서장들과  직속 윗선에다가는 몇차례씩  비위를 맞추면서 품의 조정하고, 이리저리 숱한 밤을 세워가며 집에 못들어 간 날들이 부지기수 많기도 많았다. 그런 일상은 마케팅 부장으로 일할 때에도 마찬가지였으며, 사생활은 거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찬란하다고 하는  청,장년 시절  20대와 30대의 20년이라는 세월을 불태워가며 얻은 것이 무엇이었는가. 대부분 내가 선택해서 얻은 일과  광범위한 업무 지식과 그 많은 인맥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지고  지금 나에게는 무엇이 남았는가. 불과 남들보다 이,삼년 앞서 진급하기 위해,  출세하기 위해, 몇개의 상장과 상패를 받기위해,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단순히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였다면,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한 그 많은 세월들이  너무 생각없이 지불한 내 인생의 값어치로 변질되는 것 같아  긴한숨만 나온다.  무엇인가는 값진 것을 얻었을 것이다.

 

 내가  선택한 <중반부> (02-01-2010)

나는 개인 사업을 40대에 들어와서 시작하여 10년을 했다. 대부분의 회사원들이 그러하듯이 이렇게 회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바에야  차라리 사업을 하자라는  참으로 막연한   결심을 하고 준비없이 뛰쳐 나와 회사를 만들었다. 이전까지 회사원 시절에는 모든 돈과 사람이 회사 소유였으므로 내가 하고 싶은대로 있었고 잘못 되더라도 징계를 당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사표를 내면 된다는 배짱이 있었다. 하지만 개인 사업은 하나에서 열까지 개인 주머니에서 돈이 나와야 하기 때문에 마음껏 일을 저지를 수가 없다. 그래도 얼마간의 흑자가 때에는 사업에 자신감도 생기고 이대로 가면 준재벌이 수도 있겠다는 착각도 든다. 직원들은 늘어나고 사업 규모와 영역이 자꾸 늘어나며, 전국 대리점 규모도 늘어난다. 사업이나 개인 생활이나 되고 살림이 늘어날 때에는 문제가 없다.직원들에게 주인 의식도 강요할 있고 회사의 비젼도 이야기할 있다. 야단도 있고 야근을 강요할 수도 있다. 차도 바꾸고 목에 힘도 들어간다. 광고 비용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며 인지도도 높아진다. 누구 눈치보지 않고 내가 결정한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기 때문에 사장이라는 자리에 만족도 한다. 직원들이 동생같고 아들, 딸같다는 착각도 한다. 평생 가족이라는 생각에 함께 날밤을 세워도 피곤한 모른다. 밤세워 일하고 새벽에 직원들하고 사우나를 함께 갔다가 해장국을 먹고 다시 회사로 출근하는 것이 무슨 대단한 독립운동한 처럼 연대의식을 느낀다. ‘ 사전에 불가능은 없으며, 세상은 넓고 일은 많다라는 말이 나를 위해 만들어진 같은 착각을 한다.

그런데 IMF 같은 경제 위기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적병을 만나거나 회사의 정책 결정이 잘못되어 적자가 나기 시작하면 사장의 하루하루는  지옥의 시작이다. 적자가 누적이 되고 계획대로 실적이 나오지 않으면 고통과 불안의 나날을 보내야 한다.그날부터 사장은 모든 일을 제껴 놓고 돈과의 전쟁 해야 한다. 살면서 한달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짧게 느낀 적은 없다. 겨우 지급금을 맞추어 마감했는데 한달이 금방 다시 올아 온다은행 금리와 예상 경제 지수가 맞지가 않고 예측조차 하기 힘들면 견디기가 정말 어렵다종업원 한명 한명의 급여가 부담스럽기 시작하면 아무리 좋은 경영철학도, 비젼제시도  먹히지 않는다. 명령이 하달되지 않으며 상하 의사소통이 두절된다. 아무리 신뢰하는 부하 직원이라도 두달만 급여가 연체되기 시작하면  웅성거리기 시작하며, 사표가 접수되기 시작한다. 그것도 우수한 사원부터 나가기 시작한다. 당연히 그들도 회사의 조직원이기에 앞서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이며, 사회인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사장은 회사가  망하는 전날까지 아무에게도 <죽겠다.>라는 한마디 없으며, 어떻게든 돈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회사와 사장에게 허점이 보이면 어느날 생각지도 않았던 직원들이 주축이 되어  갑자기 노동조합이 생긴다 노조 뒤에는 노조 본부가 있어서 그날  이후부터는 일거수 일투족이 노조 상부의 감시와 지시를 받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노조 본부라는 조직의 힘은 실로 막강하다. 회사의 모든 직원이 힘을 합해 일을 해도 위기를 버티기 어려운데허구한 일은 하지 않고 책상에 마주 앉아서 노사 회의다, 노사 타협안이다, 노동 투쟁이다 하는 날에는 회사를 꾸려 나가고 싶은 마음이 송두리체 없어질 아니라 조그만 기업의 사장은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버티기가  정말 어렵다그리고 사람이 싫어진다. 대부분의 중소기업은 사장이 직원 한명 한명을  면접보고 뽑는다. 대부분 학교를 졸업한 아무것도 모르는 신출내기를 모셔 와서 몇년동안 교육시키고 키워서 이제 쓸만 하다고 생각될 때면 퇴사한다고 사표를 낸다. 그것도 모자라서 사장의 앞에서  노조 운동한다고 팔짱끼고 노려보고 있으면 누가 자기 돈으로 사업하고 싶겠는가. 물론 모든 잘못은 회사 사장에게 있다. 사장이 책임지고 정리해야 한다그래서 나는 정리하고 빈털털이가 되었다.  

내가 선택한 (사업)이었지만 내가 대기업체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아니면 차라리 그럴듯한 프랜차이즈 장사를 했더라면 지금 이런 고생은 하지 않을텐데 하는 후회도 본다. 그래서 지금도 개인 회사를 운영한다고 상대방을 소개받으면 별로 부러운 생각은 들지 않고 측은지심만 가득하다. 개인 사업은 때이거나 힘들 때이거나 , 사람, 기술 모두 고생이다. 돌이켜 보면 자신이 너무 정신적, 인격적 여유가 없었던 같다. 또한 무리의 조직원들과 가족들을 책임질 있는 정도의 핵심 기술이나 자금, 인력등도 부족했던 것이다. 너무 대기업 시절에 조직의 힘으로 몇번 이긴 경험만 믿고 , 열정과 자신감이면 사회에 나가서도 이길 있을거라는 착각으로 <쪽배> 하나만 의지한 , 무한 경쟁의 바다에 뛰어든 것이다. 그러니 배려와 감사가 있을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목표는 달성해야 하니 <빨리 빨리> <조금 > <열심히> <최선을 다해> <죽을 각오로> <악착같이> 같은 단어들로 직원들을 독려하고 앞만 바라보고 달렸던 세월들이었다. 생각해 보면 한가지 <목표> 달성하기 위해 직원들과 자신에게 너무 많은 희생을 강요했던 시절이었던 같다. 아마도 아내는 사업하는 사위라면 아무리 돈을 번다고 하더라도 탐탁치 않게 생각할 것이다 인생의 40대는 개인 사업한다고 시작하여 결국 10년만에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면서 얻은 것은 무엇일까.

 

내리는 겨울 밤 (02-08-2010)

지금처럼 하염없이 그리고 속절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잊혀져 생각이 난다. 90년만의 폭설이라고 하니 내일 아침이면 세상이 새하얀 눈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나의 모든 죄와 어리석음이 눈처럼 하얗게 사함 받음을 믿고 싶다. 나의 욕심과  용서하지 못함이 눈처럼 하얗게 덮혀져서 다시는 나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짐을 믿고 싶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느낀다면 고통과 괴로움을마냥 눈에 묻혀 버릴 있었으면 놓겠다. 하도 눈이 많이 내리니까 이런 공상도 본다신이 얼마나 이꼴, , 지구상의 인간들이 하는 천태만상이 역겹고 보기 싫으시니까 하얀 색으로 도배를 하고 싶어서 저러시나 싶다. 하지만 눈은 더럽고 추한 것을 잠시 덮어버리고 감출 수는 있어도 근본을 치유할 수는 없다. 눈이 녹아내리면 나의 아프고 가난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거리의 사람들과 길거리의 나목과 달리는 자동차 처럼 우리 모두가   잔재물들을 뒤집어 써야 한다.

나는 고향이 부산이기 때문에 어렸을 눈에 대한 애뜻한 추억이 별로 없다. 어려서부터 고등학생 까지 눈을 구경한 적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그래서인지  총각 시절부터 결혼해서 이민올 까지의 눈에 대한 추억은 모든 것이 꿈속같고 영화같다. 슬라이드 필름처럼 순간 순간들이 그리워진다. 시절의 사람들이 보고 싶고 만나고도 싶다. 동화속 같은 겨울 찻집에 앉아 도란도란 지나간 세월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레몬네이드 향내를 맡으며 진한 커피도 음미하고 싶다. 젊은 시절에는 지금처럼 눈이 펑펑 내리면 무조건 집을 뛰쳐 나와 거리를 헤매고 다녀야 하는 알았다. 허름한 오바 깃을 세우고 명동 한복판을 친구들이나 연인과 마구 걸어다녀야 하는 알았다. 실컷 돌아다니다가 춥고 배고프면 찻집에 들어가서 음악듣고 커피를 마시면서 인생에 대하여 서로 열변을 토하며 고민해야 되는 알았다. 그러다 운이 좋게도 일행중에 누가 약간의 돈이 있으면 무교동에 가서 막걸리를 마시며 철학과 사상과 제도를 비판해야 되는 알았다. 대부분이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시절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멋이 있고 꿈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대부분이 군복 물드린 검정색 야전 점퍼에 청바지 차림이었지만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비굴하지 않는 의젓함이 있었다. 가진 돈은 없고 머리카락은 비록 장발이었지만 눈망울은 항상 초롱했고 항상 책을 가까이 하던 시절이었다. 행동 하나하나에 겸손함과 경우가 있었고 순진함과 순수함이 있었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기억이 눈을 바라보며 감사할 뿐이다.

하지만 이민을 와서 기억나는 눈에 대한 기억은 추억이랄 것도 없고 별로 달갑지도 않다. 무엇보다 눈이 이렇게 많이 오면 대부분의 가게들의 매상이 떨어진다. 겨울내 이런 폭설이 몇번만 오면 대부분의 살림살이는 적자를 면키 어렵다. 거기다 겨울철의 복병은 눈길에 미끄러졌다고 고소하는 전문 고소꾼들이다. 나는 이민온 첫해부터 흑인동네에서 5년동안 장사를 하면서 가게 앞에서 넘어져서 다리 불구가 되었다는 고소를 2건이나 받았다. 물론 고소장을 받기 전까지는 알지도 들어보지도 못한 사고들이며, 사람들이었다. 결국 두건의 고소모두가 허위로 꾸며진 사실임을 법정에서 알게 되었지만, 사건으로 마음에 받은 상처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잊지 못하는 일은 오는 밤에 배달을 하는 일이다. 이민와서 3개월만에 처음으로 장사가 조그만 정육점이다. 여기서는 Meat Store라고 하는데  고객의  95% 이상이 흑인이며, 90%이상이 사회복지 기금인 Food Stamp 주문을 한다. 그래서 한달에 2주일은 바쁘고 2주일은 거짓말처럼 한가하다. 손님들은 한달에 한번 나오는 국가지원금으로 생활하는데 대부분이 차량이없어 전화로 주문하면 집까지 배달을 주어야 한다. 적지 않은 고객이 손자, 손녀를 데리고 사는 할머니들이다. 그들에게는 고기가 주식이므로 한달치를 주문해서 냉동고에 넣어두고 생활하는 사람이 많다. 한번 주문할 적게는 50, 많게는 2백불씩 주문을 하며 50불단위로 보따리가 2, 3개씩 되므로 숫자가 결코 만만치 않다. 처음에는 흑인 배달부를 고용했지만 결근을 밥먹듯이 하므로 고객관리가 엉망이 된다. 몇사람 바꾸어 보았지만 마찬가지다. 수없이 오후에 주문들어 것은 퇴근할 내가 한꺼번에 배달하는 밖에 없었다. 그때는 미국온지 일년밖에 안되어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겠고 지금처럼 네비게이터도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전화로 불러 주소지만 갖고 집을 찾는다는 것이 여간 힘들지가 않았다. 거기다 배달 약속 시간이 조금만 늦어도 야단이 난다. 그때는 한명의 고객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욕을 들어도 못들었는 댕큐 말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오늘처럼 눈이 엄청나게 많이 오는 밤이면 배달하는 것이 장난이 아니다. 흑인 동네는 주민 각자가 스스로  눈을 치우지 않으면 눈이 그대로 방치된다. 그런 눈이 몇번 오면 좁은 길은 차량이 운행할 없다. 없이 길가에 주차하고 몇개씩이나 되는 고기백을 나누어서  고객의 집으로 옮겨야 한다. 야밤의 흑인 동네는 참으로 어둡고 음산하다. 집에 불들을 놓고 살지를 않는것 같다. 겨우 찾아서 초인종을 누르면 즉시 문열어 주는 집보다 몇차례 문을 두들겨야 열어 주는 고객이 많다. 집안으로 주문한 고기를 옮길려고 보면 사는 모습이 정말 각양각색이다. 어떤 집안은 온갖 오물 냄새와  마약에 쩔어 있는 엄마의 충혈된 눈빛과 방치되어 있는 아이들을 보면 이곳이 정녕 미국인가 하는 슬픔의 집들이 한두곳이 아니다. 그래도 할머니가 있는 집안은 사람 사는 같다겨울 밤에 배달하는 것은 항상 두렵고 끔찍하다. 그것도 차안에 아내와 가게 일을 도와주겠다고 어린 자식들을 남겨두고 배달한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정신 나간 짓이었다배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11시를 훌쩍 넘겨 버리기 일쑤이다. 그렇게 내리는 겨울 밤의 배달을 우리 자식들은 잊어버리지 말기를 바란다. 가난한 아버지의  그늘진  뒷모습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5년이라는 세월동안 기적처럼 우리 가족을 무사히 지켜주심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한 잊어버려서는 안된다..

 

 무대와  역할 (02-15-2010)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연극 무대라기도 하고 한편의 드라마라고도 한다. 그리고 스스로 연극의 주인공이라고 하고 주인공의 역할를 맡으려고 한다가끔 부부가 아니라 원수같이 힘들게 사는 사람에게   그렇게 사느냐 물어보면 이승에서의 자신의 역할이 비련의  주인공 역할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체념하고 사는 것을 본다. 이승에 살면서 한편의 드라마를 찍든, 수십편의 드라마를 찍던지간에 내용이  별로 달라질 것이 없는 이유는 내가 맡을 역할은 나의 선입견과 아집으로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어쩌면 우리 대부분이 자신의 역할을 이미 정해 놓고 사는지 모른다. 세상에는 이루 조차 없는 수많은 역할 중에 자신이 알고 있는 크기만큼의 틀에 구겨서 억지로 맞추려고 한다. 문제는 자신이 정해버린 배우인지 탤렌트인지 하는 우스깡스러운  역할이 자신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기의 가족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역할을 맡기를 강요한다는 것이다. 내가 길로 가니까 너도 같은 길로 따라 와야 한다는 것이다. 정신의학자들은 이것을 <조건부 역할>이라고 한다. 네가 나를 사랑하니까 나도 사랑하는 것이고, 네가 나의 원하는 상대 역할에 충실하니까 나도 나의 역할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반대로 네가 나를 나의 기대만큼 사랑하지 않으면 나도 나의 사랑을 중단하겠다는 조건인 셈이다. 기대와 보상이 맞지 않으면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방을 쓰거나 헤어지는 밖에 없다. 밑지는 장사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결혼 전에는 사이가 좋았는데, 결혼 후에 사이가 나빠지는 것은 자신이 결혼 전에 알고 있는 <남편> <아내> 역할을 떠맡으려 했기 때문이며, 서로 역할에 대한 기준을 세우고 그에 맞춰 행동하려 것이다. 진정한 자기 모습을 잃어버리고 가면을 쓴채 책임감으로만 살아 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신은 지금 이대로 모습으로도 충분히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행동의 근원은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보상받기 위해 가면의 역할을 이용한 것이다. 본래의 자신의 모습은 그보다 훨씬 강하며자신은 세상의 어떠한 역할들로도 정의할 없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나에게  역할을 주었다면 분은 하나님이시며, 따라서 역할이 무엇인지 아는 분도 하나님 뿐이시기 때문이다. 인디언들의 이야기처럼 나는 한점 구름 없는 파란 하늘이 되어야지 구름들과 어울려 자신의 고귀한 가치를 잃어버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각양각색의 구름들이 우리 각자가 말하는 < 한정적 역할론>이다. 남편은 이래야 되고, 아버지는 이래야 되고 자식은 이래야 되고 아내는 이래야 된다는 <한정적. 조건적> 역할이 아니라 흔들림없는 사랑을 있어야 푸른 하늘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체를 믿지 않도록 배웠다. 그래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며, 자신이 받은 상처, 고통, 자신의 아픔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상대방에 대해서는 웃음과 이해,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주지 않음으로 서로를 배신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다. 대부분이 <보상> 불과했다. 어렸을 때부터 <무엇을 어떻게 하면> <이렇게 사랑받을 >으로 배웠다. 우리 모두는 어렸을 <착한 아들, 착한 > 대한 조건부 역할과 보상을 기억할 것이다. <보상> 익숙한 자기자신에게는 더욱 구속하고 엄격하다.  우리는 오히려 남에게 관대하다. 다른 사람에게 하듯이 스스로에게도 친절하고 너그러워지는 연습이 필요하다

<인생수업> 닥터 엘리자베스  쿼블러 로스  ‘ 말을 다시 인용해 본다.

 “사랑은 삶에서 유일하게 진실하고 오래 남는 경험이다. 사랑은 두려움의 반대말이고 관계의 본질이며, 행복의 근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랑이 조건적이고 기대와 요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현실의 사소한 갈등은 악몽을 만드는 씨앗이되고 사랑이 없는 관계에 놓이게 된다. 대부분은 무조건적인 사랑, 우리 자신에게 바쳐지는 사랑을 원한다. 조건적으로 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사랑하지 않을 구실을 찾고 있는 것과 같다. 삶이란 나에게 잠깐 맡겨진 선물이다. 서로에게 걸고 있는 기대를 버려야만 평화롭고 행복한 사랑을 발견할 있는데, 우리는 대부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엄격한 조건을 내세운다. 우리는 거의 조건화되어 있다고 정도로 조건적인 사랑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 자신이 무한히 선해 질수 있는 가능성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주는 , 판단하지 않고 기울여 들어주는 , 조건없는 사랑을 베푸는 등이 그것이다. 가능성이 우리의 목표이다. 진정한 자신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인간적인 자아> 존중해 주는 것이다.”

이제 이렇게 보자. <나는 누구인가?>라는 마음의 선한 본질을 찾아서 흔들림없이 붙들어매자. 그런 다음  나는 <사랑 밖에 몰라> 노래 가사처럼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어 버리자. 어떠한 역할이나 조건이나 보상 따위는 잊어버리자. 그냥 곁에 사랑을 있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하자.

 

  지구별 여행 (02-22-2018)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은 <삶을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았어야 했다.> 것이다. 류시화씨의 표현대로 하자면 우리 모두는 지구별의 순례자들이며, 한번의 즐거운 놀이를 위해 이곳에 왔다. 놀이가  사랑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별에 여행을 것이다. 우리는 본래 태어나고 죽는 존재가 아니라 영생의 존재라고 생각해 보자. 우주 밖의 영생이라는 별에서 살다가 지구별에 여행을 왔는데 <태어남> <입국 심사에서 통과> 것이며, <죽음> 비자 기간이 만료되어 지구별에서 <출국 심사> 하는 것이란다. 얼마나 상큼하고 여유로운 발상인가. 이미 지구별의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서 어떻게 살고 무엇이 되어 산다는 것은 신의 치밀한 여행 계획에 의거하여 짜여진 일정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즐거운 여행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드린다는 것이다. 우리도 가끔 여행을 가서 보면 거기까지 와서 싸우고  화를 내며, 심지어는 여행을 마치지도 않고 가방을 싸서 집으로 돌아 가는 여행객들을 보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이왕 신이 놓은 여행 페케지에 따라 지구별까지 왔으면 잘난체 못난체 그만하고 재미있게 놀다가 영원한 자기집으로 돌아 때에는 사랑과 추억만 가지고 가면 일을 말이다. 어짜피 돌아 때에는 필요도 없고 가지고 없는 쓰잘데 없는  재산, 지위, 명예,등에 올인을 하니 즐거운 소풍을 와서 너무 심각하게 노는것 아닌가. 그래서 천상병 시인은 <귀천>에서 이렇게 노래했나 보다. “(중략) 하늘로 돌아 가리라. / 아름다운 세상 소풍 끝내는 , /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인생 수업> 작가 엘리자베스 퀘블러노스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삶을 심각하게 받아드리면 놀이를 잊어 버리게 된다. 사람들 대부분이 놀이보다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성공>이라는 사다리를 올라가면서 우리는 즐거움을 느끼는 법을 잊어버린다. 삶이 힘들다고 생각하며, 계속 삶을 개선하고 고치고 싶어한다. 단지 즐거움을 얻기 위해 시간을 비워 두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 조그만 즐거움이라도 맛보면 죄책감을 느끼며, 놀이에서 얻는 즐거움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성공한 사람들은 은밀한  방법으로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건전한 놀이를 삶에 적용하는 것은 휴식 이상의 것임을 기억해야한다좋지 않을 때보다 좋은 일에 대하여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즐겨야 한다 혼자 있을 때에도 근사하게 시간을 알아야 한다우리가 어린아이 였을 때에는 세상이 신기한 마술로 가득 즐거움이었듯이 나이를 먹어가더라도 놀이를 계속 한다면 늙지 않고 젊음을 유지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나에게 남은 종반부 삶과 관련하여 어떠한 <> 선택하여야 하며,  어떻게 하면 <>  즐기면서 재미있게 놀다가 마감할 있을까. 지나온 40년간의 <>들을 되새김해 보아도 내가 빼앗기지 않으려 몸부림 쳐도 소용없었고, 빼앗으려 독을 품고 달려들어도 내것이 되지 않았으니 <청지기> <청지기> 뿐이라는 진리만 깨달아도 훨씬 재미있게, 여유있게 살았을 거라는 때늦은 후회를 본다.

40 후반에 사업 실패하고 나서 남의 회사에 월급쟁이 사장 노릇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거의 빈손으로 미국이라는 나라에 이민을 오게 되었다. 미국에 이민와서 하였던 <가게>라는 곳의 일들은 결코 하고 싶은 이라기 보다 하지 않으면 들이었던 같다. 이민 자체를 오지 않으면 3명의 자식들 공부조차 시킬 없겠다는 위기감 때문에 아마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한국에서 월급쟁이를 하면서 기러기 아빠로 살기로 했는데, 일년 뒤에 아내가 결코 떨어져서 수가 없다 선언을 하니 싸서 미국에 오지 않을 없었다미국에 와서는 가진 돈도 거의 없고 남의 종업원 생활은 2주일 해보고서는 두손 두발 들고 무조건 돈에 맞는 가게를 찾아 이런 장사, 저런 장사를 했다. 그렇게 5년이라는 세월을 장사하면서 이때까지 느껴보지 못한 가족간의 다른 사랑도 느껴 보았고 내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사랑과 삶의 가치에 대해서도 다른 각도에서 보기 시작했다. 비록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들이었지만 이전까지는 얻지 못했던 많은 것을 얻을 있었다. 지금 4년째 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같은 <사업체 브로커>라는 일도 그렇게 존경받을 일은 아닌 같고, 그렇다고 대충대충 장난삼아 있는 일도 아니지만 나에게는 이전의 어떤 일보다도 소중하다.나는 내가 잃어 버린 만큼 보다 귀한 것으로 채워 주심을 감사한다. 아내는 나와 살면서 가장 선택한 일이 나를 미국에 오게 해서 함께 살게 라고 한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도 <변신중> 것만은 분명하다.

 <인생 수업> 이런 문구가 있다.  “살아가는데 두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기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별에 이를 없다는 것은 불행이 아니다. 정녕 불행한 것은 이룰 없는 별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20대에서 40대까지는, 내가 부족함이 없을 때에는  세상에 기적은 없다고 생각했다. 기적은 약한자들의 종교적 환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물질을 잃어 버린 지금의 이민 생활은 모든 것이 기적으로 느껴지며, 앞으로의 남은 세월도 기적으로 채워질 것으로 믿는다.

 

 아웃라이어(OUTLIERS) (03-02-2010)

우리는 최근에 사람이  국가와 나라 국민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철저히 피부로 느꼈다. 바로 <김연아>라는 피겨 스케이트 선수이다. 얼굴도 이쁘고 하는 행동도 이쁘고 거기다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에 세계 피겨 최고 기록 보유자까지 되었으니 한국 사람이면 너와 내가 없이 모두가 자식처럼 누이처럼 기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사회학에서는 이러한 특출한 사람들을  <아웃라이어>라는 용어로 사용한다.

아웃라이어(OUTLIERS) 사전적 의미는 –1. 본체에서 분리되거나 따로 분류되어 있는 물건, 2. 표본중 다른 대상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통계적 관측치라고 해석한다. 경쟁대상에서 제외되어야 마땅할 특출한 천재 혹은 특출나게 성공한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필자나  독자 여러분 모두가  자식을 키우는 부모 입장이라면 <말콤 글래드웰> <아웃라이어>라는 책을 권하고 싶다.

책의 논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성공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전부 틀렸다. 기존의 법칙에 돌을 던져라. —매년 출간되는 백만장자, 유명 인사,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은 대동소이한 내용으로 전개된다. 초라한 환경에서 태어나서 치열한 노력과 재능 계발을 통해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고 영웅으로 거듭 났다는 이야기는 성경의 요셉도 마찬가지이다. 형제들에게 쫓겨나 노예로 팔려 가지만, 특유의 명석함과 지혜를 통해 파라호의 오른팔이 된다는 이야기말이다. 하지만 어찌 요셉 자기 혼자 잘나서 출세할 있었겠는가. 생물학자들은 <생태학> 통해 숲에서 가장 상수리 나무는 가장 도토리에서 나왔다고 주장하지만, 이외에  나무에게 빛을 태양, 뿌리를 내리게 토양, 운좋게 피할 있었던 토끼와 벌목꾼들의  숲에 관한 이야기는 빠져 있다 것이다. 저자는 성경 귀절을 인용하면서  <마태복음의 법칙>이라고 하는 <기회> 대해 말한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까지 빼앗기리라. (마태 2529)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세계 인명백과 사전에 기록된 수많은 인사들, 아니 한국 사람중에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사람들, 예를 들어 유명 음악가들,운동 선수들여자 골프 선수들, 한국,미국 주류 사회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인물들 부지기수 많은 사람들이 성공한 자의 반열에 이름을 새겼지만 정작 <아웃라이어>들을 만들어 배경에 대해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성공> 본인의 천부적 재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책에서는 <1 시간의 법칙> 이라는 단어로 정의하는데 저자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   성공한 사람들에게 타고난 재능이라는 것이 있을까성취 공식은 <재능 더하기 연습>이다. 심리학자 <안데르스 에릭손> 1990년대 <재능 논쟁 사례>에서 베를린 음악 아카데미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 세그룹으로 나누었는데 첫번째는 <엘리트>그룹으로 세계 수준의 솔로 연주가를 희망하는 그룹이며, 두번째는 < 한다>라는 평가를 그룹이며, 세번째는 프로급 연주를 적이 없고 공립 학교 음악교사가 꿈인 학생 그룹이었는다. 그룹 모두 대략 다섯살 전후에 연주를 시작하였으며, 초기 몇년간은 대략 일주일에 두세시간으로 비슷하였지만, 8세부터 연습 시간의 차이가 있었다. 아홉살에 6시간, 열살때 12시간, 열네살때 16시간, 스무살때 30시간을 연습하였다. 결과적으로 스물살이 되면 엘리트 그룹은 모두 <1 시간> 한다는 그룹은 <8 시간>, 교사 희망 그룹은 <4천시간> 연습했음을 알게 된다. 연구 결과는 <미완의 대기>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정상의 자리에 오르기에 부족한 사람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타고 천재> 다른 사람이 노력할 노력하지 않고 정상에 올라 연주자도 없다는 사실이다결과는 최고 수준의 음악 학교에 들어 만큼의 재능이 있다면, 실력 차이는 누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진정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매직넘버 1 시간> 필요하다는 것이다. 1 시간은 대략 하루에 3시간, 일주일에 20시간씩을 10년간 연습해야 가능한 숫자이다.

나는 이 논리에 많은 부분을 공감한다. 개인적으로 나의 큰 딸은 피아노로 음악을 전공했고 둘째 딸은 그림으로 디자인을 전공했다. 두명 모두 다섯살 때 부터 전공 교육을 시켰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올라 갈수록 경쟁자는 좁혀지며 경쟁은 치열해진다. 한국의 최고 우수한 집단에 모인 아이들의 천부적 재능은 엇비슷하다. 대부분이 어릴때 천재라는 소리를 몇번씩은 듣고 자란 아이들이 모인다. 결국 승패는 누가 더 지독하게 연습을 하였는가? 누가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는가? 하는 <노력의 마라톤>이다. 그러면 과연 그 아이 혼자서 스스로 10년 이상을 초인적인 노력과 열정을 유지할 수 있는가? 나의 사견은 아무리 아이가 천재적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부모의 절대적인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부모 중 한사람은 자신의 사생활을 포기한채 그 아이의 일정표에 전적으로 매달려 있어야 한다. 돈은 돈대로 엄청나게  투자되어야 한다. 돈이 떨어지면 성공도 멀어진다. 돈, 시간, 노력, 희생 어느한가지라도 모자라면 그 대열에서 탈락된다. 탈락되면 학교 선생이나 동네 학원 강사로 만족해야 한다. 나는 <김연아>처럼 성공한 아이들을 보면 그 뒤에 가리워진 그 지독스러운 부모들이 생각난다. 그 <극성스러운부모>들이야말로 성공한 아이보다 더 피나는 노력을 했음을 알기 때문이다. <비틀즈 사례>와 <빌 게이츠 사례>, <모짜르트 사례> 등을 분석해 보면 우리  자식들을  <아웃라이어>로 만들기 위해 너무 쥐잡듯이 잡지 말았으면 한다.  <아웃라이어>로 키울 여건, 즉 돈, 시간, 노력, 열정, 희생이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나와 같은  부모들이라면  하나님을 향한 <어머니의 눈물>만이 그 아이를 <성공의 아웃라이어>로 키울 수 있다고 확신한다.

 

  큰 스님 (03-07-2010)

오늘 아침 출근길은 유난스럽게도 자연의 감사함이 풀풀 묻어나는 상큼한 날이었다. 지겹고 길다 싶을 정도의 겨울이 한 곁으로 물러서고 바람의 냄새며 봄을 준비하는 초목들의 새로운 준비가 하루를 시작하는 나의 마음을 설레게 했는가 보다. 그런데 사무실에 도착하여 컴퓨터를 여니 <법정 스님>께서 입적하셨다는 기사가 온 화면을 채우고 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는 고통은 언제나 서툴고 황망스럽지만 특히나 평소에 존경하던 분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온통 머리 속을 하얗게 만든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주일 아내와 산책하면서 법정스님, 이 해인수녀님, 최인호씨 등 평소에 좋아하는 사람들이 병석에서 하루빨리 쾌차하기를 기원했는데 이렇게 훌쩍 먼 길을 떠나셨다니..

 우리가 살아가면서 과연 진정으로 삼배를 올리고 싶은 <큰 스승>이 몇분이나 될까. 내 스스로 여러 분을 큰 스승으로 모시지 못하는 우민함은  우선 내 자신이 그 분들의 큰 깨달음과 업적을 알지 못하는 무지가 우선이요, 둘째는 그 분들도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인지라 , 알면 알수록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인간적인 정은 쌓이겠지만 정신적 스승으로서의 존경심이나 신비감은  퇴색되어 가는 것을 어찌 할 수 없음이리라. 하지만 <법정 스님>은 우리 같은 사바대중이 그 분의 책을 통하여 삶의 지혜와 그 분의 사상과 가르침을 가까이 접할 수 있었으니,  어찌 내 스스로가 <큰 스님>으로 받들지 않겠는가. 나는 개인적으로도 그 분에게 많은 은혜와 신세를 지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종교를 떠나서  그 분의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이 바뀌어도 변함이 없다.

<무소유>는 30년전 내 나이가  20대 중반일때 문고판으로 된 얆은 책자를 통해서처음 읽게 되었으며 그때 스님을 책으로 뵙게 되었다. 그 책 내용중에 스님이 선물로 받은 ‘난’에 관한 이야기가 지금까지 마음 깊은 곳에 자리 하고 있다. 내가  그 무엇을 소유한다는 것이 <삶의 자유>를 얼마나 방해하는지 나이가 들어 갈수록 느끼며, 누군가에게 무엇을 받는다는 것이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비근한 예로 한동안 우리집 가족들이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자고 난리법석을 떨며 나만 허락하면 된다고 협박(?)을 하였는데 결국 내가 허락하지 않았다. 내 자신이 구속하는 것도 구속받는 것도  싫어하고, 내 몸하나 간수하기가 버거우며, 그놈들을 키우다 보면 자식들이야 지금처럼 각자 뿔뿔이 흩어져 살 것이고  결국 그 놈들 나머지 생애는 내가 책임져야 하는데,  나는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아내 한사람만 책임지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이다. 또 한국에서 처럼 분재나 난을 키우는 것도 아직은 이 곳의 내 생활이 바람처럼 유랑하기 때문에 다년생 화초보다는 일년초로 대신한다. 자기 생이 일년이므로 내 탓을 할 리도  없을 것이고 그러니 헤어짐도 덜 부담스러울 같아서이다.

스님 역시  어떤 스님한테서 선물받은 난초 두 뿌리를 정성스레 기른 얘기를 하면서 거기에 일희일비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친구에게 줘버린 뒤 비로소  그 몇 년간의 집착에서 벗어난 얘기를 <무소유>에서 이렇게  쓰셨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듯 홀가분한 해방감. 유정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이니까….”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미국에 와서도 나를 위로하는 소중한 몇가지 중에는 우리 교회 목사님이 5년동안 설교하신 것을 기록한 나만의 설교집과  산책하면서 내 스스로 즐기는 묵상 못지않게 <큰 스님>이 쓰신 몇권의 책들이다. <무소유> <오두막 편지>, <봄,여름, 가을, 겨울>, <새들이 떠난 숲은 적막하다.> <산에는 꽃이 피네>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여라> <홀로 사는 즐거움> <아름다운 마무리>등이 내가 가까운 곳에 항상 놓고 읽는 책들이다. 최근에 쓰신 <일기일회> 법문집과 <한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사람을>은 신청 중이지만,  의도적으로 스님의 책을 소유하기 위해 수집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무실 책상 위에나 집에서 내가 머무는 곳에는 다른 책 몇권 속에 항상 그 책들 중 한권이 함께 한다. 그 이유는 언제 어디서나 어느 페이지를 펼쳐서 보더라도 변함없이 나에게 마음의 평안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가 어줍잖은 칼럼을 쓸 때에도 가끔 <큰 스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지도 못하면서 도용을 하는 이유도 그러하다. 법정 스님은 늘 사람과 자연 사이에 계시며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게 ‘자연’은 우주가 베푸는 은혜와 선물이라고 말씀하셨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나고 가꾸면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법. 꽃, 나무, 풀들과 교감하며 터득하는 존재의 기쁨. 이 풍진 세상, 당신 곁에서는 어떤 꽃과 나무들이 말을 걸고 있는가? 그 어떤 유산보다 값진 자연의 의미, 인간과 자연의 참된 소통을 일깨우기 위해 힘쓰셨다.

법정 스님은 불가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의 무상함을 이야기하지만, 그 무상함이란 초월해야 할 허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설한다. 삶을 당연히 여기는 오만한 자세보다는 순간 속에서 살고 순간 속에서 죽는 절박함이 더 중요하다는 것. “지금 이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고 지금 이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만남이니 어떻게 살든 그 한 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스님의 가르침은 매 순간을 아름답게 매듭짓고 다시 그로부터 거듭나는 늘 깨어있는 삶을 강조하고 있다.

<큰  스님>은 화려한 다비식도 금하게 하시고 평소에 즐기시던 대나무 침상에서 생전에 입고 계시던 승복을 입으신 채로 <무소유>를 실천하시며 조용히 떠나셨지만, 우리 대중들의 마음 속에는 항상 <큰 스승>으로 남아 계실 것이다. 내 마음 속에 향을 하나 피워 올리니 그 향내가  <맑고 향기롭게> 세상 온 천지를 지켜 주실 것을 믿는다.

 

또한 지나가리니 (03-14-2010)

문구는 솔로몬이 다윗 왕의 반지에 세겨 문구로 유명하다. 내가 모든 것을 얻었다고 하더러도 교만하지 말며, 내가 모든 것을 잃고 어둠의 길을 방황할 때에도 좌절하지말고 인내하면 고통의 시절은 지나가고 새로운 희망의 날이 것이라는 세상이치를 문장으로 표시한 것이다. 부와 명예도, 실패와 좌절도 어느것 하나  영원한 것은 없으며,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현답일 것이다. 요즈음 내가 사는 이곳 한인 사회를 바라보면 바닷물에 흠뻑 젖은 솜뭉치 같은 느낌이 든다. 장사하는 사람마다 이놈의 장사가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된다는 이야기뿐이다. 가게마다 , 없이 매상이 툭툭 떨어지니 하루 빨리 경기가 나이지기를 학수고대 뿐이다.

흔히들 지금은 <바이어 마켓>이라고 한다만 참으로 세상 물정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Seller 매상이 떨어져서 매물로 놓을 수가 없고, 팔고 나서 가게가 마땅치 않으며, 살때 융자받기가  어렵다영세한  은행들은 윗전의 눈치를 보느라 핑계, 핑계, 융자를 없는데  무슨 재주로 가게를 있단 말인가. 금융 위기가 닥치고 모두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작년 이맘 때는, 그래도 오히려 지금보다 희망이 있었던 같다. 금융 부분만 안정이 되면 경기가 다시 살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어마한 돈을 금융권이라는 괴물의 입안으로 집어 넣었건만 어지간 해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돈이 무슨 돈인가. 미국 정부가 <FRB–연방 준비 제도 이사회라는 애매모호한 명칭부터 국민의 혼란을 야기함>라는  세계금융의 그림자 정부에게 미국 국채라는 지불각서를  주고 빌린 돈이다. 미국 국민들이 대대손손 갚아야 빚인 것이다. 빌린 돈이 결국 그림자 정부의 하수인들인 그들 금융권에 대부분 들어간 것이다. 은행들이 부도난다고 공갈을 쳐대니 급한 불부터 밖에 없다. 그리고는 몇달도 지나지 않아 엄청난 돈을 년말 성과급 보너스 형식으로 나누어 가졌다니 그들은 애시당초 도덕 불감증 환자인데다가 , 인면수심의 괴물들이다. 순진한 학생 같은 미국 대통령 <오바마> 고유의 은행 업무와 금융 투자부분을 분리하라고 그렇게 화를 내며 길길이 날뛰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 그들의 세력은 실로 막강하다. 대통령이 아무리 중소 기업들을 살려야 경제가 살고 실업 문제가 해결된다고, 은행에 대출을 주라고  울부짖어도 그들은 먼산에 개짖는 소리 정도로 여길 것이다만약 막대한 돈이  양심적인 독재자에 의해 경제 산업 개발에 투자되었다면,  미국 국민 전체가 < 살아보세> 외치며 산업 생산에 투입되었다면 지금처럼 실업률이 고공행진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의 금융산업의 횡포, 정확히 말해 세계 그림자 정부의 <금융 상품 폭탄 돌리기> 게임에 세계가 미쳐서 날뛰게 만든 각종 펀드들, 서로를 담보로 잡고 새로운 금융 상품인양 파생시켜 끝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도박 정국을 만들었다. 결국 그들만 돈을 벌었고 세계는 빚더미에 앉게 되었으며 그들의 빚잔치를 치루는 비용조차 세계인들이 지불한 결과가 되었다. 그림자 정부의 시작은 미국이 원조가 아니다.  17세기부터 그림자 정부는 유럽 영국,프랑스, 독일,오스트리아, 이탈리아5개국을 손아귀에 쥐고 있었으니 미국과 유럽은 배를 <초록이 동색인> 빚쟁이 나라들이다. 그들 나라의 화폐 발행 권리는 모두 그림자 정부가 갖고 있다.  미국에서 시작한 금융위기가 지금 유럽시장을 뒤흔드는 이유도 이러하다. 그리이스, 이탈이아, 스페인, 포루투칼 모두가 자생력으로 견디기 어렵기는  도토리 재기이며, 그렇다고 영국, 프랑스는 멀쩡해서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 모두 그림자 정부의 거대한 채무국인지 오래전의 이야기다.

미국의 환률과 금리를 보면 유럽 경제가 미칠 영향을 짐작할 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그렇게 막대한 돈이 경제를 살리기 위해 풀렸고 제로에 가까운 저금리의 돈이 시중에 유통되었으면 경제와 주식시장은 살아나야 하고 돈을 빌려 <FRB>에서는 돈을 끌어들이기 시작해야 한다. 전형적인 <출구전략>으로 경기는 되살아 나야 하며,  금리는 서서히 인상될 것이고, 소비자 물가도 서서히  인상될 것이다. 은행들은 대출 조건을 까다롭게 하여 돈을 흡수하고,  금리가 인상되니 저축과 은행 예금은 늘어나게 된다. 돈이 많이 풀렸고 금리는 저금리이었으니 부동산 시장은 활기를 되찾고 서민 경제는 회복되어야 한다. 달러를 많이 찍어 냈으니 달러 가치는 하락할 것이고 미국의 수출은 달러 약세에 힘입어 늘어나야 하고 무역 적자와 재정적자는 점점 개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새로운 성장 동력이 없는 미국은 어떠한가. 돈이 서민 경제에 투입된 것이 아니라 금융권 빚잔치 하는데 모두 들어간 반면 금융권은 FRB 눈치보느라 돈을 틀어막고 내놓지 않는다. 지급 준비금을 인상하는등, 그들의 배후에는 미국 정부가 있는 것이 아니라 <FRB>와 그림자 정부가 있기 때문이다. 돈을 빌려준 그 조폭들이 돈을 더 빌려주지 않는 다음에는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국민의 원성이 커지면 결국 남의 나라 돈을 빼앗아 오는 방법밖에 없는데 중국도 옛날 중국이 아니다. 위안화를 인상하라고 아무리 협박하여도 중국이 미국 채권을  절반이상 가지고 있으므로, 미국 정부가 강요하는 행동이 중국의 이익에 수틀리면 미국 채권을 풀어버리겠다는 실력행사가 얼마전에 실제로 일어났다. 중국은 직접적인 위안화 절상보다는 내수 시장 확대에 힘 쓸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과 유럽 시장이 모두 부담스럽다.거기다 믿었던 세계 2위의 일본마져 OECD 국가중 최고 채무률로 자기 코가 한자이다.  어쩌면 미국의 힘이 그만큼 약해 진 것이다. 지금이라도 <FRB>는 돈을 더 풀어 은행들의 대출을 용이하게 하고 미국 서민 경제를 살려야 하며, 미국 산업 경제를 살려야 한다. 그래야 미국 국민으로부터 빚을 받을 수 있다. 미국 정부도 이왕 빚투성이 살림이니 FRB로 부터 돈을 더 빌려서 클린턴 시절 처럼 <IT 열풍>갈은 새로운 산업 신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이제 금융상품 같은 도박에서 손을 씻고 새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온 국민이 성실히 일하고 땀흘려 돈을 벌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 하나님이 원하는 미국이 될 수 있고 세계인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미국이 될 수 있다. 산업 경제를 활성화 시켜 일자리를 많이 만들고, <이민의 국가>답게 세계 우수한 인력들을 받아들여야 하며, 이민 문호를 적극 개방하여야 한다. 그 길만이 로마제국의 멸망을 답습하지 않는 길이며, 이 땅의 주인인  인디언들에게 지은 죄를 조금이라도 갚는 길이다. 은행이 서민 경제에 돈을 풀지 않으면 부동산 경기도, 금융 경기도, 산업경기도 모두 어렵게 된다. 이런다고 양심을 되찾을 그림자 정부도 아니지만, 향후 그들의 돈의 흐름과 금리 정책에 따라 그들의 흑심이 무엇이며, 가진 자와 빚진 자의 뺏고 빼앗기는 전쟁이 가속화될 것이다. 우리 서민들은 그날까지 절약하며 견디어 내야만 다시 좋은 날을 보게 될 것이다. 그날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성공에 대하여 <사랑하는  딸들에게  1> (03-21-2010)

어느 봄날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공지영씨의 산문집 <네가 어떠한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읽으면서 나도 사랑하는 딸들에게 나의 속마음을 이야기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비슷한 주제로 글을 쓴다. 나에게는 20 중반의 딸과  20 초반의 둘째 , 그리고 아직 16살이 아들이 있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비슷한 나이 또래의  조카들과미국에 이민와서 나와 같은 가난한 아버지를 한국인의 딸들이 있다아빠로서 아버지로서 외삼촌으로서 옆집 아저씨로서 생각을 두서없이 몇회에 걸쳐이 글을 쓴다너희들이 공감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전혀 이해가 다른 부분도 있을 것이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나는 다정다감한 아빠도 아니고 자상한 아빠는 더욱 아닌 같다질문과 대답은 항상 단답형이며, 고집스럽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 독재형의 아빠이다. 또한 아빠가 결정했던 동안의 결론들이 너희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는 것인지 알면서도 돌아 서서는 후회하고 너희들 못지 않게 가슴 아파했던 기억들이 많았음을 고백한다. 아빠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충분한 설명을 주지 못해 너희들이 오해한 부분도 있었을 것이고, 주변의 사람들이 동일한 고민을 이야기했을 때에는 그렇게 아픔을 후벼 파는듯한 대답은 하지 않았을텐데  하는 후회도 많이 한다. 오늘은  장영희 교수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나오는 소제목처럼이민온 가난한 아버지가 보고 싶은 딸들에게 따뜻한 햇살을 함께 맞으며 <내가 살아보니까> 시작하는  이야기로 편하게 들어주면 한단다.

<성공에 대하여>

너희들이 성공해서 돌아오겠다고 아빠 곁을 떠난지가   몇년이라는 새월이 지나가는구나처음 너희들이 아빠 곁을 떠나 원하는 곳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전공하는 일을 배워 돌아오겠다 했을 때에 아빠는 한마디로 반대했었지. 나가면 고생이고 먼곳까지 가서 공부할 각오면 이곳에서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요, 하도 험한 세상이며 특히 여자애들이 헤쳐나가기에는 너무 힘든 장애물이 많으니까 여기서 공부 마치고 홀로서기가 때까지는 아빠곁에 있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때문이었다. 하지만 너희들 의지가 확고하고,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오겠다는, 아빠를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등의 약속때문에 결국 허락하고 말았지 한편으로는 아빠가 같이 있는다고 해도 너희들에게 있는 것이 재워주고 먹여주는 이외에는 별로 없다라는 자학적인 무능함을 배제할 수가 없었단다. 그리고 막상 세계 최고의 나라라는 미국에 이민을 오면 너희들에게 무한한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소수 민족인 한국인이 겪어야 , 가난한 자가 겪어야   많은 제약도 무시할 없었다한때는 우리 딸들을 세상 누구나  부러워하는  우아하고 성공한 숙녀로 키울 자신이 있었던 시절도 있었는데

어느듯 몇달 뒤면 둘째가 대학을 졸업하고 다른 공부를 위해 타국으로 간다니 아빠는 고마울 뿐이다아빠는 항상 최고를 좋아하고 최고를 추구했었지. 당연히 너희들도 최고가 되기를 강요했고그러한 아빠의 기대와 요구가 너희들에게 얼마나  크나큰 마음의 <부담>으로 남았을 것이며, 부담이 어떤 상처로 남아 있을지, 아빠도 <성공>만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진실 앞에 모순적 부담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수만 있다면 아빠가 생각하던 세계보다 넓은 세계로, 아니 너희들이 도전해 보고 싶은 아름다운 < 가능성> 대하여 하루라도 젊었을 과감히 도전해 보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너희들은 보라는듯이 푸른 창공을 비행하고 있구나. 솔직히 너희들은 아빠의 기대보다도 훨씬 날고 있단다. 처음 너희들을 파란 하늘로 날려 보낼 때에는 여린 날개로 날아갈 수는 있으려나 , 몇달 지나지 않아서 어린 날개에 이런 저런 상채기만 가지고 돌아오는건 아닐까 등의 걱정뿐이었다. 하지만 너희들은 아빠의 도움이 없이도 너희들의 <>이라는 목표를 향해 높이 비상하였으며, 그런 너희들의 용기와 열정에 감사와 박수를 보낸다. 젊은 시절과 비교해 보아도 너희들이 훨씬 멋있고 훌륭하다는 사실을 밝힌다.

나는 너희 나이 너희처럼 그렇게 강하지 못했다. 장교로 월급을 받기 까지는 할아버지가 보내 주시는 학비며 생활비 (우리 때에는 향토 장학금이라고 했지) 생활했을 혼자 돈을 벌어 적이 없다. 굳이 과외 교사로 용돈을 벌어 적은 있지만 말이다. 그것도 방학이면 거의 두달동안 배낭 메고 전국을 싸돌아 다니기위한 여비 마련이 목적이었지만 말이다. 반면 너희들은 학비며 생활비의 많은 부분을 너희들이 해결하니 장하다고 말하지 않을 없구나. 거기다 너희들은 확고한 전공이 있고 전공을 살려 일년 , 5년뒤, 10 뒤의 확고한 계획과 꿈이 있으니 아빠보다는 몇배나 낫구나. 아빠는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을 정도의 약간 공부 하는 학생이었을 , 그렇게 분명한 인생의 계획이나 비전이 없었다. 대기업에 취직해서 사장되는 것이 꿈이었다고나 할까. 아니 대학 다닐 때에는 한국 과학원(전직 카이스트)이라는 곳이 생겨서 그곳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면 30살에 대학교수가 있겠다는 꿈을 가진 적은 있었지. 하지만 최종 시험에서 떨어지고는 곧바로 군에 갔으니 결국은 꿈과 계획이 분명하지 않았던거지. 그러니 한번 시험에 떨어진걸 가지고 이네 포기하고 것이야. 할아버지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도와달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던거야.

하지만 너희들은 내가 허락하지 않았어도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홀로 날개짓치며 비상하였을 것이며, 결국 내 도움 없이도 멋있게 해 내지 않았니?  물론 아직도 험난한 여러 과정들이 남아 있겠지. 삶이라는 바탕색이 항상 파란 하늘색은 아니니까. 구름도 있고 어느날 그 구름은 먹구름으로 변하기도 하고 천둥, 벼락을 동반하여 너희들을 무서움과 공포로 몰아 넣어 너희들 비행을 방해하기도 하겠지만, 아빠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이미 가난한 아빠의 지나온 삶을 통해 인생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도, 성공이라고 생각한 것도 오래 가지 않으며, 실패나 좌절은 있을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받은것이 있으면 베풀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도, 오늘 여유가 있을 때 내일을 위한 준비도 필요하다는 것을, 사람을 믿어야 하며 그러기에 사람을 경계해야 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을, 돈의 필요성과 게임의 법칙도, 그 중에서 사랑의 힘이 가장 믿을수 있고, 추구해야 할 가장 높은 삶의 가치라는 것을  배웠을 것이다. 그런 너희들에 비하면 그 당시 나는 철부지 도련님(?)에 지나지 않았거든… 또 무엇보다 아빠를 안심시키는 것은  너희들은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니? 이 험난하고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 마다  의지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니? 너희들의 믿음은 너무나 강해 어떨때는 이 아빠가 서운할 때도 있단다. 하지만 너희들에게 하나님이 항상 계신다는 너희들 믿음을 생각할 때마다 아빠는 <아버지, 고맙습니다.> 라며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구나. 그러니 너희는 <갈매기의 꿈>처럼 더 높게, 더 멀리 무사히 비행하리라 믿는다.

 

꿈과 행복에 대하여 <사랑하는 딸들에게 2> (03-28-2010)

 개나리가 꽃망울을 맺는다 싶더니 며칠동안의 비바람을 견디면서 오늘은 활짝 만개하였구나. 내일은 너의 엄마와 결혼한지 28주년 되는 해이다. 만난지 얼마 안된것 같은데 연애기간 까지 합하면 30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했네. 감사합니다. 내일은 아침 예배를 보고 엄마와 봄소풍을 갈려고 한다. 얼마전 교회 권사님에게 근교에 볼만한 곳을 지나가는 말로 물어 보았는데 안내 책자며, 지도는 물론이고 어느 식당에 가면 어떤 음식이 맛있다는 까지 자세히 적어 주셨단다 내외분의 극성스런(?)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가보지 않을 수가 없구나. 철없이 좋아 엄마 사진 많이 찍어서 블로그에 올려둘께..

지난주 이야기를 계속하자. 너희들은 아빠가 무조건 <성공>하기를 바란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빠의 진정한 소망은 너희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무엇이 성공이며, 성공의 기준을 어디다 두어야 것인가 조차 불명확한 것은 사실이다. 지금 설정한 성공의 기준을 달성하고나면 다음은 그다음은  무엇을 것인가. 성공이라는 기준이 너무 애매하고 주관적인 것은 속에 인간의 <욕망> 있기 때문이지. 욕망의 끝이 없듯이 성공의 끝도 없단다. 예를 들어 <의사> 된다고 성공한 것이 아니란다. 의사들 세계에도 학벌의 싸움, 전공의 우월감, 잘버는 의사와 가난한 의사, 실력의 한계, 본인만 아는 의료사고의 죄책감 , 반복되는 일의 무력감, 끊임없는 경쟁과 좌절속에서 방황한단다. 가끔 언론에 대학 교수나 의사, 대기업 중역, 사회 지도자, 인기 연예인들이 자살하는 기사를 수가 있다. 일반 서민들이 생각할 저렇게 많이 배우고 돈도 많이 벌고 성공한 사람들이 무엇이 아쉬워 자살을 할까 생각하지만 사람들의 포기 기준은 자신이 설정한 <성공>이라는 기준에서 멀리 벗어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생의 길을 올바르게 가는지 알아 보는 방법에 세가지 질문이 있다고 한다. ‘첫째 길은 네가 원하는 길인가?  둘째 남들도 그게 너의 길이라고 하는가?   마지막으로 운명도 그것이 당신의 길이라고 하는가?’ 질문에 너희들 스스로 답을 보아라. 첫번째 질문은 아빠가 너희에게 어렸을   부터 수시로 질문이다. 아빠는 너희가 어렸을 네가 좋아하고 자질이 보였으므로 기회를 것일 , 지금도 계속 걸어가는 너희 길을 강요한 기억은 없는 같구나. 어쩌면 포기하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너희들이 전공하는 분야가 정상까지 가기가 너무 힘들고 멀기 때문이지. 하지만 너희들은 분야를 공부할 때에는 무슨 과목보다 즐거워하지 않았니? 지금도 너희들이 원하는 길이었고 그러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하니까 고생을 인내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빠도 마찬가지이지만 세상의 수많은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일을 하지만 자신이 일을 원해서, 일을  좋아서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니? 일하는 자신이 원하고 즐거워야  일의 능률도, 생산성도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빠가 <살아보니까> 사는게 별게 아니더라. 특히 미국이라는 낯선 곳에 이민이라는 와서 보니까 더욱 그래. 먹고 살기로 치면 무엇을 해서라도 못먹고 살겠니? 부자로 살고 성공해서 살고 먹고 살고 이런 것들이 정말 대단한 것들이 아니야. 부자가 아니어도 성공하지 못해도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따로 있더라는 거야. 여기서 세탁소하고 델리 가게하고 그로서리하는 사람들이 성공한 사람들이니? 그렇다고 사람들이 못배워서 이런 가게를 하니? 그러면 이런 조그만 가게 하면서 하루 12시간 이상 힘들게 일하며 산다고 모두가 불행하니? 아니야, 누구보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 그러면 차이점은 무엇이니? 내가 하고 싶은 ,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이다. 또한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성공> <실패> 차이가 아니라 <꿈이 있느냐, 꿈이 없느냐> 차이인 것이야. <젊음> 아름다운지 아니? <> 있기 때문이야. 아니 꿈이 많기 때문이야. 늙어 간다는 것은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꿈을 잃어 가고 있는거란다. <> 있는 사람은 가난해도 참을 있고 지금 걷는 길이 험하고 어려워도 견딜 있는거야. <> 있는 사람은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아, 나의 사랑하는 딸들 처럼 말이야. 그러면 <> 무엇이니? <> 너희들이 이루고자 하는 <유명인사> 되어 <성공한 사람> 되는 것만이 아니다. <> 무슨 <> 하던지간에 <> 통하여 <어떠한 사람이 것인가?> 이다. <> 정당하고 아름다워야 둘째 질문인 남들도 너의 길이라 인정하고, 세째 질문인 운명도 너의 길이라 인정할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기뻐하실 있을거야.   

아빠가 좋아하는 이해인 수녀님의 <꿈을 위한 변명>이라는 시를 다시 읽어 줄테니 들어보렴. “아직 살아 있기에 / 꿈을 있습니다. / 꿈을 꾸지 말라고 / 강요하지 마세요./ 꿈이 많은 사람은 / 정신이 산만하고 / 삶이 맑지 못한 때문이라고 / 단정짓지 마세요./ 나는 매일 꿈을 꿈니다. / 슬퍼도 기뻐도 / 아름다운 꿈은 그대로 삶이 됩니다. / 오늘의 이야기도 / 내일의 이야기도 / 꿈길에 그려질 때가 / 생각보다 많습니다. / 꿈이 없는 / 삶이 없는 꿈은 얼마나 지루할까요. / 죽으면 꿈이 멎겠지만살아 있는 동안은 / 꿈을 꾸고 싶습니다. / 꿈이 있어 외롭지 않다고 / 말할 있습니다.

<> 너희들이 전공하려는 <> 통하여 얻은것을 이웃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베풀려는 <배려>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 사랑> 것이야. 그러기 위해 <> 대한 행복을 얻으려면 순간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고 열정을 가지고 즐기는 것이다. 그것이 공부가 되었든, 일이 되었든간에 <부자> 되기 위한 것도 아니요, <성공>하기 위한 것도 아니요, <> 포기하지 말고 <> 향해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믿음이 중요한거야.

아빠는 너희들이 무엇이 될까라는 생각보다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생을 살 것인가를 항상 생각하며 기도한단다. 매번 결론은 너희들은 아빠보다 몇십배 몇백배는 <행복한 사람>으로 살거라는 믿음이다. 아빠는 너희들이 성공해서 돌아오겠다는 말에 애잔함을 느껴진다. 성공해도 내 딸이고, 실패하고 가난해도  사랑하는 나의 딸들이다. 아빠는 너희와  살 수 있는 날들이 많지 않음을 알고 있다. 너희들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돌아와도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창공을 높이 비행하다가 힘들고 지치면 언제라도 돌아와서 쉴 곳이 있다는 것을 잊지마라.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아빠는 항상 너희 곁에 있단다. 너희가 말했듯이 아빠는 큰 태산과 같고, 넓고 깊은 바다와 같으니까.. 

 

 일과 사랑에 대하여 <사랑하는 딸들에게 3> (04-05-2010)

 봄은 눈부신 사랑이어라. 나는 사는 이곳이 사계절이 있어서 좋다. 춥고 어두운 겨울을 견딜 있는 것은 만물이 생동하는 따뜻한 봄날을 기다릴 있음이요, 폭발하는 활화산 처럼 에너지를 분출할 있는 여름도 봄의 준비된 배려가 있기 때문이요, 가을의 낭만과 아름다움이 있음도 봄이 아련한 추억이 있기 때문이리라. 아빠는 봄이 가장 좋다. 겨울 속에 숨어서 기다리는 봄이어서 좋고, 가끔은 봄속에 아직 숨겨진 겨울이 남아 있어서 좋다. 속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꿈과 비젼이 있고 배려와 양보가 있어서 좋다. 꽃도 피어나는 순서가 있지만 서로 앞다투거나 시기하지 아니한다. 비비람이 몰아쳐 꽃가지가 꺾여도 포기하지 않으며, 얼마지 않아 새롭게 피어나는 꽃대를 서로 격려하고 반겨준다. 산에 홀로 꽃은 꽃대로, 뜰이나  화분에 꽃은 꽃대로 개성있고 아름답다. 봄의 냄새는 별다른 화장이나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자체가 풋풋하고 싱그럽다. 다시는 인생에 봄날은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바라보는 것만으로 은혜스럽다. 이곳의 목련나무들은 그렇게 크고 풍성한지 멀리서 보면 마치 벚꽃이 만개한 같다.

인생에서 이십대는 계절의 여왕 사월과 오월 같다. 이제 우리 딸들도 <사랑> 배울 나이가 되었구나. 아빠는 우리 딸들이 여러번의 사랑을 보았으면 한다. 물론 (엄마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엄마처럼 처음부터 <운명적인 사랑> 만나  바로 결혼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아빠는 별로 원하지 않는다. 사랑은 만나고 이별하면서 그리워하고 몸부림치고 아파하면서 커가는 것이다. 그렇게 사랑과 이별의 아픔이라는 과정을 통해 사랑의 깊이는 깊어지고 성숙된 사랑을 있는 것이다. 실연의 아픔이나 이별의 고통 한번 겪어 보지 않고 사랑했다 말하기에는 너무 민밋하지 않니? 주변의 친구들이 시집가니까, 결혼할 나이가 되었으니까, 눈에 반했으니까 등등은 결혼할 이유가 되는 같지 않다. 결혼은 평생동안의 의무이자 책임을 동반한다. 스스로가  책임을 이행할 최소한의 자격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면 기다려야 한다. 한마디로 홀로 서기가 되어야  한다. <홀로서기> 상대방의 도움없이도 있는 최소한의 자격요건이다. 아빠 때에는 사랑은 나의 다른 조각을 찾는 것이었다. 쪼가리와 쪼가리가 만나 굴렁 바퀴가 되어 굴러 가는 것이라고 했다. 인생의 반려자라기도 하고 동반자라기도 했다. 그래서 사랑은 아낌없이 빼앗는 것이라고도 하고 강한 자만이 미인을 차지한다고도 했다. 따라서 사랑은 조건이며 서로의 비슷한 조건을 찾아 서로 비슷한 삶끼리 맞추어 사는 이라고 했다.

지금도 결혼의 조건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겠지만  아빠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서로 나의 결점을 커버할 <보완재> 찾거나, 나의 상황을 업그레이드 시키거나, 전략 대상이거나 ,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기 위한  <상승재> 찾는 것이 결혼의 우선조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조건의 법칙> 조건이 맞지 않으면 언제라도 깨어질 있는데 <삶의 조건> 살아가면서 수시로 바뀐다는 것이다. 사랑은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주는 것이다. 그것도 주다가 손해본다 싶으면 중단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낌없이, 상대방과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평생 있는 남자를 만나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게 쉬우냐하는 것이다. 인생은 도박이라고 하루밤의 열정으로 평생을 내질러 버릴 수는 없는 아니니? 어리석은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잘못된 결정인줄 알면서도 평생 후회하며 사는 것이겠지. 그래서 아빠는 너희들이 결혼할 상대를 결정하기 전까지는 깊은 사랑, 얕은 사랑, 뜨거운 사랑, 부드러운 사랑 여러가지 사랑을 경험해 보았으면 한다. 그래서 정말 너희가 사랑을 알고 평생 후회하지 않을, 주어도 주어도 아깝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라.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사랑>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부과된 가장 어려운 일이다. 사랑은 궁극적인 마지막 시련이고 시험이며 과제이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아직 사랑할 능력이 없다. 사랑도 배워야 하니까모든 노력을 기울려 고독하고 긴장하며 하늘을 향한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승화되고 심화된 홀로됨이다. —사랑은 무턱대고 덤벼들어 헌신하며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사랑이란 자기 내부의 어떤 세계를 다른 사람을 위해 만들어 가는 숭고한 계기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보다 넓은 세계로 이끌어 가는 용기이다.”

마치 아빠가 엄마에 대한 사랑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한 같지 않니?   ^^

이런 이야기도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서로 마주 바라 본다는 것은 <조건 검색>이다. ‘내가 이만큼 주었으니 이번에는 당신차례이다. 얼마나 주나  두고 보자라고 책정하는 것이다. 서로가 감시하고 감시 당하며, 통제하고 통제당한다. 서로가 이해할 있어야 하고 조건에 만족해야 한다. 하지만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는 것은 이상과 꿈이 같은 것이다. 그러니 취미도 생각도 가치관도 비슷할 밖에 없다. 서로 가는 속도가  틀리더라도 같은 방향이니 손을 내밀어 잡아 수도 있고 기다려   수도 있다 다른 이야기도 있다. ‘세상 부부 중에는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부부도 있지만, 등을 돌리고 사는 부부도 있다. 등을 돌리고 있으면 서로가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므로, 만나는데 걸리는 시간은 지구 한바퀴를 돌아야 하며, 거리상으로는 10만리나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부부는 무촌이라고 하지 않니. 부모 자식간의 일촌보다 가까울 수도 있고 헤어지면 이웃보다 못한 남남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결국 내가 남자를 선택해서 조건없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홀로 서기> 되어야 하고 홀로서기를 하기 위해서는 < 남자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 일에 대한 사랑> 수반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 <> 분명해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사람을 만날 있지 않겠니? 그러기 위해서는 너희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최선과 열심을 다하여야 한다. 그래야 너의 <> 사랑할 있다. 너희들은 엄마에게 아마도 아빠가 마음에 들어 사위는 지구상에 없을거야라고 말하는데 솔직히 아니다라고 자신은 없다. 아빠들은 자기 딸들을 항상 최고로 생각하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너희들이 선택하고 결혼할려고 결정한 남자라면 아빠는 딸을 믿고 내가 믿는 딸이 결정한 남자라면 무조건 우리 가족으로 받아드릴 마음의 준비는 끝난 상태다라는 것을 밝혀둔다.. 아빠도 많이 변했지?

서두르지 말고 멋진 사랑을 위하여, 우리 딸들 화이팅!!!    

 

가난과 사랑에 대하여<사랑하는 딸들에게 4> (04-12-2010)

세상에 가난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은 그다지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누구나  돈을 좋아한다. 공부하고 성공하기 위한 목적도 많이 벌어서 편안하게 살려는 것임을 부인할 없다. 세상의 아빠라면 누구나 자기 딸이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자식이 많이 배워서 좋은 직업을 가지고좋은 직업의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여 돈도 많이 벌고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착한 일까지 한다면, 사회로 부터 존경과 신망도 얻을 있을거라는 꿈같은 소망을 가지고 산다. 물론 가난하다고 이웃을 사랑할 없다는 이분법적 논쟁은 피하자꾸나. 가난과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 해보자. 너희 나이 때에 사랑에 빠지면 가난해도 상관없으니 헤어지는 것만은 피하게 달라고 기도하지. 하지만 <살아보니까> 가난도 힘들고 이별도 힘들다. 가난도 삶의 과정이고 사랑과 이별도 삶의 과정이지. 하지만 가난때문에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 이별해야 한다면 그건 만나지 말아야 잘못된 만남인거야. 세상의 많은 부부가 사랑해서 결혼하지만 많은 세월을 가난과 때문에 싸우고 다툰다. 심지어 그로 인해 헤어지고 도망도 간다.

가난이 앞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옆문으로 빠진다.” 속담이 있다. 많은 가난한 부부가 가난이 싫어서 어떤 때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까 생각도 했다.” 한다. 장영희 교수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있는 것이지, 무엇을 먹고 어디를 가는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든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자체가 행복이다라는 말은 진실성이 보장되는가? 미국 속담에 자루는 똑바로 서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돈이 있어야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자존심을 내세우며 있다. 돈이 있어야 공부도 하고 병도 고치고 나의 평가도 좋게 받을 있다.” 라고 한다.  그녀는 태어나서 한살도 되기 전에 소아마비가 되고 세번의 선고를 받고 병마와 투병하면서도 영문학 교수로 열심히 살다 사람이다. 가난하다고 불행한 것은 아닐지라도 엄청나게 불편하다는 것은 가난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불치병에 걸려 평생을 병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의 고통을 모르듯이 말이다. 소득 분배가 균등하게 이루어지는 사회주의는 없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자신이 맡은 일만 열심히 하면  정당한 댓가를 지불받는 제도나 사회는 없다. 인간이 사는 세상에는 인간이라는 원초적 한계때문에 진정한 만족과 감사를 기대할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국>이라는  단어가 성립되는 것이다.

유대인 속담에 마음이 가난한 자는 용서받을 있어도 지갑이 가난한 자는 용서받을 없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가난>이라는 것이 결코 자랑거리나 위안거리가 없다. <가난> 강요받는 특수 분야, 예를 들면 종교지도자나 국가 지도자, 성직자들도 가난을 희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방도 인간인 다음에야 <가난> 강요하거나 기대해서는 안된다.

<> <사랑> 별개이다. <> <>이고 상대방의 <> 상대방의 <>이다. 사랑하는 남자가 <부자>라고 해서 내가 부자인 것은 아니다. 부자인 남편과 같이 사니까 알게 모르게 도움은 받겠지만 결국 돈의 주인은 두사람이 없다. 요즈음 한국의 미혼 남자들이 결혼 조건으로 내세우는 우선순위를 보고 고소를 금치 못한다.  ‘얼굴이 못생긴 여자는 데리고 있어도 직업이 없는 여자는 용서할 없다.’ ‘ 여자의 능력이나  학력보다 처가집 장인의 직업과 재산이 우선이다.’ 등등이 세상 치사하게 변해간다는 느낌이다. 예나 지금이나 <돈보고 결혼한다.>라는 말이 있다. 보리쌀 세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안한다.’라는 말도 있었다. 아무리 부자를 선호하고 쾌락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세상이라지만  <> <사랑> 같이 묶는다는 것은 아닌 같다. <> 결혼조건으로 내세운다는 것은 주객이 바뀐 것이다. 결론은 내가 <> 있어야 한다. 너희들 나이에 맞게 말하면 내가 <> 만들 <능력>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공부하고 <전문가> 되고 <홀로서기> 가능해야 하는 것이다. <전문가> <홀로서기> 안되니까 부모의 재산에 목을 메는 것이다아빠의 결혼 조건은 <홀로서기> 자신이 있었으므로 사랑하는 사람의 <성품> 사랑에 대한 <순수성> 우선으로 두었다. 그러기에 우리 부부는 때문에 싸우거나 다툰 적이 별로 없다는 너희들도 알고 있을거야.  

무슨 사랑이던지간에 사랑에는 이별이 전제되어야 한다. 공지영씨의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에서 헤어질 남자와 사랑하라 말이 있는데 같은 맥락일 것이다. 아빠는 엄마를 지금도 사랑하기에 항상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이별을 좋아해서 준비하는 것이아니라  사랑하니까 이별이 무서워서 준비하는 것이다. ‘ 속까지 저리도록 아프게 짝사랑하라 말이 있지. 아빠는 사랑은 일방통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통로이고,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의 통로이다.  사랑의 통행로는 일방 통행이지 쌍방 통행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사 죽는 날까지 서로의 통행로로 함께  사랑하다 죽음을 맞이한다면 없이 감사할  일이지만한쪽이 사랑이 변해 떠나간다고 하더라도 보내 주어야지 어쩌겠니.. 울며 불며 붙잡고 메달인다고.. 그래서 사랑은 떠나고 몸만 옆에 남아 있다면 사랑이 너무 비참하고 서글프지 않겠니.. 차라리 혼자 구석진 어둠에 남겨져 찢어져서 피흐르는 상처를 혼자 꿰메고 혓바닥으로 핧으며 치료하는게 낫지 않을까.. 다만 다시는 이런 아픈 이별이 없도록,  흉터로 남은 상처를 바라보며 영혼이 더욱 성숙해지기를 기도해야지.. 그런데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때문에 사랑은 떠나갔는데도 이별하지 못한다면..한푼의 위자료라도 받기 위해 머물고 있다면..서로 먼저 죽기를 발원 기도하며 지붕 아래서 별거한 살아간다면..이건 아니잖아. 차라리  모든 재산과 돈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리 주어버리면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는 추잡함은 없을텐데 말이다. 아빠가  쫓겨나면 용돈 부탁한다..

 

일과 돈에  대하여<사랑하는 딸들에게 5> (04-17-2010)

지난 주에 가난과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 했지. 가난한 부모를 만난 자식들이 가난에서 탈출해서 부자가 되는 것은 누구나의 꿈일 것이다하지만 부자가 되기 위해 부자집 아들과 결혼을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은 결국 돈을 보고 결혼하는 것이므로 잘못 시작이라는 것을 일러두었다. 반면에 너희들은 듣기 싫어하겠지만 가난은 되물림 되기 쉬우며 그만큼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아마도 노력은 너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고되고 험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결국 스스로 돈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에 대한 지름길이 없다는 것이 유감이구나. 부자가 되기 위한 별도의 <부자 경영학>이나 <부자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없듯이 부자되기가 어렵기도 하고 몇가지이론으로 단정지을 없는 노릇이다. 대학에서도 사회에 나가 부자들을 위해 일할 있도록 <일꾼 공부> 시킬 , 돈을 만들어 스스로가 <부자되는 공부> 시키지 않는다. 이유는 기존의 부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일꾼>이지, 너희가 부자되기를 원치 않키 때문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부자되는 공부는 스스로 해야 한다. 하지만 아빠가 뒤늦게 공부하고  배운 몇가지 기본 법칙을 말해 줄테니까 살면서 참고하여라.

돈을 만드는 방법은 크게 세가지가 있다. 첫째는 너희가 <> 통하여 <> 만드는 방법이요, 둘째는 <> <> 만드는 방법이고, 세째는 <사람> <> 만드는 방법이다. 먼저 <> 하여 돈을 버는 것은 가장 기본이 되는 절차이다. <> 하여 돈을 버는 가장 빠른 길은 앞에서 이야기 너희들  <전공> 살려 돈을 벌거나 , 아니면 <장사> 하여 돈을 벌거나 <회사> 취직하여 돈을 버는 것이다. 흔히들 월급, 년봉, 근로 소득, 사업 소득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일을 하지 않으면 먹고 없는 구조이니까  누구나 일을 해야 한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슨 <> 것이냐는 것이다. 세상 부모들이 공부 열심히 해라, 아이비 리그 대학에 들어가라, 여기 한인 부모들처럼 의사가 되어라, 변호사가 되어라등등 듣기 싫을 정도의 잔소리를 하는 이유는 좋은 직업의 전문가들은 안정된 급여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분야의 <전문가> 되라는 잔소리로 바꾸어 말할 있을 것이다. 네가 좋아하고, 네가 남보다 뛰어나고, 남들이 너를  전문가로 인정하여야 쉽게 그리고 많이 있다그러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좋은 학교를 나와야 하거나 사회에서 인정하는 전문가 자격증을 따야 한다. 전문가가 되면 평생 <> 인하여 안전하게 돈을 있으므로 부모들은 전문 직업을 원한다. <전문가> 되는 과정은 노력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질과 적성이 함께 맞아야 하며,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지속적인 계발과 도전이 필요하다.

과정에서 탈락되면 <일반 경쟁>부분으로 일을 해야 한다. 회사에 들어가거나 장사를 하거나 주급생활을 하면서 돈을 만들어야 한다. 세계는 경쟁이 치열하고, 가변적 요소가 너무 많다. 따라서 시장이 불안정하므로 직업과 직장이 바뀌기 쉽고, 실패할 확률이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육체적으로도 <전문가> 보다 힘이 든다. 그렇다고 돈을 반드시 적게 번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이곳 미국이라는 사회는 부부가 열심히 장사를 해서 어느 규모 이상의 사업체를 운영하면  어지간한 변호사나 교수보다  돈을 많이 수가 있다. 한국처럼 직업에 따른 신분 차별이 극심하지 않으므로 본인들만 열심히 하면 있는 사회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색이 바렌  문구지만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도 생기지 않았겠니..어찌 보면 평생 유사한 업종의 장사를 하거나  동일한 회사에 장기간 근무하는 것도 분야에서 전문가라고 있겠지.  그러니까 의사, 변호사가 아니더라도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열심히 하고 계속 연구하고 변화시켜 나간다면 누구나 가능한 일인 셈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 통해 걸어가는 길은 수천가지나 되므로 네가 좋아하고 있는 길을 택하되, 설령 어쩔수 없는, 원하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떠한 <> 선택하던지 간에 <최선> 다하고 <열심히> 해야 한다는 명제는 불변이다. 모든 것은 너희들이 결정할 문제이며, 결국 너희들 인생이니까 너희들 책임이라는 것도 잊지마라. 아빠는 너희들이 무슨 일을 하던지 무슨 직업을 갖든지 너희를 응원할 것이다.

<> 통하여 돈을 만드는 것의 중요성은 <> 통하여 <종자돈> 만들 있기 때문이다. 돈의 속성은 꼭대기에서 눈을 굴려 내려보내는 것과 같다. 눈을 굴릴라고 하면 눈덩어리가 필요하겠지. 조그만 눈덩이는 굴러갈수록 눈덩이로 변해 간다. 시작되는 눈덩어리가 없다면 그냥 산에 쌓여 있는 눈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눈덩어리를 만들 수가 없다. 아무리 눈이 많이 와도 스스로 눈덩어리를 만들 의지가 없다면 그냥 쌓였다가 녹아버리는 눈이 되고 말지 않겠니.. 조그만 눈덩이를 만드는 것을 <종자돈> 만든다고 한다. 사람들이 <전문가> 선호하는 이유는 안정된 고수입이 보장되므로 눈덩이를 지속적으로 여러개 만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설령 눈을 굴려 내리다가 한두개가 바위에 부딪혀 깨어진다 해도 계속 만들 있기때문이다

여기서 해주고 싶은 기본 원칙은 <부자>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검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지출> <수입>보다 많아서는 절대로 눈덩이를 만들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검소>하고 <절약>하는 생활이 몸에 베어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기에는 종자돈을 만들기 위해 악착같이 절약하면서 돈을 모으지만 조금 모였다 여겨지면 소비가 늘고 사치를 하게 된다. 남을 의식하는 소비의 삶은 부자 대열에 끼이기 어렵다. 검소한 생활이란 필요한 부분에만 지출하는 것이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부분에 돈을 사용하는 것을 과소비라고 하며, 쓰지 말아야 곳에 돈을 사용하는 것을 낭비라고 하는데 모든 것이 <허영>에서 출발한다. 이는 자신의 내적 부족함에서 오는 심리적 불안상태에  기인한다. 흔히들 소비가 왕성해야 경제가 돌아가므로 소비는 미덕이다’ ‘소비자가 왕이다등등 소비를 부추기는 말과 메스콤의 상품광고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유대인들을 보면 그들이 어떻게 하여 지금의 미국과 세계 경제를 손아귀에 쥐고 있는지 있다. 그들의 근검, 절약정신은 그들의 길고 수천년의 핍박의 역사에서 체험한 것이다요즈음 너희들이 말하는 <명품병> <성형병> 대표적으로 잘못 소비문화이다. 돈을 버는 목적은 그런 곳에 낭비하기 위함이 아니다. 명품 핸드백 하나에 수천불을 지불하고 그걸 사서 네가 얻는 일시적 만족감과 , 한달에 30불만 지원해 주어도 한가족이 먹고 수있는 빈민 가정에 10년을 도와 있는것과, 명품 핸드백 금액을 기부하여 그런  가족을 200가구나 도울 있다면 어느 쪽이 가치와 만족감이 높을까

하나님은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말씀>에 따라  <선한 일>을 하기 원하시며, 그 <선한 일>을 통하여 벌은 돈은  <선한 곳>에 사용되기를 원하실 것이다. 아무튼 <종자돈>은 만들어야 한다. 그 크기가 얼마이던지 간에 그것이 없으면 <돈>을 굴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돈과 돈에 대하여 <사랑하는 딸들에게 6> (04-22-2010)

지난 주는 <일을 통해 돈만들기>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무슨 일을 선택하든지 <말씀> 맞는 <선한 > 하고 그로 인해 벌은 돈은 <선한 > 사용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 <부지런>하고 <성실히> 하여야 하며, <최선> 다하여야 한다. 생활은 <근검 절약>하며, <검소> 생활이 몸에 베어야 한다고도  했다. 결국 <> 통한 < 만들기> <종자돈> 만들기 위함이며, 대표적인 형태가 <저축 생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지출> <수입> 같거나 초과해서는 안된다는 잊지마라. <소비>에서 즐거움을 찾지말고 <저축>으로 돈이 늘어나는 것에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이번  주는 <종자돈> 이용하여 <뭉치돈> 만드는 이야기를 할까 한다. <>으로 <> 만드는 방법을 알아보자. 흔히들 이를 <금융 지식>이라고 하며, 이로 인한 소득을 <금융 소득>이라고 한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 통해 절약하며 저축한 돈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공부를 많이 하고 전문가가 되는 것도, 새벽부터 늦게까지 장사하는 것도 돈을 벌기 위함이지만, 정작 <> <> 만드는 방법을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는다. 아빠도 마흔살이 되어 개인 사업을 때까지는 <> 대한 공부를 전혀 하지 못했다. 회사다닐 때에는 한달마다 꼬박 꼬박 월급이 나오므로 월급 범위내에서 생활하고 남은 돈을 저축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기껏해야 이자율이 좋은 은행 상품에 돈을 맡기는 것이 전부이었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은행 대출이라는 처음 보았으며. 사업을 하면서도 <돈의 흐름>이나 <돈의 성질> 솔직히 알지 못했다. 사업 시작후 10년이 지나 IMF 사업을 실패하고 돈을 잃어버린 후에야  ‘돈이 무엇인가’  책을 보기 시작했으니 이것은 패배할 밖에 없는 게임을 것이었다. 학교 다닐때 배운 공업 수학이니, 양자역학이니, 제어공학이니, 졸업 한번도 사용해 적이 없는 어려운 과목들을 배우면서도 , 평생 살면서 알아두어야 <> 대한 공부는 어느 대학이나 학원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았으며, 스스로 독학할려고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니그것이 자본주의 세계의 <가진 자와 일하는 > <주종관계> 분명하게 구분짓는 부분이다.

부자들은 너희와 같은 일반 사람들이 <> 대해서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희들이 개미처럼 열심히 일해서 부자들의 돈을 늘려 주기만을 원할 뿐이다. 포드 자동차의 창업자의 말이 대표적이다. ‘나는 저들의 손과 발만 필요한데 근로자들은 머리가 붙어 있어서 나를 골치아프게 하는 것인가’  결론은 <부자> 되기 위한 <> 관한 공부는 스스로 찾아서 해야 한다. <부동산>, 아파트와 개인 주택, 상업용 건물, 토지, 임대 건물 등과, <동산>, – 주식과 펀드, 채권, 유가증권, 등에 대하여 별도의 공부를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기본적 경제 지표와 분석 자료들을 이해할 있어야 한다. 복식 장부를 작성, 이해할 있는 기본 회계 지식도 기본으로 공부해야 한다. 아빠 때에는 그래도 중학교 필수과목에 <상업>이라는 과목이 있어 복식장부는 물론, 총계정 원장, 분계전표,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 경영 기본 상식들을 3년간 배웠는데 지금은 그것조차 가르치지 않으니 정말 걱정이다.

이러한 <금융 지식> 관련 서적들을 사서 읽고시간을 별도로 정하여 스스로  계속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주변의 부자나  전문가에게 귀찮아 정도로 <한수 지도> 부탁해서 배워야 한다. 돈은 항상 흘러 다니므로 시대와 상황에 따라 <투자 전략> 바뀐다. 타이밍을 잘못 판단하면 애써 모은 돈을 몽땅 잃어 버릴 수도 있다. <> 통해 <> 만드는 방식을 <투자>라기도 하고 놓고 먹기라는 표현도 한다. 중요한 것은 투자 <결정> 내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모르고 남이 시키는대로, 혹은 남들이 하는대로 따라하다가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 <> 대한 공부가 부족하면 가장 안전한 자산에 분산해서 투자를 해야 한다. 문제는 <> 대한 <마음가짐>이다.

<> 대하여 솔직해야 하며, 좋아해야 하고 , 돈에 대한 <공부> 해야 하고, <> 스스로 관리하는 <능력> 키워야 한다. 장부를 스스로 기록하는 습관을 키워야 하며, 안정된 금융 상품을 찾아 <> 굴리는 <경험> 쌓아야 한다. <부자> 되고 싶어 해야 하고 <부자의 > 가지고 있어야 한다. <> <> 만드는 것은 <게임의 법칙> 의한 것이다. 너희들이 무슨 운동 경기를 하거나 게임을 하더러도 게임을 이기려면 게임에 대한 운용 규칙을 알아야 하고 게임의 노하우를 알아야 하듯이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테니스 게임을 이길려면 남보다 많이 연습하여야 되는 것은 기본이거니와 테니스라는 게임을 좋아 해야 한다. 게임에서 진다고 해도 인생이 불행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부자> 안되고, 돈에 대한 게임에서 실패하여 가난하게 된다고 해도 모두가 불행한 것은 아닌 것이다. 다만 네가 좋아하고 필요해서 게임을 한다고 하면 그래서 이기기를 원한다면, 남들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아빠의 칼럼이 비지니스와 관련된 내용들이 많으므로 참고하도록 하여라.

다만 주의할 것은 <> 변함이 없지만 <돈을 만드는 방법> 유행이 있다는 것이다. 한때 ‘10 만들기 같은 책들이 인기있던 시절도 있었지만, 무엇에 투자해서 얼마를 벌었다는 수치상의 결과보다도 뒤에 숨어있는 돈의 유행과 흐름을 찾아낼 있어야 한다. 몇년이 지난 그런 책들을 다시 읽어 보면 뒤늦게 방법을 따라 했다가 망한 사례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돈의 게임> 일확천금을 노리는 <도박>으로 생각해서는 절대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로 안전한 금융 상품은 없기 때문이다. 누가 무슨 금융 상품을 사서 대박이 났다고 하니까,  있는 없는 모두 긂어 모아서  빚까지 져가면서 <돈의 게임> 한다는 것은 볏집을 지고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과 같다. 무슨 상품을 사든지 간에 적자를 보면서 투자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사람과 돈에 대하여 <사랑하는 딸들에게 7> (04-29-2010)

 지난 주는 <돈이 돈을 만드는 방법> 대해서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돈을 많이 벌고 부자가 되기 원하면서도 진작 돈에 대한 공부는 게을리 한다고 했다. 그것을 <금융지식>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가르쳐 주는 곳은 없으므로 스스로 꾸준하게 공부하라고 했다. 지금같이 경제가 어려울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돈을 적게 버는 사람들이 아니라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사람들이다. 분수에 넘치는 집에 산다거나, 잘못 판단한 투자나 과소비로 인해 씀씀이가 사람들이다. 주변을 의식하거나 체면때문에 과소비를 하는 것은 <내적 빈곤>에서 오는 <가치 상실>  허영이라는 <대리 만족>이라고도 했다. 이모든 것은 기본적인 <금융지식> 부족한데서 기인하는 것들이다.

오늘은 살아가면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사람을 통해 > 만드는 방법을 말하고자 한다. 이를 <경영>이라고도 하는데 경영의 핵심은 <사람 관리>이다. 경영 지식은 공부하면 되지만 사람관리는 나의 모든 ­—인격, 교양, 지식, 성품 등이 총망라되어 스스로가 그들과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돈을 만드는 사람은 고객, 직원, 경쟁사, 협력사, 가족, 친구, 스승, 선후배 등이 모두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먼저 <인간 관계>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사람은 무인도에서 혼자 살지 않는 다름에야 대부분의 일들이 <사람 관계>에서 비롯된다. 대부분의 종교들도 핵심은 <관계 철학>이라고 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 <나와 다른 나의 관계>,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들을 어떻게 만들고 유지하느냐가 핵심이다. 대부분의 목회자들 설교나 교양 서적, 경영 관련 서적들도 <관계 이론> 주종을 이룬다. 너희들이 무슨 대학을 나와 무슨 전공을 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간에 결론은 순간마다 행복하기 위해서이며,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사람 관계> 기인함을 부인할 없다. 그러기 위해 종교도 갖고 책도 읽고 삶의 고민도 한다. 평생 일도 하고 결혼도 한다. 모든 것이 <인간 관계> 귀착이 되는 것이다

돈을 버는 방법 중에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방법이 <사람> 통해 돈을 버는 것이다. 인간 관계가 원만한 사람이 성공에 가까이 있고 행복할 가능성이 높다고 있다. 비근한 예를 보면 대학을 나오지 않고 생김새도 보잘 없고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한 사람이지만 성공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있다.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공통적인 것은 탁월한 <인간 관리 능력> 갖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혼자 없듯이 <> 혼자 만들 수가 없다. <> 사람이 만들었고 사람들이 사용하며 사람들을 통해 <> 불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따라서 <사람공부> 하지 않으면 < > 벌수가 없다. 노파심에서 말한다면 <> <하나님> 연관시키지 마라. <구하면 주시리라> 말씀을 잘못 이해해서 하나님께  <> 구걸하면 안된다. <> 필요해서 기도를 할려고 하면 <선한 > 해서, <선한 > 사용코져 하오니 <> 만들 있는 <지혜>  <사람>이나, <사건> 예비하여 달라고 해야 것이다. 결국 스스로  <관계> 통해 그것들을 만들고나서 기도를 통해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이 알아서 <> 해결해 것이라고 막연히 기도만 하고 기다린다면 <게으른 >라고 야단을 치실 같다…  아빠의 생각은 <> 스스로가 만드는거야.  <관계> 만드는 <기술의 문제>. <>이란 자체는 변하지 않아. <> 인간이 만들어 종이조각에 불과하거든. 하지만 내가 필요로 하는 <> <능력>만큼만 만들 있는거다. <> <가난> 우연은 없어. 냉정히 말하면 <행운>이라는 것도 없다. 돈은 누구에게나 머물러 있지 않아. 항상 흘러 다니지. 그래서 돈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거다.         

그러면 <인간관계>라는 용어부터 살펴보자. 너희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앞으로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같으냐. 아마도 지금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것이며, 그들과 여러 관계를 맺게 것이다. 네가 만나야 사람들이 모두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라는 착각은 하지 않겠지. 자신도 그러하지만 100% 착한 사람도 100% 악한 사람도 없다. 사람은 죽는 날까지 변하여 가는 과정의 개체이므로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너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너와 유사한 사람들이기 쉽다. 그러나 너희를 도와줄 수있는 사람들은 너희보다 훨씬 강한 사람들이다.. 가까이는 부모나 집안 어른, 학교 선생님이나 교수님, 학교 선배, 직장 선배등이며 친구도 너보다 강한 애들이 도움이 된다. 이들은 네가 생각하는 수준의 몇단계 위에 있는 사람들이며, 영향력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보다 몇십배 강하다. 그들은 너희를 경쟁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반대급부의 대가를 원하지않는다.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너희를 도와줄 수도 있고 너희를 곤경에 빠지게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네가 좋아하는 운동 경기를 한다고 하자. 네가 <상수> 몇게임만 해도 너보다 못한 <하수> 매일같이 일년을 경기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배울 있다는 알거야. 더구나 <상수> 너를 이쁘게 생각하여 너의 몇가지 단점을 지적해 주고 지도까지 해준다면 너의 실력은 눈에 띄게 달라진다. 사업도 마찬가지야. 그냥 얼마 되지도 않는 돈으로 죽도록 고생해서 돈을 만들 수도 있지만, 이미 성공한 사업가의 도움이나 전화 한통화가 사업을 바꾸어 버릴 수도 있는거야

따라서 네가 얼마나 너희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칠 사람을 얼마나 많이 유지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한 거야. 너희들이 좋은 인간 관계를 맺고 싶다면 관련된 책을 많이 읽고 그렇게 닮아가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며, 변해 가야 한다. 책을 읽을 때도 그냥 읽으면 돌아서서 잊어버리니까 기억해야 문장에 밑줄을 치고 조그만 공책에 기록해두거나 컴퓨터에 <나의 묵상록>코너를 만들어 기록해 두고 수시로 읽고 행동에 옮겨야 한다. 절대로 사람들을 <이용>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사람(강자)들은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사람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솔직하라> 것이다. <진실성> 전제되지 않으면 네가 어떤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그러기 위해서는 <착해야 한다.> 생각과 행동이 선하지 않으면 관계가 오래 가지 못한다. 너희가 선물받은 너의 삶과 세상이 자체로 진정 아름답지 않니?  <사람을 미워하지 마라>.  가능한한 <>  만들지마라. 보기 싫으면 자리를 피하면 된다. 살다보면 나의 선한 말과 행동이 본의아니게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잘못이나 결점을 네가 밝혀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거나 험담하지마라. 당사자를 비판함으로서 당사자를  잃게 됨은 물론이고, 너의 비판을 들어준 사람도 너에게서 등을 돌린다. 특히 너희와 관련된 사람들의 약점은 끝까지 비밀을 지켜 주어야 한다. 사람 관계는 은행의 <비밀금고> 같아야 한다. 상대에게 믿음을 주어야 그들도 너를 믿게 된다. 어설픈 사람들을 보면 내가 누구 누구도 알고 사람과 친한 것처럼 위세를 부리면서 한편으로 다른 사람을 비난한다. 그런 사람은 네가 없는 자리에서 너를 비난하거나 악소문을 내는 소인배이니 절대로 가까이 하지마라그런 사람은 말이 많고 위선적이며 허풍장이이므로 믿을 사람이 못된다. 떼를 지어 몰려 다니는 패거리를 부러워 필요는 전혀 없다.  <좋은 사람들>  <좋은 관계> 맺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 자신의 됨됨이>임을 명심해라..

 

인간 관계와 자아에 대하여 <사랑하는 딸들에게 8> (05-05-2010)

 아빠는 사람들의 <인간 관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우리가 호수나 강에 가면 돌을 던져서 동그라미를 만들지 않니그러면 동그라미가 파문을 일으키며 여러개의 원이 만들어지지.. 그때 던진 돌이 < 자신>이다. 돌이 크고 무거우면 많은 원을 만들며, 원의 크기도 점점 커지듯이 자신이 어떤 모양의 돌이냐에 따라 너의 인간 관계의 크기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동그라미를 가만히 관찰해 보면 돌이 떨어진 지점과 가장 가까운 원이 있고 가장 곳의 원이 있는데 가장 가까운 원의 크기가 가장 작고 가장 곳의 원이 가장 큼을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가까운 곳의 조그만 원이 다음의 원을 만들고 다음의 원이 또다른 바깥 원을 만든다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관계> <사슬 고리> 같은데 중간이 빠져버리면 고리는 연결되지 않겠지..

그럼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네가 어떤 <> 되느냐는 너의 학력, 전공도 있지만 너의 성품, 인격, 습관, 종교관, 철학, 원칙 등이 너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네가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집안에서 태어 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자신의 돌이 수는 없고 좋은 돌이 있도록 돕는 촉매제 역할을 뿐이다. 너는 스스로를 통해 갈고 닦아 본연의 모습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너를 다이아몬드 원석으로 지구에 내려 보냈는데 자신의 어리석음과 게으름으로 주어진 환경만 탓하고, 속에 묻힌채 중도에 포기하고 체념하면서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얼마나 안타까우시겠니.. <탈무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모든 사람은 세상이 때문에 창조되었다.’ 라고 느낄 있는 권리를 가졌다. <엘리노어 루스벨트> 말하기를 –‘당신이 동의하지 않는 세상 누구도 당신이 열등하다고 느끼게 없다.’ <세익스피어>–‘너만이 너다.’ 이보다 의미있고 풍요로운 말은 없다.’ 했다. 갈고 닦고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은 너의 몫이다. 속에 있는 진정한 너를 찾아야 한다. 너만이 너다.—

다음 너와 가장 가까운 원은 <가족>이다. 하나님이 피로 맺어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가족> 너의 모든 삶의 시작이요, 마지막이다. 부모,자식, 형제, 친척들이 여기에 해당하며 필연적 관계, 운명적 관계라고 하지.. 결혼한 배후자는 별도의 다른 돌이다. 결혼은 두개의 돌을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던지느냐, 상대 배후자의 돌이 어떤 돌이냐에 따라 두개의 돌이 만드는 전체 원의 크기가 결정된다. 그러니 네가 만드는 너의 원과 배후자가 만드는 원은 실제로는 별개이며, 직접적인 관계가 없음을 잊지마라. 다음 원이 친구, 선후배존경하는 인물학교 교수 ,선생님, 목사님, 멘토등이다. 다음 원이 사회에서 혹은 일을 통하여 만난 사람들이다. 다음 원이 네가 사는 동안 알게 되는 이웃이며, 다음 원이 네가 도와 주어야 , 도움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라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하며 시작인 자신과 가족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이웃과 인류를 사랑한다는 것은 허풍이며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다.

이제는 고전이 스티븐 코비 박사의 필독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보면 다음의 7가지 습관에 대해 정리하였는데, 주도적이 되라. 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하라. 소중한 것부터 먼저하라. 상호의존의 패러다임을 만들어라. 상호이익을 추구하라. 경청한 다음에 이해시켜라. 시너지를 활용하라. 심신을 단련하라. 7가지의 소제목을 가지고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라는 내용이니 읽어보도록 하여라. 외에도 너희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책은 많키도 많다. 아빠가 추천해 주고 싶은 책도 많다. 그런데 아빠의 노파심은 너희들이 너희를 만드는데 필요한 책들을 너무 읽지 않는것이 아닐까 우려한다. 시대가 바뀌고 무슨 세대, 무슨 세대하여도 나를 바꿀 있는 가장 강력한 매체는 책이다책을 읽어야 생각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고 인생이 바뀐다고 하는데, 너희들은 책말고 무엇으로 자신을 바꿀레?. 세상 물건중에 책값처럼 저렴한 것이 없단다.. 성경책 한권이 얼마니? 속에 담겨진 말씀의 가치는 얼마니 엄마가 가장 이쁠 때가 언제인줄 아니? 일요일 산책하면서 일주일동안 읽은 중에서 인상 깊은 줄거리나 감상을 이야기할 때이다. 이때 엄마를 바라보면 신비하게까지 여겨진다니까..

사랑이 별꺼니? 평생 콩깍지가 씌워서 사는 것인데 상대방의 내면의 아름다움만큼 강한 콩깍지는 없는 같다. 너희가 사랑하는 남자가 생겨서 사람의 마음을 빼앗고 싶다면 좋은 책을 읽고 너의 느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비싼 옷을 입고 얼굴을 몇번 성형을 하고 비싼 선물을 좋아하는 놈이라면 애시당초 그만 두는게 낫다. 아빠는 사위감 면접 시험을 본다면 사람의 머리 속에 무슨 책들이 들어있나 물어 것이니 참조토록 하여라.

 부자가 되고 싶다면 부자가 되는 책들을 많이 읽어야 한다선한 사람이 되고 싶다면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한 책들을 많이 읽어야 한다. 책을 읽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나 시사토론을 보는 것과 다르다. 명언 몇구절 외워서 흉내내는 것과는 다르다책이외의 다른 것은 보는 순간 뿐이며,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하지만 좋은 책은 읽는 중간 중간, 책을 읽고 후에도 묵상을 하고 사색을 하게 된다. 예를 들면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듣고도 교회문만 나오면 잊어버리는다거나, 교수가  칠판에 풀어주는 수학 문제를 그때는 모두 이해하고 있을 같은데 며칠 뒤에 다시 풀려고 하면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자신이 변할려고 하면 여러 방면의 좋은 책을 읽고 묵상하고 결심하여 조금씩 행동으로 옯겨야 하는거야. 아빠가 지난 주에 말했지. 네가 맺고 있는 인위적 인간 관계의 사람들은 너와 유사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말이다. 유유상종이니,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말처럼 주위의 사람들이 삶에 끼치는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네가 변하면 인간 관계도 너의 모습에 따라 변하여 간다.

아빠가 제안을 하나 해 볼께. 가족과 같은 필연적 관계를 제외하고 그 다음원의 사람들, 그 다음 다음의 사람들 명단을 중요도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해 만들어 보아라. 만나고 있거나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들이  몇명이나 되며, 그사람들 직업, 재산, 학력, 행복지수등을 네 나름대로 기록해 보아라. 그러면 현재 네 위치를 어느정도 알 수 있다. 이것을 <인물 100선>이라고 가칭하고 평생 수정하며 유지토록 해야 한다. 그 인물 100선 가운데 부자나  네 전공과 관계된 영향력있는 인사가 별로 없다면 너의 꿈은 공염불이 되기 쉽다. 꼭 친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것은 네가 친해지도록 노력해야 될 네 문제니까..네 주위에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많다면 너도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다.당연히 너보다 <강자>가 많다면 너는 굉장히 의욕적이고 도전적이므로 고무적인 현상이다. <강자>와 친해지는 방법은 <관심>이며, 관심은 지속되어야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편지나  카드 혹은 E-Mail이다. <뼈가 저리도록 짝사랑>하다보면 언젠가 너와 좋은관계로 너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따라서 너의 인간 관계나 사람 관리는 전적으로 너의 몫임을 명심해라.

 

배려   –전편  – <사랑하는 딸들에게 9> (05-12-2010)

아빠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아쉽고 부족하였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배려>이다. 예수의 <사랑>이나 부처의 <자비심>, 공자의 <> 사상 모두가 근간의 부분이 <배려>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구나.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 보면 그때 좀더 배려심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면 많은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를 본다. 경쟁에서 이긴다는 것은 상대방을 넘어뜨려서 짓밟고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와의 경쟁이며, 승리한다는 것은 상대를 배려함으로써 함께 생존하는 공생이라는 것을 패배하고나서야 알게 것이다. 생존경쟁, 적자생존, 약육강식 등의 단어에 현혹되어 강한 리더쉽, 강력한 추진력, 탁월한 업무 실적, 카르스마적 지도력등이 칭찬인줄 알고 살았다. 그것은 독선과 아집, 독재와 같은  이기적 삶이었으며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훨씬 많은 잘못 삶이었음을 고백한다. 아름다운 삶은 전쟁이 아니다. 삶을 전쟁 치루듯이 잘못 살아온 인생 선배로서의 고백이니 너희들은 반복되는 우를 범치 않토록 부탁한다.

흔히 <배려> 설명할 예로 드는 이야기가 있다. “앞을 못보는 장님이 야밤에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한손에는 등불을 들고 길을 걸어 가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물었다. ’정말  당신은 어리석군요, 앞을 보지 못하면서 등불을 들고 다닙니까?” 그가 말하기를 당신이 나와 부딪히지 않게 하려구요. 등불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한 입니다.” 흔히들 <역지사지> 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 <황금율의 법칙>이라는 문구도 사용한다. 성경의 <내눈의 들보>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문제를 때에도 문제 출제자의 입장에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 문제를 쉽게 수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앞으로 너희들이 사업 계획이나 전략을 만들더라도 <고객> 입장에서, 경쟁사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능력이 우선되어야 하며, 최신 경영도 <고객가치 창조>에서  <상호가치 창조> 바뀌었다. 필립 코틀러가 <마켓 3.0>에는 현대 비지니스 시장의 가치 기준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는 제품 가치중심의 1.0시장과 고객가치 중심의 2.0 시장은 막을 내리고 가치 주도의 시장 3.0 새로운 시장으로 진화되고 있다고 한다.고객을 단순한 소비자로 생각하지 않고 이성과 감성과 영혼을 가진 전인적 존재로 접근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고객은 제품의 기능이나 서비스의 품질에 국한되어 만족하는 것이아니라 영적 가치까지 함께 하길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적 깊은 공감대가 공유되어야 하며 그것은 상호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적 배려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너희들이 좋은 <인간 관계> 맺고 싶을 때도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좋은 관계> 어렵다. 필요할 만나서 이용하고, 필요없으면 헤어지는, 요즈음 너희들의 표현대로 <쿨한 관계> 되어서는 곤란하다사람과의 관계는 <핫한 관계> 되어야 한다. 진정으로 모든 것을 주어 사랑하다가 이별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 있겠니. 아픈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는데 몇달, 몇년이 걸린다 할지라도 모든 것을 주어 <핫한 관계>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배려이다.  상대방을 <이해>할려고 해야 배려할 있고, <배려> 있어야 <용서> 가능하고, <용서> 되어야 진정한 <사랑> 가능한 것이다. 법정 스님은 <일기일회 (一機一 )>라는 책에서 <행복>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지금 이순간  순간 순간마다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의 삶은 현재 순간 한번의 기회밖에 없기에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항상 깨어 있어라는 뜻으로 <일기일회>라는 법문집을 만드신가 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만을  위함이 아니라 상대를 배려하여 함께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아스퍼거 신드롬>이라는 말을 들어 보았니한상복씨가 <배려>라는 책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여 보자. 이는  남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일종의 장애를 말하는데  자기 세계 속에만 갖혀 있다고 한다.. 이기적인 사람은 남의 입장을 알면서도 자기 욕심때문에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지만 아스퍼거는 남의 입장을 이해못한다는 것이다.  <사스퍼거(Social Asperger )> 자신에게 한없이 관대하고 남들에게는 무자비하며 예의조차 없으며, 결국 자기 자신을 망쳐 놓는 것인데  남의 약점을 집요하게 찾아내 상대방을 공격하며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다고 한다.  아스퍼거의 대표자는 대부분 비상한 머리의 소유자들로 핵물리학자 뉴턴. 레인 영화의 더스티 호프만 역할을 들고 있는데 섬찍하구나.. 아빠는 너희들이 성공하고 살길 원하지만 남들을 무시하고 그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까지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배려>없이 <사랑>없이 행복하게 살수가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남들에게 많은 가치를 안겨줄수록 돌아오는 가치도 늘어나며, 남을 위하는 마음은 결국 자신을 위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행복의 <> 남이 내게 <주는 > 아니라 내가 스스로 <짓는 >이라고 했다.

 공자의 <인의 사상>에서  < >이란 사람 < >변에 < > 결합한 것인데 사람 둘만 모여도 서로를 위해야 하며, 이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마음씨를 말한다고 한다. <논어> 방대한 내용을 축약하면 나의 삶을 살아가며, 남과 조화를 이루고, 결국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가는 지혜. <모든 것이 사람관계>에서 비롯되며, 의사소통도 결국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주는것이라고 했다. 이또한 <배려> 요약한 말이다..

 

배려  – 후편   <사랑하는 딸들에게 10> (05-17-2010)

 사람들은 일에 감동하지 않는다. 예상밖의 큰일이 생기면 놀랄 뿐이며, 사람들은 의외로 작은 일에 감동을 받는다. 안에는 커다란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평소 사람들의 습관을 눈여겨 보면 그들을 위해 즐거운 일을 기회가 늘어나게 됨을 있다인간관계가 좋아지고  넓어진다는 것은 스스로 책임져야 부분이 늘어난다는 말로 해석해도 좋다. 사람들은 누구나 <지기> 만나기 원한다. 나를 알아 주는 사람만큼 반가운 사람도 없다. <지기>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배려>함으로서 얻어지는 것이다. 상대방을 배려한다는 것은 패배주의도 온정주의도 아니다. 자신을 포기하거나 비굴하게 감추는 것도 아니다. 흔히들 상대방을 배려하면 스스로를 희생하고 손해만 본다고 왜곡된 부분 해석을 하는 경우를 본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자본주의 형틀에서 교육받으며 자라났기 때문에  <Give and Take> 익숙한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받은 다음 줄것이냐, 주고 다음에 받을 것이냐이다. 인간은 불신의 동물이며 욕망의 동물이기 때문에 결코 자신이 손해보거나 피해보지 않을려고 한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먼저 받은 다음에 줄려고 하면 세상은 어떻게 되겠니?

흔히들 천국과 지옥을 비교할 이런 우화를 인용하는 것을 알고 있지?  “ 천국과 지옥은 모두 수저를 사용하는데 혼자서는 결코 수저로 밥을 먹을 없다. 천국 사람은 서로 수저를 이용하여 상대방 입에 밥을 넣어 주는 반면, 지옥 사람들은 서로 자기 입에 밥을 많이 넣겠다고 싸우는 통에 굶어 죽는다고 하지.”  논어에도 이런 유사한 우화가 있다. “원시시대에 부족이 이웃하고 있었는데 각자의 마을에는 서로 다른 풍성한 열매들이 나무에 달려 있다. 서로 자기 마을의 열매만 먹어도 아무런 걱정없이 평생을 먹을 있는데 마을은 상대방 열매가 탐이 나서 서로 빼앗고 죽이고 죽어 마을은 모두 전멸하게 된다.”  만약 그때 한쪽에서 먼저 상대방 마을에 자기 마을의  열매를 선물했다면 마을은 모두 공생하며 많은 열매를 얻을 있었지 않을까. 네가 먼저 받은 다음에 줄려고 하면 <좋은 인간관계> 결코 기대할 없을 것이다. 부부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이고 친구간의 우정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배려> <나눔> 공생의 길이며, 함께 승리한다는 의미이다.

 <성경>에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니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자는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인생의 세가지 키워드가 있다고 한다. 첫번째는 솔직하라이것은 행복의 조건이며 스스로를 위한 배려이다. 두번째는 상대방의 관점에서 보라이것은 즐거움의 시작이며 너와 나를 위한 배려이다. 세째는 통찰력을 가져라이것은 모두를 위한 배려이며 진정한 성공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세가지 키워드의 조건은 <배려>이다. 배려는 나를 넘어서는 도약대이며, 세상과 조화를 이루는 인간들의 연결고리이다. 배려는 경쟁까지도 넘어설 있다. 경쟁자의 입장에서 보고 경쟁자를 앞지르고 결국 경쟁자를 나은 길로 인도한다.

경제 용어에 <부등가 교환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일한만큼 돌려 받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자기는 노력에 견주어 2천원을 받고 싶은데 고객은 1천원만 지불하며, 그러면서 2천원의 가치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1천원을 손해보았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1천원의 차이에 대한 가치는 고객만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니며, 나에게 돌아올 때에는 보람, 찬사, 존경,도움, 협조등 다른 가치로 바뀌어서 돌아 온다.”  내가 손해보는듯한 관계가 진정한 <좋은 관계>이다. 따라서 <배려> 결국 자신을 위한 <낮아짐>임을 잊지 말기 바란다. 이러한 유사 사례를 책에서 몇가지 인용해 보자.

<논어>에서는 단단한 돌이나 쇠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깨지기 쉽다. 그러나 물은 아무리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깨지는 법이 없다. 물은 모든 것에 대해서 부드럽고 연한 까닭이다. 골짜기에 흐르는 물을 보라. 앞에 있는 모든 장애물에 대해서 스스로 굽히고 적응함으로써 줄기차게 흘러서, 드디어 바다에 이른다.”  노자는 “ <상선약수>라는 표현을 했다. 최상의 선이란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의 선함은 만물을 이롭게 주지만 다투지 않는다. 물은 스스로 낮은 곳에 처신한다.” 했으며  <명심보감>에는 평소에 인정을 베풀면 훗날 좋을 모습으로 있다. —범사유인정, 후래호상견이라는 표현도 했다. 공자의 <>라는 뜻은 자기를 생각하는 것처럼 남을 생각하는 마음씨이다. 어려운 사람을 동정하고 남의 탓을 하지 않으며, 남에게 관대하라는 뜻으로 평생을 두고 실천해야 도리라고 있다.

현대 사회는 경쟁의 사회임을 부인할 없다. 그러나 경쟁에는 게임의 법칙이 있는데 앞에서 아빠가 설명했듯이 내가 먼저 받을려고 하면 게임에서 이길 없다는 것을 말해줄려는 것이다. <배려> 만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저축성 보험이라고도 표현하지만 결국 내가 돌려받게 되며, 함께 있는 경쟁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배려는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며, 그것도 받기 전에 먼저 주어야 한다. 배려는 일회성이 아니라 몸에 베어져서 자연스러워야 하며, 배려하는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은 길고 많은 일을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 길게 보면 배려하는 삶이 결단코 너희들 자신에게 행복한 삶이 것으로 아빠는 믿는다.

 

아버지의 자화상전편  <사랑하는 딸들에게 마지막편, 11> (05-22-2010)

아빠가 사랑하는 나의 딸들에게 무슨 의미를 남겨줄려고 이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말은 말로 헛돌고 생각은 생각으로 헛돌아 아직 말은 시작도 하지 않은 처럼 많이 남았는 같은데 머리에만 맴돌고 마음만 죄어 오는구나. 아빠는 너희에게 어떤 아빠이며, 어떤 아버지로 남아 있을까 하는 미안함과 두려움이라 할까..일본의 시찌다 마코드가 이야기한 <아버지가 자녀에게 주어야 7가지 선물> 보면 존경심, 인내심 (자신을 억제하는 ), 사랑, 의욕(스스로 하고 싶어 하는 마음), 개성, 배움, , 이렇게 일곱가지 선물중에서 과연 나는 너희에게 무엇을 주었으며 무엇을 있나하는 자괴감이 밀려온다.

아빠 스스로 생각해도 다른 아버지들 처럼 자상하지도 않으며, 사회적 명성이나 부나 지위도 없는 보잘것 없는 촌노로 늙어가기만 하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누구와 비교하여 뼈가 부서지도록 일할 있는 강한 체력도 아니고, 근면 성실하거나 신앙심이 깊거나 삶의 철학이 깊은 것도 아니다. 아직도 수많은 번민과 자학과 위선과 어리석음으로 힘들게 하루하루  깨우치며 반성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민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아버지와 관련된  어떤 교육프로그램에 들어가 전혀 다른 모습의 완제품으로 바뀌어서 나오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라는 존재는 기준이 정해진 비교의 대상이 아니며, 교육의 수준에 따라 대접받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자체로 아버지이어야 한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존경해야 하고 사랑해야 하고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아버지의 <자존>이다. 아버지라는 사람들은 무슨 희망으로, 무슨 꿈으로 세상을 살아가는가? <자존감> <자존심>이다. <자존>으로 홀로 흔들리지 않고 우뚝 서야 가정을 지키고 자식과 아내를 지킬 있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아버지들은 <자존> 잃어버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 본인 스스로도 자존을 잃어버리고, 아내와 자식들도 아버지의 자존을 땅바닥에 내동이친다. 다른 아버지들과 비교하면서 말이다. 소득 수입과 재산, 부드럽고 자상함, 물질적 선물과 금전적 지원,등등은 결국 아빠가 나에게 무엇을 어떻게 줄수 있느냐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자존이아니다어깨죽지를 늘어뜨린채 고개 숙인 아버지들의 <자존> <존경> 누가 찾아주어야 하는가. <가족>만이 있다. 아버지는 남자이다. 남자는 투사이다. 투사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운다. 목숨 걸고 싸울 용기와 목적을 잃어버린 투사는 이미 투사가 아니다. 그래서 현명한 아내와 가족은 절대로 투사의 <자존> 건드리거나 업신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꺼져가는 <자존> 불씨를 살려서 활활 타오르게 만들어 물불 가리지 않는 투사로 만드는 것이다. 본인이 투사가 아니라고 생각되거나 가족이 투사로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스스로 떠나거나  아버지이기를 포기하여야 한다.  

아버지는 아버지 방식대로 살다 것이다. 신이 허락한다면 죽는 날까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랑하다  가고 싶고, 부지런히 교회 나가서 용서를 구하며 조금씩 그분을 닮아가는 삶을 흉내내다 가고 싶고, 산책하며 사색하며 책읽고 뒹굴뒹굴 그렇게 살다 가고 싶다. 보기 싫은 사람은 안보면 되고 보고 싶은 사람은 짝사랑하면서 만나고 헤어지면서 그렇게 살고 싶다.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직접 만들어서 주변 사람들과 나누어 먹고, 가고 싶은 있으면 여건이 허락하는대로 여행하며 살고 싶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한잔 하면서 흘러간 옛노래도 부르면서 살고 싶고, 좋아하는 운동도 계속 하면서 살고 싶다. 파란 하늘도 보고 산도 보고 꽃도 보고 밤하늘의 별도 보고 푸른 바다도 보면서 살고 싶다. 너희에게도 내가 있는 크기만큼의 사랑을 모두 주다가 홀연히 가고 싶다. 너희들은 서로 아빠를 모시고 살겠다고 하여 고맙긴 하지만, 아빠는 죽는 날까지 아빠가 벌어서 먹고 살다 것이다. 추한 모습도 구질스러운 모습도 보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너희들이 살다가 언제라도 어떤 모습으로라도 아버지에게 돌아오면 재워주고 먹여줄 것이다. 너희들은 아빠보다 훨씬 강하고 똑똑하니까 하리라 믿는다. 하지만 아버지니까 이런 잔소리조차 없다면 아버지가 너무 왜소해 보이고 초라해 보이지 않겠니. 나는 요즈음 아빠들이 너무 의기소침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같아서  싫다.

잘났던 못났던 아버지는 아버지이어야 한다. 일찌기 어느 역사에 이렇게 아버지의 위상이 땅에 떨어진 적이 있었을까. 아내한테 비난받고 자식들한테 비판받고 산업화 사회에서 부속품으로 냉대받는 현대의 아버지들은 과거 역사 속의 아버지보다 과연 무슨 잘못을 그렇게 많이 한걸까.아빠시대의 아버지들도 일제 식민지시대, 육이오 전쟁, 보리고개를 거치면서 가난과 무지와 빈곤속에서 한평생 사셨던 분들이었지만 가족으로 부터의 존경과 사랑은 아낌없이 받으셨다. 그러면 현대의 아버지들은 이렇게 왜소하고 초라한 모습들일까.  어쩌면 아버지 스스로의 원칙과 소신을 잃어버린 흔들리는 갈대이어서인지도 모른다. 너희들은 아빠를 평가하거나 비판하지 말아라. 아버지는 아버지 자체로 존경받고 대접받아야 한다. 너희가 자식인 처럼 나는 너희들의 아버지인 것이다. 아빠는 아빠 스스로 변해 뿐이지 주눅들어 이리저리 발에 체이듯이 눈치보며 살고 싶지 않다. 아빠는 킬리만제로의 표범이고 싶다.   

 

아버지의 자화상 후편 <사랑하는 딸들에게 12,마지막회> (05-29-2010)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우는 일본의 <마쓰시다 고노스께>는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세가지 은혜>를 이렇게 말한다. 첫째는 집이 가난해서 어릴적 부터 고생을 많이 했으므로 세상 살아가는 경험을 많이 쌓을 수 있었던 것이고, 둘째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서 항상 운동에 힘써 왔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음이요, 세째는 초등학교도 못다녔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나의 스승으로 여기고 누구에게나 물어가며 배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음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구차한 변명일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너희에게 해 준 것이 없다는 이유를 핑계삼아 너희들 인생을 체념하거나 꿈을 작게 가지지 말라는 부탁이다. 성공적인 삶이란 누구나 현재의 주어진 위치나 환경에서 부터 한발작 한발작 씩 내딛기 시작하지만, 누가 더 큰 꿈을 가지고 있으며 누가 더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난다.

이제 너희들도 모두 성인이므로 각자의 인생은 각자의 책임으로 진행될 것이다. 아빠가 너희에게 쓴 12편밖에 되지 않는 짦은 칼럼중에 돈에 관한 칼럼을 5편이나 쓴 이유를 아빠의 속물근성이나 물질만능주의 정도로 평가절하 하지마라. 아빠니까 돈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빠니까 다른 아버지들처럼 보편적 가치나 통속적 가치에 대해서 말할 수밖에 없다. 공부 열심히 해라.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라, 좋은 친구를 사귀어라. 착하고 성실하고 능력있는 배후자와 결혼하라, 등등 수없이 들어온 평범하다 못해 진부한 잔소리들이다.  만약 대중을 위한 연설이나 강연을 한다면 좀더 품위있는 형이상학적 철학이나  사상등을 이야기했을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아빠가 없는 세상에서 너희들 혼자 살아가야 하는 생각을 하면, 세상이라는 것이 그렇게 핑크빛 성공만 있는 것도 아니고 잘 된다는 보장만 있는것도 아니기에 먹고 사는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알려줄려는 것이다. 그것은 여느 아버지들도 마찬가지일거야.

소설가 김훈씨가 쓴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에 대하여>라는 에세이에 보면 “돈과 밥으로 삶은 정당해야 한다.— 아들아, 사내의 삶은 쉽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사내의 한 생애는 돈을 벌어 오는 것이다. 돈이 없다면 돈보다 큰 것을 이룰 수 있겠느냐? 돈은 인의예지의 기초이다. 물적 토대가 무너지면 그 위에 세워놓은 대부분의 것들이 무너진다. 그런 허망한 아름다움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없다. 돈 없이도 고상하게 잘난 척 하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추악하고 안쓰럽고 남세스럽다. 돈이 있어야 밥을 벌 수 있다. 우리의 먹거리는 반드시 돈을 경유하게 되어 있다. 그러기에 우리의 노동은 소외된 노동이다. 밥은 그  의미 내용이 심오하다. 공맹노장보다 심오하고 유물론 유심론 따위는 코흘리게 장난만도 못한 짓거리다. 돈과 밥의 지엄함을 알면 사내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아는 것이고, 이걸 모르면 영원한 미성년자이다.” 라고 거친 말을 토해낸다..

물론 배고픈 소설가의 신파조 넋두리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니까 해야 할 이야기이고, 인생을 먼저 살아온 수많은 선배들의 이구동성이라면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가난해보지 않은자가 가난을 모르듯이 배고픔을 모르는자가  그 고통과 공포를 어찌 알겠느냐. 전세계 10억이 넘는 인구가 지금 이 순간에도 배고픔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데 너희들이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돈이없어서, 정말 가난해서 배고파본 적이 있느냐. 너희들이 돈을 벌어서 밥을 사오지 않으면 온 가족이 굶어야하는 절박함을 겪어본 적이 있느냐.

얼마전에 교회의 유스 그룹에서 주관하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여러 학부모들과 10주동안 저녁을 만들어 준적이 있다. 이곳 미국 땅에서 청소년을 둔 이민 부모들은 자식을 키운다는 것이 고통과 인내 그 자체임을 예전에 몰랐을 것이다.. 오죽하면 교회에서 그런 프로그램을 도입했겠느냐. 부모들이 아이들과 가까워지기 위해 매번 값비싼 다른 매뉴로 정성을 다해 저녁을 만들어 갖다 바쳤다(?). 그런 음식들을 적지 않은 아이들이 몇 젓가락 먹는 시늉만하고 음식 쓰레기 통으로 버리는 것을 보고 내 자식이나 남의 자식이나 간에 이건 아니지 않는가. 한국은  음식 쓰레기 처리 비용이 년간 8조원을 넘는다고 한다. 이렇게 돈과 밥의 소중함을 모르는 아이들이 성공해서 출세를 한다한들 무슨 진정한 사랑을 알겠는가. 먹을게 지천으로 늘려있고 해달라고 응석만 부리면 다 해주는 부모들을 만나서 내가 최고인줄 알고 사는 우리 아이들에게 무슨 미래와 배려와 나눔을 기대할 것인가. 이 세상에서 받은 빚을 어떻게 갚을려고 저러나 싶어 불쌍하다는 연민의 정까지 느낀다면 내가 너무 예민한건가..

<아버지의 편지>라는 책을 읽어보면 조선시대 유명한 유학자, 성리학자,정승고관, 선비들이 자식들에게 쓴 편지 내용들이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들도 자식에 대해서는 여느 평범한 아버지들과 다를바 없음이 씁쓸한 미소를 짓게 한다. 절약해라, 공부 열심히 해라, 돈 아껴쓰라, 안부 자주 해라 등등…   역사의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시시콜콜한 잔소리 투성이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러하셨던 것처럼 나는 한국의 선비 정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백인, 흑인, 유대인 그 어느 민족의 아버지도 결단코 부럽지 않으며 표본으로 삼고 싶지도  않다.  그들은 그들의 역사와 문화가 있고 한국인의 아버지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가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 방식대로 아버지의 원칙대로 너희들을 사랑할 것이다.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너희들에게 잔소리를 할 것이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너희들에게 아낌없이 줄 것이다.. 그리고 사랑한다. 나의 딸들아… 

 

 삶의 여백 (06-05-2010)

어느날  창가에 흩날리는 눈꽃잎을 바라보다가 문득 < 나는 결혼해서 지금까지 방이 없었을까?> 라는 엉뚱한 생각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집에서 때에나 작은 집에서 때에도 아이들 방은 있어도 나는 방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방이 필요가 없었다. 결혼 생활 30 가까이 도둑 고양이 처럼 늦게 조용히 들어 왔다가  아침 일찍 나가는 생활의 연속이었으니 하숙집이냐고 아내가 바가지를 긁어도 말이 없었다. 더구나 결혼할 서로 약속하기를 아무리 크게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절대 방을 쓰지 않기로 하였으니 죽으나 사나 이불 뒤집어 쓰고 밖에 없다. 대부분의 한국 남자들이 그렇듯이 내가 필요한 물건은 거실에 모두 있었다. 한때는 집에 들어 오면 텔레비젼부터 틀고 나서  다른 일을 시작하던 시절도 있었다. 집안의 공간은 거실이었고 안에서 모든 일이 해결된 셈이다. 그러니 방에 대한 필요성이 없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민을 와서 그런지, 텔레비젼이 없는 생활을 해서 그런지,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다는 욕심을 가져본다. 크기는2평에서 3 남짓한 조그만 방이면 족하다. 창문은 이왕이면 동남쪽 방향으로 하나 났으면 좋겠다. 빗살 무늬 창문을 통해 세월이 지나감을 있으면 좋겠고 아침이 밝아오는 여명의 한가함을 느낄 있었으면 좋겠다. 방에는 일체의 가전제품이나 가구들이 없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책을 있는 조그만 앉은뱅이 책상과 등받이 나무의자 하나면 족하다. 책상 위에는 읽고 있는 한권과 성경책 한권이면 그것으로 족하다.  바라보이는 앞에는 아무 장식이 없는, 조그만 나무 십자가 하나가 있었으면 좋겠다. 공간에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보다가 졸다가 했으면 좋겠다. 아주 가끔은 방에 사는  아내도 초대하여 좋은 차를 함께 나누며 대화도 하고 싶다. 텅빈 공간에서 지나간 세월동안 나의 찢겨 나간 상처들을 어루만지며 혼자 위로하고 싶다. 상처의 아픔을 핥으며 참고 견디다가 정녕 힘이 들면 소리없이 눈물도 한없이 흘려 보고 싶다. 어둠이 안에 내리면 서성이며 방안을 걷고 싶다. 벽에 걸린 십자가를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없이 그렇게도  있고 싶다. 때로는 분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리고 깊은 사색에 잠기고 싶다. 불현듯 생각이 나면 숨쉬듯이 편안한 글을 쓰고 싶다. 방에는 이제 나만이 혼자 있고 싶다. 며칠이고 숨죽이며 산듯, 죽은듯 그렇게도 지내고 싶다

만약 죽는 날까지 경제적 사정이 허락치 않거나, 혹은 껌딱지처럼 항상 붙어 지내기를 원하거나 , 혼자서   방에 틀여 밖혀 있는 꼴을  아내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방을 갖고 싶은 꿈은 꿈으로 끝나도 상관없다. 지금처럼 한구석에 나만의 공간을 만들면 된다. 그러나 마음 속에 방을 만드는  삶의 여백은 늦기전에 만들어 놓아야겠다. 얼마 전에 이웃에 사는 한국사람이 서부 먼곳으로 가족이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떠나기 전날  늦은 밤에  차를 한잔 기회가  있었다.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고 언젠가 함께 일도 같이 보고 싶은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떠난다는 것이 여간 아쉽지가 않았다. 가족간에 왕래가 있는 사이가 아니어서 가끔 한잔 마시며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정도를 하는 사이였는데 어떤 이별도 언제나 서툴기는 마찬가지이다. 나는 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본인이 말해 주지 않으면 거의 묻지 않는 나의 성격적 결함 때문이겠지만 , 나이는 내가  몇살 연배같으므로 격려와 용기를 있는 이야기를 수도 있으련만 그것조차 부담이 같아  서로 차만 마셨다. 스스로가  독백처럼 하는 말이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순간까지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밖에 없는데 이렇게 사는게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우리 부부는 앞만 바라 보고 애들 키우며 열심히 살았는데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분의 흐르는 눈물을 바라보면서 눈물 안에 모습을 보는 같았다.  어깨를 다독거리며 같이 눈물을 삼키는 밖에 달리 말이 없었다. 그때 내가 분에게  “아마도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앞으로는 우리 함께 <삶의 여백> 가지고 살아 봅시다라고 제안한 기억이 난다.

미국 이곳에서 부부 모두 대학을 나오고 한인사회의 엘리트 그룹이지만 우리 모두는 너무 앞만 바라보고 바쁘게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삶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고 한다. 각자 생각하는 정상은 다를 있지만 모두들 정상을 향해 올라 간다. 걸어가다가 같은 방향을 가는 친구를 만나게도  되지만 각자 걷는 속도도 다르고 목표하는 정상도 달라서 헤어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정상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산행을 마쳐야한다. 그런데 죽을 힘을 다해 산행을 마치게 되면  <그분> 만나게 될텐데,  그분이 너는 정상까지 올라 오면서 무엇을 보았는가?”라고 물어 보시면 대답이 정상에 올라온다고 앞만 보고 걸어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옆에 누가  함께 걸었는지도 모릅니다. 오직 발끝의 등산화와 땅만 보았을 뿐입니다.” 라고 엠마오로 걸어가는  제자들 같이 되어 버리면 분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조금의 여백과 공간과 여유가 있었다면 잠깐 걸음을 멈추고 지나온 길을 내려다 보면서  얼마나 아름다운 산행 길인지 알텐데같이 동행한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지 알텐데, 비록 정상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여정에서 얼마나 귀중한 것들을 얻었는지 알텐데 말이다.

내 마음에 삶의 여백이 있어야 그 분도 내 마음속에서 나와 함께 편히 거하실 것이 아닌가. 오시라고, 잘 모시겠다고 생떼거지를 써서 모셔는 와 놓고선 내 욕심과  아집과 성냄으로 그 분이 쉴 방조차 없다면 그런 실례가 어디 있는가.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으면 철도 나야 하고 하나씩 필요 없는 것은 버리고,  필요한 것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주기도 하고 나누어 주기도 하여 나만의 빈 방을 만들어야겠다. 그래서 그 분을 문 밖에 서 계시게 하지말고 내 방 따뜻한 아래목에 모셔야 하지 않을까. 

 

쓰는 죄스러움 (06-17-2010)

언젠가 한번은 독자 여러분에게 나의 뻔뻔함과 무지함에 대하여 양해와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벌써 칼럼을 쓴답시고 신문에 글을 쓴지가 3년하고도 7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거의 180여편의 칼럼을 매주 쉬지 않고 셈이다. 이것은 나의 자랑이 아니라 염치없음과 부끄러움을 말함이다. 처음에 글을 때에는 나의 개인적인 문제로 가볍게 시작한 글이었다. 이민온 아버지가 세명의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은 없고 그렇다고 하루하루 힘에 겨워 헉헉대며 살다 가면, 과연 아이들의 기억속엔 어떤 아버지로 남아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여느 이민의 아버지들처럼 공부도 할만큼 했고 교육도 받을만큼 받았고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지금의 모습은 먹고 살기에 바쁘고 영어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철학도 전문 지식도 인격도 없는 막장인생을 살다 아버지로 기억될까 하는 안타까움이었다. 많이 알아서라기 보다 아버지가 알고 있는 , 말해 주고 싶었던 , 남겨 주고 싶었던 것들을 글로 쓰고 싶었다.

이렇게 개인적으로 시작한 가벼움이 이제는 부담의 무거움으로 느껴진다. 나는 전문 <글쟁이> 아니다. 국문과를 졸업한 것도 아니고 문학에 소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살아오면서 글을 보고 싶다는 꿈도 없었다. 당연히 <글쟁이> 되기 위한 전문 교육을 받은적도 없고 습작이라도 하기 위한 조그만 준비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글을 알았다면 젊은 시절부터 책을 한권 읽더라도 기록해 놓거나 책이라도 남겨둘걸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민올 책들은 무거워서 모두 남들에게 주고 왔다. 젊은 시절 읽었던 책들의 내용은 기억속에 거의 지워져 버렸고 사회 생활중에는 거의 경영과 관련된 서적만 읽었을 , 그것마져 기억 저편에 있다.. 그런 사람이 매주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일인가. 나이가  들어가면 체면과 겸손함과 함께 철도 들어야 할텐데 말이다.

글을 쓴다는 일은 뼈를 깍는 고통과 같다고 했다. 한줄의 문장을 만들기 위해 단어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며칠밤을 눈으로 지새운다고 들었다. 글은 사실을 기반으로 대중의 공감과 감동을 만들어야  한다. 사실을 기반으로 하기 위해 많은 서적을 탐구하고 자료를 통하여 역사를 알아야 한다. 직접 현장을 방문해야 하고 삶의 실체가  속에서 묻어나야 한다. 그런데 글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수다스러운 뺑덕어멈처럼 매주 정제되지 않은 글과 말을 쉴새 없이 쏟아낸다는 것이 가당키나 소리인가. 거기다 나를 번민케 하는 일들은 독자들의 격려와 칭찬이다. 한인 사회가 좁아서기도 하지만, 만나는 적지 않은사람들이  ‘ 읽고 있습니다.’라는 격려 인사를 하신다. 우리 교회 원로 목사님이나 목사 사모님이 격려하시는 것은 어린 양을 돌보시는 측은지심이라고 치더라도 여러 교회의 목사 사모님들이 격려 전화를 주시고 응원해 주시는것 까지도 조금의 뻔뻔함으로 버틸 수가 있다. 그런데 생면 부지의 사람들이 길을 가거나  장을 보거나 가게를 방문해서 만나면 언제 칼럼이 너무 마음에 남아 냉장고에 붙혀 두고 읽으신다던가, 자식들에게 주기 위해 빠지지 않고 글을 모아 두고 있다거나, 신문을 매주 가지러 없으니 이메일로 송부해 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마다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마음뿐이다. 한편으로 이곳에 이민오신 한인들은 참으로 너그로운 분들이 많다는 생각으로 부끄러움을 감추어본다.

그런데 더욱 뻔뻔스러운 것은 사정이 허락하는 , 글을 계속 쓰고 싶다는 것이다. 이유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아직도 우리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다른 하나는 글을 씀으로서 자신이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장영희 교수의 말처럼 글을 쓰는 것은 아름다운 빚을 지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 스스로 위로를 많이 받았다. 그냥 내마음을 글에 그대로 고백했다.독자들은 나의 고해 사제였다. 앞으로 살면서 오랫동안 조금씩 분할해서 갚아볼까 한다. 빚을 갚기 위해 남의 삶에 조금이나마 어떤 보탬이 있었으면 좋겠다. 혹시 무심히 글이 한사람에게라도 상처를 주었거나 누군가를 힘들게 하였다면 용서를 빈다.’  

성경에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리라<누가 7:47>”. 라고 했다. 진실로 그러하다.  나는 침묵의 다수 무서움을 안다. 하찮은 글을 읽으면서 조금의 위로라도 받으셨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침묵 속의 어느 한분이라도 글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받으셨다면 널리 해량하여 주시고 용서를 구한다. 보잘 없는 사람이 준비됨없이 매주 시간에 쫓기어 주저리 주저리 횡설수설한다고 이쁘게 생각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소설가 조정현씨는 <누군나 홀로 나무>에서 더욱 엄격하게 말한다. “선비는 쉼없이 글을 읽을 뿐만 아니라 글을 짓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말로 짓는 원한은 백년을 가고 글로 짓는 원한은 만년을 간다. 글은 무한한 생명력을 갖고 있음으로 함부로 글을 잘못 쓰지 말라는 경고이다. 그래서 선비를 말할 학식이나 글재주보다 꿋꿋하고 단단한 지조와 절개로 이루어진 절개 정신을 앞세웠는지도 모른다. 모든 글은 진실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명제와 일치한다.” 소설가 김훈씨는 쓰는자의 적은 끝끝내 독자들이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영원히 일인대 만인 싸움이다.” 했다. 나는 그렇게까지 비장하고 거창하게 글쓰는 작업을 옥죄이고 싶지는 않지만  좀더 책을 많이 읽고 느끼는 바를 여러분들과 <나눔> 작업 정도로 생각할까 한다. 쓰는 초기에는 사업경영이나 마케팅 이론에 대하여 주로 썼지만 지금은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 이민들의 이야기를 주로 쓴다 이유는 글을 쓴다는 것은 인류나 인간(Man) 대해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람(man) 대해 쓰는 것이다.’라는 글에 동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같은 시대에 이민와서 자식 키우며 힘들게 살아가는 이웃으로 받아주시고  지속적인 사랑과 연민으로 글을 읽어 주시길 부탁드린다.

 

가시고기 (06-28-2010)

얼마전 블로그를 뒤적거리다가 <가시고기의 일생>이라는 다큐를 본적이 있다. 이른 봄이 되면 동해 동종창 하구에 가시고기가 나타난다. 일생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살다가  산란기가 되면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둥지를 짓고 새끼를 키우는 유일한 어종이다. 수컷은 암컷의 등을 자극해 암컷의 산란을 돕는다. 수컷이 사정해 암컷이 알을 산란하면 암컷은 둥지를 떠난다. 수컷 혼자 남아 수초로 위장막을 설치하고 알 냄새가 나지 않토록 날개로 계속 부채질을 한다. 바다에 안전한 곳은 없으므로 수컷이 둥지를 지키는 것이다. 한번에 1,000 여개의 알을 낳는데 알이 떠내려가지 않토록 점액질을 분비하여 알들을 고정시킨다. 수중 세계에도 밤이 더 무섭다. 그래서 수컷은 밤에 더 바쁘다. 등에 가시를 세운채 알을 지킨다. 24시간 단 1초도 잠을 자지 않는다. 산란 8일째가 되면 알들의 부화가 시작된다. 수컷은 주둥이로 알집을 눌러 부화를 도와준다. 먼저 깨어난 새끼를 돌보면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알들의 부화를 계속 도와 주어야 한다. 수컷은 이러는 동안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는다. 고기 색깔은 푸른 색으로 퇴색되어간다. 먹지 못하고 자지도 못한 아비는 지너러미도 주둥이도 모두 퇴화되어 없어져간다. 그러는 동안 새끼들은 빠르게 적응해간다. 아비는 모든 것을 다 바치고 생을 마감한다. 치어(새끼)들은 그 죽은 아비의 육신을 먹는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육신을 자식들을 위해 바치는 고기가 가시고기이다.

흔히들 아버지의 희생을 가시고기에 비유하곤 한다. 조창인의 소설 <가시고기>를 보면 첫 문장이 ‘아빠는 멍텅구리입니다.’로 시작한다. 정호연이라는 주인공 남자는 탄광촌에서 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은 아버지로부터 길가에서 버림을 받는다. 갖은 고난으로 성장하여 촉망받는 시인으로 성장한다. 결혼하여 아들을 얻었는데 아내는 새로운 사랑을 찾아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프랑스로 떠난다. 열살이 된 외아들은 백혈병에 걸리는데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팔아도 아들의 병은 낫지  않는다. 어렵사리 일본의 골수 기증자를 찾게 되는데 병원비가 없다. 자신이 증오하는 삼류 애정소설도 써보고 졸부의 자서전도 써 보지만 병원비 마련이 쉽지 않다. 결국 자신의 신장을 팔기위해 검사를 받는데 암 말기 판정을 받는다. 최후로 암이 전이되지 않은 부분을 찾게 되고 결국 자신의 안구를 팔게된다. 아들은 골수이식을 받아 기적적으로 회생하게 된다. 이 세상의 유일한 희망이요, 목적이었던 아들을 엄마에게 돌려 보내고 아버지는 죽는다는 슬픈 줄거리이다. 마지막 부분이 이렇게 끝난다. ‘세상에 널 남겨 놓은 한, 아빠는 네 속에 살아 있는거란다…아빠는 언제까지나  너와 함께 앞으로 앞으로 걸어가는 거란다. 네가 지칠까봐, 네가 쓸어질까봐, 네가 가던길을 멈추고 돌아설까봐 마음 조이면서 너와 동행하는거란다. 영원히, 영원히..’ 에필로그  마지막 부문에서는 ‘자신의 아이를 세상에남겨 놓은 이상은, 죽어도 아주 죽는게 아니래..’로 끝난다.

이 세상의 아버지들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낯선 미국땅까지 와서 생고생을 하는 것일까. 내 한몸 살고자 치면 이 막노동같은 삼류 인생을 살고자 했다면 한국에서는 무엇을 해서라도 못살았을까. 말도 못하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냥 바보처럼 ‘허허’ 웃기만 하는 이민의 아버지들은 정말 ‘멍텅구리’인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위해 멍텅구리로 사는지 자식들은 아버지가 죽고나서라도 알기나 할까.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를 보면 한국의 아버지들이 생각난다. 어려운 가정 형편상 고학을 하여 행정고시에 합격을 하여 정부 사무관 생활을 시작한다. 기적처럼 성공한 삶이 시작된다. 현숙한 아내를 맞이하고 딸은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재원이고 아들도 공부 잘하는 고등학생이다. 하지만 지연과 학연이 앞서고 경쟁이 치열한 조직 사회에서  항상 낙오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다. 가족들 눈에는 매일 술에 취해 밤 늦게 귀가하는 무능한 아버지로, 그리고  남편으로 외면당한다. 가족들 누구도 아버지로 남편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모두 각자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항상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오면 조용히 자기 방에 들어가야 한다. 자식들은 친구 아버지와 비교하면서 부족하고 못난 점만 머리 속에 각인되어 간다. 아버지를 원망하고 비난한다. 모든 일은 엄마와 상의한다. 아버지가 자식들을 위해 해 준것이 없는  꼴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친구 병원에 가서 종합 검사를 받게 된다.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는다. 수술이나 방사능 치료조차 무의미한 5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가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사랑을 찾으려 한다. 가족들도 아버지가 얼마 남지 않는 시한부 인생이라는 판정을 알게 되며, 후회하고 아버지와의 마지막 사랑을 하게 된다. 이 책에는 ‘사람의 냄새’라는 주제가 여러번 언급된다. 이런 대목도 있다. ‘슬픔은 짧을수록 낫지 않을까. 결국에는 잊어버릴 것을, 또한 잊어야 하는 것을 무엇하러 미리부터 잊혀지지 않는듯 잊는 연습을 해야 하는가.’

나는 세상의 아버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국인의 아버지들, 특히나 이민온 한국 아버지들을 보면 괜히 안스럽다. 어쩌면 내가 겪어야 할 이 시대의 같은 아픔인지도 모른다. 왜 현 시대를 살아가는 아버지들은 이토록 왜소하고 초라한 모습들일까.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아버지는 ‘이래야 되고 저래야 하고, 무엇이 모자라고 무엇이 못났고…가족을 위해 무엇을 해 주었는데.. 남들 아빠처럼 잘난게 뭐 있는데..등등 무슨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 수많은 힐난을 받아야  하는가. 아버지는 아버지 그 자체만으로도 대접받아야 한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이순간까지도 아버지는 가시고기처럼 자기 목숨을 걸고 가족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어떤 미소 (07-06-2010)    

사람들은 미소짓는 얼굴을 좋아한다. 처음 보는 얼굴이데도  환한 미소를 마주하면 내 기분마져 환해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미소속에 가리워진 그 사람의 아픔은 알 수가 없으며, 애써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나의 청년 시절에 프랑스와즈 사강이 쓴 <어떤 미소>라는 소설이 있었다. 사랑해서는 안되는, 헤어져야 하는줄 알면서도 남자 친구의 외삼촌이며 유부남을 사랑한다. 죽을 만큼 사랑했던 유부남과 헤어지면서 돌아서는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미소가 있었다. 사랑에 빠진 젊은 여자의 복잡한 내면 세계를 그린 작품으로 기억된다. 흘러간 미국 팝송에도 <어떤 미소>라는 노래가 있다. 한국의 유행가 가사에도 “웃는 얼굴 다정해도 믿을 수 없어요”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그리고 나에게도 잊혀지지 않는 <어떤 미소>가 있다. 가게를 팔아달라는 어느 장로님의 부탁을 받고 가게를 처음 방문한 날은 목련꽃 피는 따뜻한 봄날이었다. 카운터를 보고 있는 한 아가씨를 처음 보게 되었다. 얼굴도 이쁘지만 입가에 짓고 있는 미소는 어찌나 화사한지 가히 따뜻한 봄날의 꽃잎 같았다. 그 후에 알고 보니 그 아가씨는 그 장로님의 큰 따님이었다. 참으로 화목한 가정이었고 인자한 아버지였으며 예쁘고 착한 딸이었다. 그로부터 가게를 팔아드리기 위해 여러 바이어를 연결시켰고 계약이 될 것처럼  이루어지다가 무산되고 좀처럼 팔리지가 않았다. 그렇게 일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그동안 그 가게를 방문한 횟수만 수십차례는 되었을텐데 그 큰 따님은 언제나 밝은 미소로 나를 반겨주는 것이었다. 장로님은 여러가지 집안 사정이라고만 말할뿐, 가게를 빨리 팔아달라고 부탁하셨으므로 여간 송구한 노릇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날 장로님은 나와 차를 한잔 마시자고 하시면서 자신의 골방으로 나의 손을 잡아끄신다. 그러면서 가게를 꼭 팔아야 하는 이유와 30여년 동안 고국을 떠나 이민와서 살아온 이야기를 하신다. 어느듯 검게 그을은 얼굴의 굵은 주름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무슨 말로 위로도 할 수가 없기에 그냥 듣기만 하였다. 30여년의 긴 아픔을 어찌 한,두시간에 설명이 되겠냐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이야기를 다 들어주는 것 밖에 달리 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 남미로 이민간 이야기, 그 곳에서 겪었던 아픔들, 어린 자녀들의 미래, 사기당한 이야기등, 결국 자녀들의 장래를 위하여 다시 미국으로 이민오게 된 과정, 영어를 할 줄 모르는 부모님들 때문에 학업을 중지하고 이 가게에 볼모(?)로 붙잡혀 있는 큰 딸에 대한 미안함, 죄책감등으로 그 늙은 아버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아버지를 더욱 미치게 하는 것은 이날까지 그런 무능한 아버지를 한번도, 단 한번도 원망하지 않는 큰 딸이었다고 한다. 영어를 거의 못하는 늙은 부모와 그 가게가 없으면 먹고 살 방법이 없는 경제적 한계와 그 가게를 팔고나면 무엇을 해서 먹고 사는가하는 두려움으로 그 큰딸을 서른이 훌쩍 넘기도록 볼모로 잡고 있었다며 꺼억 꺼억 울음을 운다. 꽃다운 나이에 누군들 사랑하기를 원치 않았겠으며 결혼하고 싶지 않았겠으며, 공부하고 싶지 않았을까. 이쁜 옷도 입고 파티에도 참석하고 돈 걱정, 세상 걱정 없이 철부지 공주처럼 살고 싶지 않았을까. 오직 집, 가게, 교회만을 왔다 갔다 하며 그 아까운 청춘이 허물어지는 것을 바라보야만 했던 그 딸의 아픔은 어떠했을까. 왜 아버지가 밉고 하나님이 원망스럽지 않았겠는가. 같은 또래들은 성공한 사회인으로 살고 있는데 자신만이 연민의 발목에 잡혀 꼼짝 못하는 자신이 죽도록 원망스럽지 않았겠는가. 부모에게 한마디 원망도 하지 않았다면, 원망을 받아줄 남자 친구도 없었다면, 그녀는 아마도 아무도 모르는 십자가 앞에 엎드려 수많은 세월을 울며 매달렸을 것이다.

나는 그 장로님의 평생 살아온 이야기를, 세월의 아픔을 두어시간 듣고서는 말없이 나왔다. 그 가게를 나오면서 그 따님에게 ‘모든 일이 잘 될겁니다. 힘내세요’라고 말하니 그녀는 오늘도 역시 환한 <어떤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렇다. 저 미소 속에 그녀만의 눈물이 있었다. 저 미소속에 그녀만의 아픔이 있었다. 나는 그녀의 미소만 보았을 뿐이다. ‘앞으로도 나는 저 미소만 알고 있는 것으로 하자. 그 뒤에 감추어진 눈물과 아픔을 잊어버리게 하자’라는 결심으로 그 가게문을 나왔다. 그날 뒤로 정말 1개월만에 그 가게는 팔렸다. 가게를 사신 분도 너무 좋은 분이고  좋은 가게를 사게 해 주어 고맙다고 지금까지 인사를 받는다. 그 뒤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 따님은 좋은 남자를 만나 서 결혼했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화창한 날이면 그녀의 화사한 미소가 떠오른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우리의 딸들이, 아들들이 자신의 꿈을 잠시 접어두고 부모님들의 가게에서 일하고 있다. 나의 딸들도 이민 초기에 가게와 나와서  일들을 했다. 특히 큰 딸의 아픔이 컸을 것이다. 어느 이민 아버지라도 그 자식들에게 씌웠던 멍에는 평생 지울 수가 없다. 특히나 달빛 흐른는 밤에 혼자 술잔이라도 기울이면 아버지의 목구멍을 타고 술은 눈물이 되어 흐른다. 이민의 딸들아, 아들들아, 지금 비록  힘들고 어렵더라도 결코 꿈을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기회는 기다리는 자에게만 반드시 찾아온다. 아직도 너희에겐 아름다운 세월들이 새털처럼 많이 남아있지 않니. 하나님을 원망해서도 안되고 가여운 부모님을 미워해서도 안된다.  부모님도 너희와 똑같은 미완성이며 결함투성이라는 걸 안다면 네가 철들어간다는 증거이다. 부모가 너희를 껴 안았듯이 너희도 부모를 껴 안을줄 안다면 철이 든 것이다. 정말 힘들때는 사람에게 기대지말고 십자가 앞에 엎드려 실컷 울으려무나. 그 분은 배신하지 않는다. 그 분은 비밀을 지켜 주신다. 그 분은 변함이 없으시다. 그 분은 항상 네 옆에 계신다. 그 분은 반드시 너를 도와 주실 것이다. 하물며 착한 너희들을 모른채 외면하시겠니. 절대 그런 일은 없다. 다만 너희들이 기다리지 못하는 것 뿐이다.참고 인내하며 때를 기다리자. 입가에는 환한 <어떤 미소>를 잊지말고 말이다. 

 

 행복의 저울 (07-13-2010)

신은 누구에게나 사람의 마음에 ‘행복의 저울’을 주었다고 한다. 신은 인간에게 행복이라는 놈도 주셨고 불행이라는 놈도 주셨는데 인간  스스로가 언제라도 행복한지 불행한지를 측정할 수 있도록 저울을 주셨다는 것이다. 요즈음 말로 바꾸면 ‘행복 자가 측정기’인 셈이다.그런데 대부분의 인간들은 행복의 무게가 50%, 불행의 무게가 50%인 커트라인 중간층에 가장 많이 밀집되어 있다고 한다. 따라서  행복의 무게추가 1%만 행복 쪽으로 가면 행복지수가 51%가 되어 저울이 행복쪽으로 기울게 된다. 그러면 자신은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하늘을 날듯이 기뻐하고, 있는 잘난척은 다하고 다니면서 신께 감사의 기관총을 쏘아댄다.자신은 신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나 뭐라나 하면서 주위 사람을 짓밞고 다닌다. 그러다가  1%가 불행쪽으로 가서 불행지수가 51%되면 자신은 불행한 놈이라고 땅이 꺼져라 한숨지으며 신은 죽었다는둥, 종교는 마약이라는 둥, 신을 자기의 몸종 부리듯이 동네 강아지 끌고 다니듯이 투덜대며 원망한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신은 장난끼가 심하신 것 같다. 애시당초 인간이라는 놈을 만드실 때 유전자나 DNA 싹수를 보시고 행복하게 살 놈과 평생 불행하게 살 놈의 행복지수와 불행지수를 고정시켜 버렸다면 인간 각자가 행복하다고 착각하고 살거나 팔지거니 하며 체념이라도 하면서 살텐데 말이다. 그런데  그놈의 행복 저울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조석으로 바뀐다. 아침에 출근할 때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으로 착각하고 아내의 온 얼굴에 키스 세례를 퍼부으며 사랑한다고 ‘있는 애교, 없는 애교’ 다 떨면서 출근했다가 회사에서 직속상사에게 한마디 꾸중이라도 들으면 집에 들어와 ‘살 맛이 없다는 둥, 이민을 가자는 둥, 일등만 아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둥’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전락시키면서 애꿎은 소주만 작살낸다.

그러니 사람의 행복은 지수가 100%가 되어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1%만 더 행복을 늘리던가 아니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1%만 줄여도 ‘행복의 저울’은 행복 쪽으로 기우니 행복한 사람이 되기 참 쉬운 노릇이다. ‘천국과 지옥은 내 마음 한번 어떻게 먹느냐에 달라진다’는 말씀이 여기에 숨어있었던 것은 아닐까. 역사적으로 보아도  불과 수십년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각종 첨단 문명의 혜택을 보고 있는 현대인들은 왜 자살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것일까. 순간적인 불행은 단지 1%가 부족할 뿐이데 99%가 부족하다고 ‘행복의저울’을 잘못 측정하여 삶을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 행복과 불행은 한 바구니에 담겨져 있다고 한다. 또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한다. 같은 동전이지만 내가 보고 있는 쪽의 동전 면이 행복이면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면 불행 쪽의 동전 면을 행복 쪽의 동전 면으로 스스로 돌려 놓으면 된다.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이 비교함으로 발생한다.. 첫째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목표와 비교하여 현재 자신의 위치를 비관하고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즉 자기 자신이 경쟁 대상이고 비교 대상이다. 자의식이 강하고 자본주의 교육이 요구하는 물질적 목표와 성공 욕구가 강할수록 행복 만족도는 낮아질 수 밖에 없다. 둘째는 주변 사람들과의 비교에 따른 좌절이다. 친구, 직장 동료, 학교 동창, 자기 나이 또래의 주변 사람들, 종교나 취미 단체에서 만나는 이웃들과의 단순 비교이다. 모두가 스쳐 지나가는 일순간의 인연들 뿐인데 그 사람들과 비교하여 불행하다고 판단하고 자살까지 한다면 너무 한심한것은 아닐까. 현대인은 물질적으로는 더 풍부하고 편리하게 되었지만 행복지수는 반대로 더 낮아졌다고 한다. 누구는 올림픽 구호가 현대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문구라고 한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에 대부분의 현대인은 생각없이 몰려다닌다는 것이다. 한가지 더 추가하면 ‘더 많이’ 가 빠질 수 없다. 그렇게 한평생을 정신없이 몰려다니다가 죽음의 문턱에 도달해서 그때서야 ‘나는 누구였던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던가’를 생각하고 후회한다는 것이다.—“Too  Late”              

프리스트 카터가 쓴 자전적 소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 미국 인디언들이 고통을 참는 이야기가 나온다. 인디언들은 인간에게 두가지 마음이 있는데 하나는 육신의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의 마음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고통을 받으면 영혼의 마음이 몸 밖으로 빠져 나간다. 영혼의 마음은 고통받는 육신의 마음을 잠재우고, 대신 몸 밖으로 빠져나간 영혼의 마음으로 육신의 고통을 느끼지 않고 육신의 고통을 바라 볼 뿐이다. 인디언들은 말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두개의 마음을 갖고 있다. 하나는 몸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꾸려가는 마음이다. 다른 마음은 영혼의 마음이다. 몸을 꾸려가는 마음이 욕심을 부리고 교활한 생각을 하거나 남을 해칠 생각과 남을 통해 이익을 볼려는 생각을 하면 영혼의 마음은 점점 졸아들어 밤톨보다 작게 된다. 몸이 죽으면 몸을 꾸려가는 마음도 죽게 되지만 영혼의 마음만은 그대로 남는다. 사람은 누구나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밤톨만한 영혼을 가지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면 세상의 어떠한 것도 이해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영혼의 마음은 근육과 비슷해서 쓰면 쓸수록 커지고 강해진다. 마음을 크고 강하게 가꿀 있는 비결은 오직 한가지, 상대를 이해하는데 마음을 쓰는 뿐이다.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영혼의 마음으로 가는 문은 절대 열리지 않는다.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 이해하는 마음이 생기고 이해와 사랑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부터 행복 1% 이동하기 시작해 보자. 당신의 <행복 저울>  분명 행복한 사람으로 기울어 있을 것이다.

 

등목 (07-26-2010)

오늘은 무진장 더운 날씨이다. 며칠간 계속 화씨 100도가 넘으니 섭씨 37도를 넘은 셈이다. 이런 더운 , 세탁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나 그릴같은 불판 앞에서 일하는 교민들을 생각하면 덥다는 표현조차 사치스럽다. 세탁소 내부의 작업온도는 화씨 130도를 넘는다고 한다. 더욱 대단한 사람들은 그렇게 반나절을 찜통같은 더위 속에서 몸이 소금에 져린듯 흘리며 일하고 나서도 곧바로 골프장으로 직행하는 사람들이다. 평생 프로 골퍼 되는 것이 염원인양 있기만 해도 땀이 흐르고 정신이 몽롱해 지는 불볕같은 땡볕에 나가 골프를 치시는 분들의 체력은 철인 5 경기에 나가도 손색없는 정도이다. 가히 배달의 자손답다는 경외감마져 든다.

이런 더운 날씨에는 잊혀져 가는 등목 생각난다. 이제 한국도 대부분이 아파트 생활을 하고 집집마다 욕실과 샤워시설이 되어 있으니 등목이라는 단어조차 요즈음 아이들에게는 생소할 것이다. 나의 청소년 시절에는 여름철 등목은 하루 일과중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남자들은 바깥에 나갔다 오면 웃통을 벗고 등목을 다음에야 다른 일을 있었다. 집안의 사내라는 사내는 하루 저녁일과가 등목으로 시작한다. 등목의 휘날레는 아버지이시다. 아버지가 저녁에 퇴근하고 돌아오시면 어머니가 아버지의 등목을 치신다. 딸들은 수건을 들고 있고 아버지는 아이구 시원하다 연발하시면서 천천히 물을 부으라고 엄살을 하신다. 어머니는 무슨 엄살이 그렇게 심하시냐면서 몇차례고 차가운 물을 등에 부으신다. 자식들은 그런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깔깔거리며 웃는다. 아버지의 등목이 끝나면 가족들은 대청마루에 마련된 저녁 밥상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저녁 식사를 한다. 서쪽 하늘에는 노을이 지고 가족들의 하루 일과가 아버지의 질문을 중심으로 한명씩 보고를 하는 순서로 이어진다.

그때가 불현듯 너무 그리워진다.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집집마다 등목을 치는 소리가 허름한 담장 너머로 들려오고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퍼져난다. 등목을 치지 않으려고 도망치는 꼬마 녀석들과 잡으려고 쫓아가는 옆집 아주머니 모습도 그립다. 그렇게 집집마다 저녁을 마치고 나면 동네 평상에 나와서 아줌마들의 수다가 시작된다. 어느 집에서 제공했는지는 모르지만 수박이라도 한덩이 있으면 동네 잔치 분위기다. 다른 집에서는 옥수수를 내오고  어떤 집은 고구마를 내온다. 꼬마들은 모여서 술레잡기나 깡통차기를 하면서 신나게 논다. 그렇게 밤은 깊어가고 한집, 두집 잠자러 집에 들어가면 하루가 져무는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등목 마음 생각해 본다. 아들놈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니 아들의 등목을 치실 마다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아들은 어머니의 거칠어가는 까칠한 손길을 등에서 느꼈을 것이다. 엎드려 등물을 받으면서 어머니의 사랑과 한숨과 아픔을 느꼈을 것이다. 집안에 걱정이 있거나 슬픔이 있을 때에는 아들은 엎드린 어머니가 부어 주시는 등물과 함께 말없이 눈물도 흘렸을 것이다. 언젠가는 가난에서 벗어나 어머니를 호강시켜 드리겠다는  효심도 솟았을 것이다. 한편 어머니는 아버지의 등에 물을 부으실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남자를 보았을 것이다. 등과 어깨죽지의 근육은 점점 말라가고 젊은 시절 호기롭던 사내의 지쳐가는 모습을 느꼈을 것이다. 사랑은 세월의 아픔과 함께 익어가는 것인가. 늙어감과 작아짐, 초라함과 허약함, 침묵과 소심함, 허허로움과 삶의 부담감 같은 것들이 세월과 함께 가까이 다가옴을 어머니는 아버지의 등에서 알았을 것이다.

또 등목은 가족들끼리만이 아니라 친구간에도 우정의 가교역활을 했다. 여름방학때 친구집을 찾아 가거나 학교 도서실에서 만나 방학 숙제를 할려면 운동도 빼놓을 수 없다. 혈기 왕성할 때이니 한여름 긴 시간에 죽치고 공부만 할 수 있었겠나. 한바탕 공을 차고 놀면 우물가나 수돗가에 몰려가 웃통을 벗어던지고 서로에게 등물을 쳐준다. 서로의 등을 문질러 주면서 말없는 우정은 깊어만 간다. 서로 장난치느라 바지는 반쯤 젖어있기 마련이다. 등목을 마치고 나무 그늘에 앉아서 서로의 꿈도 이야기하고 누구에게도 말못하는 고민도 이야기한다.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도 한다. 그때 나이에는 여자의 사랑보다는 친구의 우정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것으로 생각했었다. 꿈들은 진실했고 건전하였으며 웅대했다. 비록 까까머리 어린 촌놈들이었고 시대적으로는 힘들고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꽤나 생각들이  진지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 교복은 명예의 상징이었고 책임의 징표였다. 지금은  사회 각 지도층에 있는 놈들로 부터무엇을 하고 사는지 모르는 놈들까지  각양각색 모양으로 흩어져 살지만, 적어도 그 시절만큼은 아름답고 순수한 친구들이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친구가 있다. 교외에 집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농대 교수이면서 조그만 과수원을 갖고 있었다. 그 집에는 깊은 우물이 있었는데 여름철 등목은 우물물이 제격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정신이 번쩍 들게 머리까지 등목을 하고 그늘 평상에 앉아 매미소리를 벗삼아 책을 보는 즐거움은 지금도 너무 그리운 기억이다. 게다가 친구 어머니가 말아 주시는 열무 국수맛은 지금 생각해도 일품 별미인것 같다. 등목을 생각하면 까맣게 잊고 지내는 옛 친구들이 불현듯 보고 싶어진다. 이제는 이름들마져 가물가물하지만 문둑문득 그리워지는 것은 이국 땅에서 사는 외로움때문일까. 아니면 한국에 홀로 계신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일까.  지금이라도 달려가  ‘어무이, 저 왔심니더. 등물 좀 쳐 주이소’ 하며 어머니께 나의 지친 등을 내밀고 싶다. 왜냐하면 등목은 혼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등목은 사랑하는 사람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를 온전히 맡기고 순종할 수 있어야 제대로 등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라도 스스럼없이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고 나를 감싸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등목’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사이에서만 일어나는 한국인들의 그리운 모습이다.  

 

두드려라, 열릴때까지 (08-02-2010)

이 제목은 한비야씨가 쓴 <그건 사랑이었네> 중에서 나오는 소제목을 따 온 것이다. 성경에서 ‘두드려라, 그럼 열릴 것이요’에서 인용한 것이겠지만 성경 말씀대로라면 언제까지 몇번을 두드려야 열린다는 말씀이 안계신다. 한두번 두드려서 안열리고 ‘아직 때가 이르노니 참고 기다려라’ 한다고 해서 기다리면 요즈음같은 불경기에 목만 바짝바짝 타들어 갈 것이다. 차라리 손 놓고 경기 좋아질 때 까지 기다리기 보다는 열릴 때까지 계속 두드려 봄은 어떨까.

요즈음 불경기 같은 시절에 가게 매매가 되느냐고 손님들은 물어 보신다.  저같은 경우에는 이미 올해 상반기에 작년 일년 매출을 넘어섰다. 모두들 힘들어 하실 때 사실대로 말씀드리기가 거시기해서 거시기하다고 얼무버리지만, 전반적 매매 시장의 환경 여건은 최악이다. 무엇보다 비지니스 융자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이다. 더 중요한 것은 언제쯤 은행융자가 풀릴것이냐 하는 점일 것이다. 이것은 일개의 일반은행들이 결정할 수 없는 미국 경제와 세계 금융시장이 맞물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08년 하반기 세기적 금융위기로 미국은 엄청난 자금을 풀었지만 정작 그 막대한 달러는 시중 경제를 살리는데 투입된 것이 아니라 월가의 대형 은행들 빚보증하는데 대부분 소요되었다. 거대 은행들의 헤지펀드 놀이에 세계 금융과 지구인들이 농락당했다. G20대부분의 국가들이 자국의 금융 경제를 지키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풀었다. 그러면 당연히 경제가 회복되어야 하고 풀었던 자금을 회수했어야 한다. 점차적으로 금리는 인상되어야 하며 대출 규제는 강화되어야 한다. 소비자 물가는 상승될 것이며 달러가치는 하락할 것이다. 달러 가치가 하락하면 미국의 수출은 경쟁력을 가질 것이며 미국 경제는 호전되어야 한다.

그런데 작금의 상황을 보면 금리는 인상할 수 없으며, 소비자물가는 오히려 하락하고 있다. 미국 달러도 하락하지 못한다. 경기회복은 커녕 디플레이션을  각계에서 우려한다. 일본의 장기 침체와의 유사성을 우려한다. 부동산 가격이 주요 핵심변수로 부각한다. 미국과 유사한 산업구조인 유럽경제가 먼저 무너졌기 때문이다. 할수없이 중국의 위안화 눈치만 본다. 과거처럼 중국을 협박해서 눌릴수도 없다. 유럽은 미국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그림자정부의 사채를 써 왔던 국가들이다. 거기다 사회보장제도가 미국보다 훨씬 잘 되어 있다. 유럽은 살기 좋은 나라이지만 살기 좋다는 그 뒤에는 엄청난 국가 빚이 있다.  미국도 유럽도 이미 거대 산업 생산국가가 아니다. 주요 고부가치 첨단 산업과 서비스산업과 다국적 기업들의 일차산업을 제외하고는 아시아에 대부분 하청을 주었다. 그 하청업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자생력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이 금융위기을 가장 빨리 벗어난 국가들은 중국, 한국을 위시한 산업생산국가이었음이 이를 반증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미 거대한 소비국가이다. 소비자가 눈먼 돈이 생겨야 소비를 할 것이 아닌가. 가장 손쉬운 방법이 부동산 경기의 거품이다. 내가 주급생활해서 10만불을 만들려고 하면 얼마나 어려운지 이민생활을 하는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자고 나니까 집값이 올라 있고 은행에서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준다면 그것처럼 공돈벌기가 쉬운 것이 없다. 그런 공돈으로 마구 소비한 것이다. 이 문제는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향후 미국 정부는 집에 대한 융자를 더욱 까다롭게 할 것이다. 또다시 부동산 거품으로 경기를 부양할 수는  없다. 집을 살 능력이 없는 사람이 집을 샀기 때문에 생긴 문제가 서브프라임이다. 오바마는 집 융자는 조이고 임대 주택쪽을 확산한다고 한다. 또 세기적인 금융 규제법안이 통과되었다. 그 법안의 핵심은 은행 서로가 빚보증 서주면서 위험한 펀드 불꽃놀이를 못하게 함이다. 은행 고유업무와 투자 업무를 분리시킨 것이다. 그러면 은행은 본연의 예금과 대출로 돈놀이를 해야 하는데 빚갚느라고 돈이 없고 금리는 바닥이다.

결국 미국 정부가 그림자 정부를 통해 다시 한번 막대한 달러를 찍어내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제 3의 산업을 창출해서 돈을 만들어야 한다. 친환경 산업이나 생명공학 산업이나 무엇이 되든, 미국은 무식한 전쟁놀이를 제외한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달러를 더 찍어낼 것이라는 예측은 이번 연방 준비 이사회에서 금리를 당분간 동결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은행들이 보유하고 있는 차압 부동산들이 어느정도 소진되고 정부에서 막대한 돈을 다시 은행에 풀기 전까지는 돈놀이 하는 은행으로서는 과거같은 대출을 해 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상당기간 은행 융자는 어려울 것이라는게 내 개인적 생각이다. 정부의 과도기 정책은 빈부격차를 가속화시킨다. 또 불경기일수록 서민층이 과도한 융자(빚)을 얻어 가게를 사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다. 자기 분수에 맞게 눈높이를 낮추는것이 현명한 투자이다.

셀러 입장에서는 장사는 안되고 매상은 자꾸 떨어지니 가게 시세는 자꾸 떨어진다. 그래도 개인적으로 급한 사정이 있어 팔려고 매물로 내놓았는데, 더 급한 매물에 밀려 손해보고 파는 것 조차 쉽지 않다. 은행 융자가 어려우니 오너융자를 해 주지 않으면 팔기조차 어렵다. 그런데도 바이어는 망설인다. 경기가 더 나빠져서 매상이 더 떨어지면 어떡하나. 매물은 많고 살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내일 앞을 누가 장담하겠느냐만, 그래도 가게를 살 사람은 산다. 올해 들어와 매매된 가게들을 보면 모두가 좋은 조건으로 가게를 샀다. 같은 매물이지만 작년, 재작년만에 비교하면 파격적인 가격과 오너 융자 조건들임을 해당 브로커는 알고 있다. 손해를 보고 가게를 파는 사람들이야 각자 피치못할 사정이 있어 가게를 판다지만,  파격적인 조건의 가게를 사지 않고 망설이는 바이어들은 무슨 속셈인지 잘 모르겠다. 두드리기는 하는건지, 한번 두드려보고 안되니까 장기휴가 떠난건지 잘 모를 일이다. 하기야 모두 제때에 <사고팔고>를 잘 했으면 모두 부자되었겠지만 결과는 시간이 지나 보아야 알 수 있으니까 세상살이가 오묘한 것이 아닐까.  

 

 백수의 여유 (08-14-2010)

불경기가 길어지면 가게 주인이나 일하는 종업원이나 힘들기는 마찬가지이다. 매상이 줄어드니 일의 양은 줄어들고 가게 수익도 줄어들기 마련이다. 주인은 종업원의 인원 수를 줄이는 것이 당연하고 해고당하는 종업원은 늘어난다. 남아 있는 종업원의 일의 양은 늘어나지만 불평조차 할 수 없다. 아니면 근무 시간을 줄여버리므로 생활하기가 이리저리 모두가 힘들기는 마찬가지이다. 한국은 청년백수가 3명중 2명이고 미국은 2명중 1명이라고 한다. 백수와 실업자의 차이는 일자리를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을 백수라고 하고, 일자리를 찾아도 일이 없어서 쉬고 있는 사람을 실업자라고 하며 실업자에게는 실업 수당이 일정기간 지불된다는 것이 다르다. 백수거나 실업자이거나 간에 어렵게 대학 공부까지 마쳤는데 일자리가 없어 집에서 빈둥빈둥 놀고 있는 자식을 바라보는 이민의 부모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할 수 없어 아버지 가게에 나와 일하는 모습을 보아도 속이 뒤집히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백수라고 아무런 일자리를 찾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생의 황금같은 백수기간 동안에 여유를 갖고 앞으로 선택할 직업에 심사숙고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한평생 살아가면서 일을 하고 산다. 대학 졸업하고 군대 갔다오고 삼십부터 일한다고 하더라도 30년 길어야 40년 일을 하게 되는데 그 기간동안 나만을 위한 휴가는 얼마나 될까. 누구나 이런 꿈을 꿀 것이다. 이번 일만 끝나면 휴가를 내어 그동안의 지나온 일들을 정리해 보고, 인생 설계도 다시 해보고, 읽고 싶은 책도 한가롭게 읽고, 가고 싶은 곳도 시간에 구애받지않고 여행하고,  옛 친구도 만나보고, 그동안 신세진 사람들을 찾아가 대접도 하고, 주위의 힘든 사람들을 위해 봉사도 하고,  한평생 함께 사는 아내와도 연애시절로 돌아가 사랑하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어할 것이다. 그것을 안식년이라고도 말하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생명체는 안식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심지어 논과 밭도 일정 주기 단위로 쉬어야한다. 그래야 재충전이 되고 새로운 에너지가 생기고 계획과 목표를 재점검할 수 있고 감사할 시간을 가질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그리 녹녹한가. 현대문명은 인간이 편리하기 위해 급속히 발전한다. 그러나 첨단화 될수록, 세계화, 국제화 될수록 지위가 올라 갈수록, 돈이 늘어갈수록 점점 더 바빠진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바쁘다 바뻐’를 입에 달고 산다. 심지어 ‘바쁨 증후군’까지 있어 잠깐 한가한 시간이 생기면 불안해 하는 것이다. 무언가 남들보다 뒤쳐지는 것 같고 그 대열에서 낙오되는 것 같고 손해보는 것 같아 안절부절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그런 여유를 허용치 않는 것이다. 또 그런 안식년의 기회가 주어져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방황할 것이다.

나에게도 실제 비슷한 기회가 주어진 적이 있었다. 20년전 대기업 부장 시절에 운이 좋게도 (우리 교회 목사님은 행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싫어하시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바꾸겠다.) 사업실적이 좋아 포상휴가를 2주일 받은 적이 있다. 사업 파트너 회사(다국적 기업)에서 모든 일체 비용 (비행기값, 숙식비 일체, 이동 경비, 팁,심지어 아이들을 돌보는 한국의 파출부 비용까지 )을 지불하므로 우리 부부는 몸만 가면 되었다. 장소는 지도상에 잘 나오지도 않는 카리브해의 작은 섬이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곳에서 선진국 비밀 정상회담이 가끔 열리는 곳이라고 한다.

도미니카에서 비행기를 타고 들어가는데 그곳은 말그대로 천국이었다. 음식과 술은 얼마든지 있다. 매일 특선요리들이 새롭게 선보인다. 식사를 하는 장소도 내가 결정할 수 있다. 침실, 해변가, 식당 어디서나 가능하다. 자고 싶은 시간에 자고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면 모든 것은 준비되어 있다. 요트를 타고 바다에 나가고 싶으면 최신 요트가 준비되고, 말을 타고 들판을 산책하고 싶으면 말이 준비된다. 바다 낚시, 골프는 물론 어떠한 운동도 그림같은 장소에서 즐길 수 있다. 사우나를 비롯하여 카지노도 있다. 에메랄드와 코발트 빛깔의 바다수중에서 스킨스쿠버도 즐길 수 있다. 식사할 때에는 항상 라틴계 음악으로 악단들이 감미로운 생음악을 연주한다. 프랑스령이었는데 모든 물품은 면세여서 쇼핑의 천국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우리 부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 이외에는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부부가 함께 취미 생활을 해 본적도 없고, 부부 단 둘만 있어 본 기억이 까마득하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몰랐다. 손에 쥐어주어도 먹지 못하는 바보가 따로 없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으로는 불안했다. 평생 2주일의 긴 휴가를 쉬어 본적이 없고 돌아가서 책상에 쌓여 있을 일들을 생각하는, 휴가중에도 일을 생각하는 일중독자였던 것이다. 그래도 그 때 2주일의 환상적인 휴가 덕분에 20년이 지난 지금도 쫓겨나지 않고 밥을 얻어 먹는지도 모른다.

이민의 생활은 대부분 대동소이할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서 가게 갔다가 저녁에 퇴근해서 돌아오면 밥 해먹고 설겆이하면 저녁 9시다. 씻고 드라마 한편 보면 11시이고 그러면 자야 또 내일 일을 나갈 수 있다. 하늘이 두쪽이 나도 가게문은 닫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교회 행사가 많으면 일주일이 한달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른다. 조용히 책을 읽고 묵상한다는것은 사치에 가깝다. 자식들하고 심중담론을 할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우리 교회 도서관은 지역의 자랑거리인데도 책을 빌려가는 성도는 교인의 10%도 훨씬 못미친다. 그것도 대부분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다. 모르긴해도 이민자들 중에 일년에 책 한권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일 것이다. 그렇게 산다. 왜 바쁘게 사는지도 모르면서 먹고 살기 위해 그렇게 바쁘게 산다. 가끔은 ‘이건 아닌데…’ 후회하면서도 할 수 없어 바쁘게 산다. 그것은 바쁘게 살 수 밖에 없는 형틀에 자기 자신을 묶어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이라도 무조건 가게 문 닫고 아내와 함께 단둘이 일주일 휴가라도 같다오면 가게가 망하고 지구의 종말이 올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