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 칼럼 2017

** 모든 저작권은 윌리칼럼 저자인 이위식 (Wi Sik, Lee)에게 있으므로 저자의 서면 동의 없는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모든 윌리 칼럼은 미국 Korea Phila Times (주간필라) 신문에 매주 해당 날짜에 출간된 것임을 밝힘니다. **

 

 보내고  맞이하며 (12-29-2017)

여러분 모두 2017년 한해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고맙고도 감사했습니다. 2018년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가족 모두 행복하시길 소망합니다.

어쩌면 연례행사 처럼, 또 2017년 한해를 보내고 새로운 2018년을 맞이해야 한다. 흔히들 송구영신 (送舊迎新)이라고 한다. 낡은 것, 옛 것은 보내고 새로운 것, 미래의 것을 맞이한다? 글쎄? 과거가 없는 현재가 있으며, 현재가 없는 미래가 있을까? 삶이 살아가는 과정 (processing) 이라고 한다면 삶은 끝맺음이 아니라 이어짐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지나간 한해를 끝맺으려 하며 잊으려고 하는가? 삶의 고통 때문이 아닐까?  일본 문화에서 이어온 망년회 (忘年會) 행사도 마찬가지다. 한해 동안의 노고와 고통을 잊어버리자는 의미로 술과 춤으로 격려한다. 한국 기독교에만 있는 <송구영신 예배>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영원불멸의 신에게 시간이 있을 것으며, 어제 오늘이 있을까? 하물며 묵은해와 새해가 무슨 의미일까? 하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유달리 삶의 굴곡도 많고 고통도 많고, 그래서 한(恨)도 많다. 그래서 보내려 하고 잊으려 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라도 있다면 <보내고 새롭게 맞이하려 한다>.    

2017년은 내가 보내준 것인가, 지나가 버린 것인가, 아니면 내가 보내버린 것인가?  2018년 새해는 내가 맞이할 것인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쑥 찾아오는 것인가? 모든 것은 <지나간다>. 지나가기에 견딜 수 있는 것이다. 나는 2017년 한해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도 잘 나지가 않커니와, 기억할 정도로 간단하지도, 여유롭지도 않다. 그냥 무사히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기적같고, 눈물겹게 고맙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야만 했고, 하루하루 보장된 날이 없었기에 하루하루 사는게 힘들었고, 그래서 하루하루에 감사해야만 했다. 비단 2017년만 그랬을까? 삶이 나를 속인 언제부터인가, 아니 내가 살아야 할 삶의 시야가 보이지 않았던 때 부터 그런 삶을 살아야 했다. 사는게 힘들수록 세상 만물은 눈부시게 아름답게 보였고, 나는 점점 초라해지고 낮아져야 했으며, 감사해야 될 주변의 사람들은 늘어나기 시작했다. 힘들수록 그분께 점점 의지하게 되고 옆에서 함께 동행하고 계신지 순간순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내가 살면서 기댈 수 있는 그분이 있다는게, 나의 손을 잡아줄 그분이 있다는게 나에게는 기적이고 눈물이다.

나에게는 머물러 사는 또 한가지 이유이자 부끄러움이 있다. 매주 칼럼이랍시고 신문에 쓰는 글들이다. 2006년 가을부터 칼럼을 썼으니12년째로 접어든다. 글이 글 같지 않으니 자랑도 아니고 훈장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글을 쓰는 이유에는 두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자식들 때문이다. 12년전 첫번째 칼럼 제목이 <연필 한자루>였다. 사무실도 없이 연필 한자루로 이 사업을 시작했다. 이민온 가난한 부모니 물려줄 재산도 없고, 나의 성격적 결함으로 자식들과의 의사소통 마져 원만하지 못하니, 애비로써의 마음과 생각을 전달해 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게 칼럼을 쓴 이유 같지 않은 이유다. 그래서 먼 훗날 애비가 없는 세상을 살아갈 때, 힘들고 어려울 때 조금의 위안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었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나처럼 힘들게 이민와서 힘들게 사는 분들에게 조금의 도움이나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으로 변명 아닌 변명 같은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12년이 지난 지금 와서 글을 쓰는 진짜 이유를 생각해 보니 나를 위함임을 잘 알고 있다. 아무리 글 같지 않은 글을 쓴다고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해서는 책을 읽어야 하고, 사색해야 하고,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매주 무엇을 쓸 것인지 결정해야 하고, 글을 쓰고 다듬어야 한다. 말과 행동이 달라서는 안되는 엄격함과 지엄함이 있거늘, 하물며 공중에 흩어지는 말도 아닌 평생 남는 글인 다음에야 그 엄중함이 육신을 넘어 영혼마져 상관한다. 그러니 더욱더 신중하고 조심하며 몸과 마음을 다잡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정이 허락하는한 글을 계속 쓰고 싶다. 하지만 바탕이 워낙 미천하고 시원찮으니 여러분의 양해와 이해를 부탁드릴 뿐이다.

이제 2017년을 떠밀려서 살았든, 정신없이 우와좌왕 살았든, 생각없이 별 볼일 없이 살았든, 가난하게 살았든, 아프며 병환 중에 살았든, 살았다는 그 자체가 그분으로 부터 칭찬 받을 일이다. 삶의 본질은 산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나쁜 짓 안하고, 도둑질 안하고, 착하게 살려고 애썼다면 그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하자. 나 혼자만이 산 세월도 아니고 가족이라는 공동체 속에서, 이민사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종교라는 공동체 속에서 위로받고 위로한 세월을 감사하며 살자.

2018년 새해라고 만만하기야 할까?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있겠지. 하지만 살아온 세월을 기억해 보면 삶이 몸서리치는 고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고통 속에 사랑이 있었고, 우정과 웃음이 있었다. 선의와 정의가 있었기에 살맛나는 세상을 살았다. 새해에도 가슴을 활짝 열고 고통을 맞이하자.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분이 함께 계시니 그 무엇이 두려우랴, 그 무엇이 나의 새해와 소망을 막을소냐? 다 함께 물결치는 희망의 나라로 나아가자.  

 

 예루살렘의  역사 <전편> (12-22-2017)

 세계 최강 국가, 세계 최고 지도자인 미국 미통령 트럼프가 2017년 12월 6일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공식 서명했다. 예루살렘은 종교, 정치, 군사, 문화의 아킬레스이자 세계 화약고다. 이런 곳에 불씨를 던져 세계를 전쟁과 테러의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것인가? 세계의 양심은 규탄한다. <이스라엘의 하수인>, <유대인의 개>라고 비난을 받는 트럼프는 유대인 사위를 앞장 세워 세계 혼란의 대가로 무슨 실익을 챙긴 것일까? 그의 미치광이 결정은 미국에 도움이 될까? 이미 트럼프는 세계 지도자도 아니고, 세계 평화의 중재자도 아니다. 그의 천박한 야욕과 무지는 자신의 백인 지지 세력만을 위한 폭군이자 광대일 뿐이다. 세계 최강의 군사력만을 앞세운 미국은 점점 세계인들에게 소외되고 조롱거리가 된다. 트럼프 같은 인간을 대통령으로 뽑은 미국인들의 지성에 한계를 드러낸 인과응보이다.

2016년 3월 <일신교 3형제>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세가지 종교가 전 인류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가 세계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이다. 불교와 유교는 신을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고 인간 스스로가 진리를 깨우치는 종교이니 신의 논쟁에서 제외된다. 전세계 인구 73억명 중에 기독교인은 17억명이며, 그중 카톨릭이 10억명, 개신교가 7억명이다. 서유럽과 미국 기독교인들은 근대 500년을 거치면서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또한 1천6백만명의 극소수에 불과한 유대교인들은 전세계 금융, 식량, 정보 등 제반 분야를 장악하고 있다. 반면에 14억명의 이슬람교인들은 아시아에만 6억, 북아프리카 인구의 60%, 중동 아시아 순이다. 일부 중동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후진국이고 가난한 저항 세력이다. 세계사의 수많은 전쟁이 일신교 3형제 집안 싸움인데, 기독교, 이슬람교는 모두 유대교에서 파생된 종교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 구약의 모세5경을 믿으며, 구약의 선지자들을 믿고 따른다. 같은 믿음의 형제임에 불구하고, 성육신 예수와 예수의 부활과 다시 올 구세주에 대한 해석 차이로 서로가 적이 되어 죽도록  싸우니 가관은 가관이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 일신교 3형제에게 예루살렘은 모두의 거룩한 성지이니 결단코 양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미국은 극단적 기독교 국가가 되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세계인은 신의 성지인 예루살렘의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지구 종말을 막을 수 있다.

– 예루살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며, 같은 유일신을 믿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3대 종교의 공동성지다. 예루살렘 어원은 평화 (샬롬)의 도시(이르)다. 예루살렘 구시가지는 기독교인 구역, 무슬림구역, 유대인 구역, 아르메니안 구역으로 4분할 되어 있다. 기독교 구역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뒤 시신이 묻혔던 장소로 기독교 성지가 된 <거룩한 무덤 성당>과 골고다 언덕이 있기 때문이며, 구시가 북서쪽 사분면에 속한다. 무슬림 구역은 구시가 북동쪽에 위치하며, 예루살렘 인구의 3분의 1이 아랍인이다. 이슬람 3대 성지인 예루살렘은 대표적 상징이 <바위의 돔- 황금사원>과 무함마드가 승천한  <알아크사 모스크 -은색사원>이 있다. 유대인 구역은 구시가 남동쪽이며, 성지로 <통곡의 벽>이 있다. 아르메니아 지역은 구시가 남서쪽이며, 오스만제국 때 정교회 대주교좌가 위치하며, 야고보 대성당, 다윗탑 등이 있다.

– 이스라엘 인구는 팔레스타인 포함 1300만명 (2016년 기준), 예루살렘은 86만명, 텔아비브가 400만명이 넘는다. 예루살렘은 로마시대에는 그리스인과 유대인, 중세에는 무슬림과 기독교인, 현대에는 아랍인과 이스라엘인들이 싸운 수많은 전쟁 역사를 가지고 있다. 2번이나 도시가 완전 파괴되고 23번이나 공성전을 겪어야 했다.

<예루살렘 역사>를 년도별로만 간단하게 나열해 보자.

– BC 1000년경 : 다윗왕이 유대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을 통일함으로써, 가나안 족속중 여부스 족속에게서 빼앗음. 일명 <다윗성>이라고도 했음.

-BC 957년 : 7년에 걸쳐 <솔로몬의 제1성전>을 예루살렘 <성전산>(Temple Mountain –하나님의 집이 있는 산)에 건설, ‘예루살렘 성전’ ‘거룩한 집’으로 불리움. 이집트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출애굽을 이룬 모세가 40년 광야 생활 이후 하나님으로 받은 십계명 석판을 보관했던 목상자 <언약궤>를 보관했던 곳으로, 유대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김,

– BC 586년 : 바벨론의 침공으로 <제1성전> 파괴.

– BC 535년 : <예루살렘 제2 성전> 완공 (BC 515 ~AC 70). 유대지역은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의 식민 지배 하에 있었음. 초대 군주 키루스 대왕은 식민지역의 종교를 허용하고, 그 식민 민족들 중에서 인재를 발탁 등용하는 탁월한 정책을 펼침. 이에 따라 유대성전 건축 허가 및 지원까지 하였음.

– BC 20년 : 로마가 유대지역을 점령 지배함. 이 지역의 헤롯왕을 임명 위임하자, 성전을 보수하여 <헤롯 성전>이라 불리움. 로마에게 유다왕국이 멸망한 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로 인해 상업이 매우 발달함.

 

 이민의  직업병 (12-08-2017)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아프다. 이민와서 어떤 계기가 되었든, 처음 선택한 업종은 대부분이 고정 직업이 된다. 같은 업종을 수십년간 하다 보면 몸이 고장날 만도 하고 병의 증세도 비슷하다. 대부분의 맘앤팝 비지니스는 주인이 몸이 아파도 가게 문은 열어야 하고, 아픈 몸을 끌고 장사는 하여야 한다. 하물며 일하지 않으면 굶어야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종업원으로 일할 경우에는 그 고통이 더 심하다.

고통에는 여러가지 고통이 있다. 성경에서는 <욥의 고통>이 가장 대표적이다. 잇따른 재난으로 많은 재산과 열명의 자녀를 모두 잃고, 죽음보다 더한 병마에 고통스러워 한다. 사람들로 부터의 배신의 고통도 크다.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라고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변하지 않는다. 욥은 의인인지라.. “가난과 육신의 고통 중에 한가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어떤 것을 택하겠는가?”라는 하나님의 물음에 욥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이 세상 어떠한 고통도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답한다. 과연 유대인 다운 답변이라고 생각하지만, 고통은 당한 당사자의 처해진 환경과 배경에 따라 종류와 크기가 다를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여러가지 고통이 있다. 그만이 그 고통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많은 현대인들이 자살을 한다. 편하기 위해 자살하지는 않을 것이다. 견디다 견디다 못해 고통의 마지막에서 포기를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고통을 이겨내려 견디고 싸우고 마침내 극복한다. 어쩌면 삶이란 과정이 고통의 연속이고, 고통과의 싸움이며, 견디어내는 것이리라.

이민의 삶은 전문직이 아닌 다음에야 대부분이 육체적 고통을 수반한다. 특히 한인들이 비교적 손쉽게 일하던 Stock Business 들이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Beauty Supply, Discount, Dollar, 옷가게 등등, 물건을 사와서 파는 단순 판매사업은 점점 사양길로 접어들 것이다. 영세 중소 상인들은 <온라인 배달사업>에 주목해야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온라인 배달사업>은 사업영역을 넓힐 것이다. 편리성과 가격 경쟁력에서 이길 수 없다. <온라인 배달사업>이 할 수 없는 분야는 사람이 직접 육체적 노동을 해야만 가능한 분야다. 그렇다고 육체노동이 적은 우리 지역의 <맥주>관련 업종은 다변화와 저변화로 진행중이다. 이미 <맥주도매상>은 고유영역이 아니다. 어느 <대형 슈퍼마켓>에서도 맥주 도매가 가능해졌다. <맥주 소매점>인 <Beer/Deli>도 <WaWa> 등 대형소매 체인점들이 작업 진행중이라고 한다. 맥주 소매가 일반 편의점에서 판매가 된다면 <WaWa> 등과 같은 시설 등 검사 규정이 더 까다로워 질 것이다. 가게 방판유리를 없애라는 법안이 상정되는 이유도 이런 맥락의 일부는 아닐까? 언제일지 시기가 문제라면, 향후 <Beer/Deli> 라는 용어는 없어지고, Deli와 맥주를 함께 파는 편의점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 미국 대부분의 타주는 이미 오래전 부터 편의점에서 맥주를 팔고 있다. 물론 나의 사견이지만 우리 한인들은 대응책을 준비해야 한다. 그렇다고 백인들 위주의 <Restaurant Business>에 문화적 배경과 경험도 없이 뛰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돈많은 중국인이나 인도인 이민자들은 건물과 대형 장치사업에 투자한다. 그렇다면 중소 자금의 한인들은 중국인들이나 백인들이 하지 않는 업종을 선택해야 한다. 무슨 업종이 남아있을까? 결국은 그토록 하기 싫어하는 <세탁소>, 빨리 빨리의 대명사 <Breakfast>, 궂은 일의 <Seafood>, 하루종일 손과 발을 갈고 다듬어야 하고 손님에게 친절해야 하는 <Nail>가게, 이민초기로 다시 되돌아오는 <Convenience /Beer/Deli> 정도 일 것이다. 모두가 육체적으로 힘든 업종이다. 업종마다 아픈 부위도 다르다. 하지만 다른 민족들의 공격을 덜 받는 안전업종이기도 하다.

그러니 몸이 재산이다. 내 몸은 내가 잘 관리해야 한다. 하기야 아프고 싶어서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냐 마는 조심하고 또 조심하시라는 부탁이다. 이런 말을 하는 나도 요즘 허리 통증으로 고통이 심하다.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심한 육체적 노동은 하지 않지만,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어서 생기는, 일명 현대인의 직업병 <VDT – Visual Display Terminal 증후군>이라고 한다. 요즘은 인터넷 발달, 가게 세부 사진, 정확한 데이타 분석, 사업성 비교분석 등으로 Buyer를 이곳저곳 모시고 다니지 않는다.  이사람, 저사람 데려오는 것을 Seller도 싫어한다. 꼭 사겠다는 결심이 서면 Seller와 인터뷰 하고 제반 자료 확인한 뒤, 곧바로 오퍼한다. 그러니 하루 8시간 이상을 책상 앞에 앉아있게 된다. 문제는 앉은 자세가 왼쪽에 있는 컴퓨터 2대를 보면서 상담을 하게 되어 자세가 뒤틀린 것이다. 이런 일을 10년이상 반복하여 하다보니 문제가 생겼다. 서 있기가 힘들 정도니 당분간 좋아하는 운동도 일체 못할 것 같다. 매일 스트레칭 요가를 한다고 하는데 좀처럼 나아지지가 않는다. 이날까지 큰 병이 없어 치과를 제외하고는 병원간 일도 별로 없고, 별도로 먹는 약도 없어서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교만했나보다. 그리고 ‘이제는 너도 늙었다’ 는걸 경고하시는 것 같다. 가난한데다가 몸까지 아프면 그 설움을 어찌할꺼나.. 조심하고 또 조심하자. 여러분도 건강하세요, 아프시지 말고..

 

 망향가 (望鄕歌) (12-01-2017)

이번 추수감사절은 미국에 사는 온(?) 가족이 다 모였다. 온 가족이라 해 봐야 뉴욕에 사는 둘째딸과 예비 사위, 처형 가족, 취업비자로 이민온 외조카 가족이 전부다. 이번 추수감사절 음식은 23살 막내 아들이 혼자서 모두 만들었다. 설마 혼자서? 했다. 20LB Turkey 구이, 햄구이, 스터핑, 머쉬포테이토, 그린빈, 호박파이, 옥수수 빵, 연어훈제 스테이크 (이것은 예비 사위가 만듬), 스윗 포테이토, 야채 셀러드. 제반 소스를 모두 홈메이드로 직접 만든 것이다. 맛도 최고였다. 혼자 장을 보고 14시간 동안 혼자서 만들어 상차림까지 완벽했다. 전공 선택을 잘못했나? 누가 우리집 며느리가 되실지, 아마도 괜찮을 것입니다. 기대됩니다.

가족은 모여 살아야 한다. 가족은 보고 싶을 때 만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살 때에는 내가 장손이므로 무슨 때가 되면 늘상 우리 집에 모두 모였다. 모이면 시끌벅적하고 각종 음식 만들어 먹고 웃고 놀고 하던 때가 그립다. 모두 성인이 된 조카들도 눈에 그립다. 만나고 싶어도 마음같이 갈 수가 없는 처지니 그리워 할 뿐이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고,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들. 실향민(失鄕民), 탈북자 (脫北者), 새터민, 이민자.. 나는 탈북자들 이야기를 다룬 <모란봉 클럽>을 즐겨 본다. 아버지 어머니가 함경남도 함흥, 흥남 출신으로 1.4 후퇴 때 피난민 이어서도 그럴 것이다. 내가 만약 이북에서 태어났더라면 나는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할아버지가 대지주이셨으므로 북한 공산주의가 말하는 전형적인 부르조아다. 출신 성분이 좋지 않았으므로 아마도 평생 탄광 노동자로 죽도록 일하지 않았을까?

이미 대한민국으로 넘어온 탈북자만 3만명이 넘는다. 미국에도 탈북자가 1천명이 넘는다고 한다. <모란봉 클럽>을 보면서 탈북한 사람사람 마다 사연이 다 다르고 가슴 아프지 않는 사연이 없다. 목숨을 걸고 탈출을 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걸까? 대부분이 혼자몸으로 가진 것없이, 도와줄 사람 없이, 아무런 대책없이 막연하게, 말도 통하지 않는 미지의 국가로 탈출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더구나 남겨두고 온 부모 형제, 심지어 처자식 들이 받을 형벌과 고초를 뻔히 알면서도 탈출해야만 하는 기구한 사연들이 가슴저이며 눈물짓게 한다. 아직도 중국 땅에는 3만명 (일각에서는 십만명) 탈북자들이 불법체류자로 공안들의 감시를 피해 살고 있다고 한다. 20%는 인신매매나 중국인 첩으로 노예 취급을 당하며 살고 있다고 한다.

북한 땅에 남겨진 자나 탈북하여 떠돌이 생활을 하는자나 모두 내 동포요, 한민족이다. 대한민국 헌법 3조에는 한반도 전역을 대한민국 영토라 규정하고, 한반도 (남,북한)에서 태어난 국민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간주하며,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불법 반국가 단체에 의해 구속되어 국적을 취득하지 못하는 상황 뿐이라는 것이다. 속지주의 원칙이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3만명의 탈북자는 북한의 출신 성분,신분, 교육도 다르고, 탈출 경로, 탈출 방법도 다르다. 탈출 사유도 각가지다. 배고파서 탈출한 자. 반역자로 낙인 찍힌 자, 계급 경쟁에서 낙오된 자, 북한체제에 환멸을 느낀 자, 중국이나 대한민국을 막연히 동경한 자, 심지어 범죄자도 있을 수 있다. 탈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들은 목숨을 걸고 죽음을 각오하고 국경선을 넘어선 것이다. 어른이든 어린 아이든, 그들이 살아온 세계와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세월은 완전히 다른 세계다. 이념과 사상이 180도 다르다는 것은 외계인과 다름없다. 단지 한국어라는 언어와 문화 풍속이 같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일 수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함께 산다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다. 남한에도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다. 시골 촌놈 코 베어가는 세상 정도가 아니다. 영혼을 송두리째 탈탈 털어 갈 수도 있다. 이해 되는 것보다 이해 되지 않는 것들이 태반일 것이다. 남한에서 살다보면 그 누구도 믿지 못하고 마음 조이며 두려움에 살아야 할 수도 있다. 말 할수 있는 사연보다 말 못할 사연이 더 많을 것이다.

고향을 떠나온 탈북자나 우리같은 이민자나 다를 바가 무얼까? 탈북자는 그래도 신분이나마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미국 이민자들 중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불법체류자라는 낙인으로 산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긴장의 연속이며 두려움 속에서 산다. 탈북자들은 정치에 절대 참여해서는 안된다. 정치, 언론, 종교에 이용당하지 마라. 대한민국은 아직도 종북 빨갱이, 진보 좌파, 극우 보수, 일베, 뉴라이트 등, 냉전논리로 이분화 되어 서로를 적이라 싸우는 이합집산이다. 종교의 정치화가 극에 달한 나라다. 북한 탈출 당시 선한 목사들 도움으로 90%가 기독교 신자가 된다. 하지만 남한의 정치화된 교회와 목사를 믿지말고 예수 말씀만 믿으라. 그리고 가족간에 사랑하라. 착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다보면 언젠가는 고향에 갈 좋은 날 있을 것이다. 그날까지 망향가를 부르며 함께 사랑하며 살자. 탈북자와 이민자 우리 모두에게 신의 가호를 !!  

 

 꿈, 드림, 몽(夢) (11-24-2017)

추수 감사절이다. 올 한해도 별탈 없이 온가족이 무사히 함께 살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한다. 이보다  더 큰 축복과 은혜가 어디 있으랴.

추수감사절은 북아메리카 개신교의 최대 명절이다. 구약성경의 초막절과는 전혀 다르다. 초기 유래는 영국 성공회 교도들에 의해 박해받고 사회에서 소외되던 청교도들 102명이 1620년 9월6일 메이플라워를 타고 두달간 항해 끝에 미국 메사추세츠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겨울에 도착한 그들은 농업이나 어업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추위와 식량부족으로 봄이 오기도 전에 절반이 죽는다. 원주민인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대풍작을 하게 되자 원주민들을 초대하여 신께 감사를 드린 잔치가 추수감사절이다. 그런 은인인 인디언들을 인종말살 정책으로 무자비하게 죽이고 그들의 땅을 빼앗은 미국 기독교인들은 인디언들에게 반드시 용서를 구하고, 역사에 정확히 기록해야 한다. 피해자에게 용서받지 못한 자가 신께만 회개하고 감사 드린다고 진정으로 신이 기쁘게 받아드릴까?      

미국은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며 이민온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다. 각자의 나라에서 소외당하고 못살던 사람들이 <마지막 꿈>이라고 여기며 목숨 걸고 이민을 왔다. 특히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이후 초토화된 유럽 국가에서 우수한 인력들이 이민오면서 미국은 부강해졌다. 그 이후 미국은 세계인들의 <드림>이 되어, 미국만 오면 무엇을 해도 먹고 살고 자녀들 교육을 시킬 수 있다는, 평등과 기회의 나라로 인식된 것이다. 그러니 미국은 어느 한두개 민족이 만든 나라가 아니다. 세계 각 민족들이 이민와서 함께 일하고 각국의 문화를 전파하니 경제는 부흥하고 문화는 융성하게 된 것이다. 미국은 1970년대 신자유무역 정책으로 개방화, 세계화로 세계최강의 부국이 된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의 <미국우선> 정책은 무엇인가?  <더불어 함께>가 아닌, <내것만 먼저>는 세계 속의 고립화와 폐쇄화로 쇠락의 길을 자초할 것이다.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군사력도 아니고, 경제력도 아닌, 문화력이 우선되어야 한다. 문화는 그 나라의 역사요, 철학이자 사상이다. 각 나라의 문화는 그 나라 백성들이 만든다. 미치광이 트럼프는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앞세워 각 나라로 부터 돈을 빼앗아 오는 깡패일뿐, 그는 철학도 사상도 없는 천박한 자일 뿐이다. 그런 자는 결코 세계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아메리칸 드림>은 이제 한 여름밤의 꿈이련가.

국가 지도자는 백성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

우리는 시진핑의 <중국몽>을 잘 관찰해야 한다. 2013년 시진핑은 <대국굴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이라는 <중국몽>을 천명했다. <종엄치당 (從嚴治黨)>, 즉 치국(治國)은 치당(治黨)이 선행되어야 하며, 치당은 반드시 종엄(從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정부패, 반부패가 반드시 척결되어야 한다고 선포했다.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어려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타호박승 (打虎拍蠅 – 호랑이든 파리든 다 때려 잡는다), 괄골요독 (刮骨療毒 – 뼈를 깎아 독을 치료한다), 장사단완 (壯士斷腕 – 장사가 팔을 끊어버림)의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시진핑의 <중국몽>은 <아메리칸 드림>을 염두에 둔, 기존의 사회주의적 애국주의 (중국식 민족주의)와 유교 (儒家)사상을 결합해 낸 개념이다. 중국몽은 19세기 강국몽(强國夢 – 부국강병의 꿈)으로써, 아편전쟁 (1840년)후, 양무운동 (1861년), 변법자강운동 (1898년), 신해혁명 (1911년)의 연장선에 있다. <기회의 땅>이란 의미의 <아메리칸 드림>은 존F. 케네디의 ‘자유의 땅’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인권의 땅’이 결합하여 형상화 되었다. 시진핑의 꿈은 <전면적 소강(小康) 사회 완성, 즉 중산층 완성>에 있다. 중국몽의 시간표의 1차 목표는 2021년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 까지 ‘전면적 중산층 시대’를 완성한다는 것이다. 매년 7%이상 경제 성장을 해 왔듯이 2021년까지 7%대 경제 성장을 하면 미국의 GDP를 추월하여 세계 최강 국가 (G1)가 된다는 것이다. 이미 중국은 2010년 일본 GDP를 추월하여 미국과 함께 G2 (양대강국)으로 부상하였다. 또한 2차 목표는 2049년 (중국 건국 100주년)까지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이 된다는 목표다.

시진핑의 중국은 트럼프의 미국과는 달리 세계와 소통과 자유무역을 통해 세계를 재패하려고 한다. 그러면 <코리안 드림, 한국의 꿈>은 무엇인가? <적폐청산>을 통해 부정부패가 근절된, 청렴한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남북한이 통일되어 한민족의 위대성을 세계 만방에 떨쳐야 한다. 한류열풍을 통해 아시아와 손을 잡고 함께 성장해야 한다. 한민족만의 한국 문화를 계승 발전해야 한다. 한국인만의 사상과 철학을 고찰해야 한다. 인내천 (人乃天)과 민본사상과 같은… 세계와 균등 외교를 해야 한다. 무엇보다 한민족을 단합하게 하고, 자긍심을 심어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문재인 정부는 한국인 공동의 <코리아 드림>을 갖게 해 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청년들에게 <꿈>을 심어줘야 한다. 청년들이 살고 싶은 나라,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제2의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를 외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기성세대는 기꺼이 거름이 되고 흙이 될 것이다.

 

 삼생(三生)의 업보(業報) (11-17-2017)

이번 겨울은 또 얼마나 추우려나. 날씨가 영하로 떨어지니 느긋함 보다는 괜한 조급함이 앞선다. 연탄 200장과 김장 100포기면 겨울 채비를 마쳤던 그 시절 넉넉함이 그립다. 매번 최고로 추웠다던 언젠가의 겨울도 그럭저럭 잘 버텼는데 뭘.. 막연한 앞날의 걱정은 막연한 과거의 흔적들로 위로하고 위로 받는다.

나는 작년 이맘때 부터 아내를 가게에 데려다 주고 사무실에 출근했다가, 퇴근할 때 아내 가게에 들러 함께 퇴근한다. 아내는 다운타운에서 혼자 조그만 가게를 하는데 아침 7시30분에 문을 열고 오후 6시 30분에 문을 닫는다. 나의 근무 시간은 오전9시부터 오후 5시이지만 반드시 정해진 것은 아니다. 또 아내와는 출퇴근 방향도 다르고 하루 교통시간이 1시간 이상 더 소요되니 따로따로 출퇴근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작년부터 아내는 가게 장사가 잘 되지 않아 우울해 하며 혼자서 마음 고생이 심했는가 보다. 어느날 출근하는 아내의 뒷모습이 너무 안스러워 그날부터 상전으로 모시고 다닌다. 아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그동안 내가 너무 이기적이고 무심한 남편이었음을 자성하고 참회한다. 아내와 함께 하는 이번 겨울도 따뜻하리라..

아내와 남편은 전생(前生)의 카르마 (Karma)로 만난다고 한다. 카르마는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업 (業)> 혹은 <업보 (業報)>로 번역된다.<업>은 생각, 말, 행동으로 짓는 것을 의미하며, <업보>는 <업>에 따라 받는 결과를 말한다. 인도 종교와 철학의 근간인 <윤회 (輪廻)> 사상은 불교의 <인과율 (因果律)>과 더불어 불교 사상의 근간이 된다. 즉 원인과 행위와 결과가 한 몸통인 셈이며, 인과응보로 인해 우리의 삶은 무한반복 된다는 것이다. 내가 살면서 행하였던 모든 결과는 죽어도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생에도 계속 이어진다니, 무서운 사상이다.  

그런데 부부의 인연 (因緣)은 전생의 원업(怨業) 때문에 만났다는 것이다. 심지어 전생에 원수가 부부로 만난다고 하지 않는가? 부부 두사람 중의 한사람 혹은 두사람 모두가 서로에게 전생에 크게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현생(現生)에서 원업을 풀라고 부부로 만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부가 서로를 위하지 않고 금실이 좋지 못하면 다음생 ,즉 내생(來生)에 다시 부부로 만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삼생 (三生)을 부부로 만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현세의 부부 역할이 내세에는 서로 뒤바뀔 것 같다. 즉 남편과 아내, 가해자와 피해자, 갑질과 을의 핍박, 강한 자와 약한 자, 경제권자와  피경제권자, 대접 받는 자와 대접하는 자, 등등 으로 역할이 완전 역전될 것 같다. 그래야 정의롭고 공평한 윤회 사상이 되지 않을까?

그런데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전생에 원수였기에 현세에서는 할 수 없이 부부로 살았다 할지라도 다음 세상에 또 같은 사람과 살아야 한다? 이건 아닌거 아닌가? 세상은 넓고 남자도 여자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또 같은 사람과 만나서 지지고 볶고 살아야 하나? 그래서 복도 지지리 없는 x 라고 푸념 하는건가? 이건 너무 가혹한 형벌이 아닌가? 아무튼 이승에서의 인연은 이승에서 끝내기 위해서라도 여러분이나 나나 모두 아내에게 무조건 잘 해주어야, 다음 세상에 더 좋은 배필을 만날 수 있을거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다. ㅋㅋㅋ 부인, 배신자를 용서하오.

하지만 기독교 사상에는 윤회가 없다. 인간은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으로 천국행이냐, 지옥행이냐로 두갈래 길 밖에 없다. 천국으로 가더라도 현세의 부부가 다시 부부로 살지 않는다. 천국은 공동체로 모두 함께 모여 사는 논리라서 천만다행(?)이다. 그런데 천국 가기가 쉬운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참회하면 모든 용서를 받고 누구나 천국 간다? 너무 냄새 나는거 아닌가? 천국문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 구멍 들어가기 보다 힘들다는데?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한 지옥 갈 성직자들이 어영부영 천국 입국심사 가이드 라인을 자기들 끼리 너무 낮춘거 아닌가? 천국 심사는 인간이 하는 것도 아닌데.. 신의 영역인데.. 누구 마음대로.. 윤회를 하든 천국을 가든, 분명한 것은 <있을 때 잘해!>이다. 괜히 아내에게 원망 살 구실을 만들지 말고 가슴에 원한의 업보를 만들지 말자. 죽도록 사랑하다가 오랬는데 미움 받을 짓만 실컷하고서 천국 입국 심사에서 떨어지지 말고, <있을 때 잘해.>

조선시대 시인 허난설헌이 만든 <규원가 (閨怨歌)>를 소개하니, 가여운 마누라님을 잘 위로하고 많이 사랑해 주자.

엊그제 젊었더니 어찌 벌써 이렇게 다 늙어 버렸는가? / 어릴적 즐겁게 지내던 일을 생각하니 말해야 헛되구나. / 이렇게 늙은 뒤에 설운 사연 말하자니 목이 멘다. /부모님이 낳아 기르며 몹시 고생하여 이 내 몸 길러낼 때, / 높은 벼슬아치의 배필은 바라지 못할지라도, 군자의 좋은 짝이 되기를 바랬거늘, / 전생에 지은 원망스런 업보요 / 부부의 인연으로 장안의 놀기 좋아하는 경박한 사람을 꿈같이 만나 / 시집간 뒤 남편 시중하면서 조심하기를 마치 살얼음 디디는 듯 하였다. // 생략//  스스로 부끄러워 하니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우주 속  인간 (11-10-2017)

지난 10월 26일 우주 국제 정거장 (ISS)에 머물고 있는 우주 비행사 6명과 프란체스코 교황께서 나눈 대화가 깊은 울림이 있어, 두고두고 생각케 한다. 교황께서 우주 비행사들에게 하신 질문은 세가지다.

“우주에서의 인간의 존재는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갑니까?” “무엇이 당신에게 가장 큰 행복입니까?

<나>라는 한명의 인간은 우주의 크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될까? 100세도 안되는 인간의 수명에 비해 우주의 수명은 얼마나 될까? 천자문(千字文)의 시작은 천지현황 (하늘 天, 땅 地, 검을 玄, 누를 黃), 즉 하늘은 위에 있어 그 빛은 검고, 땅은 아래 있어서 그 빛이 누르다. 그 다음이 우주홍황 (집宇, 집宙, 넒을 洪, 거칠荒), 즉 하늘과 땅 사이는 넓고 커서 끝이 없다. 세상의 넒음을 말하는 것으로 동양적 우주론이다. 또한 구약 성경에서는 야훼가 6일동안 천지를, 즉 지구를 만드셨다고 한다. 서양의 6일 천지창조론이다. 현대과학은 우주의 탄생을 <빅뱅 우주론>으로 설명한다. 우주 공간은 현재도 계속 팽창하고 있는데 팽창 속도가 거리에 비례해서 늘어난다. 따라서 특정 거리 이상의 은하들은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팽창하므로 그 이상의 우주는 인간의 과학적 지식으로는 영원히 볼 수 없다라는 것이다. 즉 인간이 관측 가능한 우주 (Observable Universe) 만의 나이는 138억년, 관측 가능한 우주의 크기만 930억 광년 (9,300 x 10의 26승)이다. 따라서 우주는 무한한지 유한한지 조차 인간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물며 그 우주 속의 한개 우주에 속하는 태양계, 그 속에 포함된 지구, 그 지구의 한 구석에서 살고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해 보라. 한개의 점으로도 표시할 수 없는 <점의 가설> 같은 공간 속의 <나> 자신이, 숫자로 표시할 수도 없는 <찰라>라는 100년도 못되는 시간을 살다 가는 인생이다. 인간이란 한없이 나약하고 보잘것 없는 존재임을 인정함이다. 그러니 우주의 모든 구성체은 <함께>, <더불어> 함이 아닐까?

우주정거장에서 바라본 지구는 아름답다. 무한한 우주를 창조하신 절대자 <신>이 바라다 보시는 지구다. 우주 비행사 브레스닉은 교황께 말한다. “신의 창조물을 매일 바라볼 수 있는 것이 가장 기쁘다. 지구는 말로 다할 수 없을만큼 아름다우며, 국경도 분쟁도 없다. 그저 평화로을 뿐이다.” 교황께서는 “지구는 너무 연약하며, 대기는 얇아서 해를 끼칠 수 있고 그 자체로 파괴될 수 있다. 여러분은 신이 바라다보는 눈으로 지구를 보았다.” 신은 인간에게 지구라는, 생명이라는 귀중한 선물을 주셨건만, 인간은 서로 싸우고 지구 환경을 파괴하고 오염시켜 어쩌면 후손에게 물려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경고다.

인류의 권력의지는 끝이 없다. 15세기 대항해 시대를 맞이하여 신대륙이 발견되고 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러다가 항해시대에서 항공시대로, 항공시대에서 우주시대로 발전해 간다. 향후에는 인공지능 정보화 시대가 세계를 지배한다.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하다가, 하늘을 지배하는 자가 인간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면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죽어서 육체는 땅에 묻혀 썩거나 태워서 재가 되지만, 영혼은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는 소망으로 사는데 하늘나라는 없다. 하늘을 지나 우주에 나가도 그 우주는 끝이 없고 우주 밖의 우주가 또 있을 뿐이다. 그러니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함이 아니요, 천국은 내 마음 속에 있다 하심이 아닐까? 심령이 가난한 자, 내 마음이 천국이면 내가 천국에 사는 것이요, 내 마음 밭이 지옥이면 지옥에 사는 것이리라. 천지 우주와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저 우주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살아계신 것은 아닐까? 교황께서는 질문하신다.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지구별에 올 때 각자의 마음 속에 함께 오셨다가, 별이 되어 돌아갈 때 함께 가시는 것은 아닐까?

우주와 삼라만상을 창조하신 신은 절대자다. 신은 있다고 해서 있고, 없다고 해서 없는 존재가 아니다. 신은 있다고 해도 없고, 없다고 해도 있다. 인간이 평가할 대상이 아니다. 신이 인간의 형상을 닮았다 함은 인간의 수준에서 신과 인간적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우리들의 희망인 것은 신의 아들이다 아니다가 아니라, 사랑의 실천가, 사랑의 혁명가, 사랑의 자유주의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들이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류를 살해했다. 그것도 사랑하라는 예수를 십자가에 내걸고 말이다. 가장 부패하고 거대한 성을 쌓고 세계 최강의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이 기독교 국가이고 바벨탑의 교회다. 예수가 이루고자 하던 사랑과 평화의 세계가 아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에 인간 스스로 함몰되어 간다. 내가 믿는 신만이 유일한 신이고 나머지는 모두 적이며 악마라는 이분법적 종교 이념 논리에 스스로를 묻혀버린 것이다. 그래서 인류가 끝날 때 종교도 끝난다는 것인가?

교황께서 질문하신다. “무엇이 당신에게 가장 큰 행복입니까?” 나는 답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지금 여기서, 오늘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존엄사 (尊嚴死) (11-03-2017)

시간이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삶의 조각들이 낙엽되어 떨어진다. 중년의 남자에게 가을은 외로움이 반, 그리움이 반이라 했던가. 이제는 어떤 색깔로든, 호수의 잔물결처럼 마감을 준비해야 한다. 저 떨어지는 낙엽은 자살인가? 타살인가?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인가? 나무로 부터 모든 공급이 끊겨 죽임을 당한 것인가? 저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에도 삼라만상의 생사화복을 결정하는 신의 섭리라 하기에는 살아온 삶의 애절함이 더하다. 우리 각자가 살아온 치열한 삶의 흔적들이, 떨어지는 저 낙엽과 별 다름없다 함은 눈이 시리도록 애달플 뿐이다.

2011 나의 칼럼 <나비의 환생> 에서 소개한 글의 일부다. 죽음학의 대가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정신의학자이며, <인생 수업>, <죽음의 순간>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가 <생의 수레바퀴> 그녀의 일생을 다룬 자서전 형식이다. 그녀의 일생 또한 한편의 영화와 같다. 책을 집필하기 시작한  1991 시점에 이미 그녀는 암을 선고받고 투병중이었으며 육신은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후회하는 것은 일을 많이 했었으면, 돈을 모았었으면, 높은 자리에 올랐었으면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조금만 하며, 하지 못하고 미루었던 소망들이다.”

 그녀는 암에 걸린 어린 소녀에게 <꿈꾸는 고치>라는 제목의 편지를 쓴다. “우리가 지구에 보내져 수업을 마치고 나면 몸은 벗어 버려도 좋아. 우리의 몸은 나비가 되어 날라오를 누에처럼 아름다운 영혼을 감싸고 있는 허물이란다. 때가 되면 우리는 몸을 놓아버리고 영혼을 해방시켜 걱정과 두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 신의 정원으로 돌아간단다. 아름다운 한마리의 자유로운 나비처럼 말이다.”

한국에도 2018년부터는 <존엄사 (尊嚴死), death with dignity> 허용된다고 한다. 일명 <안락사 (安樂死), 그리스어로 아름다운 죽음’>라고 하는데, 불치의 중병에 걸린 등의 이유로 치료 생명유지가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생물에 대하여 ,간접적인 방법으로 고통없이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행위를 의미한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수단> 따라서 구분하면, <존엄사> 소생이 불가능한 환자에 대하여, <소극적 안락사> 환자의 소생과는 무관하게, 환자나 가족의 요청에 따라 생명 유지에 필요한 영양공급, 약물투여를 중단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다. <적극적 안락사> 안락사를 수행하는 사람이 치사량의 약물이나 독극물을 직접 환자에게 주사하여 환자를 죽이는 행위다. 물론 <적극적 안락사> 종교적, 의학적, 법률적으로도 허용되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가끔 발생하여 세간의 화제가 되곤 한다. 불치병의 아내를 살해하고 본인도 동반 자살하는 경우다. 환자의 동의 여부에 따라 <자발적 안락사> <비자발적 안락사> 구분짓는다.

안락사의 찬반 여론은 전세계적으로 오랜동안 이슈다. 누구나 해당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2016 <연명의료 중단 웰다잉법’> 만들어졌다. 치료해도 회생가능성이 없는 환자에게는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네가지 연명의료를 중단할 있게 것이다.

<존엄사>  <소극적 안락사> 72% 찬성하는데, 찬성하는 이유는 첫째가 가족들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이고, 둘째가 환자에게 고통만, 세째가 경제적 부담, 네째가 환자의 요구다. 28% 반대하는 이유는 첫째가 존엄한 생명을 인위적으로 사망에 이르게 없다는 것이고, 둘째가  신이 주신 생명을 죽인다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는 , 세째가 남용 위험, 생명경시 풍조 등이다. 법원이 제시한 <존엄사> 허용 기준은 환자의 병이 회생 가능성이 없어야 하고, 환자 자신의 치료중단 의사가 있어야 하고, 경제적 이유나 자살 의도는 허용이 안되며, 환자의 연명을 위한 치료만 중단 가능하며, 의사에게만 치료 중단자격이 부여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어렵고도 힘든 결정이다. 어쩌면 삶보다 죽음이 훨씬 어렵다.  <>. 늙지 않고 아프지 않고 죽을 수는 없다. 누구나 거쳐가야 과정이기 때문에 함께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나의 개인적 생각으로는 태어나고 살아가는 과정() 하나님이 주관하신다고 하여도, 적어도 나의 생명을 죽는 방법에 대해서는 스스로 결정할 권리와 자격이 있어야 한다. 혼수상태가 아닌, 의식이 뚜렷할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고, 결정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는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의 주인공인 노교수 모리와 같은 생을 마감하고 싶다. 비록 루게릭 병에 걸려 육체는 힘들었지만, 모리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고, 주변의 다정한 이웃과 제자들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벗할 수 있으니, 모리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죽음은 쇠락이나 좌절, 포기가 아니라 겸허하게 받아드리는 것이다. 모리 교수는 <작은 하루>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었다. 나 역시 가장 부담스런 것은 나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 나의 아내와 자식들을 힘들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감이다. 하루를 더 산다는 생체적 의미가 아니라, 서로에게 좋은 추억과 사랑을 남겨주고 떠났으면 하는 소망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인공지능 여인과의 사랑 (10-27-2017)

올해 최고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이렇게 말한다. “인류의 역사는 인류가 신을 창조하면서 시작됐고, 인류가 신이 되면 역사는 끝날 것이다.” 향후 20년 이내 인류는 인공지능으로 인해 엄청난 변화를 겪을 것이라 예고한다. 방대한 빅 데이타와 초고속 컴퓨팅 능력으로 만들어지는 인공지능 로봇들이 인류의 신격화를 만들 것이라는 것이다. 즉 과거의 <신>이나 신의 대리자에게 주어졌던 <권위>가 향후에는 사람들의 <감정>을 조정하는 <인공지능> 회사 (구글, 마이크로 소프트 등) 들에게 옮겨갈 것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당신에 관한 모든 데이타를 인공지능 회사가 가지고 있다면 당신의 고민을 신에게 물을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 회사에 물으면 해답을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은 욕망을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라, 단지 욕망을 느끼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두가지로 결정되는데 하나는 무작위적인 외부 자극에 의해서고, 다른 하나는 유전자로 프로그밍된 성격과 특성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인간에게 과연 <영혼>이나 <자유의지>, <자아>라는 것이 있었는가?  김대식 교수는  저서 <인간  vs 기계>에서 나의 기억, 나와 관련된 모든 자료, 말투, 영상, 성격, 유머 등을 인공지능 기계에 프로그래밍 한다면 나와 얼마나 다를까?

나는 1982년에 대형컴퓨터 소프트웨어 연수로 미국에 온적이 있다. 그때 박사 공부를 하는 홀애비 집에 초대 되었는데 사람 크기의 여자 인형을 끼고 자는걸 보고 사뭇 놀랐다. 솔직히 그놈을 <변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이상형으로 원하는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 수 있다니. 더구나 10년 뒤?,  20년 뒤라면?

유투브에 떠도는 영국 드라마 <Humans>에 관한 내용이다. 인공지능 가사 도우미 로봇이 집에 오면서 일어나는 해프닝이다. 인공지능 여인 (로봇)은 모든 면에서 당연히 안주인 (아내이자 엄마)보다 월등하다. 얼굴도 영화배우 보다 이쁘고, 말투도 상냥하다. 기억을 잊지 않고, 화내지 않으며, 우울해 하지도 않으며, 당연히 담배나 술과 마약도 하지 않는다. 요리 실력도 완벽하고, 가족이 필요로 하는 것은 미리미리 챙겨준다. 가족마다의 눈높이로 대화가 가능하다. 인내심을 가지고 각자의 고민을 들어주고 따뜻한 위로를 한다. 빠르고 강하며, 관찰력도 뛰어나다. 두려워 하지도 않는다. 다행히 로봇 그녀는 사랑을 하지는 않는다. 그런 가사 도우미가 있다면 당장 이혼하자는 남자들이 엄청 늘어날 것 같은데 ㅎㅎ.. 그런데  가사도우미가  잘 생긴 매너남자 로봇이라면? 이혼당할 남자들 역시 엄청 많을 것이다. 그러면 인간 공동체 코어인 <가족>은 어떻게 되는거지? 

영화 <Black Mirror> 의 시리즈 <Be Right Back> 스토리가 이러하다. 남편이 죽은 여자친구를 위해 러시아 인공지능 개발자는 친구 남편의 모든 이미지를 인공지능에 입력한다. 남편의 이메일, 영상자료, 목소리 등 모든 자료가 해당한다. 어느날 남편으로 부터 이메일이 날아온다. 믿지 못한다. 남편과 채팅을 한다. 어느날 남편으로 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똑같은 목소리다. 둘만이 알 수 있는 비밀스런 이야기를 한다. 남편만의 유머로 말한다. 어느날 남편 의체를 구입하여 인공지능을 다운로드 한다. 이제는 남편을 만질수도 있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인공지능 남편으로 부터 이질감을 느낀다. 결국 인공지능은 가짜라는 더 큰 슬픔에 빠진다. 인공지능 남편을 절벽으로 데리고 가서 밀어뜨려 죽인다. 당신은 당신의 인공지능 로봇을 누군가 만든다면 찬성 or 반대?

얼마 전에 <알파고 제로> 등장으로 세계를 또한번 놀라게 했다.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와 100번을 대국해서 100번 모두 이긴 것이다. <알파고> 처럼, 기존의 인공지능은 방대한 데이타, 즉 수많은 기보들을 입력해서 최선의 방법을 찾는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파고 제로>는 기존의 방대한 기보 입력이 전혀 없이, 바둑 정석만을 입력하면, 스스로 자신과 대국하면서 독학으로 깨우친다는 것이다. 즉 이미 인공지능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이나. <부처>의 말씀을 인공지능 로봇에게 입력하여 자생케 한다면 로봇이 진정한 <재림 예수>나 <득도한 생불>이 되는건 아닌가?

앞으로의 미래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인간 대 기계> 저자 김대식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하던 대부분의 일과 노동들은 인공지능 로봇으로 대체된다. 인간보다 훨씬 똑똑하고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보다 인건비가 훨씬 더 저렴하다. 멀지 않은 세상은 <노동없는 미래>가 된다는 것이다. 일하지 않고 놀고 먹는 거대한 그룹, 즉 사회 번영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는 무위도식하는 <백수그룹>과 <극소수 엘리트 그룹>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그 비율은 99.99999 %와 0.000001%로 나뉜다는 것이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먹고 노는 그런 세상은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천국>인가, <지옥>인가?  더 심각한 것은 그 미래가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별일은 별일 일세..  

 

 살다보면  살아진다 (10-20-2017)

그저 살다보면.. 살아진다.

산다는게 참 힘들다. 짧지만 않은 세월동안 이렇게 살아봐도 힘들고, 저렇게 살아봐도 힘들다. 부자로 살아봐도 힘들고, 가난하게 살아봐도 힘들다. 유명인으로 살아봐도 힘들고, 무명으로 살아봐도 힘들다. 젊은 시절도 힘들고, 늙은 시절도 힘들다. 신앙인으로 살아도 힘들고, 무교인으로 살아도 힘들다. 산다는게 고해다.

그저 살다보면.. 살아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65억명의 지구인 중에 한명일 뿐이다. 내가 한국이라는 곳에서 태어나서 미국이라는 이곳에 사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의지가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의 현장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힘들게 살다가 죽어갔다. 내가 그 시대, 그 현장에 있었다면 나도 그렇게 살다가 죽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알지도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한다.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다가 죽어서 별이 되었다. 내가 아는 은하계 만큼의 은하계도 또 있다면, 나는 무엇이며 어떻게 살다 죽어야 하나?  <나>라는 존재는 그저 은하계의 <덤>인가, <점>인가?

그래도 그저 살다보면.. 살아진다.

살아온 날이 기적 같으니, 살아갈 날이 기적처럼 두렵다. 하루하루가 기적이었다. 힘들고 슬픈 날도 많았다. 가난하고 두려운 날도 많았다. 이 경쟁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지? 이 경쟁에서 도태되면 깊고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텐데.. 나는 성공해야 한다. 나는 잘 살아야 한다. 나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마음 조이며 살지 않은 날이 단 며칠이나 있었던가? 나는 내 아이들이게도 그렇게 살기를 주문하고 강요했다. 나는 그렇게 되지 못했지만, 아니 나는 그렇게 되지 못했기에, 너희들만이라도 잘 살아야 한다고 얼마나 다그쳤던가? 하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자라서 잘 살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그저 살다보면.. 살아진다.

어떻게 살아야  잘 살지?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늘 감사하며 성실히 살아야 한다. 비교하지 말고 작은 것에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사색하고 사유하며,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살아야 한다. 모든걸 하나님께 의지하고 깊은 신앙심으로 살아야 한다. 소식하고 운동하며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내 욕심을 내려놓고 나를 부정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사는게 복잡하고 어려운가? 그렇게 많이 배우고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해야 살 수있나?  대충 살면 안되나?

그래도 그저 살다보면 살아진다.

이렇게 살아도 살아지고 저렇게 살아도 살아진다. 그러니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말자. 남들이야 어떻게 살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자. 작은 소망을 갖자.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때? 소망과 희망은 없는 것보다는 있는게 낫겠지. 내 자신이 우주에 <점>과 같은 <덤>이라면 좀 마음이라도 편하게 살자. 싸워서 이겨야 하고, 남들보다 잘 살아야 하는 전투식 삶은 이제 그만하자. 죽기 살기로 미친놈 처럼 살지말자. 착하게 살자. 착한 마음으로 남을 아프게 하지 말고 나쁜 짓 하지 말고 살자. 멍청하니 놀지말고 착한 일 하면서 살자. 몸이 지치고 힘들면 쉬어가며 살자. 좋은 사람 만나서 사랑하면서 살자.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못났으면 못난대로, 생긴대로 그냥 살다.

그저 살다보면 살아진다.

앞만 보지 말고 가던 길 멈추고 되돌아보며 살자. 내가 걸어온 길이 얼마나 되나? 살다가 앞뒤, 좌우가 다 막혔다면, 하늘을 보자. 하늘의 태양과 밤하늘의 별을 보자. 나도 언젠가 저 별이 될거다. 저 멀리 불빛을 보자. 외롭고 힘들 때는 바람의 소리를 듣자. 나뭇잎과 나무가지 사이를 흘러가는 바람의 소리를 듣자. 새들의 소리, 풀벌레 소리를 들어보자. 눈을 감고 바람의 냄새를 맡아보자. 마음이 답답할 땐, 언덕에 올라 노래를 부르자. 바다로 가서 파도에 소리를 질러보자. 수많은 바람의 조상들이 하던대로 그렇게 해보자.

그저 살다보면 살아진다.

슬프면 슬픈대로, 힘들면 힘든대로 그저 그런대로 살아진다. 잘나면 잘난대로, 못나면 못난대로 그런대로 살아진다. 오페라 서편재의 <살다보면 살아진다>를 소개한다. “혼자라 슬퍼하진 않아 / 돌아가신 엄마가 말하길 / 그저 살다보면 살아진다 / 그말 무슨 뜻인지 몰라도 / 기분이 좋아지는 주문 같아 / 너도 해봐 눈을 감고 중얼거려 // 그저 살다보면 살아진다 ~~ / 눈을 감고 바람을 느껴봐 / 엄마가 쓰다듬던 손길이야 / 멀리보고 소리를 질러봐 / 아픈 내마음 멀리 날아가네 // ~~

그저 살다보면 살아진다. 사는게 뭐 대수인가, 뭐 별건가? 사는 날까지 사는거지. 사노라면 좋은 날도 있겠지. 그래, 기적같이 잘 산 세월이야. 또 남은 날도 기적이 일어날거야. 그분이 함께 하시니까..

 

이데올로기의 종언(終焉) (10-13-2017)

아직도 이데올로기 이념 논쟁으로 민족이 분열된 국가는 지구 상에서 한민족 밖에 없다. 지금까지 <빨갱이, 종북>이라는 용어를 쓰는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 없다. 젊은 시절 읽었던, 이제는 고전이 된 다니엘 벨의 <이데올로기의 종언>에서 결론지었듯이, 소련의 공산주의는 오래 전에 몰락하였다. 기원후 세계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유대인을 두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기독교의 초석을 만든 <사도 바올>과 공산주의 이론을 만든 <칼 마르크스> 라고 말하고 싶다. 소련의 공산주의는 칼 맑스가 말한 공산주의가 아니다.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 공산주의 우월성, 과학적 공산주의와 소련의 공산주의는 많이 다르다. 칼 맑스가 말하는 유토피아, 즉 공동 생산, 공동분배, 평등한 사회질서, 균등한 기회와 안정된 사회보장은 욕망의 인간사회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에 권력 계급은 독재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다니엘 벨은 미국식 자본주의나 소련식 공산주의와 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 이념은 종말을 고하고, 민족주의, 국력주의, 경제 민생주의 시대가 시작될 것으로 예언했다. 어쩌면 중국 손문의 삼민주의(三民主義), 즉 민족(民族), 민권 (民權), 민생(民生) 주의가 남북한이 함께 가야 할 길이 아닐까?

대한민국과 북한 독재정권은 태생부터 잘못된 것이다. 남한은 해방후 <독립 자치> 국가가 아니라, 점령군 미군정에 의해 <신탁통치> 되다가, 권력의 화신 이승만에 의해 친일파 내각으로 구성된 나라다. 이승만 내각에는 항일 독립운동가, 상해 임시정부 요원이나, 민족 지도자 등이 한명도 없었다. 일제로 부터 해방이 되었으면 당연히 임시정부 요원들과 항일 투쟁 독립 투사들로 국가가 구성되어야 하고, 친일파들은 공개 숙청 되어야 하는데, 이승만 정부는 정반대였다. 일제 강점기 35년동안 수많은 민중을 학살하고 고문한 <친일 부역자>들이 다시 정권을 잡아서 독립투사들을 죽이고 그 가족들을 연좌제로 몰아 씨를 말린 것이다. <국가 보안법>이라는걸 만들어서, 수많은 양민들을 <빨갱이>이라는 죄목으로 살해했다. 당신이 항일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면 이런 나라에서 살았겠는가? 그들은 월북을 하고 지리산 빨치산이 되었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사 교과서에는 일제시대 독립운동가와 민족 지도자들 역사가 없다. 민중은 무지했다. 그 친일 부역자들이 박정희 독재 정권으로 이어지고, 전두환, 노태우 정권까지 찬탈하면서, 현재까지의 대한민국 기득권 수구세력, 주체 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대한민국은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가 없다.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더 큰 거짓말을 하고, 부정부패를 감추기 위해 더 큰 부정부패를 저질러 왔던 것이다.

북한은 김일성이 항일 독립운동가 출신이고, 만주 지역, 북간도, 서간도, 연해주 지역의 많은 독립군과 독립 운동가들이 북한 정부수립에 참여했지만, 김일성은 독재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많은 항일투사들을 숙청했다. 다른 공산국가들 처럼 유토피아적 이념을 앞세우고 독재를 택한 것이다. 3대를 잇는 독재 국가는 북한이 세계 유일하다. 북한은 공산국가가 아니다. 남한 사람의 어느 누구도 북조선을 찬양하거나 동조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직도 기득권들은 진보를 <빨갱이>로 몰아 <보수 아닌 보수>로 위장한다. 인터넷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북한은 더 이상 통제된 독재국가가 불가능하다. 북한은 조만간 내부적으로 붕괴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 주민 경제가 자유롭고 잘 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햇볕정책>이다. 그래서 한민족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민족주의다. 남북한 모두 잘 사는 것이 민생주의다. 내 나라 내 땅은 내 힘으로 지키는 것이 자강 자력하는 것이며, 민권주의다. 한반도에서는 어떠한 전쟁도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우리세대는 해방후 그런 독재정권 시대에서 50년을 살았다. 너나 없이 누구나 그런 정권 아래서 일하다 보면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부역자>가 될 수 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 <한강>, <태백산맥>이 우리 세대가 살아온 세월들을 대표한다. 죽은 자와 죽인 자, 피해자와 가해자, 투쟁가와 부역자,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못배운 자, 그렇게 나뉘어서 서로 죽도록 싸웠다. 남과 북, 그들 모두는 우리 형제요, 같은 민족이다. 작가 황석영 씨의 말을 인용해 본다. “근대에서 현대로 가는 터널 앞에는 과거의 상처에 대한 기억과 망각의 갈등이 있다. 샤머니즘은 기억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불러내어 진실을 밝히고, 원한을 풀어주는 과정이다. 이것을 <해원 (解冤)>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 <용서하라>. 용서한 후에는 이제 같이 살자. 이것이 <상생(相生)>이다.”

해방 이후 조선의 역사는 같은 형제끼리 죽이고 죽는 원한의 역사다. 남북한 독재정권은 정말 많은 동포들을 고문하고 죽였다. 작년 2016년 9월부터 12월까지 <기억해야 할 근대사> 25회부터 38회에 걸쳐 칼럼으로 기록했다. www.willbusinessbroker.com에 들어가시면 볼 수 있다. 민중은 기억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민중이 깨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죄를 물을 수 있고 그래야 <적폐>를 청산할 수 있다. <적폐청산>은 정치적 흥정이나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야 용서가 되고  새로운 미래를 함께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부역자들 <일제시대> (10-06-2017)

 왜 대한민국은 곳곳이 썩지 않은 곳이 없으며, 범죄에서 자유로운 사회 지도층들이 드문가? 문제인 정부가 들어서자 마자 입법, 행정, 사법, 군사 곳곳의 <적폐청산> 작업들은 이제 시작에 불과한데도 자칭 보수 정치권, 보수 언론, 보수 법조계 등을 필두로 <정치보복>등을 외치며 죽기살기로 항거한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적폐청산>을 제대로 한 대통령이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적폐청산 하다가 죽었다. 적패의 중심인 기득권 세력은 이명박, 박근혜 때 만들어진 최근의 세력이 아니다. 조선 말기부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친일파 세력으로 힘을 키우기 시작한다.

<친나치 프랑스 부역자들 공개 처형> :

프랑스는 톨레랑스 (관용)의 나라다. 관용의 나라 프랑스가 관용하지 못한 사건이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4년 부터 1951년 사이 7년동안 나치부역자에 대한 <적폐청산> 이었다. 1940년 6월16일 부터 해방될 때까지 나치독일에 협력한 프랑스인에 대하여 유죄선고를 받은 어떤 국민이라도 공개 처형한 정치적 숙청 사건이다. 친나치 공조죄는 다음에 해당한다. – 나치 독일 협력자의 조직이나 당에 가담한 자. – 선전활동에 가담한 자. – 밀고하거나 고발한 자. – 어떤 형태로든 독일군에 관심을 보인 자 (독일군과 정을 통하거나 몸을 판 여자도 포함 됨), – 블랙마켓 (전시 상황 시장)을 이용하여 부당이득을 취한 자 등이다.

이들 <나치 부역자>에 대한 처형, 공개적 모욕, 폭행, 감금 등이 일어난다. 특히 <합법적 숙청>이라는 명분 아래 즉결처형을 시켰는데, 1944년말 부터 1945년 초까지 몇개월 동안에만  105,000명이 즉결처형 당했다고 한다. 드골 임시 정부 권한으로도 약 1만명을 반역행위로 <사형>시키고, 사형 다음으로 중형이라 할 수 있는 <국적 박탈>을 49,723명에게 내린다. 독일군과 관계를 가진 여자들 3만명을 색출하여 <머리 깎인 자들>이라는 죄명으로 머리카락을 빢빡 깎은 다음에,  1만명은 즉결 처형하고, 나머지는 거리에 끌고 다니며 모욕을 준다. 독일군을 도와준 민병대원들, 군사재판의 검사와 판사들, 고위 공직자들, 부당이득을 취한 기업가들, 나치 선전원, 나치 협력자, 부역자, 내통자 모두가 <적폐청산>에 해당된다. 관용의 나라 프랑스는 나치 부역자들을 끝까지 색출하여 그에 상응하는 죄값을 지불케 했다. 민족의 반역자에게는 용서와 관용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일제 식민지 친일 부역자들> :

19세기, 20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국가에서는 어디나 <부역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부역자 (附逆者, Collaborator)는 전쟁 중이거나 식민지로 점령당한 지역에서 점령군에게 협조하거나 동조한 사람을 일컫는다. 다시 말해 국가의 <반역자>를 총칭한다. <자발적 부역자>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국가와 민족에 반역 행위를 한 자이고, <강제적 부역자>는 강제 징용, 강제 노동을 당한 사람들로서 여기서 말하는 국가와 민족의 <반역자>에 해당되지 않는다. 조선의 친일파들은 35년 일제 식민지 기간동안 조선인 부역자의 범위와 숫자가 실로 광범위하다. 어느 제국주의라도 식민지 통치는 식민지 국가의 부역자들로 통치케 한다. <이이 제이 (以夷制夷)>, 즉 오랑캐는 오랑캐로 제압한다는 고사성어와 마찬가지로, 조선 민족에게 가장 악랄하고 못살게 만든 놈들은 일본놈들이 아니라 일제에 앞장선 친일 부역자, 즉 민족의 반역자들 이었다. 그들은 정치계, 법조계, 행정계, 경찰, 군인, 언론 신문사, 학계, 경제계, 문화계 곳곳에서 앞장서서 일제를 찬양하고 조선 민족을 학대했다. 친일 부역자들은 소위 배운 자들이었고, 가진 자들이었고, 사회 지도층들이었다.

그래 다 이해한다고 하자. 먹고 살기 위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힘을 키우기 위해,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등등 어떤 변명이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반역자는 용서를 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했어야 한다. 공개 사형시키고 국적을 박탈하고, 민족 반역자 명단에 올려 그 후손들도 그에 상응하는 죄값을 치르게 했어야 했다. 그래야 대한 독립을 위해 가산과 목숨마저 버리고 대한의 독립을 위해 싸운 독립군들과 그 후손들이 존경받고 대우받으면서 명예로운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핍박받으면서 참담한 식민지 백성의 삶을 산 수많은 조선의 민중들에게 떳떳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1945년 8월15일 조선은 해방이 되었지만, 친일 부역자와 민족의 반역자들은 즉결 사형을 당하기는 커녕, 다시 민중을 억압하고 죽이는 이승만 독재정권의 부역자들로 다시 부활한 것이다. 왜 그랬을끼? 조선은 조선 스스로의 힘으로 투쟁해서 독립한 것이 아니요, 자력으로 해방을 쟁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은 어느날 갑자기 미국에 항복선언 하고, 일본 스스로 조선에서 물러갔기 때문이다. 조선은 독립할 준비가 안된 것이다. 그러기에 민족의 지도자는 여러명 있었고, 독립군, 독립 운동가들도 있었지만, 일치단결하여 하나가 되지 못했다. 한명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전 국민들이 똘똘 뭉쳐 있지 못했다. 독립이 되면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청사진이 없었다. 노예생활을 하면서도 애굽을 탈출시킨 모세와 같은 영적 지도자가 없었던 것이다.

 

 < 5.18 광주 민주 항쟁> -피의 항쟁 (09-29-2017)

<5월20일> 23시15분 : 광주 시민에 대한 <무차별 발포명령>은 보안사령부 (전두환 소장)-> 505 보안부대 -> 3공수여단 (최세창 준장), 7공수 여단, 11공수여단을 통해 계엄사령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하달됨. 밤12시 발포 개시, 광주역 시민4명을 살해함.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은 5월 21일 저녁7시30분에 발표되지만, 전두환은 하루 전에 이미 발포 명령을 하달하였음. 따라서 전두환의 ‘자위권 보호 차원에서 발포’는 새빨간 거짓임.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

<5월21일>  – 오전 10시  광주역 광장에 10만명의 시민들과 버스, 택시 200대가 모여 들었다. – 오전 12시까지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겠다는 계엄군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음. –오후 1시 건물 외부 확성기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계엄군의 일제 사격이 시작됨. 애국가는 발포 사격 개시 신호였음. – 21일 광주역 시위 현장에서만 최소 54명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이 부상당한다.  – 당시 광주 120개 개인병원과 3개 종합병원에는 사상자들로 발디딜 틈도 없었음. -21일 저녁 광주 시민들은 <무력항쟁>을 선택, 광주 외곽 경찰서, 파출소 무기고 등을 습격, 소총 5,400정, 수류탄 1천개 이상을 확보함. – 아세아 자동차를 습격하여 200여대 트럭을 확보. – 이때부터 무장한 시민들은 스스로를 <시민군>이라 칭함. – 21일 오후 6시 진압군은 도청에서 철수. 광주 외곽에 주둔하면서 광주 시내를 철저히 봉쇄함. –외곽지역 민간인 학살 시작됨. – 광주는 철저한 고립무원지역이 됨. –광주를 제외한 대한민국 국민들은 광주 현장의 참혹한 사태를 전혀 알지 못함. –언론에는 북괴의 지령을 받은 김대중이 남파된 북괴 특수군과 함께 광주 시민들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키고 무기를 탈취해 방송국을 불태우고 계엄군을 공격하고 있음. 광주는 무정부 상태이며, 출입 통제 상태” 라고만 전국에 방송됨. – 21일 오후 2-4시 공격형 헬기 (코부라)의 기총사격이 시작됨.

– <5월22일> 수습대책 위원회 (신부, 목사, 공무원 등이 주축)가 구성되어, 자율적 수습과 군대 투입금지, 시민군 총기 반납 등을 최규하 대통령에게 건의하나 수용되지 못함.

– <5월24일> : 신군부는 주한미군 사령부에 전방부대 20사단을 광주로 이동하겠다고 요청함. 미국은 이를 승인함.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미 전두환 군사정권을 암묵적 승인한 상태였으며, 신군부는 미국이 무력 유혈진압을 사전 승인한 것으로 선전, 후일 역사에 정당함을 주장키 위한 계략임.

– <5월26일> : 정부 최후 통첩, 시민군은 무기를 버리고 도청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군대로 강경진압 할 것을 통보. – 시민군은 외신기자 회견에서 신군부의 잔혹성을 증명하기 위해 결사항쟁 할 것을 선포함. – 26일밤 3만명의 시위대 중에서 고등학생 등 99%는 집으로 자진 돌려 보내고 1%만 남아 결사항쟁하기로 함. 세계 혁명사에 20세 미만의 미성년자들을 집으로 되돌려 보내는 혁명군은 없었음. 시민군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지키다 죽어야 한다. 산사람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의 빛나는 미래를 위해 항쟁의 마지막을 자폭으로 끝내서는 안된다. 자, 고등학생들은 먼저 나가서 살아라. 그리고 증인이 되어라.”

-<5월27일> – 0시 광주 시외통화가 모두 끊김. –새벽 1시, 공수특전군 광주 시내로 진입. –여성의 유명한  가두 방송 시작.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모두 일어나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겁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 주십시오” 그러나 아무도 도와줄 수 없었음. –새벽 4시 도청은 계엄군으로 완전 포위됨. – 마지막 경고 방송 후 일제 사격 개시. – 투항자도 사살함. –도청 시민군이 5~6백명 중 2백명이 잡혀갔으니, 사망자는 160~400명으로 추산됨. – 새벽5시 시민군 마지막 항쟁, 공수 계엄군 광주 도청 함락.

-<5.18 광주항쟁>에서 계엄군에게 지급된 무기는 실탄 130만발, TNT 450파운드, 수류탄 4,890발, 발칸포 1,500발, 클레모어 지뢰 180개, 권총 2,754기, 기관총 10,759기, 육군 공격용 헬리콥터 5대, 그외 공군 공격형 훈련기 (사천비행장), 공군 전투기 (수원비행장) 공대지 미사일 장착 대기중 등등.. 세계 역사상 이것은 시민진압이 아니다. 전두환 계엄군은 북한군이 아닌, 대한민국 국민을 대상으로 전쟁을 한 미친 놈들이다.

 – <5.18 광주 사료편찬 위원회>는 사망자 265명, 행방불명 81명, 부상자 3,378명, 기타 910명, 총 피해자 4,634명로 발표한다. 문재인 정부에서 많은 사실들이 밝혀질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계엄군들이 침묵하고 있다. 계엄군 말고도 <5.18 광주항쟁>에 관련된 수많은 가해자, 방관자, 목격자들이 있다. 선량한 시민들이 수백명 죽었는데, 죽은 자는 있고 죽인 자는 없다. 거짓되고 비겁한 역사로 사는 민족은 미래도 거짓되고 비겁하다. <광주 항쟁>에서 죽은 자들의 목숨을 헛되게 해서는 안된다. 물론 <5.18 광주 항쟁>이 있었기에, <6.10 민주항쟁>이 있었고, 미흡하나마  지금의 민주주의가 시작될 수 있었을 것이다. <5.18 광주 항쟁> 영혼들의 명복을 빈다.

 

 < 5.18 광주 민주 항쟁> -서막 (09-22-2017)

<5.18 광주 민주 항쟁>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 10일간 전라남도 광주 지역 일대에서 발생한 민중 항쟁이었다. 자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국군이 자신들의 독재 정권장악을 위해, 선량한 광주 시민들 수백명을 역사의 유래가 없는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한 사건이다. 27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세계 홀로코스트 보다 더 악랄한 <5.18 광주 대학살 > 전모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시금 조선의 백성임이 부끄럽고도 치욕스럽다. 우리는 정말 잔인한 조선 민족이다. 아직도 세계 유일한 분단 민족이면서도 서로 핵폭탄으로 불바다를 만들어 죽이겠다고 어러렁 대는 민족이다.  

<5월 17일> 전두환은 군사 쿠테타를 일으킨다.  5.17 비상계엄이 선포되기 하루 전인 5월16일에 이미 800명의 재야인사 블랙리스트가 하달되고, 600명이 체포된다. 17일 김대중을 비롯한 37명을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한다. 전국적으로 재야인사와 운동권 학생들 총 2,700명이 체포된다. 주한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은 “김대중을 체포하는 것은 볏단에 불을 들고 뛰어든 것과 같다.”라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경고한다. 죄목은 김대중은  해방 이후부터 빨갱이 골수 공산주의자이며, 반국가 단체 한민통을 만들고, 불순분자들을 접촉, 내란 음모, 사주한 혐의다. 반면에 김영삼은 가택 구금상태이므로 그대로 두기로 한다. 그 이유는 신군부가 김대중과 전라도를 빨갱이 공산주의자들로 몰아, 경상도와 전라도의 감정싸움을 유발키 위함이다.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각종 악성 유언비어는 이승만, 박정희 시절부터 오랜 세월동안 독재정권을 찬탈하기 위한 지역갈등 모략 전술이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에도 “경상도 공수부대 군인들이 40만 전라도 사람들 씨를 말린다.”라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김대중 외에도 문익환, 김동길, 고은, 리영희 등 기라성 같은 재야인사들이 체포, 구금,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또한 유신의 권세가들을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로 체포한다.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오원철 등이다. 그리고 5월 17일 전국 대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지고, 대학교 교정 입구에는 계엄군들이 탱크로 점령하고 있었다.

다음의 글들은 황석영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최영태의 <5.18 그리고 역사>, <한국 현대사 사료연구>, 최정운의 <오월의 사회과학> 등에서 인용한다.

<5월18일> 아침은 광주도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였다. 7공수여단이 전남대, 조선대에 들이닥쳐 운동권들을 체포하고 탱크로 점령해 버린다. 거기다 전날 5월17일 김대중 선생을 국가 내란반란죄로 체포하였기에 전라도 민심은 극도로 예민해 있었다. -5월18일 10시 전남대 정문 앞에서 학생 100명이 공수부대원들과 대치. –일부 학생들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 으로 돌 투척. –공수부대 돌격 명령. – 공수부대원 700명이 무력진압 함. – 주요 진압 무기는 쇠심이 박힌 살인용 곤봉이었으며 주요 공격 부위는 머리임. 곤봉 한방이면 두개골 함몰, 뼈가 부서짐, – 피투성이 시위 학생들이 금남로 광주 시내로 도망감. – 오후 2시 학생 시위대 2천명으로 증가. –공수부대원들의 잔악성 원인 : 광주로 투입되기 몇주전 부터 잠을 재우지 않고 악에 바치도록 힘든 <충정훈련>을 받게 함. 빨갱이 김대중과 광주 시민들이 남파된 북괴 특수군과 함께, 대한민국을 공산화 한다는 사상교육을 철저히 시킴. 고향이 전라도 출신 공수부대원들은 배제시킴. 파병된 공수부대 하사관급 대부분은 월남전 참전자들로서 실전의 잔인함이 몸에 배어 있는 자들임. 심지어 광주시민을 베트콩이라 생각하고 죽였다고 함. – 3,4명이 1개조로 시위대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은 무조건 찾아내어 두둘겨 패고 체포해 끌고 감. 18일 하루동안 270명을 트럭에 싣고 감.

<5월19일> 초기진압이라는 명목으로 정호영은 공수부대 1,146명을 광주로 증파시킴. – 버스, 택시를 검문 검색, 청년들을 무조건 잡아감. – 시위대가 돌과 화염병으로 맞섬. – 공수부대 총검으로 시위대를 난자질 하기 시작함. – 여고생 젖가슴을 난자질 했다는 첩보가 올라옴.  -여성의 배를 찔러 살해함.  -진압군들의 각종 잔임함은 상상을 초월함. – 노인, 여자, 어린 학생 가리지 않고 곤봉으로 때리고 총칼로 찌름. 심지어 경찰들 마져 시민들을 도망치라고 해서 두둘겨 맞음. – 광주 교육청은 광주 일대 초,중,고교 무기한 휴교 조치 발령. – 시민들, 고등학생들 시위대에 참가하기 시작함. 시위대 1만명이 넘어섬.

-<5월20일> 시위 3일차 : – 광주 시내 버스, 택시 200여대가 시위대 앞장에 섬. – 전날 머리가 으깨져 피를 많이 흘리는 시위대 부상자를 택시 운전사가 발견하고는 병원에 데리고 갈려고 태우자 진압군이 대검으로 택시 운전사를 찔러 살해함. 이런 사건이 3건 이상 발생함. 이것이 20일 200대 차량 시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됨. – 2시30분 화염 방사기에 여러명이 현장 즉석에서 불타 죽음. – 저녁 8시40분 MBC가 불타기 시작함. 조선,중앙, 동아는 물론, 방송사, 국내 언론들 전부가 광주 사태에 대해 일체 보도하지 않음. KBS, 세무사 등이 불타기 시작함. –밤 11시 부터 공수부대원 각자에게 실탄 120발씩 지급됨.  

 

 빼앗긴 <서울의 봄> (09-15-2017)

1980년 <서울의 봄>은1980년 3월 대학교 개학과 함께, 신군부의 군사반란과 정국 장악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1980년 4월부터 전국 대학으로 규탄대회가 끊이지 않는다. 더구나 김옥길 교육부 장관의 <유신시대 어용교수 인정 및 퇴진 운동>과 함께, 대학교 1학년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열흘간 군대 입대해 받던 <병영 집체 거부운동>을 빌미로 <대학 민주화 바람>은 4월말까지 계속된다. 

 5월2일 서울대 1만명 이상의 학생들이 모여 <계엄 해제>, <신군부 전두환 및 유신잔당 신현확 퇴진>, <정부 개헌중단>, <관제언론 비난> 등의 슬로건으로 비상학생 총회가 열림, – 5월3일 전국 대학 총학생회 간 공식적 연대방안 모색, – 5월9일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이 고려대학에서 모여 <총학생회 회장단 회의> 개최, -<5.15 대학생 총궐기설>, <5.12 신군부 쿠테타설>, <북한군 특수 8군단 남침설>이 유포된다. 또한 전두환 신군부는 <북풍공작>을 실시한다. 철없는 대학생 시위가 대한민국을 절대절명 위기 사태로 몰아가고 있다는, <좌익 빨갱이>, <북괴 남파 조정설> 등, 고전적 수법이 반복된다. 이 수법은 이승만 자유당 시절부터 지금까지 지겹도록 울겨먹는 수법이다. 전두환 신군부는 5월초부터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비상기구 설치> 등 <시국 수습방안>을 마련하고, 실제로 5월17일 24시를 기해, <전국 비상계엄>을 선포, 임시국회 무산, <국보위- 국가보위 비상대책 위원회 –내각을 장악하기 위한 행정기구>를 설치한다. 이것이 <5.17 군사 쿠테타>다. 제 2차 군사독재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서울의 봄> 하이라이트는 5월14일, 15일 양일 간에 일어난다.-5월14일 오전 8시50분 신군부 진압군 투입 지시, -5월14일 정오 7만명 대학생 서울역에 집결, 지방 11개 대학생 3만명도 가두 진출함. –이기택 외 66명 국회의원 비상계엄 해제 건의안 제출, -5월15일 지식인 134명 비상계엄 해제 촉구 시국 선언문 발표, – 5월15일 오후 3시경 서울시내 30개 대학생 10만명 서울역 광장에 모여 <계엄철폐, 민주 일정제시 요구>, -전국 주요 도시 부산, 인천, 대구, 광주, 목포, 청주, 춘천, 천안 등지에서도 시위대 신군부 성토대회가 열림.

<서울역 회군> : 5월15일 서울역 광장에는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대학생 시위대와 시민 등 수십만명 (일각에서는 15만명)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날 나도 공군본부에서 근무할 때인데 퇴근 후 서울역 현장에 있었다. 나는 그렇게 많은 시위 군중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농성에 가담했고, 버스를 탈취한 민중들이 진압군을 향해 돌진하곤 했다. 전경 1명 사망, 113명 부상, 가스차 1대 전소, 차량 7대 파손. <부마항쟁> 이후 최대 시위 현장이었다. 이날 저녁에 서울지역 13개 대학교 총학생회장들이 모여서 이 수많은 군중들을  어떻게 할 것이지 결정한다. 해산시킬 것인가, 진군할 것인가, 아니면 그 자리에서 농성만 할 것인가?  격론 끝에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 – 자유 한국당 16대~20대 5선 국회의원 및 현재 국회 부의장>의 주장대로,  지금은 충돌하여 유혈사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일단 해산하고, 준비해서 다음에 집결하기로 한다. 서울대 대의원회 의장 유시민, 고려대 총학생회장 심계륜 등은 여기서 물러나면 신군부에게 쿠테타를 일으킬 명분을 준다.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는다. 끝까지 투쟁하자고 하지만, 저녁 8시 30분에 심재철은 해산 명령을 내림으로써 <서울의 봄>은 <5.18 광주 학살>이라는 불행한 역사의 서막을 올린다.

 5월16일 55개 대학 학생대표 95명이 이화여대에 모여 <전국대학 총학생회 회장단 회의>를 열고, 김영삼 –김대중 4월 통합협상이 결렬된 뒤 계엄해제 등 <6개 개헌안>을 제시하지만, 신군부의 음모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5월17일 오후 5시 전두환 신군부는 <전국 비상 계엄령>을 확대 선포하고, 전국 시위 주모자들을 기습 체포한다. 또한 일본 국회의원단의 등소평 회담 후 북한 <남침 불가> 확답과 르몽드지의 <남침 불가론> 등을 신문기사에 못내도록 일체의 보도 통제를 한다. 일각에서는 서울대 총학생회장 신재철이 내린 <서울역 회군>이 대한민국 민주화를 10년 후퇴시켰다고 평가한다. 만약 유시민의 주장대로 5월15일 밤 수십만명 시위 민중이 해산하지 않고 진압군과 충돌했을 경우,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었을 경우, <5.18 광주 사태>는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신군부도 전국 계엄을 보류하고 정권장악을 망설였을 수도 있다. 1980년 <서울의 봄>은 그렇게 전두환 신군부에게 <민주,인권, 자유>를 빼앗기고 말았다. <서울의 봄>이 실패한 원인은 <5.18 광주 항쟁>과 <6.10 항쟁>에 비해 <민중>의 협력과 동참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혁명>이라 하기에는 대학생 지도부들이 너무 아마추어들이었고, 사전 준비도 충분하지 못했다. 또 정치권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의 지도자들도 단합과 혁명 의지가 부족했다. 그놈의 당파싸움은 지금까지 계속되니,ㅉㅉ., 그래서 역사는 <만약>이라는 가정이 없는가 보다.

 

 12.12 군사반란 사건 (09-08-2017)

1979년 <10.26 박정희 저격 사건>의 주범 김재규에 대해서는 역사가 좀더 흐른 다음에 재평가 될 것이다. 그는 국가 내란을 일으켜 권력을 찬탈하기 위함이 아니다. 죽은 자의 무덤에서 춤출 위인이 아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우발적이고 비계획적이다. 유신 독재에 대한 분노와 애국충정의 무인 (武人) 반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역사의 또 다른 아이러니는 시해사건 3일전인 10월23일,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보고한 <박근혜- 최태민> 보고서다. 두사람의 문란하고도 부적절한 사생활과, 구국 여성봉사단을 통한 각종 부정축재 행위에 대한 내용이다. 박정희는 이 보고서를 묵살하고 박근혜를 총재, 최태민을 명예총재에 임명한다. 딸과 늙은 개를 정치에 이용하는 박정희의 심리 상태가 경악스럽다. 김재규의 살해 사유 중, 하나가 된 이 보고서는 오늘날 대한민국 역사를 뒤집는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사건으로 반복된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김재규의 <10.26 사건>을 수사하던 합동수사 본부장 겸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군대 사조직인 <하나회> 멤버 34명과 와 함께 일으킨 사건이 <12.12 군사 반란 사건>이다. 5.16 군사 쿠테타에 이은 두번째 군사 쿠테타다. <하나회>는 육사 11기 출신의 젊은 장교들 사조직으로써, 박정희가 김재규의 중앙정보부, 차지철의 경호실, 전두완의 보안사령부 3개 조직을 서로 견재하도록 키워온 군부 비밀 사조직이었다. <10.26 사건>이후, 모든 권력은  보안사령관, 중앙정부장 서리, 합동수사 본부장인 전두환에게 집중된다. 전두환은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정치에 관여하는 등 전횡을 일삼는다. 이에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가 전두환을 동해안 경비사령관으로 보직 이동시키는 등, 하나회 주요 핵심 인물들을 한직으로 밀어내려는 정보를 입수한 전두환이 <12.12 군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일단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대장을 체포한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 노재현 국방장관은 무능했고, 진압군이었던 친 정승화 계열인 특전사령관 정병화 소장, 강직한 수도경비 사령관 장태완 소장,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 등은 전두환 합동수사본부 측을 반란군으로 규정한다. 대정부 전복시도나  민간소요 무력 진압을 위한 부대가 <충정부대>다. 수방사와 특전사 1.3. 7.9. 공수 특전단, 수기사, 17 .20. 26, 30사단이 여기에 해당한다. 상호간에 <충정부대> 병력을 동원하지 않는다는 신사협정을 꺠고, 전두환은 제1, 3, 5, 공수여단을 동원해 국방부, 육군본부, 특전사령관 정병화 체포, 수경사령관 장태완을 제압한다. 또한 노태우의 최전방 예비사단  9사단, 30사단을 중앙청으로 출동하라고 지시한다. 전방부대 동원은 북한군 남침과 직결되므로 한미연합사령관 사전동의를 얻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노태우는 병력 절반을 쿠테타에 동원한다. 그 공로로 제2인자가 되고 나중에는 대통령까지 된다.

<12.12 군사 반란>에 가담한 주요 <신군부> 멤버는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 – 9사단장 노태우 소장, -1군단장 황영시 중장, -국방부 군수 차관보 유학성 중장,-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 -50사단장 정호영 소장, – 20사단장 박준병 소장, – 1공수 박희도, 3공수 최세창, 5공수 특전 여단장 장기오 준장, – 보안사령부 허화평 대령, 허삼수 대령, 권정달 대령, 이학봉 중령, – 수경사 30경비단장 장세동 대령, – 33 경비단장 김진영 대령 등이 있다. 이들 신군부가 전두환 정권 7년, 노태우 정권 5년 도합 13년을 대한민국 지배 세력으로 군림하며 온갖 영화와 부정부패를 일삼는다. 하지만 <12.12> 반란군들은 국민들과 대학생, 야당들의 반대로 눈치를 보느라 즉시 정권을 빼앗지 못한다. 1980년초부터 전두환은 허문도 등의 <K-공작 계획>을 실행하여 언론을 통폐합, 조정, 통제하기 시작한다. 4월14일에는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되어 대한민국 정보기관을 모두 장악한다.

결국 1980년 <서울의 봄>을 거쳐, 신군부는 <12.12 군사반란 사건> 부터 5개월에 걸쳐 1980년 <5.17 군사 쿠테타>를 일으켜 강제적으로 정권을 찬탈한다.

문민정부 시절, 신군부는 <12.12 사태> 내란 반란죄로 체포되어 1심에서 – 전두환 사형, 노태우 유기징역 최고 형량인 22년 6개월을 선고 받았다가, 2심에서 각각 무기징역, 징역 17년으로 선고받는다. -정호영, 황시영, 허화평, 이학봉 각각 징역 10년, – 허삼수, 유학성, 최세창, 이희성 각각 징역 8년, – 장세동, 차규헌, 주영복 각각 징역 7년을 받았다. 그런데 왜 김영삼과 김대중은 이들을 사면시켜 주었는지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들은 지금도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 1979년 대구 경북 여론조사에서 시민 63%가 전두환, 노태우 사면에 찬성했다고 하니 대한민국 백성은 정에 약하다고 해야 하나, 망각과 무지하다고 해야 하나? 자세한 내용은 유투브를 통해 MBC 드라마 <제5공화국>을 보면 알 수 있다.

<서울의 봄>은 1979년 <10,26 사건> 이후 (1979년 10월26일~ 1980년5월17일) 사이에 발생한 민주화 운동을 일컫는 말이다. <12.12 신군부 반란 사건>은 대학생들이 겨울방학 때 일어난다. 1979년 12월6일 제 4공화국 최규하 정부는 긴급조치를 해제하고, 재야인사들을 복권한다. 시민사회 원로들은 유신헌법 폐지와 민주적 선거를 요구한다. 여야는1980년 5월20일 국회를 열어, 계엄령 해제와 유신헌법 개정논의를 하기로 합의한다. 이제 국민들은 정상적인 민주국가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부마 민주항쟁과  10.26 사건 (09-01-2017)

 유신헌법 시기에 벌어진 사건이 김대중 납치 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민혁명당 사건, 장준하 의문사 사건.. 등등이다. <유신철폐!>, <독재타도!>. 유신체제 이후 1970년대에 얼마나  많은 무고한 학생들과 시민들이 고문 당하고 죽어갔는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은 오직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죄없는 백성들을 <빨갱이>로 몰아,  죽이고 또 죽였다. 유신헌법을 기초한, 유신의 앞잡이 김기춘이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 의 주범이라니, 그 유신의 뿌리는 현재까지도 실로 깊고도 광범위하다.

1979년 10월 16일 <부마 민주항쟁(釜馬 民主抗爭)>이 일어나기 까지 백성들은 유신 독재의 공포 앞에서 침묵해야 했다. -1978년 12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집권당 공화당은 신민당에 패배한다. – 1979년 5월, 신민당 대표로 강경파 김영삼 당선. – 1979년 8월, YH 여공 신민당사 점거 사건, – 1979년 10월 4일, 김영삼 신민당 대표를 국회의원 강제 제명. -1979년 10월 16일, 부마 민중 항쟁 발생. 5천명 부산대학교, 동아 대학교 학생들이 국제 시장 일대에서 시위, 저녁에 시민들 합세. 5만~7만명으로 시위 인파 확산 (대학생, 고등학생, 회사원, 상인, 노동자, 가게 종업원, 도시 하층민 등). 그래서 <부마 항쟁>을 <민중 항쟁>이라고 한다. -10월17일, 부산 시민들은 21개 부산지역  파출소, KBS, MBC, 부산일보사, 경남도청, 서구청, 부산세무서에 투척, 파괴, 방화. -10월18일 0시, 부산지역 계엄령 선포, 육군 1공수 특전사 특수부대, 제1해병 사단을 계엄군으로 2천명 투입, 1,058명 연행, 경남대학교 1,000명 대학생 마산 시위, -10월 19일, 마산지역으로 시위 확산, -10월20일, 마산 수출지역 근로자, 고등학생들 시위 참가, 마산 위수령 선포, -10월26일 김재규의 박정희 시해 사건. <유신의 심장을 향해 쏘아라>. 이렇게 유신의 종말은 처참히 끝을 맺는다.

부마 항쟁에 시민들이 합세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자. 박정희 식의 국가 주도 경제는  발전에 한계를 들어낸다. 부가가치세 도입 등으로 세금 폭증, 부동산 가격 폭등,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으로 대기업들 중복 과잉 투자, 경공업 경시로 은행 대출 감소 등로 부산 (신발, 섬유, 합판 산업 위주), 마산 (마산 수출 경공업단지) 지역 경제 침체 등 지역 민심이 극히 나빠진다. 더구나 부산, 경남 지역의 정치적 대부 김영삼 신민당 대표를 국회의원에서 강제 제명 시킨 것이다. 또 대외적으로 인권을 중요시 하던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박정희 독재 정권에 대하여 강한 불만을 수차례 표출하며, 주한 미군 철수를 거론하는 등, 한미 동맹이 최악의 상황이 된다. 또한 제2차 석유 파동으로 인플레이로 인한 물가 상승, 중화학 공업 경상수지 악화 등 여러 악재가 겹치게 된다.

1979년은 박정희가 5.16 군사 쿠테타를 일으킨지 만 18년이 되던 해였다. 이미 박정희는 오랜 독재 정치로 국가 지도자로서의 판단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버러지 같은 놈’ 차지철과 같은 간신들로 들끓고 있었다.

1980년 <5.18 광주 대학살>의 징조는 이미 1979년 <부마 민주 항쟁>에서 예고 되었다. 부마항쟁 현장을 다녀온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보고하기를 “제가 내려가기 전까지는 시위대가 남민전 (남조선 민족 해방전선 – 유신체제 타도를 위한 반체제 지하조직. 이재오, 김남주 시인 등)과 부산지역 불온 대학생들이 지역 양아치들과 주축이 된 데모라고 생각했지만, 160명 연행자 중 학생은 16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선량한 일반 시민이었습니다.” 김재규는 부마항쟁이 민중봉기이며 유신체제에 대한 민심이반으로,  더이상 유신체제 존속이 어렵다는걸 직감한다. 이에 박정희는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는가?” 라고 말한다. 이에 차지철은 한술 더 떠서 “각하,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명을 학살했는데, 우리가 일,이백만명 희생시키는 것 쯤 별 문제 있겠습니까? 그깟놈들 탱크로 밀어버리죠” 라고 정신나간 소리로 부추긴다. 캄보디아 킬링필트는 불과 3년전인 1976년에 발생한 사건이다. 실제로 차지철은 부마 항쟁에 기갑부대를 투입할려고 한다.

만약에 1979년 10월26일 궁정동 만찬에서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하지 않았다면?, 5.18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몇달전에, 부산과 마산에서 계엄군에 의해 대규모 민중 대학살사건이 발생했을 것이 자명하다. 두사건을 대비해 보자. 너무나 동일하게 일치하는 상황이다. 박정희와 전두환 군부 독재자, 경상도 부산 마산과 전라도 광주, 김영삼 국회의원 제명과 김대중 납치, 순수 시민혁명,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주동설과 북괴 특수군 남파설, 무고한 시민을 향한 발포 명령, 민중 대학살. 진상규명 흐지부지, 여야 정치인들의 이합집산과 야합, 반복되는 권력의 부정부패..  끔찍한 한국의 현대사다. 그러니 그 당시 군부 권력층의 두뇌구조는 죄없는 백성들을 대량 학살 해서라도 권력을 찬탈해야 한다는 욕망이 철저히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자들이 아직도 살아있다. 역사의 죄인들은 많으나 그들과 가족들은 처벌받기는 커녕, 한국의 지도층으로서, 부유층 기득권자로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적폐청산 or 헬조선??

 

 1980년의 봄 – <10월 유신> (08-25-2017)

어제 아내의 성화로 <택시 운전사>라는 영화를 보았다. 영화를 보는 도중, 그냥 눈물이 흘렀다. 참으로 곤고한 한국인의 삶이다. 내가 함께 살아온 세월이다. 한국 전쟁이후 태어난, 베이버붐이라는 우리 세대는 험란한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서 살았던 세대다. 1950년대 이승만 자유당 독재시절에 태어나서, 1960년, 1970년대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시절에 청소년기와 청년 시절을 보냈다. 1980년대 전두환, 노태우 군사 독재 시절에 30대 사회 초년병 시절을 거쳐 1990년, 2000년대 김대중, 노무현 민주화 정권 시절에 중장년 시절을 보냈다. 이제  2010년대 이명박, 박근혜 부정부패 정권과 촛불혁명으로,   지친 육신을 가누지 못한채 어정쩡한 노인 시절을 맞고 있다.

영화속의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즉 1980년 5월 <광주의 봄>을 알기 위해서는 1980년 4월 <서울의 봄>을 알아야 한다. 1980년 <서울의 봄>을 알기 위해서는 1979년 <10,26 사태>를 알아야 하고, <10.26 사태>를 알기 위해서는 1979년 <부마 항쟁>을 알아야 한다. 1979년 <부마 항쟁>을 알기 위해서는 1972년 <10월 유신>을 알아야 한다. 나는 73학번이다. 온전히 대학 학기를 마친 기억이 없다. 대학 4년동안 허구헌 날 데모했다. 제대로 학기말 고사를 치루지 못했다. 대학 휴교와 조기 방학이 일상화 되던 시절이다. 대학을 마치고 군대를 갔다. 77학번 이후 후배들이 <80년 봄항쟁>을 할 때는 같은 세대 군인들이 학교를 탱크로 점령했다.

그때 나도 군인이었다. 만약 내가 공군 장교가 아니고, 특전사 장교로 광주 항쟁에 투입 되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실제로 나는 회사원 시절에 만난, 광주 항쟁 현장에 투입된 특전사 장교를 알고 있다. 그는 75학번 후배였는데, 그때 <광주 현장>에서 만행을 저질렀던 군인들을 지휘한 한명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현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고백하지 못했다. 참회하기 위해 교회에도 나가고 결혼도 했다. 누가 봐도 장래가 보장된 엘리트 회사원 이었다. 하지만 만나면 술이고, 퇴근하면 술이고, 맨날 술에 쩔어 살았다. 결국 그는 마흔의 나이에 자살하고 말았다. 동 시대를 살았던 많은 젊음이들의 또다른 아픔이다. 수많은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또다른 죽음이다. 조선의, 대한민국의 역사는 왜 그토록 많은 피를 먹어야 사는가?  아직도 세계 천지에 유일하게 종북 좌빨, 빨갱이 하면서, <이데오르기 이념 투쟁>을 하면서 서로 죽자고 사는 민족이다. 1980년의 봄을 알아야 한다. 그 시대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영화 <택시 운전사>를 이해할 수 있다. 또 다른 영화 <변호인>, <화려한 휴가>, <26년>, <박하사탕>, <남영동 1985>, <꽃잎>, <오월애> 등을 이해할 수 있다. 언젠가는 모든 진실이 밝혀지겠지. 젊은 세대를 위해 간단히만 살펴보자.

<10월 유신>

<유신헌법>은 1972년 10월17일 박정희 자신의 종신집권을 하기 위해 만든 반민주적 헌법이자 친위 쿠데타 헌법이며, 독재정치의 신호탄이 된다. 유신헌법을 만든 배경은 3선개헌으로 대통령 후보자격을 얻게 된 박정희는 당연히 대통령에 당선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지만, 김대중과의 사투에서 근소한 표차이로 가까스로 당선된다. 또한 뒤이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이 개헌저지선을 확보하자, 집권직후 1971년 <국가보위 특별조치법> (일명 국보위법)을 제정한다. 그리고 1972년 10월 17일 <유신헌법>을 발표하고, 다음날 10월 18일 계엄포고 1호를 선포한다. 집회 및 시위 금지, 언론 출판 방송 사전검열, 대학 휴교 조치, 직장 태업 금지, 유언비어 날조 금지, 야간통행 지속 금지 등이 시행된다. 또한 군대를 동원해서 국회를 강제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 정당 활동을 중지한다. 군대를 동원한 친위쿠테타다. 야당 국회의원들을 감금하고 고문한다. 11월21일 유신헌법 찬반투표를 하지만, 이미 제도 정치권, 학교, 언론, 종교계 등 모든 반대 세력들을 강제로 탄압시킨 뒤, 부정선거를 치룬 투표였다. 국회를 해산하고 대통령이 임명한 국무 장관들이 유신헌법을 심의하고 통과시킨다.

국민들은 실상을 알지 못했다. 이미 언론은 독재의 주구(개)가 되었으니, 이때부터 국민은 귀머거리며 장님이자 벙어리가 되었다. 국민들은 <7.4 남북 공동성명>이 있었기 때문에 곧 통일이 될거라 기대했다. 또한 계엄령 선포 시기였다. 유신헌법은 국민투표 90% 이상의 득표율과 지지율로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된다. 또한 북한도 1972년 사회주의 헌법을 선포하고, 1인 독재의 국가 주석을 신설하였다. 그러니 1972년에 남한과 북한 모두가 독재주의를 선포한 꼴이다. 남북한 모두의 백성들은 그렇게 기만되고 무지하였다.

<유신헌법>의 기본골자는 첫째, 대통령 직선제 폐지 및 통일주체 국민회의 간접선거. 둘째, 국회의원 1/3을 대통령 추천으로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선출. 세째, 헌법 효력을 일시 정지 시킬 수 있는 대통령 긴급 조치권 부여. 네째, 대통령이 국회 회산권 및 모든 법관 임명권 보장. 즉 3권분립 붕괴 및 독재권 보장. 다섯째, 대통령 임기를 6년 연장하고, 연임 제한을 철폐하여 종신 집권을 가능케 함이다.

 

 품격 (品格) 시대 (08-18-2017)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은 <신사의 품격>, <숙녀의 품격>, <어른의 품격>.., 어떤 품격을 갖추고 사십니까? 품격은 품성(品性)과 인격(人格)의 합성어라고 한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품격>있는 <멋쟁이> 삶을 사는걸까? 삶이란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투쟁이라는데..

너나 없이 우리는 출세 제일주의, 황금 만능주의, 능력 지상주의 시대에서 교육받고 경쟁하며 살아왔다. 타인과 비교하며 비교 당하며 살아왔다. 당신의 이력서에 들어갈 덕목을 <외적 성공>요소라 한다면, 당신의 조문(弔文)에 들어갈 덕목은 당신의 <내적 성공>요소라 할 것이다. 우리는 평생 대부분의 시간과 노력들을 이력서에 들어갈 외적 성공요소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학교 교육, 각종 자기 계발서, 성공 스토리, 동기부여 서적, 제반 경영 서적들.. 등이 대표적이다. 현대인들은 SNS 상에 팔로우가 많을수록 더욱 더 고독해진다고 한다. 스스로를 타인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품격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이 글의 일부는 데이비드 브룩스의 <인간의 품격>에서 인용함을 밝힌다. 랍비인 조셉 솔로베이치크는 1965년에 쓴 <고독한 신앙인>이라는 책에서 창세기 후 인간에게는 두가지 상반된 본성이 있다고 한다. <아담-1>은 커리어를 추구하고, 야망에 충실한 외적 본성이다. 창조하고 건설하고 생산하고 발전하길 원한다. 드높은 위상과 승리를 원한다. 반면에 <아담-2>는 내적인 본성이다. 도덕적 자질을 구현하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내적 인격을 갖추길 원한다. 선한 분별력을 갖는 선한 사람이 되고자 원한다. 친밀한 사랑을 원하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길 원하며, 진리에 순응하며 살기 원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귀하게 여긴다. <아담-1>은 세상을 정복하길 원하나, <아담-2>는 세상에 순응하길 원한다. 아담-1의 좌우명이 <성공>이라면, 아담-2의 좌우명은 <박애, 사랑, 구원>이다. <아담-1>은 실용주의 및 경제학적 논리다. 노력을 하면 보상이 따르고, input이 있으면 output이 있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고 효용을 극대화 한다. 반면에 <아담-2>는 도덕적 논리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부터 정복해야 한다. 성공은 자만이라는 가장 큰 실패로 이어진다. 실패는 가장 큰 성공인 겸손과 배움으로 이어진다.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자신을 잃어버려야 한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각자 스스로 찾아야 한다.

저자는 인간을 <뒤틀린 목재 (crooked timber)>라고 정의한다, 임마뉴엘 칸트는 “인간이라는 뒤틀린 목재에서 곧은 것이라고는 그 어떤 것도 만들 수 없다.”라고 했다. 즉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자신의 한계 앞에서 겸손해져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약점과 싸우며, 자신의 죄와 대결하는 과정에서 인격이 수양된다고 믿는다. 죄와 약점을 극복함으로써 각자 맡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내적으로 덕을 쌓고 세상에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감명을 받아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접촉해서 그들의 일상을 본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토마스 머튼은 “영혼은 운동선수와 같아서 싸울 가치가 있는 상대가 필요하다. 시련을 겪고, 스스로를 확대하고, 잠재력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이다.” 우리에게 삶이란 존경하는 <그들>과 내 자신의 투쟁이다. 결국 주변에 선한 영향력 있는,  품격 높은 <그들>이 많아야 한다. 결론은 ‘사람이 메세지’다.

그들은 오랜 삶을 경험하고 거기서 느끼는 희열과 고통을 모두 맛본 숙성된 과일과 같은 사람이다. 그들은 겸손, 절제, 과묵, 중용, 존중, 그리고 온화한 수양을 미덕으로 삼는 사람이다. 그들에게서는 도덕적 희열이 뿜어져 나온다. 거친 도전을 받아도 온화하게 응답한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침묵을 지킨다. 모욕을 받아도 위엄을 잃지 않고, 자극을 받아도 자제력을 잃지 않는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성취를 얻는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때에도 눈에 뜨지 않은 겸손한 태도로 그 일을 해낸다. 그들은 해야 할 일을 인식하고, 그냥 그 일을 실행에 옮긴다. 그들은 갈등이 없는 평온한 삶을 산 사람들이 아니다. 숱한 갈등과 분투하면서 성숙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간 이들이다. 그들은 강인한 내적 인격을 연마하고, 심오한 깊이에 도달한 사람들이다. 마침내 아담-1은 아담-2 앞에 머리를 숙인다. 우리가 찾는 <품격> 높은 사람이다.

현대인들은 게임에서 이길 수 있는 약삭빠른 동물이 되라고 배운다. 계산적이고 이해타산적이다. 또한 빅미(Big Me), 즉 자기 과잉 훈련을 받는다. 개인의 능력이 최우선시 되는 사회 시스템에서는 자신을 부풀리고 과대 포장하는데 익숙해야 한다. 자기 중심주의 문화에서는 타인의 찬사가 중요하고, 타인의 시선에 비교당한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본 구세대 입장에서는 결국 사회적 성공이라는 헛깨비만 쫓다가 모든 걸 잃어버리고, 허무와 허탈과 상실만을 얻게 된다는 걸 충고하고 싶다. 성공했다고 <갑질>하는 하류들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리틀미 (Little Me), 겸손과 절제 속에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깨달아서 성숙한 인간이 되는 길만이 <품격> 높은 삶을 사는 것이리라.

 

 갑(甲)질 사회 (08-11-2017)

하루가 멀다하고 명색이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하는 자들의 <갑질>이 서민들을 분노케 한다. <갑질>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보다 약한 상대방을 착취, 폭행, 공갈, 협박, 공격하는 일체의 행위를 일컫는 신조어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갑질>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요즘 언론에서 질타를 받고 있는 육군 4성 장군의 마누라가 하는 공관병 <갑질> 형태는 빙산의 일각이다. 필자가 군대 생활 하던 40년 전에도 그랬고, 그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병 (士兵)의 사병(私兵)화, 노예화는 언제나 그랬다. 남편이 별 하나면 마누라 별 2개라는 말도 있다. 군대 내 각종 비리, 상납, 부정 관행 등은 상상을 초월한다. 진급을 하기 위해서는 상관집 식모살이를 해야 한다고 할 정도다. 마누라들 군기가 더 세다.

군대 뿐만 아니라 직속 상하 관계에 있는 <상명하복>의 구조에서, <부정부패>가 극심한 사회에서 특히나 심하다. <실력자>, <결정권자>로 불리우는 <힘의 실세> 주변에는 <갑질>이 상상을 초월한다. <거울 이론>이 통하지 않는다. 부자들 20%가 사이코패스 (반사회적 인격장애) 라고 한다. 왜 유독 한국의 갑질은 심할까? 한국인들은 임진왜란을 시작으로 일제 강점기 때 식민사관, 군사 독재 기간, 급격한 경제 성장을 통한 부정부패에 젖어온 사람들이다. 거기다 잘못된 자본주의 사관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기를 강요받았던 세대들이다. 전교생 시험 성적을 매주 일등부터 꼴찌까지 학교 입구에 붙여 놓았던 세대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등급이 오픈된 <비교세대>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고, 부모가 자식을 때리고, 형이 동생을 떄리던 <폭력 세대>다. 항상 마음 한구석에는 분노가 가득차 있었고, 공부 잘해서 출세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였던 세대였다. 아부와 권모술수, 강한 자에게는 비굴할만큼 굽신거리고, 약한 자에게는 자신이 당한 것 이상의 보복을 일삼은 <갑질 세대>들이다.

<갑질>은 진정한 <갑>의 행동이 아니다. 진정한 <갑>은 사회와 조직의 존경받는 지도자이자 리더들이다. <갑질>을 하는 사람의 심리에는 <열등감>과 <보상심리>가 깔려 있다. <열등감>은 자기 비하 심리로써, <나르시즘>과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한다. 나는 최고다. 나는 너보다 낫다 라는 병리적 나르시즘은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가학적으로 공격하고 착취하는 것이다. 이를 <경계성 인격 장애>라고 한다. 이 심리는 “성격은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지만, 행동은 불안하고 충동적이다.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성찰하지 못하며, 자신과 타인을 분명하게 구분짓지 못한다. 타인에게 나쁜 감정을 투사하거나, 타인이 자신을 착취하도록 허용한다. 반복적 좌절을 경험하면서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혼돈의 삶을 살아간다.”라고 설명한다. <갑질>을 하는 사람의 내면에는 학대 받았던 자신의 <을>의 공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몸이 기억한다>라는 유행어가 있었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사랑하기가 더 힘들다. 매를 맞는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주변사람들을 폭행할 가능성이 더 높다. 자존심을 내팽게치고 <갑>에게 아부하며 출세한 사람은 자신의 <을>에게 그 이상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은 사람은 자신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지랄>과 온갖 <패악질>을 할 확률이 높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힘든 시절을 살았기 때문에 스스로 진정한 <갑>이 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을 해야만 한다.

<갑질>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기 보다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존심>은 남에게 굽히지 않고 스스로의 품위나 가치를 지키려는 마음이다. 즉 내 자신의 가치가 타인과의 관계로 결정되는 것이다. 타인과의 <비교>로 쉽게 상처받고 열등감을 느끼고 자기 비하적으로 되기 쉽다. 우리 세대는 <비교>세대다. 허구한 날 비교하고 비교 당하던 세대다. 수직관계 사회로 <자만감>과 <자격지심>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보다 강한 자에는 아부, 약한자에게 갑질이 되는 것이다. 거기다 <체면>문화까지 더해지니 나 자신보다는 타인을 먼저 의식하게 된다.

반면에 <자존감>은 자신을 스스로 가치있게 여기고,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공부를 잘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부자로 살 수도 있고, 가난하게 살 수도 있다. 삶의 가치는 이런 것들이 우선되어서는 안된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타인과 함께 잘 사는 사람, 공감하는 사람, 배려하는 사람, 친절한 사람이다. 자존감이 높으려면 자신에게 친절해야 한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인정해야 한다.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장점을 칭찬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 발전할 수 있고, 스스로에게 만족할 수 있다. 힘들고 실패하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격려하고 위로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으로 부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나는 하나님이 직접 사명을 주시어 지구별에 온 소중한 사람, 나는 좋은 일을 해야 하는 선한 사람, 나는 착하고 거룩한 사람, 상대방을 내 몸처럼 배려하는 따뜻한 사람” 이라고 믿고 기도하자. 자존감 높은 진정한 “갑”이 되자.

 

 초대받은  손님 (08-04-2017)

지금 나에게 가장 귀한 손님은 누구인가?

‘나는 나다.’ ‘나 이외에는 모두 타인이다.’ 고로 ‘나 이외에 직계 혈연(부모와 자식)을 제외한 모두는 손님이다’ 라는 전제 하에 생각해 보자. 손님 중에는 초대받은 손님도 있고, 초대받지 않은 손님도 있다. 나 이외의 많고 많은 타인 중에 가장 소중한 손님 (손+님, 客人 –일본어 오갹사마) 은 <아내ㅡ 안사람 (內人), 처(妻), 집사람 (家人, 家內- 일본어 ‘가나이’), 부인 (婦人- 일본어 ‘오쿠사마), 와이프>가 아닐까?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트라우마가 있다. 나의 시시너접한  연애관을 고백할려고 한다.나는 대학시절과  장교 시절을 혼자 자취생활로 7여년을 보냈다. 그 청년시절을 보내면서 몇명의 여자를 만나고, 사랑하고 그리고 헤어졌다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사랑보다 이별이 몇배의 고통이라는 것도 배웠다. 이별은 그때마다 깊은 상처를 남긴다. 마지막 이별을 하면서 다짐을 했다. 이별에 이별의 이유를 달지 말자. 이별의 변명을 하지 말자. 아니 다음에 만나는 여자와는 내가 헤어지자고 하지 말자. 사랑하는 여인이 스스로 떠난다면 말없이 보내주되,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지 말자. 여자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지 말자.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일년 가까이 혼자가 되었다.

나는 혼자라는 고독을 처절하게 느꼈다. 깊어가는 밤이 되면 아파트 복도를 걸어가는 사람의 발자욱 소리만 들어도 사람이 그리워 미칠 것만 같았다. 누군가를 만날려면 만날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이번에 사랑하는 여자와는 결코 이별하지 않으리라는 내 자신과의 약속 때문에 얼핏 만난다는게 두려웠다. 나는 그렇게 많은 밤들을 한마리 외로운 늑대가 되어야 했다. 자취 전문의 남자는 못하는 음식이 없다. 우울하고 외로울 때 멋있는 요리는 많은 위로가 된다. 날씨가 너무 화창한 어느10월 저녁에, 나는 함경도식 찜닭 요리를 했다. 요리한 음식을 이쁜 그룻에 담고, 여러개의 촛불을 켜고, 분위기 있는 음악을 틀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고, 식탁에 앉았다. 그런데 한입도 먹지 못한채 눈물만 흐르는 것이었다. 그 순간 이런 소망으로 기도를 한 것 같다. 나를 사랑하는 여자가 내 옆에 있어만 주어도 좋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것도 못해도 된다. 내 옆에만 있어만 주면 된다.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함께 대화하고, 함께 사랑하고, 함께 꿈을 꿀 수 있는 여자면 된다. 그렇게 소망해서 만난 여자가 지금의 내 아내다. 그렇게 35년을 함께 살았다.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는 사실에 서로가 깜짝 놀란다.  

자취를 오래한 남자의 몇가지 철칙이 있다. 라면을 먹더라도 결코 서서 대충 먹지 않는다. 설거지는 미루지 않는다. 옷이나 생활용품들은 반드시 제자리에 정리정돈한다. 청소는 보이는 즉시 수시로 한다. 등등.. 그래야 혼자서 오래 살 수 있다. 그래야 나 자신을 귀하게 여기게 되며, 비참해 지지 않는다.

내 아내는 내가 <초대한 손님>이다. 가장 <귀한 손님>이다. <손님>은 언제라도 떠나갈 수가 있다. 떠나가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조차 할 수 없다. 항상 이별을 생각해야 한다. 떠나 버리면 <남남>이 된다. 그러니 아무리 가까운 손님이라 하더라도 최상의 <예>를 갖추어야 한다. 손님에게 그 무엇도 <요구>하거나 <강요>할 수 없다. 내가 <자유인>이듯이, 손님도 <자유인>이다. 그런 생각으로 아내와 35년을 살고 있다.

내 생활에 필요한 돈은 내가 버는게 당연하다. 손님에게 돈 벌라고 요구 할 수 없다. 손님과 함께 번 돈은 손님 돈이다. 나는 지금까지 아내가 얼마를 벌고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예의가 아니니 아예 물어보지도 않는다. 내가 초대한 손님에게 내 밥을 하라고 할 수 없다. 내가 요리한 음식을 함께 먹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다. 손님보고 설거지 하라는 주인이 있는가? 당연히 내가 먹은 거니까 내가 설거지 해야 한다. 집안 청소도, 빨래도 내가 하는게 당연하다. 손님 빨래는 손님이 하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다만 손님이 굳이 요리를 하시겠다고 하면, 설거지를 굳이 하시겠다고 하면, 그것은 손님의 <자유 의지>다. 솔직히 청소나 빨래는 한국 남자들을 따라 올 여자가 없다. 국방의 의무를 다한 한국 남자라면 군대에서 허벌나게 훈련 받은 특수 요원(?)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장교 교관> 출신이다. 장교 사관들 내무 검사나 내무 사열을 밥먹듯이 하고, 군화 밑창의 모래알까지 찾아내어 기합 준 악명 높은 교관이다. 아내가 청소나 빨래나 설거지를 하면 얼마나 제대로 하겠는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 내가 하는게 속 편하다. 그러면 혹자는 묻는다. 그러면 댁의 부인은 무얼 하시나요? 나는 대답한다. 내 아내는 나를 사랑하지요. 또 순전히 본인의 <자유 의지>에 따라 요리도 하고, 10년 동안 내 도시락도 싸 주고, 매일 화장도 하고 그러지요. ㅎㅎ.. 부부가 35년을 이렇게 살다보니 나의 일, 너의 일, 구분이 없고 경계가 없다. 먼저 본 사람이 한다고 보는게 맞는것 같다.

아무래도 이 칼럼 때문에 재수없다고 미국 동부에서 추방당하거나 왕따 당하는건 아닐까??       

 

 분노하는  사회 (07-28-2017)

왜 국민은 분노해야 하는가?

한국에는 약 50만개의 기업이 있다. 300명 이상의 종업원을 고용하는 대기업이15%,  300명 이하의 중소기업은 전체 85% 비중을 차지한다. <대기업 : 중소기업> 매출액 비중은 <58% : 42%>, 순이익은 <72% : 28%>이다. 그리고 근로자 고용 비중은 <15% :85% >, 인건비 비중은 <41% : 59%>이다. 불평등의 극치다. 대기업 중에서도 재벌이 속하는 100대 기업 매출비중은 29%, 고용은 전체 노동자의 4%에 불과하며, 100대 대기업의 순이익은 60%이다. 원청기업과 3차 하청기업의 임금은 4배 차이다. 한국은 재벌의 나라다.

이러한 소득 불균형이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기업과 하청기업으로 다원구조와 노동의 불균형, 재산의 불균형을 초래했다. 가난은 대를 이어 금수저와 흙수저를 만드는 불평등한 사회가 되고 말았다.

<소득 불평등 비중> = 10% 상위 계층이 차지하는 소득 / 국민소득 (자본소득 포함) 이다. 아메리칸 드림이 사라진 미국은 OECD 국가 중에서 소득 불평등 1위인 국가이고, 한국은 4위다. 미국은 소득 불평등 비중이 1910년도에는 40%, 1930년도에는 50%였다. 하지만 1940년 부터 1980년까지 40년간은 35%였다. 즉 이 40년 동안이 <아메리칸 드림>의 시기였다.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중산층이 될 수 있었던 미국이었다. 아메리칸 드림의 영웅인 프랭크린 루스벨트의 정책은 최저임금제 도입, 노동시간 제한, 고소득층 집중과세 등 소득 재분배 정책이었다. 이때 이민온 사람들은 1990년대 까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2000년에는 48%, 2010년에는 50%가 되었다. 미국은 최근 30년동안 다시 불평등이 가장 심한 나라로 전락하고 만다. 이민사회가 살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에 한국의 황금 시기는 1980년부터 1990년대 까지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이후 2000년부터 15년간 한국의 불평등은 급증한다. 재벌기업의 낙수효과는 거짓이었음이 판명되었다. 소득 불평등은 상위 20%의 시장소득이 최하위 20%보다 25배 많다. 하지만 순재산 소득은 상위 20%가 하위 20%보다 64배 더 많다. 즉 재산 불평등이 소득 불평등보다 훨씬 심각함을 알 수 있다. 한국 최상위 1% 의 재산이 전체 가구 총재산의 34%를 차지한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한사람의 큰부자가 있기 위해서는 적어도 500명의 가난한 사람이 있으며, 소수의 풍요로움은 다수의 빈곤을 전제로 한다.”고 했다. 빈곤으로 고통받는 다수의 국민들은 자신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현 경제체제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장하성 교수는 “불공정하고 불완전한 경쟁에 의해서 만들어진 불평등만이 정당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다수의 빈곤을 전제로 한 불평등은 과정의 정당성과 관계없이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빈곤은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며, 다른 사람의 자유를 구속하는 어떤 개인의 자유도 정당화 되지 못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1755년에 출간된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산업혁명이 막 시작되던 시기였으며, 유럽의 봉건 왕정에서 공화 체제로 바뀌기 이전 시기이다. 그는 경제적 불평등이 정치적 힘의 불균형으로 확대되는 위험을 간파한다. “억압받는 사람들은 압제가 얼마나 지속될지도, 그것을 끝내기 위해 어떤 합법적 방법이 남아 있는지도 알지 못한채, 억압은 지속적으로 커져 갈 것이다. 시민의 권리와 국민적 자유가 점차 사라져가고, 약자의 요구는 불온한 불평으로 취급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라고 오늘날 한국 상황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한국의 재벌은 단순히 시장 지배력과 경제적 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 언론, 사회, 문화, 교육 등 한국 사회 모든 영역과 정계, 관료, 법조계, 학계, 예술, 연예계 까지 모든 영역이 재벌의 영향력의 지배를 받는다. 이미 한국 사회는 재벌의 총체적 지배에 <분노하지 않는 노예상태>에 이르른 것인줄도 모른다. <정치권력은 유한해도, 재벌권력은 무한>한 한국이다.

이제 대다수 국민은 분노해야 한다. 경제가 고성장했지만, 고소득층 10%가 전체 소득의 45%를 차지하고, 국민의 90%가 남은 돈 55%를 나누어 갖는다는 사실에 분노해야 한다. 이런 사회를 청년세대에게 물려주는 기성세대는 부끄러워 해야 한다. 청년 100명중 22명이 실업자이고 나머지 78명 중 40명이 정규직, 38명이 비정규직인 세대. 비정규직은 정규직 임금의 60%인 세대. 결혼을 포기하고, 자녀 출산을 포기하고, 보금자리를 포기하고, 또 포기하고, 또 포기하는 세대..  희망과 꿈을 포기한 세대. 아니 꿈은 있지만 청년의 꿈이라는게 고작 좋은 직장에 정규직으로 취직하는 것이 꿈인 세대..  이 청년 세대에게 우리 기성세대는 미안해 해야 한다. 그리고 옳지 않는 것을 보고 함께 분노하며, 함께 바꾸어 나가야 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누가 주어지는 사회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쟁취하는 사회,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사회인 것이다. 대선, 총선 투표와 참정권으로 심판해야 한다. 적극적 정치 참여로 제대로 된 정치 리더들을 뽑아야 한다. 젊음이여, 어둠의 시대를 불 밝혀라. 싸워서 이겨야 한다.

 

 불평등한  사회 (07-21-2017)

 Yolo Life! <Yolo>란 “You Only Live Once”의 약자로 ‘한번 뿐인 인생, 지금을 즐기며 살자’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의료보험 홍보영상에서 ‘Yolo Man’ 이라고 말해 유명해지도 한,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 새로운 소비 트랜드로 잡아가는 핵심 키워드다. 즉 ‘아껴서 잘 살자’라는 기성세대와는 달리, 이 순간을 후회없이 사랑하고 즐기자’라는 의미다. 물론 나만를 위한 작은 사치,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고급 원두 커피 같은 의미도 있다. 하지만 한국의 젊은이들에게는 높은 실업률, 취업난, 소득 불균형, 사회 불확실성이 가져다 주는 절망적 선택을 지칭하는 자포자기 단어로도 사용된다. 왜 현대의 젊은이들은 3포, 5포 세대도 아닌, N포 세대. 한국 건국 이후 부모 세대 보다 못사는 유일한 자식 세대, 헬조선 세대로 살아야 하는가?

현대 한국 자본주의 시대는 왜 불평등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  2회에 걸쳐 쓰는 이 칼럼 내용은 문재인 정부의 대통령 비서실 정책실장으로 임명된 장하성 교수의 저서 <왜 분노해야 하는가>와 <장하성의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인용함을 밝힌다.

<경제>라는 단어는 <경세제민 (經世濟民)>의 줄인 말이다. ‘세상을 잘 다스려서 국민을 고난으로부터 구한다’라는 뜻이다. 즉 국민 모두를 <함께, 더불어> 잘 살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경제가 성장했는데도 대다수 국민의 삶은 더 나아지기는 커녕 더 살기 어려워졌다. 가장 큰 원인이 <소득 불균형>과 <재산 불균형>이다. 재산 불균형이 소득 불균형 보다 더 심각한 이유는 상속이나 증여로 물려 줄 수가 있고, 대를 이어 불평등을 이어가며, 불로소득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1990년~2016년 동안 한국의 경제성장은 360%, 즉 3배 성장했고, 가계소득은 1.9배, 고용은 0.45배 성장했다. 반면에 국민 총생산 GNI 분배는 기업소득만 14%에서 24%로 늘어나고 기업투자는 22.5%에서 18.5% 로 감소했다. 기업 총소득은 382조인 반면에 기업투자는 288조다. 100조 이상을 기업은 투자를 하지 않고 현금으로 비축하고 있는 것이다. 불공정 거래와 불공정 과세, 불공정한 재분배에 기인한다.

세계 경제 용어 중에 <재벌 (財閥>이라는 단어는 한국에만 있기 때문에 영문도 <Chaebol>로 표기된다. 한국 사람들에게 <재벌집착증>은 ‘재벌 덕분에 한국 경제가 발전했다. 재벌이 한국을 먹여 살린다. 재벌이 잘되야 한국 경제가 잘된다’ 라는 연쇄적 논리 구성이다. <재벌 공포증>은 재벌이 안되면 한국 경제가 어려워진다는 ‘우려’형. 재벌이 망하면 한국 경제가 망한다는 ‘협박’형, 재벌에 밉보여서 좋은게 없는 ‘보신’형. 한국 재벌은 다국적 투기꾼들에게 빼앗기면 안된다는 ‘애국’형이 있다고 한다. 국민을 현혹시켜 재벌과 권력이 짜고치는 고스톱이다. 한국은 노동자 세명 중에서 한명은 최저 생계비 월 1백만원에도 못미치는 임금으로 생활한다. 재벌위주의 경제 정책은 불평등을 가속화시키고 국민의 삶은 더욱더 피폐해질 뿐이다.

<소득 불균형>을 알아보자. 일할 수 있는 사람을 100명이라 보면, 비경제 활동인구 (군인, 학생, 주부, 노약자)가 38명을 제외하면 62명이 실제 근로 인구다. 그 중에서 실업자가 2명, 자영업자가 15명, 중소기업 29명, 비정규직이 15명, 대기업이 1명이다. 비정규직이라는 단어는 우리 기성세대 때는 없었던 단어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이라는 단어와 함께 만들어진 직종이다. 비정규직은 고용불안정, 낮은 임금, 근무환경 열악, 복지제도 미흡 등 각종 사회 불균형의 단초가 된다. 비정규직 비율은 2007년 35.9%, 2016년에는 32%이다. 청년 100명 중에서 구직을 포기한 잠재 구직자를 포함하면 22명은 실업자다. 나머지 78중에서 40명은 정규직, 38명은 비정규직으로 일한다. 비정규직 임금은 정규직의 60%이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에 취직하는 행운아는 15명이다. 2년뒤 대기업 정규직 유지는 7명으로 줄어든다.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스카웃되는 진짜 행운아는 5명이다.

그러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는 얼마나 될까? 나도 본 자료를 보고 깜짝 놀랐다. 1980년도에는 대기업을 100%로 기준하면, 중소기업 (전산업 기준) 96.7%, 중소 제조업은 91%였다. 즉 필자가 대기업에 다닐 떄인 1980년대에는 대기업, 중소기업 임금 거의 차이가 없었다. 다만 국가 공무원은 월급이 대기업에 비해 좀 많이 적었다. 그래서 별 인기가 없었다. 그런데 2015년도는 대기업 100으로 기준했을 때, 중소기업 전산직은 60.6%, 중소기업 제조업은 54.1% 이다. 절반 수준이다.

원청기업과 하청기업의 임금차이는 왜 <갑을 관계>인지 보여준다. 현대 자동차 정규직 임금을 100으로 기준하면, 1차 부품업체는 60.6%, 2차 부품업체는 36.2%, 3차 부품업체는 24.5% 에 불과하다. 즉 현대자동차 근로자 년봉이 9,400만원인 반면에, 3차 부품업체 평균임금은 2,300만원에 불과하다. 절대 다수인 80%의 국민은 중소기업 근로자이지만, 임금은 3분의 1수준인 것이다. <불평등 양극화>의 극치다. 그래서 재수, 삼수 해서라도 죽어라 대기업에 입사하려 하는가 보다..

 

 인간의 성격 심리 (07-14-2017)

 당신은 어떤 유형의 사람을 선호하는가?

언젠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이런 유형의 인간성을 선호한다. 성격이 쾌활하고 적극적이며, 리더쉽이 강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고, 팀웍을 잘 이루는 성격을 좋아한다. 대담하고 결단력이 뛰어나며, 사교성이 좋은 사람을 선호한다. 공동체나 봉사활동에서도 앞장서서 솔선수범하고 모범을 보여야 한다. 대화 능력이 뛰어나고 대중 연설을 잘하고, 성격이 시원시원해야 한다. 흔히들 말하는 외향적 성격의 소유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회사와 조직생활에서 성공할 수 있다고 믿으며, 대부분의 성공한 사람들은 외향적 성격의 소유자라고 믿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성격도 외향적인 성격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자기계발도 한다. 이것을 <이상적 자아>라고 하는데, 사교적이고 지배적이며 스포트라이트에 익숙한 외향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는 막연한 믿음이다.

이러한 성향은 서양 문화에서 기인한다. 동양 문화에서는 ‘침묵이 금이다’ ‘암닭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양보가 미덕이다’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등등 과묵함을 미덕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한국과 일본은 혈액형으로도 사람을 평가한다. A형은 내성적이고 소심하다. O형은 개방적이고 시원시원하다. B형은 어떻다. AB형은 어떻다. 그래서 남자는 O형이 좋고, 여자는 A형이 좋다. A형인 나는 혈액형을 물어보면 웬지 주눅이 들었다. 하지만 혈액형과 성격은 비과학적이라고 판명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나대고 설치는 사람이 각광받는 세상이 되었다. 조용히 있으면 자기 밥그릇도 못찾아 먹는다나 어쩐다나.

하지만 서양인 절반도 내성적 성격이다. 즉 사람마다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잘 할 수 있는 일도 다르고 장단점도 다르다는 것이다. 문화의 차이일 수도 있다. 만약 여러분의 성격이 내성적이라면 성격분석학자 수잔 케인이 쓴 <Quite 콰이어트 – 부제 :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추천한다. 베스트셀러인 이 책은 2012년 ‘세계지식인의 축제’인 TED 콘퍼런스에서 최단 시간 조회수 1백만을 돌파한 강연으로도 유명하다. 즉 내향적 성격의 소유자들은 특별한 재능과 능력을 세상에 보여주었고, 권장되고 축복받아야 할 성격이라고 말한다. 유명 변호사와 유명 세일즈맨들 중에는 내성적 성격이 많다고 한다. 더구나 역사적으로 성공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이다. 수많은 과학자들, IT 창업자들, 금융 귀재들, 철학자, 사상가, 성인들이 내향적 성격이었다. 예수와 석가모니는?

내향성, 외향성 성격의 정의는 1921년 심리학자 칼 융의 <심리 유형>에서 비롯된다. 내향적인 사람은 ‘생각과 느낌’이라는 내면 세계에 끌리고, 외향적 사람은 ‘사람과 활동’이라는 외부 세계에 끌린다는 것이다. 칼 융의 생각을 기반으로 포춘 100대 기업과 대다수의 대학에서 적용하고 있는 마이어브릭스 성격검사 (MBTI)를 여러분도 해 보시기 바란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무료로 할 수 있다. MBTI 성격 테스트은 자신의 타고난 성격 유형을 파악함으로써 배우자 스타일이나, 진로, 대인관계, 의사소통, 학습 스타일, 직업, 리더십 스타일을 참조하는 것이다.

MBTI 검사지는 모두 95문항으로 구성되어 4가지 척도의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하려고 한다. E (외향적) – I (내향적), S(감각) –N(직관), T(사고)- F(감정), J(판단, 계회적)- P(인식, 유연적) 중 각 개인의 선호지표를 알파벳으로 표시하여 결과 프로파일 (ISTJ)를 제시한다. 따라서 MBTI 성격유형은 16가지 유형으로 나뉘어 지는데, 그 중 한가지가 당신의 성격 유형인 것이다. 각자의 성격은 일반적 특성, 인성, 강점, 약점, 주의와 개발요소, 직업 유형이 표시된다. 내 성격은 ‘임금 뒷편의 권력형’이라고 한다. ㅎㅎ

또 다른 검사는 DISC로 알아보는 성격행동별 유형 테스트도 있다. 4가지로 분류되는데, D (주도형 : Dominance), I (사교형 : influence), S (안정형 : Steadiness), C (신중형 : Conscientiousness)로 나눈다. 각 형태마다 5가지 문항이 있다. D (주도형)에는 지배, 추진, 요구, 과단성, 실행가가 있다. I(사교형)에는 영향력, 설득력, 인상적, 상호작용, 흥미 항목이 있다. S(안정형)에는 지지, 순종,안정, 수줍음, 현상유지 항목이 있고, C(신중형)에는 조심, 유능, 계산, 걱정, 주의깊음 항목이 있다. 검사 결과 <D :주도형>이면 주도적이고 단도직업적이며, 결과를 중시하고 독립성이 강하다. 진취적이고 큰그림에 촛점을 맞추는 성격이다. <I : 사교형>이면 풍부한 영감, 낙관적, 열의적, 사회성이 좋음, 동기를 유발함, 유머 감각이 좋음, 직관적 성격이다. <S ; 안정형>이면 안정적, 공감적, 인간관계 중시, 현상태 유지, 배려심, 인내심이 강한 성격이다. <C ;신중형>이면 신중함, 성실함, 정확함, 분석적, 세부사항에 초점, 깔끔정리 하는 성격이다. 나의 성격은 신중형과 안정형 복합이다.

성격은 좋고 나쁨이 아니다. 성격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상호보완이 중요하다. 내 성격을 알고 그에 따라 상대방과 잘 조화를 이루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공짜니까 인터넷에서 두가지 모두 테스트 해 보길 권유한다.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며 행복하세요..         

 

 별이 된 남자 (07-07-2017)

 바람 한점 없는 봄날에 꽃잎 하나가 떨어진다. 이제 막 40이다. 왜 스스로 떨어져 별이 되었을까? 무슨 사연인지 알면 뭐하나? 이쁜 아내가 있고 어머니도 계시는데.. 안전한 직장에 다니고 있었고, 교회 봉사활동도 열심이었다. 이제 겨우 40인데, 건실하고도  좋은 젊은이었는데.. 그런데 왜?  오죽 했으면 스스로 별이 되고자 했을까? 장례식 내내 가슴이 먹먹하고 마음이 갑갑하다.

스스로 모진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견디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이유들이 있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별다른 사인(死因)이 될 수 없다 하더라도 본인에게는 너무도 심각하다. 현대인들의 자살율은 매년 증가한다. 십대 청소년은 청소년대로, 젊은 세대, 중년층, 노인세대, 독고노인 등 년령을 가르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고독하고 외롭다. 삶이 보장되지도 않고 기약할 수도 없다. 고민을 상담하거나 대화할 상대조차 없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도, 교회라는 공동체도 각자 살기 어렵다는 이유로, 바쁘다는 핑계로 건성이 되고 형식적이다. 누군가 단 한 사람만이라도 진정으로 자신의 고민을 경청하고 위로하고 격려해 준다면 자살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왜 그에게 그런 사람이 없었을까?

이민 1,5세나 2세들의 공통점이 있다. 어린 나이에 부모 손에 이끌려 물설고 낯선 이국땅에 이민을 왔다. 본인이 이민을 오고 싶어서 온것도 아니다. 한국말도 서툴고 영어도 서툴다. 한국문화도 낯설고 미국 문화도 낯설다. 집에서는 한국사람, 밖에서는 미국 사람이 된다. 엄마 아빠는 먹고 살기위해 새벽에 나갔다가 늦은 저녁에 돌아온다. 학교에서 돌아와도 언제나 혼자다. 고민이 있어도 의논할 사람이 없다. 학교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언제나 외톨이다. 이런 나를 <바나나>라고 놀린다. 컴퓨터에 빠진다. 대학 학비가 너무 비싸다. 공부가 재미없다. 내가 하고 싶은거와 부모님이 원하는 직업이 다르다. 한국 부모들은 일방적이고 강압적이다. 공부를 못하면 인생의 실패자로 여긴다. 비싼 학비를 감당하지 못해 군대를 자원한다. 전쟁에 투입된다. 전쟁터에서 끔찍한 사건들을 목격한다. 평생 기억에 지워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한다. 늙어버린 부모님을 외면하지 못해 모시고 산다.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문화 차이로 생각이 다르다. 서로가 마찰이 생기고 다투게 되고 결국은 미워하게 된다. 아들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하루하루 함께 산다는게 괴롭다. 교회도 직장도 가면무도회장 같다. 서로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말들만 한다. 대부분이 험담이다. 누구와도 고민을 말할 곳이 없다. 미국에 온 날 부터 지금까지 나는 혼자였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외톨이가 되어간다. 산다는게 너무 힘들다, 어떻게 하지?

물론 나의 상상이지만, 누구에게나 가능한 이야기다. 인디언들은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두개의 마음을 갖고 있다. 하나는 몸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꾸려 나가는 마음이다. 다른 하나는 영혼의 마음이다. 몸을 꾸려 나가는 마음이 욕심을 내면 낼수록 영혼의 마음은 점점 작아져 밤톨 같이 된다. 몸이 죽으면 영혼의 마음만 남는다. 사람은 누구나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전생에 살았던 영혼의 마음 크기를 가지고 태어난다. 영혼의 마음은 근육과 비슷해서 쓰면 쓸수록 커지고 강해진다. 영혼의 마음을 크게 가지는 비결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다. 욕심을 부리면 이해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작아진다.”

인디언들에게는 <문상 비둘기>가 있다. 문상 비둘기는 슬퍼해 줄 사람이 없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만 운다. 많은 현대인들이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를 위해 슬피 울어줄 사람이 있을까? 불교에는 <천도제 (薦度祭)>가 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없어지지만 영혼은 그대로 남아 업식(業識)에 따라 이몸, 저 몸으로 환생하면서 윤회를 한다고 믿는다. 윤회는 인도의 카르마 사상이다. 이 영혼을 하나의 개체로 인정하여 영가 (靈駕) 라 부른다. 천도제는 이승의 미련이나 집착을 끊어버리고 내생의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천거하는 의식행위다. <49구제>도 그 중 하나다. 기독교에서는 죽으면 영혼이 하늘나라로 간다고 믿는다. 혹자는 별이 된다고 믿는다. 이생에서 이루지 못한 소망은 한마리의 나비가 된다. 떠나는 자에게 천국이면 어떻고, 별이되면 어떻고, 환생이면 어때? 살아있는 자가 문제다.

그런데 떠나는 자가 한이 많으면 하늘나라로 가지 못하고 별이 되지 못하고 구천에서 방황한다고 한다. 죽은 영혼인데 왜 떠나지 못할까? 무슨 미련이 남아서 구천에 떠도는걸까?  떠나가는 본인보다 남아있는 사람들이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건 아닐까? 남아있는 사람들 끼리 계속 미워하면 어쩔까? 서로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하지 못하면 어쩔까? 그래. 살아있는 사람들여. 미워하지 말자. 상대를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이해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다. 떠난 사람의 몫까지 사랑하다가 별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떠나는 자도 구천에 머물지 않고 영롱한 별이 되어 여러분의 마음을 밝게 할 수 있다.  

부디 별이 된 그대여, 착하고 아름다운 영혼으로 왕생극락 (往生極樂)하여, 다음 생에는 좋은 시절 만나 좋은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기를 소망한다.

 

 어떻게 바꿀 것인가? (06-30-2017)

사람들은 변화를 원한다. 남편이 바뀌고 마누라가 바뀌고 자식이 바뀌기를 원한다. 목사와 교회가 바뀌고 세상이 바뀌기를 원한다. 바꾸고 싶다고 바꿀 수나 있을까?  아무리 잔소리 하고 바가지를 긁는다고 남편의 못된 습성이, 마누라의 고약한 성질머리가, 자식들의 버르장머리가 쉬이 바뀌었던가? 혁명을 일으키고 새로운 정부를 만든다고 세상이 크게 바뀌었던가? 목사를 바꾸고 교회를 바꾼다고 개독교가 기독교가 되던가? 나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것도 내 의지로 바꿀 수도, 바뀌어지지도 않는다. 촛불혁명으로 수백년의 적폐청산과 개혁을 이루고자 하나, 첫걸음 부터가 구만리다. 특히나 요즘 한국의 국회의원 놈들 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한심하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렇다고 포기한다면 그 또한 죄악이 아니던가? 그러면 무엇부터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

영화 <역린>에서 정조의 대사로 더 유명해진 <중용 23장>을 인용해 본다.

“작은 일에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게 되고 /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 변하면 생육된다. /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한 사람만이 /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위의 번역은 현대판으로 의역을 좀 많이 하였다면 원문은 이러하다. 여기서 치곡(致曲)은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 함이요, 성(誠)은 정성을 다 한다는 것이다. 형(形)은 드러난다 보다는 겉으로 배어 나온다로, 저(著)는 나타낸다 보다는 겉으로 드러난다로 해석한다. 명(明)은 밝아진다로, 동(動)은 남을 감동시킨다로, 변(變)은 변하게 된다로, 화(化)는 생육한다로 해석한다.

결론은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큰 뜻을 이룰 수 있고, 결국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로 해석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어지간 해서는 <감동>하지 않는다. 마누라를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자식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교인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백성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작은 일, 궂은 일 마다하지 않고 죽을 각오로 줄기장창  지극정성을 다해야, 비로서 겨우 그것도 아주 쪼끔 감동 먹는다. 보여주기 식, 생색내기 식은 금방 눈치 챈다. 감동도 한번이 아니고 여러번 먹어야 겨우 변할까 말까 하니 상대방을 바꾼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러니 위정자가 되기 힘들고, 목사 되기 힘들고 장로 되기 힘든 세상이다. 결론은 내가 진정으로 변해야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있고 세상을 변화 시킬수 있는 것이다.

4서5경의 사서중 하나인 <중용>은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서책 중 하나다. 모자라는 남편을 어떻게든 사람 만들어 보려고 산책할 때마다 가끔씩 가르침을 주신다.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도 중용의 가치를 이상적으로 여겼다. 과도- <중용>-부족, 만용-<용기>-비겁, 둔감-<절제>-방종, 낭비-<후덕>-인색, 아첨-<친절>-퉁명 이다. 물론 공자의 <중용>사상과는 격이 다르다.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 BC 483~402)의 저술로 알려져 있다. 주희가 말하기를 ‘중용의 중(中)이란 치우치지 않음이요, 용(庸)이란 바뀌지 않는 것이다. 중용은 세상의 기본이며, 오묘함이란 한이 없으며, 일상생활에 언제나 쓰여지는 학문’이라 했다. 치우치지 않고 기대지 않아, 지나침도 미치지도 못함도 없는 평상의 도리 (不偏不倚 無過不及 而平常之理)라 했다.

중용의중용장구 편 서문중에서 1장만 맛을 보자.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에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 해석 : 자연이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부여한 것을 <성>이라 하고, 본성에 의지해서 나온 자연스런 규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도>라고 하고, 도를 닦아서 모든 사람에게 널리 확대하는 것을 <교>라고 한다.

(道)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보이지 않는 바를 조심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곳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 사람들이 들을 수 없는 곳에서도 나태하지 않을까 마음으로 두려워한다.

숨겨진 것보다 더 잘 드러난 것은 없으며, 작은 것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 삼가는 것이다.

희로애락이 발하지 않는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중(中)은 천하의 대본이요, 화(和)는 천하의 달도(통용되는 도)이다. – 해석: 희노애락 각종 감정이 아직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을 <중>이라 하고, 밖으로 드러났으나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는 것을 <화>라 한다.

(中)과 화(和)의 경계에 이르게 되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에 있게 되고 만물이 자라게 된다.”

나 자신부터 변하자. 조그만 일부터 지극정성을 다하다 보면 언젠가 세상도 변할 날도 있겠지..

 

 아버지 (06-23-2017)

누구에게나 말만 하여도 목이 잠기는 단어들이 있다. 나에게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그 중 하나다.  오늘은 <Father’s Day>다. 자식들 성화에 못이겨 뉴욕의 자연산 횟집에서 호사를 받았다. 모처럼 마셔보는 소주와 생선회에 아버지가 오버랩 된다. 되돌아 보면 육십중반 이 나이가 되기까지 나는 많은 일들을 후회하고 가슴 아파한다. 그 중에서도 나는 아버지께 제대로 효도를 해 보지 못했다는 것이 나를 아프게 한다. 아니 진정으로 가까이 다가가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 못했다는 자학이다.

나는 해마다 아버지 제사를 지낸다. 얼마전이 아버지 기일이었는데, 올해는 아버지 제사상 앞에서 숨죽여 울고 또 울었다. 아버지는 올해 내 나이에 주무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에 임종도 못뵈었다. 아버지보다 더 세상을 산다는 것이 죄송하고도 부끄러웠다. 나는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고 공부 잘 하는 착한 모범생이었는지는 몰라도 아버지와 마음을 터놓고 가까워지지를 못했다. 어린시절에는 항상 어려워하고 무서워 했다. 별로 나를 야단치신 기억도 없고 항상 나를 자랑스러워 하셨는데, 내가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대학 때는 서울에서 객지 생활, 졸업하고는 군 복무로 객지 생활, 제대하고는 서울에서 회사 생활.. 이런저런 핑계로 아버지께 가까이 다가선 적이 없다.  

아버지는 나에게 언제나 큰 산이었고 큰 바다였다. 변함이 없으셨다. 언제나 거기에 계셨고, 그랬기에 항상 거기에 계실 것이라 믿었고, 나는 언제나 돌아갈 곳이 있었다. 힘들고 지칠 때나, 기대어 울고 싶을 때 아버지는 항상 그곳에 계셨다. 아버지는 나의 멘토이자 정신적 지주셨다. 감히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실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철없는 이기적인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함흥이 고향이신 실향민이다. 서울의대를 졸업하던 시절에 6.25 전쟁이 나고 말았다. 그 날로 고향의 부모 형제들과 영영 생이별을 하고 혼자 몸이 되었다. 군의관으로 6.25전쟁에 참전하시고, 종전이 된 후 같은 고향의 실향민인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시고 나를 낳으신 것이다. 그야말로 빈손으로 부모 형제 없이 혼자 힘으로 자수성가 하신 분이다. 그러니 근검절약 할 수 밖에 없었고 생활력이 강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실수를 하신 적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스스로에게 참으로 엄격하신 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를 어려워 했다. 그렇게 자식들은 아버지를 외로운 섬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아버지는 세상 마지막 날까지 외로워 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너무 죄송하다.

아버지도 평범한 한명의 남자일 수도 있다고 느낀 것은 내 나이가 삼십대 중반이 되어서다. 대기업의 부산 경남 지사장을 하고 있을 때, 처음으로 내가 일하는 회사를 불현듯 방문하신 것이다. 그냥 퇴근길에 아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들리셨다는 것이다. 그날 아버지와 단 둘이서 술을 마시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소박하게  좋아하시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늙고 평범한 한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한발짝 아버지께 다가서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까 하는 죄송함이 밀려왔다. 앞으로는 아버지와 단둘이서 이런 자리를 자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후 일년 뒤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나는 성격장애자인가 보다. 나의 속마음을 들어내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고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 또한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는 강박관념론자다. 소탈하지도 대범하지도 못하다.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싫고 말 많이 하는 사람도 싫다. 두루 무난한 것 같지만 상대방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면 한두발짝 물러서서 경계한다. 여러명이 어울려서 떠들며 노는 것 보다는 혼자 있는 시간이 더 편하고 좋다. 사람들은 내 성격이 굉장히 외향적이고 소탈하고 사교적이라 생각한다. 카르스마적이고 대중적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내 본모습은 극히 내성적이고 소심하다. 극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 주변은 항상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어야 하고 청결해야 한다. 군대 내부반 관물함 처럼 쓰던 물건은 항상 제자리에 놓여 있어야 하고 질서정연해야 한다. 농담이나 유머를 좋아하지만, 괴변이나 무례함은 싫어한다. 아부를 싫어하고 직선적이다. 생색내는 것을 싫어하고 구차한 자기변명을 혐오한다. 거짓말을 싫어하고, 특히 험담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두리뭉실하거나 맹목적인걸 싫어하고 자신의 주관과 철학이 없음을 싫어한다. 그러면 마음을 닫고 혼자가 된다.

이런 나의 성격적 결함이 내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내 스스로를 힘들게 함을 알고있다. 나는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많은 일을 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과 친구가 되지 못했고 깊은 교제를 쌓지 못했다. 나의 성격적 결함 때문에 나의 외로움을 자초했는지 모른다. 고맙게도 나의 아내와 자식들은 나의 이러한 약점을 잘 알고 나에게 쉽게 다가온다. 농담도 하고 나의 흉도 스스럼 없이 본다. 아내가 부르는 나의 별명은 <삐돌이>다. 하지만 자식들은 그러면서도 내가  어렵고 낯설다고 한다. 이러다가 홀로 외톨이가 되어 늙어가는건 아닌지.. 아버지가 보고 싶다. 

 

 아름다운  흔적 (06-16-2017)

 우리집 앞마당에 치자나무 한그루가 있다. 족히 내 키의 두배 높이다. 2층 내 침실에서 내려다 보는 치자나무에는 매번 스물 송이는 넘을 하얀 치자꽃들로 한창이다. 나는 그 창가에 앉아 책 읽기를 즐기는데, 치자꽃 향내가 나를 몽환적으로 만든다. 치자는 순결한듯 하얀 꽃도 꽃이지만, 꽃 내음은 어릴적 엄마의  화장품 냄새와 같다. 실내의 치자나무는 키우기가 까다롭다. 천상 공주과다. 하지만 앞마당 치자 나무는 별 돌봄도 없이 해마다 백여송이 꽃들을 피고 지우고 피다가 봄을 마감한다. 여느 꽃들 처럼 자연의 아름다움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자신만을 위하여 꽃을 만들고 향기로운 냄새를 피우는 것이 아니리라. 주변의 생명들을 위하여 아름다운 흔적을 남김이리라.

동물은 흔적을 남긴다. 사람은 한평생을 살면서 무슨 흔적을 남길까? 요즘 한국은 인사청문회 때문에 야단이다. 부패지수가 높은 나라에서, 결코 청렴하지 못한 나라에서 내각 인물들의 청렴도와 순결도를 따진다는 놈들이 더 남세스럽다. 불과 반백년 세월동안 세계가 놀랄만큼의 경제 급성장을 하면서 불가피한 사회적 과도기를 거치게 된다. 불법과 부정이 판치는 오물탕에서 태어나 현재의 사회 지도층이 되었다면 불법과 편법이 아닌 정당한 방법으로 부와 명예를 쌓았다는 것이 더 희귀한 일이 아닌가? 출세한 목사에게 죄를 물으면 죄없는 자가 돌로 쳐라고 하는 뻔뻔한 세상이다.

그런데 야당들이 지탄하는 후보 대상자들 청문회를 보면서 나라면 과연 저렇게 살 수 있었을까? 더욱 놀라운 일은 A후보자를 지지하는 498명의 사회 지도층들이 지지 선언서를 발표한다. 아무리 평소 알고 지내는 지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명예를 걸고 후보자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B 후보자는 전직 장관들이 모두 지지 성명을 하고 관련 행정부 노동자들이 지지 성명을 발표한 것은 대한민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참으로 자신과 세상을 위해 열심히 살았고 정의롭게 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에는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들이 많키 때문이다. 내가 만약 ??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를 지울 수가 없다. 삶의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다만 세상의 관심이 되지 않아 알려지지 않았거나 잊혀졌을 뿐이다. 사회 지도자가 될 사람이면 삶의 흔적을 숨기거나 감추어서는 안된다. 꽃은 피고 지면서 항상 아름다운 자태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꽃이 지는 추한 모습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에 사람들은 꽃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것이다. 사람이 살면서 어떻게 아름다운 모습만 있을까? 추하고 습한 부분도 있었겠지. 그러니 사람이지. 다만 솔직히 인정하고 국민들로 부터 용서를 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일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선>이란 힘 (권력)을 가지려는 마음이다. 그것은 권력에 대한 애착, 권력을 향한 의지, 권력을 강화시켜 주는 모든 것을 말한다. 그러면 <악>이란 무엇인가? 악이란 무기력을 말한다. 무기력 때문에 인간에게 닥치는 모든 불행은 악이 된다. 인간은 선을 추구한다. 어떤 권력에 대한 저항이 극복될 때 인간은 행복을 느낀다. 따라서 권력을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에게는 약자를 동정하는 것처럼 악을 조장하는 일은 없다. 거기에 종교와 인간의 모순이 공존한다. 선과 악은 신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다. 니체는 더 나아가 자신을 극복하고 초월하는 <초인>이 되라고 한다. 초인은 이 세상에 충실한 사람이다. 니체는 저 세상에 대한 희망을 설파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고 충고한다. 종교는 영혼을 육신으로 부터 분리하여 저 세상에 가져 갈려고 한다. 하지만 신은 죽었고 저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더러운 강물과 같다. 인간이 더러워지 않고 더러운 영혼의 강물을 흡수하기 위해서는 바다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초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국가를 개혁한다는 것은 사회악에 지친 국민들에게 다소 위로처럼 느낄 수는 있다. 하지만 개혁은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역사적 경험으로 알고 있다. 어떤 나라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국민 계몽이니, 진보적 발전이니 하는 청사진들을 내놓지만 결국 바뀌는 것은 극히 일부분 뿐이라는 것이다. 넓은 부엌에서는 평범한 요리 밖에 만들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고난이 많은 민족은 우수하다. 안정되고 이상적인 복지국가에서는 위대한 지성이나 영웅적인 인간이 태어나지 않는다. 국가는 국민 개인의 안정과 행복을 지켜주는 조직과 제도지만, 그 목표가 완성에 가까울수록 개인은 약화될 수밖에 없으며, 국가는 본래의 목표를 잃게된다.

그러니 문재인 정부는 촛불정신으로 소신대로 밀고 나가면 된다. 이상국가로 개혁하려는 망상에 사로잡히면 안된다. 대한의 백성은 시련과 고난 속에 단련된 민족이다. 백성을 믿고 정의롭게 국가를 만들어 가면 된다. 협치는 무슨 협치? 정치는 개나 소나 다같이 가는 것이 아니다. 트집을 위한 트집, 반대를 위한 반대, 깜도 되지 못하는 놈팽이들과 아까운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하나씩, 둘씩 바꾸어 나가다 보면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바뀔 것이라 소망한다..         

 

 아름다운  미완성 (06-09-2017)

 “인생은 무엇이며,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역사의 어느 지점에서 살았든지 간에, 인간이면 생각하고 고뇌하는 공통의 화두다. 인간이 만든 종교도, 철학도, 사상도 이 범주에 종속된다.

<인생은 미완성>. 1985년도에 공전의 히트를 쳤던 유행가 제목이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인생은 쓰다만 편지, 부르다 멎는 노래, 그리다 마는 그림, 새기다 마는 조각일 수 있지만, 결론은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최희준의 <인생은 나그네길> –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거. 인생은 벌거숭이, 구름이 흘러가듯, 강물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가는 거로만 인생은 끝나는건가? 박목월의 <나그네> –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인생은 덧없고 허무한 것으로 끝나는가?  <나그네>는 ‘쓸쓸한 방랑자’ 라는 의미의 가장 아름다운 한국말 중 하나다. 우리 모두가 나그네라면 어떻게 아름다운 마무리를 해야 하는가?  

인생은 하나님이 인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나누어 주신 미완성이고 불완전한 선물이다. 온전한 완전은 하늘나라의 삶 뿐이다. 하늘나라는 모든 인간의 본향이다. 누구나 죽으면 하늘나라로 되돌아 간다. 특정종교를 믿어야만 구원받고 본향에 갈 수 있다는 왜곡되고도 편협된 이기성이야 말로, 인간들의 삶을 힘들고 지치게 한다.

인간은 누구나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하고자 소망한다. 함석헌 선생의 사상에서 <아름다운 미완성>을 생각해 보자. 이 글 일부는 선생의 명상집에서 인용한다. 선생은 “우리가 서로 사랑합시다. 나보다 낫더라도 부러워 말고, 나보다 못하더라도 없이 여기지 말고, 그저 내 눈 앞에 선이 보이고, 참이 보이고, 아름다움이 보이는 것으로 그저 기뻐하고 감사합시다. 사람이 사랑할 수 있다는 일은, 남을 위할 수 있다는 일은, 세상 위에 착한 뜻이 한점 존재한다는 일은 얼마나 거룩하고 고마운 일이오?”

인생은 찾음이다. 삶은 자람이다. 영원의 미완성이다. 인생은 채 되지 못한채로 되는 것, 채 됐다면 채 못된 것이다./  인생은 일하는 자다. 일하는 것이 인생이다. 사람에게는 노동이 있고 고통이 있다. 일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이 곧 일이다. / 인생은 방향이 있은 것이다.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다. 그 생을 써서 뜻을 드러내는 것이 있어야 비로서 생의 보람이 있다. 내 뜻을 써서 <그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름다운 심정을 가질려면 감응(感應)하는 것이요, 감화(感化)하는 것이다. 누구와 짝을 하느냐 이다. 너희가 정말 아름답고 위대한 혼이 되고자 하면 짝할 이는 오직 <그분>뿐이리라.

삶은 환경에 대한 맞춤, 즉 적응이다. 삶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둘러쌋기 때문에 <환경>이라고 한다. 환경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 변하는 환경에 잘 맞추면 살고, 잘못 맞추면 죽는다.

늘 하늘을 우러러 보자. 우리가 할 일은 얼 힘, 즉 정신력을 키우는데 있다. 우리가 먹고 자고 여러 일을 하고 도덕을 행하고 종교를 믿어서 결국 얻는 것은 얼의 힘을 키워간다는 하나 뿐이다.

날마다 글 읽기를 잊지말자. 마음을 닦는데는 글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 먹고 입음을 간단히 하자. 예로 부터 어느정도의 금욕, 극기 없이 정신적 생명을 크게 키운 이는 없다. 선비는 먹는데 배가 부르도록 하지 않고, 있는데 평안하도록 구원하지 않는다. 의식주는 간단주의가 좋다. / 내 몸 거둠은 내가 하자. 인격은 몸과 마음이 하나 된 것이다. 그러므로 내 스스로 내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한다. 몸조심이란 몸 공경이다. 다른 사람에게 굴복, 아첨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함이요, 역사를 업신여김이다. 네 얼굴을 보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전에 네 얼굴부터 사랑하고 절을 해야 한다. 나는 나다.

때때로 산과 바다에 가자. 인자요산 (仁者樂山), 지자요수 (知者樂水)라. 자연을 가까이 하라. / 하루 한번 땀을 흘리자. 거이기 (居移氣) 라고 사람은 있는 환경에 따라 기분이 변한다. 기운을 발산시키기 위해서는 땀을 흘리며 일하는 것이 가장 좋다. 운동으로 대처하면 안되나?

나는 될수록 미워하지 않으려고 참는다. “하나님, 제발 미운 마음으로 하지 않게 해주십사!” 기도하고 기도한다. 부끄러운 고백이다. / 내 속, 정신, 영원한 이치가 <안>이요, 주위, 세상, 일, 삶, 죽음, 성공, 실패는 <밖>이다. 밖으로 인해 안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정(定)>하지 못한 사람이다.

인생을 고해라 하면서도 목적을 모르겠다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인생에 눈물과 한숨이 있다는 것은 저에게 목적이 있다는 증거다. 목적이 없다면 환란도 없다. 도달해야 할 목적이 있으니 고통이지, 목적이 없다면 고통 당할 필요도 없다.

생존경쟁이란 모두 거짓이다. 생명은 하나다. 역사는 하나다. 서로 다투고 싸움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돕고 붙듦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힘의 숭배자들이 그런 말을 만들었다. 만물을 짓고 만물을 유지하고,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은 힘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은 미완성이다. 사랑은 아름다움이어라..

 

 오월의  단비 (06-02-2017)

4월의 봄을 맞이 한다고 텃밭에 묘종을 심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월의 끝자락이다. 이틀 후면 메모리얼 데이다. 년중 몇번 밖에 없는 연휴인지라 아내와 둘이서 바다로 갈까, 산으로 갈까, 공상하고 있는데 객지생활 하는 둘째 딸아이가 집에 쉬러 오겠단다. 아내는 나와 놀러갈 계획은 코풀은 휴지처럼 내팽겨쳐 버리고, 시장을 보느라 음식을 하느라 분주하다. 많이 섭섭하다. 오늘만 날이 아닌데, 딸이야 다음에 오라고 하면 되지, 이건 경우가 아니지, 투덜거리면서도 청소하랴, 방 정리하랴, 텃밭 가꾸랴 나도 덩달아 바빠진다. 벌써 늙었나?  아내는 자식들 사정이 허락한다면 모두들 가까이 모여서 살기를 원한다. 케네디 집안처럼 수프가 식지 않을 거리에 모여서 살기를 원한다나? 글로벌한 현대를 살면서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늘상 아내의 기도 제목이자 소망이다.

뜨락에 봄비가 내린다. 소슬비가 새색시의 미소처럼 수줍은 듯 내려 앉는다. 온 천지 마음 밭에 사랑의 단비가 듬뿍 내린다. 생명의 단비가 오월의 산천초목을 축복한다. 불과 몇주 전에 심었던 야채 묘종들이 어느듯 쑤욱 커 버렸다. 방울 토마토는 벌써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부추, 미나리, 신선초, 산나물 등 야채들은 이미 나의 식단에서 제 역활을 다해준다. 어리다고 걱정하고 언제 제 역활을 다할까 걱정하지만, 자식들과 세상의 만물들은 새 생명을 얻어 더욱 아름답게 커가고 있구나. 그래, 그리고 나는 늙어간다. 내가 사는 동안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저들의 마음 밭에 사랑의 단비를 듬뿍 주는 일만 남았는데… 걱정 좀 그만 하고 잔소리 좀 그만 하자. 젊은 생명들이 살아갈 그들의 세상 아닌가. 썩어져 한줌의 거름이 될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되었지, 노인네 티 좀 내지말자. 꼰대 티 좀 내지 말자.

나는 자상한 아버지가 아니다.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아빠가 아니다. 자식들이 어려워 하고 뭔가 불편해 한다. 내가 가까이 다가서면 자식들은 언제나 한발짝 물러선다. 자신의 속마음을 어지간해서 아빠에게 직접 말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고민은 엄마를 통해서 이야기 한다. 엄마는 우리집 은혜의 통로다. 엄마하고는 매일 한시간 이상을 통화하지만 아빠와는 2,3분이면 끝난다. 경상도 남자의 투박하고도 단답형 말투는 내가 들어도 별로다. 재수없다. 말 끝을 좀 올리면 어디가 덧나나?  <노란 샤츠 입은 사나이>, 말없는 그놈이 그렇지 않아도 촌스럽고 무뚝뚝한 나의 촌놈 기질을 더욱 몹쓸 놈으로 만들어 놓았다. 모든게 내 잘못이다. 나의 후회스러움이다. 그래도 나는 많이 변했다고 자부한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빛나는 작은 별이고 싶다. 그래서 그들 곁에 머물고 싶고 조그만 불빛이 되고 싶다. 너무 멀리 와 버린 것은 아닐까. 잊혀지고 싶은 존재가 되어 버린건 아닐까. 살면서 나와 함께 한 추억이 저 오월의 단비처럼 저들의 삶에 축복이고 싶다. 하지만 우리 딸들이 못난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내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항상 고맙고 늘상 미안하다.  

법정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인용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에 대해 감사하게 여긴다./ 내가 걸어 말고는  나에게 다른 길이 없었음을 깨닫고 / 길이 나를 성장시켜 주었음을 긍정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 가는 것이다 / 일의 과정에서, 길의 도중에서 잃어 버린 초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근원적인 물음/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묻는 것이다./ 삶의 순간 순간마다 /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서/ 그때그때 마무리가 이루어 진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 놓음이다./ 내려놓음은 일의 결과나/ 세상에서의 성공이나 실패를 뛰어 넘어/ 자신의 순수 존재에 이르는/ 내면의 연금술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채움만을 위해 달려 생각을 비우고/  비움에 다가가는 것이다 / 그러므로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고 / 비움으로 가져다 주는 충만으로  자신을 채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삶의 본질적인 놀이를 회복하는 / 심각함과 복잡함을 내려 놓고 /천진과 순수로 돌아가 / 존재의 기쁨을 누린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지금이 바로 때임을 안다./ 과거나 미래의 어느 때가 아니라 / 지금 이순간이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순간임을 안다.

또한 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이고 이해이고 자비이다./ 용서와 이해와 자비를 통해 /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일깨운다.

법정 스님은 자신의 삶을 이루는 세가지 소박한 행복은 몇권과, 자신의 일손을 기다리는 조그만 채소밭과, 오두막집 개울가에서 길어 마시는 한잔이라고 한다. 나의 요즈음 일상도 스님을 많이 닮아가려고 하는데.. 그리고 지금 나는 오월의 단비와 함께 둘째 딸을 기다린다.

 

 <참>이란 무엇인가? (05-26-2017)

 인간은 누구나 <참>을 추구한다. <참>을 알고 싶어하고 <참>을 믿고 싶어한다. 그러면 <참>은 무엇인가? 기독교의 성경, 이슬람교의 코란, 불교의 불경, 유대교의 토라와 탈무드, 어느 것이 참인가? 예수나 부처의 말씀과 가르침이 <참>의 전부인가? 역사의 수많은 철학자들과 현인들의 사상은 <참>의 일부인가? 참이 아닌 것을 참이라고 믿는 것이 맹신이고 광신이다. 성인이나 철인들이 설파한 교리나 말씀은 각기 다르나 하나가 아닌가? 하나가 아닌 것은 참이 아닌가? 변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닌가? 니체의 말처럼 <의심하라>.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함석헌 선생의 <너 자신을 혁명하라>에서 <참>을 인용하면서 <참>을 생각해 보자.

참이란 ‘망령되다’의 반대 뜻으로 허투로 마구 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로 참이란 <동질적>인 거다. 순일(純一)하다는 것, 영어로 ‘pure’라는거, 변하지 않는거, 아무리 오래 가도 까딱 없는거라는 뜻이다. 세째로 어느 편에도 치우치지 않는거, 네째로 ‘가득차다’ ‘속알이 아주 단단하게 든다’라는 뜻도 있다. 다섯째로 제가 주인이라는 생각, 주체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란 다른 것은 다 두고 <나는 나다> 하는 나로서의 자각, 확신이 있어야 한다.

참은 하나다. 한 나다. 아(我)다. 큰이다. 수로 헬 수 없는 것이 하나다. 마음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다. 내가 알 수 있으면 하나가 아니다. 하나는 누가 만든 것이 아니다. 그 자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다. <나는 나다> 하는 이가 하나다. 생명의 원리는 자(自)다. 자유, 자재, 자생, 자멸, 자진, 자연, 그저 자연이다. 참은 참이지, ‘왜 참’이란 것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있어서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眞)은 참이다. 참을 찾는 것이 지혜다. 참이 아닌 것은 거짓이다. 변하는 것은 거짓이다. 사람의 경험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우주는 변동하는 우주다. 그 변동하는 가운데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을 찾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것이 바탈이다. 천성이다. 본질이다. 동양에서 말하는 역(易)은 바뀐다는 말이다. 참을 찾다가 마지막에 찾아 얻는 것이, 모든 것은 변한다, 쉬지 않고 변하는 이거야 말로 변함없는 참이다. 그 변함 속에서 변하지 않으려는, 변(變)이 됨으로써 불변(不變)에 참여하려는 믿음이다. 석가의 제행무상 (諸行無常 : 우주의 모든 것은 생멸변화하여 변천해 가며, 잠시도 같은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 꿈처럼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도 마찬가지다.

참은 빔이다. 허즉실(虛則實)이라 비면 찬 것이다. 참사랑은 누구도 사랑하지 않음이요, 참 앎은 아무것도 알지 않함이요, 참 온존히 함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사랑하고, 아무것도 알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없다. 하나님은 아니 계신 이다. 어디도 언제도 어떤 모양으로도 아니 계시기 때문에 어느 시간에도 못갈 곳이 없고, 못할 일이 없다.

참은 참음(忍)이다. 사바세계라 함은 이 세상은 참아야 할 곳이라는 것이다. 거짓은 더러운 것이다. 더럽기 때문에 참아야 한다. 시체가 가득한 죽음의 골짜기에 헤매어 들었다면 그곳을 완전히 빠져 나갈 때까지 참아야 한다.

참은 찾음이다. 찾기만 하면 참이다. 찾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참이 아니다. 얻어도 참, 못얻어도 참, 찾음이 얻음, 얻음이 찾음이다. (맹자)

삶은 참이다. 삶보다 더는 없고, 삶보다 덜도 없다. 참은 날마다 새로운 체험을 해야 하는 것이다. 진리는 맨 처음부터 있는 영원한 진리지만, 그것이 날마다 새롭게 체험되어야 생명이다. 심심하다, 지루하다, 스트레스니, 노이로제니 하는 것은 삶이 역겨워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런 인생은 죽은 인생이다.

참은 어떻게 하면 만나나? 참 든 마음으로야  된다. 참된 마음, 참되지 못한 마음이 따로 있지 않다. 마음은 참이다. 나는 타고난 약한 것이다. 나는 약하므로 거스리지 못할 것을 지키면 그만이다.

자기를 앎이 모든 것을 앎이다. 나를 앎이 하나님을 앎이요, 자연을 앎이다. 내가 나를 알았다면 모른 것이다. 다른 것은 다 알 수 있어도 나는 모른다. 자기 발견이란 무슨 잃었던 것, 숨었던 것을 찾으란 말 아니다. 잃을래도 잃을 수 없고, 숨길래도 숨길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나를 알려, 무엇인지도 모르는 영원한 것, 무한한 것을 찾으러, 하나된 마음으로 찾아나서는 것이 곧 자기발견이다.

사는 길이 결코 발 끝에 있지 않고 저 먼 앞에 있다. 땅이 아니고 하늘에 있다. 지금 있는 것에 있지 않고 장차 올 것에 있다. 뵈는 것에 있지 않고 이치에 있다. 힘에 있지 않고 정신에 있다.

스스로 하는 한 자유가 있을 뿐이다. 자유는 하나다. 사람 노릇 하는 것이 자유다. 스스로 하는 것이다. 누굴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고 싶어서 한다. 죽고 뺏김은 스스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그릇된 생각이다. 그릇됨은 삶과 생각이 하나 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수컷들의  향기 (05-19-2017)

문재인 대통령과 새 정부가 구성되고 새 시대가 열렸으니 한국 뉴스를 자주 볼 일이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다. 매일 매일 입가에 미소짓게 함은 문재인 내각들의 신선한 소식과 향기로운 수컷들의 냄새 때문이다.

<수컷들의 냄새>. 문재인 대통령은 나보다 일년 위인 고향 선배이자 동년배다. 서울에서나 미국에서나 부산고와 경남고 출신들은 서로 선배 대접을 한다. 그도 나처럼 부모님이 일사후퇴때 흥남부두에서 미군함정을 타고 거제도로 피난 내려온 함경도 피난민 가족이다.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 세대 남자들은 비슷한 수컷들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교실이나 도서관, 독서실의 냄새, 하숙방의 특유한 냄새, 군대 내부반 냄새, 친구들끼리 운동하고, 며칠밤을 같이 공부하며 뒹굴던 냄새, 며칠밤을 뜬눈으로 지세우며 시국을 토론하고 데모하고 도망다니던 친구들 골방 냄새, 허름한 막걸리 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울기도 하고 격분하기도 하던, 젊음의 열기를 나누던 그 암울한 시절의 냄새.., 그 시절의 젊은 사내 아이들 냄새가 신기하게도 이번 문재인 정부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행동 하나 하나가  노무현 대통령 이후 오랜동안 잊고 살았던 <촌놈>들의 순수한 냄새로 다시 피어나는 것 같다.

우리 세대는 목욕을 자주 못하던 세대다. 하복과 동복 교복 두벌로 일년을 살았던 세대다. 하지만 나이는 비록 어렸지만 <사내 대장부>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배웠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고등학교 시절 ‘살메’라는 시호를 갖고 계신 국어선생님이 신입생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직도 머리에 박혀 있다. “너희들은 대한민국을 이끌고 나갈 지도자가 될 사람들이다. 너희들의 생각 하나 하나, 행동 하나 하나가 앞으로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수도 있다. 모든 결정은 너희 스스로 하고, 너희 스스로 책임지도록 해라. 결단코 식충이로 살지마라.” 그 당시에는 고등학생이 담배를 피우면 정학을 당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우리 학교는 그런 부류의 감시와 제재가 일체 없었다. 학교와 사회로 부터 인정을 받는 만큼  어린 사내놈들의 자부심과 책임감이 대단했던 것이다.

<사내 대장부>. 오랜만에 읊어본다. 돈이면 최고인 세상에서 살면서 <대장부>라는 단어는 까마득히 잊혀져 버렸다. 꽃미남, 까도남, 엄친아, 명문남, 빌딩남.. 등등 사내의 가치는 모두 돈으로 직결된다. 수컷만의 특유한 향기가 없어졌다. 남자가 성형외과를 찾고 피부관리를 하고 화장을 하고… 성평등의 사회에 살고 있으니 그래, 다 좋다. 하지만 동물의 세계에서 수컷은 수컷다워야 하는거 아닌가?

도올 선생이 강의한 적이 있는 맹자의 <대장부 (大丈夫)>를 다시 생각해 본다.

<居天下之廣居 >– 천하의 넒은 자리에서 거하고, <立天下之正位> — 천하의 가장 바른 자리에 서고, <行天下之大道> — 천하의 가장 큰 도를 행한다. <得志與民由之> — 뜻을 얻으면 백성과 더불어 함께 하고, <不得志獨行其道> —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라도 그 도를 행한다. <富貴不能淫> — 부귀도 나를 타락시킬 수 없고, <貧賤不能移> — 빈천도 나를 움직이지 못한다. <威武不能屈> — 어떠한 위세와 무력도 나를 굴복시킬 수 없다. <此之謂大丈夫> — 이런 사람을 일컬어 대장부라 말한다.

군자는 광거(廣居), 넓은 자리에 거한다는 것은 인(仁) 안에서 산다든 의미다. 군자는 길을 가다가 넘어져도 인(仁) 안에 머물라 했듯이, 군자의 삶은 인(仁)에 바탕을 둔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사상은 인(仁)의 사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선하고 어질지 못한 자가 군자가 될 수 없고, 사악하고 간교한 자가 아무리 돈이 많고 출세했다 할지라도 대장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정위(定位), 바른 자리라 함은 정의(定義)로운 자리, 양심적인 자리를 말한다. 아무리 좋은 자리가 내게 주어져도 그 자리가 정의롭지 못하고 양심에 꺼리끼는 자리라면 피해야 한다. 예(禮)에 맞게 산다는 것이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사는 것이다.

대도(大道), 큰 길이라 함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보편적인 길, 양심적인 길을 말한다. 나만을 위한 길, 내 가족의 안위만을 위한 길(小道)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길, 역사와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는 길을 걸어야 한다.

득지(得志), 즉 입신양명(立身揚名),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출세하여 이름을 세상에 드날릴 지위에 오르게 되면 백성과 함께 그 뜻을 실현하고, 설령 출세하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살더라도 군자는 큰길(大道)를 가야 한다는 것이다. 부귀의 유혹이나 빈천의 고통이나 어떠한 위세나 무력이 나에게 가해진다 할지라도 군자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대장부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에게는 대장부의 냄새가 난다. 수컷의 냄새가 난다. 잘 하리라 믿는다. 거대한 적폐 세력들과 싸워야 한다. 임기 내에 끝낼 수 없는 싸움이다. 흔들림이 없도록 민중이, 백성이, 국민이, 시민이 촛불로 도와주어야 한다. 다시는 대장부 대통령이 자살하는 비극은 없어야 한다. 길고 긴 싸움이 될 것이다. 대장부와 이무기와의 싸움이다. 문재인과 조국이여, 건투를 빈다.

  

 나 자신을 혁명하라 (05-12-2017)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었고, 새 시대가 열렸다. 통합과 새 시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100년이 넘는 기득권 부패 세력들에 대한 적폐청산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 세력은 이무기와 같은 거대한 괴물이다. 대통령 한 사람의 힘으로는 결단코 혁명을 일으킬 수 없다. 적폐청산이 되는 그날까지 대한민국 씨알들의 촛불 혁명, 민중혁명은 계속 되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을 혁명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 부터 혁명해야 한다.

<너 자신을 혁명하라>. 김진 박사가 쓴 <함석헌 선생의 말씀 명상집>이다. 한때 절판이 되어 구하기 어려운 책이지만, 몇번을 읽어도 글이 무겁고 나의 생각을 되잡게 만든다. 함석헌 선생은 자신의 삶을 철저히 성찰하고 자기 반성을 토대로 사회에 실천했다. <자기 혁명> 사상은 <생각>으로 부터 시작한다. 생각은 이성적으로 떠올리는 <하는 생각>과 자기 변화를 이루는 <나는 생각>으로 나눌 수 있는데, <나는 생각>이 자기혁명 사상의 핵심 화두라는 것이다. <혁명>은 하늘에서 내린 명(命)을 새롭게(革) 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우리들이 하늘이 준 명령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권력과 탐욕의 잘못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하늘이 내린 명은 무엇인가? 예수의 절체절명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이다. 그런데 나 자신을 비롯해 현대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는 생각>이지 <나는 생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함석헌 선생은 사회혁명 이전에 자기혁명, 자기해방을 강조했다. <참 나>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씨알로서의 삶(개인)과 씨알혁명(사회)의 시작과 끝이라는 것이다. 선생은 자기혁명 없는 사회적 실천, 실천없는 자기 명상은 결코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지 못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 <참> <나>란 무엇인가? 선생의 말씀들을 간추려 몇가지 소개한다.

마음이 주인인줄 아는 사람은 마음을 맑히기를 힘쓰고, 마음이 맑아서 보면 참이 보인다.전체의 참을 볼 수 있는 눈이 참의 눈이요, 부분만 보는 눈은 흐린 눈이다. 나만 아니라 남을 아는, 이재(理財)만 아니라 영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보면 역사는 결코 강한자의 것이 아니고 착하고 부드러운 자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열린 마음은 어떤 것인가? 진리에다 무한성을 허락해서 새로 더 배울 생각을 하는 것이다. 닫힌 마음은 종의 마음이요, 열린 마음은 아들의 마음이다. 하늘나라를 지키잔것은 종이요, 하늘나라를 내 집으로 내 마음대로 쓰잔 것은 아들이다. 종놈은 문칸을 지켜라. 아들은 그 속을 알고 불편이 있으면 고치고 부족하면 더 지으면서 살리라.

하늘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 하신 그 나라는 마음의 나라다. 안이란 마음이다. 맘의 나라는 없음의 나라다. 안(內)이란 모든 것이 다 아니(否)인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 가진 때가 맘이요, 온전히 왕 노릇하는 맘, 즉 제 노릇하는 맘이다. 맘이 제노릇하면 그것이 평화다. 맘이 모든 주장을 내버린 때에야 자유다.

인격이란 다듬고 다듬은 마음과 사상과 행동이다. 사람의 혼 속에는 하늘이 넣어준 보배로운 옥이 있다. 그 옥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속의 옥을 발견한 사람은 남의 속에도 똑같은 귀한 혼이 있는 것을 알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내 속에 영원불멸의 혼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않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신(영)은 순수해지고 부드러워져야 한다. 노자가 허(빌 虛)와 정(고요할 靜)과 유(부드러울 柔)와 겸(겸손할 謙)을 권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차고 냉철한 마음이 필요하다. 냉정이라니, 차지 않고 빌 수 없고, 비지 않고 밝을 수 없고, 밝지 못하고 충만할 수 없고, 충만하지 않고 온전할 수 없다. 차야 한다. 감정은 뜨거운 것이요, 오성(悟性 – 주. 플라톤의 로고스, 인지능력)은 찬 것, 감정은 내게 붙은 것, 오성은 이(다스릴 理) 전체에 붙은 것, 그러기 때문에 차면 뚫린다. 뚫린 것이 참이다. 뚫는다 함은 유(有)를, 물(物)을 뚫는 것이다. 그것을 뚫어야 무한의 저쪽이 보인다. 그것을 통찰이라, 달관이라 한다.

생각하면 깨닫게 된다. 깨닫고 보면 인생관이 달라진다. 세속주의에서는 잘먹고 잘 입고 명예를 누리며 권세를 휘두르고 살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인생의 참 모습을 깨닫고 나면 그 모든 것이 다 떨어져 나간다. 마치 초겨울의 갈대와 같다. 그래서 마른 갈대라 했다. 욕심을 버린 사람도 그렇다. 비면 속이 뚫려서 진리를 알게 된다.

사람들은 단 것은 좋고 쓴 것은 싫다고 한다. 그러나 참을 깨닫고 나면 쓴것, 단것이 참이 아님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하면 성공이니 실패니 명예니 욕이니 하는 것으로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는 지경에 간다. 사람의 어려움은 결국 밖에서 오는 자극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는데 있다. 그것이 없어지면 마음에 평안이 있다. 그 평안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솟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기쁨, 참 행복이 있다. 삶에 보람을 느끼면 굶고 헐벗어도 즐거움을 느낀다. 죽어도 즐거워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다 좋다는 말은 참 인생이 겉에 있지 않고 속에 있다는 말이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후편 (05-05-2017) 

5월 9일이면 백성들의 현명한 선택으로 정의로운 대한민국 대통령이 선출될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이명박, 박근혜가 부패한 적폐세력과 함께 분탕칠 해온 대한민국이 3대 강대국들의 압력과 틈새에서 살아나갈 세월들로 심히 걱정된다.

함석헌 선생은 1958년 그 당시 미래의 우리에게 3가지 역사적 숙제를 던지셨다. “하나는 <통일정신>이요, 다른 하나는 <독립정신>이요, 또 다른 하나는 <신앙정신>이었다. 이 세가지 정신은 결국 하나다. 한민족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다. 한반도 5천년 역사의 내리밀림이 이조 5백년의 <당파 싸움>으로 부터 기인한다. 하나됨은 그 잘못이 누구에게 있던간에  작은 생각을 버리고 하나 (大同)하는 것이 하나님의 교훈이자 역사의 명령이다. 하나됨은 남의 인격을 존중해서만 될 수 있는 일인데, 남의 인격을 아는 것은 내가 인격적으로 바로 서고야 될 일이다. 인격이 곧 자존 (自尊)이다. 스스로 높임이 스스로 있음 (自存)이다.”

<독립정신>이 부족하다는 것은 백제가 일본에 손을 내밀고, 신라가 당나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려 묘청의 난에서 그러했고, 이조는 명나라, 청나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한제국 때는 중국, 소련, 일본에 번갈아가며 손을 내밀다가 결국은 나라를 팔아먹었다.  식민지 기간 동안에도 독립군과 임시정부 요인들이 서로 당파를 만들고 등을 돌렸다. 남의 손에 의해 해방이 되었어도 정신을 못차리기는 마찬가지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 남한은 미국에 손을 내밀었다. 형제끼리 죽고 죽이는 세계 역사에 유례를 찾기 어려운 처참한 전쟁을 치룬다. 그 전쟁은 끝나지도 않았고 통일이 되지도 못했다. 잠시 휴전 상태로 지금까지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잘 살고 있다. 특이한 민족이다. 지리 지형적 탓을 할 수도 있고, 주위 민족의 탓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격에는 핑계가 없다. 우주를 등에 지는 것이 인생이요 정신이다. <너는 역사의 주인이 되라>라는 숙제를 알아야만 이긴 자가 될 수 있다.

독립정신은 깊은 인생관, 높은 세계관에서 온다. 위대한 <종교정신>에서 나온다. 종교란 뜻을 찾음이다. 현상의 세계를 뚫음이다. 절대에 대듦이다. 하나님과 맞섬이다. 하나를 함이다. 일찍이 역사상에 위대한 종교없이 위대한 나라를 세운 민족은 없다. 종교가 잘못되고 망하지 않은 나라는 없다. 어떤 나라의 문화도 종교로 일어났고 종교로 망했다. 우리 민족의 근본 결점은 위대한 종교가 없는데 있다. 우리나라의 백가지 폐단은 가난에 있다 하지만, 가난 중에서도 심한 가난은 <생각의 가난>이다. 철학의 가난, 종교의 가난, 물자의 가난이다. 물자 가난의 원인은 <인물 가난> 때문이다. 인물 가난이 된 원인은 당파싸움으로 인물들을 자꾸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베인 나무는 10년이면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인물이 죽으면 백년이 지나도 얻기 어렵다. 따라서 한민족의 역사적 숙제는 이 한점에 맺힌다. 깊은 종교를 낳자는 것, 생각하는 민족이 되자는 것, 철학하는 백성이 되자는 것. 그리하여 굳센 믿음을 가져라. 네가 네가 되어라. 그래야 우리가 하나가 되리라.”

선생은 6.25 전쟁으로 인한 형제의 참뜻을 이렇게 묻는다. “첫째. 이것이 참해방이냐? 둘째, 이 정권들은 정말 나라를 대표하는 거냐? 세째, 너희는 새역사를 낳을 새 종교를 가졌느냐? 참 해방이 되었다면 참 자유하는 민족이 되었다면, 미,소 두 세력이 압박하거나 말거나 우리는 우리대로 섰을 것이다. 나라를 좀더 생각하는 정성과 백성을 좀더 불쌍히 여기는 생각이 있었다면 전쟁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느 시대나 새 시대의 주인되는 자는 없는 자이어야 한다. ‘남쪽도, 북쪽도, 서로 형제요 동포라고는 하면서도 서로에게 총을 내미는 이 전쟁이 서로 대적(大賊) 인줄로만 알았단 말인가? 어느 한 사람도 팔을 벌리고, 들어오너라. 너를 대항해 죽이기 보다는 나는 차라리 네 칼에 죽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땅이 소원이면 가져라. 물자가 목적이면 마음대로 해라. 정권이 쥐고 싶어 그런다면 그대로 하려무나. 내가 그것을 너하고야 바꾸겠느냐? 참 하고야 바꾸겠느냐? ‘ 라고 하는 한 사람도 없었다. 서로 죽이거나 혼자 살겠다고 도망쳤을 뿐이다. 그것이 자유하는 혼일까? 사랑하는 마음일까? 만일 그런 혼이 국민의 일부라도 있었다면 미국, 소련, 중공이 감히 우리를 강제할 수 있었겠는가?”

6.25 전쟁이 끝나고서도 서로가 이겼노라 주장한다. 형제 싸움에 승전 축하를 한다. 슬피 울어도 부족할 일인데 서로 가슴에 훈장을 달고 자랑을 하고 산다. 노자는 전쟁에 이기면 상례(喪禮)를 처한다 했건만… 지금도 남한과 북한은 한 형제이고 한민족이고 같은 동포이면서도 서로를 주적(主敵)이라고 한다. 핵전쟁이니, 선제공격이니, 서로 죽이겠다고 설친다. 해방이 우리 힘으로 되지 않았으니 해방이 될리 없다. 이제라도 우리 손으로 다시 해방해야 한다. 같은 형제끼리 만나서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 한민족 모두가 회개해야 한다. 진실되어야 한다. 돕고 나누어야 한다. 서로 믿고 의지해야 한다. 지금 우리 세대가 통일하지 않으면 다시금 강대국들의 먹이감이 되거나 노리개감이 될 것이다. 하나님, 이 나라를 불쌍히 여기소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전편 (04-28-2017)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이 칼럼 제목은 <바보새, 함석헌> 선생께서 1958년 이승만 정권 시절에 “6.25 싸움이 주는 교훈”이라는 부제로 사상계에 글을 쓰셨다가 구속되어 투옥된 글이다.

일주일 후면 누군가가 새로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것이다.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된 인물이 선출되어 대한민국 역사에 자랑스런 대통령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는 사람을 평가할 때 주요시하는 기준이 있다.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행적이다. 그때 그 시절 무슨 생각과 사상으로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보면, 지금 하고 있는 현재가 보이고 또한 미래가 보인다. 언제나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는 연결된 선(線)상에 있다. 그래서 사람은 비록 가난할 지언정 잘 살아야 하는 것이다. 개과천선 (改過遷善) 하기는 정말 어렵다. 40대 이후의 성인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사람의 사상과 철학, 역사의식은 중요한 것이다. 일국의 대통령을 뽑는 것은 명문 엘리트나 전문가, 혹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다. 백성만을 위하는 진실한 사람을 뽑는 것이다. 진정성, 정의감, 인간성, 투철한 국가관이 중요하다. 한국 사람은 학력 컴플렉스, 혈통 컴플렉스, 출신 컴플렉스가 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 그들이 살아온 과거를 보라.

이번 선거에서도 여전히 <국민경제>와 <국가 안보>가 최대 이슈다. 특히 “대한민국의 주적(主敵)은 북한인가?”에 우익과 좌익, 보수와 진보, 종북과 종미로 이분법 싸움을 한다. 주적은 누구인가? 대한민국을 침략하는 그 어떠한 국가나 세력도 주적이 될 수 있다. 전쟁중이 아니면 주적이라는 표현보다 가상의 적, 위협세력으로 표현해야 한다. 그러면 왜 북한만 주적이 되는가?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도 주적이 될 수 있다. 영원한 동맹은 없다. 그래서 어느 국가나 스스로 자강(自强), 자립(自立)해야 하고, 그러지 못하면 종속(從屬)된다. 또한 주변 국가와 동맹으로 균세(均勢)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북한은 내 형제요 내 민족이다. 언젠가 하나가 되어야 하고 통일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대동(大同) 해야 하고, 협력해야 하고 대화해야 한다. 무슨 이유든, 무슨 핑계든 한반도에서 결단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같은 형제끼리 죽고 죽이는 그런 바보같고 미친 짓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되며, 결단코 막아야 한다.  

59년전에 함석헌 선생이 쓴 <생각하는 백성이어야 산다>를 요약하면서 그 당시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게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고, 어떻게 해야 <생각하는> 백성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선생은  “6,25 사변은 아직 우리 목에 씌워져 있는 올가미요 목구멍에 걸려 있는 불덩이다. 아무런 불덩이도 삼켜져 목구멍에 내려가면 되건만, 이것은 아직 목구멍에 걸려 우리를 괴롭힌다.”고 우리 민족의 현실을 개탄한다. 그는 6.25의 역사적 뜻을 “역사적 사건의 뜻을 깨달음은 불덩이를 삼킴이요, 올가미를 벗김이다. 모든 일에는 뜻이 있다. 뜻에 나타나는 것이 일이요 물건이다. 사람의 삶은 일을 치름(경험)이다. 뜻이 있으면 있다 (存在). 뜻이 없으면 없다 (무, 無). 하나님은 뜻이다. 뜻을 깨달으면 얼 (靈), 못깨달으면 흙. 전쟁을 치르고도 모르면 개 돼지요, 영원히 멍에를 메고 맷돌질하는 당나귀다.”라고 하셨다.

선생은 6.25 전쟁의 역사적 반성을 “6.25 싸움의 직접적인 원인은 38선을 그어놓은데 있다. 미국과 소련이 미끼를 서로 물고 당기다가 할수없이 찢어진 금이 38선이다. 피가 하나요, 조상이 하나요, 풍속 도덕이 하나요, 이날껏 역사가 하나요, 이해 운명이 한가지인 우리로서는 갈라질 아무 터무니도 없다. 이 싸움의 원인은 밖에 있지, 안에 있지 않다.”

선생은 “우리는 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가? 원인은 서민 곧 백성이라는 것이, 이 씨알이 힘있게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남들은 아무리 봉건제도 정치가 백성을 부려먹는, 씨알을 짜먹는 일이라 할지라도 서민계급을 길러가며 생산방법을 가르쳐주며, 어짊과 인정은 있었는데, 우리나라 시대 시대의 정치업자 놈들은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그저 짜먹으려만 들었다. 그러니 백성들은 줄곧 말라들기만 했다. 자본주의 국가는 씨알 중에서도 중산층의 나라다. 중산층이란 그 사회제도가 씨알이 자라 제 힘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는 말이다.” “민족 전체가 남의 종이 된 것은 씨알이 양반이라는 이리떼에게 짜먹혀 여지없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민족 국가 시대에 남의 종이 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 시대에도 남의 종으로 팔릴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일본에게 해방이 되었다고는 하나 참해방은 조금도 된 것이 없다.도리어 일본시대에는 종살이라도 부모 형제가 한 집에서 살 수 있고 동포가 서로 교통할 수 있지 않았나? 지금은 그것도 못해 부모 처자가 남북으로 헤어져 헤매는 나라가 자유는 무슨 자유, 해방은 무슨 해방인가? 남한은 미국 꼭두각시, 북한은 중국 소련 꼭두각시.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았어야 하는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 밖에 될 것이 없지 않은가?”

 

 노란  리본 (04-21-2017)

4월 16일, 내일은 인류의 구원자이자 생명이신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인 동시에, 세월호 참사 3주년 되는 날이기도 하다. 예수는 부활하시자 마자 무덤에서 천국으로 바로 가시지 않았다. 예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 세상에서 배척받고 멸시받는 사람들, 아픔과 상처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달려 가셔서 그들을 위로하고 부활의 확신을 심어 주셨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고.

<예수가 여기에 함께 계시다 !(마태 28:1-10)>. 예수는 부활해서 천국에 가셨다면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씀은 거짓인가? 천국은 반드시 죽어야만 가는 곳인가? 만약, 만약에 우리 마음 속에 천국이 있다면, 우리 마음 속의 천국에 예수가 부활하여 살아계신다면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심령이 가난한 우리에게, 세상의 모진 풍파와 고통 속에 신음하는 우리의 마음속에 함께 부활하여 계신다면? 할렐루야,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인가. 나는 부활을 그렇게 믿고 싶다. 예수는 부활하시어 우리들 가난한 마음 속 천국에 살아계신다. 그러므로 예수는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 내 마음을 천국으로 만드느냐, 지옥으로 만드느냐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면 나는 잘 살아야 한다. 고민하고 성찰하고 기도하고, 그래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나누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부활의 의미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다.

<노란 리본>. 세월호의 상징이다. 노란 리본은 세월호의 유가족분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의 아픔이고 비극의 상징이다. 다시는 일어나서도, 일어날 수도 없는, 그래서 반드시 그 진상이 밝혀져야 할 상징이다. 그런데 그 노란 리본을 손이나 가방이나 차량에 달거나 부치고 다니면  <친노, 종북, 좌빨, 반정부주의자>로 치부하고 탄압하고 폭행하고 침을 뱉는 백성들이 있다면 이상한 백성들 아닌가? 3년이면 지겹도록 충분히 울겨 먹었다고 친박 정치인과 추종 세력들이 말한다. 세월호 인양은 막대한 국고와 국민 혈세를 탕진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잔인하고도 편협된 무치의 장난이다. 세월호는 죽어서는 안될 백성들이 죽었고, 살릴 수 있었던 백성들을 죽도록 방치한 사건이다. 사고가 났으면 하루빨리 배를 인양하고 시신을 수습하고 사건의 진상을 밝혔으면 될 일이다. 죽은 백성들 목숨을 가지고 3년이라는 세월을 끌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런데 참사가 난지 3년이 지났건만 아직 아무것도 밝혀진게 없다. 세월호 사망자 304명, 미수습자 9명. 그렇게 3년이 지났건만 이제 겨우 세월호 선박이 인양 되었다. 그것도 한달만에. 이게 나라인가?

나는 세월호 참사 한달 뒤인 2014년 5월 17일 <거짓된 사회>라는 제목으로 신문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나는 그때 한국은 거짓된 사회이고, 부정부패와 비리가 먹이사슬처럼 엮여진 사회이기 때문에 세월호 진실을 밝혀내기 어려울 것이라 예언 아닌 예언을 했다. 그러면서 한국이 정의로운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 처럼 <시민 불복종>과 <시민 투쟁>만이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할 것이라 쓴 적이 있다. 다행히 3년 뒤 1천7백만 촛불집회로 새로운 대한민국이 탄생하려고 한다.  물론 박근혜는 지금까지 한번도 노란 리본을 단 적이 없다. 친박 국회의원이나 고위 공직자들도 마찬가지다. 교육부는 2014년 9월에 전국 교직원과 학생들이 노란 리본을 달지 못하도록 전국 교육청에 공문을 하달한다. 노란 리본을 정치적 활동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백성의 아픔은 정치적 유불리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아픔은 공감되어야 하고 나누어야 한다. 심지어 2014년 8월에 한국을 방문하신 프란치스코 교황께도 노란 리본을 달고 계시자 정부 관계자가 못달게 했다고 한다. 물론 교황께서는 그 이후 계속 달고 계시면서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라고 명언을 남기셨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구원받고 부활하는 막연함이 아니라, 세상에서 소외받고 어려워하는 그곳에 <예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마땅히 소외된 그들과 함께 해야 하고, 그래야 우리도 구원받는 것이 아닐까? 많은 백성들이 팽목항에서, 촛불 집회에서, 각자의 일터에서 세월호의 죽은 내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또 그래서 울었다. 우리 한민족은 왜 이런 곤고한 삶을 살아야 하고,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자성해야 하고 부끄러워 해야 한다. 자식 잃은 설움만으로도 태산을 삼킬 것 같은데, 그 설움으로 소외받는 가족들이 되게 해서야 되겠는가?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은 어떤 정치적, 종교적 이념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이자 소신이며 실천하는 양심이다. 세월호 진상은 반드시 밝혀져야 할 적폐청산 중의 하나다. 숨기고 감추고 거짓말하는 백성들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죽어간 영혼들이 살아서 부활하는 그날까지 노란 리본은 우리들 마음 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

<상흔 (傷痕)> : 윤용기

때로는 마음이 / 잎이 떨어진 나무처럼 아프지만 /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참아야 하고 / 때로는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 분노가 치밀어 올라도 / 잔잔한 호수 처럼 마음을 달래야 한다 / 하얀 옷에 얼룩진 핏물처럼 / 상처투성이인 마음을 어루만지며 / 꾸역꾸역 입으로 밥을 처넣고 / 어김없이 하루해는 서산으로 넘어간다.

 

 떠나가는  자 (04-14-2017)

어려운 시국이다. 한달 뒤(2017년 5월 9일)면 한국은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한국 정치의 국제적 망신인 반면에, 1천7백만명 촛불집회는 한국 민중의 위대성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세상에 드러난 것은 빙산의 일각이요, 더 밝혀야 할 비리는 태산과 같다.

<적폐청산 (積弊 淸算)>. 한반도 근대사에서 기득권에 대한 적폐 (積弊)가 청산된 적이 있었던가? 노무현 대통령이 겁도 없이 적폐청산 하려다가 도리어 역습을 당해 결국 자살하고 말았지 않았는가. 내 조국은 조선 선조 시대 이후 노론과 친일파,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 독재세력과 재벌 기업, 정치계와 법조계, 언론계, 학계, 종교계가 마치 거대한 먹이사슬 네트워크로 짜여진 기득권 세력의 적폐를 과연 청산할 수 있을까?

문재인은 경남고 출신으로 나와는 경남 부산 지역 명문고교 맞수이자 동년배이고, 안철수는 부산고 출신으로 나보다 8년 직속 후배이니 양쪽 모두 연관은 된다. 또한 노무현은 부산상고 출신이고, 김영삼은 경남고 출신이니 부산 출신들이 드세기는 센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누가 되었던 간에 국가 지도자 답게 제대로 의연하고, 국민들 누구나 자랑스러워 할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

떠나는 지도자는 두가지 부류가 있다. 박수칠 때 스스로 자리를 떠나는 지도자와, 무시당하고 외면당해도 권력을 붙잡고 버틸대로 버티다가 쫓겨나는 자다. 정치 지도자들이야 원래 그런 놈들이라 하지만, 도덕성과 청렴성이 절대로 요구되는 문제의 대형교회 목사들은 그 추악함이 더 역겹다. 마태 6장에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걱정하기 보다는 먼저 의를 구하라” 하셨거늘, 허구헌 날 내 재산, 내 자리, 내 가족의 영달만 간구하니, 지도자는 무슨 개뿔!!

국가든, 회사든, 교회든, 조직의 지도자는 정의롭고도 진실되어야 한다. 지도자로 일하다 보면 오해를 받을 수도 있고 실수를 할 수도 있다. 부하 직원 떄문에 누명을 쓸 수도 있고, 책임을 떠 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떠날 수 있다. 아니 누구나 내려와야 하고 떠나야 한다. 그런데 떠나는 그 모습들이 너무 구차하고 졸렬하다. 술 취한 작부의 모습보다 못하다. 추잡하고 게걸스럽다. 통치 기간동안 잘못이 있었으면 법적으로 처벌을 받으면 되고, 그것으로도 백성들이 용서하지 않으면 죽음으로 용서를 빌면 된다. 설령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판정 되더라도 백성들에게 물의와 분노를 일으켰다는 자체가 지도자로써 비판받아야 한다. 남은 여생을 자성하며 부끄럽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어느 지도자에게도 <고도의 명예심>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들은.. 자살하지 않는 대한민국 지도자들. 자기 발로는 절대 내려오지 않는 지도자들. 알량한 지지자들 치마 폭에 숨어서 목숨을 구걸하는 지도자들.. 한심하다 못해 역겹다.

하지만 조선의 역사가, 한반도 역사가 이 모양이 된것은 개, 돼지 같은 몇명의 지도자들 때문이 아니라, 그런 지도자를 뽑은 백성들의 무지와 어리석음 때문이다. 받아서는 안될 돈을 받고, 온갖 가짜 뉴스에 현혹되고, 국가의 상징인 태극기를 앞세우는 것도 모자라, 미국 성조기에다가 이스라엘 국기까지 흔드는 백성들은 어찌 이해해야 하나? 조선시대 부터 지금까지 대국에 붙어 빌어 먹던 거지 습성은 언제 버릴 것인가? 선동하는 자들은 깡패인지 양아치인지 소속조차 불분명하다. 뻑 하면 대한민국 군복이 땡깡 유니폼인가? 혼자서 나라 지키고 애국하고 자유와 안보를 지켰는가?  무슨 무슨 연맹 간부직에만 앉혀 놓으면 누구라도 빨갱이로 몰아 죽이는 그 아귀들은 어찌 해야 하나?  지역과 출신으로 편을 나누고, 우파와 좌파, 아군과 적군, 우리편과 나쁜편으로 나뉘어 죽도록 싸운다. 당파싸움으로 일본놈 종살이 한 민족이 아직까지도 편 가르기와 이분법적 투쟁에 목숨 거는게 말이 되는가? 아마도 문재인이나 안철수,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기득권 부패 세력에 대한 <적폐 청산>이 전제되지 않으면 한민족의 종살이는 계속 반복된다.

필자가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들의 사상을 이끌어 주신 몇분의 스승이 계신다. 그 중에 한분이 <씨알의 소리> 함석헌 (1901.03.13 ~ 1989.02.04.) 선생이다. 독립운동가, 종교인, 기독교 운동가, 시민 운동가, 언론인, 문필가, 민권 재야 운동가, 반독재 민주화 운동가 등으로 알려져 있다. 1970년 <씨알의 소리>는 장준하 선생의 <사상계>, 1976년 한창기의 <뿌리 깊은 나무>와 함께 그 당시 청년들에게 필독 도서였다. 함석헌 선생의 사상은 광활하고도 심오하다. 그의 사상은 <무교회주의>이며 <비폭력주의, 평화주의>다. 그의 필명은 <바보새>다. 선생은 정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정치란 덜 나쁜 놈을 골라 뽑는 과정이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투표를 포기하면 제일 나쁜 놈들이 다해 먹는다.” 그러니 이번에는 진짜 <덜 나쁜 놈>을 뽑아야겠다. 그는 두차례나  미국 퀘이커 세계 봉사회에 의해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몇회에 걸쳐 함석헌 사상을 살펴보자.

 

 봄  아지랑이 (04-07-2017)

봄이 온다. 그리고 봄이 간다. 꽃이 핀다. 그리고 꽃이 진다. 기나긴 겨울밤 모진 바람이 싫어 나는 너를 그렇게 기다렸건만,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그래서 나만 마음이 들킨 것 같아 너를 잊은 처럼, 새침하게 돌아 앉았더니, 어느새 너는 내 가슴에 안겨 활짝 웃고 있구나.

어딜 거리 두리번 거리며 늦장부리나 원망도 하지만, 실은 내가 눈이 아프토록 눈물이 나도록 너를 기다리지 않았구나. 이미 홍매화 피고 수선화도 피고 벚꽃 마저 꽃망울을 터뜨리는데, 나는 네가 서둘러 오지 않는다고 불평만 하는구나. 나는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 동물이구나. 이렇게 사는 건 아닌데.. 무얼 잃어버린지도 모른채 사는거는 아닌데.. 내가 바보구나.

기억속에 아스라히 봄 아지랑이가 피어 오른다. 어릴적 봄 언덕의 아리랑이가 보고 싶어 눈을 감는다. 아지랑이 저편에 나의 어린 시절과 아버지가 보인다. 자주빛 비로드의 고운 한복을 입고 계신 어머니도 보인다. 아른대는 저 흔들림 속에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 둘 보이는구나. 약에 취한듯, 몽환 속에 빠져든다. 기억 저편의 나는 내가 아니다. 어린 시절 저 때는 참 좋았는데.. 재미있고 행복했는데.. 그런데 지금은 궁금한 것도 없고, 관심도 없고, 설레임도 없네. 그러니 사는게 재미가 없는건가? 그래서 봄 아지랑이를 보지 못하는가?

누가 뭐래도 나는 봄이 좋다. 그렇다고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봄을 맞이할 수야 없지. 내 속뜰의 창문을 연다. 봄 내음을 맡는다. 봄비의 속삭임을 듣는다. 어느듯 봄 아지랑이를 타고 산길을 걷는다. 시냇물의 조잘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발 아래 흙의 감촉이 너무 좋다. 흙냄새를 맞는다. 새들의 지저귐이 귀를 간질거린다. 겨울산의 적막함은 새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수줍은 햇살과 땅의 축복이 온 산에 가득하다. 숲속의 침묵을 배운다. 이 숲 속에 내 소유는 하나도 없지만, 내게 전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되지도 않는 글 한줄 쓴다는 것이, 배우고 익혔다는 지식 나부랭이가 저 이름모를 들풀보다 하찮구나. 봄의 생명체에는 신의 축복이, 신비함이, 위대함이, 순종함이, 겸손함이, 자존감이 흘러 넘친다. 숲 속에 피어난 봄의 향연은 나의 선생이고 나의 친구고 나의 위로다.

숲 속의 꽃들은 혼자서 피고 혼자서 진다. 홀로 된 삶은 반복되고, 반복됨은 영원으로 이어진다. 법정스님은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다.”고 말씀하신다. 홀로 있다는 것은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며 자유롭고 홀가분하고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서 당당하게 있음을 뜻한다. 스님은 다음생에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자 원을 세우셨다는데, 나는 언감생심 흉내라도 내 보았으면 좋겠다.

홀로 된다는 것은 다른 생명체의 소리에 귀 기우린다는 것일게다. 달빛 흐르는 소리, 바람 소리, 잎사귀들의 스쳐가는 소리, 개울물 소리, 산새 소리, 풀벌레 소리, 밤비 오는 소리, 심지어 외지인의 발자욱 소리 까지도 함께 하나가 된다. 그러니 홀로 될수록 함께 있다는 말씀일게다.

만약 나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내와 함께 지리산 속에 걷고 싶다. 다문 얼마간이라도 지리산 속에서 살고 싶다.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지리산 풍광들이 봄의 아지랑이 저편에서 나를 오라고 손짓한다. 마지막 지리산 산행들이 35년이라는 세월 속에 묻혀 버렸다. 다른 한국의 산들도 좋아하지만, 유독 지리산은 엄마의 품 속같다. 섬진강 물줄기는 엄마의 젓줄 같다. 산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산들의 장엄함과 노고단 산등성이를 타고 불어오는 산 바람의 청량감, 계곡 사이의 시냇물 속삭임 등, 이런 기억들을 담아서 저 세상에 가져가고 싶다. 그럴수가 있으려나..

봄의 아지랑이와 같은 일요일 낮잠을 아내가 깨운다. 손바닥 만한 텃밭에 야채 씨앗을 심자는 것이다. 좀더 있다가 묘종을 사다 심으면 쉬우련만 무슨 욕심인지 올해는 씨앗을 뿌려서 직접 묘종으로 키우자는 것이다. 그 고집을 누가 꺾어? 매년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는 텃밭에게 고마움을 전할 겸, 겨울 내내 방치되었던 흙들을 갈아 엎는다. 벌써 흙 속의 지렁이들이 댄스 파티를 열고 있다. 행여 다칠세라 조심하여 흙들을 영양 비료와 섞어 둔덕을 만들고 씨앗을 뿌린다. 아내의 욕심이 과하다. 한번 세어 봤다. 방울 토마토, 오이, 호박, 매운 고추, 아삭 고추, 신선초, 블루커리, 가지, 깻잎, 양상추, 대파, 쪽파, 부추, 미나리, 쟈스민.. 15가지가 넘는다. 이건 야채가게를 차리는 것도 아니고 농장을 하는 것도 아니고 너무 과하다는 생각만 할 뿐, 호강 못시켜 준 죄인이니 시키는대로 말없이 일만 하다가 그날 저녁 나는 허리 부러진 줄 알았다.

그래도 나는 봄이 좋다. 봄의 향내는 싱그러움이다. 하늘거리는 봄옷과 처녀 아이의 웃음소리 처럼 상큼함이다. 만물의 환생이자 역동적인 용트림이다. 겨울 내내 움추리게 했던 우울함과 불안감은 떨쳐버리고 가슴을 활짝 펴고 봄길을 걷자. 봄의 노래를 부르자. 우리 모두 다 함께..

 

 걱정말아요, 그대 (03-31-2017)

살면서 힘들 때 가장 의지되는 단어가 뭘까? 누군가가 나에게 <걱정하지마! 내가 있잖아 !>가 아닐까? <Don’t Worry! Be happy!> 가 아닐까? 육십 중반이 가까운 나이지만 어떻게 된게 아직도 사는게 힘들고 벅차다. 나에게는 삶이란 자체가 서툴고 낯설다. 부자는 커녕 여유로운 삶을 살 자신도 없고 싹수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 그런대로 이제는 놓아버리고 싶은데 놓치도 못한다. 나의 믿음은 단순하고도 무지하다. 나는 항상 그분이 나와 함께 한다는 진심과 그분이 날 사랑한다는 믿음만으로 산다. <걱정하지마, 내가 있잖아!!>. 믿는다면서도 사는게 힘들다. 걱정이 마르지 않는다. 걱정도 팔자인가 하노라?

내가 즐겨보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매일 일과는 퇴근해서 집에 오면 아내와 함께 저녁해 먹고 설거지하고 나면 저녁 9시다. TV 프로 한개 정도 볼수 있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7개 프로그램이 정해져 있다. 그중에서도  좋아하는 프로가  <김제동의 톡투유 – 걱정말아요, 그대>다. 특별히 정해진 대본이 없다. 그날의 주제에 따라 참석한 방청객들 이야기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생활 이야기다. 그런데 묘하다. 시청하다 보면 그들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구나>,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때로는 함께 웃기도 하고 함께 가슴이 울컥 하기도 하여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한다. 때로는 그들에게 말한다. <걱정말아요>, <좋아질거예요>, <힘내세요>.. 이런 말들을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나 스스로에게 위안한다.

현대 자본주의는 서민들을 더욱 살기가 힘들게 만들어간다. 특히 10대 청소년들과 2,30대 젊은이들에게 이런 각박한 세상을 물려주는 것 같아서 꼰대의 한사람으로 미안하다는 생각을 한다.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라는 말을 해 줄 수 없는 세상이다. 그래서 더욱 미안하다. 부모 세대가 늘상 하는 얘기가 있다. <믿는대로 이루어진다>는 복음 같은 말이다. 믿는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고 이루어질 수도 없다. 그래서 되묻는다. “왜 믿었는데 이루어지지 않는가?” 그러면  “그건 당신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반박한다. “나는 한번도 의심하지 않고 100% 된다고 믿었다.” 그러면 되돌아 오면 질문이 “정말 한번이라도 의심한적이 없는가?” 결국 꼬랑지를 내리게 되고 자학하게 만든다. 긍정의 힘과 열정만으로는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플랜B도 필요하고, 구체적인 전략과 실행도 필요하다.

바버라 에렌라이크는 그의 저서인 <긍정의 배신> 에서 이렇게 말한다. 거대한 현대 자본주의와 번영을 추구하는 초대형 교회들은 <긍정의 힘>과 은밀한 공생 관계를 맺는다. 조직에서는 <낙관론자>와 <긍정론자>들만이 생존할 수 있다. 상명하복! 상부에서 시키는대로 말없이 묵묵히 일하는 근로자들을 원했다. 비판하고  이의를 제기하고 투쟁하는 근로자들은 퇴출 대상 1호였다. 나도 대기업 부장 시절 상부의 지시로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작업을 한 적이 있다. 일명 <슬림화 작업>이다. 조직의 불평불만자, Trouble maker, 실적 부진한 자들을 색출해서 인사고과에 반영하고 강제 퇴출시키는 것이다. 그 작업이 싫어서 나는 퇴사했다. 회사는 과업을 실패하면 정책이나 제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개인의 긍정적 힘과 열정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자아 비판하기를 강요한다. 그래서 발전한 사업이 <동기 계발>과 <자기 계발> 분야다.

신복음주의나 한국의 대형교회들도 마찬가지다. <긍정의 힘>과 <경제적 부흥 교회>를 정비례 시킨다. 하나님은 너희들을 풍요롭게 번창하시길 원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한 믿음과 긍정의 에너지가 넘쳐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를 의심하지 말고 불만을 말하지 말라, 목사의 말씀에 토달지 말라는 것이다. 교회에도 당연히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 “믿음대로 될 지어다”. 그러면 가난한 자는 믿음이 약해서인가?  2001년부터 2006년 사이만 신도 수 2천명 이상의 대형교회가 두배로 증가해 1210개가 되었다.

저자 에렌라이크는 “신자유주의 메트릭스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밝은 면만 보고, 너 자신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라’이다. 불편한 현실을 외면하고 저마다 자신의 쳇바퀴만 열중하라는 것”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위대한 혁명가 체게바라는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키우자.” 라고 했다. <리얼리스트>는 객관적 현실을 인정하고 그 일을 직시하여 처리하되, 거대한 이상과 꿈을 가지고 잘못된 현실을 넘어서겠다는 실체적 용기를 뜻한다. 현대인은 희망과 꿈을 잃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맹목적, 병리적 긍정주의는 현실성을 잃게 하고 주변 사회에 무관심하거나 독선주의가 되기 십상이다. “항상 비판적 사고로 깨어있고, 고민하고, 개입하라. 가슴이 뜨거운 리얼리스트가 되어라”고 체게바라는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전인권의 <걱정말아요, 그대> 노래 가사중 일부다. “ 우리 다 함께 노래 합시다. 후회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 합시다. 후회없이 사랑했다 말해요. 새로운 꿈을 꾸었다 말해요.” 그래. 그러면 되었지, 무얼 더 바래. 사랑하다 죽자. 걱정말아요, 여보, 힘내세요!

 

 노동의  종말 (03-24-2017)

 왜 세계 모든 나라의 젊은이들이 이토록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까? 더욱 심각한 것은 21세기 중반에 이르면 엄청난 실업난을 겪게 되며 결국 <노동의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것이다.  왜 그러하며 어떻게 인류가 대체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변을 <노동의 종말> 저자인 제러미 리프킨 교수에게서 듣는다.

고전적 <노동의 가치>에 대해서는 필자가 2013년 10월28일 2회에 걸쳐 칼럼을 쓴적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노동 비판, 아담스미스 <국부론>의 한계효용과 잉여가치론 , 칼 마르크스의 <노동의 소외이론>, 심지어 조지오웰의 <동물농장>에 비유한 <노동의 착취>, 막스 베버의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와 칼맹의 <소명의식>, <노동의 합리성과 청빈주의> 등을 거론하였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는 시간이 흐를수록 노동의 신성한 가치가 변질되고, 노동의 정당한 댓가는 지불되지 않는다. 관련 내용은  www.willbusinessbroker.com에서 보실 수 있다.

향후 노동 시장은 어떻게 변할까? 우리 주변에 두가지만 사례를 들어보자. 첫번째는 <알파고> 사건이고, 두번째는 아마존의 <배달 사업>이다. 알파고는 인공지능 로봇이며, 향후 첨단지식 산업분야의 화이트칼러 (의료, 법률, 회계, 주식, 금융, 과학, 컨설턴트, 건축, 음악, 디자인 등) 일자리를 무차별적으로 빼앗는다. 대용량의 전자 데이타 시스템, 초광속 네트워크, 초고속 슈퍼 컴퓨터, 인공지능 프로그램, 첨단 스마트폰 등으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로봇 세상이 되어간다. 이미 외과 수술부터 의료 진단, 광범위한 지식 분석 및 평가 까지 인공지능 로봇이 대신하고 있다. 두번째 <배달 사업>은 서비스 분야의 블루칼러 일자리를 빼앗아 간다. 음식, 의류, 각종 소비재를 인터넷으로 주문만 하면 수량에 관계없이 집까지 원하는 시간에 배달해 준다. 드론의 퀵서비스도 있다. 물류 본사에는 대부분의 일들을 로봇들이 처리한다. 서비스 분야에서도 사람의 일자리가 없어진다. 가격 경쟁력, 편리함, 품질 보장, 제품의 다양성이 보장되는한, 온라인 배달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현대인들은 현대의 눈부신 기술 발전이 인류를 힘겨운 노동에서 벗어나게 하고, 풍요와 안락의 삶을 가져다 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첨단 기술>이 발달할수록 지구에는 두 집단의 종족만 존재한다. 첨단기술 세계를 지배하는 소수의 <정보 엘리트> 집단과, 지구에서 완전하게 불필요하고 아무런 희망도 없는 거대한 <영구 실업자> 집단 이라는 것이다. 소수의 가진 자와 다수의 못가진 자다. 이미 한국에도 인문계와 예술계 출신들은 취직할 곳이 없다. 점점 맑스가 말하는 신성한 <노동계급>이 사라진다.

그래서 <노동의 종말> 저자는 이런 대안을 제시한다. “기술 발전의 이익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새로운 패러다임과, <제 3부문(the Third Sector)>을 강화하는 것이다. 제3부문이란 사회적 공동체를 말하며, 그 공동체를 유지하고 재건하기위한 서비스, 노동, 가치를 부여하고 장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첨단 기술로 도태된 잉여 노동력을 공동체를 위한 형제적 연대, 봉사로 대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사회라고도 하는 제3의 부문은 서비스에서 부터 건강, 교육, 예술, 스포츠, 여가 취미활동, 종교 활동, 사회 참여활동을 포괄한다.

노동의 변천사를 보자. 구석기 시대의 사냥과 채집, 신석기 시대의 농사, 중세 시대의 장인과 노예적 노동, 1차산업혁명 시기 부터 지금까지는 대규모 인간 노동력과 기계가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다. 지금까지의 노동은 먹고 살기 위한 순수함이 있었다. 즉 어디를 가나 일할 곳이 있었고, 열심히 일하고 근검절약하면 먹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접속의 시대>에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로봇, 나노 테크놀로지, 생명공학 등의 지능적 기계들이 농업, 제조업, 서비스 분야의 인간 노동력 시장을 대체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화시대를 제3차 산업혁명이라고도 한다. 21세기는 대량 노동 시대의 종말을 고한다. 선진국의 다국적 기업들이 지구 남반부와 아시아 지역으로의 첨단 기술 제조업 이동도 이제는 값싼 인건비 때문만은 아니다. 첨단기술이 발달할수록 생산원가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낮아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노동의 종말> 저자는 21세기 후기 시장시대로 성공적인 이동을 하기 위해서는 첫째, 기술 진보의 과실을 공정하게 나누기 위해서는 생산성 향상이 근로시간의 감소, 급료 임금의 지속적 인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둘째로 공공시장 경제의 감소는 제3부문의 비시장 경제로 옮겨져야 한다. 당장 긴급한 과제는 빈민 구호, 기초 의료 서비스 제공, 청소년 교육, 임대주택 건설, 환경보호 등이다. 전 세계적으로 수만개의 비정부 기구와 단체들과의 유의미한 공동체 노동으로 흡수되어야 한다.

적어도 21세기 초반에는 제조업은 거의 무노동의 시대로 진입할 것이며, 서비스 분야도 21세기 중반에는 거의 자동화 상태로 진입할 것이다. 기계로 인간의 노동을 대체한 시장 경제와는 달리 사회경제는 기계가 할 수 없는 인간관계, 친밀감, 동료의식, 형제애적 봉사정신 등이 있다. 노동의 종말은 문명화에 사형 선고를 내릴 수도 있지만, 새로운 사회변혁과 인간정신의 재탄생의 신호일 수도 있다.

 

 노동의  상실 (03-17-2017)

 <노동의 배신> 저자가 <워킹 푸어>로 일하면서 깨달은 것은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만의 <특별한 절약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하기 때문에 돈이 더 든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식비와 주거비는 최저 이하로는 도저히 줄일 수 없다. 그중에서도 큰 비중이 <주거비> 부담이다. 한국에도 쪽방, 고시촌 등이 있듯이, 미국에도 임시 주거차량, 콘테이너 쪽방, 부엌 없는 원룸, 일주일 단위의 모델 룸 등이 존재한다. 일반적인 원룸 아파트나  임대 아파트는 한달치 집세와  2,3개월치 보증금이 있어야 하며, 크래딧 조사에도 합격해야 한다. 신용이 좋은 재정 보증인도 있어야 한다. 그런 여건이 되지 못하면 일주일 단위의 쪽방이나 비싼 모텔 방값을 내야 한다.

부엌이 없는 방을 구하면 싸구려 패스트 푸드나 편의점의 즉석 식품을 사 먹어야 한다. 영양은 커녕 최소한의 열량조차 섭취하기 힘들다. 의료보험에 가입할 형편이 못되니, 건강진단은 커녕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처방전이 필요한 약도 사먹지 못한다. 아파서 쉬게 되면 그나마 알량한  일자리도 잃게 된다. 2008년 금융위기 후 실직률은 화이트칼러보다 블루칼러가 3배 이상 높았다. 대부분의 일자리는 정규 근로직보다 임시 근로직, 비정규직, 인턴 같은 일자리로 변질되었다. 워킹푸어의 결정적 약점은 저축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 저축을 할 수 없는 사회적 구조다. 그러니 실직을 하거나 아프면 대책이 없다.

그러면 왜 가난한 노동자는 더욱 가난하여야 하는가?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결론은 근로자 <최저 인건비>를 <경제 성장률>에 비례해서 인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후 미국은 1970년대 신자유주의 체제와 생산 자동화와 기술 혁신으로 생산성이 급속도로 향상되었다. 기업주의 경제적 이득은 급증한 반면, 최저 인건비는 거의 그대로다. 25년전 최저 인건비가 $5.5 이었는데 지금도 우리 지역은 겨우 $8불 선이다.

미국 경제는 2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유대인을 위시한 세계 각국의 유수한 이민자들을 받아 들였다. 신자유주의 이론으로 1970년대 이후 생산량은 급격히 증가하고 경제 신장률은 급속도로 신장되었다. 따라서 소비는 급격히 증가하여 물자가 흘러 넘친다. 하지만 임금 인상률은 경제 성장률에 비해 제자리 걸음이었다. 그러니 1970년대 후반 부터 여성들의 일자리 창출이 퍼져 나갔다. <9 to 5>, <케리어 우먼>이 신조어가 유행하던 시기다. 1980년대에는 맞벌이 부부가 늘어난다. 따라서 소비는  증가하고 경제도 성장하지만 임금은 제자리다. 집 모게지며 차량 할부금이며 카드 융자 등 개인 부채는 늘어나고 소비는 지속적으로 증가한다. 따라서 1990년대 들어와서는 개인별 근로시간을 늘리는 수 밖에 없다. 오늘날 미국 근로자는 유럽은 물론이거니와 일본 근로자들 보다 근무시간이 더 많다. 이때까지는 미국 경제가 활성화 단계였다. 한인 이민자들도 무슨 장사를 해도 돈을 많이 벌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집값이 급격히 상승하면서 개인 부채도 급격히 증가한다. 부동산 거품이었다. 마침내 2008년에 금융위기가 몰아 닥친다. 30년동안 미국 경제와 금융은 급속도로 상승함에 따라 기업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동안, 근로자들의 인건비는 제자리에 머물어 있으니 부채만 늘어난 꼴이다. <빈곤의 악순환>의 반복이다. 그러니 <중산층>이 몰락한 것이다. 임금 정체 -> 구매 감소 -> 기업 구조 조정 -> 세수 감소 -> 정부 예산 삭감 -> 실업증가 -> 산아 억제 ->국가 생산력 저하 -> 실업 증가로 악순환은 반복된다. 근로 형태도 기업체는 <생산성 향상> 이라는 명분아래 <정규직>이 아니라 <비정규직>을 선호한다. 근무 시간은 짧아지고 인건비는 그대로니, 투잡, 쓰리잡을 뛰어야 빚을 갚으면서 겨우 생활할 수 있다.

요즘 자식 세대인 2,30대 젊은 세대들을 보면 너무 안스럽고 측은한 마음이다. 우리 같은 베이붐 세대들은 겪어보지 못한 <실업난>이다. 우리 세대들은 취업난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이다. 한국 유수의 대기업들도 자신이 취사선택해서 들어갈 수 있었다. 미래가 보였다. 입사해서 몇년에 어느 자리까지 승진하고 언제 집을 사고 언제 결혼하고 자식을 몇명을 낳을 것인가 까지 계획한대로 이루어지던 세대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 살아가기도 힘들고 벅차다. 계획을 할 수 없는 <불확실성 시대>가 아니라 <암흑의 시대>다. 죽도록 일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시대다. <노동의 가치>가 상실된 시대다.

가난한 근로자에게 <노동의 가치>를 논하지 말라. 하나님이 워킹푸어를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 하더라도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할 수 밖에 없다. 10대 어린 나이부터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가 없다. 엄청난 학자금 융자 부터 주택 융자까지 빚을 갚기 위해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해야 한다. 구직과정에서 부터 근무 환경까지 노동 현장은 노예현장으로 바뀌어 간다. 가난하기에 돈이 더 필요하고 그래서 더 많이 일해야 하고 그래도 빚은 자꾸 더 늘어가는 악순환을, 이 가혹한 가난의 굴레를, 신이시여, 어찌 하란 말입니까?   

 

 워킹 푸어 (Working Poor) (03-10-2017)

크레이지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된 가장 큰 지지층이 백인 빈곤층들 이었다. 미국의 불법 체류자들이 백인 주류층의 일자리를 빼앗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과연 불법체류자들이 그들의 일자리를 빼앗었을까? 그래서 불법 체류자와 불법 노동자들을 추방하고 특정국가 이민 입국을 금지하며, 배우자와 미성년 자녀를 제외한 가족 이민 초청을 금지하겠다는 것인가?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다. 이민자들의 <아메리칸 드림>으로 세계 최강 국가가 되었다. 가난한 자의 소망이자 열망과 꿈이 실현되어 부자 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이민자의 나라에서 이민자를 추방하겠다니? 이민을 통제하겠다니? 누가 누구보고 불법체류자라고 하는가?

미국의 주인은 인디언들이다. 미국 백인들의 조상들은 유럽 빈민자 출신들로써 엄연한 미국 불법 체류자였다. 하지만 인디언들은 예수님과 같은 사랑으로 그들을 조건없이 받아드리고 무상으로 먹이고 땅을 나눠 주었고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런데 유럽 백인들이 미국 인디언과 멕시코 인디언들로 부터 강제로 신의 소유인 <땅>을 빼앗은 것이다. 그 땅이 지금의 미국 영토다. 어쩌면 우리 모든 인간은 이 땅의 <불법체류자>들이다. 우리 모두는 <천국의 시민권자>들이었다. 우리 모두가 종교에 관계없이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 위해 잠깐 이 땅에 와서 이 땅을 빌려 쓰는 것 뿐이다. 그래서 내 것이 없는 것이요, 내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 지역 한인 불체자들은 우리 지역 한인들이 보호하고 지켜야 한다. 힘내세요, 이또한 지나가리니 !!

그러면 왜 문명이 발달 할수록, 첨단 사회가 될수록, 지구 전체가 일자리가 없어서 <구직난>으로 난리인가? 왜 한국이나, 미국이나, 유럽이나, 일본이나, 실업난에 몸살을 앓는가? 미국은 2천만명의 <불법체류자>들이 없으면 실업난이 해소될까? 결코 그렇치 않다는 것이다. 왜 가진자와 못가진자는 점점 더 간극이 벌어지고, 워킹 푸어 (working poor  : 근로빈곤층)은 점점 더 늘어나는가? 가난한 자는 왜 더 가난해져야 하는가? 함께 고민해 보자. 이 칼럼의 몇가지 내용들은 바바라 에렌라이크의 <노동의 배신>이라는 책과, 와튼 스쿨 교수 제러미 리프킨이 쓴 <노동의 종말>에서 인용함을 밝힌다.

근로빈곤층 !! 일을 하면 할수록 가난해지는 사람들 !! 과연 그들은 게으른 사람들인가? 단 1% 가진자의 탐욕 때문인가?  <노동의 배신>에서 저자는 “우리의 안락함은 근로빈곤층의 희생 위에 지어진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들에게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 미국의 수백만의 워킹푸어가 겪는 빈곤상황을 <응급상황>으로 받아드려 개선해야 한다. 임금을 올리고 그들을 범죄자 취급하지 말고, 그들이 조직을 결성해 더 나은 임금과 노동환경을 얻어내도록 해야 한다. 무엇보다 넘어져 있는 그들을 발로 차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원칙이라도 필요하다.” 라고 호소한다.

인권주의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 우리는 <노동 착취> 현장을 잘 알고 있다. 켈리포니아 농장의 노동자들은 대부분이 멕시코계 불법체류자들이다. 이동식 천막 막사에서 최저 인건비에도 못미치는 임금을 받으며 뜨거운 태양 아래서 노예처럼 일한다. 비단 한인 가게 뿐만 아니라 힘든 노동 현장에는 불법체류자들이 일하고 있다. 미국 전체 노동 인구의 10%에서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이 없으면 그 자리를 백인 하류층이 일하겠는가? 백인들이 일하기 위해서는 최저 인건비를 인상해야 하고, 4대 근로 보험과 세금을 지불해야 하고, 근로 기준법에 위반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과연 누가 제대로 영세 사업체를 할 수 있겠는가? 불법체류자를 근절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고용주를 엄격히 처단하면 된다. 불법체류자를 고용했을 경우 막대한 벌금과 I.R.S의 과도한 세금 추징과 형사처벌에 폐업할 각오를 해야 한다면 함부로 고용하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 지역 한인업체도 그런 곳이 몇군데 있다. 과연 미국 정부가 그럴수 있을까?

그러면 과연 <최저인건비>로 먹고 살 수 있을까?

<노동의 배신>은 미국에서 150만부 판매된 베스트셀러 였는데, 저자 바바라 에렌라이크는 돈 한푼없이 학력과 경력을 감춘채, 직접 빈손으로 노동 시장에 뛰어들어 겪은 삶의 현장을 책으로 쓴 것이다. 그녀는 록펠러 대학에서 세포생물학 박사를 받은 후, 빈민 건강권을 옹호하는 비영리 단체에서 일하다가 전업작가가 되었다. <긍정의 배신>도 그녀의 베스트셀러다. 그녀는 1998년부터 2000년 까지 식당 웨이트레스, 호텔 객실 청소부, 가정집 청소부, 월마트 옷매장 직원 등으로 일하면서 세운 목표는 단순하다. 일을 구하고 그 일을 해서 번 돈으로 음식을 사고 잠자리를 구하고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노동의 가치>를 논할 여유가 없다. 하물며 <인간적 대우>는 천국의 단어이다. <생각없이> <반복적으로> 일만 할 뿐이다. 매니저들의 갑질은 상상을 초월한다. 앉아서 밥을 먹거나 담배 피우며 여유롭게 쉴 수도 없다. 저임금 종업원들은 학력 수준도 낮다. 그러니 종업원들 끼리의 비인간적 텃새도 감내해야 한다. 결론은 쉬지 않고 일해도 먹고 살기가 정말 힘들다는 것이다. 그것도 2000년은 미국 경제가 거품으로 호황이던 시절이었는데도 말이다.

 

사는 자와  파는 자 (Buyer & Seller) (03-03-2017)

 몇회에 걸쳐 한인들이 선호하는 업종의 장,단점과 기회요소와 위협요소들을 간략하게나마 짚어 보았다. 내가 되묻는다. 무슨 장사를 하면 좋을까요? 소자본의 한국인이 할 수 있는 업종은 주류가 꺼려하는 업종, 돈많은 대륙민족이 하기 싫어하는 업종 밖에 없다. 즉 고생하는 맘엔팝 비지니스 밖에 없다. 백인동네의 <세탁소>나  <드랍스토아>, <네일가게>. 아니면 흑인동네의 <블랙퍼스트> 가게다. 소자본의 <스탁 비지니스>와 <장치 사업>은 점점 대자본에 밀려난다. 흑인동네의 <Beer/Deli> 가게는 당분간 검토에서 제외하는 이유는 이미 설명했다.

우리 지역 한인 사회는 노령화 사회다. 노인의 특징은 무엇인가? 새로운 비지니스를 시작하기 어렵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체력적 한계,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그래서 망설인다. 주저한다. 생각은 많으나 실행에 옮기질 못한다. 그런데다가 한국인의 전반적 마인드가  힘든 노동을 기피한다. 그러니 위에 거론한 업종들 조차 탐탁치 않게 여긴다.

<건물임대 사업>

우리 지역에서 어느정도 30만불에서 50만불 내외의 자금을 가지고 있는 6,70대 노인(?)들이 관심있는 업종이 <건물 임대 사업>이다. 작년부터 <건물>을 찾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그러나 여기에 두가지 모순이 있다. 첫째, 대부분의 <건물 매물>은 비지니스와 함께 팔려고 한다. 둘째, 간혹 건물만 나온 매물도 있지만 <투자수익률>이 년 6~7% 내외다. 10% 이상의 건물 수익률은 과장된 거짓이다. 한국인보다 돈많은 민족은 많고도 많다. 50만불 건물이면 월 $2,500불 임대 수익이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20만불을 가지고 은행 융자 $30만불을 빌리면 무엇이 손에 남는가? 한달에 월 순수익이 1만불인 사업체 조차도 우습게 아는 한국인인데 말이다. 필라의 $50만불 이하 건물은 대단한 건물이 아니다. 또한 건물 임대업에는 보수유지 비용과 공시율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건물 가치는 공시지가가 아니라 임대 사업체의 가치에 따라 달라진다. 장사를 못해 빈 건물이 되면 건물값은 폭락한다. 즉 건물 임대업을 할려면 실소득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어야 한다.

<사는 자 (Buyer)>

우리 지역에는, 아니 미국 전반에 중산층이 사라졌다. 대부분이 10만불 미만의 자기자본을 가지고 사업체를 찾는다. 은행융자가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가게를 살려고 하면 자신의 신용관리와 자금관리를 잘 해야 한다. 세금신고도 해야 한다. 미리미리 은행 대출팀을 만나서 자신의 대출 여건을 확인해 두어야 한다. 오너융자를 기대하면 안된다. 부동산 중계 수수료를 아깝게 생각하면 안된다. 부동산 중계업자는 Seller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Buyer를 위해 일한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모든 매물은 숫자로 분석되고 사업지표들로 비교 분석되어야 하고 그럴 평가 능력이 되어야 부동산 중개업자로 자격을 갖춘 것이다. 단순히 매물 주소나  매상 정도를 아는 정도면 중계인의 역할이 필요없다. 중계인은 Seller가 무엇을 숨기는지, Seller의 자료에 무엇이 참이고 허구인지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중계인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소자본 Buyer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업을 실행할 <용기>와 <자신감>이다. 몇십개의 매물을 보여줘도, 몇년을 보여줘도 결정하지 못한다. 군중심리와 불안감이다. 정말 대단한 Buyer 들이다.

<파는 자 (Seller)>

가게를 팔 경우에는 Buyer가  은행 융자를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세금보고는 2,3년 전부터 해야 한다. 오너융자도 해 주지 않을거면서 세금보고를 나쁘게 하면 어떻게 은행융자를 받으라는 말인가? 우리 지역 한국인들은 사업체가 50만불 정도의 가게면 천하를 얻은양 의기양양하다. 그러면서 <Under>를 절반을 요구한다. 세금을 최소한 내겠다는 심리다. <인지부조화>의 법칙이다. 10년 장사한 50만불 짜리 가게를 팔면 50만불이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65% 정도가 내 손에 들어온다고 생각해야 한다. 즉 내가 얼마에 샀던지 간에 10년이 지나면 35% 가량의 세금과 공과금을 내야 한다. 그러니 내손에 30만불에서 35만불이 남는 것이 정상적 생각인데, 세금을 내지 않으려니 <Under>를 요구한다. 업계의 관행이라나.. 나도 살 때 <Under>를 주고 샀으니 팔 때도 그럴 것이다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런 시대는 다시 오지 않는다. 10년 불황기를 겪은 요즘 한인들은 현금이 없다. 50만불 짜리 사업체를 찾는 Buyer들이 가지고 있는 돈은 20만불 안팎이다. <Under> 줄 현금이 없다. 물론 불법이다. 또한 자기자금 50만불 가지고 있는 사람은 50만불 짜리 가게를 찾지 않는다. 1백만불 이상의 가게와 건물을 찾는다. 그리고 설령 <Under>를 주고 산 Buyer는 나중에 세금을 내야 하므로 그만큼 비싸게 가게를 사는 꼴이다. 이러니 가게를 팔지 못한다. 흔히들 한인 셀러들이 하는 말이 “가게를 팔아도 손에 쥐는 것이 없다.” 그것은 자신의 재산을 과대평가한 잘못인 것이다. 그러니 체력이 한계상황이 될 때 까지 계속 하실 수 밖에 없다. 가게를 사는 자와 파는 자 모두의 건투를 빈다. 사업체 중계업자도 양측의 억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하니 정말 하기 힘든 직업이다.

 

한인 업종 분석 -4 <Nail, Drop Store> (02-24-2017)

 <서비스 사업>은 특화된 <기술>을 가지고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광범위한 업종이다. 그중에서도 한인 여자분들의 <서비스 사업>으로 가장 대표적인 업종이 <Nail>과 <Drop Store> 이다. 즉 남편 없이도 소자본으로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업종이다. 그외 자동차 정비, 인테리어, 집 수리, 모바일 통신사업 등 다양한 분야가 있다.

<Nail & Spa> 업종

<현상분석> : 네일사업은 한인 비지니스 시장에 큰 전환점을 가져온 업종이다. 과거에는 이민을 오면 부부가 동일한 업종에서 주급생활을 하면서 일을 배우다가 동종업종의 비지니스를 매입하는 경우가 주류였다. 또한 대다수의 <맘앤팝 비지니스>의 전형이기도 하다. 그런데 <Nail> 업종의 주급이 고소득을 보장하면서 대다수의 젊은 한인 여성들이 <Nail>업종에 몰리게 됨에 따라, 네일 업종 뿐만 아니라 각 업종의 인력 수급에 비상이 걸리게 된다. 즉 <종업원 품귀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네일 업종>의초급기술자는 월 $2,500, 중급 기술자는 월 $3,500, 고급 기술자는 월 $4,500 전후를 받고 있다. 다른 업종의 한인 여성 주급은 월 $2,500 전후인데 말이다. 또한 <Nail Shop> 가게 설치비용이 $100,000 전후로 진입장벽이 낮으므로 <Nail> 가게 종업원들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자신의 가게를 차려서 독립하는 것이 꿈이자 최종 목표가 된다. 결국은 종업원은 한정되어 있어 구하기가 어렵고, 가게 숫자는 늘어나니 인건비는 상승하고 가격 경쟁은 심해지니 수익성은 점점 떨어질 것이다.

<특장점> 1. 누구나 쉽게 가게를 차릴 수 있다. 즉 진입장벽이 낮다. 2. 단기간내의 과정을 거치면 고액 기술자 급여를 받을 수 있다. 3. 동업이 가능하다. 4. 남편 없이도 가게를 운영할 수 있다. 5. 자신의 고객 확보가 가능하다. 6. 투자 대비 고수익이다. 7. 한인 여성들의 뛰어난 미적 감각과 투철한 서비스 정신에 적합하다.

<단점> 1. 진입장벽이 낮으므로 경쟁이 점점 심해진다. 2. 한인 여자 종업원 구하기가 점점더 어려워진다. 3. 한인 종업원들이 개도국 종업원(스패니쉬, 월남여성 등)을 터부시하여 함께 일하기가 어렵다. 4. 작업환경이 3D 업종만큼 열악하다. (손가락 관절염, 어깨 결림, 기관지염, 호흡기 질환, 편두통 등). 5. 소규모 네일가게를 운영하기가 더 어럽다. (종업원 관리, 설비, 서비스 관리 등). 6.부부가 함께 하기에는 부적합.

<향후 추론> 1. 타민족 종업원으로 경쟁 대상이 확대됨. 2. 대형화, 고급 설비, 친환경 인테리어로 전환. 3. 종업원 우대 관리가 사업의 승패 좌우. (주급, 근무환경, 복지 시설 등). 4. 트럼프 정부의 불법 체류자 이민 단속이 종업원 운영에 주요 관건임.

<Drop Store>

우리 지역 한인사회의 특징을 가장 잘 대변하는 업종이 <Drop Store>다. 별도의 시설 투자가 필요없다. (컨베어 시스템, 컴퓨터, 가정용 세탁기, 바느질 재봉틀. 시설투자 총 $50,000 이면 가게를 꾸밀 수 있다. Drop Store 의 <주요 업무>는 <세탁업>이 아닌, <보관 업무>다. 손님이 세탁물을 맡기면 보관하고 있다가, -> 세탁소 배달 직원이 세탁물을 가지고 가서 -> 세탁 완료해서 가져 오면 -> 보관하고 있다가 손님이 찾아가는 것이다.

<특장점> : 1. 주6일 영업, 국경일 휴업. 여름휴가 가능, 2. 근무환경 쾌적, 3. 힘든 노동을 하지 않음. 노인화 사회에서 65세 이상 노인 부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업종, 4. 여성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업종. 5. 종업원관리가 용이함. (주매상  4천불 이상일 경우 1~2명이 최대), 6. 상품 매입, 재고관리가 필요없음.  7. 특별한 기술이나 노하우가 필요없음. (바느질의 80%는 1개월이면 습득 가능). 8. 세탁소에 비해 면적이 적으므로 렌트비와 부대비용이 저렴함. 9. 우리 지역은 소형 세탁소가 과대 밀집되어 있어 홀세일 빨래 가격이 타주에 비해 훨씬 저렴함.

<단점> 1. 진입 장벽이 낮으므로 누구나 쉽게 오픈할 수 있다. 2. 주변 경쟁 업소 (특히 세탁소) 가 가격 덤핑을 할 경우 매상에 직접적 영향을 받음. (세탁소 밀집지역을 피하고,  다운타운이나 한적한 백인 동네가 적합함.) 3. 매상 증가에 한계가 있음 (대부분 업소가 주 매상3천불 이하 소규모임.) 4. 세탁을 직접 하지 않으므로 홀세일 세탁소의 품질관리에 영향을 많이 받음. 5. 렌트비가 저렴해야 함, (최소한 주매상보다는 적어야 함.)

<향후 추론> : 1. 노령화 사회인 동시에 세탁소가 너무 많은 우리지역에서는 계속 유망받는 업종이 될 것이다. 2. 대형화, 높은 매상의 가게는 점점 감소하고, 소형화 가게가 주류을 이룰 것임. 3. 렌트비와 주변 고객 분포도가 사업의 성공요소임. 4. <바느질>이 유일한 사업의 차별 요소임.

<결론> 서비스 사업은 특화된 기술과 소자본으로 할 수 있으므로 지역 한인에게는 적합한 업종이나, 진입장벽이 낮아 한인끼리의 과다경쟁을 유발할 소지가 큼.         

 

한인 업종 분석 -3 <Stock, 장치 Business> (02-17-2017)

 우리 지역 한인들이 주로 하는 <Stock Business>에는 어떤 업종들이 있을까? 대표적으로 Beauty Supply, Discount, Dollar Store, 의류매장, 신발가게, 주얼리 가게, 맥주도매상 등을 꼽을 수 있다.

<Beauty Supply>는 한인들 Stock Business 의 대표선수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가장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업종이었고, 한인들 특성에도 맞는 업종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Stock Business가 사업의 장,단점이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특장점> 1. 주6일 영업이다. 2. 정시 출근, 정시 퇴근이다. 3. 노동 강도가 낮다. 즉 타업종에 비해 업무 루틴이 단순하고, 지극히 편하다. 4. 영업사원 주문 ->Display -> 고객 물건 선택 ->계산.  5. 소수 종업원 만으로도 관리가 용이하다. 6. 일반 고정 지출비용이 작다 (렌트비, 유티리티). 7.약간의 유행감각과 마켓 트랜드만 알면 누구나 할 수 있다. 8. 시설투자 비용이 거의 없다. 즉 사업 진입장벽이 낮다.

<단점> 1. 누구나 할 수 있다. 2. 돈의 전쟁이며, 규모의 경쟁이다. 3. 따라서 가격 경쟁이 유일한 차별 요소다. 4. 불경기가 장기화 될수록 악성재고가 늘어난다. 즉 수익성 구조는 처절한 가격 경쟁으로 점점 나빠지고, 재고는 늘어남에 따라 장부상 이익에 비해 실질 이익 구조가 나쁘다.

<마켓 트랜드> 1.향후 어떤 업종이든 인터넷 구매가 가능한 업종은 오프라인 사업이 고전할 것이다. 2. 젊은 세대는 인터넷 구매를 선호하며, 점점 증가한다. 3. 인터넷 구매 가격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매장의 대형화, 상품의 대량화, 다양화 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렵다. 4. 인터넷 구매와의 차별화를 위한 개별 서비스를 특화하여야 함. 5. 메이커도 대형 대리점 위주의 정책을 선호하고 소형 대리점은 폐쇄 정리함. 대표적 케이스가  운동화 업체인 <나이키> 정책이다.

<향후 대응 방안> 1. 인터넷 구매가 활성화 되기 전인 6,70대 세대에는 <Niche Market -틈새시장> 혹은 <Blue Ocean>이라는 용어가 존재했다. 하지만 <인터넷 구매>와 <배달 문화>가 발달할수록 <단순형Stock Business> 에는 <틈새시장>이 존재하기 어렵다. 2. <오프라인 Stock Business>는 계속 존재할 것이다. 다만 매장의 <대형화, 고급화, 가격 저럼화> 한 마켓만이 경쟁력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대형 마켓은 소자본 한인들보다 훨씬 자금력이 뛰어난 중국인, 인도인, 중동인들이 주류 세력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3. 기존 소형매장은 재고 누적으로 유통의 악순환을 겪을 것이다.

<Beer>와 관련된 <맥주 도매상> 사업은 추정하기가 극히 예민하고도 조심스럽다. 다만 타주의 선례를 보면 <맥주 도매상>은 <리커 스토아> 형태로 통폐합이 되고, <Beer/ Deli>는 <Food 관련 소매점>으로 확산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할 뿐이다. 현재로서는 사업 변수가 너무 많다. 물론 이것은 나의 지극히 개인적 추론임을 밝힌다.

<장치 사업>도 같은 맥락이다. <장치 사업>의 대표 업종은 <카워시>와 <Laundromat>, <Gas Station> 사업이다. 특별한 서비스가 없다면 시설 장치가 잘 되어있는 업소가 이긴다. <카워시>는 소자본으로 할 수 없다. 향후에는 <저가형 무인 세차장>이 주류를 이룬다. <장치 사업>은 건물을 함께 구매해야 안전하다. 그러기에는 건물값과 권리금이 우리 지역은 너무 올랐다. 또한 요즘은 일주일 날씨를 핸드폰으로 즉시 알 수 있다. 서부나 남부 지역에 비해 맑은 날씨가 적다. 결국 투자대비 수익성이 타업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 그래서 정녕  <카워시>를 하고 싶다면 날씨가 좋고 건물값이 싼 타주로 이사 가라고 권한다.

<Laundromat>은 장사가 되는 지역만 된다. 즉 그런 시설을 이용하는 민족들이 모여 사는 지역만 된다는 의미다. 그런 지역은 경쟁이 치열하다. 장치사업은 업소간 차별화된 서비스가 없다. 결국 시설과 장비가 잘 갖추어진 업소가 경쟁에서 이긴다. 자체 건물, 대형화, 시설 첨단화가 되어야 한다. 장비 감가상각이 필수조건이다. 소형 매장은 무슨 경쟁력으로 대형 매장을 이기나?  <Gas Station>은 가족수가 많아야 하고, 심야영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한인에게 맞는 업종이 아니다.

무슨 비지니스든, <진입장벽>이 낮다는 말은, <고생>을 덜하고 돈을 벌수 있다는 말은, 두가지 중 하나가 만족되어야 한다. <돈>이 많거나, <차별화된 기술>이 있거나 이다. 여기에 사업 자본은 많지 않으면서 고생은 하지 않으려는 한인사회의 이원적 모순이 존재한다. 소자본가는 대형 자본가가 선호하는 업종이나 지역을 피해야 한다. 70% 이상의 승산이 있다고 확신하고 뛰어들어도 실패하는 것이 사업이다. 즉 현대는 본인이 예측하지 못한 시장의 변화가 너무 다양하고 빠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길 확률이 낮은 사업을, 경험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는, 진입장벽이 낮은 사업을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동일업종에서 여러분이 경쟁자들을 이길 수 있는 강력한 경쟁요소, 차별요소, 기술력, 자본력, 노동력, 장점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서 저를 설득할 수 있으면 그때 해당 사업을 하시라고 권하고 싶다.

 

 한인 업종 분석 -2 <Food Business> (02-10-2017)

<Breakfast> 업종

한국인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 <빨리, 빨리>이다. 이 단어에 가장 적합한 업종이 <Breakfast>다. 대륙성 민족들이나 서구 민족들은 <빨리 빨리>에 서투르다. 상대적으로 느긋하다. 이 업종은 부부의 단시간내 노동강도가 상당히 높다. 부부가 음식에 관심이 많고, 만들기를 좋아해야 한다.

<특장점> 1. 악성재고가 없다. 2. 일찍 시작해서 일찍 마친다. (6:00 AM to 03:00 PM) .  3. 타민족이 선호하지 않는다. 4. 시설투자비가 작다. (신규 시설 투자비 $20만불 전후). 5. 매상대비 (권리금 대비) 고수익이다. 6. 부지런해야 한다. 7. 대부분 흑인 동네이므로 렌트비 등 부대 경비가 백인 쇼핑몰에 비해 저렴하다.

<단점> 1. 부부가 함께 해야 한다. (팀웍이 잘 맞아야 함), 2. 주7일, 365일 영업해야 한다. (한국인들 끼리 과다 경쟁으로 다운타운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주 7일 영업함).  3. 주고객이 흑인 지역, 흑인 대상이다. (백인, 회사원들은 WaWa, 7- Eleven, Dunkin등 전문 편의점을 활용함), 4. 진입장벽이 낮아 누구나 할 수 있다. 5. 주인 남자가 직접 Cook을 하지 못할 경우 한국인 쿠커를 구하기가 어렵다. (한국인 메인쿡 평균 주급 $1천불 이상임). 6. 노동강도가 강하므로 장기간 사업시 육체적 소모가 큼.

<향후 추론> 1. <Breakfast>는 소자본 한국인이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업종으로 계속 생존할 것이다. 2. 한인 1.5세나 2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업종이다. 3. 시설의 쾌적화가 시장 경쟁을 선도할 것이다. 4. 배달음식 문화가 확산될 것이다.

<Deli & Convenience>

그로서리, 일반 잡화가 많은 가게들은 인건비가 낮은 스패니쉬들이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Deli 비중이 높은 컨비니언스 업종으로 옮겨가야 한다. Deli 부분을 젊은층에 맞게 고급화 해야 한다.

<특장점> : 1. <Breakfast> 업종에 비해 노동 강도가 약하다. 2. 주인이 직접 요리하지 않아도 메니저먼트가 가능하다. 3. 종업원 구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풀타임, 파트타임 모두 가능). 4. 그로서리 업종에 비해 고수익이다.

<단점> 1. 진입장벽이 낮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 즉 경쟁력이 약하다.  2. 가게 위치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3. 영업시간이 길어야 한다.

<향후 추론> 1. <Beer License>가 점점 풀리고 있다. 이미 대형 슈퍼마켓은 물론, 개스 스테이션, 맥주 도매상에도 맥주 소매가 허용되었다. 주정부 자금부족으로 결국에는 일반 그로서리 소매점에도 타주 처럼 맥주 판매가  허용될 수도 있다. 2. 그러면 대형화, 고급화한 델리 가게들이 큰 인기를 얻을 것이다. 3. 위치 좋은 건물을 서로 확보하려 할 것이다. 4. 타주처럼 <Beer/ Deli>라는 명칭이 사라질 수 있다.

<레스토랑> 업종

<한국 레스토랑> : 기존의 한국 레스토랑으로도 충분하다. 우리 지역은 한국 레스토랑을 새로이 오픈하기에는 시장이 너무 작다. (거주 한국인수, 광범위하게 흩어져 사는 거주 분포도, 소득 수준 등), 영업시간, 종업원 구하기, 노동 강도, 노동 대비 수익성, 전문성 등 모든 평가 항목에서 사업 매력도가 극히 낮다. 한국음식에 전문성이 있다면 한인 인구가 밀집한 타주로 이사가는 것이 좋다.

<일본 레스토랑> : 이미 중국인들이 시장을 점령하고 있다. 즉 자본력이 커야 한다. Sushi 음식은 이제 고급 음식이 아니다. <Sushi 무한 리필> 레스토랑이 늘어나고 있다. <저가 대량> 판매가 중국인들 전략이다. 향후 무슨 업종이든지 간에 중국인들이 뛰어드는 시장은 피해야 한다. 중국인들은 자금력에서 이미 한국인들의 경쟁 상대가 아니다.

<서양 레스토랑> : 서양 전문 레스토랑은 우리 음식이 아니므로 승산이 낮다. <퓨전 음식>은 승산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첨단 음식 교육과 요리 경험이 필요하다. 1.5세나 2세에 해당되는 업종이다. 그런 전문성이 있다면 <Salad Bar>도 승산이 있다.

<Pizza 레스토랑> : Pizza사업은 <배달 음식> 사업이다. <Pizza> 뿐만 아니라 퓨젼 음식도 함께 배달 가능하다. 투자 대비 고수익이다. 하지만 365일 밤늦게 까지 배달해야 하므로 사업 위험도가 높다. 편안하고 안전한 것만 추구하는 한국인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매니저 관리로는 어렵다. 식구가 많아야 용이하다.

<Seafood> 업종 : 투자대비 수익이 높다. 소자본 소규모로는 큰 이익을 볼 수 없다. 점점 대형화 할 것이다. 튀김 부분의 수익성이 높다. 부지런해야 한다. 육체적으로 힘들다. 날생선 종업원 구하기가 어렵다. 소자본 한국인들이 다시 뛰어들 것이다.

결론 : <Food Business>는 투자 대비 고수익 사업이다. 하지만 힘들고 고단한 업종이다. <고객의 입은 냉정하고도 간사하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실패하기 가장 쉬운 업종이다. 그래도 한국인이 생존할 수 있는 극소수 업종 중 하나다.

 

 한인 업종 분석 -1 <세탁소> (02-03-2017)

 요즘 사업체 현황을 알고자 한다면 지역 신문들의 <구인, 구직, 사업체 매물> 광고를 보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구인 란은 넘치고 매물 란은 비었다. 즉 괜찮은 매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팔려고 내놓아도 팔리지 않으니 포기한 상태다. 업종을 막론하고 사람 구하기 어려우니 주인 부부가 힘들어도 꾸려나갈 수 밖에 없다. 가게는 팔리지 않고, 몸은 고달프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상이 우리 지역의 단상이다. 업종별 장단점을 간략하게 분석해 보자.

<세탁소> 업종

세탁업은 한인들의 주력 업종이다. 우리 지역 한인 사업체 중에서 3분의 1 이상이 <세탁소>이거나 <Drop Store>이다. 한인교회 장로들 중에서 절반 이상이 세탁소 관련 업종 종사자들이었다. 즉 가장 안정적 사업원이었고, 정상 출퇴근과 공휴일을 쉴 수 있고, 타민족이 하기를 꺼리는 진입장벽이 높은 업종이었다. 그래서 한인들의 독점 사업이었고 효자 종목이었다. 그런데 이 세탁업종을 <사양사업>이라고 기피한다. 아니 작년부터는 아예 외면한다. 원인이 무엇일까?

<외부 환경 변화>

  1. 옷 섬유공학의 발달이다. 많은 세탁물들이 물빨래를 할 수 있는 섬유들로 발달했다.
  2. 가정용 세탁기의 발달이다. 간편한 세탁과 다양한 섬유 세탁, 탈수, 건조 장치까지 발전했다.
  3. 패션이 고전적 스타일보다 캐주얼한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 세탁하기 쉬운 의상으로 발전한다.
  4. 가정마다 자체 세탁 환경이 용이해졌다. 아파트에도 세탁기 사용이 용이하다.
  5. 장기 불황으로 고객들의 절약 마인드가 확산되어 세탁량이 감소되었다.
  6. 세탁소 매상이 2,3년 전부터 전반적으로 하락했다. 최근 1년 평균매상 기준으로 60배 이상 하던 <매매가격>이 40~50배 이하로 떨어졌다.

<사업 환경 변화>

  1. 세탁소는 평균 가게 크기가 2,000 SF 전후다. 대부분의 백인 지역 쇼핑몰 마다 세탁소가 있으며, <렌트비>는 CAM, 부동산세를 포함하면 최소 $4,000 부터 $6,000이다. 렌트비는 계속 인상된다. 흑인지역 세탁소는 팔기 어려우므로 검토 대상에서 제외된다. 즉 매상이 작은 가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도태된다.
  2. <환경검사>가 엄격해졌다. 세탁소를 팔기 위해서는 환경검사가 필수다. 특히 은행에서 융자를 받기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 오래된 세탁소는 환경검사가 두려워 매물로 내놓지도 못한다.
  3. 쇼핑몰 건물주가 <친환경 세탁장비>를 요구한다.
  4. 세탁소 <초기 설치비용>은 $300,000 ~$350,000 이 소요된다. 모든 시설 장비에는 감가상각비가 계산되어야 한다. 설치비용이 상대적으로 높다. $4,000이하 세탁소는 홀세일을 하던가, 가족만으로 운영해야 한다.
  5. 우리 지역에는 세탁소가 너무 많다. 그래서 <홀세일 빨래 가격>이 타주에 비해 너무 저렴하다. 그러니 주매상 $4,000 이하 세탁소는 동일 매상의 Drop Store가격과 동일하거나 그 이하다.

<세탁소 매수자 격감>

  1. 한국에서 우리지역으로 <신규 이민>을 오지 않는다. 간혹 오더라도 힘든 세탁소를 하려 하지 않는다.
  2. <자식 세대>인 이민 1.5세나 2세들이 세탁소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3. 기존 한인들중 여자들이 주급이 높은 <Nail>업종으로 전환을 하여 부부형 세탁소가 성립되지 않는다.
  4. 돈많은 타민족인 중국인과 인도인은 세탁업종을 철저히 기피한다.
  5. 영세 소수민족인 동남아시아, 스페니쉬들은 투자자금이 모자란다.
  6. 세탁소에서 주급생활하는 한인 남자들은 자금이 부족하거나 가족 구성이 되지 않거나 대출 여건이 되지 못한다.

<세탁소 필수 요건>

  1. 부지런해야 한다. 2. 깔끔해야 한다. 3. 카운터 여자가 친절해야 한다. 4. 인내와 끈기가 있어야 한다. 5. 기본영어와 바느질 기초소양이 있어야 한다. 6. 최소 가족구성이 부부다.

이런저런 이유로 세탁소 매매가 점점 어려워진다. 하지만  세탁업은 향후 현상태를 계속 유지할 것이다. 정직한 사업이다. 그래도 세탁업은 한국인에게 가장 적합한 업종이며, 타민족에게는 진입장벽이 높은 업종이다. 따라서 세탁업은 멀지않아 반드시 한인사회에 다시 돌아올 것이다.

 

 멈춰선 한인경제 -2 <사업체분석> (01-27-2017)

우리 지역 한인들이 하는 비지니스 업종은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소수민족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즉 각 민족마다 주류를 이루는 주요 업종이 있기 마련이며, 타민족이 경쟁할 수 없는 강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지역 한인들이 선호하는 주요 업종은 크게 다섯가지로 구분짓는다.

  • 첫째가 <세탁소>, <Drop Store> 업종이다.
  • 둘째가 <Food 관련> 비지니스다. <Breakfast>, <Deli>, <Convenience>, <Restaurant – 한식, 일식, 중식, 서양식, 퓨전>, <Salad Bar>, <Pizza>, <Seafood, 튀김>, <과일, 야채>, <Coffee Shop>, <빌딩매점>, <Food Truck> 등이다. 그리고 술과 관련된 <Beer/ Deli, Bar- Restaurant>이다. 그외 <Franchise Business>가 있다.
  • 세째가 <Stock Business>다. <맥주도매상>. <리커스토아>, <Beauty Supply>, <Discount, Dollar>, 각종 <도매상>, <의류가게>, <신발가게> 등이다.
  • 네번째가 <장치사업>이다. <Car Wash>, <Gas Station>, <Laundromat>,
  • 다섯번째가 <서비스 사업>이다. 대표적으로 <Nail & Spa> <Hair Shop>, <인테리어, 집수리> 등이다.
  • 그외가 <건물임대업>이다.

나의 사무실에는 해마다 가게를 사겠다는 Buyer가 90명 전후로 신규 등록을 하신다. 오늘 기준으로 Buyer고객번호가 925번이고 만 10년을 이 사업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작년에는 82명의 신규 고객이 등록되었다. 적잖은 손님들이 내게 묻는다. 요즘 할만한 비지니스가 어떤게 있나요? 돈되는 비지니스가 무엇인가요? 질문이 막연하고 뜬금없다. 소자본으로 쉽게 돈 벌기를 원한다. 과연 그런게 있을까? 목표가 불명확하니 사업체 분석을 할 수 없고, 전략과 전술을 거론할 수 없다. 학생의 질문을 들으면 선생은 학생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 우리지역 한인들은 <팔랑귀>다. 시골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아는 정보는 많은데 정확한 정보는 별로 없다.

우리 지역 한인들은 해마다 유행하는 업종이 바뀐다. 곗꾼들 수다 수준이다. 몰려다니고 소문은 소문을 만든다. 말만 많고 실행하는 것은 없다. 비지니스를 선택한다고 해도 고만고만한 곗꾼들 수준이다. 주변사람들이 전문가도 아니고 성공한 사람들도 아닌데 그들 의견에 내 사업체 결정을 맡긴다. 지역 한인들은 유행따라 산다. 한때는 <세탁소>가 유행이다가 <블랙퍼스트>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네일가게>로 바뀌고 <드랍스토아>로 바뀌었다. 2015년도는 <Beer/ Deli와 맥주도매상>이 유행이다가,  2016년도 작년에는 <Beer ~~>는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고 <임대 건물>이 유행이다. 올해는 또 무엇이 유행의 바람을 탈까?  

비지니스는 <전쟁>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쟁이 어디에 있으며, 고생 안하고 편한 전쟁이 이 세상이 어디에 있는가? 남들이 잘 한다고 나도 잘 할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못한다고 나도 잘못할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잘못이다. <보편적 착각>이다. 북한 사람은 모두 적이고, 일본사람은 모두 나쁜 사람이며, 이슬람 종교를 믿는 사람은 모두 잘못된 종교인인가? 사업체 업종도 마찬가지다. A라는 업종은 모두 잘 되고, B라는 업종은 모두 안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맘앤팝 비지니스>는 일년마다 유행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잘 하는 것, 이왕 죽을 고생을 할 것이라면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한다. <SWOP 분석>이 무엇인가? 몇년전에도 몇회에 걸쳐 <사업분석 기법>을 설명드린 적이 있다.  <Willbusinessbroker.com >에 들어가셔서 <윌리칼럼 -2013년>에 <사업체 자가진단> 1편(5/20/2013)~ 9편(7/9/2013)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목표와 계획을 분명하게 세워야 한다. 나의 강점과 약점, 상대방 (Seller)의 강점과 약점을 정확하게 파악하라. 기회요소와 위협요소를 분석하고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라. 결심이 섰으면 열정과 확신을 가지고 밀고 나가라. 사업평가는 실행후 일년 뒤에 하라. 그리고나서 재평가하면 된다. 해 보지도 않고 이 핑계 저 핑계로 두려워 망설이면 돈만 축내고 무엇이 개선되는가?

먼저 <업종분석>을 시작하라. 유행이 아니라, 내가 잘 할 수 있는, 내가 이길수 있는 업종을 선택하라. 업종마다 장,단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내가 투자할 수 있는 자금과 융자받을 수 있는 자금을 먼저 확인하라. 은행 융자 담당자를 먼저 만나라. 물론 사업체가 확정되어야 정확한 융자여부를 알 수 있지만, 현재 내 상태를 먼저 점검하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 업종별 분석을 하라. 매상 대비 월 순수익을 비교하라.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숫자 뒤에 숨겨진 숫자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낭패를 보는 것이다.

<매상>과 <순수익>이라는 단어에 모든 <경영 지표>가 들어있다. <매상 분석>에는 고객분석, 월별 년도별 매상 추이, 경쟁사 분석, 자사분석 (나의 장점과 약점)이 들어있다. <순수익 분석>에는 임대료 비교분석, 종업원 급여분석, 상품 매입분석, 장비 감가상각, 각종 세금, 일반 지출 내역 등이 망라되어 있다. 그래서 <매상>과 <순수익> 분석은 반드시 해야하는 필수 과정이다.

 

 멈춰선 한인경제 -1 <환경분석> (01-20-2017)

해마다 내 나름대로 우리 지역의 한인 사업체를 분석해서 칼럼을 쓰고 있다. 올해도 역시  2016년을 분석해 보고 2017년 새해를 예상해 본다. 물론 우리 지역의 한인 경제에 대한 정확한 데이타가 부족하고 내 자신이 경제 전문가도 아니지만, 지역 최일선에서 사업체 매매를 하면서, 각 사업체 매물 마다 수시로 분석하고 추정하며, 한국인 고객들의 삶의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고 하므로 단순 무지한 예상은 아닐 것이다. 여러분의 넓으신 아량으로 새해 사업에 도움이 되시길 부탁드린다.

<지역 한인 환경 분석>

  1. 한인 인구 감소 : 우리 지역은 미국 150개 도시 중에서도 빈곤률 130위에 해당하는 못사는 도시다. 필라델피아, 팬실베니아, 델라웨어, 남부 뉴저지 한인 인구는 7만에서 8만명 (불체자 포함)을 예상한다. 요즘 한국인들은 미국으로 이민오는 것을 꺼린다. 캐나다, 호주, 유럽 이민을 선호한다. 특히나 필라델피아 우리 지역으로 이민을 오지 않는다. 또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타주에서도 우리 지역으로 이사 오지 않는다. 서부 캘리포니아 지역, 텍사스, 조지아 지역을 선호한다. 동부는 뉴욕이나 북부 뉴저지를 선호한다. 우리 지역은 이민와야 할 기회요소나 매력요소가 현저히 낮다. 그러기에 한인 유입인구는 적은 반면에, 타주로 유출 인구는 꾸준히 증가한다. 새해에도 마찬가지 현상일 것이다.
  2. 노령화 사회 : 이미 우리 지역 한인들은 노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젊은 세대가 감소하고, 기존의 한인 1세들은 6,70대로 은퇴 년령이 되어 간다.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거나, 모험을 감수하고 사업을 확장 할려고도 하지 않는다. 기존의 사업체를 정리하고, 집도 축소해서 노후 준비를 하는 노령화 사회다. 사업체 매매는 점점 부진할 것이다. 매물은 많지만 매수자가 극소수다. 소형 비지니스 브로커는 생존하기 더욱 힘들 것이다.
  3. 양극화 사회 : 우리 지역 한인들도 이미 양극화 현상이 뚜렷하다. 10%의 한인 부자들은 별 걱정이 없다. 운영하는 사업체도 대형이고 고수익을 창출하므로 사업체가 팔려도 좋고 안팔려도 여유가 있다. 그리고 부동산 투자에 관심이 많다. 반면에 2008년 금융위기 이후로 중산층들이 몰락했다. 대표적 중산층은 중소형 가게 한두개와 집 한채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말한다. 집값은 폭락했고, 중소형 가게는 매상이 떨어졌다. 지출을 줄이기 위해 집을 팔고 가게를 매물로 내놓지만 살 사람이 없다. 가게가 팔리지 않으니 문닫는 날까지 쥐고 있을 수 밖에 없다. 크레딧도 망가진 사람들이 많다. 보유 현금이 없다. 몇년전만 하더라도 Buyer가 사업자금 2,30만불 보유 중산층이 주류였다면, 지금은 10만불 미만이 대다수다. 눈높이는 높고 현실은 바닥이다.
  4. 한인사회의 가치 변화 : 이민온 한인들의 생활 가치가 변했다. 고생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2,30년전 이민세대와 사고방식이 전혀 다르다. 특히 여자분들의 가치관이 많이 바뀌었다. 죽기 살기로 일하길 원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삶과 비교하면 너무 큰 차이가 나므로 허망함과 자괴감으로 악착같은 이민의 삶을 포기해 버린다. 자식에게 사업체를 사 줄려고 하는 한인 1세들도 마찬가지다. 부모와 자식 관계가 좋지 못하니 함께 사업하고자 원하지 않는다. 한인 2세들과 사고방식이 너무 다르다. 자식들은 한인 1세들 업종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또 스스로가 피땀 흘려 돈을 번 경험이 없다. 대부분의 사업 계획이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이다. 믿을 수가 없다. 그러니 노령화 한인 1세들은 보유 재산을 잘 유지하던가, 아니면 적당한 주급 생활을 하다가 소셜연금 받고 노인 아파트 생활로 생을 마감하고자 한다.
  5. 부정적 사회 분위기 : 주변에 누가 새로 사업체를 산다고 하면 열명중 아홉명은 무조건 반대한다. 이 불경기에, 사양 업종인데, 렌트비가 비싸고, 사람 구하기 어렵고, 경쟁 심하고, 고생만 하고, 나중에 가게 팔기도 어렵고, 팔아봐야 손에 쥐는 것도 없고,,, 등등 사업을 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100가지는 넘을 것이다. 너도 나도 함께 죽자는 물귀신 분위기다. 또 불신 현상이다. 오너 융자를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 열정이 사라진 사회다. 비주류 소자본 이민자들이 생존하는 유일한 길은 예나 지금이나 험한 동네에서 백인 주류들이 꺼리는 업종을 죽기살기로 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그러니 주급 생활자가 늘어난다.
  6. 사업 지표 하락 : 지역 한인 사업체들의 매상들이 대부분 하락했다. 사업체 60% 이상이 하락, 30%가 현상 유지, 10%가 상승 이라면 후하게 평가한 것이다. 또 몇년전과 동일한 매상이라고 하더라도 사업체 권리금이 20% 가량 하락했다. 작년과 동일한 매상이라고 하더라도, 지출 경비가 증가했으니 순이익이 감소함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다가 극심한 매도 매수 불균형으로, 매물을 싸게 살 수 있어도 사업할 의욕조차 없으니 어떻게 해 볼 재간이 없다.

 

 기나긴  겨울밤 (01-13-2017)

눈이 내린다. 온종일 눈이 내린다. 좀전까지는 한많은 여인이 풀어헤친 머리카락 처럼 흩날리더니, 이제는 눈도 지쳤나보다. 포기한듯 소리도 없이 하염없이 눈만 내린다.

이번 겨울은 또 얼마나 춥고도 길까? 삶에서 겨울은 어떤 의미인가? 겨울은 내 삶의 혹한기, 시련기, 가난과 고통, 추위와 배고픔, 상실과 두려움, 헤어짐과 홀로됨, 긴 침묵과 외로움 등등..  과연 겨울에 연상되는 단어들이 이러한 것들 뿐일까? 설령 그러한들 삶 전체가 겨울만 있었을까? 겨울은 지나가고 봄의 언저리에 와 있는데 내가 모르고 있는건 아닐까?  어쩌면 풍요로운 초가을인데 잠깐의 추위로 겨울이라 착각하는건 아닐까? 이제 겨울은 막 시작하려는데 벌써부터 봄을 기다린다면 봄은 소망이 될까? 봄이 되면 얼마나 나아질까? 동토의 땅에도 사람은 살며, 서로 사랑하고, 행복하게 잘 산다는 걸 알기나 할까?

<박근혜,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사건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 대통령, 엘리트 정부 관료들, 법조인들, 언론인들, 재계 기업인들, 종교인들 … 모두가 하나같이 타락한 영혼들이다. 부정과 부패, 거짓과 위증, 위선과 출세, 재력과 권력, 불의와 편견과 독선, 이분법적 사고, 이념적 가치의 상실과 왜곡, 윤리와 도덕의 상실… 인간 같지 않는 인간들이다. 하지만 그들 속에서 나를 본다. 내가 저 무리 속에 있었다면 나는 과연 자유롭고 정의로울 수 있었을까? 내가 지금껏 살아온 세월동안 추구한 가치들이 이들과 크게 달랐을까?  ‘이건 국가도 아니다’ 라며 허탈해 하고 많은 시간들을 분노와 번민 속에 지세웠다. 하지만 나 역시 그들의 무리 속에서 나에게 출세의 길이 주어졌다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길이 보장되었다면, 나는 그들과 얼마나 달랐을까? 자신이 없다. 그래서 슬프다. 그래서 자괴감이 든다. 내가 살아온 세월은 모두가 <긴 겨울밤>에 지나지 않았던걸까?

우리는 겨울에 살면서도 못올지도 모를 봄을 기다린다. 사랑하는 여인을 품에 안고서도 다른 여인을 꿈꾼다면그건 간음이다. 왜 겨울을 살면서 봄을 기다리는가? 내 생애 봄이라는 계절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나는 허망한 삶을 산 것인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내가 기다린다고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계절은 그분이 내게 주신 것이며, 나는 주어진 계절 속에서 살아갈 뿐이다. 내 삶이 평생 겨울이라면, 내 평생 봄이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는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잘> 살아야 한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계절이 아니라 <오늘> 어떻게 살 것인가 일 뿐이다.

나는 나의 겨울에 사랑을 노래해야 한다. 차가운 눈바람이 내 속살을 파고들어도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부등켜 안고 저 <겨울눈길>을 걸어야 한다. 지나온 발자욱은 발자욱대로 남겨두고 ,나는 앞을 바라보며 저 눈길을 걸어가야 한다. 누군가 걸어간 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나의 첫발자욱일 수도 있는 길이다. 그래도 나는 얼마나 행복한 놈인가. 이 눈길을 함께 걸어줄 그분과 내 사랑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나는 걸을 수 있고, 걸어야만 한다.

겨울 눈길을 걷다보면 <겨울강>을 만난다. 겨울강은 자기를 밝고 지나가라고 한다. 괜찮다고 돌아가려니 껑.껑. 큰 울음을 운다. 그 우는 소리가 너무 가슴아파 그 강을 밟고 간다. 고맙다고, 잘 있으라고, 잘 가라고, 인연을 뒤로 한채 서로가 울고 간다.

<겨울산>에 들어서니 <겨울나무>들을 만난다. 그 울창한 숲과 햇빛 찬란하던 나뭇잎들은 어떻게 하고 빈가지에 깡마른 속살을 다 드러내 놓고 망연자실하게 홀로 서있는다. 하지만 겨울나무는 말한다. 나뭇잎이 다 떨어지니 이제야 비로서 <하늘>이 보인다고 말이다. 숲이 울창할 때는 옆 나무만 보였는데, 이제는 저만치 떨어진 나무들도 내 형제였음이 보인다고, 모든걸 벗어버리니 이제야 내 모습이 보인다고 그런다. 성불했네, 겨울나무야.

<겨울 산사>에 하룻밤을 의지한다. 겨울산의 저녁 해는 금방 숨어 버린다. 행여 외지인이 추울까봐 아궁이 불을 넉넉히 때니 방이 저글저글 끊는다. 이불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꽉 부등켜 안으니 세상 부러울게 없다. 산짐승 우는 소리도, 장작 타는 소리도, 자장가 처럼 금방 깊은 잠에 빠져든다. 새벽 산사의 약수물은 바위 틈새로 흘러서인지 얼지 않는다. 약수물 한사발에 내 영혼 마저 깨끗해진 것 같다. 소박한  산사 아침을 대접받고 <겨울바다>를 찾아 나선다. 사람의 발길은 끊어졌지만, 바다는 변한게 없다. 파도소리며, 물위를 나르는 갈매기며, 바다 냄새며, 수십년을 수백번 찾아온 바다지만, 바다는 변한게 없다. 그래, 내 평생이 <기나긴 겨울밤>이면 어때? 그래서 나는 있는 힘을 다해 하늘을 향해 겨울바다에 외쳐본다.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포기하지 않을께요>, <열심히 살께요>….  여러분 모두, 힘내세요!!

 

살다가  살다가 (01/06/2017)

 살다가 살다가

사는게 너무 힘들어 죽고 싶을 때가 있지. 살아온 지난 날이 그 자체만으로 기적 같았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억조차 하기 싫은데, 또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게 너무 힘겨워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지. 산다는게 그저 두려울 뿐이야. 무서울 뿐이야. 머리 속은 하얗고 눈 앞은 뿌였기만 하지. 생각은 생각으로 뒤엉키고, 울음은 입안에서 맴돌다 목구멍 속 상흔(傷痕)이 된다. 정말 모르겠다. 무거운 나의 삶이여, 어떻게 또 살아야 하지?

살다가 살다가

사는게 너무 아파서 죽고 싶을 때가 있지. 이승에 미련없이 두고 갈 내 육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 영혼을 부여잡고 아프게 한다. 싱그러웠던 젊은 날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한데, 피부색은 검붉은 핏빛이고, 얼굴의 자글자글한 주름은 나 조차도 보기 싫어 거울이 돌아 앉는다. 근육이 사라진 내 육신은 뼈에 가죽만 씌워진 흉상이네. 머리카락은 몇올 남아 있지도 않고, 표정 없는 얼굴은 내가 봐도 관 속에 누워 있는 내 모습일세. 몸 구석구석이 아프고 먹는 약만 늘어나는데, 죽고 싶다고 죽을 수나 있나?  누구나 생.노.병.사 윤회의 고리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하니, 멀지 않은 세월에 몹쓸 병이 찾아오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겠지. 피해갈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내 육신의 고통이여, 어떻게 또 살아야 하지?

살다가 살다가

사는게 너무 허망하고 참담하여 죽고 싶을 때가 있지. 나는 여태 무얼 했는가? 무얼 이루었으며 무얼 남겼는가? 남들은 돈도 많이 모았고, 명예도 얻고, 사회적 존경도 받고, 자식 농사도 잘 지어서 행복하게 노년을 잘만 사는데, 나는 무얼 했지? 나도 누구 못지 않게 열심히 살았는데 나는 왜 이 모양으로 여기 있지?  내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은 모두 떠난 빈자리에 나만 뎅그라니 혼자 남겨졌네. 돈을 벌기는 커녕, 노후 준비는 커녕, 당장 내일 한끼 밥을 걱정해야 하고 오늘 일하지 않으면 누구도 보살펴줄 사람이 없는 신세가 되었네. 오늘의 일자리는 내일의 보장이 없고, 오늘의 잠자리는 내일의 기약이 없네. 이렇게 살다가 추운 겨울날 길거리에서 얼어죽는들, 누가 내 시신을 거두어 줄 것이며, 누구 하나 울어줄 것인가? 끝나지 않는 나의 가난이여, 어떻게 또 살아야 하지?

그런데 친구야.

누구나 산다는게 두려운 것 같아. 당장 내일이라는 시간도, 한치 앞도 모르는게 사람이잖아. 다들 두려우면서도 안그런척 할 뿐이야. 흘러가는 시간에 어제와 오늘이 어디 있겠니? 하물며 새해라고 무얼 그다지 달라지겠니? 이태껏 열심히 살았잖아. 새해라고 어떻게 더 열심히 살겠어? 수고했어, 친구야. 하지만 어짜피 사는게 늘상 힘들다면 내일은?, 새해에는?… 이라며 꿈과 희망을 가져보고, 소망하고 그분께 기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꼭 꿈과 희망과 기도가 이루어지기야 하겠어? 한두해 살아본 것도 아닌데 말야. 그래도 이루어지면 감사하고,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내 가슴 속에 품고 살았다는 그 세월만으로 감사하게 되니 손해본 것은 없지 않나? 우리 새해에도 작은 희망과 소박한 꿈을 함께 가져 보기로 하세.

그리고 친구야.

늙어간다는 것은 슬픈 고통이지. 그런데 아프지 않을 재간이 있나?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느냐 말일세. 다만 이제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는 노력이 아닐까? 젊은날  좋아했던 담배도 끊고, 술도 가급적 끊고, 적게 먹고,  자연식에 건강식을 신경쓰고, 먹으라는 것 먹고, 먹지 말라는 것 먹지 않는.. 순종형, 사육형 노인으로 늙어가는 거지. 그리고 규칙적인 운동은 꼭 하면서 말일세. 사람이 멀어질수록 신과 자연이 가까워진다고 하지 않나? 자연 속을 걸으면서 하늘을 보세나. 그래도 언젠가는 몹쓸(?) 병이 나서 죽게 되겠지. 노인 3명중 한명이 암환자라고 하는데, 나는 아프지 말고 곱게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너무 얌체족 아닌가? 노인에게 나이는 벼슬이 아닐세. 100살까지 살면 뭐하냐고? 좋은 마음으로 사랑하다 가세.

그리고 친구야.

자네나 나나, 사람은 어짜피 혼자야. 공수래 공수거 (空手來空手去), 천상천하 유아독존 (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 하지 않던가? 내 주위 사람이 나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위 사람들을 떠나는 것이네. 떠나는 날까지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더 많이 사랑하다가 별빛 속의 한줄기 바람처럼 홀연히 미련없이 떠나세나. 무얼 이루고 무얼 남기는가에 너무 속상해 하지 말게나. 사랑과 아름다운 추억만 남기기도 짧은 세월이네. 누구나 사는게 힘들고 두렵지. 그래도 아직은 굶어 죽지는 않았잖아. 아직은 걸어 다닐 수는 있잖아. 아직은 빌어먹을 내 육신은 있잖아. 아직은 내 밥을 내 스스로 먹을 힘은 있잖아. 그래도 그래도 너무 힘들면 목이 터져라 실컷 한번 울자. 그리고, 그리고 나서는 웃으며 살자. 친구야. 새해에도 서로 잘 살자 ! 아프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