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 칼럼 2016

** 모든 저작권은 윌리칼럼 저자인 이위식 (Wi Sik, Lee)에게 있으므로 저자의 서면 동의 없는 무단 전재 및 복제를 금합니다. 모든 윌리 칼럼은 미국 Korea Phila Times (주간필라) 신문에 매주 해당 날짜에 출간된 것임을 밝힘니다. **

 

 역사란 무엇인가? (12-30-2016)

오늘로써 38회, 265일 동안, 9개월에 걸쳐 살펴본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를 일단락 끝맺고자 한다. 한정된 지면이라 여러분과 함께 생각하고 싶었던 한국 근대사의 10분의 1도, 아니 100분의 1도 기록하지 못한 아쉬움이 너무 크다. 반면에 지루하고도 길고 긴 칼럼을 여러 독자들의 배려로 많은 역사 문헌과 서적을 통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더욱 감사드린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한국 고대사>와, 카렌 암스트롱의 저서 <축의 시대> 처럼 세계 고대사도 광범위하게 공부하고 싶다.

이번 칼럼을 쓰면서 반복되는 생각이다. 왜 한반도 민중은 이렇게 고단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북한은 북한대로, 남한은 남한대로, 국가 지도자들은 권력만 잡으면 언제나 독재자가 되고, <법 권력>과 <언론 권력>과 <경제 권력>들이 서로 손을 잡고 <악의 고리>를 형성한다. 각종 부정부패로 호위호식하고, 민중을 개 돼지 취급하며 타락할 대로 타락하다가, 결국은 그 민중들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난다. 조선은 <해방>된지 71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온전히 <독립>하지 못했다. 북한의 해방 역사는 <김일성 부자 3대>의 노골적인 독재 시대였다면, 남한 역사는 <박정희 독재 프레임> 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후 독재세력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과 저항세력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으로 굳이 구분 지을 수 있다. 이제 대한민국 민중은 우익과 좌익, 친미와 종북, 반공과 빨갱이, 기독교와 비기독교.. 등등, 이런 구시대적 <이데오르기 이념, 종교 이념> 논쟁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는 남북한이 함께 잘 사는,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시대,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국가를 창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사>를 알아야 하고 , 반드시 잘못된 과거사를 청산해야 하며, <친일, 독재, 부패> 세력들은 참회하고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받아야 한다.

여러분께 E.H. Carr가 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권하고 싶다. 가볍게 읽을 책은 아니고 여러번 정독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간단히 몇가지만 서술해보자. “역사가는 자신의 시대를 반영한다. 그러기에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즉 내가 9개월 동안 기록한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칼럼은 오늘 시점에서 한국 근대사를 바라본 나의 역사관이며, 현시대적 관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켜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역사는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서 과거를 지배하고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사회의 발전과 개인의 발전은 병행하며, 역사의 사실은 사회의 힘에 관한 사실이다. 또한 위인은 역사의 사물이자 사회적 힘의 대변자이다. 따라서 역사란 오늘의 사회와 어제의 사회간의 대화이다.” 그는 또 <역사의 과학화>에서 “ 역사가는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역사와 과학의 방법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반론에 대한 반론, 가설에 대한 유사성 등이다. 역사가는 신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즉 신의 뜻이었다고 역사의 문제를 덮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역사와 도덕에서 “평등, 자유, 정의, 자연법 등 절대적 가치라고 추정되는 실제적 내용은 시대 혹은 지역에 따라 변한다. 모든 집단은 그 자신만의 가치가 있으며, 그 가치는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역사의 인과관계>에서 “역사의 연구는 <원인>에 관한 것이다. <원인>에 대한 탐색과 다양화 그리고 단순화 작업을 병행하는 것이다. 역사의 우연도 합리적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기에 역사가는 <왜?>라는 질문과 더불어 <어디로?>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역사의 진보>에서 “진보의 본질은 수많은 전환점, 지도권의 이동, 격렬한 동요, 권력 투쟁의 시간들이 진보되어, 예전의 권력은 약화되고 예전의 지표는 사라진다. 그래서 새로운 질서가 생기게 되는 과정이다.” 또 “모든 문명 사회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를 위해서 현존하는 세대의 희생을 요구한다.” 라고 했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민들은 수백만명이 촛불을 들고 겨울밤 광화문 밤거리로 뛰쳐 나왔는지도 모른다. 역사는 반드시 변한다. 관계의 객관성은 사실과 해석 사이를 오가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를 오가면서, 새로운 모델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그래서 역사의 절대적 가치는 끊임없는 <변화>이며, <운동>이고, 혹은 <진보>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 <변화에 대한 감각>과 그 변화에 대한 복잡성을 이해하는 <이성의 신념>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근대화, 현대화를 통틀어 150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동안 그 대부분의 기간도 식민지, 독재 강압 통치 기간에 살았다. 그러니 편협되고 왜곡된 역사 사관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암기과목이 아니다. 권력에 의해 강제된 주입식 역사관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가 역사적 사실을 찾아보고, <왜?>와 <어디로?>를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 여러 문헌들을 공부하여 올바른 역사관을 가지고 있어야 후손에게도 떳떳한 미래를 물려 줄 수 있다. 민중은 깨어난 횟불이자 혁명이어야 한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37회 <친일,독재, 부패시대> (12-23-2016)

해방후 조선민중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이념과 사상을 얼마나 인지하고 있었을까? 대부분이 그 지역에 태어났고 그 지역에서 산 죄 밖에 없을 것이다. 여러분이나 나나 북한에 태어나서 아직도 살고 있다면 무슨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무지한 백성에게는 <자발적 선택권>이 아니라 <필연적 종속권>만이 있을 뿐이다. 대다수 민중은 민주 투사도 아니고, 공산 혁명가도 아니다. 그들은 하루하루 먹고 살아가는 선량한 백성일뿐이다. 민중은 언제나 선량 무지했고, 권력자들은 혹세무민하여 빼앗고 강압했다. 그래서 어떠한 이념논쟁도 백성에게는 속절없고 허무할 뿐이다. 그런 양민을 개,돼지 취급한다면 언젠가 반드시 민중의 돌로 쳐 죽여야 한다.

해방후 5년간의 남북한을 비교하면 북한의 우세다. 북한은 일제 감정기부터 지하자원과 중공업 시설이 집중된 곳이다. 한반도 발전시설의 80%가 북한에 있었고, 북한 인구도 남한의 절반 밖에 되지 않았다. 남한이 3년동안 점령군 미군정의 강제 지배체제에 있는 동안, 북한은 소련으로 부터 행정자치권을 이양받아 <친일파>들를 척결하고, 1946년부터 대대적인 개혁을 실시한다. <토지개혁>을 20일만에 완수하고, 남녀평등법, 문명퇴치운동, 8시간 노동법 실시 등을 실행했다. 특히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으로 친일반역자 토지들을 무조건 다 몰수해서, 노동가능한 가족수에 따라 민중에게 무상분배했다.

반면에 남한은 3%의 지주가 70%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소작료로 50%를, 심지어 악덕 지주는 80% 이상을 수탈해 갔다. 해방후 남한을 점령한 <미군정>은 조선을 통치할 정보나 인력이 전혀 없었다. 그야말로 무식한 군발이들이었다. 그래서 미군정은 친일파 경찰, 검찰들과 손을 잡게 되고, 친일파 지주와 지본가들이 그를과 한 통속이 되며, 남한군 장교들은 일본제국주의 장교 출신들로 채워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이들이 대한민국 민주국가의 지배세력이 되어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지배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을 <우익>이라 부르며, 자칭 <보수>라고 부른다. 반면에 이들과 반대인 세력이 누구인가? 78% 이상의 문맹자인 남한의 민중들, 농민들, 노동자들, 국군 사병들, 일부 지식인들 이었다. 이들이 추구한 이념은 평등과 균등한 분배였다. 이들을 <좌익>이라 부르고 <빨갱이>로 몰았다. 남한의 이승만도 <반공이념>을 앞세워 독재자가 되고, 북한의 김일성도 <주체사상>을 앞세워 독재자가 된다. 그 <독재정치>가 지금까지 남북한 모든 백성에게 계속 강제된다.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말한다. “이승만은 남한의 공산주의자로 생각되는 양민들을 더 많이 탄압할수록, 미국의 더 많은 신뢰와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미국은 남한을 미소 냉전의 최전방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태평양 사령관 맥아더는 철저한 반공주의자 였으며, 그의 권력은 미국 대통령을 능가할 정도였다. 이를 간파한 이승만은 미국에 대한 <반공> 과잉충성으로 조국을 분단케하고, 남조선 대통령이 되어, 민족을 이데올로기 이념전쟁에 몰아넣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발생한 사건이 <여수, 순천 반란 사건>, 일명 <여순사건>이다. 국군 내부의 대부분의 사병들은 <좌익>이거나 <남로당> 출신이 많았다. 1948년 10월19일 여수 주둔 14연대에게 <제주도 공비 소탕작전> 명령이 하달된다. 하지만 제주도로 출발하기 전에 사병 2,700명이 남로당 출신 지창수 상사의 주도로 여수 친일파 경찰들을 먼저 습격한 사건이다. 반군들은 여수에서 순천으로 확산되면서 우익세력과 경찰들을 인민재판으로 처단한다. 반군 세력들은 지리산, 구례, 남원, 벌교, 보성으로 진출한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숙군작업>을 실시하여 전멸시킨다. 반란군은 지라산으로 도망쳐 <빨치산>이 된다. <남부군>, <태백산맥>의 배경이다.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공포되고, 이때부터 이승만은 남로당 <부역자 색출작업>을 하달한다. <반공>이라는 미명아래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한다. 가족중 한명이라도 반란군이었다면 가족 모두를 재판도 없이 현장에서 즉시 사살하였다. <연좌제>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1949년의 <보도연맹 사건>은 양민들을 좌익 동조세력으로 몰아 3십만명 이상을 무참히 살해한다. 그외에 <거창 양민사건> 등등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다. 한국전쟁 때도 사상자 240만명 중에서 군인은 40만명이고, 민간인 죽음이 2백만명을 넘는다. <노근리 학살 사건>등 과 같은 미군들의 무차별 폭격과 학살 사건들도 진상조사 조차 못하고 있다. <박정희, 전두환> 독재자 시절에는 또 얼마나 많은 양민과 학생들이 학살되었던가? 진정 모두 잊어버렸단 말인가?

남한의 자본가들은 어떻게 재벌이 될 수 있었을까? 해방후 조선의 일본인들은 빈몸으로 귀국해야 했다. 독립운동가들과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인 재산들을 <국가재산>으로 환수하고, 주요 산업체와 기업들은 국유화해서 <민족자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일본인 개인자산은 사유재산으로 인정한다고 하여 친일파 조선인들에게 모두 명의를 넘겨주었다. 뒤늦게 12월 미군정은 일본인의 개인토지와 재산을 <귀속재산, 혹은 적산 –적의 재산>이라 하여 미군정에 귀속된다. 해방 직후 2,700개 기업이 있었는데, 미군정은 15년 분할 상환조건으로 친일파 자본가들에게 집중 분배한다. 이를 <적산불하> 사건인데, 4년동안 물가가 60배 올랐으니, 거의 무상으로 불하받은 셈이다. 미군정은 85% 귀속재산을 이승만 정권에게 넘겼으니, 이때부터 <정경유착>과 <부정부패>가 시작되어, 오늘날 <최순실 게이트>까지 연결된다. 

일예로 조선화약공판이 한화그룹으로, 기린맥주가 OB맥주로, 삿포로 맥주가 하이트 맥주로, 선경직물이 SK그룹으로, 영광제과가 해태제과로, 미쓰코시 백화점, 제일모직, 제일제당이 삼성그룹으로, 쌍용그룹, 동양레미콘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조차 없다. 권력자의 비호아래 성장한 대기업은 <정치자금>을 갖다 바치고, 권력자는 <독재자>가 되어간다. 독재권력을 항거하는 민중들에게는 <종북, 빨갱이>로 몰아 수많은 양민들을 학살하고, 독재권력의 비리와 만행을 폭로해야 하는 언론들은 <언론탄압>으로 입에 재갈을 물린다.

<친일파>들은 말한다. “그래도 일본 제국주의 덕분에 가난하고 무식한 식민지 조선인들이 선진교육을 받고 이만큼 발전하고 잘 살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 이를 <식민지 근대사관>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보수꼴통들은 말한다. <박정희 독재>가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도 없었고 세계10위권의 경제대국도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정말 잘못된 <현대판 독재사관>이다. 도덕적 가치관이 상실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등이 되어야 하며,  돈으로 잘 살면 모든게 용서되고 은폐되는 <거짓된 사회>가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부정부패와 권력은 서로의 꼬리를 물고 괴물처럼 계속 온나라에 퍼져나가는 것이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36편 <해방후 빈곤시대> (12-16-2016)

해방후 왜 <남한>은 북한에 비해 더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나? 대부분의 기간 산업 시설들이 북한에 있었다는 점은 일부 원인에 불과하다.

첫째는 남한의 <인구 증가>다. 일제 징용이나 징병으로 끌려갔던 조선인 2백만명 중에 120만명 정도가 귀국선을 탈 수 있었다. 또한 만주와 중국에서 1백만명 동포들이 귀국했다. 하지만 조국 <조선>은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할 아무런 준비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북한에서 남한으로 이주한 북한주민이 1백만명이 넘는다. 북한에 사는 지주, 자본가, 상인, 지식층 등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일명 브로주와 계급들이다. 1946년 초반에 북한은 토지개혁과 산업의 국유화가 전면 실시 되었기 떄문이다.

둘째가 <통화량 급증>이다. 일본으로 귀국하는 90만명의 일본인들이 가지고 갈 수 있는 돈은 소액현금만 허용되었다. 그러니 가지고 있던 그 많은 돈을 조선화폐로 환전하여 조선에서 모두 소비하여야 했다.

세째가 미군정의 <쌀 정책 실패>다. 1940년부터 조선은 쌀 배급제였다. 그런데 미군정은 <자유시장 정책>을 실시한다. 그러니 백성들은 쌀을 무제한 매입할 수가 있게 되면서 매점매석이 발생한다. 그와 동시에 쌀 생산량은 격감한다. 일본이 철수하니 비료공급 차질과 관개시설 관리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 남한 인구 10% 증가와 화폐량이 증가하는 반면에, 쌀 생산량은 격감하고 쌀 소비량은 급증한다. 화폐가치는 하락하고, 당연히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곡물의 매점매석, 곡물 투기현상으로 <곡물가격 폭등사건>이 발생한다. 쌀값이 7개월만에 30배 급증하게 된 것이다. 5인가족 기준의 가장 평균 월급으로는 이틀밖에 견딜 수 없었다. 엄청난 실업난과 살인적 물가 폭등, 길가에는 굶어죽는 사람들과 버려진 아이들로 들끓는다. 주거환경은 쓰레기장과 같다. 실제로 1946년 6월 전국적으로 <콜레라가 창궐>하여 무려 11,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다. 해방은 되었지만 민중의 삶은 더 고달팠다. 거기다 북조선은 토지개혁을 통해 땅을 무상으로 나누어준다는 소문까지 나도니, 민중은 박헌영의 <계급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에 현혹될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군정은 우익을 옹호하고 좌익을 철저히 배제한다. 남한 민중은 미군정과 친일파 우익을 혐오하기 시작한다. 이때 1946년 6월 <정판사 위조지폐 조작사건>이 발생한다. “공산당 2인자 이관술이 공산당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위조지폐 인쇄를 지시하여 총9백만원 어치의 위조지폐를 찍어내다가 적발한 서건임.”이라고 미군정은 발표한다. 하지만 이것은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살인적 물가 상승 (일년동안 물가가 92배 상승함) 등으로 발생하는 민중들의 분노를 공산당과 좌익의 책임으로 돌리려 미군정 프락치들이 조작한 사건임이 훗날 밝혀진다. 이 사건을 계기로 관망하던 좌익세력들이 본격적인 민중투쟁노선으로 바뀌는 계기가 된다.

또한 1946년9월 23일 <전국철도 파업>이 부산에서 시작된다. 철도파업은 체신, 식료품, 전기, 조선, 금속, 해운, 토건 등 각 사업으로 불길처럼 번져나가 무려 25만명이 궐기하게 이른다. 이때 파업 노동자들을 진압을 위해 동원된 조직이 경찰 말고도 그 유명한 정치깡패 (대표적 인물 김두한)들이다.

전국파업이 끝난 직후 10월1일 노동절 행사를 위해 <박헌영>이 대구를 방문한 시점에 1만명 군중은 민군정 항의 시위로 돌변하여, 결국 노동자 1명이 경찰 총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미군정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전차4대를 동원하여 무력진압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10월 대구항쟁> 사건이다. 이 대구민중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경찰서 관공서가 털리고 지주와 자본가 재산들이 약탈당한다. 전국 참가 시위대 3백만명, 4천명 사망, 2만6천명 부상, 체포 1만5천명이다. <대구 10월 항쟁>을 계기로 전국의 <인민위원회>는 철저히 파괴되고, 미군정은 공산당을 불법조직으로 선포함에 따라 좌익세력들은 지하활동으로 전환하게 되고, 공식적인 공산당원들은 완전 소멸하게 된다. 하지만 공산당 영수 박헌영은 자진 월북하고, 지하로 숨어진 공산당 좌익세력들은 비밀조직화 되고 급진 과격화 되어, 1946년11월 <남로당>으로 이름이 바뀐다. 그 이후 대표적으로 <제주 4.3사건>, <여수, 순천 사건>, <지리산 빨치산 사건>, <보도연맹 사건>등등의 사건들이 발생함에 따라 한민족의 비극적 결과를 낳게된다.

<제주 4.3사건> – 제주도에는 육지와 달리 1947년도에도 인민위원회가 있었으며, 미군정에도 비교적 협조적이었다. 3월1일 말탄 경관이 어린아이를 치는 일이 발생하자, 민중들이 경찰서까지 쫓아가서 항의한다. 당황한 경찰이 군중에게 발포하자 6명이 사망한다. 이에 남로당의 주관으로 반정부 여론을 부추겨 총파업을 실시한다. 제주도민의 95%인 9만명 뿐만 아니라 경찰 20%도 총파업에 참여하게 된다. 이에 미군정은 제주경찰들을 해직하고 <서북청년단>이라는 우익 외지인들로 모두 교체해 버림과 동시에, 제주도민 70% 이상을 남로당 좌익들이라고 잠정 결론내린다. 그래서 350명의 제주 남로당원들이 죽창을 들고 경찰지서들을 급습하여 15명의 우익 서북청년단원들이 희생된다. 이에 경찰과 서청단원들은 제주도민들을 닥치는대로 강경진압하여 3만명의 양민을 학살한 사건이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35편 <미군정 시대> (12-09-2016)

 1945년8월14일 조선총독부는 일본이 내일 무조건 항복함과 동시에, 조선에 거주하는 90만명의 일본인들을 안전하게 본국으로 송환하라는 본국의 지령을 받는다. 총독 아베 노부유키 (“해방후 조선은 옛조선의 영광을 되찾는데 족히 100년이 걸릴 것이다.”라는 악담을 남긴 놈이다.) 는 조선의 민족 지도자 여운형을 만나서 담판을 짓는다. 일본인 무사귀환을 보장하되, 조선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서민들 3개월치 식량 확보, 조선의 행정권과 치안권을 넘겨받는 조건이었다.

<여운형>은 곧바로 <건국준비위원회> (일명 건준)를 발족하고, 각 지방마다 치안을 지역주민 스스로가 담당하는 <인민위원회> 165개소가 8월말까지 민중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설치된다. <인민위원회>는 공산주의 산하조직이 아니다. 다만  자본가, 지주, 친일파들은 자본주의를 선호하고, 소작농, 일반 민중들은 재산을 공평하게 재분배한다는 사회주의를 더 선호한 경향이다. 또한 지주와 소작농의 소작제 비율도 기존에는 50:50이었는데, 30:70으로 바뀌었다. 치안은 마을 청년들이 죽창이나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자체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8월20일 미국 극동사령부는 일제 강점기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라고  조선총독부에 지시한다. <건준>에 있던 우익 세력들이 빠져나가자, 공산당의 대부 <박헌영> 세력들이 건준을 장악 하면서 조선을 <인민공화국>으로 서둘러 선포한다. 그 이유는 미군정이 개입하기 전에 조선은 우리 스스로 통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1945년 9월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면서 <건준>과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고, 일본경찰 출신들에게 국내 치안을 맡긴다. 9월9일 미사령관 하지중장과 아베 조선총독 간에 항복문서 조인식이 시행되면서  남조선의 <미군정시대>는 시작된다. 웃기는 사실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서 수많은 미군과 인명을 살해한 패전국  전범인 일본 국왕은 살려주면서 일본을 <간접통치> 하기로 선포한다. <자위대>니 <평화헌법>이니 하는 것들이 이때 만들어진다. 미국은 박근혜 정부 때 이마저도 해제시켜 주지만 말이다. 또한 소련도 북한을 <간접통치> 하지만, 남한만은 미군이 <직접통치>를 했다는 것이다. 이 역사적 사실이 오늘날  지금 이순간까지 <남한>의 <전시통제권>을 미국이 가지고 있는 계기가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북한과 일본은 자국 <전쟁통제권>을 스스로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그러니 아직도 <남한>은 진정한 <독립국가>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때 <전시작전권>을 그렇게 되찾아 올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주국방하는데 돈이 많이 든다고 반대를 하였으니..

막상 미군정이 시작되었지만, 미군의 위관급, 영관급 장교들이 유구한 역사의 조선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았을까? 1980년대 초반에 필자가 미국 출장을 와서 놀란 사실은 미국사람들은 우리가 혈맹이라고 믿고있던  대한민국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하물며 1940년대 미국 군인들이야 오죽 했을까?  <남조선>을 패전국가의 가난뱅이들, 일제 식민지 시대의 노예들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미군정 입장에서는 스스로 자치정부를 해본 경험이 없는 식민지 민족이니 <행정편의주의>를 내세운 것이다. 그래서 또다시 일제 시대 앞잡이들, 일본 경찰, 관리, 행정, 학계, 법조 출신 <친일파>들을 등용하게 된 것이 <남조선>역사의 비극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덩덜아 지주, 자본가 세력들도 합세를 하면서 친일파들이 앞세운 행동강령이 <친미반공> 이었으며,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반대세력은 모조리 공산주의자로 몰았던 것이다. 그 사상전쟁, 이념전쟁이 오늘날 지금까지 <종북, 좌파, 빨갱이 새끼들>로 몰아세우는 <변증사관>으로 둔갑한 것이다. 1980년대 구소련이 무너지면서 세계의 이념전쟁도 종말을 고했다. 하물며 현시대에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바보가 어디 있으며, 독재국가 북한의 정치이념을 찬동하는 미친놈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현 남한 정부만 비판하면, 민중들이 거리로 나와 <촛불시위>만 하면 <종북, 좌빨>로 몰아부치니 생각이 없는건지, 무지한 것인지??  

반면에 소련은 해방군을 자처하면서 행정권을 북한의 <인민위원회>에 전격 이양한다. 그것은 소련이 너그러워서가 아니라 철저한 자국 이익 때문이다. 미국은 신탁통치를 통해 경제적, 군사적 이득을 얻기 위하기 위해 <점령군>을 자처했고, 소련은 신생국가들에게 <공산국가>를 확산시키고자 <해방군>을 자처한 것이다. 또한 미군은 경제적으로 부유했고, 소련군은 지독히 가난했다. 반면에 중국은 <2차국공내전>으로 모택동과 장개석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현상을 도울 김영옥은 일본패망 1945년부터 월남 전쟁이 끝나던 1974년까지를 <동아시아 30년 전쟁> 이라고 표현한다. 그 원인은 아시아 식민지 국가들이 일본과 싸워서 스스로 독립을 쟁취한 것이 아니라, 일본 스스로의 항복으로 인해 아시아는 하루 아침에 권력의 불랙홀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시아 각 나라들은 같은 민족끼리 <민주주의-공산주의> 라는 정치이념을 내세워 서로 싸울 수 밖에 없었던 <내전의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내가, 여러분이 잘나서 혹은 못나서가 아니라, 민주국가 와 공산국가로 나뉘어진, 그 시대, 그 나라, 그 지역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데오르기 이념전쟁>의 비극인 것이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34편 <해방후 1940년대> (12-02-2016)

<혼란의 시대>다. 2백만의 대한 민중은 엄동설한에 광화문으로 뛰쳐나와서 매주마다  <박근혜 퇴진> 촛불 집회를 하고 있다. 박근혜 일당은 최대한 시간을 끌며 하야하지 않을 것이다. 기득권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음모정치를 할 것이다. 여당과 야당, 야당과 야당, 대권 잠룡들은 잠룡끼리, 서로의 권력을 위해 싸울 것이다. 언제나 국가와 민중은 뒷전이다. 한국경제는 위태로워 질 것이고, 그림자 정부는 IMF때 처럼 다시 한번 한국을 먹으려 할 것이다. 김영삼 정권 시절 아들 김현철이 국정을 농단하여 한보사태를 빌미로 대혼란이 일어나고,  민중들이 연일 데모하던 참에 IMF가 쳐들어온 것 처럼 말이다. 천방지축 트럼프는 미국 우선 정책과 보호무역으로 세계와의 전쟁을 벌릴 것이고, 중국과 일본은 혼란 속의 한국 경제와 군사력을 넘볼 것이다. 조선의 지도자들은 사과할 줄도 모르고 책임질 줄도 모른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정의롭지도 못하다. 스스로 죽을 줄도 모르고 자리에서 내려올 줄도 모른다.  조선의 민중이 또다시 피를 흘리면 큰일이다. 이 땅에 또다시 죽고 죽이는 투쟁과 반란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2017년은 일년 내내 혼란과 싸움의 연속일 것 같아 심히 걱정이다.

이제 길고도 지루하던 한국 근대사 칼럼을 년말까지 일단락 지을려고 한다. 지면이 얼마 남지 않았다. 1940년대 초반의 태평양 전쟁과 중일전쟁, 패망 후 일본은 생략하기로 하고, 해방후 1945년부터 1949년 까지의 한반도 주요 사건을 나열해 보고, 주요 민중혁명 사건만 몇회에 걸쳐 다루고 끝을 맺자. 왜냐하면 지금의 대한민국과 너무 유사하기 때문이다. 연대별 자세한 사건내용은 인터넷에 해당 검색어를 치면 자세히 알수 있다. 한국 민중은 한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래야 2017년에는 제대로 된 대한민국 지도자를 뽑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45년 주요 사건>. -2월 얄타회담, 4월 오끼나와 전투, -7월 세계최초 핵실험 (맨하튼 프로젝트), -8월 만주작전 (폭풍작전), – 8.15 해방,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발족 (건준, 여운형),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부도호 사건), -9월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미군주둔, 한국민주당(한민당) 창당, 조선공산당 재건, -10월 이승만 귀국, -11월 조선인민당 창당, 김구 귀국,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오보사건, 반탁운동.

<1946년> -1월 조선공산당 3상 협정지지, -2월 북한, 임시인민 위원회 창설, -3월 미소공동위원회 개막, -6월 정판사 위조지폐사건, 전국 콜레라 창궐, -9월 부산철도 파업, -10월 항쟁 (10.1대구사건), -11월 북한 인민위원회 선거, -12월 과도입법의원 발족.

<1947년> -2월 대만 2.28사건, -3월 트루만 독트린, -4월 이승만 도미외교 후 귀국, -5월 2차 미소공동위원회, -7월 여운형 암살, -9월 UN 총회 (남북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 결정), -12월 장덕수 피살, -12월 민족자주연맹 결성,

<1948년> -1월 UN 한국임시위원단 입국, -2월 UN, 남한 단독선거안 통과, -2월 북한화폐 개혁, 인민군 창설, -4월 남북협상, 토지분양 실시, -제주도 4.3사건, -5월 제헌국회의원 선거 (1대총선), -7월 제헌헌법 공포와 대통령 선출, –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9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수립, -10월 여수, 순천반란사건 (여순사건), -12월 대한민국 국가보안법 공포

<1949년> -1월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 (반민특위)발족, -2월 학도호국단 창설, -4월 농지개혁법 논란, -5월 국군 강표부대 월북사건, -6월 미군 철수, -국민보도 연맹 결성, -6.6 반민특위 습격사건 (6.6.사건), -6월국회프락치 사건, -6월 김구 암살, -7월 북한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 (조국전선)조직, -10월 좌익단체 불법화, 토벌.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조선이 해방되던 8월15일 시점으로 우리 자신을 되돌려보자. 그 당시 조선인들의 문맹률은 78%였다. 태반이 글자 조차 읽지 못했는데 자본주의를 알았을까, 공산주의를 알았을까? 일제 강점기 36년동안 일본 제국주의 정책에 따라 노예처럼 생활했던 조선민족이 무슨 이념투쟁이며 해방 혁명을 꿈꾸었을까? 징병, 징용, 노동자,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하며 살지 않았을까?  해방 하루 전날까지 우리민족은 어느 누구도 해방이 될 것이라고, 아니 대일본제국이 항복선언을 할 것이라고 아무도 짐작조차 못했다. 조선의 <8.15해방>은 조선인 스스로가 <해방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태평양 전쟁 승리로 타국에 의해 <해방된 것>이다. 일본제국은 미국의 진주만을 공습하지만 않았어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지만 않았어도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들을 식민지화 했을 것이다. 조선은 일본 강점기 기간동안 스스로 독립을 하기에는 너무나 무력하고도 나약했다. 이해집단끼리 나뉘어지고 분산되어 있었다. 준비되지 않은 민중에게 <자주독립>은 서글픈 미래의 허상이었다. 그러니 조선은 해방되어도 분산되고 가난한 밥그릇을 둘러싸고 서로가  죽도록 싸운 것이다. 그 당시 미국은 조선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별 관심도 없었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33 < 대한민국 만주인맥> (11-25-2016)

<만주군관학교> 출신들 중에서 2년제인 <봉천군관학교> 출신들은  대한민국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했는지 몇명만 살펴보자. 4기에5명, 김응조 (육군준장), 계인조 (켈로부대 HID 대장), 5기에 18명- 정일권 (육군대장, 국무총리), 김일환 (육군준장, 교통부장관), 김백일 (육군준장), 김석범 (해병대 중장), 송석하 (육군소장), 신현준 (해병대 중장), 6기 2명- 양국진 (육군중장), 7기 7명- 박승환 (조선인민군 창군멤버), 8기 3명- 석주암 (육군소장), 9기-3명 등이다.

4년제 장교 양성 학교인 <신경군관학교>는 1945년까지 3,297명이 수학하였고, 조선인은 48명이었다. 1기 13명 – 박임항 (육군중장, 건설부 장관), 이주일 (육군대장, 감사원장), 최창언 (육군중장, 국방대학원장), 김동하 (해병중장), 윤태일 (육군준장, 서울시장), 2기 – 박정희 (수석졸업, 육군대장, 대통령), 이한림 (육군중장), 3기 – 최주봉 (육군소장), 4기 – 장은산 (수석졸업), 5기 – 강문봉 (육군중장, 국회의원), 6기 – 김윤곤 (해병대 중장) 등이다.

<간도특설대>는 1938년말 일제의 “조선인 독립군은 조선인을 통해 잡아야 한다”라는 <이이제이 (以夷制夷)> 전략에 따라 만들어진 <만주국 특수부대>이다. 주요임무는 만주에서 활동중인 <항일 독립군>조직을 비롯한 동북항일연군, 팔로군을 토벌 소탕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장 악질적인 <조선인 지원병>의 친일군사조직이었다. 주 타격대상은 연변지역 독립군 부대인 <동일항군연군>이었지만, 이를 핑계로 무고한 조선 민간인들을 살상, 강간, 약탈한 사례는 악랄하다 못해 처참하다. <간도특설대> 주요인사는 신현준 (초대 해병대 사령관), 김석범 (2대 해병대 사령관), 김대식 (3대 해병대 사령관), 박창암 (육군소장), 송석하 (육군중장), 최남근 (월남하여 좌익 활동, 여순 사건때 총살), 백선엽 (육군참모총장) 등이다. 다만 이승만의 총애를 받고,수많은 민간인들을 빨갱이로 몰아 죽인, 가장 악명이 높았던 <김창룡> 방첩대장은 일본 관동군 헌병 오장 출신이다.

여기에 대한민국의 <태생적 한계>가 있는 것이며, 현대사 교육을 금지시키고, 친일청산을 못하게 하고, 국정교과서를 획일화시키려는 음모가 있다. <이승만>정권은 이승만 자체가 독립운동가도 아니며, 미국 교민사회를 갈취하던 <하와이 깡패> 출신이다. 프린스턴 박사 출신이라는 학벌과 기독교를 등에 엎고, 해방후 최대권력이었던 태평양 사령관 맥아더 장군에게 아부하여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자다. 조선에는 이승만의 세력이 없으니 식민지 시대에 친일 골수분자들었던 친일 경찰, 친일 군인, 친일 관료, 친일 법조인, 학자들로 채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자연히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동북항일연군 출신들과 광복군 출신들, 상해 임시정부 출신들은 북조선으로 가거나, 숙청당할 수 밖에 없었다.

<박정희 정권> 때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들 대다수는 <박정희>를 역대 가장 존경받을 대통령으로 솝꼽는다. 대한민국 근대화의 아버지, 가난에서 탈출시킨 대통령, 한강의 기적, 새마을 운동, 수출혁신 등등, 박정희의 치적은 끝이 없고, 위대한 대통령으로 존경받는다. 심지어 <박정희 100주년 탄신(?) 기념> 사업으로 광화문 광장에다가 <박정희 동상>을 세운다는 것이다. 코메디인가? 이래서는 안된다. 분명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은 <독재자>이었다. 역사의 위대한 지도자는 잘한 것만 부각되는 편파적 평가가 되어선 안된다. 모든 역사적 사실이 공개되어야 하고 공평하고 정의롭게 평가받아야 한다. 그랬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박근혜 게이트> <박근혜 하야> 같은 민족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 이력서>를 사실 그대로 적어보자. 그는 누구인가? – 1917년 경북 구미에서 농민 박성빈의 5남2녀중 막내로 태어남. – 대구 사범학교 졸업후 교사로 재직. –조선인 교사 차별로 만주군에 입대하려 하나 나이제한으로 거절당함. – 일본인으로 충성맹세 혈서를 쓰고 만주 군관학교 2기 입학, 1942년 우등으로 예과 졸업. – 일본사관학교 본과 진학, 졸업, 만주국 현역 육군 소위로 전역. -8.15 광복후, 광복군을 따라 귀국. –남조선 국방경비대 포병 소위로 입대, -세째형 박상희 (김종필 장인)가 대구 10.1사건으로 경찰에 사살되자, 박정희는 남조선 노동당에 입당, 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 지도. – 1948년 육군본부 정보국 소령으로 근무중, 11월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작업에서 <여수 순천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사형선고를 받음, –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 (같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의 구명으로 사형을 면하고 예편함. –일각에서는 국군 내부에 있던 남로당 당원명단 300명을 넘겨주고 풀려났다고도 함. 군속으로 근무. – 6.25전쟁 발발, 육군포병 소령으로 복귀. –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때 중령으로 진급. -1950년 11월 아내 김호남과 이혼, 육영수와 재혼. -1953년 11월 육군 준장으로 승진. -1955년 제5사단장. 1957년 소장 진급시 남로당 경력을 백선엽의 도움으로 진급. -1957년 7사단장, 1959년 제6관구 사령관. -1960년 부산군수기지 사령관.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하야.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 부임. – 장면총리 때, 박정희 남로당 전력이 폭로돼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좌천. – 이에 앙심을 품고 혁명을 계획하던 중 <5.16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함. 박정희 정권 창출의 주요인맥들 역시 <만주인맥> 친일파 출신들이었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32 < 식민지 시대의 민중> (11-18-2016)

 조선 민중은 위대하다. 금번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백만명 민중 촛불 집회>를 보면서 국가 위기일 때마다 다시금 <조선 민중>의 <위대함>을 깨닫게 된다. 3천번 이상의 외세 침략을 받아온 한반도 역사이지만, 수많은 국가 지도자와 기득권 세력들은 무능하고 부패했지만, 그때마다 국가를 구한 것은 조선의 민중이었다. 한반도는 반드시 민중의 힘으로 통일되고 부강할 것이다.

해방 후 오늘까지 한국 현대사의 부패한 기득권 세력들은 어디서부터 생겨났으며, 왜 남북한 모든 민중들은 이렇게 곤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일제 강점기의 <역사청산>이 왜 필요하며, 반드시 해야 하는가?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우리 민족 모두에게 역사적 <죄인>이 아닌 자가 얼마나 되며, 떳떳한 자가 몇이나 될까만은, 국가의 지도자는 달라야 한다. 어느 국가든, 종교 단체든, 공기업이든,  각계각층의 지도자는 검증되어야 하고 민중의 신뢰를 받는 자 이어야 한다. 고도의 명예와 정의가 최우선시 되는 각계 지도자는 <나도 잘 한것이 많은데, 왜 나만 가지고 그래?> 로 자신의 과오와 잘못을 감추거나 합리화해서는 안된다. 이승만도, 박정희도, 전두환도, 이명박도, 박근혜도.. 등등  물론 잘한 정책도 많겠지. 하지만 국가 지도자로써 지도자가 되기 이전에도, 되고 나서도, 해서는 안될 짓거리들을 했다면 역사와 민족 앞에서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국가 지도자가 국민의 신뢰를 상실했다면 이미 죽은 목숨이다. 국민 앞에 모든걸 내려놓고 참회한 후 자결해야 한다. 그리고 저승가서 역사의 심판을 기다려야 한다. 팔자에 없는 출세 했으면 됐지, 뭐 대단한 목숨이라고 구걸 까지 해서야..

다시 1938년도로 되돌아 가보자. 국가의 위기 시에는 언제나 개혁세력과 기득권 수구세력의 충돌이 있다. 일본이 중국과 <중일전쟁>을 치루고, 다시 일본이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치루는 동안 조선의 민중은 일본 징용군으로, 위안부로 전쟁터에 끌려 갔다. 그 당시 조선 민중의 드림은 <만주 이민>이었다. <어머니, 북간도를 아시나요?> 1937년 간도성 거주 조선인은 46만명으로 총인구의 71%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중국 당국이 공인한 연변 지역 <항일열사> 3,125명 가운데 조선인 비율은 98%였다. 앞에서도 거론되었지만, 항일독립군 부대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두그룹으로 나뉘어졌다. 민족주의 독립군은  상해 임시정부 <광복군 –해방후 국군>에 합세하지만, 조직과 숫자가 미비하여 보잘것 없었던 반면에, 대부분의 12개 <대한독립군단>은 사회주의 성향의 독립군 부대로서 만주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36년 중국공산당 지도 아래, 만주 지역의 조선독립군과 중국 유격대가 합하여져 <동북항일 연군>이 만들어진다. 이곳에서 활동한 김일성, 김책, 최헌, 최용건 등이 해방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핵심세력이 된다. 북한이 입이 마르게 찬양하는 김일성의 함경도 <보천보 전투>가 1937년에 일어난다. 전성기 때에는 <항일연군> 숫자가 1만명이 넘었으니, 조선독립군의 항일연군은 중국 공산당 <팔로군>의 전략부대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모택동에게는 큰 도움이 되며, 해방후 중국을 통일하는 근간이 된다. 이때 받은 신세를 갚기위해 한국전쟁 때 1백만 중공군을 지원 (일명 1.4후퇴)하게 되며, 현재까지 <북중 혈맹관계>를 유지하는 계기가 된다. 

이에 일본은 1939년 일제의 <관동군>과 만주국의 <만주군>은 <항일연군>에 대항해  대규모 소탕작전을 벌리며, 1940년 관동군을 76만명으로 늘림으로서 1942년 <항일연군>을 소멸한다. 이 당시 조선독립군을 때려잡는데 가장 앞장선 악날한 조직이 <간도특설대>이다.

친일파 중에는 <만주인맥>이 있다. 박정희를 비롯한 수십명의 국군 장성들과 정부관료, 법조계 인물들이 <만주인맥>이다. 만주인맥에는 군부인맥과 관료인맥으로 나뉘는데, <군부인맥>은 <일본사관학교, 만주군관학교, 간도특설대> 출신들이었으며, <관료인맥>은 <만주 대동학원, 만주 건국대학> 출신들이다. 이들이 해방후 현재까지 남한 정권들의 실세들이다.

<대동학원>은 일제 괴뢰정부인 만주국 관리를 배출하기 위함이다. 1932년부터 1945년까지 4천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조선인은 116명이다. 그중 행정관료 67%, 사법관료 11%이다. 그중에서 대표적 인물이 최규하 (대한민국 외무부장관, 국무총리, 대통령 역임), 황종률 (3공화국 재무부장관), 이민재 (문교부 차관), 김병화 (법무부 차관, 대법관) 조기준 (박정희 시절 재일거류민단장) 등 다수이다. 이들 대부분은 유복한 집안의 자제들이었으며, 개인의 성공과 입신출세가 목적이었음은 당연하다. 만주 <건국대학> 출신으로는 강영훈 전총리가 대표적인데, 건국대학 목적은 조선족 피지배계층에 대한 교육편제를 개편하여 우민화 교육을 실시하고, 중간계층의 행정 엘리트를 육성하여 식민민족 사회를 통제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만주군관학교>는 만주국 육군사관학교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모방하여 1939년에 4년제 <신경군학교>가 세워지며, 1932년 설립된 2년제 <봉천군관학교>와 합류되어 <만주군관학교>로 통칭한다. 일본계, 중국계, 만주계, 조선계 학생들이 모였는데 단연코 조선인들이 두각을 나타낸다. 주목적은 <항일투쟁> 독립군 세력들을 때려잡는 것이다. 참고로 만주군은 장학량의 동북군 6만명을 흡수하여 만들어졌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31 < 중국 근대 혁명사-2> (11-11-2016)

이때부터 중국 공산당의 그 유명한 <대장정 (長程) 1934 ~1936년>이 시작된다. 마오쩌둥은 잔존 병력을 재편하여 대륙 동남부에서 시작하여 서남부로 근거지를 옮기는 대행군이 시작된 것이다. 인류 역사상 단일한 군사목적으로 이동한 최대 기록의 장정이다. 이동거리가 9,600 Km, 일체의 운송차량 없이 오직 걸어서 도보와 소,말만 끌고 이동한 것이다. 장정을 시작할 때 병력은 6만8천여명 이었는데, 이동중 6만2천명은 포로나 질병, 혹은 굶어서 죽고 나머지 6천명만 겨우 살아 남은 것이다. 1935년 11월 옌안에 도착하여 장정은 종료되며, 이들중  생존한 중국 공산당 간부들이 신중국 엘리트 계층이 되고 신격화된다. 장정 1세대와 혁명 2세대들이 오늘날 중국 현대사의 주축들이다. 대표적 인물로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 주덕, 송시륜, 임표> 등이다.

 레닌의 유럽 공산혁명 대상자는 <도시 근로자>와 도시 서민층이었던 반면에, 모택동은 <농민>이 혁명 대상이었다. 농민들은 장개석 국민당 정부의 부정부패와 기득권 부자 중심 정책에 절망감을 느꼈다. 또한 공산당이 <대장정>에서 승리한 동기는 <삼대기율, 팔항주의>의 엄격한 규율과, 민폐금지, 엄격한 처벌이다. “<삼대기율 (三大紀律)>은 1. 모든 행동은 지휘에 따른다. 2. 군중의 바늘 하나, 실오라기 하나라도 취하지 않는다. 3. 얻어낸 모든 것은 공동분배한다. <팔항주의 (八項注意)>는 1. 말할 때는 온화하게 한다. 2. 매매는 공평하게 한다. 3. 빌려온 것은 반드시 되돌려 준다. 4. 손해를 입혔을 경우 반드시 배상한다. 5. 구타나 욕설을 하지 않는다. 6. 농산물에 해를 입히지 않는다. 7. 부녀자를 희롱하지 않는다. 8.포로를 학대하지 않는다.” 이다.

중국 공산당의 <삼대기율, 팔항주의>는 대장전 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 후, 2차 국공내전, 중국인민공화국 (현 중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인민해방군 총사령부 공식 강령이 된다. 실제로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 외전에서도 철저히 지켜졌다. 실제로 6.25전쟁때 미군이나 남한 군인들에게 수탈당한 백성은 많아도, 1백만 중공군에게 피해를 입은 백성은 없었다는걸 역사는 증언한다. <과거사 청산>이 되지 않는 대한민국은 국법이 준엄하지 못하고, 그 처벌이 지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단 국치에 해당하는 박근혜 정부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뿐만 아니라, 제1공화국부터 6공화국 현시점까지 지배계층과 국정 공무원들의 수많은 부정부패와 거짓말만 없었어도, 지휘고하를 막론한 강력한 준법정신과 엄격한 법적 처벌만 시행되었어도, 대한민국은 세계만방에 자랑스러운, 정말 살기좋은 나라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안되고 있으니..

1935년 중국 학생운동이 일어나고 1936년12월12일 <서안사변>으로 장개석은 체포된다. 서안사건은 동북군 총사령관 장학량이 공산군 토벌에만 전력하고 있는 국민당 총통 장개석을 산시성 서안에서 납치 구금하고,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함과 동시에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요구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대일본 <항일전쟁>을 수행하게된다. 한편 하극상의 장학량은 장개석을 석방하고, 장학량 자신은 서안사변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54년간 가택연금 상태에서 구금생활을 자청한다. 이게 막상 가능한 일인가? 대인이며 호걸이다. 그래서 장학량은 아직도 중국인들의 존경을 받게 된다. 장학량과 장개석, 그리고 장개석의 아내 송미령. 이들의 삼각관계가 또다시 역사를 뒤바꾼 것이다.

1937년 7월7일 일본의 본격적인 중국 대륙 침략 전쟁인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1945년 9월2일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일명 <중국항일전쟁>, <지나사변>이라고 하며, 20세기 아시아 최대 전쟁이었다. <2차 국공합작>은 1945년 일본항복 선언 때까지 계속되지만, 한편으로 중국 공산당이 전열을 재정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1937년8월 공산당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칭하여 국민당에 합류한다. 이때 일본군은 정예부대 30만명, 만주국 출신 만주인 15만명, 예비군 2백만명, 세계3위의 해군력과 항공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에 중국군은 4백만의 병력이 있었으나 장개석 직속10만 정예부대를 제외하고는, 지방군벌들 소속으로 장비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오합지졸이었다.

1937년 일본군이 난징을 진격할 때 국민당은 수도 난징을 포기하고 충칭(중경)으로 천도하지만, 사령관 탕셩즈(장성지)는 난징 결사항전을 선언한다. 하지만 12월13일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고 성안을 공격하니 15만 대군은 제대로 저항조차 해 보지 못하고 무너진다. 사령관은 도망가고 성안에 남아 있던 60만명의 난징시민들과 군인들을 대상으로 6주일 동안 일본군들의 무차별적 살육, 방화,강간 등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난징대학살> 이다. 총검술용으로, 목베기 시합용으로, 산체로 묻어버리거나, 불에 태워 죽이거나, 몽둥이로 때려 죽이거나 무차별적으로 죽였다. 모든 여자들에게는 나이에 상관없이 집단윤간, 선간후살, 성노리개, 아동강간 등등..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수많은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1644부대>를 만들어 마루타(통나무) 형태의 생체실험 연구로 수많은 생명들이 희생되었다. 난징대학살로 살해된 사람만 30만명이 넘는다. 일본인들의 광적이고도 잔인한 민족성이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30 < 중국 근대 혁명사-1> (11-04-2016)

 1905년 <손문(쑨원)>의 <삼민주의> (민족,민권, 민생)로 <중국혁명 동맹회>가 결성되고, 1911년10월10일 <신해혁명> (일명 공화혁명, 혹은 1차혁명 – 이날을 쌍십절이라고 부르며,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모두 국경일로 정함)으로, 1912년 1월1일 <중화민국> 공화국이 건국된다. 또한 1911년 12월 티베트와 외몽고는 독립선언을 하게 된다. 1912년 3월10일 쑨원이 임시대총통, 북양군벌의 실권자인 위안스카이(원세계)가 총리대신에 임명되면서, 청나라 군정대권을 장악한다. 그 이후로 위안스카이의 독재가 시작되면서 혁명군을 진압한다. 이것이 <제2차혁명>이다.

1912년8월25일 중국혁명가 <쑹자오런(송교인)>의 주도로 <국민당> (전 중국혁명 동맹회)이 창설되고,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면서 위안스카이 독재를 견재한다. 그러나 1913년 쑹자오런은 암살당하고 1915년 위안스카이는 황제 제도를 부활시킬려고 시도하지만, <3차혁명>에 의해 실패한다. 1916년 위안스카이는 사망하고 전국 지방군벌들은 난립한다. 중국은 이 시기가 신문화운동, 무정부주의, 사회주의가 유행하던 시기다.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으로 1919년 모스코바 코민테른 (국제공산당) 창립대회가 개최된다. 1921년7월 마침내 <중국공산당>이 창립된다.

1924년부터 1927년동안 <제1차 국내 혁명전쟁 (일명 대혁명)>이 일어난다. 통상 <1차 국공합작>이라고 하는데, <국공>은 국민당과 공산당을 의미한다. 중국 공산당원들은 당적을 가지고 국민당에 합류하여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혁명투쟁을 하게 된다. 1925년 손문은 죽고 <장개석(장제스)> (1887~1975)이 국민당을 계승한다.

하지만 1927년4월 북벌전쟁 승리후 장개석은 상해에서 정변을 일으켜 공산당을 대규모로 탄압한다. 이 사건을 <4.12 상하이 쿠테타>라고 하는데, 남경에 국민당 정부를 수립하고, 장개석은 군사위원장, 중앙정치회의 주석을 맡으면서 공산당과 관계를 끊는다.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 <1차 국공내전 (1927 ~1936년)>이다. 한편 1928년6월 일본 관동군의 <황고둔 열차 폭파사건>으로 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이자 봉천군벌의 수장 <장작림 (장쭤린)>을 폭사시키고 만주를 인수하려 한다. 하지만 그의 아들 <장학량 (장쉐량)>이 27세의 나이로 동북3성 봉천군벌의 수장이됨과 동시에 장개석 정권에 합류한다. 이때부터 중국 근대사는 <모택동, 장개석, 장학량> 세 사람의 의사결정에 따라 급변한다.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고, 같은해 1929년 7월10일 <봉소전쟁 –봉천군벌과 소련 간의 전쟁>이 발생한다. <장학량>이 러시아가 갖고있던 북만주 철도권을 빼앗자 소련이 침공하여 장학량은 백기를 든다. 일본 관동군은 1931년 <만주사변 (1931/9/8 ~1932/2/18)>을 일으켜 만주를 식민지화 한다. 이때 장학량은 30만 정규군, 18만 비정규군, 300대 전투기, 중국 군벌중 최대 함대, 병기창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 일본 관동군은 1만5천명에 불과했는데 장개석은 일본군과 전면전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무저항 지시를 하달한다. 이것이 역사의 최대 미스터리다.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은 장학량과 연인 관계다. 송미령의 아버지 <찰리 송>은 상해 감리교 목사 출신의 부유한 사업가였다. 세 딸을 모두 미국 유학을 시켜 재원으로 키움은 물론, 세딸 모두가 중국 근대사를 바꾸는 촉매 역할을 한다. 첫째딸 <송애령>는 은행가 출신의 중국 최고 부자에게 시집가서, <돈을 사랑한 여인>이 되고, 둘째딸 <송경령>은 손문의 부인으로, <중국을 사랑한 여인>으로 불리며, 1959년부터 1975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제2,3대 부주석을 역임했다. 세째딸 송미령은 장개석의 아내이자 장학량의 연인으로써, <권력을 사랑한 여인>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우며, 1966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임시정부 지원 공로)을 수여받기도 한다.

만주사변 때 이미 장학량은 아편중독 상태였으며 북경에 머물고 있었다. 장개석은 <사랑의 질투>에 눈이 멀어 동북3성의 장학량 세력을 없앨려고 국민당 군대에게 일본 <관동군과의 무저항 지시>를 내렸다는 일설이 있다. 그래서 일본은 1932년3월1일 손쉽게 <만주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만약 막강한 군사력과 자금을 갖고 있던 봉천군벌 장학량과 국민당의 장개석이 <1차국공내전>으로 중국 공산당 모택동과 싸우지 않고, 힘을 합하여 일본 관동군과 싸웠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그랬다면 중국의 역사는 물론, 한국의 식민지 역사도 종말을 고하고 동북아시아 사후 세계는 엄청 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에 필연과 우연은 존재하지만, <만약>이라는 가설은 없는 것이다.

반면, 1931년 11월 <마오쩌둥 (모택동)>은 <주덕>과 힘을 합하여 장시성에서 해방구를 중심으로 <중화소비에트 공화국>을 선언하고 주석이 되고, 부주석은 <장국태 (장궈타오)> 가 된다. 마오쩌둥의 공산당 <홍군>은 토지개혁으로 농민층 민심을 확보하고 국민당과 게릴라 내전을 계속한다. 홍군은 4차례 국민당 토벌전에서 승리하면서 60만대군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막강한 군사력과 첨단 군사 장비를 앞세운 1백만 <국민당> 대군은 <5차 초공전>을 개시하여 공산당 홍군을 박살내고 모택동의 <해방구>는 대부분 붕괴된다. 1933년 모택동에게 등을 돌린 장궈타오는 십만명의 제4방면군을 이끌고 자신의 쓰촨성(사천성) 북부로 이동하여 쓰촨성 소비에트공화국을 설립하지만, 국민당군에 의해 전멸당하고, 1946년 홍콩으로 망명한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29 < 부끄러운 조선> (10-28-2016)

부끄러운 조선이다. 내 조국 조선의 지도자는 어찌 하나같이 이모양인가?  북조선의 김일성은 대대손손 해먹겠다고 유사이래 독재국가를 만들어, 귀때기 새파란 철부지, 광폭자 김정은에게 대통을 잇게 하여 온 인민들을 고통의 나락으로 빠지게 했다. 그런데 남조선은 군사독재와 유신 철권통치 <박정희>의 딸 <박근혜>를 <측은지심>에 대통령으로 뽑았더니, <최순실>이라는 무당인지, 잡년인지에게 국정을 농락케 해서 온 나라를 수치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박근혜는 불통, 불통 하더니 <폐쇄된 환경>에서 살아온 <폐쇄 인간>인가? 지성과 이성을 겸비한 한국의 엘리트 관료들은 진정 <내시>들인가? 조선의 대쪽같은 <선비정신>은 어디에다  팔아 먹었는가? 고려 공민왕 때 <신돈>이라는 승려가 온나라를 쑥대밭을 만들고, 고종 때는 <명성왕후> 중전 민씨가 <무당>에게 미쳐 온나라 가산을 탕진하고, 이명박은 <기독교> 세력을 등에 엎고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민중을 현혹하더니, 박근혜는 무엇에 홀린 것인가? 나라는 두동강이가 난 채로 서로 핵전쟁을 하자고 미쳐 날뛰고, 북조선은 독재국가, 남조선은 부정부패, 아부와 독선, 거짓말이 난무하는 비정상 국가라면? 이미 정의가 사라진 조선이다. 이건 국가가 아니다. 통탄할 일이고 쪽팔리는 일이고 부끄러운 일이다. 일본놈들이 40년 동안 심어놓은 출세 제일주의, 황금만능주의의 <식민사관> 때문인가? 결국 민중의 잘못이다. 민중들이 무지해서 그런 지도자들을 뽑았고 선택한 <자업자득>이라고 할 밖에.. 세계 역사에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

다시 근대 역사 이야기로 돌아가자. 조선의 식민지시대와 해방이후 한국분단의 비극을 알기 위해서는, 아니 작금의 사드배치 등, 향후 미,중,일, 러시아, 남한, 북한 동아시아 6자 세력 다툼과 균형을 알기 위해서는 중국과 일본의 근대, 현대 혁명사를 필히 알아야 한다. 언제까지 미국을 혈맹이니, 우방이니 전적으로 의지한채, 자국의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맡겨놓는 얼빠진 작태를 할 것인가? 아직도 식민지인가? 핵개발도 할 수 없는 나라가 <핵개발>을 운운하고, <전시작전권>도 없는 나라가 <선제타격> 운운한다. 남한이 핵개발 하겠다고 선언하는 그 순간부터 미국과 세계 열강들은 북한 이상의 보복조치를 취할 것이다.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가, 미국의 <핵우산> 속에서 연명하는 나라가, <한미핵조약>에 따라 핵 우라늄 원료조차 만들 수 없는 나라가 <핵개발>?? <선제타격>??  생각이 없는건지, 미친척 하는건지..

한반도는 임진왜란 5백년전이나 지금이나 향후에도 대대손손 4대 강대국 (미,일,중,러) 눈치를 잘 살펴서 <균세 (均勢)>를 이루어야 하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  <자강 (自强)> 해야만 술집 작부나 창녀 신세를 벗어날 수 있다. 그러기 이전까지는 모든게 허세고 가소로운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정신병자 같은 북한이지만 그래도 내 형제고 내 피붙치다.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고,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미우나 고우나 내 형제를 내 스스로가  앞장서서 돌로 쳐죽일 천하의 몹쓸 놈이라고 동네방네 외고 다니면 국제사회 이웃들은 우리보고 뭐라 할 것인가?  아무리 잘 살면 뭐하고 아무리 좋은 학벌에 출세하면 뭐하나?  천하의 <잡놈>일 뿐이다. 북한은 원수도 아니고 모르는 남남도 아니고, 내 형제고 내 민족이다. 내 친형제를 사랑하고 도와주기는 커녕, 동네 깡패들을 동원해 칼로 찔러 죽이겠다고 날뛴다면 어느 종교가 어느 신이 잘 했다고 칭찬하겠는가? 참으로 몹쓸 민족이고 쪽 팔리는 민족이다.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까지 <종북>이니 <좌파 빨갱이>니 하는 나라가 어디 있으며, 같은 민족이 분단되어 서로 원쑤라고 전쟁하자는 나라가 세상천지 어디 있는가? 북한은 <정신병자>인 <독재자>를 잘못 만나 죽도록 고생하는 불쌍한 내 형제일 뿐이다. 북한은 전면전쟁을 일으킬 수 없는 나라다. 더구나 핵전쟁은 불가능하다. 김정은과 미친 몇놈만 죽이면 된다. 북한은 스스로 무너진다. 내부 쿠데타로 무너지게 되어있다. 또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개성공단> 패쇄라니.. 북한을 선제타격하면 남한은 멀쩡하겠는가? 전쟁이 한번 해보고 아니면 말고 할 수 있는 동네 꼬마들 가벼운 놀이인가? 세계 전쟁사에 유래가 없는, 같은 형제끼리 죽고 죽이는, 수백만명의 민족을 살해한 전쟁을 한번 했으면 되었지, 그걸 또 하자는 얘긴인가? 전면전은 말고 국지전으로? 전쟁이 선택인가? 정치하는 놈들이나 아부하며 빌붙어 먹고 사는 놈들이나 머리 속에 똥만 들어차서 생각이라는게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불과 1백년도 지나지 않은 얼마 전까지 40년동안 일본의 식민지 노예생활 하던 나라고 민족이다. 내 역사를 다시 되돌아보고 현실을 직시하자.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근대사도 다시공부하자. 그리고 정신 바짝 차리자.

중국 근대사는 아편전쟁 (1840~1842), 태평천국운동 (1850~1864년 – 근대 최초 농민운동, 민족운동, 남녀 평등 운동. 청을 몰아내고 이상국가 건설 운동임), 1870년대 시작한 양무운동 (자강운동 –서양의 과학, 기술을 도입하여 국력을 강화하지는 사회개혁운동), 의화단 운동(1899 ~1901년 – 청일전쟁 패배에 따른 배상금, 흉작 등으로 반외세, 반기독교 운동, 반제국주의 농민투쟁 운동임. 서태후의 서구열강에 선전포고와 실패로 청나라 세력 약화)이 배경이 된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28 < 김구와 임시정부> (10-21-2016)

 1925년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하자, 구미 독립자금을 임정에 지원하는 것을 중지해 버린다. 1927년 12월 김구가 국무령에 선출되지만, 임시정부는 극심한 재정난으로 파산 직전에 이르게 된다. 일천명이 넘던 독립운동가들은 뿔뿔히 흩어지고 수십명만 남게 된다. 이광수는 친일파로 변절하고 암살단 등이 조직된다. 김구는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세계 곳곳 한인 교포 사회에 호소한다.

1931년 만주사변 (1931.09.18 ~ 1932.02.18)이 터진다. 일본은 16세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임진왜란 때부터 시작하여 일본 개화기 최고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에>에 이르러 <대동아 공영권>에 집착한다. 만주의 중요성은 일본이 아시아를 모두 먹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병참기지 역할을 하는 <만주 식민지>가 기초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점령하고 세운 국가가 괴뢰정부인, 마지막 황제의 <만주국>이다. 이것은 15년 <중일전쟁>의 시작이기도 하다. 자세한 것은 <중국 독립운동사>에서 다루자.  

결국 김구는 1931년 <한인 애국단>이라는 비밀 조직을 만들어 무장투쟁을 하게 된다. 가장 강력한 항일투쟁 조직은 1919년 11월 만주 지린성에서 약산 김원봉 선생이 만든 <의열단>이다. 창단 단원들은 <신흥무관학교> 출신 13명이었으며, 이들은 1945년 광복까지 단 1명의 배신자도 없었다. 시인 이육사도 의열단  단원이었다. 신채호 선생이 1923년1월에 발표한 <조선혁명선언 (의열단 선언)>은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오로지 민중의 폭력혁명에 의한 일제타도라는 전술을 내걸었다. 그로 부터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파사건, 상해 부두 다나카 대장 암살 사건, 김상옥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사건, 나석주 동양척식회사 폭탄투척, 김지섭 일본 황성 이중교 폭탄투척 등.. 수많은 무력 투쟁을 실시한다. 님 웨일스의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 (본명 장지락)도 의열단 단원이다. 최근 영화 <암살>, <밀정> 등에서 재조명 받고 있는데, 김원봉 선생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좌파 빨갱이로 몰아 잘못 평가하는 것은 민족역사의 비극이다.

김구의 <한인애국단> 소속으로 투쟁한 대표적 의거가 1931년1월8일 <이봉창> 의사가 도쿄에서 일으킨 <일본 천왕 암살 미수사건>과, 1931년 4월9일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승전기념 행사장에서 폭탄투척을 한 <상하이 폭탄테러 사건>이다. 이 사건에 깊은 감명을 받은  중국 국민당 장제스는 1933년 김구 선생과 <항일 전선협력>문서에 합의하고, 해방될 때까지 <상해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한다. 실제로 장개석 부인 송미령은 중국돈10만원을 기부한 기록이 있다.

이를 계기로 1940년 임시정부는 김구 (한국독립당 )를 주석 (주석 기간 : 1940.03 ~ 1947.03.03) 으로 추대하고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며, 1941년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른다. 대한민국 육군의 모태인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17일 사령관 지청천을 중심으로 30여명으로 미약하게 결성된다. 그러다가 <의혈단>의 후신인 <조선의용군>이 내부 분열을 하면서, 공산주의자 <김두봉>이 이끄는 화북지역 조선의용군 (전체 3분의 2병력)은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에 소속되어 <2차 중국 국공내전>에 참여한다. 이 부대는 중국공산당이 통일하여1949년 10월1일에 지금의 중국인민공화국을 건국하는데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며, 6.25한국전쟁 때 북한군 정규군 주력부대 역할을 한다.

반면에 사회주의자 <김원봉>이 이끄는 3분의 1 병력의 조선의용군은 상해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과 합류한다. 그래서 겨우 병력이 1천명 가량 된다. 하지만 김원봉 또한 김구의 임정 지시를 받지 않는 독자적 행동을 한다. 하지만 김구는 포기하지 않고 1945년 미국OSS 특수부대 (미국CIA 전신)과 함께 광복군 50명의 특수요원을 선발하여 <서울 진공작전>을 준비한다. 이 작전은 미 잠수함을 이용해 서울에 침투해 일본군을 격파하는 특수작전이었는데, 준비 도중인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항복선언을 하게 된다. 이것은 국제법상 굉장히 중요한 팩트인데, 만약 일본이 항복하기 이전에 <임정 광복군>이 조선땅에서 연합군과 함께 일본군과 전쟁을 했다면 독립자치권을 요구할 권리를 갖게 된다. 하지만 일본이 스스로 항복을 한 상태이므로 식민지인 조선은 점령국가인 미국과 소련의 간섭, 즉 <신탁통치>를 받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김구 선생은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전해 듣고는 대성통곡을 했다는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는 항상 법통논란에 휩싸일만큼 세력이 약했다. 공산주의자 박헌영은 임정을 망국인사들이 권력 싸움이나 하던 패권주의 <망국정부>라 하고, 여운형은 30년간 해외에서 지리멸렬, 유야무야하던 조직으로 임시정부 자체를 폄하한다. 상해 임시정부보다 더 규모가 큰 임시정부가 만주, 연해주, 한성, 미주에도 있다는 것이다. 정녕 한민족은 전체가 하나로 뭉치고 단결하지 못하는 민족성인가?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 정체성은 버젓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친일 꼴통들은 건국97년 (1919년 4월13일 임정 건국일)으로 하지 않고, 건국 68년 (1948년8월15일) 이라고 한다. 그럴러면 대한민국 헌법 전문을 고치던가?  아무튼 미국과 영국은 해방 이후에도 <임시정부>를 한국의 공식 정부로 승인하지 않으며, 소련은 1944년 인정한다. 한국인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는 <임시정부>인데 뭘..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27 < 1920년대 독립운동사 > (10-14-2016)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데오르기> 이념투쟁 시대 이기도 했다. 지금은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한 탈냉전시대이지만, 그 당시는 왕권, 군주제도가 붕괴되고 신흥 자본주의와 국제 공산당이 막 시작한 시대이었으므로 <이념의 혼란시대> 였다고 할 수 있다. 임정 내부에서도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식 민주주의, 국무총리 이동휘는 혁명적 사회주의, 사회주의 내에서도 여운형, 안병찬은 이르쿠츠파, 이동휘는 상하이파, 김준연은 ML파로 나뉘어진다.

1920년12월8일 임시정부 대통령에 취임하기 위해 상해에 입국한 이승만은 <구민위원회>를 설치하여 독립지원 자금을 <외교우선> 명분으로 개인이 유용함과 동시에, 임시정부는 국제 연맹의 <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고 미국에 청원서를 보낸다.   또한 1921년 국무총리 이동휘는 <고려공산당>을 창립하고 국제공산당 코민테른으로 부터 2백만불을 받지만, 일부만 임시정부에 주고 나머지는 유용한다. 이것이 <코민테른 자금 유용사건>이다. 김구와 안창호는 양쪽 모두를 반대한다. 이에 이승만은 미국으로 출국하고, 안창호, 김규식은 내각에서 사퇴한다. 김구는 이동휘 부하 김립을 암살케 하고, 이동휘, 한형권 등 공산주의자들을 임정에서 추방한다.

반면에 1920년6월7일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하고, 7월11일 노두구에서 일본 간도영사관을 습격하여 승리한다. 마침내 1920년 10월21일부터 26일까지 김좌진, 이범석 장군의 <북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대한신민당 독립군> 등 연합부대 총 1,950명의 독립군이 일본 육군과 6일간에 걸쳐 10여 차례 전투를 치룬다. 이것이 그 유명한 <청산리 전투>다. 청산리는 북간도 연길과 용정에서 백두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산악지대다. 일본군 전사자 1,200명, 부상자 3,300명, 반면에 독립군 전사자 130명, 부상, 실종자 290명!! 일본군의 대참패였으며, 독립군의 대승리였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독립군들이 무슨 전투에서 승리했다 함은, 일본군을 몇명 죽였다 함은, 그보다 몇백배, 몇천배 더 많은 만주지역 조선동포들이 일본군의 보복으로 죽었다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그 사례가 <청산리 전투>이후의 <간도 대학살>이다. 일본군들은 1만명 이상의 조선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2,500채 민가와 30여개 학교를 불질러 버렸다. 척박한 만주땅에서 독립전쟁을 한다는 것은 전투식량과 은신처와 전투자금을 지원한 <만주동포>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심지어 그들은 목숨까지 잃었다. 그런데 그 후손들을 조선족이니, 연변족이니 하대하면 되겠는가?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있다. 1921년 6월27일 발생한 <자유시 참변사건>이다. 표면적으로는 러시아군이 사할린 조선의용대를 무장해제 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지만, 실제로는 <고려공산당> 독립군 통치권을 둘러싼, <이르쿠츠크파 -대한국민의회 지지>와 <상하이파 -상해임시정부 지지>와의 권력 분쟁 때문이다. 배경은 청산리 전투 등에서 참패한 일본군들이 만주지역 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단행하자, 독립군들은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이때 1920년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통합된 독립군 조직은 <북로군정서- 서일,김좌진>, <한국독립군-지청천>, <대한독립군-홍범도>,외 <간도국민회, 대한신민회, 의군부, 광복단, 혈성단, 도독부, 야단, 대한정의군정사, 군비단> 총 12개 독립군 부대였다. 총 병력은 3천5백명이었다. 분산되어 있던 독립군 부대를 <대한독립군단>으로 규합할 목적으로 자유시에 모였기에 많은 독립군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1백명 이상의 독립군이 사망하고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으며, 대한독립군단을 만든 총재 <서일>은 자결했다. 이 배후에는 일본군이 캄차카반도 연안일대의  어업권을 러시아 백군에게 준다는 조건하에, 조선독립군 내부 분열을 조장한 획책에 말려든 것이다. 러시아는 내전 중이었으며, 볼세비키 붉은 군대에 대항하는 반혁명파 백군을 일본이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만주, 연해주 지역의 조선 독립군의 숫자와  독립투쟁 의지는 급격히 저하되며, 대부분이 <상하이파> 공산당으로 들어간다. 결국 독립군 내부 분쟁으로 아무르 강물은 핏빛으로 붉은 울음을 운다.

또한 1923년1월3일부터 6월까지 신채호 선생의 주도로 전국 각지 (조선 국내, 상해, 만주, 북경, 간도, 연해주, 미주)지역에서 135개 독립운동단체, 158명의 대표가 모인다. 그리고  125명의 대표가 확정되는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한다. 회의 배경은 <상해 임시정부>의 대표성 결정, 이념과 지역 갈등 문제 해결이다. 즉 이념은 <외교독립론>의 이승만계, <무장독립론>의 박용만계, <실력양성론>의 안창호계로 대립되고, 지역은 <기호파>와 <서북파>로 나뉘었다. 여기다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서>건이 폭로된 것이다. 또한 <한성 임시정부>의 승인건도 중요 이슈였다. 하지만 <국민대표회의>, 이 역시 <창조파>와 <개조파> 두개 파벌로 나뉘어진다. 북경과 시베리아에 기반을 둔 <고려 공산당>의 <창조파>는 기존의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임시정부를 만들어 무장투쟁을 하자는  것이고, 임시정부 정통성을 중시하는 여운형, 안창호, 김동삼 등 <개조파>는 기존의 임시정부를 인정 유지하고, 부분적으로 개조해나가자는 것이었다. 조선아.. 조선아.. 어찌하란 말이냐??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26 < 이승만과 임시정부> (10-07-2016)

작금의 한국인들은 <중국동포>들을 <조선족>이니, <연변족>이니 하면서 하대한다. <재미동포>를 대하는 것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하지만 <중국동포> 그분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조선의 독립운동사도, 임시정부도, 오늘날의 대한민국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분들에게 부끄러워 해야하고 빚진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경술국치를 거치면서 많은 선각자와 지식층과 백성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연해주, 서간도, 북간도, 연변, 산둥 지역으로 이주했다. 만주에만 50만명, 동북지역에만 1백만명의 조선 동포들이 삶의 터전을 일구며 살았다. 그들이 독립운동의 주축이 되고 또 희생양이 되었다. 윤동주 시인의 <동주>라는 영화를 추천한다.

1919년 <3.1 독립선언>을 계기로, 1911년 중국 신해혁명 때 쑨원 (孫文)의 삼민주의 (三民主義 – 民族主義, 民權主義, 民生主義- 는 중화민국과 중국 공산당 헌법의 기초가 됨)에 영향을 받아서 중국 땅에 조선의 <망명정부>가 탄생한다. 1919년 4월13일 여운형의 <신한청년당> 9인이 주축이 되고, 이동녕, 이시영, 신채호 등의 만주, 연해주 독립지사들과 조선에서 파견된 현순, 손정도를 포함하여 총 29명의 궐기인으로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또한 같은해 1919년 9월11일 <대한만국 임시헌법>이 만들어지고, 의원내각제를 기반으로 한다. 국무총리에 이승만 (나중에 본인이 대통령으로 호칭을 바꿈),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군무총장에 이동휘 등이 임명된다. 물론 연해주에도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가 있었고, 서울에도 <한성 임시정부>가 있었다.

어쨌던, 일제 식민지 시대의 1920년부터 1948년 까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변천사를 보면, 각종 이념이 대립되고 여러 파벌로 나뉘어져 와해되는 과정을 알 수 있다. 왜 한국인들은 식민지 시대에서 조차 뭉치지 못하고 서로 비방하고 뿔뿔히 흩어져야 했는가? 각 개개인은 훌륭한 독립지사고, 민족의 선생인데 모이기만 하면 싸우고 헐뜯는가? 오호 통재라! 오호 애재라!!. 아니 임진왜란 때 부터 현재 박근혜 대통령까지 왜 내 조국 조선 땅에는 제대로 된 지도자가 한명도 없었을까? 나같은 백성들의 무지 때문이다..

미국 OSS 보고서에 의하면, 1920년대  <임시정부>의 <분파주의>가 얼마나 심했는지, <임시정부>에는 최소 27개 파벌이 존재했다고 한다. 따라서 <임시정부>는 한국 정치를 주도할 능력이 없다로 평가했다. 또한 <이승만>이라는 개인 평가는 “권력욕과 사리사욕이 강하고 권모술수가 능해, 국가 지도자로 부적격한 자”라고 평가한  미국무성 문건이 최근 공개된 바 있다. 신채호 선생은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이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은 놈”이라고 평한다. 하지만  왜 이승만을 <임시정부>와 <제1 공화국> 대통령으로 두번씩이나 뽑았을까? 한국인들의 최대 약점인 학연, 지연, 혈연 컴플렉스 때문이다. 첫째는 <학연>이다. 이승만이 미국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 대학 박사학위 소지자라는 것에 임시정부 요인들도 속았고, 백성들도 속았다. 그는 2년만에 석사, 박사 학위를 모두 받았는데, 그는 명석한 두뇌의 천재라서가 아니라, 모사꾼과 같은 뛰어난 협상력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이들 대학과 딜을 한 것이다. 하여튼 한국인들은 <학벌>에 약하다. 그러니 지금도 명문대학과 사법고시 출신들이 다해 먹는 나라가 된 것이다. 둘째는 <지연>이다. <임시정부>는 크게 이승만의 <기호파 – 서울, 경기, 충청 지역 중심)와 안창호의 <서북파 – 평양, 평안도>로 나뉜다. 이미 전라, 경상 지역은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때 뿌리채 뽑힌 상태이고, 나머지는 만주로 이주한 상태다. 그 유명한 <우리가 남이가?>.. 세째는 기독교라는 <종파주의>다. 같은 종교를 믿는다면 악마도 형제요 자매가 된다. 기독교인들이 뽑아준 이명박 전 대통령은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고 자랑한다. 국가가 자기 소유물인가? 주고 말고 하게? 국회의원 3분의 2가 기독교 신자라고 우긴다. 예수에 대해 제대로 알기나 할까? 목사들이 정치권에 나댄다. 언제부터 대한민국이 기독교 국가가 되었나? 천박하고도 웃기는 짓거리다..  <이승만> 인물평전에 대해서 본 칼럼에서는 간단히 다루자.

<이승만>을 <하와이 깡패, 하와이 마피아>라고 부르는 이유는 박용만, 안창호의 <하와이 국민회>를 무력으로 강제 인수했기 때문이다. 또한 <국민회>자금으로 부동산 투기를 하고, 국민회 건물을 불법 매각하고, 여자들과의 사치스런 생활로 샌프란시스코 검찰에게 <불륜 구속>을 당하기도 한다. 이승만의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기간은 1919년 부터 1925년 탄핵될 때 까지 6년 동안이지만, <임시정부>에 체류한 기간은 총 6개월이 되지 않는다. 그는 미국에 있었다. 또한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의 <위임통치>를 받았야 한다는 청원서를 작성한 것이 탄로가 나서, 임시정부로 부터  <탄핵>받게 된다. 또한 이 당시 <임시정부>의 독립 자금지원의 대부분은 미국 한인들이 모아주는 <구미위원회>인데, 이승만이 구미위원회를 장악하여 <임시정부>에 공급되는 독립자금 지원을 일체 중단해 버린다. 이유는 조선의 독립은 무력투쟁이 아니라 미국과의 <외교>협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피같은 독립자금들을 임시정부에는 한푼도 보내지 않고 개인일탈에 유용하고 만다. 이러니 <임시정부>는 건물 월세도 제때 못내는 파산 직전까지 이르게 된다. 어릴 때 김구 선생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보면 선생의 아내 (최준례 여사)가 길거리에 버려진 배추 잎파리들을 주워 시레기 죽을 끓여 상을 차리는 장면이 기억난다. 김구 선생처럼 지도자는 항상 변함없이 청렴해야 하고 정의로워야 한다. 아닌 놈은 결코 아니다. !!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25 < 3.1 독립운동사> (09-30-2016)

<경술국치>후 한반도 내에서는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을 핑계로 농민들의 강제 토지수탈과 <남조선 의병탄압 사건>으로 조선 내부의 독립운동이 어렵게 되자 해외로, 특히 간도와 연해주로 많은 조선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한다. 연해주에는 이범윤의 <권업회 (1912년)>와 이상설, 이동휘의 <대한광복군- 최초 조선 망명정부 (1914년)>, 북간도에는 의병장 출신의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서간도에는 신민회가 주축이 된 <경학사><부민단>, 미주 지역에는 안창호, 박용만의 <대한인 국민회>등이 결성된다. 식민지 시대를 살면서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민중에 대한 교육, 독립군대, 독립 자금, 조직운영 등등, 임시국가 운영에 필요한 제반 요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독립 운동가는 말한다. “누군가는 뒤에 오는 세대를 위해 씨를 뿌려야 한다. 또 누군가는 미래를 위해 거름이 되어야 한다. 몸은 비록 죽었어도 희생자의 정신은 그렇게 역사와 함께 부활하는 것이다.”

조선독립 운동사는 <3.1 독립운동>을 기점으로 확연히 구분된다. <3.1 운동>의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몽향 <여운형 (1886~1947년)> 선생을 알아야 하지만, 우리 세대는 김구, 안창호, 이상설, 김규식, 박헌영,등.. 선생들에 비해 그를 잘 알지 못한다. 그는 <중도 개혁파> 휴머니스트였다.

여운형은 기독교인으로써 배제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민중교회인 <숭동교회>를 만들어 7년간 전도사로 사역한다. 1907년 도산 안창호 선생의 연설을 듣고 감동하여 독립운동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일제 강점기가 되자 조선 기독교가 친일보수 성향을 띄게 되는 것을 우려해 중국으로 간다. 중국은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여 서태후의 청나라가 붕괴되고, 막강한 북양 군벌 세력을 갖고 있던 위안스카이 (원세계)의 과도 정부가 서게 된다. 여운형은 1914년 선교사 언더우드의 추천으로 집안 재산을 모두 정리하고 중국 난징의 금륭대학으로 유학을 간다. 1917년에는 중국 국민당 원수 쑨원(손문 –삼민주의>를 만나 교제한다.

그곳에서 <1차세계대전> 후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감동을 받아 <3.1 만세운동>을 기획하게 된다.  그는 1918년 <신한 청년당>을 조직하여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고, <장덕수>를 조선에 파견하여 독립 조직원과 독립자금을 모집케 한다. 또한 <이광수>를 일본 동경에 파견하여 1919년 <2.8 독립선언서>를 기초케 한다. 여운형 자신은 중국 길림성으로 가서 <무오독립선언서 -1919년 2월1일 신채호, 조소양 등 만주, 러시아 지역 독립운동가 39인>의 촉매 역할을 하고, 간도의 <김약연, 정재면>과 만나 조선 독립을 상의하고, 연해주의 <박은식, 이동녕, 조완구>등을 만나 연해주 <대한국민의회>를 탄생케 한다. 그는 1922년 소련의 서기장 <레닌>을 만나 “조선은 공산주의 혁명을 추진할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 운동에 주력해야 한다.”라는 충고에 적극 동참한다. 여운형 선생은 민족주의자다. 조선의 독립은 공산주의, 민주주의, 좌익, 우익, 친미파, 친일파, 친중파 등으로 나뉘어져서는 안되며, 조선에는 모든 계파, 정파를 끌어안는 <단독 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도 개혁파>로 일관되게 행동하다가 1947년4월3일 서울에서 암살당한다. 상해 임시정부의 김구, 스탈린 공산당의 김일성, 남로당의 박헌영, 미군정의 이승만 등, 이데오르기의 이분법자 모두에게 배격당한 것이다. 그가 진정한 조선의 혁명가였는지 문헌들을 통해 여러분 스스로가 재평가 하여야 한다.

<3.1운동>은 이렇게 중국 만주, 연해주, 일본, 미국, 조선 각지에서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독립운동이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3.1 독립만세 사건- 1919년 3월1일 33인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서 낭독>는 그 중 일부이다. 그 당시 조선 전체 인구가 1,678만명이었는데, 3월1일부터 4월30일 까지 60일 동안 만세운동에 참가한 집회인수가 106만명, 사망자가 7,509명, 구속된 자가 4만7천명, 만세 운동 횟수가 1,214회 이었다고 하니, 전 조선인들과 천도교, 기독교, 불교의 모든 종교가 혼연일체가 된 그야말로 전국적인 <비폭력 민중봉기>였던 것이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인 이유는 1919년 3월3일 <고종 장례식>에 참삭하기 위해 전국에서 백성들이 모였기 때문이기도 한다. 고종은 1919년1월21일 사망했는데 <고종 독살설>이 유력하다. 그 전날 이완용이 당직을 섰고, 고종 시신에 음료에 의한 독살 흔적이 유력하며, 해당 궁녀 2명이 피살된 정황이다.  그런데 수많은 3.1독립만세 희생자들 중에서 우리 세대에게는 유독 <유관순 누나>가 왜 뇌리에 박혀 있는걸까?  우리는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이화학당>의 친일파 몇 교수들이 해방후 그들의 친일 행적을 감추기 위해 이대 동문의 유관순 열사를 과대 포장했다는 설이다. 글쎄?

<3.1독립 만세사건>은 상해와 만주와 연해주, 미주에 분산되어 있던 독립조직들이 합심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고, 중국인들의 신민주주의 혁명인 <5.4 운동 -1919년 5월4일>에 결정적 영향을 주게 되며, 인도, 베트남, 그리고 세계인들에게 조선의 독립의지를 알리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무지한 무산계급을 동원하는 <무저항 투쟁>이나 <계몽주의>는 독립투쟁의 한계가 있으며, <무력항쟁>만이 조선의 독립을 앞당긴다는 결론을 얻는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24 <1차세계대전> (09-23-2016)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 만4년만에 <제1차 세계대전> (1914년7월28일 ~1918년11월11일)이 발발한다. 이 전쟁은 식민지 제국주의들의 전쟁이다. 산업혁명과 과학 기술의 발달로 유럽의 경제력은 급성장했으며, 생산과 소비의 극대화를 위해 유럽 각국은 세계를 식민지화 한 것이다. 발발은 대영제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의 삼국협상을 기반으로 한 <연합군>과,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의 <동맹군> 간의 전쟁으로 시작된다. 오스트리아 왕위 후계자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하자, 7월28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를 침공하고, 독일은 룩셈부르크, 벨기에를 침공하고 프랑스로 진격하면서,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 한다. 이에 독일의 진격이 멈추면서 <서부전선>은 1917년까지 3년간의 지루하고도 참혹한 <참호전>이 계속된다. 학창시절 읽었던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라는 책과 영화 속의 참호전 비극은 아직도 기억에 어렴풋하다. <동부전선>은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지만, 독일의 반격으로 실패한다. 1914년 11월 오스만 제국이 참여하면서 전선은 메소포타미아, 시나이 반도까지 확산된다.

러시아 정부는 1917년 <2월 혁명>으로 차르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임시정부가 들어서지만 혼란만 가중된다. 이에 레닌이 이끈 <볼셰비키 공산당>이 <10월 혁명>으로 11월에 정권을 장악한다. 1918년 3월 러시아와 동맹군간의 조약이 체결되어 핀란드, 발트3국, 폴란드와 우크라니아 등 광대한 영토가 동맹군에 할양된다. 1918년 11월 오스트리아가 휴전에 합의하고, 독일은 <11월 혁명>이후 휴전에 합의함으로써 연합군의 승리로 1차세계대전은 종료된다. 전쟁후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 등 4개 제국이 해체되면서 많은 영토를 잃게되고, 중동아시아의 새로운 국가들이 탄생한다.

전쟁 배경은 유럽 강대국 간의 힘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1815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간의 신성동맹을 맺는다. 식민지 쟁탈전에 뒤늦게 뛰어든 독일은 1871년 <보불전쟁>에서 승리하자, 독일 산업 경제가 급성장하게 된다. 독일과 영-불이 식민지 쟁탈을 벌리는 것은 당연한 인간의 욕망이다. 이에 영국과 독일은 군비경쟁을 하게 되며, 독일의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러시아 두나라간의 양면전쟁을 피하기 위해 1873년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삼제동맹>을 체결한다. 또한 독일, 오스트리아의 <범게르만주의>와 러시아계의 <범슬라브주의>는 발칸반도에서 충돌한다. 발칸반도의 오스만제국의 힘은 약화되는 반면, 러시아의 영향력은 증대하게 된다. 1878년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를 점령하니, 범슬라브주의 동방정교회의 러시아 제국을 분노케 한다. 이에 러시아는 삼국동맹에서 탈피하여 연합군과 동맹을 맺는다. 1892년 프랑스-러시아 동맹이 체결되고, 1904년 영국-프랑스 협정이, 1907년에는 영국-러시아 우호조약이 체결된다. 이후 유럽의 화약고인 발칸반도에서 1912년 부터 1913년까지 오스만제국과 발칸동맹 사이에 <발칸전쟁>이 발발한다.

또한 유럽제국들의 식민지 지역에서도 전쟁은 발생한다. 아시아 태평양  섬지역은 독일 식민지에서 일본과 미국의 식민지로 넘어간다. 또한 일본은 중국 칭다오(청도)를 점령하기 위해 1914년 8월23일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일본은 연합군 참전 댓가로 태평양 오세아니아 반도, 중국의 만주, 산동반도, 내몽골에 대한 반영구적 이권을 요구한다. 이에 대한 반발로 중국은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창립한다. 아프리카의 독일 식민지도 연합군 수중으로 넘어간다. 영국 식민지인 인도는 영국을 지원하면 인도가 자치권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서부전선에 14만명, 중동전선에 70만명의 인도군을 파병하지만, 전쟁후 영국의 인도 자치 약속이 지켜지지 않차, 간디가 주도하는 <인도 무저항 독립운동>이 일어난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계속 중립적 입장을 표명하며 전쟁에 참가하지 않다가 전쟁 종료 1년전인 1917년 4월6일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유는 독일이 멕시코에게 미국을 공격하면 전쟁후 미국으로 부터 빼앗긴 멕시코 땅을 되찾아 주겠다는 비밀전문이 탄로났다는 설도 있고, 영국과 프랑스에 막대한 채권을 가지고 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연합군이 전쟁에서 패할 경우 빌려준 막대한 채권을 받지 못할 것을 우려해, 미국의 참전을 종용했다는 설도 있다. 미국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으로 초강대국 지위에 올랐으나, 미국이 만든 <국제연맹> 참여를 스스로 거부함으로써, 국제적으로 <고립주의>가 되는 자충수를 두게 되며, 이는 미국 <경제 대공황>의 계기가 된다. 한편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 민족의 운명은 민족 스스로가 해결한다.>는 조선의 <3.1 독립운동>, 인도의 <무저항 독립운동>의 촉진제가 된다.

1차세계대전은 제국주의의 몰락인 동시에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출발이기도 하다. 또한 공산주의와의 이데오르기 이념 전쟁의 시작이다. 패전후 <독일 제국>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하여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며, 폴란드 독립, 독일의 영토인 알자스-로렌 땅이 프랑스에 병합, 아프리카의 르완다, 탄자니아, 카메룬, 태평양 식민지를 연합군에 빼앗긴다. 또한 독일의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연합군의 부당한 요구는 <제2차 세계대전>의 빌미가 된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폴란드 땅 일부를 이탈리아에 할양하고, 유고스라비아 왕국 건설 (크로아티아, 체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가 연합왕국을 건설함), 헝가리 독립 등이다. <러시아 제국>은 발트3국, 우크라이나, 핀란드, 폴란드가 독립한다. <오스만 제국>은 터키 공화국이 탄생하고, 요르단, 키프로스, 이라크가  영국 통치령이 되고, 시리아, 레바논, 아르메니아가 프랑스 통치령이 된다.

이 전쟁으로 연합군은 4천3백만명, 동맹군은 2천5백만명이 참여하여, 총 38,890,500명의 사상자와 9,901,000명의 전사자, 그리고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상 최악의 전쟁이다. 하지만, 일본은 고작 8십만명의 참전과 300명의 전사자만으로 생색만 내고 아시아 이권을 차지하는 실리를 얻게 된다. 역시 쪽발이데스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23 <1910년대 독립운동사> (09-16-2016)

선지자 예레미아는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모두 평안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라고 하나님에게 원망하듯 질문한다 (예레미아 12장 1절). ‘인간 세상 식자(識者) 노릇’이 어려운 선비들은 죽음을 택하거나 독립 운동가가 되고, 식자 노릇을 기회로 삼은 지식층들은 친일파로 변절한다.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은 <경술국치>날,  독약을 마시고 자식들을 불러서 유언을 한다. “내가 죽어야 할 의무는 없지만, 나라가 선비를 기른지 5백년에, 나라가 망한 날, 한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어서야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는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식자 노릇을 대행했다.

목숨을 걸고 싸운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에 내 나라 내 조국이 존재하는 이유다. 앞으로 거론되는 많은 독립운동가 (등록된 국가 독립유공자 1만5천명)들, 그 중에서도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352명의 한분 한분을 본 칼럼에서 다룰 수 없음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적어도 역사적 인물을 감히 존경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분들의 생애 정도는 제대로 알아야 한다. 단순히 무슨 전투에서 일본군을 몇명 죽였다거나, 무슨 단체를 만들었다던가 하는 단파적 업적 보다는 그분들이 살아온 생애 전반과 사상을 알아야 한다. 그분들은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자식과 가족들의 운명마져 조국에 담보로 잡힌 분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친일파 매국노들 뿐만 아니라, 해방 후 대한민국 위정자들 (특히 이승만과 박정희 일파)에 대해서도 성장배경과 패악한 친일 업적들을 알아야 한다. 한때는 독립운동을 하다가도 어떤 사정에 의해서든 변절자가 된 사회 지도층도 부지기수다. 왜 변절자 되어야만 했는지, 해방 후 몇몇 그릇된 정치 지도자들 때문에 대한민국이 어떻게 변절되었는지도 알아야 한다.

식민지 시대에 매국노와 친일파는 많았지만, 지금까지도 <역사청산>이 안된 나라는 대한민국 뿐이다. <죄(罪)>는 있는데 <벌(罰)>이 없는 나라는 정의로운 국가가 아니다. 오히려 죄지은 자가 더 잘 사는 나라라면 정상적인 국가라고 말할 수 없다. 사죄와 참회가 없는데 어떻게 백성들이 용서할 수 있겠는가?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노무현 정부 떄 <과거사 청산 위원회>를 비롯하여 여러 <역사 청산> 단체들이 만들어 졌지만, 쥐새끼 이명박 정권 때 모두 강제 해산해 버린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백성이 지혜로워야 하며,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된 국가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의 검증이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다.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 세상은 편리하면서도 무서운 세상이다. 검색사이트나 유투브에 들어가면 역사 속의 유명인(악인이나  선인)들의 성장 과정과 발자취를 모두 알 수 있다. 우리 각자가 독립운동사의 역사적 인물들을 공부하여야 한다.

이제는 변절한 권력자들의 선전과 세뇌교육에 뇌하부동하는 무지한 민중이 되지말고, 안창호 선생의 말씀대로 국민 각자가 <힘을 길러야 한다>. 내가 아는 만큼 힘을 기를 수 있다. “돌배 나무에는 돌배가, 참배 나무에는 참배가 열리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선배의 권유로 도산 안창호 선생의 <흥사단 아카데미>에 가입한 적이 있는데, 교복에 <기러기> 문양의 빼지를 달고 다니는 것을 자랑스러워 했던 기억이다. 그때 기억하는 청년 강령이 <무실, 역행, 자강, 충실, 근면, 정제, 용감>이었다. 그중에서도 <무실 (務實)>은 <거짓말 안하기 운동>, <참되기 운동>이다. 요즘도 하는지는 모르지만, 매일 한가지씩 수련활동을 이야기하고, 모임을 시작할 때와 헤어질 때에는 돌아가면서 <윤회 악수>를 했던 풋풋한 기억이다.

1910년대 독립운동의 시발점은 <신민회>와 <신흥무관학교>를 들 수 있다. <신민회>는 1907년 4월 안창호 선생의 발기에 의해,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과 서울 지역 인사들이 주동하여 창립하였다. 안창호, 이희영, 진덕기,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윤치호, 양기탁, 김구, 최광옥, 김규식 등이다. 상동교회 교사들 중심으로 기독교 이념을 바탕으로 조직된 항일 비밀 결사단체로 알려져 있다.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실력양성을 통한 국권회복과 공화정제의 근대 국민국가 수립 (독립전쟁론)을 목표로 하였다. 민족학교로는  평양에 대성학교와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하였고, 민족계몽으로 대한매일신보, 조선광문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독립기지로써 남만주에 삼원보, 서간도에 한흥동,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는데 공헌하였다. 하지만 1911년 조선총독 데라우치를 암살하려 했다는 일본의 조작된 <105인 사건>으로 안창호, 윤치호 등은 검거되고, 이승만, 김규식 등은 미국으로 망명함으로써 <신민회>는 해체된다. 하지만 뒷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계승된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 이상룡을 주축으로 서간도(길림성)에 개교한 독립군 양성기관이며, 현 경희대학교 전신이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서로군정서 <의용대>, <조선혁명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을 이끄는 무장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이 된다. 또한 비밀결사 단체인 <의열단> 단원들과 청산리 전투의 김좌진 장군을 배출하기도 한다. <이상룡>은 신민회의 양기탁, 이시영의 권유에 따라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심한다. 안동 유림의 명문가 출신인 이상룡은 노비문서를 불태워 노비들을 해방시킨 뒤, 가산을 모두 정리하여 식솔들을 이끌고 서간도에 정착한다. 경학사라는 결사조직을 결성하고, 신흥무관학교 초대 교장이 된다. 그후 일제에 의해 패교된 후 홍범도, 김좌진 부대에 합류한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22 <경술국치-2> (09-09-2016)

<안중근의 이토 암살 사건> 때문에 <한일병합>이 빨리 진행된 것은 아니다. 이미 일본은 이토 암살 (1909년 10월) 이전인 4월에 이토가 한일병합에 찬성했고, 7월 일본각의는 <한국병합에 관한 건>을 의결하였다. 또한 한일병합에 따른 조선 민중의 반발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남한 대토벌 작전>을 시행하면서 닥치는대로 죽이고 방화했다. 일본 통계에 의하면 1906년부터 1911년 까지 조선 의병 사상자만 2만1,485명이었다고 하니 민간인을 합하면 사상자 수가 엄청나다고 할 것이다.

특히 <안중근 이토 암살 사건>이후, 북간도(두만강 북부 일대지역), 서간도(압록강 이북 길림성, 요림성 일대)에서 농사지으며 살던 10만명의 조선인들에게 일제의 극심한 탄압과 피해가 가해진다. 간도 지역은 1712년 중국과 조선이 합의해서 세운 <백두산 정계비>에도 기록되었듯이 엄연한 한국의 땅이다. 하지만 일본은 1909년 9월 4일 북경에서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을 맺는다. 일제가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신에 간도를 중국 땅으로 승인해 버린 것이다. 쳐죽일 일본놈들이 한국을 강점한 것도 모자라서, 한국의 영토 간도 땅을 중국에 불법으로 팔아먹은 것이다. 이때 중국과 일제가 자기들끼리 합의한 국경선이 현재까지의 한반도 국경선이다.

대한제국을 일본에 팔아먹은 매국노 쌍두마차는 뭐니뭐니 해도 <이완용 친일내각>과 <송병준의 일진회>다. 1909년12월3일 이완용의 대한협회와 일진회는 한일합방 성명서를 발표하자고 주장하지만, 선두권을 빼앗길 것 같은 대한협회가 반대하자, 일진회는 그날 밤 일방적으로 일진회 회원 200명을 소집해 총회 열고 합방제의를 전격 가결한다. 12월4일 일진회장 이용구는 100만회원의 연명이라면서 <한일합방 성명서>을 중외에 선포한다. 매국의 공로를 일진회에게 빼앗길 것을 우려한 이완용은 비서 이인직을 보내 통감부와 비밀협상을 한다. 이에 일본 통감은 “모든 조선 왕실과 내각 대신들은 일본 왕족으로서의 대우를 받으며, 언제나 그 위치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세비를 지급받음은 물론, 세습재산도 유지하게 된다”라는 약속을 받아낸다. 오히려 이완용은 일본이 너무 관대하다고 황송해 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결국 5백년 조선을, 5천년 유구한 한반도를 팔아먹은 댓가가 고작 자신들의 알량한 권력과 몇푼의 재산인 셈이다. 이러니 나라가 식민지가 되든, 백성들이 노예가 되든, 나와 내 가족만 잘 살면 된다는 조선왕족과 노론 수구파 골통들은 한국 현대사의 권력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마침내 1910년8월22일 <한일합방 조약>이 조인된다. 물론 이 조약은 조선 황제의 재가도 없었으며, 강제로 병합한 불평등 조약이므로 우리는 <한일합방>이니 <한일병합>이니 하는 용어를 사용하면 안되며 <경술국치>라고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일본이 강제로 한국을 빼앗은 것은 맞지만, 조선 조정대신과 기득권 노론 세력의 매국노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수치스러운 것이다.

1910년 10월12일 데라우찌 조선총독부는 매국 친일파 76명에게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작위를 수여하고 은사금을 지급한다. 76명을 분석하면 왕실 12명을 제외한 64명중에 노론56명, 소론6명, 북인 2명이다. 그러니 1623년 인조반정 이후 350년간 노론 세력이 이 나라를 다 해먹은 것이다. 이 친일 매국노 후손들 1177명이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의 정치계, 법조계, 재계, 학계 등에서 고위직을 맡고 있으며, 내노라 하면 알 수있는 거물들로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다. 왜 그럴까?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생명은 물론, 가족과 전재산 마져 조선 독립을 위해 희생한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왜 대한민국 국민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가? 독립운동가는 물론이거니와 그 자식들과 후손들은 대한민국이 보살피고 보답하기는 커녕, 가난과 무지에 내팽겨진 채 이름없는 얼굴들로 살아야 하는가? 다시금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누가 목숨걸고 조국을 위해 초개같이 희생하려 할 것인가? 오늘날 친일파 권력자들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에게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나치 독일의 선전 전략가이자 선동가 히틀러로 만든 파올 요제프 괴벨스는 <프로파간다-선동> 전략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느 나라를 점령하든지 간에 점령 국가에는 세분류가 존재한다. 하나는 조국을 배반하고 침략국을 옹호하는 지지 세력 <Assistance>, 둘째는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키려는 반항세력 <Resistance>, 그리고 세째는 방황하는 개,돼지 <민중세력>이다. 지지세력에게는 약간의 권력과 돈이면 충분하고, 반항세력과 기득권 세력은 회유해서 안되면 철저히 응징하고, 민중세력은 반항세력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탄압하되, 반복적 세뇌 교육이 필요하다.” 그는 개돼지로 매도한 독일 국민들을 세뇌하기 위해 전 국민에게 라디오를 보급한다. 그 당시는 TV가 없던 시대다. 그 라디오를 통해 계속적으로 반복된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민중을 선동하고 세뇌시킨다. 괴벨스는 이렇게 말한다 “한번 들은 거짓말은 부정하지만, 두번 들은 거짓말은 의심하게 되며, 세번 들은 거짓말은 진실로 믿게 된다. 거짓말에 약간의 진실을 보태면 더 큰 효과를 가져온다.” 그는 근대 광고학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우리 세대 또한 오랜 세월동안 종교나 이데오르기 이념 전쟁에서 거짓말에 이미 세뇌당한 개,돼지는 아닐까?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21 <경술국치-1> (09-02-2016)

1905년 11월17일 외교권을 빼앗긴 <을사늑약> 이후, 1906년2월 조선에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고, 3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다. 1907년 5월 참정대신 이완용, 법무대신 조중응, 농상공부대신 송병준의 삼각 매국내각이 구성된다. 나라를 팔아먹기 위해서는 먼저 고종을 축출해야한다. 일진회의 송병준이라는 매국노는 일본에서 직물염색업을 하다가, 1904년 러일전쟁 때 통역관으로 조선에 들어온다. 그해 독립협회 300명과 <유신회> 조직을 만들고, 12월 이용구 등 동학 잔여 세력의 진보회를 통합하여 <일진회>를 만들었다. 일진회는 일본 낭인들이 만든 <흑룡회> 하부조직으로써 일본의 동북공정의 앞잡이 역할을 한다.

고종은 승부수를 띄운다. <헤이그 밀사사건>이다. 이 또한 고종의 이중정치며 뒷북정치다. 을사늑약 주범들에게 정권을 내주는 한편, 의병들에게 밀지를 내려 거병을 촉구한다. 1907년 4월20일 이상설, 이준, 이위종에게 네덜란드 <헤이그 2차 만국 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하면서 백지위임장을 준다. 1907년 6월15일부터 10월18일까지 대한제국 외교권 회복을 연설하였지만, 강대국 그 누구도 상대하지 않는다. 즉 열강 평화회의에 약소국 조선이 낄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일본은 고종을 믿지 못한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강대국들이 말하는 <평화>라는 단어는 열강들 끼리 서로 충돌하지 않고 약소국을 식민지로 사이좋게 차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사는 특히 19세기와  20세기는 약육강식의 시대다.

마침내 고종은 <강제퇴위>를 당한다. 고종의 문제는 개화파와 민족 저항세력을 모두 제거함과 동시에, 정치노선이 이중적이며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1907년 7월18일 송병준은 고종 면전에다가  “일본에 건너가 일본천황에게 사과하든지, 대한문에 나가 일본 사령관 하세가와에게 항복하라”고 윽박지른다. 그날 저녁8시 이완용은 칼을 빼들고 고종에게 다가가 양위를 강요하면서 “폐하께서는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고 협박하자 고종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 처럼 묵묵히 앉아만 있었다.”라고 매천야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에 고종은 순종에게 대리청정을 하려고 했으나, 1907년 7월20일 친일파들과 일제는 고종과 황태자가 불참한 가운데 <고종 양위식>을 거행한다. 고종44년 치세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다. 이사건의 주범을 <정미7적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 이병무, 이재곤, 조중응, 송병준>이라고 한다. 돌로 쳐죽일 매국놈들..  

1907년 7월24일 총리대신 이완용은 이토와 <제3차 한일협약- 일명 정미7조약, 한일신협약 이라고도 함>을 체결한다. “한국정부는 시정개선, 법령제정, 중요 행정상의 처분을 일본 통감의 지도를 받는다”고 하고, 이완용은  <협약실행을 위한 각서>에서 <재판권>을 일본인에게 맡기고 <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한다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1909년 7월 <기유각서>로 대한제국의 사법권, 행정권, 경찰권, 군사권을 일본에게 모두 넘기게 된다. 조선5백년 역사가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이때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이 발생한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9시 이토 히로부미가 탑승한 특급열차가 하얼빈 역으로 들어왔다. 안중근 독립의사는 이토에게 권총 4발을 쏘았다. 안중근은 암살 후 <대한만세>를 세번 외치고 체포된다. 안중근 의사는 말한다. “무슨 까닭으로 세상일은 이렇게 공평하지 못한가? 슬프다. 이웃나라를 강탈하고 인명을 잔인하게 헤치는 자는 이렇게 기뻐 날뛰면서 아무런 꺼림도 없는데, 죄없고 어질고 약한 인종은 거꾸로 이런 곤경에 빠져야 하는가?” 안중근은 이토를 살해한 15가지 이유를 법정에서 진술한다. 안중근은 고향 진남포에서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운영하던 교육자였지만, 의병으로 참전해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결행한 것이다. 그는 1909년 3월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왼손 무명지를 절단하는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고 그 붉은 피로 <대한독립> 네글자를 태극기에 쓴다. 이토를 저격한 이유도 한국독립과 동양 평화 유지를 위해서였다. 그는 여순 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까지 <동양 평화론> 집필에 전념하였다. 그의 신념은 한.중.일 세나라가 각기 독립국을 유지하는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 협력하며, 서양세력의 침략을 방어하고 동양평화와 세계 평화를 성취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토에게 쫓겨난 고종은 이완용 친일 내각의 강요에 못이겨 이토 장례식에 굴욕적인 조문까지 해야 한다.

안중근 의사가 살해한 이토 히로부미는 일개의 통감이 아니다. 일본 근대사의 영웅이었으며, 일본 헌법의 창시자인 동시에, 지금도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사람이다. 평민 하층계급 출신인 그는 14세 때 요시다 쇼인의 <송하촌숙> 문하로 들어가서 1863년 영국 유학을 간다. 적극적 개화론자인 그는 1876년 <한일수호조약>을 체결하고, 1885년 <텐진조약>을 체결한다. 그해 일본 초대 총리대신을 맡고, 1892년 전제 군주헌법인 <일본헌법>을 발포한다. 이때부터 일본 천황은 군사통제권을 장악하여 아시아 침략전쟁의 근거가 된다. 이토는 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모든 정책을 주관해 오던 자였으며, 이런 거물을 안중근 의사가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한 것이다. 장하다. 그 이름 <안중근>!!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20 <을사늑약> (08-26-2016)

러일전쟁의 결과는 고종의 판단 착오였다. 고종은 2백만 대군의 러시아만을 하늘처럼 믿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서 명기한 것 처럼, 고종은 자신이 웅대한 지략과 불세출의 지략을 갖고 있다고 자만했다. 고종은 외교적 수완으로 강대국들 사이에서 줄타기만 잘하면 전제왕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고종은 철저한 이중 플레이를 했다. 강대국이나 강자 앞에서는 몸을 낮추고 뒤돌아서서는 반대 세력을 부추기는 전략을 썼다. 국왕의 처세술이 유약하고 이중적이니 백성들은 왕을 믿을 수 없고, 충신들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며, 쥐새끼 같은 간신들만 들끓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 1905년 을사늑약부터 1910년 경술국치까지 어떻게 나라를 빼앗기게 되는지 살펴보자.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고종은 1904년 11월 4일 이승만을 밀사로 미국에 보낸다. 사람이 그렇게 없나? 독립협회 열혈회원이었던 이승만은 1899년 박영효 사건에 연루되어 종신형을 받고 복역중, 선교사의 도움으로 1904년 4월 특별사면을 받는다. 밀사로 미국에 간 이승만은 미국의 어느 누구도 만나지 못한다. 고종은 1905년10월 미국 선교사 헐버트를 통해 루스벨트에게 친서를 전달하고 11월에는 러시아 공사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한다. 힘없는 초등학생이 동네 깡패들 여기저기에게 도와달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무식하면 용감하다? 고종과 대한제국 내각은 그만큼 국제정세에 어두웠고 뒷북만 치는 꼴이었다.

이미 일본은 1902년1월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조선을 일본이 먹기로 합의했고, 1904년 2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 하버드 동창생인 가네코 겐타로 의원을 특사로 보내 <러일전쟁>에 대한 지원을 약속받고, 1905년 7월 세칭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미국은 필리핀을 먹고 일본은 한국을 먹기로 합의가 끝난 상태이기 때문이다. 또한 러일전쟁 후 1905년 9월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한국은 물론, 여순과 대련의 조차권과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까지 양도받은 상태다. 유럽 열강들도 일본이 조선을 먹는 것을 기정사실화한 상태였던 것이다. 또한 일본은 친일파들을 통해 한국의 대외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소상히 알고 있었다. 게임이 되나?

1905년11월9일 일본 추밀원장 이토 히로부미가 방한한다. 그런데 4일전 11월5일 친일파 매국노 송병준이 <일진회 선언서>를 발표한다. “한국의 외교권을 일본 정부에 위임하는 것이 대한제국 독립을 유지할 수 있고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이라는 내용이다. 이러니 무슨 나라꼴이 제대로 되겠는가? 1905년 11월17일 “한국이 부강해졌다는 사실이 인정될 때까지 한국의 외교권은 일본이 갖는다”라는 내용이 <을사늑약>이다.

<늑약>과 <조약>의 차이점은 <늑약>은 강제로 체결한 조약인 반면에 <조약>은 합의에 의해 합법적으로 체결된 것을 말한다. 그러니 한국은 <을사늑약>이라고 하지만, 국제법 상으로는 <을사조약>이다.

<을사늑약>이 무효라는 한국측 주장은  1. 평화적 방법이 아닌, 일본 군대가 궁궐을 몇겹으로 포위한 상태에서 고종과 대신을 협박하였다.  2. 외무대신 박제순의 관인을 훔쳐서 일본공사 하야시가 일방적으로 날인한 위조문서다.  3. 조약 비준권자인 고종 (광무황제)이 비준을 승인하지도 않았고 외무대신 박제순에게 공식 위임하지도 않았다.  4.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 1895년 시모노세끼 조약. 1898년 니시-로젠 협정. -1902년 영일 동맹협약 . -1904년 한일의정서 등.  5. -1965년6월 <한일 기본관계조약>에서 “1910년 8월22일 한일합방 조약과 그 이전에 양국간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무효 (Null and Void)로 한다” 등이다. 그러면 뭐하냐고? 꽃제비가 여자 꼬실려고 한 말을 믿는 철없는 여자가 잘못이지, 스스로 망가진 여자가 누구를 탓하나? 철이 없는건지, 모자란건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선 한반도는 눈물바다가 된다. 1905년 11월30일 시종부무장관 민영환이 자결하고, 다음날 조병세가 음독자살. 주영공사 이한응이 영국에서 자살. 12월 이상철, 김봉학이 자결한다. 12월16일 <을사오적> (학부대신 이완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농공대신 권중현)을 매국노로 처단하라고 전국 상소가 빗발치고 자결 항쟁이 줄을 잇는다. 하지만 고종은 이들을 처단하지도 않커니와 이들 사직을 만류한다. 조선의 왕들은 그 누구도 목숨을 걸고 백성들과 함께 결사항쟁을 하지 않는다. 왕은 왕실 가족들과 함께 종묘사직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강대국에게 목숨을 구걸하면서 연명할 뿐이다. 항상 그렇듯이 전국적으로 <을사의병>이 일어나 몇년동안 게릴라전이 펼쳐진다. 하지만 이 협약을 기점으로 사실상 한국은 독립국으로서 갖추어야 할 주권을 상실하게 된다. 그해 12월21일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 (조선총독부로 개편 후 총독으로 변경됨)이 되면서 한국 국정 전반을 관장하게 된다.

<황성신문>의 주필 장지연은 <을사늑약> 체결 다음날, 논설에서 “시일야 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 – 이날을 목놓아 통곡하노라”라는 유명한 절규를 남긴다. 훗날 이 양반도 변절하여 친일파가 되지만.. 을사년 이때 백성들이 받은 충격을 <을씨년스럽다>라고 유래한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19 <러일전쟁> (08-19-2016)

 자강(自强) 능력이 부재한 19세기의 조선 역사는 청나라에 붙었다가 일본에 붙었다가 러시아에 붙었다가 결국 20세기에 접어들자마자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 그런데 우리가 일본 식민지가 된 배경에는 세계 제국주의들의 패권다툼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단순히 친일파 매국노 몇놈이 일본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술국치> (한일합방, 1910년 8월22일)를 알기 위해서는 <기유각서> (1909년 7월), <정미 7조약> (1907년 7월24일), <을사늑약 >(1905년11월17일)을 알아야 한다. 을사늑약과 같은 불평등 조약을 알기 위해서는 1904년 <한일의정서>의 내용과, 1902년 <영일동맹>을 알아야 하고, 1904년 <러일전쟁>이 왜 일어나야 했는지 배경을 알아야 한다.

<러일전쟁> (1904년 2월8일~1905년 9월5일)은 만주 남부와 요동반도, 한반도 근해에서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한 무력전쟁이다. 이미 <청일전쟁> (1894년)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끼 조약>(1895년)에서 중국(청나라)이 조선과 만주 (요동반도)를 포기한다는 각서를 받아 놓은 상태다. 그런데 러시아가  <삼국간섭>이라는 명분으로 요동을 중국에게 돌려주게 한다. 그리고서는 1897년 독일은 중국의 칭다오 (청도)를, 러시아는 여순과 다롄 (대련)을 점령한다. 거기다 <의화단 사건> (1899년~1901년. 청나라 의화단이 서강 8개국과 벌인 국제전쟁, 188명 서구 선교사와  4만5천명의 중국 기독교인들을 살해함)을 빌미로 러시아는 만주 전체를 먹으려고 한다. 그런데다가 러시아는 당초 별 식욕을 못느끼던 조선마저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친러내각이 구성되니 조선에 대해서도 입맛이 당기는 것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죽 써서 개주는 꼴이다.

이에 일본은 1902년 <영일동맹>을 맺는다. 러시아의 극동지역 남하를 방어하고 동아시아 이권을 영국과 분할하며, 일본은 조선의 강탈 우위권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반면에 일본은 러시아와 밀약을 별도로 추진한다. 즉 만주는 러시아가 먹고 조선은 일본이 먹자는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한반도 북위 39도 윗쪽과 만주는 러시아가 먹고 39도 남쪽만 일본이 먹으라고 한다. 이때부터 열강 자기들끼리 그어논 경계선이 지금까지도 분단된 빌어먹을 <삼팔선>이다. 이에 반발한 일본은 1904년 2월4일 이 밀약을 파기하고 전쟁을 일으킨다. 이 전쟁이 <러일전쟁>이다.

선전포고도 없이 1904년 2월8일, 9일 러시아 함대를 기습공격하고, 2월10일 선전포고 한 다음, 여순항 (현재 대련 지역), 제물포 해전, 압록강 전투, 여순항 봉쇄와 황해해전, 러시아의 발트 함대 이동, 1905년 흑구대와 선양전투, 쓰시마 해전에서 모두  러시아는 참패하고 일본의 승리로 전쟁은 끝난다. 러시아 패전 원인은 병력 열세 (러시아군은 고작 10만명인 반면, 일본군은 25만명), 시베리아 철도의 미완공으로 모스코바 병참물자 공급 지연, 일본의 러시아 전력 분석력 우위, 미국의 일본 전쟁자금 지원. (영국의 <로스차일드> 가문 대리인인 미국의 제이콥 쉬프드는 전쟁자금 40%를 일본에 공식지원하고 비공식 금융지원까지 약속함. 유럽 열강들은 러시아가 당연히 이긴다는 쪽에 판돈(채권)을 걸었던 반면에, 예상치 못한 일본의 승리로 일본 국채값이 급상승하자 로스차일드는 막대한 수익을 차지함. 워터루 전투,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등등.., 전쟁을 통한 대표적인 국제 금융 착취 수단임), <한일의정서 체결> (1904년2월23일. 조선은 일본의 전쟁을 지원하기로 함).. 등이다.

결국 미국의 중재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를 계기로 노벨평화상을 받음)로 <포스머스 조약> (1905년 9월5일,- 일본이 한국에 대한 군사, 경제적 우월권을 인증함. 사실상 조선 식민지화를 열강들이 인정한 조약임)을 체결하고 일본의 승리로 끝난다. 하지만 일본은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고 빚만 떠안은 채, 러시아로 부터 땡전 한푼의 전쟁보상금도 받지 못하고 국가 파산 상태로 위기에 몰린다. 결국 일본, 러시아 모두가 손해본 전쟁이며, 그림자 정부인 <로스차일드>만 이득을 본 것이다. 한국인들은 알아야 한다. 과거도 미래도 미국은 한국을 버릴지언정 일본을 버리지는 못한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중국, 한국, 일본 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는 엄청 달라졌을 것이다. 19세기 러시아는 누구인가?  왜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도와줬을까? <러일전쟁>의 세계사 배경에는 그레이트 게임 (The Great Game : 1813년부터 1907년 영러협상 까지)이 있다. 세계 2대 최강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에 중앙아시아, 류아시아, 발칸반도, 흑해, 동아시아 패권을 둘러싸고 서로 영토 확장을 위해 1백년 가까이 싸운 기간을 말한다. 특히 크림전쟁 (1853년~1856년)은 러시아가 지중해 출구를 확보하기 위해서 오스만 제국(현재 터키, 마지막 이슬람 제국)과 영국 프랑스 연합군과 싸운 전쟁이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페르시아가 차지했던 중앙아시아 북쪽 영토 (아르제바이젠, 사마르칸트 등)를 모두 차지하고, 영국은 인도, 아프가니스탄을 차지한다. 러시아의 영토가 점점 극동아시아 까지 확장되는 것을 우려한 영국이 일본을 돕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냉전시대의 시발점이다. 19세기까지는 미국은 세계 열강 반열에 끼이지도 못한 나라다. 미국 남북전쟁 (1861년~1865년)과 하와이, 알라스카 까지 모두 통합된 <미합중국>이 1897년 부터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18 <서재필과 독립협회> (08-12-2016)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김홍집 4차 친일 내각>이 유길준, 서광범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을미개혁>이 단행된다. <1차 갑오개혁 (1894년 7월~11월)> 중점 사업은 군국기무처 설치, 의정부와 8아문 조정 개편, 궁내부의 재정 일원화, 과거제 폐지, 사노비법 철폐, 과부재가 허용, 은본위제 등을 꼽을 수 있다면, <2차 갑오개혁 (1894년11월~1895년 5월)>은 내각7부, 지방 권력 개편 (지방 수령 권한 축소), 2심제 사법제도 확립 등을 들수 있다. 한편 <을미개혁 (1895년 8월 부터 1896년 2월까지)> 때는 사회제도 개혁으로 태양력 사용, 종두법, 소학교 설치, 단발령 강제 시행 등이다.

특히 <단발령> 강제 시행 (1895년 11월15일)은 그 당시 조선 양반과 민중들에게는 목숨과 바꿀 수도 없는,  있을 수 없는 법령이다. 흔히들 학창시절 한자학 시간에 외웠던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 효지시야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라.. 즉 나의 신체, 장기, 털, 피부는 모두 부모로 부터 받았으니, 이를 감히 다치거나 훼손하여서는 안되며, 이를 건강하게 잘 지키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대학생 때 장발 단속에 걸려 이 문구를 읊조렸다가 경찰관에게 뒤지게 혼난 기억도 있다. 박정희나 친일파들은 왜 민중의 머리칼을 가지고 야단이야? 하기야 요즘 세대는 얼굴이며 가슴이며 신체 구석구석 손 안되는 곳이 없으니 그 불효를 어찌 다 할까나 ㅠㅠ.. 하물며 이 당시 상투는 남자 어른의 상징이었는데 서구 개화라는 이유로 전국 백성들에게 일제히 단속령이 내려졌으니 가만히 있을리 없다. 자살하고 난리가 난리도 아니다. 이를 계기로 <을미의병>이 양반, 유생들 중심으로 일어나지만  곧 굴복당하고 만다. 고종도 유길준에게 상투를 강제로 잘리게 되니, 사진 속에 겉으로 웃고 있는 고종의 속이야 오죽 했을까?

중전 민씨가 없는 고종은 친일파들에 의해 궁궐에 감금된 신세나 다름없다. 또한 독극물이나 암살에 대한 공포증이 극에 달해 음식 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이에 1895년 10월 12일 이완용, 이범진, 윤치호 등이 미국 공사관에 고종을 피신시킬 계획을 세우는데 이를 <미관파천>이라 한다. 하지만 내부자 밀고로 실패하며 이를 <춘생문 사건>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정도로 포기할 고종이 아니다. 1896년 2월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잽싸게 피신한다.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말이 파천이지 러시아의 포로가 된 것이다. 일국의 국왕이 그것도 황제라는 자가 남의 나라 공사관에 몸을 숨긴다는 것. 임진왜란 때 인조가 의주로 도망가서 명나라에 망명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한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래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숨어서 1897년 2월20일 경운궁에 환궁할 때까지 374일을 버틴다. 숨어 있는 기간 동안의 고종 몸값 지불을 위해서  러시아에 삼림채벌권, 일본에 광산개발권, 미국에 철도, 전철,전화 부설권등 각종 이권을 헐값에 팔아 넘긴다. 참으로 창피하다 못해 곤고한 조선이다. 이곳에 피신해 있는 동안 김홍집, 유길준 등 친일파를 살해하고 친러 인사들 (이완용 포함)을 대거 등용한다. 이때 1895년 12월 25일 귀국하는 인물이 필라델피아 한인 사회의 대표 인물 서재필 (미국 시민권명 : Phillip Jaisohn, 한국명 : 피제손)이다.

서재필은 약관 32세 나이로 미국 의사이자 미국 최초 시민권자로서 금의환양한다. 귀국하자마자  -1896년 중추원 고문 자리를 맡게 되며, -4월7일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독립신문은 4면 중3면은 한글, 띄워씌기를 함으로써 한자를 모르는 민중 계몽지 역할을 했으며, 1면은 영문으로써 외국인들에게 조선의 사정을 알리는 선전지 역할을 한다. -5월부터는 배제학당에 출강해 자유민주주의와 후배들을 양성한다. 이때 학생이 문제의 이승만이다. -7월2일 <독립협회>를 창설한다. 정치에 안경수, 이완용, 사회에 윤치호, 이상재, 남궁억 등 정동파 인맥들이 중심이 된다. 자주국권, 자유민권, 자강개혁을 목포로 <만민공동회>를 주관하고, <독립문, 독립관, 독립공원> 건립을 추진한다.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에서 발전된 <대중토론회>였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의회설립 및 입헌군주제로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또한 노비 해방운동을 추진했다. 1897년  그가 한 연설 중에는 “인간은 물건이 아니며, 재산이 되어서는 안된다. 인간의 생명은 하늘이 부여한 것(天賦人權)이다. 아무런 잘못없이 누구도 다른 인간의 권리를 함부로 침해해서는 안된다”라고 역설했다. 조선 정부가 독립신문을 탄압한 이유는 정부 수구파의 비판, 러시아 침략정책에 대한 비판, 탐관오리 부정부패 고발, 전제군주제 비판 (서재필은 영국의 입헌군주제나 미국 공화제를 선호), 국정개혁과 민권신장 주장, 서재필의 오만한 처신 등을 꼽았다.

한때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일본에 매각할려고 했으나 일본의 거부로 무산된다. 그는 왕권강화를 위한 수구파들의 암살 계획(미국 시민권자라서 암살하지 못함), 러시아 공사의 항의와 내정간섭, 중추언 고문직 해고 압력 등으로 1898년 5월14일 출국한다. 출국후 독립신문은 윤치호가, 독립협회는 이상재 등이 이어받았지만, 서재필이 출국한 같은 해 1898년 12월 26일 해산된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17 <명성황후 시해 사건> (08-05-2016)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중전 민씨) 시해 사건을 우리는 1895년 <을미사변>이라고 기억한다. 일국의 국모가 사약을 받은 것도 아니고, 적국 일본의 양아치들이 능욕하고 시신을 난도질 한 후 장작불에 태워 죽인 사례는 일찌기 세계 역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수치스런 사건이다. 이런 일본 놈들은 돌로 찍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이지만, 내 조국은 어쩌다가 조선의 국모를 그 지경으로 살해당하도록 내팽겨친 나라인가? 사건 배경과 명성황후에 대해 알아보자.

1894년 1차 동학혁명 후, 중전 민씨의 청국 파병요청으로 발생한 청일전쟁은 1894년 6월 풍도해전, 성환전투, 8월 평양전투, 9월 황해해전, 11월 여순 함락 (2만명을 죽이는 여순 대학살 발생), 11월 동학  2차혁명 우금치 전투, 1895년 2월 중국 위해 함락, 타이완 함락 등 청나라는 일본에게 백전백패를 당한다. 북경까지 위협을 당하게 되니 1895년 4월 17일 청의 리홍장은 일본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굴욕적인 <시모노세끼 조약>을 체결 당한다. 조약의 핵심내용은 청나라는 조선의 종주국임을 포기하는 동시에 조선의 모든 이권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즉 일본이 조선을 먹어도 좋다는 양해각서인 셈이다. 또한 중국 랴오동(요동) 반도와 타이완(대만), 풍후섬을 일본에 할양한다는 것. 전쟁 피해보상금 2억냥 지불, 중국 주요 항구 개방과 자유무역 허용 등이다. 중국으로서는 치욕적인 양해각서인 셈이다.

하지만 일본이 중국을 먹을 수 있게 내버려 둘 러시아가 아니다. 시모노세끼 조약이 체결된 후 일주일 밖에 지나지 않은 1895년 4월 23일 독일, 프랑스, 러시아 3국 제국주의자들이 일본을 압박한다. 이를 <삼국간섭>이라고 한다. 일본은 할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한다. 이러한 국제정세를 재빨리 간파한 사람이 중전 민씨다. 청나라에 의존하던 외세를 친러시아로 재빨리 바꾸고, 일본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친일파 박영효 암살 지령을 내리고 (박영효는 일본으로 도망감), 3차  김홍집 친러내각 (정동파 일명 친미파 이범진, 이완용 등)을 구성한다. 이완용은 친미파 -친러파 – 친일파 –매국노로 뱀처럼 변질한 인물이다.

이에 일본의 총리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중전 민씨 살해 지령>을 내린다. 이노우에 일본공사를 통해 미우라 고로 공사와 일본 양아치 패거리를 조선에 파견한다. 1895년 8월 20일 작전명은 <여우사냥>. 우리에게는 <을미사변>이다. 일본군들은 조선 궁궐에 들어와 중전과 상궁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한다. 중전 민씨를 윤관하고 시신을 칼로 능욕한 다음, 궁궐 안마당에 장작불을 지피고 그 불에 중전 민씨를 태워 죽인다. 여기에 합세한 조선인들이 있었으니 우범선 (생물학자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 조선 군대와 들러리 흥선 대원군이다. 중전이 살해당하자 친러 내각은 붕괴되고 일본군들이 조선 조정을 장악한다. 권력이 무엇이길래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죽을 때까지 싸웠으니 나랏꼴은 무엇이며, 일본놈들은 조선을 어떻게 생각할까?  중전 민비를 죽인 칼은 아직도 일본 신사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백성들이 중전 시해 사실을 안것은 시해후 2년이 흐른 뒤였다.

중전 민씨는 누구인가? 시해후 2년뒤인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꾼뒤, 고종은 광무황제, 중전 민비은 <명성황후>에 칭호되고 그때서야 국장으로 장례식을 치룬다. 45세에 살해당한 민비는 15세 나이에 중전으로 입궐한다. 고종은 12세. 민비(본명 민자영)를 추천한 사람은 다름아닌 흥선 대원군의 부대부인 민씨였다. 친척인 셈이다.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남편 고종을 대신하여 시아버지 대원군 권력과 30년 동안 맞선다. 서로가 철천지 원수다. 민비 명성황후는 4남1녀를 낳았지만 순종을 제외하고는 모두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는다. 그래서 무당을 찾게 되고 전국 방방곡곳을 찾아다니며 굿을 하다보니 내탕고의 많은 돈을 탕진하게 된다.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민씨 친척들을 끌어들이니, 이들이 전국 매관매직을 하게 된다. 심지어 관직 가격표가 정해져 있었다니 무얼 더 말할까? 관직을 돈으로 산 놈들이 탐관오리가 됨은 당연하고, 이런 썩은 관료들이 본전을 뽑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정 부패를 하게 된다. 그러니 고혈을 짠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찌르고 백성들의 삶은 찌들대로 찌드는 것이다. 이런 나라에 무슨 돈으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할 수 있으며, 자강(自强)을 외칠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한국 부정 공무원들은 조선 말기와  얼마나 많이 다를까? <내부자들> 영화를 보면 수치스럽다. 백성을 <개, 돼지>로 여기며 자신들의 뱃속만 채우고자 하는 대기업과 부패한 고위 당직자들은 무엇이 달라진걸까? 왜 한국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렇게 부패하고 타락되어야 하나? OECD 국가 중에 가장 <거짓말>을 많이 하는 국민이 한국인이라면 분기탱천(憤氣撐天)하여 아니라고 말할자 과연 몇이나 될까?  만백성의 어머니인 중전마마를 일본 양아치 놈들에게 능욕당한 것도 분하지만, 자신들의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외세의 힘을 등에 엎고 부정 부패한 중전 민씨 일가족 또한 동정받을 수 없다. 오페라의 <명성황후>처럼,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해서는 민족과 국가의 발전은 없을 것이다. 한도 많고 사연도 많은 1895년 을미년은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16편 <동학혁명> (07-29-2016)

1884년 갑신정변을 청나라의 개입으로 권력을 다시 장악한  중전 민씨 세력은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날로 더 심해진다. 또한 갑신정변을 계기로 청나라와 일본은 텐진조약을 체결하는데 그 골자는 양국중 일방이 조선에 병력을 주둔시킬 경우 사전에 상대국에게 사전 통보한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894년 <동학혁명> (동학 농민운동, 갑오농민전쟁 등으로 불림)이 일어나기 까지 조정과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한다.

<동학> 사상은 무엇인가? 수운 최제우가 1860년 만든 동학(東學)은 서학(천주교)에 대항한 조선의 <민중 신앙 운동>이다. 인내천 (人乃天). 즉 사람이 하늘이다. 천심즉인심 (天心即人心). 하늘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이다. 시천주 (侍天主). 하늘님을 내 마음에 모신다. 등이 주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늘님을 각자 마음에 모시고 살고 있으므로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차별되어서는 안된다는 <평등사상>.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인권사상>. 하늘님을 각자 마음에 모시고 사는 인간은 스스로 마음을 닦고 우주의 기와 소통을 하면 누구나 하늘님이 될 수 있다는 <자성 사상> 등이다. 즉 천국은 각자 마음 속에 있으며 이 사상을 깨우치는 것을 천도 (天道)라고 하고, 배움을 동학 (東學)이라고 한다. 유불선 교리와 미륵사상, 서양 천주교 기독 사상과 일부분 유사한 것 같지만 사뭇 다르다. 이 당시 조선시대 민중들은 양반, 상놈의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으며, 서양 제국주의 외세에 시달리면서, 피박받고 강제 수탈 당하던 시절이라, 이 동학 사상은 천지개벽할 민중신앙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4년뒤 교주 최제우는 혹세무민의 죄로 참수당하고, 제2대 최시형을 거쳐 제3대 교주 손병희 때 <천도교>로 확장 계승된다. 1920년대는 천도교인 수가 3백만명에 이르고, 3.1운동의 독립 선언서 33인 민족 대표 중에는 천도교인 15명, 기독교인 16명, 불교인 2명이 될 정도로 민족 항쟁의 선두에 서게 되지만, 내부 조직의 분란으로 와해되면서 서서히 세력이 약화된다.

조선은 1894년부터 1898년까지 격변의 사건들에 휩싸임과 동시에 일본의 식민지의  빌미가 되는 기간이기도 하다. <동학농민혁명>은 1차, 2차로 나누어 진행된다. 1894년1월 1차 동학혁명은 전라도 고부 (대표적 곡창지대임. 지금의 정읍) 군수 조병갑 (탐관오리의 대표적 인물)의 각종 탐욕과 부정부패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고부 접주 정봉준 (녹두장군)을 선봉으로 김개남, 손화중 등 남접파들과 손잡고 일으킨 농민 무력항쟁이다. 1차 동학혁명의 명분은 교주 최제우의 신원 회복 (기독교는 갑신정변후 1885년 공식 승인이 되지만, 동학교는 불법으로 계속 탄압받음)과 전국 탐관오리들의 숙청이었다. 봉기 석달 만에 관군에게 승리하고 전주성에 입성한다. 하지만 중전 민씨가 청나라에 또 지원군을 요청하면 일본도 조선에 파병할 것을 우려하여 <전주화약- 탐관오리 숙청, 노비문서 소각, 과부 재가 허락, 잡세 폐지, 문벌타파, 인재등용 등이 주요 골자임>을 체결하고는 자진 해산한다. 반면 동학군은 전라도 53군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자체 감시 감독을 하게 된다.   

하지만 동학도 세력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우려한 심약한 고종과 권력욕이 강한 민씨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일본은 텐진조약을 근거로 조선에 일본군을 파병한다. 청은 조선 조정의 요청에 따라 양국 철군을 일본에 제의하지만 일본은 철군을 거절한다. 오히려 민비를 몰아내고 대원군을 다시 앉혀 꼭두각시 정권을 만들려고 하지만 대원군이 말을 듣지 않자, 경복궁에 무단 침입하여 대원군 내각을 실각시키고 김홍집, 박영효, 서광범 등으로 구성된 친일 내각을 구성하고 개혁조치를 취한다. 김홍집 친일 내각은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1차 갑오개혁을 단행한다.

이에 일본은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하니 1894년7월에 <청일 전쟁>이 한반도에서 발발하지만 두달만에 일본의 승리로 끝난다. 청나라는 풍도해전, 평양전투, 여순, 대만까지 함락당한다. 반면에 동학군은 최시형의 북접 10만명, 정본준, 김개남의 남접 10만명, 도합 20만명의 동학군이 있었지만 두파벌로 나뉘어진다. 최시형의 북접은 포교에 중점을 둔 타협론파였고, 정봉준, 김개남 남법은 결사항전론파였다. 또한 대원군은 손자 이준용을 왕위에 세우고자 정봉준의 남접파를 정치에 이용한다. 제2차 동학혁명은 축멸왜이 (–왜적과 서양 오랑캐를 몰아낸다)와 제세안민 (세상을 구원하고 민중을 편안케 한다) 명분으로1894년 9월에 시작되지만, 전봉준의 공주성 공격은 최시형 북접군의 비협조로 지연되고, 김개남의 독자적 행동으로, 결국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동학혁명은 실패로 끝이 난다.

만약 1차 동학혁명 때 조선 조정이 관군들 힘만으로 동학혁명을 저지하였다면 청일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청.일 군대가 조선에 상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능한 고종과 권력 투쟁의 중전 민씨와 대원군만 아니었더라도, 동학교도의 내부분란만 아니었더라도, 내나라 조선은 일본 식민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땅을 치며 후회한다. 그리고 반성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동학 혁명은 동아시아 민중 혁명의 본보기가 되어, 중국의 항일 투쟁, 베트남 민중 투쟁의 불씨가 된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15편 <갑신정변> (07-22-2016)

1868년 일본은 <메이지 유신 시대> (~1899년 일본 헌법제정 까지)를 맞는다. 즉 에도막부  말기시대 존왕양이 (尊王攘夷) 사상에서 시작된다. 그뒤 메이지 시대는 천황제로 강력한 왕정 복구를 함과 동시에 서구 열강들을 따라잡기 위해 서양 문물 흡수, 학제, 신분제, 징병제, 지세개정 등, 일련의 제도 개혁, 민주화와 인권 운동 탄압, 불교 및 기독교 금령, 일방적 자본주의 육성, 군사력 강화 등 부국강병 정책에 힘쓴다. 이때부터 일본은 입헌군주제의 제국주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조선은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 사건> (미국측 일방적 통상요구로 관민들이 미국 상선을 불태운 사건)을 계기로 -1871년 <신미양요> (최초의 한-미 전쟁, 미국 선박 안전보장, 일본과 같은 통상협상과 개항요구에 대한 대원군의 거절. 조선군 340명 사망, 미군 3명 전사의 일방적 전쟁임. 미국은 조선의 무역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 자진 철수함. 대원군의 전국 척화비를 세우게 되는 계기가 됨), -1875년 <운양호 사건> (1873년 탄핵으로 10년 쇄국정책의 대원군이 물러나자, 일본 군함이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벌린 일방적 전투)과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고종 13년. 일명 병자 한일수호조약. 일본의 정한론 대두, 조선영해 자유항행, 조선 개항 등을 이유로 조선을 강제 개국시킴. 특히 제1조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즉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정함으로써 일본의 조선 침략을 국제법적으로 정당화 시킴. 일본이 서구열강에게 당한 불평등 조약을 조선에 그대로 적용시킴. 청나라도 조선 개국에 찬성함)된다. 세상이 격변하는 19세기 중엽에 조선은 <척사위정론 (斥邪衛正論)>, 즉 서양 천주교와 서양 제국 뿐만 아니라 일본까지 싸잡아 금수보다 못하다고 배척하고, 서양 문물을 반대함과 동시에 오로지 청나라만을 주군으로 모셔야 한다는 사대적 논리는 스스로 힘도 기르지 않은채, 전적으로 외세에 의존하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거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빌미가 된다.

뒤늦게 -1881년 일본에 신사유람단, 청에 영선사를 파견하지만,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한다. 배경은 중전 민씨와 외척 수구파들이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병 조직인 <별기군> (일본식 신식군대)을 창설하고, 훈련도감에서 해직된 구식 군인들에게 10개월 이상 연체된 봉급을 썪은 불량쌀로 지급한 것에 대해 구식군대가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이에 민씨 외척들은 청나라와 일본에 지원을 각각 요청한다. 청의 개입으로 정권을 되찾은 민씨는 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유배보내고, 중전 민씨(명성황후) 수구파들 (민겸호, 민승호, 민규호, 민태호, 민영목, 민영익, 민응식 등)이 권력을 완전 장악한다. 하지만 청나라는 조선 내정 간섭이 심해지고 원세개는 조선에 청군 3천명을 상주시킨다.  또한 일본은 손해배상금 명복으로 <제물포조약>과 <조일수호조규>를 강제 체결함으로써, 조선은 청일 양대 각축장이 된다.

민씨(명성왕후) 일파들의 전국적 매관매직, 각종 이권및 수탈, 부정부패, 청나라의 내정간섭, 당오전 화폐 발행으로 악성 인플레이션 야기, 청국 상인 일방 횡포, 민씨의 무당굿 등 국고낭비 등등.. 국가는 썩을대로 썩고 민심은 극도로 피폐해진다.  이를 빌미로 청나라에 의존하는 중전 민씨 세력을 몰아내고, 일본 메이지 유신을 흉내내어 개화정권을 수립하려고 <급진 개화파>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 등)들은 1884년 <갑신정변>(일명 3일천하. 무력 쿠테타)을 일으킨다. 개화파들은 노론 북학파와 소론 양명학파 출신들로 조선 사회경제의 모순과 신분제도 (양반 및 매관매직, 노예제 등) 혁파, 조세제도 개혁, 외국문물 개방, 중정 민씨(훗날 명성왕후) 세력 숙청 등의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키지만 3일만에 반란은 실패로 돌아간다.

갑신반란의 실패원인은 첫째, 급진 개화파들 평균 연령이 25세 (서재필은 19세)의 젊은 혈기와 혁명 명분만 있을뿐, 소수 일본 유학파 (1년 정도 일본 사관학교 교육) 중심으로 개혁준비 및 전략적 전문성이 부족했고, 둘째, 개화파가 급진파 (일본 메이지 유신 모방)와 온건파 (청나라 양무운동 모방) 두개파로 나뉘어졌으며, 세째, 일본 공사의 거짓 지원 약속(반란 자금 지원, 일본 군대 파견 등), 네째, 백성들의 민심을 얻지못했으며 (백성들은 친일을 극도로 싫어함), 다섯째, 개혁 명분조차 친일 사대임. 즉 중전 민씨가 청나라를 사대하듯이, 개화파 역시 친일파들로 일본을 사대하는 외세 의존형 반란임 , 여섯째, <청불전쟁> 판단 착오 (1884년 반란 직전 청나라는 베트남 영유권 문제로 프랑스와 전쟁함으로써 조선 주둔 3천명의 청군이 철수할 것으로 예상하여 반란의 적기로 판단함), 일곱번째, 민씨의 즉각적인 청나라 지원요청 및 청의 개입으로 조기 반란 진압. 여덟번째, 왕정국가에서 왕을 위협, 민심 이탈. 아홉번째, 급진 개화파 이외에는 모두를 적으로 간주하는 극단적 선택 등이다. 즉 개혁 열정만 있을뿐, 반란이나 혁명을 할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전적으로 외세(일본)에 의존하여 국가 정복을 꾀한 정변일 뿐 아니라, 오히려 <청일전쟁>의 빌미를 제공하는 단초가 된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14편 <조선개화기와 기독교> (07-15-2016)    

 조선 근대사와 개화기를 알기 위해서는 조선 기독교 역사를 개괄적으로나마 알아야 할 것 같다. 개신교는 천주교보다 100년 늦은 1885년에 조선에 들어왔으니 천주교 전파가  조선 개화기의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은 1549년 스페인 프란시스 사비에라 신부가 오다 노부가다에게 전파한 것이 공식 선교 시작이다. 중국은 1583년 마데오 리치가 광동성에서 선교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지만, 중국은 로마 전성시대 때 부터 비단길 (실크로드)를 통해 많은 서양 문물을 접하고 있었으며, 신라, 백제, 발해 유물에서도 서양과의 접촉 사례를 추론할 수 있다. 조선 개화기 당시의 기독교는 신학 뿐만 아니라 서양 과학과 산업 기술을 함께 전파하였으므로 서양 문물을 배우는 계기가 된다.

조선은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 (1612~1645년)가  병자호란 후 인질로 청에 끌려 가서 서학(천주학)과 서양 학문을 가져온 이후, 이이명(1658~1722년), 홍대용 (1731~1783년) 등에 의해 천주교 교리 연구를 하게 된다. 뒤를 이어 권철신 (1736~1801), 정약용 (1760~1801) 등의 진보 학자들로 계승되고, 다산 정약용의 매형 이승훈(1756~1801)이 1784년에 북경에서 조선인 최초로 영세를 받는다. 즉 중국과 일본과는 달리 초기 조선 기독교는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된 것이 아니라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1801년 <신유사옥> ( 순조 1년 수렴청정 하던 정순왕후의 벽파와 천주교인들이 많은 남인, 시파간의 당파싸움으로 중국인 천주교 신부 주문모를 비롯하여 1백명 신도를 공개 처형하고, 정약용 등 400명 신도들을 유배 보냄)으로 박해 받는다.  – 1811년 북경주교를 통해 교황청 보고, -1831년 로마 교황청은 조선대목구를 선정, 교구장을 임명, -1836년 프랑스 선교사 3명이 입국, 조선 천주교인은  9천명으로 확산된다.

1839년 <기해사옥> (헌종 5년, -천주교인이 많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세력 싸움으로 3명의 서양 천주교 신부와 119명 천주교인이 투옥 처형 당한 사건), 이 당시 조선 조정은 <오가작통법>으로 탄압 (다섯 가구중에서 한 가구라도 기독교를 믿으면 다섯가구 모두 처형하는 제도)함, -1846년 조선인 최초 로마 카톨릭 사제 김대건 신부 (1821~1846)가  순교당한다.

한편 중국은 1851년 <태평천국의 난>이 발발하고, 조선에는 안동 김씨가 세도정치를 시작한다. – 또한 일본은 1853년 미국 페리제독이 흑선을 타고 일본에 들어와 개항을 요구함에 따라, -1854년 <미일 화친 불평등 조약> (일명 가나가와 조약)을 맺고 강제 개항을 하게 된다. -1856년 중국은 <제2차 아편전쟁>을 당하게 되고, -1858년 <아이훈 조약> (청-러 국경 협의 조약)과 1860년 <베이징 조약> (영,불,러시아와 청나라간의 불평등 조약. 북경이 함락되고, 청황제는 만주로 피신함. 이때 연해주가 러시아에게 강제 할양됨으로써 극동아시아 진출의 계기가 됨)이 체결된다. 중국은 -1861년 서태후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고 <양무운동> (1861~1894년, 中休西用 운동, 즉 중국의 고유 문화는 지속 유지하되, 서양 문명과 과학 기술, 특히 무기 제조술을 적극 받아들이기로 함)이 시작된다. 중국 근대화의 시작인 셈이다. 한편 일본에는 막부 내전이 시작되고, 미국에 사절단을 파견한다. -1858년 일본은 안세이 5개국 조약 (미,영,러,불, 네덜란드와 굴욕적인 통상조약)을 맺으며, 이를 계기로 메이지 유신 시대가 열린다.

한편 조선에는 -1860년 최제우가 천주교 <서학>에 맞서 <동학>을 창시한다. 이 당시에도 백성들의 삶은 피폐할대로 피폐했음을 1811년 <홍경래의 난> 이후 2백여건의 농민투쟁을 통해 알 수 있다. -1862년 <임술민란> (철종 13년, 진주농민 항쟁을 비롯하여 한해에만 경상, 전라, 충청을 비롯하여 전국 71곳에서 농민들이 민란을 일으킴. 이를 통틀어 임술민란 혹은 임술 농민항쟁 이라고 하며, 훗날 1894년 동학혁명의 계기가 됨. 민란 동기는 농기술 발달로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자, 대량 농지를 확보한 양반 지주층들의 가혹한 착취와 삼정제도-토지세의 전정, 국방세의 군정, 환곡 이자의 환정-의 문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모순, 전국 관리들의 부정부패, 농민들의 소작농 전락 등, 부익부 빈익빈의 소득 양극화 현상에 기인함. 이로 인해 조선 양반제도도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함.)이 대표적 민중 반란이다. 임진왜란 이후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는 한반도의 슬픈 역사다.   

1866년 <병인박해> (고종 3년, 흥선 대원군의 대규모 천주교 탄압 사건임. 8천명의 평신도와 프랑스 선교사  12명중 9명을 처형한 사건. –러시아 남하 정책을 저지 하기 위해 한-불-영 동맹을 추진하던 대원군의 계획이 무산되고, 영-불 연합군이 청나라 북경을 점령한 것을 계기로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이 급속 추진됨. 병인박해는 11월 병인양요의 원인이 됨) 사건을 계기로 대원군의 쇄국양이(鎖國洋夷) 정책은 -1871년 전국 200여개소에 척화비 (“서양 오랑캐와 싸우지 않고 화해를 하면 나라를 파는 것”을 비문에 새김)를 세우고, 서원 철폐, 일본국서 거부, 오페르트의 남연군 분묘 도굴사건 등으로 더욱 강화되었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13편 <16~18세기 세계사 연혁> (07-08-2016)

19세기 조선 개화기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중국과 일본, 서구 강대국들의 근대사 배경을 알아야 한다. 너무 광범위하므로 연혁대별로 16세기부터 18세기의 세계 근대사 주요 사건만 되짚어보자.

16세기 (성종, 선조 시기) 주요 세계사는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 (1492년)과 루터의 종교 개혁(1517년)이 가장 중요한 사건이 아닐까. 신대륙 발견으로 유럽의 제국주의들은 세계 식민지 침략 전쟁이 시작되었고, 종교 개혁으로 민중들의 평등 투쟁과 인권 확립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519년 마젤란 세계일주, – 1533년 인도 무굴 제국 창건, -1534년 잉카제국 멸망, -1536년 칼뱅 종교 개혁, -1543년 코페르니쿠스 지동설 발표, -1562년 프랑스 종교전쟁 (위그노 대학살), -1565년 스페인 필리핀 점령, 1566년 네덜란드 독립 전쟁, -1590년 토요토미 히데요시 일본 통일, -1598년 프랑스 낭트 칙령,

17세기(인조, 효종, 헌종, 숙종 시기) 주요 세계사는  -1600년 영국 동인도 회사 창설, -1603년 에도 막부 수립, -1607년 영국 미국의 버지니아에 식민지 건설, -1618년 30년 전쟁 (~1648년, 카톨릭교 국가들과 개신교 국가들 사이의 종교전쟁이자, 최초 국제 전쟁임. 신성 로마제국의 몰락, 스페인 제국의 쇠락, 독일의 황폐화, 프랑스의 세력 확장, 네덜란드 스위스 독립 등 유럽 권력 재편의 계기가 됨), -1620년 청교도 미국 상륙, -1649년 영국 공화정 시작,  -1688년 영국 명예혁명 (카톨릭과 개신교의 갈등, 왕권 신수설과 의회의 갈등으로 왕권 교체), -1689년 청-러시아 네르친스크 조약 (헤이롱강- 아무르강과 외싱안링 산맥을 청-러의 극동 국경선을 정함, 북만주가 중국 땅이 됨)

18세기 (영조, 정조 시기) 주요 세계사는 -1700년  대북방 전쟁 (~1721년, 러시아와 스웨덴의 발트해 주도권 장악 전쟁임. 러시아의 승리로 발트해 지배및 유럽 신흥 강국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됨), -1713년 영국 스코틀랜드 합병, -1736년 영국 산업혁명 시작, -1756년 7년전쟁 (~1763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빼앗긴 독일 동부 영토를 되찾기 위해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작센-스위덴-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프로이센-영국-하노버 연합과 맞서 싸운 전쟁임. 프로이센이 최종 승리하여 영국은 북아메리카와 인도에서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고 대영제국의 기초를 만든 전쟁임), -1760년 유럽 산업 혁명 시작, -1773년 미국 독립전쟁 (보스톤 차 사건), -1776년 미국 독립 선언, -1789년 프랑스 대혁명 (~1793년, 시민의 권리 선언, 정치 권력이 왕족에서 자본가 계급으로 이동, 도시민과 농민 세력 부상, 혁명후 75년간 공화정, 제국, 군주제로 바뀌면서 세계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 -1796년 백련교도의 난 (~1804년, 청나라 호북성, 사천성, 협서성 3성의 넓은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빈농, 노동자 사이에 백련교가 퍼지면서 반권력 폭동으로 일어남, 청조는 묘족의 난과 겹쳐 심각한 재정 위기를 맞음),

19세기 전반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시기) 주요 세계사는 -1804년 신성 로마제국 멸망, 나폴레옹 황제 즉위(~1814년), -1814년 스티븐슨 증기 기관차 발명, -1815년 워털루 전투 (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웰링톤의 영국-네덜란드-프로이센 연합군 간의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함, 또한 나폴레옹 패전 소식을 제일 빨리 입수한 로스차일드는 런던 주식 시장에서 주식 역판매로 거액을 챙겨 오늘날 까지 세계 금융 시장의 대부가 되는 계기가 됨), -1815년 독일 연방 창설, -1819년 싱가포르 영국령이 됨. -1821년 그리스 독립전쟁 (~1829년,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의 투르크인들이 그리스를 지배함. 러시아-영국-프랑스 연합 해군이 그리스를 지원하여 오스만- 이집트 함대를 물리치고 1832년 그리스가 독립국으로 승인됨), -1823년 미국 먼로주의 선언 (미국 제임스 먼로 대통령은 향후 미국은  유럽 대륙 및 식민지 전쟁에 중립을 지키며, 미국은 유럽 열강의 미국에 대한 일체의 간섭 및 침략을 거부하는 신세계임을 공표함, 이것은 향후  200년동안  미국 외교정책의 기본 입장이 됨), -1833년 영국 노예제 폐지, -1834년 독일 관세 동맹  창설(독일 연방 관세 철폐 및 통합,  자유 무역), -1837년 영국 빅토리아  여왕 등극 (~1901년 64년간 재위, 빅토리아 시대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대영제국의 최전성기와 일치), -1840년 1차 아편전쟁 (~1842년, 중국의 아편 단속을 핑계로 영국이 일으킨 전쟁. 중국의 최대 수출품은 차(茶), 영국의 수출품은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 영국의 무역 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수출함, 중국이 임칙서를 내세워 강력 대응, 마약상들을 홍콩으로 쫓아냄. 이에 영국은 무역항 확대 빌미로 아편전쟁을 일으킴),  -1842년 난징조약 (1차 아편전쟁 댓가로 영국은 홍콩을 장기 할양받고, 상하이 (上海), 광저우 (廣州), 푸저우 (福州), 샤먼 (慶門), 닝보(寧波)  등 5개 항구를 강제 개항 시킴).

이후의 19세기 세계 후반 근대사는 조선 근대사와 함께 다루기로 하자.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12편 <국가와 역사> (07-01-2016)

이제부터 한국 근대사를 4단계로 나누어 공부하고자 한다. 먼저 세계 산업혁명 시기 전후와 고종 즉위 이전 시기 (1700~ 1862년), 그리고 일본 메이지 유신 시대와 고종 재임기간의 조선 개화기 및 경술국치 까지 (1863~1910년),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와 조선 독립 운동사 (1911~1945년), 한반도 해방 후 동아시아 30년 전쟁, 공산주의 북한 역사와 친일파의 남한 역사 (1945~현재 까지)이다. 물론 이 방대한 역사 자료들을 비전문가가 몇회의 칼럼에 기술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이렇케라도 역사에 무지한 내 자신의 한국 역사관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왜 한반도 내 조국은 그 많은 외세의 공격을 받아야 하고, 침략을 당할 때 마다 백성들만 죽어나야 하는지, 어떻게 하다가 나라까지 빼앗기게 되었는지, 일제 식민지 기간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으며, 왜 수많은 독립 투사들의 기록들은 알려지지 않는지, 해방이 된 후 민족의 죄인이자 반역자인 친일파들이 오늘 이 시점까지 대한민국을 우지좌지 하는 기득권 세력들로 되었는지, 왜 오늘날 마져도 사회 곳곳이 부정부패와 거짓말이 난무하는 불신과 체념의 사회가 되었는지, 왜 출세 야욕과 황금 만능주의로 최소한의 도덕심 마져도 내팽겨쳐 버리는 사회가 되었는지, 아직도 세계 유일한 분단 국가이며, 가장 처참한 동족간의 전쟁을 치룬 나라인 동시에, 아직도 남북한 동족을 가장 불천지 원수로 싸우는 우민한 민족이어야 하는지,,, 세계인들이 비웃기 전에 내 자신이 부끄럽고, 그러기에 내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기 위해 이 지루한 근대사 칼럼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경술국치(1910년) 이후 현재까지 교육받은 한인 세대들은 제대로 된 한국 근대사를 공부할 수도 없었고 한국 근대사를 거론하는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다. 그것은 역사 국정 교과서 라는 미명 아래 현 정권까지도 계속된다. 그래서 우리 세대 머리 속에는 좌익, 빨갱이, 공산주의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감으로, 편협되고 조작된 역사 교육만 받은 것이다. 과거 청산 없는 역사의 조작과 거짓이 작금의 한국인들을 황금 만능 괴물 혹은 무지한 수탈자로 흉물스럽게 변질된 것은 아닐까? 

 1880년 일본 청국 공사관으로 있던 청국인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에서도 통렬히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조선을 <연작처당 (燃雀處堂) – 처마 밑에 사는 제비(참새)가 집에 불이 난 위험에 처해 있으면서도 자각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조선이 위기에 대처할 두가지 핵심은 <자강 (自强) –스스로 힘을 길러라>과 <균세 (均勢) –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결속을 다지며, 미국과 연대하여 힘의 균형을 유지하라>라고 했다. 한국의 생존 전략인 이 두가지 키워드는 조선 건국 이후 오늘에 이르는 현 시점 까지, 아니 미래에도 한국이라는 국가와 백성을 지키기 위한 불변 요소다. 이 역사적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멀지 않은 미래에 또다시 수치스런 역사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하기 떄문이다.

국가란 무엇인가?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플라톤의 <국가론>을 다시 인용해 보자. 국가는 인간의 필요성에 의해 시작된다. 인간 스스로 자족하지 못하니 서로의 필요성에 의해 일정한 지역에 모여 도움과 협력으로 경제적 사회를 형성한 것을 국가라고 부른다.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는 백성 전체에게 최대한의 행복을 주는 것이다. 평등과 정의와 선이 전제되어야 할 것 같다. 특히 플라톤은 이데아 이론에서 모든 이데아 가치는 원형(原形)이 존재하는데, <선의 이데아>야 말로 만물의 목적인 동시에 만물이 존재하는 원인이라고 말한다.

이상국가의 구성원은 세분류로 나눌 수 있는데 통치 계급 (왕, 통치자), 수호 계급(군인, 집행 기관), 생산 계급(노동자, 백성)이다. 이들은 각각의 합당한 덕이 있고, 이 덕목들이 잘 조화를 이룰 때 이상 국가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첫째 통치자는 <지혜>, 즉 깊은 사색을 통한 지식, 국내 일에 관한 지식, 대외 관련 철학적 지식, 그리고 선의 이데아를 갖고 있어야 한다. 특히 <동굴 이론>에서 지도자는 동굴 속에 갇혀서 모상 (模像, 그림자, 가짜)밖에 보지 못하는 백성들과는 달리, 동굴 밖의 원형(原形, 선의 이데아)을 보고 깨달아야 하며, 선의 이데아를 실현하도록 해야 한다.  이런 통치자를 철인(哲人)이라고 표현한다. 과연 대한민국 통치자들 중에 몇명이나 해당되는지 되묻고 싶다. 둘째, 국가 수호자인 집행 기관은 <용기>가 필요하며 용기는 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 어떠한 고통, 쾌락, 욕망, 공포에 굴복함이 없이 정의에 대한 올바르고 합리적인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 세째 생산 계급인 백성은 <절제>있는 행동으로 쾌락과 욕망을 절제하고 극복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 근대사와 현대는 이 세단계 부류의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돈과 출세, 개인의 욕망을 위해 지옥에서 아비귀환인 상태로 살아온 것은 아닐까? 윗물, 중간물, 아랫물이 차례대로 오염되어 이제는 온통 시궁창이 된 것은 아닐까? 설마 백성들이야..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11편 <만주 역사> (06-24-2016)

 19세기 조선 개화기와 근대사를 다루기에 앞서 우리는 만주 벌판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1644년 청나라가 베이징을 접수할 때 여진족은 50만명, 한족 (漢族)은 족히 1억 5천만명으로 추산된다. 300배나 많은 한족을 300년 가까이 지배한 여진족과 한민족의 <만주 역사>는 어떠한가?

한국인들이 만주를 지배하던 고구려 시대에는 강성대국이었고, 주변 강대국들이 만주를 점령할 시에는 한반도는 열소빈국이었다. 지금도 중국은 <동북공정>을 주장하며 북한 땅까지 넘보고, 일본은 <대동아 공영>을 명분으로  만주 사변을 통해 조선과 만주를 먹어 삼킨 전례가 있다. 이렇게 한반도와 만주는 주변 강대국들에게는 순망치한 (脣亡齒寒 –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인 셈이다. 만주가 치아(齒)이면 한반도는 입술인 셈인데, 지금은 남북한 38선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 남북한이 하루 속히 통일 되어야 하는 이유이며, 향후 한반도 혹은 만주 지역에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만주 지역에는 3 계통의 종족이 살았다. 중부의 예맥족은 한반도 남부의 한족(韓族)과 더불어 한민족 근간을 이룬다. 이들은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를 건국했다. 또 동쪽의 숙신족 계통은 중국 주-진 시기에는 숙신, 한-위-지 시기에는 읍루, 남북조 시기에는 물길, 수-당 시기에는 말갈, 요-명 시기에는 여진, 청나라 시기에는 만주로 불렸다. 말갈족들은 고구려 유민과 함께 발해를 건국했고, 여진족은 금나라와 청나라를 건국했다. 또 서부 지역의 동호족은 오환, 선비, 거란, 실위를 세웠다. 훗날 거란은 요나라를 세워 발해를 멸망시키고, 실위는 훗날 12세기 징키즈칸이 몽골제국을 만들면서 원나라를 건국했다. 즉 근대사 이전까지는 만주는 중국과는 별개의 영역이었으며, 대동강 이북의 평안도와 함경도도 고려의 서희가 여진족을 몰아내기 이전까지 여진족의 땅이었다. 그러다가 조선 세종 때 압록강,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을 확정하고 여진족이 만주 전역를 점령하고 부터 사건이 달라진 것이다. 여진족은 청나라를 건국한 후 신장, 티베트, 내몽골 지역 까지 차지하니, 중국의 영토가 명나라 때보다 40%이상이 확장된 셈이다. 하지만 여진족의 청나라는 300년 동안 중국을 지배하면서 한족들에게 동화되어 만주국 언어가 소멸되고, 고유 문화도 잃어버린다. 반면에 한민족은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지금까지 동일한 언어와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면서 민족 동질성을 유지함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이후 일본은 중국을 차지하기 위해 조선과 만주 침략을 정당화하고 조선 식민지를 영토 확장의 빌미로 삼기 위해 만선사관 (滿鮮史觀 – 일본이 조선을 만주로 부터 해방시켰다고 주장함)을 주입, 고착화 시킨다. 뒤에서 다룰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31년 만주사변, 1932년 만주국 건설, 1937년 중일전쟁 등, 한반도에서 일어난 근대 전쟁들은 만주 지역의 정세 변화와 직접 연관된다. 또한 만주지역은 중국 국공 내전시기에 모든 지역에서 열세였던 마오쩌둥이 이곳에 진입한 후 만주의 중국화는 가속화된다. 이후 중국 항일 전쟁, 조선 독립 운동사, 1백만명 조선 실향민과도 직결된다.

만주는 한민족의 땅이었다. 김광석의 운동권 가요 <광야에서> 가사처럼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 벌판 /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 /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 움켜진 뜨거운 흙이여”… 단군 왕검께서 BC 2333년에 고조선을 세우신 이래, BC 194년 위만조선 때에는 옥저, 동예까지 였다. BC 37년 주몽이 졸본지역에 고구려를 세우시고 AD 311년 미천왕 때 선안평을 점령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차지한다. 광계토왕 (391~412년) 때는 부여를 정복, 라오허강 동쪽부터 중국 동북부에 이르기 까지, 요동에서 연해주까지,  64개 성과 1,400개 마을을 차지하였다. 5세기부터 7세기 까지 만주 전역을 고구려가 차지하지만 668년 당나라에 고구려는 망한다. 대조영은 698년에 고구려 유민들을 집결시켜 발해를 건국한다. 신라가 당나라 외부세력을 끌어들이지 않고 고구려가 스스로 삼국통일을 했다면 한민족의 영토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알 수는 없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수습과정에서 외만주와 연해주가 러시아에 할양되고, 의화단의 난으로 러시아가  만주를 점령하여 20만 대군을 주둔시키고 극동총독부를 설치한다. 더 나아가 북만주와 하얼빈을 차지하고 송화강과 고비사막을 러-청의 경계로 정하지만,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러시아는 철군한다. 1906년 청은 만주 지역을 <동북3성-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성> 체제로 전환하여 한족을 유입시켜 인구를 늘린다. 하지만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일본은 동북 3성과 하북성을 병합해 만주국을 만들지만, 2차세계대전 패망으로 만주국은 붕괴된다. 현재 만주는 중국의 산업경제의 주요 중심지다. 만주 연길에서 장춘까지만 해도 300Km이며, 기차로 8시간 동안 가도가도 끝없는 평야다. 옥수수 등 비옥한 곡창지대이며, 풍부한 지하 광물을 중심으로한 공업지대이다. 1997년 기점으로 이미 1억697만명 인구가 살고 있으며, 만주족 1천만명에는 2백만명의 조선족, 거란족, 몽골인 등이 포함되어 있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10편 <병자호란> (06-17-2016)

 1627년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선조 처럼 백성들을 버리고 강화도로 도망간다. 여진족이 해군이 없다는 약점을 간파하고 강화섬으로 잽싸게 피신한 것이다. 형제지국의 화친조약을 맺고, 전쟁 보상금으로 황금 1만냥, 은 1만냥, 포 5백만필, 모시 50만필, 군사 3만명, 말 3천마리를 요구한다. 무능한 조정으로 인해 또다시 마른 수건에 물 짜듯이 조선 백성들의 고혈을 짜 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1632년 후금은 내몽고 세력을 규합하면서 세력이 커지자 조선과의 <형제 맹국>에서 <군신지국>으로의 격상과 더 많은 세공을 요구한다. 이에 조선 조정은 김상헌(노론, 주자학)의 <척화파>와 최명길 (소론, 양명학)의 <주화파>로 극명하게 나뉜다. 특히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이라 칭하고 청태종을 황제로 칭호토록 한다. 이에 척화파들은 오랑캐 추장에게 황제라 칭하며 주군으로 모실 수는 없으니 사신 용골대의 목을 쳐 죽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주화파는 청나라의 막강한 세력을 인정해야 한다고 맞서지만, 인조는 척화파의 손을 들어준다.

때마침 인조는 평안감사에게 청과 맺은 군신 맹약을 파기하니, 청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밀서를 보내는데, 이 밀서를 용골대에게 빼앗긴다. 이 밀서 탈취사건을 빌미로 정묘호란 9년 후인 1636년 12월 6일 청태종 홍타이지는 10만대군을 이끌고 심양에서 출발하여 10일만에 한양에 입성한다. 병자호란은 45일간의 단기 전쟁이다. 속전속결로 끝난 병자호란의 배경은 척화파의 반대가 주된 이유가  아니라, 청나라의 연이은 만주 지역의 흉년과 대명 무역 차단으로 인한 극심한 재정 고갈난 때문이었다. 다만 임진왜란 때와는 달리 조선에는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충분한 관군 (조선 수비대인 속오군이 8만~9만명)과 수만의 의병이 있었지만 참패한 이유는 첫째, 이순신과 같은 기적의 성웅이 없었고, 둘째, 이괄의 난 학습효과로 중앙 정치 세력에 병력을 몰아주는 기찰 정치를 하면서, 정작 전방 병력을 제대로 배치하지 못한 인조의 실정 때문이다. 인조는 왕자들과 왕실 가족들을 강화도로 피신시키지만, 인조는 퇴로가 차단당해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몸을 숨긴다.

하지만 엄동설한의 추위와 극심한 기아에 탈영병들은 급증하고, 원군 지원을 요청한 명군은 오지 않으니, 1월 26일 강화도가 함락되고, 1월 30일 인조는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는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삼전도의 삼배구고두 (三拜九叩頭)  굴욕사건>이다. 즉 석천동 삼전도에서 당태종의 발 아래에 인조가 세번 큰절을 올리고, 한번 절할 때마다 세번씩 머리를 땅에 쳐박는 여진족 항복 예식이다. 이것은 1910년 경술국치 다음가는 조선의 굴욕적인 항복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김훈의 <남한산성>을 읽어보면 조선 국왕의 수치는 물론, 백성들이 항쟁하며 겪는 삶의 처절함과 고통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다. 만약 함경도군 2만명을 이끌고 있던 김자점이 청군의 보급선만 끊고 장기전에 들어갔더라면, 강화도를 지키던 김경진이 제대로 싸우기만 했더라면, 조선은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관군을 이끌던 조정 중신들은 당리당약으로 멍청하니 세월만 보냈다.

병자호란 후 청과의 강화조약은, 명과 국교를 끊고 청과 군신관계를 맺을 것. 소현세자 (1612~1645년)과 봉림대군 (훗날 효종, 1619~1659년)을 청의 수도 심양에 인질로 보낼 것. 조선의 인질이 조선으로 도망올 경우 붙잡아서 무조건 심양으로 보낼 것. 명을 공격할 때 조선 자비로 원병을 보낼 것. 매년 청에 막대한 세폐를 보낼 것 등이다. 그중 가장 굴욕적인 사건이 조선 백성 인질 사건이다. 일명 <환향녀 (還鄕女)> 사건이다. 병자호란 그해 겨울에 심양까지 끌려간 조선 백성들은 후송 도중에 죽은 자를 제외하고도 60만명이라고 한다. 지금 남한 인구가 5천만명이면 그 당시 조선은 5백만명이었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6백만명이 인질로 끌려간 셈이니 그 아비귀환은 가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인질 대부분이 젊은 남녀이니 양반, 상놈 가리지 않고 대부분 끌고 간 셈이다. 조선의 여자 인질들은 대부분 청국인들의 첩이 되었는데, 청국 본처의 구박과 학대와 모멸감이 극에 달했다고 한다. 조선 포로들 중에서 극적으로 탈출하여 압록강을 넘어오더라도 조선 관군이 다시 붙잡아서 청국에 돌려 보내야 했다. 그러면 청국은 탈출 포로들의 발 뒤꿈치를 도끼로 찍어버리는 혹형에 처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포로를 돈으로 살 수 있었는데, 조선 양반들이 자신의 가족을 서로 빼 갈려고 하는 통에 포로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으며, 일반 백성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그렇게 귀국한 포로들 조차 가문과 지역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매춘녀 취급을 당하니, 목 매달아 자살 하거나, 머리 깍고 스님이 되거나, 몸을 파는 여자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속환된 여자를 <화냥년>이라는, 그녀가 낳은 자식을 <호로 (胡虜)자식>이라는 욕설이 이때 생겼다는 야설도 있지만, 결코 사실무근이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9편 <정묘호란> (06-10-2016)

 1597년 임진왜란이 끝난 후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선조 (1567년~1608년, 41년 집권)의 아들 광해 (1603년~1623년, 20년 집권)는 선조가 의주로 도망가 있는 동안 백성들과 함께 왜적들과 싸웠다. 조선 왕조 최초로 이원 집정제 (分朝)를 실시한 것이다. 광해는 왕세자로 책봉된 이후 16년동안 선조의 병적인 권력 견제심리로 항상 의심받는다.

한편 조선의 주군, 명나라 (1368년~1644년)의 마지막 황제 만력제는 1600년 이후부터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조정회의를 한번도 주재하지 않음은 물론, 정사는 환관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환관정치에 황제의 극심한 향락주의와 대규모 토목공사들로 인해 막대한 자금을 무자비한 수단으로 중국 백성들에게 수탈한다. 반면에 만주벌판과 요동을 거점으로 한 여진족 누루하치(1539년~1626년)는 1616년에 후금 (훗날 청나라)을 창건한다. 또한 명나라에 대한 조공 중지를 선포한다.

광해는 왕이 된 후 군사력 강화와 신무기 개발을 위해 화기도감 (火器圖鑑)을 설치하고, 어려운 재정 가운데서도 군사를 양성하며, 성들을 증축한다. 외교적으로는 많은 정보와 첩보를 바탕으로 명나라의 쇠퇴함과 후금의 막강한 군사력을 간파한 광해는 외교 중립노선을 걷는다. 하지만 명나라는 여진족의 세력이 커짐을 우려하여 광해에게 전쟁 파병을 요청한다. 한국의 최초 파병 역사다. 조선은 할수 없이 도원수 강홍립 장군을 임명하고 1만3천명의 군사를 파견한다. 임진왜란 20년, 광해 10년인 1618년 명나라는 조선 병사들을 방패막이로 후금의 누루하치를 공격한다. 하지만 강홍립은 광해의 밀지를 갖고 최대한 시간을 끌다가 후금에 투항한다. 한양에서 압록강까지 이동하는데 6개월이 걸렸다고 하니 광해의 저의를 알고도 남음이다.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은 외교밀사 자격으로 조선과 후금의 밀월관계를 지원한다. 광해의 양면 외교술이다. 하지만 후금과의 밀월 소문은 마침내 조정 대신들도 알게 된다. 이에 조선의 조정대신들은 봄철의 개구리들 처럼 광해의 외교정책을 비판하며 들고 일어난다.

또한 요동을 후금에게 빼앗긴 명나라 요동 백성들은 조선으로 밀려와 정착하니 그 숫자가 1622년까지 12만명에 이른다. 그들 수장은 모문룡이라는 자로서, 요동정벌을 빌미로 조선에게 식량과 군사물자를 강탈해 감은 물론, 조선을 감시 견제하는 역할까지 한다. 이에 광해는 전략상 이들을 압록강 부근 가도 섬에서 집창촌을 이루어 살게 한 후 지원을 끊는다. 하지만 광해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임진왜란 때 불 타버린 궁궐 공사외 성곽 보수공사를 위해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징세 관리들과 조정 대신들은 이를 악용해 뇌물과 인사청탁으로 부정부패하니 백성들의 삶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졌으며, 붕괴직면의 민심은 광해의 등을 돌린다.   

이렇게 일어난 것이 1623년 (광해 15년) <인조반정>이다. 조선 3대 반정 (계유정난, 중종반정, 인조반정) 중 하나로 서인 반역세력 ( 이괄, 김자점, 이귀, 김류 등)이 광해군과 대북파 (소북파 포함)를 축출하고, 능양군을 인조로 옹립한 사건이다. 반정의 명분은 크게 세가지로서, 후금과의 화평정책에 대한 부당성,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 영창대군의 의문 살해 사건이었지만, 결국은 과도한 정책 입안으로 인한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막대한 세금 징수에 따른 민심 이반이라 할 수 있다.

인조 (1623년~1649년, 26년 집권) 역시 성공할 수 없는 쿠테타로 성공한, 왕이 될 수 없는, 왕이 되어서도 안되는 자가 왕이 된 것이다. 인조는 개인적인 복수심으로 모반한 쿠테타이지, 신하들로 부터 옹립된 왕이 아니다. 반정 일년 후에는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북방 사령관인 이괄이 난을 일으킨다. 이것이 1624년의 <이괄의 난>이며, 이로 인해 북방 방위선이 무너져 정묘호란의 빌미가 된다. 이 시대를 다룬 영화가 <광해, 궁중 잔혹사, 서궁, 왕의 여자, 회천문, 청풍명월, 추노, 활, 화정> 등이 있다.

반면에 후금은 태조 누루하치가 사망하고 주전론자인 태종 홍타이지가 즉위한다. 그가 친명정책을 주장하는 조선을 공격하니 이것이 1627년 인조 4년의 <정묘호란>이다. 임진왜란 후 30년째 되는 해이기도 하다. 정묘호란의 배경은 이러하다. 후금의 홍타이지는 명나라를 공격하고 싶었지만, 등 뒤에 명나라와 군신 관계에 있는 조선이 있다. 조선의 반정 세력인 서론들은 명나라를 주군으로 모시고 (친명정책), 후금을 오랑캐 라고 경멸 (배금정책) 했다. 또한 평북 철산의 가도에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군사를 만들어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이 두가지 모두가 눈의 가시였던 셈이다. 또한 그 무엇보다 후금은 명나라와의 무역으로 국가 재정을 마련했는데,  국교단절로 인해 극심한 식량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후금의 홍타이지는 명을 공격하기 이전에 조선을 정복하여 후한을 없애고, 조선으로부터  식량 지원을 받아야 하는 급박함으로, 부당하게 폐위당한 광해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1672년 1월, 3만의 후금군이 조선을 공격한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8편 <임진왜란 –최종회> (06-03-2016)

순신 장군은 혁명가나 권력 야심가도 아니고, 강력한 세도가도 아닌, 일개의 지역 장수였다. 그가 한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성웅 (聖雄)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순신이 왜적들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 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나 이은상이 번역한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면 그는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아버지였으며, 남편이었다. 가정을 지키고 싶었고 가족을 사랑했다. 그러나 왜군들에 의해 가족은 위협당하고,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가장으로서의 그는 긴긴 밤들을 슬퍼하고 고뇌했다. 그는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 하고, 왜군들 마저 동정했다. 그는 시인이었으며, 늘상 책과 가까이 했다. 그는 실존적 휴머니스트였다.

다만 그는 한 나라의 군인이었기에 절망 속에서도 무의미한 희망을 갖지 않았으며, 최상의 선택을 하기 위해 불철주야 고전분투했다. 국가와 백성을 사랑했기에 그는 출세 야욕에 눈멀지 않았고, 사리사욕과 당파에 휩쓸리지 않았다. 주군인 선조의 변덕과 의심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존망이 등전풍화와 같았기에, 수많은 밤을 잠못 이루고 뒤척여야 했다. 반면에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백성들의 존망과 세력이 커짐을 경계하여,  가당치 않는 명령을 내리고 이를 핑계로 이순신을 형벌로 고문 한다. 온 육신이 망가진 이순신은 백의종군을 선택하며, 결국 노량 해전에서 자살같은 죽음을 선택토록 강요당한다. 만약 이순신이 남해안 여러 해전에서 일본 함선과 보급선을 격파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이미 임진왜란 때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나자 전란의 공을 명나라에게 모든 은덕을 칭송하고 선조 자신의 몽진(한양 –개성-평양-의주) 결정을 정당화 했다.

임진왜란 7년은 참으로 슬픈 조선의 역사다. 조정과 양반들은 기득권자들로서 자신의 권력과 부를 좀더 차지하기 위해 헛된 짓들로 일관한다. 당파 세력을 위해 수많은 학자와 인재들을 대량 학살한다. 왕은 멀리서 충신와 백성을 죽여서 자신이 살려고 하고, 조정대신들은 국가와 백성들을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자력갱생>도 안되고, 주변 국가와 세계 정세에는 무지했으며, 그래서 주변 국가들과의 <힘의 균형>도 이루지 못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임진왜란은 조선이 일본에게 승리한 전쟁이 아니다. 일본을 공격한 전쟁도 아니고, 왜군을 조선에서 자발적으로 몰아낸 전쟁도 아니다. 왜군은 도요토미 사망으로 도쿠가와 시대로 바뀌었기 때문에, 본거지가 관동지역인 도쿠가와 세력 안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철수한 것이다. 주군인 명나라는 여진족 (후금)의 세력 확장으로 일촉즉발 전쟁 상황이었으므로, 조선을 지켜줄 여력이 전혀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명나라는 임진왜란 7년동안 조선을 위해 전쟁다운 전쟁을 한번도 한적이 없다. 게다가 지금의 한국처럼 <전시 작전권>이 명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 스스로 왜군과 맞서 싸울 수도 없었다. 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내 나라 군사들을 동원할 수 조차 없었다. 내가 내 가족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데 누가 내 가족을 지켜준단 말인가? 무능함과 어리석음이다.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성웅(聖雄) 이순신 장군이 무지렁이 백성들과 함께 조선을 구하고 조선의 역사를 바꾸었다는 것은 단지 기적이며 전쟁사의 위대한 승리일 뿐, 정상적인 국가의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국가의 운명과 백성들의 삶과 생명은 기적에 의지해서도 안되며, 요행을 바래서도 안된다.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임진왜란 7년동안 조선의 군사들만 죽었겠는가? 한반도 조그만 땅덩거리에서 4만명의 명나라 군인들과 15만명의 왜군들이 3년동안 전쟁하고 4년동안 협상 명분으로 조선에 주둔하면서 얌전하게만 있었겠는가?  인구조사를 보면 1669년 현종때 조선 인구는 502만명, 131만호였다. 그러니 임진왜란 당시에는 5백만명도 안되는 인구였다. 또한 전국 농경지의 70%, 전국 인구의 50% 이상이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 몰려 있었다. 경상도는 고려 말기부터 시도 때도 없이 왜놈들이 쳐들어 오니 성할 날이 없었고, 전라도 충청도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전략상 집중적으로 작살이 난 곳이다. 왜군과 명군 20만명의 젊은 병사들이 7년 이상을 주둔하면서 조선 백성들의 곡식만 작살나겠는가? 수많은 조선의 여자들이 작살난 것은 불보듯이 뻔하다. 남자들은 왜군에게 끌려가 왜선들 노를 젓고 조선 관군들과 싸우다 죽어간다. 현재 남한 인구가 5천만명인데 2백만명의 외국 군대가 들어와 있다고 상상을 해보라. 어느 시대 어느 국가의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다. 패전국의 백성들과 부녀자들의 참혹한 삶은 역사가 눈물로 증명한다. 아무런 죄도 없이 조선의 백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조선 땅에서 산다는 이유만으로, 왕과 관료들의 사리사욕 때문에, 전쟁나면 끌려 나가서 죽고, 착취당하고 얻어맞고 강간당하는, 그래서 굶어죽고 자살하고 도륙당하는, 그런 슬픈 역사가 그때부터 해방 후 6.25 전쟁, 심지어 군사독재 시절까지400년간 수없이 반복되는 것이다. 언제나 왕과 조정은 무능하고, 민중과 부녀자들이 목숨으로 나라를 지킨다. 조선의 민중은 언제나 위대했다. 하지만 민중의 역사는 슬픔이 반복된다는 것이 슬픈 것이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7편 <임진왜란 -3> (05-27-2016)

 7년 전쟁인 임진왜란 (1592.4.13 ~1598,11.19) 은 1차 임진왜란 2년 (1592~1593)과 4년동안 명,일 협상기간, 2차 정유재란 1년 (1597.7.8 ~1598.11.19)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임진왜란 일지를 적어보자.

  • 4. 13 : 고니시 유키나가 일본군 1군을 선봉으로 우키타 히데이에 총대장 16만 대군으로 조선 침공.
  • 4. 15 : 이틀만에 부산진성. 동래성 함락
  • 4. 28 : 충주 탐금대 전투에서 삼도 순변사 신립 장군 패배, 전사. (선조는 신립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하고 조선 경군(수도 중앙경비 병단) 8천명까지 지원했으나 전멸당함) — 선조 4월30일 한양 파천.
  • 5. 3 : 20일만에 한양 함락
  • 5. 7 : 이순신 옥포해전에서 승리
  • 5.17 : 임진강 방어선 붕괴
  • 5. 25 : 홍의장군 곽재우 의병 봉기. 경상도 의령, 조헌. 승병장 영규.
  • 5. 29 : 거북선 최초 실전 투입
  • 6. 15 : 두달만에 평양성 함락, 선조 의주로 피난. (6/23일 선조 의주 도착)
  • 7. 7 : <한산도 대첩>. 이순신 47척 함선으로 적함 70여척중 66척 격파.
  • 10. 5 : <진주대첩>. 3만명의 왜군이 진주성 공격. 3천8백명의 조선관군과 의병, 백성들이 진주성을 방어함. 진주 목사 김시민 전사. 왜군 1만명 사망.
  • 겨울 : 선조는 명나라로 망명할려고 하나 명나라는 허락하지 않음. 평양성의 일본군은 한산도 대첩 패배로 보급 물량 지급이 중단됨. 극심한 추위와 배고픔으로 병력 3분의 1이상이 동상과 극심한 굶주림으로 의주를 공격하지 못함.
  • 1. 6 : 명나라 이여송 4만 병력과 조산 연합군 평양성 탈환. 왜군 후퇴.
  • 2. 12 : <행주대첩>. 권률 2천3백명 군사와 백성들이 3만명의 일본군을 대파. 일본군 남쪽으로 후퇴.
  • 6. 22 : 일본군 9만명이 진주성 재공략. 6일후 진주성 함락. 군사. 백성 6만명이 살륙당함.
  • 1594~1597 : 4년간 명나라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 간 물밑 협상. – 협상 조건  첫째. 조선 8 도(八道)중, 남조선 4도(四道)를 일본에게 이양할 것. 둘째. 조선 왕자를 볼모로 일본에 보낼것. 세째. 명나라 공주를 토요토미 후궁으로 삼는다. 네째. 조선의 권신이 일본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서약. 다섯째 양국간 무역증서제 부활 등등 이다.
  • 7. 6 : 이몽학의 난.- 1차 임진왜란과 거듭된 흉년으로 농민들은 가난했고, 서얼 출신 이몽학이 도천사 승려들과 7백명의 농민, 조정의 불만세력들을 규합하여 수천명이 난을 일으킴. 선조는 이 난을 계기로 이순신 장군, 곽재우 의병장 등을 의심하고 견제함.
  • 7. 8 : <정유재란> 발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를 대장으로 14만 대군, 주력선단 6백척으로 침략함. -명나라 심유경의 술책으로 협상이 지연된다는 것을 알게 된 토요토미는 조선을 다시 공격할 것을 명령함. – 첫째 전라도를 철저히 징벌하고, 둘째. 충청도와 경기도를 침공하여, 성곽을 짓고 성주를 둘것. 세째. 의병의 원인인 조선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살해 하고, 그 증거로 살륙한 조선 백성들의 코와 귀를 베어올 것.
  • 7. 15 : 원균의 <칠천량 해전>에서 대부분의 함선 대패하고 전사함.
  • 8. 16 : 명군과 조선군이 지키던 남원성 함락, 명군 도망.
  • 9. 16 : <명랑 대첩>. 백의종군 이순신이 배 12척으로 일본 함대 130여척을 격파.
  • 8. :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도쿠가와 이에아스로 정권 이양. 일본군 철수 명령. –  일본군 철수 원인 : 도쿠가와는 관동지역 다이묘였으므로 조선과 전쟁하기에 거리가 멀고, 국내 다른 다이묘들의 공격을 당할 위험부담이 큼.
  • 11. 19 : <노량대첩>에서 일본으로 철수하는 일본 전단 2백여척을 격파. 이순신은 비무장 상태에서 전사당함.

임진왜란 3대 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 김시민의 <진주 대첩>, 권율의 <행주대첩>이다. 또한 이순신의 3대 대첩은 <한산도 대첩>, <명량 대첩>, <노량 대첩>으로 꼽을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없는 임진왜란은 있을 수 없다. 이순신이 <한산대첩>에서 일본 보급선들을 막지 못했다면 일본군은 평양성에서 멈추지 않았고, 통째로 조선을 집어 삼켰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그때 이미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순신은 우리 민족의 영웅이며,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6편 <임진왜란 -2> (05-20-2016)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과대 망상증 환자이든,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든, 그는 일본 에도 막부를 전국 통일하고, 일본 100년 내전을 끝낸 장본인이다. 그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원인은 명나라를 침략하기 위한 <정명가도 (征明假道) –명을 치기위해 조선은 길을 비켜달라) 명분도 있겠지만, 일본 통일 후 충성을 다한 각 영주들에게 이익 분배할 영토와 30만명의 무사계급의 막강한 군사력을 분출할 또 다른 출구가 필요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면 인진왜란 피해국인 조선의 14대 국왕 선조 (1567년~1608년, 41년 통치)는 어떤 사람인가? 흔히들 선조를 치세의 명군이자 난세의 암군이었다고 평한다.

명종(1545~1567년)이 후사없이 죽자, 직계가 끊기고 왕통마져 단절된 조선의 첫번째 방계 임금이다. 선조의 부친 덕흥군은 중종의 아홉번째 아들로서 서자이며, 선조 자신은 세번째 아들이다.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 처럼 출신 성분에 대한 열등의식이 항상 내재된 사람이다. 선조가 즉위 당시 16세 어린 나이였으니, 제대로 된 세자교육이나 제왕교육을 받았으리 만무하다. 얼떨결에 어린 나이에 왕이 되고, 당파 대신들의 술책에 놀아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조는 누구도 믿지 않는, 어느 당파에도 기울지 않는, 의심이 많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존해야 하는 생존 본능이 누구보다 강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선조 재임시 조선시대 3대 (세종, 중종, 선조)의 가장 많은 인재풀 (pool)을 갖고 있었다. 유명한 역사 인물들만 해도 류성룡, 이원익, 이순신, 이항복, 이이, 이황, 정철, 이덕형, 이산해, 윤두수, 권율, 정인홍, 허준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꼽을 수 있다. 선조는 많은 인재 발굴과 적재적소 배치, 붕당을 이용한 권력 강화,이간질로 상호 견제, 신권 억제로 왕권 강화 등을 잘 처신한 인물이었다. 대표적 예로, 임진왜란 1년전에 함경도 무명 장수 였던 이순신을 10계급 특진시켜, 왜적의 침입을 미리 대비하라는 특명을 내린다. 물론 류성룡의 추천이 있었지만, 탁월한 선택이다.

선조도 임기 초기에는 정치를 잘 했다가, 임진왜란 3년전인 1589년  10월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기반으로 한 <기축옥사>로 인해 3년동안 조선은, 특히 전라도는  작살이 난다. 본래 정여립은 서인이었으나, 스승인 이이를 비판한 일로 동인이 되고, 관직에서 은퇴하여 전라도로 낙향한다. 그는 호남에서 <대동계>를 조직히여,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무술 연마와  민족주의 사상을 공부한다. 신분제도를 철폐한 <대동계>의 세력은 점점 커져 황해도 까지 이른다. 서인들은 이런 대동계를 역모세력으로 선조에게 간하니, 정여립은 자살한다. 정여립 사건을 빌미로 전라도 출신인 서인 정철은 전라도 전역을 <반역향 (叛逆鄕)>으로 낙인 찍고, 전라도 호남 인사들을 위시한 유생 1천명을 죽인다. 동인 세력을 죽인다는 명분으로 전라도 인재들의 씨를 말려 버린 사건이다. 인재 피해규모는 조선 4대사화를 합한 것보다 많으니 정철의 그 잔인함과 당파 권력욕으로 인해 수세기에 걸쳐 한반도 역사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다 준다.

여담으로 현 시대를 사는 한국인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가? 해방후 매번 선거 때마다 대통령, 대통령 후보, 정부 주요 각료들 대부분이 영남 사람들 일색이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김영삼, 이명박, 노무현, 박근혜도 그렇고, 지금 잠룡들 대부분도 경상도다. 진정 호남에는 인물이 없었던걸까? 결코 아니다. 역사상으로 호남 지역은 지식인, 문화인들의 산지(産地)였고 보고 (寶庫)였다. 한반도 최대 곡창지대이며, 중국과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다. 국가가 위기때 마다 민중 혁명을 주도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역으로 권력 집단들로 부터 핍박을 당한 곳이다. 기축옥사를 기점으로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동학혁명, 광주학생사건, 여수 순천 반란사건, 지리산 빨치산 사건, 5.18 광주 민주 항쟁 까지 전라도는 그렇게 작살나고 핍박받고, 학살당했다. 심지어 오늘에 이르는 현대사까지 정치적으로 왜곡, 악용되며, 고의적으로 거세되고 차별된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갑자기 쳐들어 온 전쟁이 아니다. 임진왜란 2년전인 1590년, 일본 통일 축하 사절단으로 일본을 방문한 조선 통신사들에게 도요토미는 조선을 곧 침략할 것이니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사전 경고했다. 하지만 조선의 집권자들은 일본을 오랑캐의 나라라고 얕잡아 보았을 뿐 아니라,  일본에 대한 정보가 거의 무지한 수준이었다. 100년이 넘도록 칼과 총(철포)로 전쟁만 해서 전쟁에는 이골이 난  30만명의 왜군들과 조선 건국 이후 200년 동안 국가간의 큰 전쟁이 없이 맹자왈, 공자왈 만 외치면서, 군량미는 없어도, 제대로 훈련된 관군은 없어도,  명나라만을 주군으로 잘 모시면 된다고 생각한 조선의 임금이나 관료들과  무슨 싸움이 되겠는가?  스스로 힘이 없는 자가, 자신의 몸 하나도 제대로 간수할 수 없는 자가, 무슨 가족을 책임지며, 무슨 국가와 민족을 책임지겠는가? 오호 애재라, 오호 통재라.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비극이 시작된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5편 <일본-3> (05-13-2016)

조선 근대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돌로 쳐 죽여도 시원찮을 원수같은 놈이지만,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일본 근대사의 3대 영걸 중 한명이었다.

그중 첫번째 인물이 일본의 오다 노부가다 (織田 信長 1534년 6월~ 1582년 6월)다. 그는 교토에서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키고 전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다. 그는 오와리 지방의 작은 영주의 장남으로 태어나, 일본인 최초로 일본 통일을 꿈꾸던 야심이 큰 사람이었다. 그는 막부의 다이묘에 만족하지 않고 천하 통일의 큰 포부를 가졌으며, 조정의 관직도 대의를 위해 사양하였다. 그는 앞날을 내다보는 통찰력, 신분을 떠난 파격적 인재 등용. 직업군인 제도, 상업중시, 신무기 개발에 대한 과감한 투자 등, 뛰어난 통치자적 면모와 지략, 한발 앞선 선진 문화 도입, 포루투칼 선교사들의 천주교 포교 허용 등 선구자적 면모 등은 아직까지도 일본인들의 존경을 받는다. 즉 그는 전형적인 일본인 특징과는 달리, 과감하고 모험적이며, 전통이나 관심에 얽매이지 않고, 과격하면서도 혁명적인 인물로, 일본의 이단아로 평가 받는다. 1582년 6월 전국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자신이 가장 신임하던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모반으로 자결한다 (혼노지의 변). 일본사에서 유일하게 주군을 배신한 미쓰히데는 같은 동료 경쟁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살해당한다.

두번째 인물이 임진왜란의 주범이자 일본을 전국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 秀吉1537년 3월~1598년 9월)다. 그는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는 일찍 죽고 어머니는 재혼한다. 온갖 고생을 하다가 그의 주군 오다 노부가다가 행차하는 길 앞에 옷을 벗고 드러누워 “가난해서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하니 노부가다가 목숨을 살려준다. 1554년 18세 부터 그는 주군 노부가다의 하인이 되어 충성을 다했다. 변소지기 일을 시키면 변소 냄새는 커녕 티끌 하나 보이지 않토록 청소를 완벽하게 했다. 또한 주군의 신발을 만들게 했더니 정성을 다해 신발을 만들었으며, 추운 겨울철에는 신발을 품안에 안고 문앞에 서 있다가 품속에서 꺼내 주군의 발에 신겨 주었다. 어느날은 노부나가가 금잔 술잔을 우물에 빠뜨리자, 히데요시는 큰 물동이 수백개를 구해서 물을 담았다가 한꺼번에 우물에 물을 부어 금술잔을 구해 주군께 바쳤다. 등등 주군을 향한 충성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는 천한 신분으로 주군 노부가다의 총애를 받고 출세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1582년 이후 오다 가문의 선두 가신인 시바타 가쓰이 와의 대립, 158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대립에서 모두 승리하여 1586년 태정대신에 올라 도요토미 정권을 확립한다. 1587년 직접 20만 대군을 이끌고 규슈를 공격해 평정하고, 1589년 측시에게서 아들 쓰루마쓰가 태어난다. 1590년 육군, 수군 총 21만 대군을 이끌고 관동으로 출병, 최후의 적 호조가문을 평정한다 (오다와라 정벌). 1591년 후계자로 지명했던 외아들 쓰루마쓰가 병사하자 조카 히데쓰구를 양자로 맞이해 관백직을 양도하고 자신은 <태합(太合)>으로 불렸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의 주도로 명나라를 정복하고 조선을 복속시킨다는 목표로 16만대군을 이끌고 임진왜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전쟁)을 일으킨다. 그는 1598년 8월 62세로 죽었다. 그가 1583년에 건립한 일본 오오사카 성을 관광하다 보면 성 내부에 그의 초상화와 전시에 입었던 갑옷, 칼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가 얼마나 왜소하고 추남 (주군이 붙여준 별명이 원숭이, 대머리 쥐)이었으며, 손가락이 6개인 다지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쇼군이 될 수 없는 출신 성분에 대한 열등의식이 항상 있었다. 따라서 적, 아군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으며, 주군인 오다 노부가다의 사상과 정책을 대부분 모방하였다. 그럼에도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조선과 명나라를 대상으로 큰 정복 전쟁을 일으킨 능력(똘끼?)만은 역사적으로 다시 재조명되어야 한다.

세번째 인물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 1543년 1월 ~1616년 6월, 73세)이다. 에도 막부 (강호 막부, 도쿠가와 막부 라고도 함) 시대의 1대 쇼군 (1603~1605년), 오고쇼 (1605~1616년)를 지냈다. 1617년 사망후 에도 바쿠후의 시조로 신군(神君)으로 불리며 숭배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필자 세대에게 1970년에 출간된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大望)>이라는 12권의 소설로 더욱 유명하다. 대학생 때 읽었는데 기억이 가물하다. 도쿠가와 이야기는 임진왜란 후반에 다시 거론키로 하자.  

세간에 잘 알려진 <갑자야화> 한 구절인 두견새 일화가 있다. 새장의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오다 노부가다는 울지 않는 새는 한칼에 죽여 버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울게 만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 다케다 신겐은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않는대로, 울면 우는대로 내버려 두었다. 성격의 차이고 문제 해결 방식의 차이다. 주관의 이입, 상대에 대한 평가, 전략적 접근 등의 차이이지만, 누구 옳고 누가 그름을 평가할 수는 없다. 영웅인 그들은 일반 범인들과 달랐기 때문에 역사를 변화시켰고 백성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4편 <임진왜란 -1> (05-06-2016)

 역사의 큰 변화를 가져온 전쟁이나 사건은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가해국이 있으면 피해국이 있다. 영웅이 있으면 역적과 간신이 있다. 성공한 이유가 있으면 실패한 원인이 있다. 역사는 상대적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억하고 싶은 과거만 기억할려고 한다. 상처받은 아픔은 잊으려고 외면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현실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만 본다”라고 했다. 그래서 역사는 승리자의 소설이 되기도 하고 조작되기도 한다. 한국 근대사도 그러하다. 한국인들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 잊고 싶은 과거, 외면하고 싶은 과거들이 너무 많다. 당장 불안한 오늘의 삶이 너무 힘들니 아픈 과거를 잊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엽전이니 냄비근성이니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징비록에서 처럼 과거를 철저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미래를 대비할 수 없다. 그래서 전쟁의 악순환은 반복되고 약소국은 언제나 패전국이 된다. 백성들의 가난은 가난으로 이어지고 민중의 무지는 무지로 대를 잇는다. 역사의 잘못이 반복되는 어리석음이다. 백성들이 깨어 있어야 정치 지도자들이 제대로 국가를 운영한다. 백성들은 치욕의 역사를 잊지말아야 하고 또한 잊혀져서도 안된다.

지금부터 조선의 아픈 과거를 들여다 보자. 한반도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는 시기는 중국과 일본의 정권이 바뀌는 대 변혁기와 항상 맞물린다. 고려시대 홍건적의 난(1359년 공민왕 8년, ~1362년)은 중국의 송나라 (960~1279년)와 거란 (요나라, 916~1125년), 원나라 (1260~1368년)에서 명나라로 바뀌던 시기였고, 조선의 임진왜란, 병자호란은 일본 막부의 전국 통일, 중국의 명나라 (1368~1644년)와 여진족의 후금 (1616~1636년), 그리고 청나라 (1616~1912년)로 바뀌던 시기였다. 조선의 치욕적인 근대사를 세단계로 나누어 검토해 보자. 첫째가 임진왜란(1592~1598년), 정유재란 (1597~1598년 12월), 정묘호란 (1627년 1-3월), 병자호란 (1636년 12월~1637년 2월)시대다. 조선의 선조(1567~1608년), 광해 (1603~1623년), 인조 (1623~1649년)의 82년에 걸쳐 발생한 전쟁이다. 두번째가 조선의 대원군 10년(1863~1873년)과 고종 44년 (1863~1907년)시대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시대 (1867년1월~1889년, 23년)와 겹친다. 쇄국정책, 갑신정변, 청일전쟁, 러일 전쟁, 시모노세끼 조약, 을사늑약, 경술국치 (한일합방 – 조선은 일본과 합방한 적이 없으며, 조선은 식민지로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긴 치욕스런 날임을 잊지말아야 함.)이며, 일본의 이토우 히로부미, 중국의 리홍장을 알아야 한다.  세단계가 일제 식민지 시대, 독립운동사, 대동아 전쟁, 중국 인민 혁명사, 조선 독립, 미군정 시대, 군사독재 시대로 이이어진다.

임진왜란 (1592년 4월3일 선조 25년 부터 7년 전쟁) 배경부터 시작해 보자. 역사든 인간사든, 어떤 사건일지라도 우연히 졸지에 발생하지는 않는다. 배경과 원인이 있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에 조선에는 삼포왜란 (1510년 중종5년, 제포, 부산포, 염포에 거주하던 왜인들이 조선의 지방 관리들의 부당한 대우에 대마도주의 지원을 받아 병선 100척, 무장 왜인 4-5천명이 일으킨 왜변), 이이의 십만양병설 (1583년, 만주 여진족의 잦은 침략, 일본의 전국 통일로 조선 침략 예정설에 대비해야 한다는 이이의 주장에 당파 의견대립으로 무산됨. 훗날 서론들이 십만양병설을 조작했다는 주장도 있음), 임꺽정 반란 (1504~1562년, 조선 명조 때 황해도 백정 출신,1559년부터 1562년까지 관료 부정부패, 정치 혼란으로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조선 3대 의적으로 활동을 함), 조선 관군 징집제도의 변질과 모순 (임진왜란 당시 제대로 된 관군이 없음. 정도전의 강제 징집 동원 제도 -토지를 나누어줘 농사짓던 농민들이 유사시 강제 도원되는 제도가 용병제로 전락하면서 양반 자식들은 빠지고 먹고 살기 힘든 백성들은 지원입대를 하지 않음) 등등.. 명나라의 비호 아래 오랜동안 큰 전쟁이 없으니 군량미도 부족하고 군사도 부족한 상태에서 관료들의 부정부패는 날로 심해져 백성들 삶만 고달프다.  

반면에 일본은 마르크 폴로 (1254년~1324년)의 동방견문록에 의해 <지팡구 : 황금이 가득한 땅>로 서양에 최초로 소개된다. 흔히들 일본의 개방시기는 1853년 미국의 동인도 함대 사령관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 함대가 내항하여 미국 필포어 대통령의 개국 요구 국서를 통해 1854년 미일 화친 조약을 맺고 부터라고 알고 있다. 조선은 일본과 1876년 수호조규를 체결, 1882년 미국에 문호 개방 즉,  일본보다 22년 뒤진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1549년 천주교가 일본에 전파 (조선은 1784년 북경에서 이승훈이 세례받은 것으로 시작)되기 이전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1492년)한 후 16세기 초 일본 막부시대 때 부터 포루투칼 상선들에 의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것이다. 특히 철기 문화와 서양 문물, 항해술, 특히 포루투칼 인들이 선물한 조총 등 총포류의 개발은 일본 통일을 앞당겼을 뿐만 아니라, 조선등 주변 국가들을 침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3편 <일본 -2>  (04-29-2016)

일본이 백제를 도와준 유일한 기록이 있다. 백제 의자왕 20년 (AD 660년) 2월, 당나라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금강 입구에 진을 치고, 김유신 5만 군대가 사비성을 공격해, 황산벌에서 계백 장군 결사대를 격파하니 백제 의자왕이 멸망한다.  이에 AD 661년 3월 백제 부흥군 (백제 왕자 부여풍)이 일본에 원병을 요청하니, 왜 (왜의 여왕은 제명 여왕이었으며, 의자왕의 여동생임)는 2만 7천명의 병력과 4백척 (1천척이라는 기록도 있음)의 함선을 백제에 지원한다. 하지만 당나라 해군에 패배하고 백제의 많은 귀족들과 함께 일본으로 되돌아갔다는 기록 (663년, 백촌강 전투 – 동아시아 최대 국제전쟁)이 있다. 일본은 9백년 후 임진왜란 (1592년~1597년, 2차례 7년간 전쟁) 때 중국 명나라와 재격돌을 하게 되면서 1945년 일본 항복 선언 때 까지 중국, 한국등 동아시아를 침략,  지배하게 된다.

고려말 부터 조선 건국 때까지 (1223년 ~1392년) 169년간 529회의 가장 많은 왜구 침략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고려 충정왕 2년 (1350년)부터 조선 건국 1392년 까지 40년동안만에도  495회 왜구 침략이 집중되었다. 왜구들의 침략은 소규모 노략질 수준이 아니었다. 400~500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수만명의 병사들로 무장한 침략행위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 왜구 침략이 집중된 원인은 1350년 전후로 일본은 남북조로 분열되면서 격심한 내전이 시작된다. 이른바 막부 전국시대로 100년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대마도는 왜구들의 피난처요 소굴이 되니, 수시로 고려를 침략한 것이다. 이 일본 내전은 임진왜란 (1592년~)의 주역인 토요토미 히데요시 (풍신수길 1537년 3월~1598년9월)의 주군인 오다 노부가다 (1534년~1582년)가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 지속된다. 이렇게 100년동안 전쟁에서 단련된 왜군들의 막강한 전투력을 이용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명나라)을 점령할려고 일으킨 전쟁이 앞으로 다룰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이다.

한국 근대사를 알기 위해서는 조선 시대 5백년과  대한제국 식민지 시대, 해방 이후 미 군정시대, 그리고 일본 막부시대, 에도시대, 메이지 유신시대, 일본 제국시대를 알아야 하고, 중국의 명나라, 후금, 청나라 , 중국 공화국, 중국 공산당, 중국인민 공화국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서유럽의 식민지 제국시대를 알아야 비로서 <축의 근대 시대>를 알게 되며,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관과 종교관, 사상관을 알게된다. 과거를 알아야 미래르 대비할 할 수 있는 것이다.

먼저 옛추억을 더듬어 고등학교 때 외우던 조선 왕조를 간략하게 되집어 보자. 세계사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세계의 남들이 잘 살때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은 무얼 하고 있었는지, 왜 백성들은 죽도록 고생해야 했는지 알아야 하기 떄문이다. 불과 5백년전의 일들이다. 조선왕조 1대부터 27대까지 재임기간, 출생성분 순으로 간략하게 기록한다. 여기에 왕조별 전쟁 기록들만 연결해 보아도 대충 백성들의 고충을 짐작할 수 있다.

  • 1대 태조 6년 (1392~1398년) 이자춘과 의혜왕후 적자,
  • 2대 정종 2년 (1398~1400년) 태조와 신의황후 둘째
  • 3대 태종 18년 (1400~1418년) 태조와 신의황후 다섯번째
  • 4대 세종 32년 (1418~1450년) 태종과 원경왕후 셋째
  • 5대 문종 2년 (1450~1452년) 세종과 소현왕후 둘째
  • 6대 단종 3년 (1452~1455년) 문종과 현덕왕후 외아들
  • 7대 세조 13년 (1455~1468년) 세종과 소현왕후 네째
  • 8대 예종 1년 (1468~1469년) 세조와 정희왕후 둘째
  • 9대 성종 25년 (1469~1494년)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둘째
  • 10대 연산군 12년 (1494~1506년) 성종과 폐비 윤씨 장남
  • 11대 중종 38년 (1506~1544년) 성종과 정현왕후 둘째
  • 12대 인종 1년 (1544~1545년) 중종과 장경왕후 장남
  • 13대 명종 22년 (1545~1567년) 중종과 문정왕후 차남
  • 14대 선조 41년 (1567~1608년) 중종의 서자 덕훙대원군 셋째
  • 15대 광해군 20년 (1603~1623년) 선조와 공빈 김씨 둘째
  • 16대 인조 26년 (1623~1649년) 선조의 다섯째 정원군의 장남
  • 17대 효종 10년 (1649~1659년)인조와 인렬왕후 둘째
  • 18대 현종 15년 (1659~1674년) 효종과 인선왕후 둘째
  • 19대 숙종 46년 (1674~1720년) 현종과 명성왕후 외아들
  • 20대 경종 4년 (1720~1724년) 숙종과 희빈 장씨 외아들
  • 21대 영조 52년 (1724~1776년) 숙종과 숙빈 최씨 서정자
  • 22대 정조 24년 (1776~1800년) 사도세자와 혜빈 홍씨 둘째
  • 23대 순조 34년 (1800~1834년) 정조와 수빈 박씨 둘째
  • 24대 헌종 5년 (1834~1849년) 효명세자 (익종)과 세자빈 조씨 장남
  • 25대 철종 14년 (1849~1863년) 전계 대원군 이광의 아들
  • 26대 고종 43년 (1863~1907년) 흥선대원군과 순목대비 둘째
  • 27대 순종3년 (1907~1910년) 고종과 명성왕후 장남.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2편 <일본 -1> (04-22-2016)

작금의 한반도 주변 증세는 조선시대 말기와 너무 흡사한 느낌이다. 미국과 중국, 중국과 일본, 그 사이에 끼어있는 한반도, 60년동안 혈맹관계였던 미국과 남한, 북한과 중국, 미국과 일본 5개국의 변화가 예사롭지 않다. 한반도는 냉전과 탈냉전 시대가 공존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 세계 3대 강국 미,중,일  G3의 최전방 지대가 한반도이다. 청일 전쟁, 러일 전쟁, 2차 세계대전 대동아 전쟁, 미중 (육이오) 한반도 전쟁 등, 동북 아시아 지역의 이권 전쟁터가 한반도였다. 이념적, 문화적 충돌처도 한반도였다. 역사 속의 한반도는 동네북이고 싸움터였다. 결국 한반도만 작살나고 한국인만 수탈당한 역사다. 향후에도 마찬가지다. G3국이 한반도를 에워싸고 호시탐탐 노리는, 긴박한 국제 정세임을 남,북한은 자각해야 한다.

먼저 일본과의 근대사를 알아보자. 그런데 최근에 일본 아베정부는 자발적 전쟁권을 확보했다. 2차세계대전 패망 이전의 일본으로 돌아간 것이다. 왜 일본은 서둘러 전쟁 자결권을 확보해야 했으며, 미국은 허락해야 했는가?

2016년 4월16일 구마모토현을 강타한 지진은 강도 7.3으로 이틀전 (14일) 지진 6.5보다 보다 파괴력이 16배나 강력한 지진이다. 우리는 5년전 일본 지진을 기억한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센다이 동쪽 130km지점에서 강도 9.0의 거대한 쓰나미가 덮쳤다. 1923년 관동 대지진 7.8보다 훨씬 강력했고,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5만배 위력이다. 쓰나미가 지나간 동북부 지방은 폐허가 되었다. 설상가상 동북 지방에는 원자력 발전소가 밀집되어 있다. 그중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파괴되면서 방사능이 누출되었다. 아직도 방사능 피해는 계속 되고 있으며, 전 일본이 공포 상태다. 일본은 지진 화산대 중심에 있다. <불의 고리> 지역이다. 언제라도 제2,3의 쓰나미, 핵발전소 파괴 등이 일어날 수 있다. 아베 정권은 독도가 1905년 을사늑약에 의거, 독도가 일본 영역임을 조선 정부가 서명했다고 주장한다. 일본 초,중, 고등학교  도덕 교과서 7종, 지리 교과서 4종, 역사 교과서 7종에 모두  독도는 일본 영토임을 분명히 기재함은 물론, 국제 심판소에 소송을 걸고 있다. 일본 국민들을 세뇌 시키고 있다. 일본은 왜 이런 미친 짓을 할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이다. 독도는 단순한 섬 영유권 문제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거기다 일본과 한국이 지리적으로 얼마나 가까운가? 부산 사람들은 알고 있다. 날씨 좋은 날, 태종대 앞바다에서 대마도(쓰시마)가 보인다. 불과 49.5km 거리다. 해저 터널을 뚫으면 자동차로 30분 거리다. 또 부산에서 이끼(一技)까지 68km, 후쿠오카까지가 132km다. 부산역에서 서울역까지가 441.7 km, 자동차로 5시간 거리인 것과 비교하면 일본은 30분 거리의 바로 옆 동네다.    

한국은 일본을 비하하고 멸시하지만, 일본은 한국을 경쟁 상대로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을 단 일주일만  출장가 보면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일본 젊은이들은 일제 식민지 기간 동안의 그들 만행을 알지 못한다. 60대 이후의  기성층은 한국을 불과 100년도 안된 시기에 자기들 식민지 국가의 노예로 생각하며 향수에 젖어 있다. 국토 크기도, 인구 수도 한국보다 3배 이상이다. 경제력과 기술력에서 10배 이상 차이난다고 자부한다. 엔화는 달러, 유로화와 함께 세계 3대 기축통화다. 일본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돈을 찍어낼 수가 있다. 65년동안 전쟁 불가능 국가로 통제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보다 군사력이 앞선다. 그들은 이미 70년전에 군함, 전투기는 물론 잠수함까지 만들었던 나라다. 거기다 국제사회가 승인만 하면 즉시 대륙간 탄도 미사일과 원자 폭탄을 만들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끝난 나라다. 일본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불안한 미래를 대비하여 강력한 힘을 길러야 한다. 아픈 과거를 반복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일본을 쪽바리, 왜놈, 조그만 섬나라, 한국 남해안 지역을 노략질이나 하던 해적들 나라, 훈도시의 야만족, 삼한 시대 후손들이 일본을 건너가 만든 나라, 백제와 신라에 조공을 바치던 신하의 나라, 임진왜란 때 잠시 조선의 위기가 있었으나 이순신 장군의 연승으로 초전에 박살난 별 볼일 없는 일본 정도로 왜곡된 역사를 배워왔다. 하지만 일본은 한반도를 끊임없이 공격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 보면 박혁거세 8년 (BC 50년), 유리왕 11년 (AD 14년), 탈해왕 17년 (AD 73년), 지마왕 10년 (AD 121년)에 일본의 공격을 받았다. 광고토왕 비문에 지워진 세글자의 해석이 지금까지 양국 역사 학자들의 미결 상태로 남아있다. 핵심은 <임나일본부설>이다. 즉 일본이 백제와 신라를 격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주장이며, 이것은 한반도 남반부를 일본의 식민지로 삼았다는 주장을 하기 위함이다. 일본은 한반도를 삼한시대 부터 근대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이 공격하고 약탈했다. 석굴암의 부처도 일본 공격을 막기 위함이요, 신라 문무왕 수중릉도, 아들 신문왕의 감은사 절 완공도 일본 공격을 막기 위함이다.

 

 기억해야 할 한국 근대사 -1편 <서론>  (04-15-2016)

 4월 한식이 지났건만, 어제는 온종일 함박 눈이 내렸다. 기대도 안했으니 반가움도 없다. 속절없이 내리는 눈이 애처롭다. 무슨 미련이 남았길래 돌아와서는 안될 사람처럼, 연두빛 봄날에 하염없이 눈이 되어 내리는걸까. 내리는 눈이 마치 벚꽃 같다. 벚꽃들이 약속이나 한듯이 일순간에 꽃비 되어 떨어지던 우에노 공원의 기억들을 잊지 못한다. 민중의 삶은 떼를 지어 휩쓸고 지나간다. 산다는게 어쩌면 그렇다. 예상치 못한 불행이나 어려움은 소리소문 없이 다가온다. 비켜날 수가 없다. 그러다가 오늘 저 파아란 옥빛 하늘처럼 언제 그랬다는 듯이 우리네 삶은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하루의 삶은 천년의 역사처럼 속절없이 반복된다. 하루의 삶이 놀이처럼 손쉬운 날이 하루라도 있었던가. 그럭저럭 산다는게 단 하루도 쉽지가 않다. 그래도 살다보면 잊지 못할, 잊어서는 안될 기억들이 있다.

며칠 후면 4.13 국회의원 선거날이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선량인지 한량인지 그들 속에는 아는 얼굴도 있고 선후배도 있다. 그들이 민중을 대표하고 국가를 대표하고 나라 법을 만든다고 하니 농담같아 가벼워 보인다. 한국 역사 속의 지배자들이 그러했다. 우리 같은 범인들이 오랜 준비도 없이 정치한다고 나대더니 국가를 어렵게 하고 민중을 도탄 속에 빠뜨려 역사를 눈물짓게 했다. 당장 어제와 같은 오늘의 그들이 내일 그러지 말라는 확신이 있나?

이제는 나 자신이 미국 시민이 되어버린, 이중 국적의 재외동포가 되어버린, 뭔가 어색하고 손님 같은,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야반도주한 배신자 처럼, 그런 별 볼일 없는 이방인이지만, 나의 조국은 부정할 수 없는 한국이며, 내 자식들의 뿌리도 영원히 한국 자손들이다. 그러기에 언제 어디서나 내 조국 한국이 잘 되었으면 좋겠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한반도의 정세가 예사롭지가 않다. 한국은 5천년 역사 중에 최근 40년만큼 외부의 침략도 없이 온 백성이 풍요롭게 잘 산 세월이 없었다. 한국의 경제적 위상이 세계 열방 중에서 10위권에 속할 정도로 강성했던 적도 없었다. 우리도 세계인도 모두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한국은 기적>이라고..  하지만 기적은 기적일 뿐, 오래 지속된다는 보장은 없다. 불과 40년동안 이룩한 한국 경제 기술은 중국이 모두 빼앗아 가고 있다. 중국의 대량 생산 제조력은 인도와 동남아시아로 넘어간다. 미국과 일본의 첨단 기술력은 한국이 흉내도 낼 수 없을 정도로 내공이 깊다. 북한은 5년이내 무너진다. 북한이 무너지면 한국은 북한의 가난과 부채를 끌어 안아야 한다. 5천년 한반도의 역사가 찌질이도 가난하고 처참했던 이유는 강대국 사이에 끼여있는 지형적 불리함이다. 세계 1위 미국, 2위 중국, 3위 일본..  3대 조폭 얼짱들에게 둘러싸인 어린애에 불과하다. 최근 40년은 세계 1대 얼짱인 미국의 비호아래, 한국은 세계 2위였던 일본이 하던대로 열심히만 따라 하면 되었기에 잘 살 수 있었다. 세계 순위권 밖에 있던 중국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데 중국이 일본과 한국이 하던대로 따라 하면서 불과 20년만에 세계 2위가 되었다. 중국 인구가 14억명이다. 내수 시장이 세계 최강이다. 중국은 세계 1위 미국을 넘본다.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막내리고 세계 3위로 다시 올라선다. 세계 인구 2위국인 12억명의 인도 (향후 인구 1위 국가 예상)가 중국의 뒤를 이어 받는다.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보호할 수 없다. 미치광이 트럼프가 한국이 핵을 갖게 허용한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미국은 제 코가 석자다. 향후 한국의 경쟁력은 무엇인가? 더 이상의 한강의 기적은 없다. 향후 한국의 미래는 조선말기 시대와 너무나 흡사하다. 나같은 촌노의 노파심이어도 좋고 헛소리이어도 좋다.  

 그래서 내 자신이 한국의 근대사를 다시 알고 싶고, 내 후손들에게도 제대로 알려 주고 싶다. 바보같이 당하고만 살지 말라고.. 그래서 이 칼럼을 쓴다. 물론 나는 역사학자도 아니요, 역사 지식 또한 미천하다. 다만 몇권의 책들 (신명호의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한명기의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한명기의 ‘역사평설 병자호란’, 이덕일의 역사평설 ‘근대를 말하다’) 과 역사 관련 자료에서 참조하고 인용함을 밝힌다.

역대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한 왕조가 끝나면 다음 왕조에서 바로 직전의 왕조를 정리하여 단대사(斷代史)를 편찬했다. 즉 새로운 왕조는 직전의 왕조의 흥망성쇠를 반추함으로써 새로운 국가의 정당성을 천명함과 동시에 지전 왕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자 했다. 이런 역사관을 감계 사관 (鑑戒 史觀)이라고 한다. 시대와 사람은 바뀌어도 그 시대와 사람을 흥망성쇠로 이끄는 핵심적 요소는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역사는 반복되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15 광복이후 한국 정부들은 조선 말기 친일파들의 행적, 일제 식민지 시대때 친일파들의 수탈 행적, 한국의 근, 현대사를 거론조차 못하게 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민중은 과거의 어느 시대처럼 또 강대국의 노예가 될 수 있음을 정녕 모른단 말인가..

 

 귀향 (鬼鄕) (04-08-2016)

 세간의 여러가지 화제 속에 절찬리 방영되고 있는 <귀향>이라는 영화를 통해, 나는 역대 한국 정부와  한국 민중에 대한 몇가지 의문을 갖는다.

첫째 <일본군 위안부>라는 역사적 주제다. 어느 국가이든 영원히 잊어서는 안될 역사적 굴욕과 상처가  있다. <일본군 위안부>는 어느 몇명의 한국 할머니들 이야기가 아니다. 내 조국의 딸들이자 내 누이들의 피맺히는 원한이며 울음이다. 내 조국의 수많은 십대 어린 내 딸들이, 내 누이들이 일본군과 경찰들에게 이유도 없이 끌려가 이름모를 전쟁터에 내버려졌다. 하루에도 수십명의 남자들로 부터 강간당하고, 견디다 못해 도망가면 죽도록 매질당한다. 각종 성병과 임신, 강제 낙태, 짐승과 같은 열악한 생활 환경, 그런 반복된 성노예 생활을 하루도 아니고, 한달도 아니고, 몇년간을 유린당하다가 대부분이 현장에서 잔인하게 죽었다. 그중에서도 극소수가 천운으로 살아서 조국이라는 내 땅에 돌아왔건만, 내 조국은 외면하고 창피스러워 하며 무관심해 한다.

 <위안부>에 대한 첫 증언자는 1991년 8월14일 고 김학순 할머니이시다. 수많은 위안부 피해자들 중에 238명만이 한국 정부에 등록이 되었고, 그나마 현재 생존해 계신 할머니들은 단지 44명에 불과하다. 그분들은 역사의 산 증인이며 역사의 희생자들이다. 한국이라는 조국을 잘못 만난 민중이며, 우리의 딸들이다.  과연 내 딸에게 그랬다면, 만약 여러분의 딸에게 그랬다면 어떻게 할까? 나는 상대가 몇명이든 간에 절대로 그들을 용서하지 못한다. 반드시 보복한다.

그러면 두번째 의문이 생긴다. 일본군이 항복선언을 한지 70년이 지났건만, 한국 정부가 한 짓은 무엇인가? 한국 민중은 무엇을 했으며, <종군 위안부>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얼마나 교육받았는가?  238명의 증인들이 살아계실 때 얼마나 정확한 역사적 진실들을 기록해 두었으며, 보증하고 있는가? 역사는 반복되며, 반복된 실수를 하지 않키 위해서는 반복된 교육이 필요하다. 해방 후 한국 정부는 침탈과 약탈, 강간 당한 굴욕의 역사를 백성에게 교육하지 않았다. 거짓과 허위로 역사를 위장하고, 심지어 획일화된 거짓 역사를 국민과 민중에게 강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400년전에 백성을 수탈한 권력층 후손들이 지금도 민중을 지배하고 있기 떄문이다. 바뀐 것이 없다.

세째 의문은 왜 일본은 한국인들의 줄기차게 반복되는 항의에도 일체 사과할 줄 모르는가? 일본은 조선 사대부와 지배층들이 그들의 나라  조선을 일본에게 팔아 먹었다고 생각한다. 각종 계약서를 그 증거로 제시한다. 또한 아시아의 번영을 위해 일으킨 대동아 전쟁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발생한 제반 행위 (종군 위안부 포함)에 대한 사과와 피해 보상금은 1965년 한일 협정서에 의해 이미 정산이 끝났다는 것이다. 결국 한국 박정희 정부의 요구와 합의로 비용 지불이 모두 끝난 계약을 자꾸 반복해서 울겨먹는 이유를 의심한다. 돈인가? 한국 권력층의 부도덕과 치부 떄문이가? 그래서 2016년 얼마의 위로금 형식으로 완전 <퉁>치자는 것이 아베 정권의 배려(?)이다. 이것 또한 박근혜 한국 정부가 서둘러 동의하고 합의문 발표로 종결지었다. 일본과 한국, 누가 더 한심한가?  아무리 먹고 사는게 힘들어도, 목구멍이 포도청이어도 절대로 받아서는 안될 돈이 있다. 어떠한 합의도 해서는 안된다. 반복해서 굴욕의 역사를 교육했어야 한다. 한국인은 구약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는 줄줄 외우면서도 자신들의 역사는 모른다. 아니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스라엘과 한국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들은 용서 하되 잊지 않는다. 그들은 반드시 복수한다. 반드시 응징한다. 그때가 언제일지 몰라도 교육하고 또 기억한다. 그랬기에 지금 유대인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과연 한국이 일본을 공격할 날이 있을까? 응징할 날이 올까?  일본이 웃는다. 일본이 키우는 개가 웃는다.

네째 의문은 <귀향>이라는 이 영화다. 조정래라는 무명 감독이 작품 구상해서 극장 개봉까지 14년이 걸렸다. 제작 비용은 시민들이 모아준 후원금이 11억 6천만원 이었고, 제작비 후원은 일반 민중이었으며 그 숫자가 75,270명이다. 이것은 세계 최다 후원인 규모라는 것이다. 민중은 자랑스러워 할지 모르지만, 나는 창피하다. 역사만큼이나 굴욕적이다. 도대체 한국은 누구의 국가이며, 정치 지도자는 누구를 위한 지도자인가? <일본군 위안부>라는 역사적 사실과 고증이 왜 가난한 감독과 가난한 민중들이 한푼 두푼 모아 영화로, 지금에야 역사적 자료로 만들어야 하는가? 출연 배우들이 무명의 재일 동포들과 극소수 원로배우들이었으며, 그것도 무보수로 참여해서 만들었다면?  역사적 국민 영화를 만드는데 14년이나 걸려야 하는가, 요즘 한국 돈으로 11억이 돈인가? 아파트 한채 값도 안되는데.. 나는 통곡한다. 왜 나의 조국 한국은 국가가 어렵고 위기가 닥칠 때마다, 왕과 위정자는 도망가고, 기득권자인 지배층들은 나라 팔아먹고 백성 팔아먹고, 그런 다음에야  굶주린 백성들이 몸팔고 금가락지 팔아서 나라를 구하는가 ?? 나는 몇회의 칼럼에 걸쳐 임진왜란 부터 해방 이후 한국 근대까지를 다시 한번 공부하고자 한다. 내 후손들아, 역사를 알자. 기억하자. 잊지 말자. 그래야 억울하게 죽은 우리 선조 귀신 (鬼)들이 본향 (本鄕)으로 돌아갈 수 있기 떄문이다.

 

  민본 사상 (民本 思想) (04-01-2016)

미국이나 한국이나 선거의 계절이다. 정치 후보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고 한다. 과연 그들이 <국민>을 알기나 알고 하는 소릴까? 얼마전 대하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가 종영되었다. 그 드라마의 핵심 인물은 조선 왕조 오백년 기틀을 만든 <정도전>이다. 정도전은 위대한 혁명가이자  사상가였다. 이성계를 바지 사장으로 앉히고 백성들이 만들어가는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즉 민본 (民本)과 위민 (爲民) 사상이다.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고, 백성을 위한 나라이어야 하며,  백성을 잘 살게 만들어야 한다”가 정도전의 <민본 (民本)>사상의 골격이자 조선시대  건국 이념이기도 하다.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우리 한민족의 사상적 기반은 고조선 건국 이념인 <홍익인간 – 만민을 널리 유익하게 한다> 사상과, 단군 이념의 <제세이화 (濟世理化) – 합리적 교화로 세상을 구제한다>로 시작한다. 조선시대 이황의 <천인합일 (天人合一) – 하늘, 왕, 백성이 하나가 되어 세상을 다스린다> 사상과 우국경민 (憂國警敏) 사상은 백성을 우러러 섬김이 우선된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백성을 정치적 주체로 정하고, 백성이 필요에 의해 통치자를 추대한다. 동학의 <인내천 (人乃天)>사상도 그러하고, 고대 아테네 시민정치도 그렇고, 링컨의 <of the people, for the people, by the people>도 그러하고, 현대 민주주의도, 불교의 자비주의도, 기독교의 박애주의도, 근본은 <인간 평등>이다.  

<민본>의 어원적 기원은 맹자의 서경에서 비롯된다. 민본이란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고, 정치의 목적을 양민 (養民)에 두는, 백성을 위한 사상이다. 맹자의 민본 사상은 맹자의  핵심사상인 <성선설>에 근거한다. 선(善)은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 인성이며, 모든 사람을 평등한 인격체로 묶는 역활을 한다. 따라서 왕은 백성과 동거동락하는 관계이며 동반자적 관계다. 즉  <백성- 하늘- 왕>의 관계는 하늘이 백성을 낳았고, 하늘은 백성이 하고자 하는 바를 반드시 따르며, 임금은 하늘의 대리인으로 천명을 대행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관계이다. 그래서 백성이 가장 귀하고 하늘이 그 다음이며, 왕이 가장 가볍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심을 얻으면 천하를 얻고, 민심을 잃으면 천하를 잃는다는 것이다. 맹자는 민본의 실천 방안으로 “無恒産者 無恒心” 즉 백성들의 생업을 보장하면 백성은 선을 지향하는 마음이 자동으로 발생하게 되므로 군주는 선으로 백성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도전은 노비문서를 불태워 버리고, 토지를 백성들에게 되돌려 주어 생업에 힘쓰게 되면 왕은 선으로 백성을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 민족은 불행한 역사를 살아왔고, 지금도 불행한 역사를 살고 있는 것일까? 도울은 잘못된 백성은 없고, 잘못된 <지도자>만 있을 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거룩한 <민본사상>으로 건국한 조선은 어떻게 되었는가? 조선 역사 5백년 중에서 3백년을 노론이 다해 먹었다. 물론 고려 시대도 백성이 편안하지 않았다. 더우기 조선 선조를 시작으로 1623년 인조 반정과 함께 조선의 역사는 일본과 중국에 반복으로 강간당한 역사다. 이순신 장군이 배 열두척으로 일본의 수백척 함선을 이긴 것은 역사의 자랑이 아니다. 왜 조선은 왜적들의 수백년에 걸친 침공과 약탈을 막지 못했는가? 무슨 나라가 배 12척이 전부라는게 웬말인가? 조선을 구한 영웅 이순신은 왜 자살 같은 죽음을 선택해야  했는가? 언제나 조선의 왕들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자신의 죽음이 두려워 울면서 도망다녔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세번 머리를 땅에 쳐밖고 피를 흘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무능한 고종은 44년동안 왕위에 있었다. 노론의 76명은 조선을 일본에게 팔아먹는 댓가로 일본 제국이 하사하는 귀족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아시아의 수많은 나라가 일본의 침략을 당했지만 식민지가 된 나라는 나의 조국 조선이 유일하다.조선 시대 노론이 식민지 친일파가 되었고, 해방후 기득권자가 되어 지금까지 부와 권세를 누리고 있다. 그들이 4백년간 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다.  

우리 세대는 조선시대 이후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우리 세대는 역사의 진실을 배우지 못했다. 악은 악으로, 무지는 무지로 세습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하지 못한다. 백성은 밥이 목숨이니 역사에 무관심하고 무지하다. 나의 조국은 1945년에 해방되었지만 지금까지 독립되지 못했다. 남한은 미군정이 지배하는 나라였다. 이승만은 해방된 조국의 진정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김구 선생, 안창호 선생과 급이 다르다. 그러기에 그도 전쟁통에 조선의 왕들 처럼 국민들을 남겨두고 남쪽으로 도망을 갔다. 해방된 조국은 친일파들이 인수했다. 박정희도 그러하다. 그래서 1980년대까지 한국은 한국 현대사 연구가 금지되었다. 자신들의 진실된 역사를 모른는 국민들이 어떻게 제대로 된 지도자를 뽑을 수 있겠는가? 무지한 민중이 우매한 지도자를 뽑고, 우매한 지도자가 무력한 국가를 만든다. 민본주의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민중이 깨어나야 한다. 민중이 똑똑하고 현명해야 한다. 한끼의 밥을 위해 인간의 고귀한 것을 버려서는안된다. 민중은 창녀가 아니다. 민중은 노예가 아니다. 민중이여, 깨어나라 !!

 

 아가야,  꽃신 신고.. (03-25-2016)

 봄햇살이 하얀 포말처럼 부서지듯 내 창가를 두드리면 나는 툴툴 털고 일어나 봄길을 걷고 싶다.  우리 아가 예쁜 꽃신 신기우고 조그만 손 꼭 잡은채 그렇게 봄길을 걷고 싶다. 봄이 곧 올 것이라는 막연함이 내 앞 뜰에 피어난 이름 모를 봄꽃으로 나는 그제야 알았다. 나의 반복되고도 건조한 삶들이 이 봄날을 무심하게 맞이했구나. 봄 언덕이든, 숲길이든, 산길이든, 따뜻한 햇살이 비추이는 곳이라면 우리 아가 손 잡고 그렇게 봄길을 걷고 싶다. 봄길을 걷는다 함은 소박한 내 삶의 소망이다. 이제 무슨 미련이 남아서 또 그렇게 아쉬워 할까? 아니다. 그분으로 부터 그동안 받은 것만으로도 넘치고 또 넘친다. 이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나의 봄길을 가자. 더 이상의 부담스런 인연을 뒤로 한 채, 만나고 헤어짐이 흐르는 강물처럼 봄길을 걷자.    

봄길을 걷는 날이면 아무런 변명도 없이 나의 잡초덩굴 같은 머리 속을 맑게 비우기로 하자. 많은 사람들과 많은 일들과 많은 생각과 말들 속에서 먹고 살 수 밖에 없다는 궁색한 변명을 이제는 하지 말자. 바쁘다는 말도, 누구와의 약속도 이날은 없기로 하자. 이 날은 그분의 위대함만 보기로 하자. 삼라의 모든 생명들이 그분의 말씀대로 봄을 기다리지 않았는가. 태초부터 한번이라도 봄이 오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봄날은 꼭 온다. 그분의 약속이고 만물들의 믿음이지 않았는가. 나만의 기다림이 간절하지 않으니, 고마움도 소중하지 않구나. 미안한 마음으로 봄길을 걷자. 소중한 마음으로 봄길을 걷자. 눈에 보이는 봄의 아름다움을 내 마음에 담자. 바람 소리, 새소리, 개울물 소리를 내 마음에 담자. 봄의 향내들을 내 마음에 담자.  

올해도 봄꽃은 어김없이 피어난다. 앞섬도 뒷섬도 없이 주신 순서대로 피었다가 지지 않는가. 동백섬의 붉은 동백, 홍매화, 섬진강 강변의 산매화, 지리산의 진달래, 덕유산 벚꽃, 학교 언덕배기의 개나리, 어릴적 동네 밖의 애기 사과꽃, 살구꽃, 철쭉, 산유화, 하얀 조팝나무, 앵두나무 꽃, 백목련, 자목련,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라일락, 수선화, 수국, 치자꽃, 제비꽃, 할미꽃..  그리고 보고도 알지 못하는 수많은 들꽃들, 너무나도 위대하고도 꾸밈이 없는, 그분이 주관하는 봄의 향연이다. 봄꽃 한송이 한송이 마다 그 시절 한 사연과 한 사람의 그리움이 한장의 사진 되어 내 기억에 인장된다.

봄은 계절의 부활이다. 그분은 이미 우리들 마음에 부활하셨다고 나는 믿는다. 부활은 다시 사는 것이다. 육신이 죽어 하늘나라로 승천하는 것은 부활이 아니다. 그녀가 말한다. “내가 당신의 환영을 보았나이다. 내 영혼이 부활한 당신의 환영을 보았나이까?” 하니, 그분께서 “아니다. 네 마음 속에 내가 이미 있으니 네가 나를 보았느니라” 고대 종교에서 부터 현대 철학에 이르기 까지 두가지 설이 존재한다. “육신은 죽어 땅에 묻히고, 영혼은 살아서 천국으로 간다.”의 육신과 영혼의 이원 분리론이다. 또 다른 설은 “육신과 영혼은 하나다. 육신이 죽으면 영혼도 함께 죽는다”의 육신과 영혼의 일원론이다. 그 무엇이 진리이든 간에 내가 죽어서 구원받아 천국가는 것 보다는, 그분은 이미 부활하셔서 우리 모두들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계심이 훨씬 더 생산적이고 의미있는 삶을 사는게 아닐까? 하늘에 계신 그분이 언젠가인지 모를 그날에 지상에 내려오셔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시고 믿는자를 구원하신다? 글쎄?? 그분은 이미 내 마음 속에 부활하여 살아 계시고, 내가 죽는 날까지 그분이 나와 항상 동행하신다고 믿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내 사후는 아무도 모른다. 사후 세계는 인간의 의지가 아니고, 오로지 신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적으로 나의 개인적 신앙관이니 갑론을박할 대상도 되지 않는다.        

이제 기다리던 봄날이 성큼 내 곁에 서 있다. 가벼운 배낭 하나 울러메고 우리 아가 손잡고, 삼천리 방방곡곡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 너무도 많구나. 어느 이름 모를 암자에 단 며칠이라도 내 고단한 영혼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날이 있을까. 절간의 풍경소리며, 스님의 독경소리가 너무도 멀리서 들리는구나. 과연 내 생애 그럴 날이 또 올 수 있을까?

우리 마음 속의 <꽃신>은 무엇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해 줄수 없었던, 그래서 마지막으로나마  꼭 사 주고 싶었던 <그 무엇>, 함께 하고 싶었고 함께 나누고 싶었던 <그 무엇>, 내가 가장 소중하고도 귀하게 간직하고픈 <그 무엇>이 아닐까?  그러면 우리의 <아가>는 누구인가?  아가는 새생명이다. 내 존재의 의미이며 희망이다. 나의 <꽃신>을 신고 예쁘게 단장한 모습을 바라만 봐도 좋을 듯한 <그 사람>, 못해주어 늘상 미안하고 그래서 가슴 속에 눌러놓아 화석이 되어버린 <그 사람>, 아기처럼 순수하고 맑은, 아기처럼 삶의 고통과 두려움을 모르는, 아기처럼 삶의 비루함과 처절함을 모르는, 그래서 나보다는 더 행복하고, 나보다는 더 오래 살아야 할 <그 사람>, 오직 나만을 믿고 의지하기에, 내가 아니면 혼자서 살 수 없을 것 같은 <그 사람>, 그 사람이 나의 <아가>가 아닐까.  이 좋은 봄날, 우리 아가 예쁜 꽃신 신고 활짝 웃으며 봄길을 함께 걸어 보자.. 

 

 일신교  삼형제 (03-18-2016)

 칼 마르크스는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비판하고,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왜 인간은 현대에 와서 더욱더 신을 믿고 종교에 의지하는가? 첫째는 현실의 삶 자체가 너무 힘들고 고통이며,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절대자인 신에게 기대고 의지하려 함이다. 삶에 위로받고 희망과 활력을 얻고자 함일 것이다. 그래서 종교는 필요악이든 필요선이든,인류 역사와 함께 한다. 둘째는 자연의 위대함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첨단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한계와 자연의 위대함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과학이 발달할수록 종교 원리주의자들이 득세를 한다는 것이다. 즉 경전 속의 많은 가설과 설화들을 신성화하고, 절대 불변의 진리로 우상화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는 세가지 종교가 전 인류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다름아닌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이다. 불교와 유교는 신을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니 제외된다. 전세계 인구 73억명 중에 기독교인은 17억명이며, 그중 카톨릭이 10억명, 개신교가 7억명이다. 서유럽과 미국 기독교인들은 근대 500년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분야에서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또한 극소수에 불과한 유대교인들은 금융 제국, 식량 제국, 정보 제국 분야를 장악하고 있다. 반면에 14억명의 이슬람교인들은 아시아에만 6억, 북아프리카 인구의 60%, 중동 아시아 순이다. 일부 중동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후진국이고 가난한 저항 세력이다.

세계사의 수많은 전쟁이 일신교 3형제 집안 싸움인데, 기독교, 이슬람교는 모두 유대교에서 파생된 종교다. 유대교에서 <토라>라고 하는 것은 구약성경의 모세5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말한다. 구약 나머지 부분은 이스라엘 역사서이다. 유대교는 같은 유대인인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고, 그들의 구세주도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 구세주가 오지 않았고, 심판의 날 유대교인들만 구원받는다는 선민 의식을 가지고 있다. 유대인들이 믿는 것은 구약도 신약도 아닌, 토라와  탈무드 뿐이다. 반면에 기독교는 예수만이 구세주이고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예수도 하나님이라는 것이 성삼위일체론이다. 따라서 성육신한 예수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고 기독교를 믿어야 구원받고 천국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고 천국을 갈 수 없다는 역논리다.

 반면에 이슬람교는 예수는 신의 아들은 아니지만, 구약에서 나오는 여러 예언자 중에 한사람으로만 인정하며, 마지막 예언자가 무함마드라고 하는 차이다. 즉 하나님은 동일한 신이며, 이슬람교의 <쿠란>에는 구약, 신약도 포함되어 있으나, 성경에는 잘못 기록된 것도 있으며, 정확한 신의 말씀은 쿠란 뿐이라는 차이다. 물론 예수의 부활도 믿지 않는다. 기독교가 <사랑>이라면 이슬람교는 <평등>이다. 이슬람 계율은 <육신오행 (六信五行)>이 골격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공동체 생활인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국가의 종교를 믿게 된다.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한국만이 기독교가 번성한다. 독특한 민족성은 험난한 역사에 기반한다. 미국은 개신교 중심 국가다. 다른 종교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기독교인들은 이슬람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죄인? 악마? IS? 적? 테러집단? 무지랭이? 이단? 현대 종교는 막강한 힘이자 권력이다. 타 종교를 입에 담는 것 조차 무조건 우상숭배니, 이단이니, 파문이니 하는 공포로 공동체 집단에서 배제시킨다. 무지하고 편협되며 독선적 종교관이다.

기독교는 예수가 만든 종교가 아니다. AD 30년 예수 사후, 로마의 기독교에 대한 학대가 계속되다가, AD 70년 로마 대화재 사건을 계기로 예수살렘이 파괴되고 유대인 대학살이 시작된다. 이 시기에 초대교회를 통해 사도 바울을 위시한 여러 사도들이 기독교 초기 이론을 정립한다.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정치적 목적으로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함을 발판으로, AD 367년 니케아 강령을 통해 삼위일체론과 신약 성경 27개 문서가 확정이 된다. 물론 사도들이 만든 신약의 4대 복음서 (마태,마가,누가, 요한)외에 알려지지 않은 복음서들과 역사적 사실들이 많지만, 그동안 어둠에 묻혀 있다가 지금 조금씩 밝혀지고 있다. 

유일신 삼형제가 싸우는 종교의 핵심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예수가 신의 아들이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든, 죽은지 3일만에 부활을 했든, 기독교를 믿어야 구원받고 천국을 가든,  아니면 지옥을 가든,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신만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은 예수가  그 시대에 살았었고, 전 인류를 위해 위대한 말씀과 행적을 보여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자는 <예수의 말씀>만을 믿고 행하면 된다. 인간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그런데 세 종교 중에서 가장 공격적이며 침략과 궁합이 맞는 종교가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라고 한다. 기독교는 세계 침략의 무기로 혹은 식민지를 만드는 구실로 사용되었다. 신의 구원을 가져다 준다는 정복의 명분으로 활용되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세계의 역사를 바꾸고, 세계를 지배하며 잘 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나 예수님만은 이런 기독교인들의 역사적 만행을 결코 용서치 않으실 것이다. 그건 분명코 그분의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 (03-11-2016)

 당신은 지금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가? 여러분들이 사용하는 컴퓨터를 몇일 단위로 리부팅 해야만 재사용할 수 있는 이유를 아는가? 인공위성, 위성항법 장치, GPS와 구글 등 검색 사이트, 페이스북, 카카오톡, 각종 SNS 등. 정보 통신 시스템  그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면? 당신은 벌거숭이다. 얼마전 한국 국회에서 테러 방지법이라는 명분으로 강제적 감청, 도청법을 통과 시킨 사례는 애교 수준에 불과하다. 미국의 위성 통신 감청망인 <에셀론>의 존재를 아는가? 미국은 첩보위성과 초고성능 슈퍼 컴퓨터, 첨단 네트워크, 데이타 베이스 관리 기술 등으로 전세계를 오가는 이메일, 팩스, 유무선 전화 내용들, 심지어 육성까지도 무차별적으로 도청, 감청하고 있다. 도시 곳곳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 개인의 모든 이력과 정보들을 깨알만한 전자칩으로 감시할려는 전자주민증 등등, 시간이 흐를수록 현대인들은 <감옥>이라는 제도권에 갇혀서 모든 것을 감시, 관찰받고 있다. 현대는 국경없는 <정보 제국주의> 시대다.

일찍이 조지 오웰은 소설을 통해 <빅 브라더(big brother)>의 전방위적 감시체제에 의해 모든 인간의 일거수 일투족이 감시되고, 인간들의 꿈과 무의식 조차 조작되는 초전체주위적 사회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있다. 그런데 그런 시대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 (1926~1984년)는  그의 저서 <감시와 처벌 (1975년)- 감옥의 탄생>에서 <판옵티콘 panopticon> 이라는 감옥 설계도를 소개한다. ‘모든 것(pan) 을 본다 (opticon)’라는 뜻으로 일망 감시 시스템을 의미하는 ‘판옵티콘’은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리미 벤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이론 창시자)이 처음 만든 단어이다.  이 감옥은 감시탑이 한가운데 있고, 그 감시탑을 둘러싸듯 도넛 모양의 원형 수용소가 세워져 있다. 건물은 각자 독방으로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다. 죄수의 독방들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어 감시탑에서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반면에 감시탑은 어두워 죄수들은 그 감시탑 안을 볼 수가 없고, 그 안에 감시원이 얼마나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모른다. 감시자는 <신>이 되어간다. 죄수들의 불안과 고통은 감시자를 점점 신으로 생각하게 되고, 나중에 감시자가 없어도 있다고 생각하고 엎드려 기도하게 된다. 신은 내면화되고 정착되어 간다. 몰래 카메라와 같은 것이다. 서양 종교가 신도들을 겁박하는 핵심이다. ‘신은 너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알고 계신다. 너는 영원한 죄인이다. 신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라’.. <Subject>는 <복종>과 <주체>라는 두가지 상반된 의미를 갖고 있다. 판옵티콘은 비단 감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의 모든 조직과 기관에도 해당된다.

<보는자>는 감시하는 자이며, 처벌하는 자인 동시에, 지배하는 권력이다. 반면에 <보여지는 자>는 감시와 지배를 당하는 민중이며 노예다. 중세 왕권 시대에는 공개 재판을 통해 강력하고도 잔인한 <신체적 형벌>을 가하면 민중을 공포로 몰아 넣고 지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몇몇 부작용도 나타난다. 죄인의 억울함, 사회의 불만, 동정의식, 이로 인한 폭동 등이다. 또한 처벌을 위한 경제적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이 대안으로 생긴 것이 감옥이다. 감옥살이는 인간의 정신 개조를 목적으로 한다. 감옥은 <규율 권력>을 만들어 낸다. 규율은 처벌로 이어지는데, 법과 규율을 어기면 반드시 처벌받고야 만다는 보편성과 필연성을 사회 전반에 증가시킨다. 따라서 각종 규율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각 개인들을 그 사회의 <길들여진 몸>으로 만들어 간다. 우리도 이미 많은 제도와 규율과 감시 속에서 길들여져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미셸 푸코는 길들여진 몸을 만드는 여러 기법과 전술을 통틀어서 <규율>이라고 명명한다. 규율은 세가지 단계, 즉 관찰과 규범적 판단, 검사 과정을 거친다. <관찰>은 위에서 여러 사례를 열거하였으며, <규범적 판단>은 사회 구성 개체들을 비교, 분리, 계층화, 동질화 시키는데 목표를 둔다. 예를 들어 군대에서 군기잡기, 교회에서 율법과 강령, 가정에서의 가정 예법, 회사 규정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판옵티콘적 사회에 귀속된 구성원들은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 규율을 무시하는 순간, 비정상적 인간, 이단, 정신병자, 퇴출자로 분류된다.

현대는 정보화 시대다. 누가 많은 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확보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된다. 정보의 중요성은 높아가는 반면 인간관계의 중요성은 오히려 감소해 간다. 정보의 무료화는 공평한 것 같지만 반대로 빈부의 격차를 확대시키는 아이러니를 만들었다. 정보를 쥐는자가 권력의 중심을 장악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보는자인가, 보여지는 자인가. 이제는 누군가를 감시하는 것도 싫고, 감시당하는 것은 더더욱 싫다. 그럴 수만 있다면 바람처럼 구름처럼 들꽃처럼, 이제는 사랑만 하며 그렇게 자유롭고 싶다.

 

 히틀러와  파시즘 (03-04-2016)

유투브에 들어가면 영화 <300>을 보실 수가 있다. 못보신 분들이 있다면 꼭 권하고 싶다. 남자는 정복욕, 여자는 소유욕이라고 했던가? 수컷들의 본능적 욕망, <갈수 있는데 까지 가보자>와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이 두가지가 고대로 부터 현대에 이르는 제국주의 패권의 본질인 동시에, 이 영화의 주제이자, 현대판 미국과 북한이다.

BC 5세기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의 크세르크세스 왕이 조그만 도시국가 스파르타 왕 레오디나스 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무릎을 꿇어라. 나를 숭배하라. 그러면 전부 용서해 주겠다. 너희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라를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하겠다. 그러니 무릎을 꿇어라”. 하지만 스파르타는 영토는 작지만 자존심만은 세계 최강이다. 어릴 때부터 “너는 스파르타를 위해 싸울 것이다. 이것이 네가 지켜야 할 자존심이다”라고 교육받고 자란다. 영화에서 <300명>의 스파르타 병력으로 1백만명 대군 (다른 자료에는 6십만 대군)인 페르시아군에 도전하다가 전멸한다. 페르시아 제국도 단지 조그만 영토의 스파르타를 점령한다는 것 보다 ‘내 앞에 무릎을 꿇지 않는 자는 제국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항상 욕망의 끝을 모르는 자존심이 멸망으로 종결된다.

‘앞으로 2개월 동안 북한을 예의 주시하라’ 라는 중국 왕이 외교부장의 말은 무슨 의미이며, 북미 단독 평화협정 협상은 무엇인가? 미국이 남한을 버릴지언정, 중국은 북한을 버리지 못한다. 지혜로워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계 근대사와 한국 근대사를 다시 살펴 보아야 한다. 여러분은 이런 의문이 들지 않는가?  독일은 무슨 힘으로 두번씩이나 세계 1차대전과 세계 2차대전의 주전국이 되었을까? 과연 20세기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무슨 일들이 있었을까? 유럽의 식민지였던, 불과 240년의 짧은 역사의 미국이 무슨 계기로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가 되었을까?

먼저 시국이 시국인만큼 히틀러와 파시즘에 대해 알아보자. <나의 투쟁> 히틀러가 전쟁 악마든 미치광이든 간에, 철학과 과학의 나라이자, 지성적이고 냉철한 독일 국민들은 왜 히틀러와 파시즘에 동조하고, 세계 전쟁을 두번이나 일으켜서 수많은 목숨들을 죽고 죽여야 했는가?

그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역사적 배경과 <베르사이유 조약>을 먼저 알아야 한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럽은 세계 식민지 확보를 위한 제국주의 시대였다. 제 1차, 2차 세계대전의 본질은 식민지를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의 싸움이다. <베르사이유 조약>은 제1차 대전의 패전국 독일과 승전국 사이의 조약 인데, 독일은 해외 식민지 영토를 전면 포기하고, 알자스와 로렌 지방을 프랑스에 양도하며, 배상금 1,320억 마르크를 배상금 (2010년에야 모두 갚음)으로 지불하는 조건 등이다. 그 중에서 식민지 포기가 가장 치명적이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이탈리아, 일본 모두는 식민지가 전혀 없거나 다른 제국주의에 비해 극히 적은 식민지를 갖고 있다는 불만이었다. 즉 파시즘 대 자본주의 전쟁이 아니라, 식민지 보유국가와 미보유 국가간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식민지를 갖고 있다는 의미는 원료 생산지와 소비시장을 동시에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 상당한 경제적 고통을 겪게 된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연합국은 독일에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전쟁 피해 보상금을 요구함으로써 독일을 영원히 몰락하게 만든다. 천문학적으로 가공할 인플레이션, 환율 급등으로 독일 경제는 파산 직전이 된다. 중산층은 하류층으로 몰락하면서도 우리는 하류층과 다르다고 강한 자존심을 가진다. 중간층의 특유한 계층의식을 간파한 인물이 히틀러와 나치스다. 누가 히틀러에게 자금을 지원했나? 미국과 그림자 정부다. 그들은 항상 전쟁 양쪽 모두에게 판돈을 빌려주어 전쟁을 일으킨다. 거기다가  패전국에는 갚아야 할 배상금을 또 빌려주어 이중 고리대금업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 패권국가가 되었다.

파시즘의 특징은 특별한 이유 없이 <무조건 반대> 하는 것이다. 무조건 넘어뜨리는 파괴본성이다. 반마르크스 주의, 반사회주의, 반자유주의, 반민주주의, 반국제주의다. 인종 차별과  민족주의 사상을 고취시킨다. 파시즘의 사상은 국민 사회가 빠진 심각한 통합의 위기를 민족주의 (내셔널리즘)의 고양과 강렬한 지도자 숭배에 의해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또한 기성의 전통적인 지배체제의 과감한 재편성을 요구한다. 마르크스적 사회운동에 대한 격렬한 적대감과 기존 지배층에 대한 반발을 유도하는 독특한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파시즘 사상은 기존 지배층의 위기 의식 뿐만 아니라, 사회 몰락의 위기에 직면한 중산층의 위기의식도 강렬하게 반영하는 것이다.

역사상 최고의 선전 선동가였던 히틀러는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회복시키는 방식으로 대중을 이끌어간다. 국민 내셜리즘. 종교적인 신, 신의 대리자도 모두 몰아내고 모든 사람의 대변자 위치에 자신을 올려놓는다. 히틀러든, 김정은이든 결론은 한반도에 어떠한 전쟁도 일어나서는 안된다. 대한 민중을 대상으로 더 이상의 꼭두각시 놀이는 없어야 한다.

 

북한식 독재주의 (02-26-2016)

 반만년 역사의 한반도 정세가  어느 때보다 예사롭지 않다. 철부지 독재자 김정은이 4차 핵실험을 단행하고 장거리 로케트 미사일을 발사 해서도 아니고, 핵전쟁을 일으킬지 몰라서도 아니다. 이에 대응하여 박근혜 정부가 개성공단에서 전격 철수하고 미국이 종말 미사일 사드를 배치해서도 아니다. 미국 오바마 정부가 대북제재 법안 (H.R. 757)에 서명함을써 미국 독자적으로 북한을 제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계 금융기관을 통한 북한의 모든 자금줄이 차단된다. 미국은 세계 유일한 군사 금융 제국주의다. 세계 경제 G7중심의 36개국이 가입된 자금세탁방지기구 (FATF)는 북한과의 모든 거래와 자금의 흐름을 통제한다. 중국, 러시아도 자유로울 수 없다. 자금세탁, 테러자금, 외환 결제 등, 세계 은행망이 감시체제에 들어갔다고 보면 된다. 막대한 석유 생산력을 보유한 이란도 종국에는 미국의 금융 통제에 항복하고 말았다. 향후 정상적인 무역거래를 할 수 없는 북한은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혹독한 빈곤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급변하는 세계 정세는 영원한 우방도, 적국도 없다. 한국 10위권의 경제적 위상은 세계 모든 나라와 연계되어 있다. 미국 만큼이나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도 중요하다. 이번 박근혜 정부의 일련의 조치들은 탈냉전 시대에서 다시금 냉전시대로 돌아가지 않을까 우려된다. 왜 한국 정부가  스스로 전쟁의 불씨가 될려고 나대는가? 제일 큰 걱정은 김정은이다. ‘세습된 권력은 반드시 멸망한다’라는 역사의 교훈이다. 그는 나이도 어리지만 공산주의 혁명가도 아니고 인민의 지도자도 아니다. 무지한 폭군이자 겁많은 30대 철부지다. 그래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하면 미국이 북한을 그대로 두겠는가? 남북한 전쟁의 전시권은 미국이 가지고 있다. 미국은 남한의 승락 없이 북한을 초토화 시킬 수 있다. 그러니 장거리 핵무기는 김정은이 세습된 독재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갈 협박용 일 뿐이다. 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할테니 현 북한체제를 보장해주고, 먹고 살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보장 해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먼저 핵무기를 포기하라, 아니다. 먼저 전쟁 불가침 조약을 먼저 체결하자. 이것이 6자회담의 핵심이다.

그런데 주변 강대국들이 남북한의 통일을 원할까? 남북한이 강대국의 최전 방어선으로는 최상이다. 아직도 한반도는 종전국이 아니라 휴전국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전쟁을,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군비경쟁을 부추킨다. 남북한 모두 천문학적인 막대한 자금 (남한만 매년 9조원 이상)을 무기 구입비용으로 지출하고 있다. 대박 시장이다. 그런데 최근에 한국이 중국과 바람을 피우니 미국은 극동아시아 최전 방위선을 일본으로 가정하고 아베 정권에게 자체 전쟁 권리를 공개적으로 양도했다. 본래 19세기부터 미국과 일본은 오래된 동맹관계였고 한반도 식민지화도 미국과의 사전 합의가 있었다.  미국의 군사력은 세계 모든 나라의 군사력을 합한 것보다 더 우세하다. 러시아는 아직까지는 세계 2위 군사강국이고, 중국의 군사력은 세계 2위가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세계 유일하게 미국을 공격한 제국주의 국가다. 세계에서 한국만 일본을 우습게 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한반도는 지도에서 없어진다. 설사 전쟁에서 이긴다고 하더라도 남북한 모두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폐허국이 되는 것은 물론, 제국주의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한강의 기적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북한은 타국도 적국도 아니고 불천지 원수도 아니다. 5천년 유구한 역사의 내 나라이고 내 민족이다. 일제 식민지 40년 동안 나라 잃은 설움을 함께 겪고 살다가, 웬놈의 제국주의자들 이해관계로 분단되어 산지 66년째가 되니 100년 이상을 이 모양 이꼴로 산다.이런 시국에 잘사는 남한 정부와 우리 국민들이 정신차려야 한다.

 독재와 평등은 종이 한장 차이다. 북한이 김정은 체제를 유지하든, 내부 쿠테타로 정권이 바뀌든, 상대방의 실체를 인정하고 통일에 대비해야 한다. 밥은 먹여가면서 달래든가, 겁을 주든 해야 하는거 아닌가? 밥그릇 자체를 발로 차 버리면 철없는 독재자를 어떻게 감당하려 하는가? 역사 속에 실패한 독재자는 스스로 무너지게 해야 한다. 그럴러면 주변 세력들의 배신이 필수다. 그 방법중 하나가 <햇볕정책>이었는데, 밑둥을 싹뚝 잘라 버렸으니.. 지금 당장 북한이 몰락하면 남한은 통일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지금 이순간에도 힘들어서 못살겠다고 낙화유수처럼 자살하는 세계1위의 자살 공화국이 <오병이어>처럼 나눔의 기적을 행할 수 있을까? 준비된 자만이 성공할 수 있다. 말로만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서는 안된다. 진정으로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 남북한 한민족이 통일이 되어 서로 도와주고 사랑하며 세계 열방이 부러워 하는 나라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육이오 전쟁으로 죽은 수많은 영혼들과 이산 가족들의 한을 위로하고, 다시는 내 조국에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미국식 사회주의 (02-19-2016)

 요즘 미국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75세의 버니 샌더스 (Bernie Sanders, 1941년~)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는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1979년부터 2015년까지 무소속으로 정치 활동을 하고 있다. 그를 일명 <민주 사회주의자>라고 부르며, 미국 상원의원 중에 유일한 사회주의자다. 그는 미국 사회에서 버림받은 저소득층, 소수민족, 기존 정치에 믿음을 상실한 중산층과 지식층, 환경 단체, 희망을 포기해야 하는 젊은이들을 폭넓게 대변한다. 그는 선거운동에서 슈퍼팩을 거부하고 소액 모금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그의 연설은 미국의 현실정치와 자본주의의 문제점들을 적나라하게 지적한다. 소득 불평등과 빈부의 격차, 보편적 국가 의료보험 (OPEC중 미국만 없음), 공립대학 무상 교육, 최저 임금 시간당 $15, 부유층 세금 증세, 정치 자금법 개혁, 성적 소수자 권리 향상, 복지 제도 확대, 기후변화 대응을 촉구한다. 그는 미국의 극소수층이 부와 권력을 독차지하는 <과두정치>를 중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의 년간 5백만명의 어린이가 굶주리고 2백만명 이상이 노숙을 하며, 1천만명 이상이 실업자이고, 마약과 총기 범죄가 하루에도 수없이 일어나는, 병들어 가는 미국 사회의 원인을 먼저 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평균 임금보다 500배나 더 많이 받는 대기업 CEO의 년봉, 상위 0.1%인 30만명의 부자들 소득이 저소득층 1억5천만명의 소득보다 더 많은 현실, 상위 1%의 소득이 하위 90%보다 더 많은 현실, 한마디로 극심한 빈부의 격차, 소득의 불균형, 부도덕한 분배, more and more 탐욕의 극치 등을 해결해야만 하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들이다. 어느 조직이나 사회가 마찬가지지만, 극우 보수층과 꼴통 기득권자들은 소득의 재분배, 사회주의적 분배를 결단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극소수자의 막대한 자본과 워싱톤 정치가가 오랜 세월 밀월 공생관계이다. 그렇게 인물이 없나? 아버지, 아들, 동생이 차례로 해먹겠다고 하지 않나, 성불륜 남편에 이어 마누라까지 대를 이어 대통령이 되어야 하나? 심지어 세계인들의 바보 조롱꺼리며, 가진건 돈 뿐인, 또라이 도날드 트럼프 같은 자도 대통령 후보로 나서는 미국 정치판을 어떻게 정상으로 볼 수가 있겠는가? 그림자 정부의 미국 지배자들은 자신들 영역만 건드리지 않으면 어느 놈이 되든지 상관 없다는건가? 이런 아사리 정치판에서 지지 세력이 전혀 없는 무소속의 버니 샌더스가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  그가 유대인이며 유대교인 이라는 점도 기독교 국가인 미국에서는 절대로 불리하다. 미국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울 수도 있다. 하지만 2천년 전에 <예수>라는 전대미문의 <혁명가>가 있었듯이, 언젠가는 이 미국도 사회주의 혁명가에 의해 진정하고도 정의로운 민주적 사회주의가 될 것이라 소망한다. 나는 그를 지지한다. God bless America!

자본주의의 진짜 <적>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대립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신의 뼛속까지 스며든 <인간의 욕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자본주의 최대 문제점을 <빈부의 격차>라고 지적했으며, 그 격차는 점점 더 심해질 것이라 예상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시민 혁명도 미완의 혁명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혁명으로 자유를 얻은 것은 전체 민중이 아니라 일부 부르주와와 유산계급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본>에서 “사람은 경제적 위치와 수입에 따라 사고가 달라지며, 문화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자본주의는 더욱 번창하고, 사회주의와 변형된 공산주의는 종말을 고해야 했을까? 그것은 제도적, 이념적 시스템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인간의 욕망이라는 본성에 비롯된 자연적인 시스템인 반면에, 사회주의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욕망은 본성이고, 이성은 인위적이다. 이성이 본성을 언제나 제어할 수는 없다. 막스 베버 (1864년~1920년)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 부터 사회주의 실패를 예언한 인물이다. 그는 <사회주의>에서 “<관료제도화>는 어느 사회에서나 공통적으로 흐르는 역사의 필연이자 숙명이다. 사회주의 이념이 문제가 아니라 관료 제도화가 문제다. 관료제는 필연적으로 부패할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가 약육강식의 세계라면, 사회주의적 관료제는 능력보다는 지위와 역활을 중요시 여긴다. <지도자>는 자신을 신격화하고, <국가>는 <노동자>를 국가에 예속시킨다.결국 노동자는 파업의 권리마져 빼앗기는 노예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는 병들어 가는 한국 기독교와도 너무 흡사하다. 위의 문장에서 해당 단어만 <목사>, <한국 교회>, <성도>로 바꾸어 대입해 보라. 관료제와 세습제는 어느 이데올로기나 위대한 제국도 멸망과 파멸로 끝났음을 세계 역사는 증언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막스베버는 현대사회가 <목적 합리화> 행위가 갈수록 더 중요시되어, 결국은 <가치 합리화> 행위없이 목적 합리화로 굴러가게 될 것임을 경계하였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은 무시되어도 좋다든가, 좋은게 좋다든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선동들이 민중을 무지하게 만들었다. 민중이여, 깨어나라!!

 

 자본주의와  기독교 (02-12-2016)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아니 우리 삶을 지배하는 커다란 두개의 축이 있다면 그것을 <자본주의와 기독교>라고 하면 과언일까? 그 배후를 조정하는 세력은 앵글로 색슨족과 유대인을 중심으로 한 백인 우월주의의 서유럽과 미국이다. 그들은 모두 기독교 국가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본질은 무엇이가?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근검절약하여 번 수입을 저축하고, 저축한 돈이 불어나면 돈을 필요로 하는 곳에 빌려주거나 투자를 하여 더 큰 돈을 버는 것이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칼 마르크스가 간파한 자본주의 본질 중에 가장 큰 문제점은 <빈부의 격차>이다.

자본이 자본을 만들어내는 이 <자본주의>는 가진자가 더 많이 가지고, 가지지 못한 자는 아무리 애를 써도 부를 축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높지 않은 교육을 받아서는 낮은 임금, 열악한 노동 환경을 지속적으로 강요받기 때문이다. 자본은 늘 새로운 시장을 찾아 확대 재생산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19세기 유럽이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식민지를 확대하기 위해 제국화 되었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이라는 저서에서 “자본은 자기 증식을 행하는 가치의 운동체다.” 즉 자본이 이윤과 잉여가치를 낳은 사회시스템을 자본주의라 정의한다. 자본주의는 자본을 가진 소수자에게 매우 좋은 시스템이지만, 자본을 가지지 못한 자에게는 이보다 더 불공평한 시스템은 없다. 과연 현대 사회의 0.1%의 부자가 99.9%의 가난한 자를 지배하는 것과 달라진게 무엇인가? 오히려 빈부의 격차는 점점 심해지고 벌어졌을 뿐이다.

산업혁명이 모더니즘 (근대화)의 시작이며 자본주의의 모태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16세기 마르틴 루터와 함께 종교 개혁의 양대 산맥을 이룬 장 칼뱅 (1509년~1564년) 의 <예정설>이 자본주의 발단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캘빙 신학은 다섯 솔라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주만 영광 받으심)과, 언약 신학 (구속 언약, 행위 언약, 은혜 언약), 그리고 5대 교리 (일명 TULIP)인 인간의 전적 부패,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궁극적 구원으로 요약된다. 캘빙 신학은 16세기 이후 개혁교회, 장로교회, 미국 청교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캘빙의 <예정설>은 이러하다. “신은 구제할 인간을 사전에 결정한다. 이것은 신의 결정이기 때문에 아무리 선행을 쌓아도 바꿀 수 없다.” 라고 단정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 부터 결정된다면 염세적이고 비관적이 될 것 같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반대적 심리 상태가 생긴다. “전능하신 신이 끊임없이 선행을 하는 나같은 인간을 구제하지 않을리 없다”로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갖고 더욱 금욕적이며, 열심히 일하고, 부단히 선행을 베푸는 것으로 구원받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프로테스탄트는 세속적인 <직업과 일>을 신이 각자에게 부여한 소명으로 생각했고, <노동>이야말로 <신의 영광>을 더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직업을 소명으로 생각하고 평생 일하는 것을 신에 대한 봉사로 생각하여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당연히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금욕을 중시하고 불필요한 곳에 낭비하는 것을 싫어하니 돈은 눈덩이처럼 늘어날 수 밖에 없다. 한국 기독교는 술과 담배마저 강제한다. 그렇게 늘어난 돈을 소비하지 않으니 투자를 하게 되고 계속 확대 재생산이 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부가 늘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자본주의 탄생의 모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부자되기 참 쉽죠잉~~

20세기초 막스 베버가 쓴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근대 자본주의는 칼뱅 신학등 프로테스탄트 (개신교)를 받아드린 나라들, 영국, 독일, 네덜란드, 미국 등이 중세 카톨릭을 승계 발전 시킨 이탈리아, 스페인, 동유럽 보다 더 많이 경제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또한 개신교는 개인이 신을 직접 마주 하다보니 기본적으로 성욕을 금지시 했다는 것이다. 즉 개신교가 카톨릭보다 훨씬 더 윤리적으로는 금욕을, 생활면으로는 근검절약을 엄격히 규제했다는 것이다. 성에 대한 불만이 오죽했으면 19세기 빅토리아 왕조때는 여성들의 히스테리가 극에 달했으며, 이로 인해 프로이드가 성의 대한 심리학과 철학을 연구하였을까? 심지어중세 카톨릭 지배의 시대를 <암흑의 시대>라면 프로테스탄트가 지배하는 시대는 <흑백의 시대>라고 표현한다. 암흑의 시대는 그래도 그 나름대로의 여러가지 색깔을 갖고 있지만, 흑백시대는 흑과 백, 두가지 색깔 뿐이라는 비아냥 거림이다. 오늘날의 개신교가 흑백논리이기 때문에 외면받는 것은 아닌가? 내가 믿는 종교만 옳고 나머지 종교는 모두 적이며, 내 하나님만 신이고 다른 신은 모두 우상이고,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내 종파는 정통파이고, 나머지 종파는 모두 이단이라면? 아무튼 문제투성인 자본주의와 기독교는 환상적인 파트너가 되어 지금까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인간의 욕망과  브랜드 (02-05-2016)

프랑스의 현대 사상가 장 보드리아르는 “현대인들은 기호를 소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다. 현대인들은 브랜드가 갖고 있는 힘을 인정하고 그것을 좋아하게 되며 그 자체로서 실질적인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가 곧 상품의 브랜드 이미지이며, 이들 각종 브랜드 이미지가 구매력과 직결되는 것이다.

우리 세대가 자랄 때만 해도 제품력의 최우선 조건은 <기능성>이었다. 제품이 제 기능, 제 구실만 제대로 하면 메이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격이 중요했다. 그래서 ‘값싸고 성능 좋은’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 기업들의 목표였다. 그 당시 내가 몸담고 있던 회사의 광고 문구가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였으니까.. 그런데 현대인들의 욕망은 타자들과 <차별화> 되기를 원한다. 남들이 갖고 있지 않는 나만의 것을 갖기를 원한다. 본래 <브랜드>는 독자적인 기술로 키워진 품질로 시작하여 독특한 이미지와 품격이 덧입혀지고, 마침내 모두가 동경하는 <그 무엇>이 되는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거대한 세계사의 흐름에서 보면 근대 이후 현대에서는 경제 중심의 도시였던 런던, 동경, 뉴욕이 브랜드 중심이 되지 못했다. 문화 예술의 중심 도시 프렌체, 파리, 뉴욕이 브랜드 도시로 남게 됨을 알 수 있다. 나같은 촌부는 일백번을 죽고 태어나도 세계 명품에 목숨거는 세태를 이해하지 못한다. 핸드백 하나에 수백만원, 심지어 수천만원 하는 세태, 동일 기능의 제품을 브랜드라는 이유만으로 몇배나 더 비싼 비용을 지불하는 일련의 세태, 그런 명품으로 몸치장을 해야 하는 심리 상태를 도저히 용해할 수가 없다. 내가 명품을 사주지 못하는 찌질남이어서 그런가? 그러니 한번 촌놈은 영원한 촌놈일 수 밖에…

인간의 욕망에는 어느 시대나 <유행>이라는 것이 있다. 유행은 상품의 특정 아이템이나 스타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치관이나 형태에도 영향을 미친다. 유행은 선택한 사람들에게 심리적 안정감과 집단의 소속감을 느끼게 한다.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크 지멜 (Georg Simmel)은 이렇게 말한다. “유행은 사회에 대한 의존 욕구를 충족시킴과 동시에 차별화 욕구도 만족시킨다. 유행은 타인을 모방하는 동시에, 모방하지 않는 타인과 차별받고 싶은 심리다. 차별화되면서도 소속되려는 경향은 계급의식과 맞물려 있다. 낮은 계급 (혹은 다른 계급)의 사람들과 구별되고, 비슷한 계급의 사람들과 동류의식을 갖기 위함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만 (David Riesman)은 “어느 시대나 사람들은 유행에 뒤쳐지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다. 소속 계층의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지 않키 위해 겉모습, 말투, 예절, 태도 등 소속 계급의 유행에 맞추어 신속하게 교정하며 적응해야 한다.” 현대 자본주의 계급은 결국 재산의 크기로 정해진다. 상류층은 중하류층과 차별되길 원한다. 평등하길 원하지 않는다. 특권의식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유행을 만든다. 주거지역, 주거 형태, 교육기관, 여가 활동, 취미 생활, 식생활, 신앙생활, 옷차림, 자동차 등 그들만의 문화 생활과 유행을 만들어 간다. 반면에 하류층은 상류층과 비교하면서 그들 스스로를 쓸모없고 결함이 많은 사람이라고 자학한다. 그러면서도 상류층을 모방하려고 애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 계급 제도는 과거의 신분 제도와는 달리 보장된 것이 없다. 따라서 끊임없이 인정받고 확인 받아야 한다. 한국 교회는 계급제인가, 신분제인가? 다수의 현대인들은 자신을 비하하고 혐오하며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할수록 남을 모방하게 된다고 한다. 어찌보면 현대인은 자신의 모습이 아닌 타인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수많은 타인들 중의 한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에릭 호퍼는 그의 저서 <맹신자들>에서 “우리는 자신의 판단과 운명을 믿지 못할수록 타인의 모범을 따르려고 한다.”고 했다.

유행은 대중심리다. 인간의 욕망 중에 “사람은 사람이 많은 곳에 가고 싶다”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도시로 도시로 몰리는 <도시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도시화로 인해 근대화가 가속화 되고 자본주의가 더욱 번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도시화 될수록 도시 속의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빈곤의 악순환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 조그만 지역 한인 사회도 가진 재산에 따라 계급화되고, 사람이 모이는 곳에 더 많이 모이게 된다. 교회도 브랜드다. 새로운 이민 인구는 증가되지 않고, 한정된 기독교인들은 브랜드가 큰 대형교회로 모인다. 설교가 아닌 편리함의 쏠림 현상이다. 소형 교회가 편리함 (교회 편의시설이나 각종 프로그램, 교인 네트워크 등)만을 따지면 대형교회를 따라갈 수가 없다. 그러니 어떻게 확보한 교인들인데, 힘들게 꾸려 나가는 작은 교회들은 신도 몇명만 빠져 나가도 교회가 휘청거리고, 목회자 가족들은  생활고에 시달린다. 제도 자체의 모순이다. 현대 기독교는 성장 시장이 아니다. 성숙기를 지난 침체기 혹은 쇠퇴기 시장이다. 말씀 중심이 아니라, 교인 수가 돈이며 브랜드다. 우리 같은 가난한 자들은 브랜드나 유행을 따라가면 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내 모습 이대로> 갈고 닦으며, 진실되게 사는게 중요하다.

 

 인간의 욕망과  <황금> (01-29-2016)

“황금을 돌같이 보라” 라고 듣고 자란 우리 세대는 가식과 허구의 불균형 세대다.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최영 장군 당사자는 과연 그랬는가?  황금을 싫어할 인간이 세상 천지 어디에 있을까? 가진 자의 교만과 못가진 자의 무능만 있을 뿐이다.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간사는 황금을 갖기 위해 몸부림 친 역사다. <황금 만능주의>. 신자본주의는 황금만 있으면 못 할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세계사는 황금의 이동이 <권력의 이동>이었으며, 미래도 그러할 것이다. 황금, 돈, 권력자, 부자, 지배자, 금수저, 부의 이동과 세습.. 무엇이 다른가?

근대 세계사의 권력 이동을 살펴보자. 15세기 말부터 대항해 시대가 시작된다.  바스코 다가마 (1469-1524년)는 신세계 인도의 향신료에 욕심이 있었다. 신상품이라는 물질 욕구가 토지를 소유하고 싶은 욕구로 변하고, 토지 욕구는 영토 확대라는 제국의 야망에 식민지 정책으로 바뀌고, 식민지화는 최종적으로 황금과 물질을 강탈하기 위한 것이다. 황금 욕망에 대한 불씨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1254-1324년)에서 366곳에 황금에 대한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황금의 로망을 갖고 신대륙을 최초로 발견한 욕망의 화신 콜롬버스는 황금 구경도 못했다. 신대륙에서 황금을 발견한 최초 서양인은 신대륙의 <정복자>로 알려진 스페인의 에르난 코르테스다. 그는 1521년 멕시코 중앙고원을 중심으로 번영했던 아스텍 왕국을 정복하여 대량의 황금을 약탈한다. 그 다음이 페루를 중심으로 남미 절반에 걸쳐 번영하였던 잉카제국을 무력으로 정복한 프란시스코 피사로였다. 잉카제국의 찬란한 문명은 유럽 제국의 황금 욕망으로 지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서양인들은 기독교를 선교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황금을 강탈하기 위해 셀 수도 없는 수많은 남미 대륙의 원주민들을 살육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다. 침략자들은 기독교인들이었다. 지금도 남미의1%의 가진자와 99%의 못가진자의 빈부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다. 기독교인들은 세계인을 향해 회개해야 하는 죄인들이다.

황금은 강한자에게 몰린다. 고대 이집트 신화에서 황금은 <신의 살결>로 표현되며, 금 자체가 신이라고 생각한다. 이집트 왕 투탕카맨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황금 가면이 그 사례이다. 조병호 박사(목사)의 저서 <성경과 고대 전쟁>에서  황금의 이동 과정을 인용해 본다.  <B.C 1000년>은 다윗의 시대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번성한 황금기였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머문지 400년간이나 예루살렘이라는 난공불락의 성에서 살던 여부스족이 겨우 다윗의 부하 600명에 의해 하루아침에 성을 빼앗기고 만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옮겨다니던 법궤를 정해진 한 곳에 모셔둘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바치려는 결심한다. 당대에 성전을 건축하지는 못했지만, 다윗은 성전 설계도와 건축자재들을 솔로몬에게 전해주고, 오빌(인도)의 금 3천달란트 (금93톤, 현재시가 43조원) 와 순은 칠천 달란트를 성전건축 자금으로 남겨주었다. 또 다윗의 측근들도 오빌(인도)의 금 5천달란트(현재시가 72조원)와 순은 1만달란트를 헌금한다. 즉 다윗 시대는 엄청난 경제력을 가진 시대였다.

솔로몬 시대는 금들이 넘쳐났고 은들은 돌맹이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솔로몬의 경비요원들은 큰 금방패를 들고 있던 사람이 200명이고, 작은 금방패가 300명으로 도합 500명이 금방패를 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윗과 솔로몬이 쌓아놓은 어마어마한 부는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어진 뒤, 남유다의 부는 이집트가 가져가고, 북이스라엘이 부는 앗수르가 가져간다. 그 이후 바벨론이 이집트와 앗수르를 점령하면서 솔로몬의 부가 바벨론으로 넘어가고, 그 이후는 페르시아 제국으로 넘어간다. 페르시아가 황금의 제국으로 불리운 근원이 솔로몬의 부였고, 그 이후 다시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로 이동, 헬레니즘 시대의 번영으로, 또 다른 신흥 세력 로마 제국으로 이어진다. 구약 1천년 세월동안의 <돈의 흐름>이다.

근대에 와서는 16세기 무적함대 스페인 제국으로, 1588년 스페인 아르마다 무적함대가 영국에 패배해서 대영제국으로 이동한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은 식민지 브라질에서 대형 금광을 발견하여 대량의 금을 확보, 포루투칼로 부터도 금을 빼앗아 세계 최강 제국이 된다. 이후 영국은 전쟁이 아닌 무역으로 금을 모으기 시작. 금값 안정을 위해 1816년 <금본위제- 금만을 본원 통화로 인정)를 시작하여 1914년 막을 내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금보유국이 된 미국은 <금환본위제 – 금본위제를 채용한 다른 나라의 통화를 보유해 자국 통화의 안정을 도모하는 제도>를 실시하다가 1971년 닉슨 쇼크로 달러를 기축통화로 변동환률제를 실시한다. 이것이 오늘까지 이어지는 시카코 학파의 신자유주의 근간이 되는 것이다. 한정된 황금으로는 그들의 욕망을 억제할 수 없는 그림자 정부 (세계 자본 권력)가 펼쳐놓은 노름판 위에서 온 세계가 미쳐가고 있다. 21세기는 <돈의 전쟁>이다. 황금, 달러, 유로화, 위안화, 엔화의 물고 물리는 권력 전쟁이다. 세계 권력의 균형만이 인류가 생존할 수 있다.       

 

인간의 욕망과  커피 (01-22-2016)

 신이 인간을 만드실 때 삼라만상의 다른 생명체와의 가장 큰 차이점을 무엇에 두었을까? 나는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지구별에 보내실 때 인간의 두뇌 속에 <욕망>이라는 생명소자 (반도체 칩과 같은 것)를 끼워 넣었다. 그 욕망이 있기에 변화하고 발전하고 좀더 잘 살려는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아담과 이브는 신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인간은 욕망이 있기에 <희노애락 (喜怒哀樂)>이라는 감정이 있다. 욕망이 있기에 목표와 희망이 있다. 욕망이 있기에 행복이 있고 니체가 말하는 <권력의 의지>가 있다. 욕망을 이루지 못했을 때 고통과 좌절이 있으며, 새로운 도전과 극복이 있다.

 그러면 죽어서는 어떻게 될까? 만약 천국 심사에서 천국행으로 판정되면 <욕망>이라는 생명소자 (칩)을 빼버릴 것이다. 즉 희노애락이라는 감정이 없어지는 것이다. 욕망을 그대로 둔다면 천국은 하루 아침에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희노애락은 상대적 경쟁과 비교가 전제된다. 아니면 희락 (喜樂)만 있는 칩으로 바뀔 수도 있겠지. 그런데 슬픔과 분노 (怒哀)가 없는 희락? 한마디로 허구한 날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웃기만 하고 찬송만 부르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생노병사가 없는, 산해진미에 구중궁궐에 살면 뭐하나? 한마디로 바보 같은 삶이 아닐까? 만약 천국 심사에서 탈락이 되어 연옥 (혹은 구천)을 헤매는 귀신이 되면 희노애락 칩을 그래로 둘 것 같다. 그러니 귀신들은 죽어서도 산자들의 삶에 일일이 나타나서 간섭하는 것이다. 지옥행 대상은 노애 (怒哀)만 들어있는 칩으로 바꾸지 않을까? 그래서 불교 초기 경전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라는 현실론적 문구가 생겨난 것인가. 그러니 나는 죽으면 천국의 삶을 원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뇌물을 주더라도 다시 이승으로 보내달라고 할 것이다. 이승에서 새로운 인생을 다시 시작해 보고 싶다. 이건 순전히 웃자고 하는 나의 잡담이니 종교적 의미를 부여치 말기 바란다.

지금부터 다룰 내용들은 사이토 다카시 교수가 쓴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에서 인용함을 미리 밝힌다. 첫번째 키워드가  인간의 <욕망>이다. 욕망은 나머지 4개의 키워드 <모더니즘, 제국주의,  이데오르기, 종교>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어쩌면 인류가 존재하고 그래서 사건과 역사가 존재하는 모든 기저에는 인간의 욕망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근대사 욕망의 상징물로 <커피, 금, 철, 브랜드>를 들었다.

 17세기 이전의 유럽은 남녀노소 평균 일인당 하루 맥주 소비량이 3리터였다고 한다. 알코올은 이성을 흐리게 하고 욕망을 자극한다. 생활이 방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던 17세기에 각성이 강한 커피는 프로테스탄드 (개신교)를 중심으로 유럽에 보급된다. 프로테스탄트는 카톨릭에 비해 훨씬 금욕적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유행한 <커피>는 인간의 한계와 나태함을 극복하게 한다고 믿는다. “도를 넘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한다”라는 서양 문화와  ‘그칠줄 모르는’  지속성은 근대화의 기본이자 근간이 된다. 1700년에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커피 재배에 성공하자, 1723년 프랑스를 시작으로 유럽 각국은 서인도 제도, 아프리카와 남미 대륙등에서 대규모 커피 재배를 시작한다. 커피는 혹독한 노동을 착취하게 되므로 일명 ‘니그로의 땀’이라고 부른다. 지금도 아프리카 많은 나라들의 수출품 중에서 커피 비중이 80% (우간다는 98%)를 넘는다. 커피를 싼 가격에 수출케 하고, 생필품은 비싼 가격에 수입하게 하는 악랄한 식민 정책이 시작되는 것이다.

커피와 차는 어떻게 다른가? 일의 피치를 올리고 싶을 때 마시는 것이 커피인 반면에, 한숨 돌리면서 쉴 때 마시는 것이 차, 혹은 홍차이다. 그래서 커피 마시는 시간을 <Coffee Break>이라고 하고 차 마시는 시간을 <Tea Time>이라고 한다. 전통적인 영국의 티타임은 하루 4~5회 정도이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도 차 문화권에 속하였는데 영국이 프랑스와의 전쟁 (1754년~1763년,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패하여 막대한 부채를 안게 된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홍차 판매 독점권 등을 영국의 동인도 회사에 줌으로써 미국에게 높은 관세를 물게 한다. 이에 반발한 사건이 유명한 보스톤 차사건(1773년)이다. 이를 계기로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나니, 미국의 커피 아메리카노는 미국의 독립과 기독교가 함께 연결되는 촉매제가 되는 셈이다.

또 다른 각성 음료는 <코카콜라>이다. 코카콜라는 원래 약으로 개발되었다가 1920년 미국 금주법이 발효된 이유로 도약하기 시작한다. 1939년 세계 2차대전이 시작되자 코카콜라는 미국 병사들에게 사기 진작에 도움이 되는 군수품으로 허가를 받게 됨으로써, 세계 60개 버틀링 공장이 세워진다. 즉 미국 병사는 세계 어느곳에서나 코카콜라를 마실 수 있게 되는데, 원액을 만드는 레시피는 미국 국가 기밀 수준이다. 그래서 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은 코카콜라의 주식을 장기간 보유하고 있나?  어쨌던 커피와 코카콜라는 근대화와 자본주의 정신에 필수인 인간의 욕망 상품인가 보다.

 

 세계사를 움직이는 힘 (01-15-2016)

얼마전 한국에서 사는 큰딸이 아빠 생신 선물로 책을 선물하고 싶다고 해서, 평소 꼭 읽고 싶었던 몇권의 책을 부탁했다. 그 중에서 르몽드 세계사 1-1권 (우리가 해결해야 할 전지구적 이슈와 쟁점들, 1-2권은 못구함), 르몽드 세계사 2권 (세계질서의 재편과 아프리카의 도전), 르몽드 세계사 3권 (팍스아메리카나의 후퇴와 약진하는 신흥 세계), 그리고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 등 책 몇권이 도착했는데, 책의 내용이 너무 깊고 방대하다.

이런 생각을 한다. 현대를 산다는 것은 꿈 속에서 가위 눌리는 기분?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내가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거대한 힘에 의해 움직이며, 나는 그 속에 구속된 지극히 작은 자일 뿐,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꼼짝 달싹도 할 수 없는 새장에 갇힌 새? 아니면 <인공지능 로보트>라는 생각이다. 현대인은 분명 엄청난 과학의 발달과 문명의 이기들로 인해 편안하고 안락하게 장수하며 살고 있다. 또한 현대인은 엄청난 정보의 홍수 시대에도 살고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부터 스마트폰에 손이 간다. 간밤에 세계에서 쏟아진 뉴스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스포츠, 연예 등등. 점심 시간에도, 퇴근후 저녁 시간에도,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도 뉴스와 정보에 시달린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런데 그 수많은 정보들과 편리함이 나와 무슨 상관이지? 그게 내 삶에 어떤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며 연관이지? 이런 생각이다.

인류의 역사를 성경 역사로 말하면 BC 3천년 부터 시작해서 AD 2016년 현재까지로 볼 때, 약 5천년의 역사 중에 내가 산 세월은 불과 62년에 불과하다. 또한 오늘을 살고 있는 나는 세계인구 65억명 중 (이슬람 14억, 카톨릭 10억, 개신교 7억, 힌두교 7억, 불교 5억, 무종교 10억, 기타, 자료마다 약간씩 다름) 한명에 불과한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을 믿든, 어떤 생각으로 살든, 무엇을 하고 살든, 내가 죽고나면 모래알 같은 흔적조차 남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내가 살다 간 세상이 어떤 세상이었고, 왜 그러한 사건들이 일어났으며, 그 거대한 무질서와 혼란 속에서도 한순간이나마  제대로 알고 깨어있는 상태에서 살고 갈 수 있다면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현대 역사는 한 국가나 민족의 역사가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는 거미줄과 같은 복잡한 거물망으로 얽혀있어 누구나 세계의 역사 속에서 독립되거나 자유롭지 못하며 연관되어 이어지는 것이다. 과거사 역시 박제되어 떨어져 나간 고철덩어리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시금석이 된다. 따라서 역사학은 년도별 사건 발생적 기록물이 아니라 내일을 살아야 하는 사상이며 연결 권력인 것이다. 그래서 역사학은 암기학이 아니라 논리학일지 모른다. E.H. 카가의 말처럼 “역사란 역사가와 그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인 것이다. 그런데 임기 5년에 불과한 한국의 현정권이 한국 고대사에서 현대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를 정부 교과서라는 틀에 일률적으로 묶어버린다고 강제되겠는가. 식민사관에 길들려진 지극한 어리석음이며 무지이자  아집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듯 현재의 상황과 관점에서 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의 방향을 결정하는 방향키가 되는 것이다.

우리 부부는 노년을 이렇게 살고 싶다. 사상은 고전 철학부터 근대 철학으로 이어지는 인문학을 중심으로 배우고 생각하며, 역사 또한 세계사를 움직이는 100여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공부하고 싶다. 적어도 내가 어떤 세상에서 무엇을 믿고 무엇을 생각하며 살았는지 조차 모르는, 무식한 노인이나 광신적인 종교 원리주의자로 살다 죽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다. 바보는 행복할 수는 있지만 왜 행복했는지는 모른다. 어떻게 살면 어때?  강제할 수 없는 각자의 몫이다. 요즘 아내는 엄청 유식해졌다. 가게에서 하루종일 인문학 강의를 틀어놓고 일을 한다고 했는데 불과 몇개월 동안 사람이 변했다. 메모한 노트의 분량도 제법 많다. 산책을 하거나 차를 마시면서 토론을 하다보면 아내는 나의 선생이 될 때가 많다. 많이 컸다(?). 나의 위기다. 더욱 분발해야겠다. (우리 부부는 이런 유치한 재미로 삽니다 ㅎㅎ)

요즘 사이토 다카시가 쓴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을 세번째 정독하고 있다. 그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동경법대 박사출신의 메이지대학 문학부 교수인데, 세계사를 바라보는 그의 논제가 굉장히 의미있고 재미있다.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거대한 흐름과 상호 연관성, 변천의 원동력인 인간의 욕망에 방점을 찍고 서술하였다. 그는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을 인간의 욕망, 서양 근대화의 힘인 모더니즘, 제국주의의 야망사, 몬스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그리고 종교 (특히 세계3대 일신교인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라고 보았다. 이 다섯가지 키워드로 칼럼을 쓰기로 한다.

 

어떻게 얻을 것인가? (01-08-2016)

새해에는 여러분 모두 소원성취(所願成就) 하십시오!! 한국의 새해 덕담으로 가장 많은 문구가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말씀과 ‘소원성취하라’는 말씀일 것이다. 성경에도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구하는 자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자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니라. (마태7:7-8)” 라고 하셨다.

새해에 당신은 무엇을 얻기 원하는가? 구하기 위해서는 원하는 대상,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목표는 막연함이 아니라 계량화 할 수 있는, 아니면 몸소 체감할 수 있는 구체성이어야 한다. 원하는 대상이 확정되었으면 그것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구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존재함을 말한다. 성경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태 6:33)”고 한다. 상대방으로 부터 얻어내는 과정을 <협상>이라고 한다. 협상은 ‘좀더 많이 얻어내는 것 (getting more)’을 의미한다. 협상은 상대방을 이기는 것이 아니다. 더우기 상대방을 죽이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상대와 같이 윈윈하고 서로 만족하는 것이다.

13년동안 와튼 스쿨의 최고 명강의로 인기 중인 협상의 달인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교수의 저서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인가?>를 강력 추천한다.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은 임금 협상에서 다른 학생들보다 20%이상 더 많이 받는다는 것도, 세계 100대 기업중 절반 이상의 임직원들이 그의 강의와 컨설팅을 받았다는 결과만으로도 그의 명성을 실감할 수 있다. 몇가지만 여기에 인용한다.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세가지 요인이 있는데, 첫째가 사람 즉 상대방과의 관계, 호감, 신뢰이며, 그 비중이 55%다. 그 다음이 협상의 절차(과정)가 37%, 나머지가 전문지식 (8%)이다. 즉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이론을 <감성 협상론>이라고도 한다. 협상은 논리가 아닌 감성(emotion)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누구인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그의 감성과 니즈(needs)를 파악하는 작업이 우선이다. 일예로 회사 면접 시험을 볼 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하기보다는, 회사가 어떤 인재를 원하는지 먼저 파악하고, 회사의 니즈에 내가 어떻게 부합되는 인물인지를 설명하라는 식이다. 손자병법의 “<지피지기 (知彼知己)>, 즉 상대방을 먼저 알고 내 자신을 알면, 백전백승이며, 그 중 으뜸은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것이다.”과 상통한다.

<감성 협상법>의 12가지 핵심전략을 소개해 볼까?  1. 목표에 집중하라. 선택과 집중이다. 무엇을 얼마만큼 얻을 것인지 목표를 정하라. 2. 상대의 머릿속 그림을 그려라. 상대방의 행적, 생각, 정서, 감성등을 파악하라. 3. 감정에 신경 써라. 논리적 접근보다는 감성적 접근이 우선이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찾아라.  4. 모든 상황은 제각기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라. 같은 사람과 같은 내용을 협상하더라도 주변 여건에 따라 상황은 변한다. 5. 점진적으로 접근하라. 한꺼번에 모든걸 얻으려 하지마라. 협상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6. 가치가 다른 대상을 교환하라. 사람마다 원하는 가치가 다르다. 나에게는 사소한 가치가 상대에게는 큰 가치가 될 수 있다. 7. 상대방이 따르는 표준 (standards)을 활용하라. 상대방의 성향, 과거 발언, 전례 등을 파악하고, 그것을 협상의 기준치로 활용하라. 8. 절대 거짓말을 하지마라. 거짓말은 언젠가는 들통이 난다.억지로 강한 척 혹은 약한 척 연기할 필요도 없다. 9. 의사소통에 만전을 기하라. 상대방을 위협하거나 비난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10. 숨겨진 걸림돌을 찾아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문제점을 보아야 한다. 역지사지다. 11. 차이를 인정하라. 다름을 인정해야 이해가 시작된다. 12. 협상에 필요한 모든 것을 목록으로 만들어라. 미리 준비하라.

극히 일부의 내용을 이 책 내용의 전부인양 소개하는 것은 이 책을 모독하는 것 같아 마뜩치 못하고, 이렇게 수박 겉핡기로 소개해 봐야 여러분도 돌아서면 잊어버릴 것이기에 직접 읽으시길 권한다.

결국 협상은 상대방과 하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핵심은 신뢰, 존중, 약속이다. 의사소통의 우선은 역지사지 (易地思之)다.  인간관계의 황금률이다. 의사소통은 상대방 말을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다음 단계로 나의 의견을 말할 때는 단정적으로 하지말고 질문 형식으로 하라고 한다. 기도도 하나님과의 협상이라고 볼때, 내가 그분 안에, 그분이 내 안에 들어와야 가능하다. 협상을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당장 스파링 대상으로 마누라와 마주 앉아 협상을 시작해 보자. 부부 사이에 무슨 문제점이 있는지, 어떻게 해야 타결할 수 있는지 고민해 보자. 가장 가까운 마누라와도 협상 타결을 못하는 위인이 무슨 사업을 구하고, 교회를 구하고, 나라를 구하겠다고.. ㅉㅉ  반성하자.. 새해에는 원하는 것을 좀더 열심히 구하고 찾아보고 두드려보자 !!

 

  응답하라  2016 (01-01-2016)

 성탄절 연휴 때 지인으로 부터 안부 전화가 왔다. 수다 중에 요즘 인기프로인 <응답하라 1988>를 꼭 보라는 강권에 못이겨 첫회를 맛만 보기로 했다. 하지만 연휴에 별 특별한 계획도 없던터라 앉은 자리에서 만이틀 동안 16회 분량을 모두 보고 말았다. 한번 필이 꼽히면 책이든, 드라마든, 끝장을 보고야마는 못된 습성 때문이다. 무엇이 우리 부부를 연휴의 그 소중한 시간 동안 TV앞에서 모두 탕진(?)하게 만들었을까?

산다는게 별게 아닌데 집집마다 오십보 백보인데,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왜 그리도 힘들게 살았는지, 왜 그리도 아둥바둥 앞만 보고 살았는지 모를 일이다. 1988년이면 서울 올림픽이 있었던 시절이다. 그렇게 먼 과거도 아닌 것 같은데 벌써 27년이 흘렀다. 그러고 보니 그 드라마의 둘째달인 여고생 덕순이가 45세 아줌마가 되었고, 우리집 큰 딸이 그 당시 여섯살에서 지금은 삼십대 애 엄마가 되었으니 세월이 눈깜짝할 새 금방이다. 드라마 작가가 엄청 디테일한 탓도 있지만, 이미 까마득히 잊고만 살았던 추억들이 되살아나면서 그 시절 감사해야 할 일들도 많았고 고마운 친구나 이웃도 많았음을 다시 한번 생각케 한다. 그 드라마에도 다섯 가정이 가족처럼 의지하며 사는 모습에 시청자 모두가 위로받으며 그리워 했을 것이다. 맞어. 그땐 그랬지. 이웃 서로가 내 일 처럼, 내 자식들 처럼, 같이 나눠 먹고, 같이 축하해 주고, 같이 슬퍼하며 위로해줬지. 그런데 지금은? 지금도 그럴 것이다. 변했다면 내가 변했을 뿐이다.  

그러면 그때와 지금 내가 사는것이 얼마나 변했을까? 별로 달라진게 없다. 물론 그때는 삼십대 중반의 회사원 시절이었으니 새벽에 집을 나가서 늦은 밤에 퇴근하던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시절이었다. 남들보다 한걸음 앞서기 위해, 남들도 바쁘게 사니까 나도 그렇게 살아야 되는 줄 알았다. 왜? 라고 스스로에게 묻지도 않았다. 지금 처럼 매일 매일이 하루하루가 늘상 똑같았다. 삶이란 언제나 나에게 퐁요롭지 못했으니 나의 여유로움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나의 절박함이기 때문이다. 그때와 지금이 달라진 것은 세월이 흘렀다는 것일 뿐, 그래서 내가 늙었다는 것일 뿐, 산다는 것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새해가 되었다고 해가 바뀌었다고 사는게 얼마나 나아질까? 새해에 희망을 가진다고 무엇이 엄청나게 변하고 무엇이 새로워질까? 죽기 전에 삶의 목표를 달성했다는 말이 가당키나 할까? 삶의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삶의 목표나 목적을 자본주위적 논리에 맞추면 끝이 없다. 돈과 물질은 인간의 욕망이라는 기관차의 화력이기 때문에 내가 뛰어 내리지 않는한, 그 기관차는 스스로 멈추지 않는다. 삶은 끝이 없는 길을 걷는 것이다. 산길이든, 들길이든, 가시밭 길이든,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걷는 것 뿐이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나의 길을 걷는 동안 누구와 걸을 것인지, 무엇을 볼 것이지, 무엇을 깨달을 것인지, 무엇을 행할 것이지, 나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지역의 한인 사회는 <정지된 사회>다. 새해 한해도 살기가 무척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미국 경제는 향후 점점 좋아진다. 미국이 석유를 수출할 수 있는 법안을 2015년 통과한 것은 트루먼 대통령 이후 처음 있는 일로 엄청난 의미를 갖는다. 미국의 에너지 혁명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세일 오일과 세일 가스는 세계 정세를 뒤바꿀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생산 원가가 높아서 투자대비 고수익을 창출하지는 못하지만 멀지 않은 세월에 미국은 다시 한번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 위상을 되찾을 것이다. 지금 당장 투자 우선지역은 텍사스, 다코다, 캘리포니아다. 그 다음이 펜실베니아, 동부 북부 지역이다. 그래서 요즘 너도 나도 텍사스, 텍사스 하는 것이다. 사정이 급한 사람은 지금 당장 텍사스로 이사가면 된다. 세일 오일 혁명에 관해서는 별도의 칼럼으로 다룰 것이다.

어쨌거나 세월은 흘러서 오늘이 되었듯이 또 내일이 흘러서 언젠가 2016년을 되돌아 볼것이다. <응답하라, 2016년>. 10년이 지난 훗날도 오늘을 되돌아 보면, ‘그때가 좋았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도 행복의 기준은 내 아내와 내 자식, 그리고 내 친구, 내 이웃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항상 결론은 같다.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잘 해라. 오늘을 열심히 살아라.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라. 서로 사랑해라. 감사해라. 이것이 인간사에서의 불변이고 진리다.

그래도 사는게 힘들면 고정희 시인의 상한 영혼을 흥얼거리며 가자. “(중략) 이 세상 어디에서나 개울은 흐르고 /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가랴 / 가기로 목숨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후략)” 그래도 우리 모두 새해에는 또 다시 새로운 희망을 갖고 살아가자..